소설리스트

4권 - 1화 (50/87)

1장. 네 입술로 듣고 싶어

순간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그에게 되물을 뻔했다. 하지만 끝내 되묻지 않은 까닭은…… 나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남자가 나를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지. 잘 알고 있지 않나.

그 스스로도 밝혔다.

원한다면 오빠가 되어주겠노라고.

분명 그건 ‘유예기간’을 주는 말이었다.

<언제든 기다릴 수 있어. 네 곁에서.>

정원에서의 대화가 머리를 꽉 메우고, 빠져나가지 않았다. 무슨 말이든 해야 했지만 입만 달싹일 뿐이었다.

말이 나오질 않는다. 나를 보는 붉은 눈에 사로잡힌 듯 꼼짝할 수 없었다. 그의 눈은 붉으면서도 때때로 빛에 따라서 밝기가 달리 보였다. 가장 밝은 빛 아래에서는 최상급 홍옥처럼 맑은 빛을 드러냈으나, 그림자 아래에서는 이렇게……

선명한 핏빛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만큼 오늘 체이서의 눈은 검붉고 또 붉었다.

“이아나.”

내 시선에 응하듯 그가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역광 아래 잠긴 눈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판이한 눈을 하고 있었다.

내가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한 이유이기도 했다.

‘이상해.’

간신히 태연함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지금 보이는 체이서는 분명 지금까지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나는 흘끗 그의 상의를 응시했다.

그답지 않게 단추 하나가 풀려 있다. 겨우 하나라고 하나, 그를 아는 이라면 깜짝 놀랄 몰골이었다. 그는 누구든 유혹할 것 같은 낯과 다르게 빈틈 하나도 허락지 않는 남자였으니까.

“대답이 없으면 섭섭하잖아.”

살짝 가라앉은 눈, 눈 밑에 진 피로한 검은 그림자.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평소의 금욕적인 모습을 지워내며 오히려 향락적이고 퇴폐적인 느낌을 자아냈다.

그의 뒤로 보이는 것이 한낮이 아니라 깜깜한 밤이었다면, 지금 그의 모습을 밤 뒷골목 어딘가에서 보았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였을 만큼.

“내 이아나, 모를 거라 생각했을까?”

“……뭐를?”

생각지 못한 질문에 침묵하던 내 입술이 열리고 답변이 흘러나갔다.

체이서가 내 머리끝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와 동시에 한 걸음을 옮겼다. 나는 주춤 물러나다 말고 발목이 묵직하지 않음을 느꼈다. 발이 가볍다.

‘이곳은 도뮬릿이 아니야.’

새삼 깨달았다. 그동안 발목이 얼마나 무거웠던 건지.

변화를 깨닫고 잠시 멈칫하는 사이, 성큼 다가온 체이서가 내 손끝을 잡았다. 그는 그대로 날 잡아당겨서 지금도 검은빛이 흘러나오는 문신에 지그시 입술을 묻었다.

리케도르안과 겹치는 모습이었으나 전혀 다른 느낌을 자아냈다.

“‘내, 모든 것을 주고 싶은데.’”

그는 입술을 옅게 비비고는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나로는 부족해요?’”

존댓말? 아니, 잠깐만. 몸이 그대로 굳었다.

……저건 리케도르안이 한 말이잖아.

체이서가 그대로 눈을 휘었다.

“‘내가 망가질 정도로, 너를 원해. 이아나?’”

등 뒤로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걱정 마, 내 동생.”

체이서는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손목에 입술을 묻었다가 떼었다.

“들은 건 이것뿐이야.”

과연, 저 말이 사실일까?

“아무리 나라도 헤르님 한복판에 있는 소리를 듣기는 어려워서.”

그의 엄지가 문신을 진득하게 문지르고 떨어진다. 이 검은 장미를 통해 들었다는 걸 피력하듯이. 그는 내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거짓을 말하지 않는 게, 모든 진실을 말하는 것과 같은 말은 아님을. 거짓을 말하지 않는 대신 진실은 능히 숨길 수 있는 남자였다.

“그래서 무어라 대답했어?”

“……들었을 거잖아.”

내 담담한 음성에 체이서는 답하지 않았다. 아니,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잠시간의 침묵 끝에 조용히 읊조렸다.

“듣고 싶어.”

입술을 손목에 파묻어 조금 뭉개진 발음이었다.

“네 입술로 듣고 싶어, 이아나. 들려줘.”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지금 보이는 웃음이 다정하지만은 않은 까닭을.

“응?”

그의 눈에는 미미한 분노가 함께 어려 있었다. 아니다.

과연 이게 미미한 분노일까?

납치당한 나를 데려와 불바다로 만들 때도 보지 못한 얼굴이었다.

수많은 감정이 사슬처럼 엮인 표정, 그중 도드라진 것이 평소의 다정함과 이와 마구 뒤엉킨 분노. 체이서가 입술을 열었다.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할짝.

솜털이 곤두서고 허벅지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읏…….”

그의 입술이 가볍게 손목을 문지르는 것으로 모자라 손목을 가볍게 핥고 떨어졌다. 짐승이 하듯이. 아울러 맹금과도 같은 날카로운 광기가 담긴 시선이 나를 향했다.

이 순간과 어우러지지 않게 비단처럼 부드러운 웃음과 함께.

“들려줘, 어서. 응?”

늘상 있던 온화함만 깃든 미소는 아니었다.

“나는…….”

“응, 내 이아나는.”

내 입술이 달싹이다가 이내 단호하게 떨어질 때였다.

“더는…….”

“이런.”

체이서가 갑작스럽게 눈을 가늘게 좁혔다. 동시에 가볍게 중얼거렸다.

쿵쾅쿵쾅.

그의 나붓한 목소리와 동시에 모든 걸 부술 듯한 거대한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 같기도 문을 부수는 것 같기도 한 소리는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체이서의 눈이 옆을 곁눈질하는 것 같았다. 그의 고개가 향한 곳은 등 뒤에 위치한 문이었다.

체이서는 그대로 돌아와 고개를 숙이며 살짝 웃었다.

“아쉽네.”

듣기 좋은 울림을 하고 있었지만 많은 것이 담긴 음성이었다.

그가 눈을 들어 올렸다.

“이아나, 난 네게 기회를 줬어.”

그가 허리를 더욱 숙이고, 거리가 훌쩍 가까워진다. 흘끗 나를 잡은 손을 바라본 체이서가 말을 이었다.

“네가 바란다면 곁에서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 있다고.”

“…….”

오빠이길 원하냐고 묻던 질문이 머리를 스쳤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참 아쉽다.”

그가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린다.

“아직, 여기까지 능력이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

발밑에서 검은빛이 일렁거리며 올라오고 있었다. 이는 쉬르멜라에서의 이동을 떠올리게 했다.

하나 조금 달랐다.

“다음엔 네 선택을 들으러 올게.”

그가 내 손목을 살짝 잡은 채로 작게 속삭였다. 입술이 거의 닿을 것처럼 가까워 숨소리마저 그대로 느껴졌다.

“내 이아나. 이 유람은, 길지 않을 거야.”

나는 그의 몸을 밀어냈다. 그는 순순히 밀려났다. 아무것도 강제하지 않겠다는 듯이.

그가 손목을 놓았지만 여전히 잡힌 것 같은 느낌이 남아 있었다. 이 느낌을 지우려 애쓰며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가지 않아.”

내 말에 체이서가 잠시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는 반사적으로 웃었다.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그러나 그의 눈꼬리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체이서의 발밑이 점차 희미해지고 있었다. 내게 뻗은 손끝도. 더는 웃음을 머금지 않은 눈이 나를 직시했다. 아니. 집착적이다 싶을 만치 떨어질 줄 몰랐다.

“데리러 올게.”

그와 함께 쾅! 문이 열렸다.

“이아나!”

그곳엔 머리가 잔뜩 흐트러진 리케도르안이 서 있었다.

간발의 차였다. 체이서가 사라지기가 무섭게 문이 열렸으니까.

이미 체이서는 온데간데없었다. 찰나 간의 차이로 체이서의 모습이 깨끗하게 사라지고 나타난 것이다. 그럼에도 리케도르안이 모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체이서가 남긴 검은 빛의 잔상이 찢어진 종이처럼 내 주변에 머무르고 있었으니.

이는 마치 흩날리는 흑장미 꽃잎 같기도 했다.

‘이래서야 광고하는 꼴이네.’

나는 상황도 잊고 헛웃음을 머금었다.

흑장미, 그 남자는 자신이 가진 장미와 너무나도 비슷한 남자였다.

실제로 도뮬릿에 한가득 피어 있던 흑장미는, 참 탐스럽고 아름다웠다. 아름답지만 쉬이 건드리지 못하는, 건드리면 다칠 것 같은.

검은빛 잔상 사이로 리케도르안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파직, 파지지직.

그가 걸어올수록 그의 몸에 묘하게 일렁이는 붉은 빛과 검은빛이 부딪쳐 번개 같은 작은 스파크가 튀었다. 몇몇은 리케도르안에게 튀어 그의 옷 끝을 검게 태우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아니, 타들어가는 옷을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이윽고 내 앞에서 멈춰서 내 어깨를 잡았다.

추궁하려나?

하나 예상과는 달리 그는 다친 곳은 없나 보기라도 하듯이 연신 내 몸을 훑느라 바빴다.

이를 증명하듯 푸른 눈동자가 바삐 움직였다.

특히나 검은 장미 문신이 미처 사라지지 못한 손목을 보았을 때, 시선이 집요하도록 오래 머물렀다.

나는 그가 하는 것을 물끄러미 보며 그대로 시선을 내주었다. 마침내 확인을 끝내고 고개를 들 때까지. 눈이 마주치자 붉은 입술이 우물거린다.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다.

“다친 곳은 없어요?”

분명 내 주변에 머문 검은 빛의 뜻을 모르지 않을 텐데 이렇게 묻다니, 나는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작은 미소를 터트렸다.

“응, 괜찮아요.”

그 남자는 결코 날 다치게 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이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나였다.

체이서와 나의 관계는 너무나도 모순적이었다.

그 남자는 족쇄를 채우고 나를 가둬버린 미친 인간이었지만 동시에 내 목숨을 수없이 구한 인간이기도 했다.

목숨을 빚졌으나 혈육도 남도 될 수 없는 관계. 나는 지난 4년간 그리고 지금에서도 나와 그 남자의 관계를 정의하지 못했다.

“……그 남자가 나타난 거죠.”

리케도르안이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의 손이 내 어깨에서 떨어진다. 내리깐 눈꺼풀이 바람에 흔들리는 민들레처럼 진동했다.

그러나 아주 조금만 떨어졌을 뿐 리케도르안의 손은 허공에 살짝 떨어진 그대로 날 다시 잡지도 못한 채 머뭇거렸다.

“갈 건가요?”

‘날 버리고?’ 그의 말 앞에는 이런 말이 생략된 것 같았다.

나는 웃음을 품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러고는 어깨 위에 있는 그의 손을 잡고 토닥였다.

“안 간다고 했어.”

여전히 체이서와 나의 관계를 정의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차차 깨닫고 있었다.

<그렇게 행동해봐야, 그 남자와 다를 것이 없으니까.>

체이서가 내게 채웠던 족쇄가, 해왔던 행동이…….

내가 익숙해졌던 모든 것이 사실은.

생각하던 것보다 더, 이상하고 미친 일이었단 걸.

“정……말인가요?”

“응.”

그의 얼굴에 눈에 띄게 안심이 어렸다. 그것이 부끄러웠는지, 이내 고개를 살짝 돌렸다. 귀 끝이 조금 붉었다. 이런 게 부끄러운가? 엉뚱한 것에 수줍어하는 모습이 퍽 귀여웠다.

‘아. 안 간다고 말했으니까.’

문득 든 생각에 나는 리케도르안의 손을 놓고 그대로 바닥으로 몸을 숙였다. 그러고는 체이서가 가기 전부터 연신 애옹애옹! 정원이 떠나가라 울고 있던 푸딩이를 안아 들었다.

-이, 인간! 무서웠다, 무서웠다, 냥! 무서웠다!

‘그래그래.’

좀처럼 약한 소리를 잘하지 않는 푸딩이 내 몸으로 마구 파고들었다. 달달 떠는 고양이를 최대한 조심스럽게 토닥이고 쓰다듬어주었다.

4년 전 처음 푸딩을 발견하고, 내가 갖기로 한 뒤로 체이서는 푸딩에게 적대 어린 행동을 취하지 않았지만, 푸딩은 짐승답게 체이서의 이면을 한눈에 간파하곤 했다. 아울러 평소 체이서를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 인간. 흐, 흑장미는 나를 죽이려 했다, 냥.

‘내가 그렇게 두지 않았어.’

머릿속에서 푸딩이 구슬프게 울었다. 안아주고 있었지만 떨림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울음소리 사이로 미약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그렇게 되더라도…… 이 몸은 인간 너를 지켰을 거다, 냥.

푸딩이를 쓰다듬던 손이 잠시 멈칫했다. 그러다가…… 이내 푸딩이를 힘주어 꽉 안았다. 평소 푸딩이가 하듯이 이마를 푸딩의 이마에 가져다 대고는 숨을 내쉬었다.

‘고마워.’

그렇게 눈을 뜨자, 단단하게 서 있는 허리가 보였다. 아마도 리케도르안은 내가 푸딩이를 진정시킬 때까지 기다려준 것 같았다.

그가 눈을 깜빡였다. 내게 향한 한 쌍의 눈동자가 어찌나 온순한지, 쳐다보고 있노라면 저 눈이 단 며칠 전까지만 해도 차가웠단 것을 잊어버릴 것 같았다.

감정이란 이렇게도 사람을 다채롭게 바꿔놓는 걸까. 문득 궁금해졌다.

열렬하게 쳐다보는 리케도르안의 눈은 우습게도 지금 안고 있는 푸딩이와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그래서 한숨과 함께 결심했다.

‘그래, 한 번은 물어봐야겠지.’

나는 애옹애옹, 애교스럽게 우는 푸딩을 들어 올렸다.

영화 ‘라이온킹’에 나오는 한 장면처럼 푸딩이를 들이댄 내 모습과 당황한 리케도르안은 언젠가 쉬르멜라에서 보였던 것과 비슷한 구도였다.

“……뭘 하는 건가요?”

리케도르안도 이를 떠올린 것인지 표정이 묘해졌다.

“대공님, 이제 이쪽이 어떤 존재인지는 알고 있죠?”

“대공이라니. 갑자기 호칭이 바뀐 까닭을 알 수 없는데요.”

“으음, 별로였어요? 그럼 리케도르안.”

그러자 리케도르안의 미간이 펴졌다. 본인이 단순하다는 자각은 할까? 리케도르안의 눈이 푸딩을 향했다.

“아무튼 알고 있죠?”

그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붉은 장미의 수호신.”

“네, 맞아요.”

역시나 모를 리 없었다. 그나저나 영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 어투다. 본인이 붉은 장미이면서 말이다.

“이 애 데려갈래요?”

양쪽에서 반응이 터졌다.

-싫다, 냥!!

“……데려가라고?”

푸딩이 마구 몸부림쳤다.

아차 싶은 순간에 한 손에 힘이 빠지고, 그 틈을 틈타 내 가슴으로 돌아간 푸딩이 마구 발버둥 치며 내 품에 발톱을 박고는 파고들었다.

‘아니, 그래도 한 번은 얘기해봐야 할 것 아니야.’

-너무한다, 인간. 배신이다, 배신이다, 냥!

‘그, 아니다. 알았어. 네가 싫다면.’

그저 한 번쯤은 묻거나 짚고 넘어가려던 것이었지만 아기 수호신님이 이렇게 놀라서야.

‘진짜 물어만 본 거라니까?’

-배신자다! 배신자다, 냥!

이래서는 리케도르안이 좋다고 해도 안 될 판이었다. 나는 흘끗 그의 눈치를 보았다.

“뭔지 몰라도 싫어하는 것 같은데요.”

“하하하…….”

대체 자기 장미한테 하악질하는 수호신이 어디 있겠냐 싶었지만, 생각보다 리케도르안은 태연했다.

“나도 싫어요.”

오히려 아무렇지 않은 낯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왜?”

각성에 수호신이 반드시 필요하다 했지만, 리케도르안은 다른 대가로 부작용을 겪고 완벽한 장미가 되었다.

푸딩도 말했듯 더는 자신이 필요 없다고 했지만 그래도 매번 얼굴을 보는데 아주 이야기하지 않는 것도 이상해서 꺼낸 것인데.

“됐어요. 주지 말아요.”

리케도르안이 허리를 숙여 나와 눈을 마주쳤다.

“내겐 더는 필요 없어요.”

짐짓 다정한 행동이었지만 흘러나오는 말은 단호하고 단정 짓는 목소리였다. 수줍음마저 가신 음성에서 그의 뚜렷한 의지가 보이는 듯했다. 내가 푸딩이라면 섭섭할 것 같은데, 정작 푸딩은 그러기는커녕 그거 보라는 듯 의기양양하게 나를 째려봤다.

-거, 봐, 봐라, 인간! 붉은 장미도 내가 싫다고 하지 않냐, 냥!

‘아니……. 너 슬퍼해야 하는 것 아니야?’

-나도 쟤 필요 없다, 냥!

푸딩이가 마구 몸을 치대듯 비벼왔다.

-인간, 너만 있으면 된다, 냥. 버리지 마라.

나는 리케도르안과 푸딩이를 번갈아 보다가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서로 싫다고 단언하는 인간과 수호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아니. 이렇게 닮아 있으면서 싫긴 뭐가 싫대. 동족 혐오도 아니고? 어쨌거나 양쪽이 싫다고 하는데 굳이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앞으로 여기서 지낼 처지에 정말 한 번은 묻고 싶었던 거니까.

“그래요, 싫다면야 어쩔 수 없긴 한데.”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도 이건 물어야겠다.

“왜 거절한 거예요?”

푸딩이야 나와 오래 지내서라고 쳐도. 그는 수호신이 있는 쪽이 좋은 게 아닌가. 리케도르안은 잠시 복잡한 표정을 했다.

“……붉은 장미의 수호신은 몸의 일부나 다름없다고 해요.”

아. 그건 알지.

“그러니까 가지고 있어요.”

“어. ……어?”

“아니, 가지고 있어 주세요.”

리케도르안의 손이 푸딩의 등을 만졌다가 떼어냈다. 의외로 푸딩은 질색하지 않았다. 갑자기 왜 만지냐는 시선으로 한 번 쳐다봤을 뿐.

“내 일부라면서요.”

리케도르안이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조금 냉한 기운이 도는 얼굴 아래 그의 입술이 우물우물 움직였다.

“내 일부니까, 가져요.”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 같기도 했다.

“……그럼 언제나 함께인 거잖아요.”

그리 말하고는 뺨을 붉혔다. 스스로도 어찌하지 못하는 현상인 듯 그가 얼른 제 뺨을 가렸다.

이미 다 봤는데.

“할 수만 있다면. ……영원히 가져줬으면 좋겠어요.”

그는 손등으로 얼굴을 가려, 눈 밑이 살짝 붉은 모습을 보이면서도 제 할 말은 했다. 집요하게 나를 응시하면서.

“……으음, 내가 오래 산다면 그러겠지만.”

좀 당황스러운 마음에 이렇게 중얼거렸더니, 리케도르안이 돌연 놀란 낯을 했다.

“이아나, 아파요?”

그는 손등에서 얼른 손을 내리고 다가와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 실수로 오해의 여지를 남겼는데 그건 아니에요.”

얼른 해명했다.

“이 아이가 처음부터 내 수호신은 아니니까. 나와 수명이 다를 수는 있다고 하던데요.”

이건 조그만 흑마법사님이 해준 이야기였다. 체이서의 최측근답게 그는 장미에 대해서도 해박했던 그는 이따금 장미에 관한 유용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당시엔 괜한 관심을 받지 않으려 많은 것을 묻지는 못했으나 몇 가지 들은 사실을 종합하면 이러했다.

마쉬멜은 내가 푸딩과 계약한 사실은 몰랐으나 붉은 장미 수호신과 계약은 불가할 것이라 했고. 설사 계약하더라도 수명이 다를 확률이 높다고 했다.

이는 힘의 차이로 인해 어쩔 수 없다고.

머뭇거리던 리케도르안이 나를 조심스럽게 품에 안았다.

“하아…….”

머리 위에서 날숨이 터져 나왔다. 이성이 있는 쪽치고는 대범한 행동이었으나 움찔거리는 몸을 보아서는 인격이 변하거나 유혹을 위한 행동은 아닌 것 같았다.

“놀랐어요. 당신이 아픈 걸까 봐…….”

“난 건강해요.”

리케도르안이 숨을 몰아쉬었다. 많이 놀란 모양이었다.

“건강 빼면 시체인걸. 그리고 오래 살고 싶어요.”

나는 망설이다가 팔을 들어 그의 등을 어색하게 토닥여주었다. 내 실수로 오해하게 한 거니 자업자득이다.

“조금 전에 이야기한 거요.”

리케도르안은 이런 내 어깨에 머리를 댄 체 작게 속삭였다.

“그건 괜찮을지도 몰라요. 수명이요.”

“왜?”

그에게서 금방 답이 흘러나왔다.

“당신은 푸른 장미니까.”

나는 놀라는 대신 아 그랬지. 하고 받아들였다. 나도 장미니까, 괜찮은 거구나. 어느새 난 내가 장미란 사실을 천연덕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알려주는 데다 나름의 능력이 쏙쏙 드러나니 외면할 수가 있으랴. 다만 이런 생각은 든다.

‘거창한 능력은 아니네.’

체이서의 능력이 통하지 않는다거나, 다른 장미의 수호신과 계약이 가능하다거나. 생각보다 좀 자잘한 능력이지 않은가? 제이르는 내가 다른 장미에 걸린 저주를 무효화할 수 있다고 했지. 이 외에도 다른 능력도 있다고 했는데, 또 뭘 할 수 있는 걸까?

그리고.

‘푸른 장미에게도 수호신이 있을까?’

자연스럽게 수호신의 존재에 당도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곧 지워졌다. 리케도르안이 내 어깨에 얼굴을 살짝 비볐기 때문이었다. 그러고는 얼굴을 꾹 묻어 조금 뭉개진 발음으로 속삭였다.

“정말, 갈 거. 아니죠?”

“그럼요.”

말한 건 반드시 지킨다……라기엔 양심에 찔리긴 한데.

“이젠 말한 걸 지킨단 장담은 못 하겠지만.”

잘못한 게 있으니. 잠깐 손을 멈칫했다가 다시 그의 등을 두드렸다.

“정말이에요.”

성인 남자가 이렇게 우는 소리를 하며 끙끙대면 징그러울 법도 한데, 그런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커다란 짐승이 나 하나만 보고서 온몸을 다해 의지하는 느낌이 들었다.

‘여기에 귀랑 꼬리만 있으면 완벽할 것 같은데.’

바람에 흔들리는 머리카락에서 기분 좋은 향기가 느껴진다.

축축한 지하 감방에서도 홀로 향기가 나더니 감방을 나온 지금에도 그에게선 그때의 향기가 났다. 오히려 이 청량하고 기분 좋아지는 향기가 더 진해진 데다가 성숙해지고 깊어진 것 같다.

가마마저 그답게 단정한 모습을 보다 살짝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그가 이렇게 계속 머뭇거리고, 고개를 떼어내지 못하고. 속으로 염려하는 바를 모르지 않았다. 그의 손이 붙잡고 꼼지락거리는 부위는 내 손목이었으니까. 검은 장미가 있던 자리를 정확하게 잡고 문지르고 있었다.

“신경 쓰여요?”

움찔.

고개를 들면 그는 잘못을 들킨 사람처럼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면서도 내 시선을 피하거나 나를 놓지는 않았다.

참 올곧다니까, 이 남자도.

나는 그에게서 천천히 떨어져 손목을 내밀었다.

“이미 봤겠지만 여기, 검은 장미 문신이 있거든요?”

난 그가 보았단 걸 뻔히 알면서도 말로 꺼내어 표현했다.

“……알아요.”

그가 내 손목을 차마 쥐지 못하고 바로 앞에서 주먹을 쥐었다. 난 주먹이 살짝 떨리는 것을 목도했다.

“아는데, 싫어요. 아니. 슬퍼요.”

그가 찬 목소리로 읊조렸다.

“이아나, 당신이 미운 게 아니라 난 이 장미가 밉고.”

“응. 알아.”

그가 못내 우울해하는 것 같아서 환기하듯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럼 당신이 이 장미 숨겨줄래요?”

“……네?”

“아니면 지워줘도 좋고.”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체이서에게 가진 모순적인 감정을 둘째 치더라도 이 문신은 내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그러나 만약 이 문신이 리케도르안이 하는 말을 체이서에게 모두 전하는 거라면 우리 모두에게 좋지 않았다. 내가 하는 말이야 전해지든 말든 상관없지만……. 나로 인해 이곳에 위험한 일이 일어나는 건 바라지 않았다.

“이거, 이따금 내 오빠에게로 소리를 전달하는 것 같거든요.”

이미 위치야 발각된 것 같고.

“계속 둬서는 안 될 것 같아요.”

사실 지우는 방법은 없을 것 같지만, 리케도르안은 숨기는 정도의 방법은 알 것 같았다. 아니면 기능을 못 하게 하거나.

“뭐든 조치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나는 말끝을 늘어트리며 고개를 들었다.

“혹시 방법이 있나요?”

“있어요.”

리케도르안이 빠르게 대답했다. 제가 너무 빨리 대답한 것을 깨달았는지 멈칫했다.

“뭔데요?”

동시에 그의 얼굴에 열꽃이 피어났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수줍음이었다.

왜 그러는 거지?

“그…….”

“그?”

그는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했다. 이어서 붉디붉은 열꽃이 펑펑, 터질 것같이 그의 귀와 눈 밑을 점령했다. 그가 손등으로 입을 가리고 고개를 숙였다. 언뜻 흰 깃 사이로 보이는 목까지 붉어지고 말았다. 흡사 4년 전 지하 감방에서의 모습과 동일했다.

왜 이러는 거지?

재회하고서는 거의 보지 못했던 완전히 붉어진 모습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내, 내 장미를 네게 새기는 거요.”

그 말에 나는 잠깐 할 말을 잇지 못했다.

이게 그렇게 붉어지면서 할 말인가?

그러나 이어진 리케도르안의 말에 나는 숨을 멈췄다.

“문, 문신을 새기는 방법이…….”

“방법이요?”

“조금……. 그래서.”

“뭐가 그런대요?”

“야, 야하니까!”

……뭐해? 야해? 청초한 남자의 입에서 나온 부정확한 야릇한 말이 상상력에 불을 지폈다.

진정하자. 착한 생각. 착한 생각.

‘……사실 나 붉은 장미 문신도 있는데.’

가만히 듣고 있던 푸딩도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인간, 이미 문신이 있지 않냐, 냥?

‘그건 그런데…….’

……차마 위치가 위치라 말을 못 하겠다.

-말 안 하냐, 냥?

‘응, 안 할래.’

결심은 빨랐다.

‘보여주려면……. 아니, 좀 변태 같잖아.’

그도 그럴 것이 이 3살 수호신님과 계약하며 생긴 붉은 장미 문신은…… 무려, 허벅지 안쪽에 있었다. 아무리 입술을 부대끼고 할 것 좀 했다고 해도 쉬이 보여주고 싶은 곳은 아니었다.

“새, 새겨도 괜찮다면…….”

어쩌지. 저쪽은 기대하고 있는 것 같은데.

지나치게 반짝거리고, 해사한 낯을 보고 있으려니 어째 일단은 말을 돌려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어떻게 돌리지? 그렇게 생각하며 막 난간 쪽을 응시했을 때였다.

쿠웅!

거대한 소리가 들렸다. 나와 리케도르안의 시선이 약속이라도 한 듯 마주쳤다. 거대한 땅 울림이 들렸다.

땅 울림뿐만 아니었다.

뿌우우우-.

마치 근처에 출정식이 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은 거대한 뿔고동 소리, 함성을 가장한 웅장한 소리도 함께였다. 너무나 큰 소리였다.

‘뭐지?’

다만 다른 것은 놀란 나와 다르게 리케도르안은 태연했단 점이다. 나는 몸을 완전히 돌려 난간을 향해 다가갔고, 곧이어 소리의 원인을 곧 알 수 있었다.

멀리 보이는 성벽으로 거대한 마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아니, 마차라기엔 충격적인 비주얼이었다. 저런 걸 보통…… 마차라고 그러나?

여태까지 내게 가장 충격을 준 마차는 체이서의 20마리 말이 이끄는 이른바, ‘그것이 알고 싶다 : 말 학대 마차편’이었다. 그런데 저건……. 그것과는 비교도 안될 크기였다.

‘말이 이끄는 것 같진 않은데.’

엄청나게 거대했으니까. 다른 의미로 충격적이었다. 크기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마차는 새하얀 색이었는데, 여기에 금박 무늬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마차 앞에 말이 매여 있긴 한데, 웬걸 장식으로 줄만 매어둔 것 같고 홀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저 거대한 크기를 고작 3마리 말로 끌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저게 대체…….”

뭐야? 마차 맞아? 그렇게 마차가 정문에 들어서자마자 멈췄다. 왁자지껄 모여 있던 시중인들이 일사불란하게 갈라진다. 마차 문이 열리고 마차 앞으로 요상한 것이 대동되었다.

-인간, 저게 뭐냐, 냥?

함께 지켜보던 푸딩마저도 이상했는지, 내게 물었다.

‘……가마…… 같은데.’

가마는 가마인데 마차 못지않게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달려들어서 몰고 있다. 거기다 가마를 짊어진 이들이 하나같이 새하얗고 멋진 투구를 쓴 것이, 흡사 기사의 차림새…… 같은데.

왜일까. 모두 상체를 탈의하고 있었다.

‘이건 또 무슨 좋은 광경이래…….’

몸은 좋은데, 상황이 묘하고 기괴했다.

마치 금욕을 상징하는 것 같은 고결한 백금 투구와 상의를 탈의한 기사들이라니. 나는 줄곧 이렇게 놀람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데, 리케도르안쪽이 내내 조용하단 점이 마음에 걸렸다.

흘끗 쳐다보면. 그는 난간 밑 상황엔 관심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저 아래를 바라보면서 재회한 날처럼 매우 차갑고, 조금은 불만 어린 눈이었다.

마치 이런 광경이 익숙한 사람처럼.

이윽고 가마 위로 누군가 올라섰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거대한 양산이 그 사람을 가렸기에 누군지 볼 순 없었다. 그러다 가마로 막 올라서며 형상이 드러나는 순간, 나는 눈을 크게 떴다.

‘프란시아?’

찰랑찰랑. 흔들리며 우아하게 굽이치는 머리카락 아래 곱디고운 얼굴은 분명, 프란시아였다. 크기가 너무나 달라져서 알아보지 못할 뻔했지만…… 내게 저 머리색을 못 알아 볼 리 없었다.

프란시아는 자연스럽게 가마에 올라섰다. 곧이어 가마 위로 거대한 양산이 펴지며 그녀의 얼굴이 사라졌다. 이제 소녀라고도 부를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제야 프란시아가 타고 온 마차, 거기에 그려진 이빨을 드러낸 짐승과 가시넝쿨이 휘감긴 십자가를 보았다.

저건, 신전의 상징이다.

내게 상식을 마구 때려 넣어준 조그만 흑마법사님 덕에 문장을 알아볼 수 있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신전.

황실과 대공가 및 공작가, 이 둘과 함께 제국의 권력을 나눠 가진 세력이다. 하나 이는 어디까지나 과거의 광영일 뿐 현시대에 들어서는 쇠락하고 패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세력이 예전만은 못하단 소리다.

그렇기에 감방에 있을 때, 귀족 죄수들도 신전에 대해서는 자주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만큼 중요하지 않은 세력이란 얘기도 되겠다. 물론 이빨 빠진 호랑이도 호랑이이듯 여전히 주축 세력인 대단위 치유 능력 부대와 신성력으로 싸우는 전투 성기사를 주축으로 무시 못 할 세력임은 맞다.

……까지가 마쉬멜의 의견이었는데.

그리고 원작에서 여주인공이 갑작스럽게 나 성녀예요! 외친 이후로 일명 주인공의 버프를 받아 눈부신 성장을 이루어, 마침내 무시 못 할 세력이 된다. 여기까지가 원작 내용인데.

문제는 원작 상 프란시아가 성녀가 되어 선언하는 시기는 한참 뒤였다. 내가 여주인공을 놓아준 만큼 원작에서 어긋나는 점이 있을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나는 복잡한 눈으로 가마를 보았다.

저런 건 처음 보고 듣는데요…….

반쯤 홀딱 벗은 성기사들이 들고 가는 가마라니, 그런 게 있었을 리 없다. 왜 확신하냐고? 이 소설이 빨간 책이었기에 있었다면 서술이 안 될 리가 없다! 피폐하거나 도색적이며 향락적인 부분은 과도한 묘사를 해서라도 표현하던 책이었다.

그래서 좋아했지. 이런저런 씬도 참 많고…… 큼큼. 아무튼.

……저 사람들 성직자 아닌가?

성직자와 살갗이라니 정말이지 어우러지지 않는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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