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며칠 뒤.
리케도르안이 말한 것처럼 많은 이들이 헤르님 저택에 당도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을 직접 본 건 아니고 수많은 마차들을 보았다.
“와, 또 하나 들어오네.”
지금처럼 난간에 기대어 아래를 바라보면서.
헤르님 대공가.
이름에서 알 수 있다시피 대공이란 권력, 그 이름답게 거주지는 성이라 부르고 싶을 만큼 컸다. 체이서의 경우 세력은 헤르님 못지않으나 그는 통제할 수 있는 저택을 선호한 반면, 리케도르안은 전통이 담긴듯한 이 성에 사는 듯했다.
‘이런 것만 봐도 참 반듯하단 말이지.’
헤르님, 붉은 장미가 상징하는 것은 정의, 도덕, 정열. 제국민 모두가 자랑스러워하는 가문이자 황실의 정의로운 수호자로 각인된 가문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겠지. 그 존경받는 가문의 가주가 감옥에 갇힌 제 아들을 학대했다는 것은.
“사람 일 참 모른다니까.”
현재 내가 있는 곳은 내 방이 아니었다.
이 장소를 설명하자면 며칠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저께인가. 리케도르안이 제이르를 대동하고 또 다른 사람과 함께 들어왔다.
<메를린입니다.>
정장을 걸치고 딱딱하게 웃는 40대 여인은 이곳의 시중인 총관리인이라고 한단다.
<믿어도 괜찮아요.>
리케도르안은 제이르를 포함해 이 사람까지는 믿어도 된다고 이야기해주었다.
<기억나요? 메리다. 메를린은 메리다의 딸이에요.>
기억했다. 어린 리케도르안에게 다정하고 친절했던 몇 안 되는 사람. 주변을 의심하는 건 굳이 리케도르안이나 체이서가 아니어도 우두머리에 선 자라면 당연한 일이었다.
두 사람이 조금 더 특수하긴 하지만.
<각하께서 공중 정원 산책까지는 허락하셨습니다.>
공중 정원. 이곳의 성은 구조가 살짝 특이했다. 4층 즈음에 작은 정원을 만들어놓았다. 아래를 보면 도시 정경과 성 앞이 고스란히 보이는 멋진 정원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허락이란 표현을 쓰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곳에 있으면 허공에 붕 뜬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가씨는 어디든 가셔도 됩니다.>
하늘을 날고 싶은 건 사람이 한 번쯤 해볼 법한 생각인데, 이곳에 있으면 그 꿈 같은 소망이 조금 이루어지는 느낌을 주었다.
“어디든지라.”
나는 피식 웃었다.
‘감방 같네.’
모순적이지만 그러했다. 캄브라캄, 그곳에서도 내가 가지 못할 곳은 없었으니까.
‘……르나그의 뒷배 덕에 말이지.’
현재 리케도르안은 잠시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아무래도 객이 연속해서 방문하고 있으니. 그 객이 가신이라 하여도 집주인으로서 얼굴을 비치지 않을 순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 것치고는 조금 전까지 여기 붙어 있다가 갔다. 그것도 잠시 인격이 바꿔서는 목에 진득한 입술을 남긴 채로.
‘그 모습은 봐도 봐도 적응이 안 되던데.’
나른한 짐승 같은 모습을 떠올리면 괜히 긴장된다. 반사적인 기분이었다.
‘시간이 좀 더 필요하려나.’
나는 고개를 들었다.
푸딩은 저 멀리서 나비를 마구 쫓다가, 혹은 꽃 향기를 킁킁 맡다가 잔디에 몸을 마구 비비고 있다. 영락없이 길괭이 같은 모습이다.
막 냥냥, 우는 3살 수호신님에게서 눈을 떼어내며 하늘로 향했다.
‘르나그는 괜찮을까.’
리케도르안의 말을 떠올렸다. 그 남자가 나를 찾고 있다니, 괜스레 미안해졌다.
‘항상 걱정만 끼치는 것 같네.’
푸른 하늘은 르나그의 어떤 색과도 관련이 없었지만 그가 가진 서늘함을 생각나게 했다. 인상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 내 약혼자를.
“끙. 어떻게, 르나그에게만 연락을 취할 방도가 없나.”
한 손에는 보이지 않지만 체이서의 검은 장미 문신, 다른 한 팔에는 제이르가 준 팔찌. 소식을 전달하고 싶은데 방법은 요원해 보였다. 이리 생각하던 중 다 놀고 온 것인지 푸딩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인간, 너는 내려가 보지 않냐, 냥?
“왜?”
-정원을 좋아했지 않냐, 냥.
나는 공중 정원을 흘끗 응시했다. 여기도 정원인데? 나는 대답하는 대신 사람이 와글와글한 밑을 한 번 눈에 담았다.
“사람 많은 건 별로라서.”
손을 무심하게 휙휙 휘저었다.
“사람이 많은 걸 보면, 삼삼오오 모여 있던 하녀들 사이에서 갑자기 누가 검을 뽑고 달려든 게 생각 나.”
푸딩이 눈을 깜빡였다.
-그게 무서웠냐, 냥?
“아니. 그건 아닌데.”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 후에 같이 있던 하녀들이 죄다 죽을 뻔한 게 무서웠지?”
그때 그 하녀들은 다행히 모습을 숨긴 암살자와 함께 있었던 이유만으로 죽지는 않았지만. 사라진 그녀들이 어디로 보내졌는지는 끝내 알 수 없었다.
체이서는 그런 남자였다. 나를 위해서, 라는 목적을 두면 무엇이든지 서슴지 않고 행했던 사람. 4년간 본 것은 그것뿐이었으니… 판단할 근거는 차고 넘치는 상황이었다.
나와 어느 정도 마음이 통하는 푸딩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폭신한 이마를 내 다리에 비볐다. 난 괜찮은데 말이지. 하지만 살며시 웃으며 허릴 숙여 푸딩을 들어 올리려 할 때였다.
파아앗.
-인간?
어라. 손끝에서 혼탁한 검은 연기가 흘러나왔다. 아니. 연기가 아니라 빛이다.
검은빛을 본 순간 내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몸에서 나온 검은 빛. 이것이 흘러나온 곳은 내 손목이었다.
피가 맺히듯 검은 장미 문신이 그려진다. 도드라진 흑장미는 만개할 것처럼 매혹적이었다. 곧 장미 문신에서 흘러나온 빛이 찬란한 날개 문양을 갖췄다. 아퀼라의 날개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꾸물꾸물 뭉친 빛 덩어리가 그대로 폭발해 팟! 눈부신 빛이 반짝였다. 나는 빛을 피하려다가 발을 헛디뎠다.
시야가 붕 흔들린다.
‘윽. 넘어진다.’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었다. 따뜻한 바람이었으나 만끽할 시간은 없었다.
넘어졌음에도 아프지 않았다. 누군가 내 허리를 붙잡고 넘어지지 않게 잡고 있었으니까.
눈을 뜨면 익숙한 낯이 앞에 있었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장인이 정성스레 빚은 것같이 아름답고도 황홀한 얼굴, 유혹할 듯 휘어진 눈매.
눈이 마주치자, 오묘한 눈매가 간드러지게 휘어졌다.
붉은 눈동자였다.
“안녕, 내 이아나.”
체이서가 빙긋 웃었다.
“잘 지냈어?”
떨어진 시간이 무색하게 너무나도 태연한 인사였다.
나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아니,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체이서가 이곳에 나타났다고? 대체 어떻게? 그보다…….
‘체이서 쪽에서 먼저 연락할 수 있는 거였어?’
혼란스러웠다.
그가 내게 먼저 연락할 수 있었다니. 그렇다면 왜, 어째서… 지금까지 연락을 하지 않았던 거지? 할 수 있던 거면서 일주일이 넘게 하지 않았다. 지극히 체이서답지 않았다.
내가 아는 이 남자는 결코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도뮬릿 저택에서 탄광으로 끌려가거나 불구가 된 이가 4할은 줄었으리라. 말을 찾지 못하고 당황한 사이, 체이서의 느릿한 시선은 나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천천히 관찰하듯 살피는 것 같기도 했다.
난 이런 시선을 알고 있다.
<다친 곳은 없어, 이아나?>
암살자가 나타났을 때, 독을 탄 것이 밝혀졌을 때……. 내게 가해진 위협을 깔끔하게 치워버린 그가, 치워버린 뒤에 이런 눈을 하곤 했다.
내게 이상이 없는지 꼼꼼하게 살피는 눈. 나는 주먹을 꾹 쥐었다가 폈다.
“……이거 놔줘.”
나는 여전히 체이서의 품에 갇혀 있었다. 넘어지지 않게 붙잡아준 것은 고마우나, 지나치게 가까웠다. 체이서는 내가 밀어내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유람이 길어. 내 동생.”
“…….”
그는 내 요청에 답하는 대신 엉뚱한 대꾸를 했다. 그 대답에 몸이 멈칫 굳었음은 물론이었다.
지금까지 의지와 상관없이 자꾸만 도뮬릿으로 가고 싶은 기분과 생각이 들었던 건, 이 순간을 예감해서였을까?
“네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몰라.”
거리가 가까운 탓에 그의 황홀한 음성이 그의 커다란 몸통을 타고 둥둥 울렸다. 몸이 바짝 긴장했다. 이 음성이 아주 가까이서 들어오는 탓도 있을 것이다.
“여기가 어디야?”
체이서는 대답하지 못하는 내게서 눈을 떼어내지 않았다.
“대답이 없네. 그럼 내가 맞춰볼까, 이아나?”
체이서의 낯이 가벼운 미소를 담았다. 그가 이곳을 모를 리 없었다. 다름 아닌 리케도르안의 성을 말이다.
“헤르님의 성이네.”
유혹하듯 아름다운 곡선을 그린 입술에서 정답이 흘러나왔다.
역시나. 가벼운 소름이 돋았다. 체이서의 눈이 ‘그렇지’ 하고 묻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티를 내는 대신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당황이 눈과 얼굴에 머무르지 않도록, 태연하게 보이게끔.
“그래서?”
다행히 목소리에서 떨림이 묻어나지는 않았다.
나는 그게 어쨌냐는 시선을 숨기지 않았다. 체이서는 타인의 거짓을 눈치채는 데 능했다.
그러니 그는 내가 진심으로 이리 생각하는 것을 알 것이다.
이게 뭐 잘못되었느냐고.
“……유람이 많이, 즐거웠나 봐. 이아나.”
체이서가 웃음을 잃지 않은 채 손을 들어올렸다. 허리를 잡지 않은 다른 손이 내 옆머리를 잡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자못 다정하고 온화한 손길이었다. 지금 이 부드러운 웃음처럼.
그러나 나는 한순간이지만 광기가 스친 붉은 눈을 놓치지 않았다.
그대로 체이서의 손을 붙잡아 멈췄다. 그러고는 그의 손을 떼어내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여긴 어떻게 온 거야?”
나는 내게로 돌아온 화살의 방향을 바꿨다.
체이서가 하는 질문에 줄줄이 답해서는 체이서가 원하는 방향으로밖에 갈 수 없다. 그의 옆에서 많은 이들을 보며 깨달은 것이었다.
“내가 가지 못할 곳은 없어, 이아나.”
그렇겠지. 세상 잘 나신 악당이었으니. 나는 작은 헛웃음을 머금었다.
“그런 걸 물은 게 아니란 걸 알잖아?”
“그럼 알지. 내 동생도 알 거고.”
뭐? 맥락에 맞지 않는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뭘 알아?”
“내가 네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걸 말이야.”
일주일 넘게 보지 않았건만 여전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낯이 나긋하게 미소했다.
“널 위해서라면 적진 가장 위험한 곳이라 해도 서슴없이 올 수 있다는 것도.”
적진, 그리고 위험한 곳. 체이서는 스스로 시인했다. 아무리 그라고 해도 이곳이 위험한 곳이란 것을.
내가 당황을 숨기지 못하는 순간에도 이 남자의 얼굴은 여유로웠다.
“내가 널 위해 오지 못할 게 무에 있겠어.”
체이서는 고개를 숙여 내 손바닥 깊이 얼굴을 묻었다. 마치 지금까지 쉬지 못했던 숨을 쉬기라도 하듯이.
더욱 가까워지고서야 알았다.
“이제 그만 돌아와, 내 이아나.”
그의 눈 밑이 마지막으로 본 것보다 새까맸다. 잠을 자지 못한 사람의 몰골같이. 체이서는 눈을 감고, 숨을 들이켰다.
“……네가 있어야, 잠이 와.”
날 붙잡은 손이 쇠사슬처럼 단단했다. 내게 얼굴을 묻은 그에게서 나온 것은 그라고 믿지 못할 만큼 작은 음성이었다. 그는 그대로 손바닥에 코를 비볐다. 애교를 부리는 거대한 짐승같이.
“돌아와서, 나 재워줘.”
내 이아나, 달콤한 음성이 귀를 가득 채웠다. 약하게 들려서 잘못 들었나 싶을 정도로 여리게 흘러나왔다.
“응?”
한순간 정신을 놓았다면 내가 이 남자와 정말 이리 달큼한 사이였다 믿을 정도로 녹진한 목소리였다.
“……왜 항상 내게 능력이 통하지 않을 걸 알면서, 쓰는 거야?”
나와 그의 시선이 교차했다.
“언젠가 통할까 봐.”
“통하면?”
아래에서는 시중인들이 짐을 옮기는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4층에 올라올 즈음 돼서는 희미한 잔음만 남기는 소리였다.
체이서가 감았던 눈을 느릿하게 떴다. 피처럼 붉고 투명하리만치 맑은 눈동자가 자리했다.
“이상하지, 통하면 더할 나위 없이 효율적일 것 같아서, 언제나 통했으면 하고 바랐는데.”
효율, 다분히 그다운 말이었다.
“이제는.”
체이서는 아래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말했다.
“통하지 않기를 바라기도 해.”
“통하지 않는 건.”
체이서의 의뭉스러운 말에 넘어가지 않았다. 나는 입을 열어 핵심을 토했다.
“내가 푸른 장미라서야?”
제이르가 말한 대로라면, 내가 체이서의 능력에 영향받지 않는 이유도 알 수 있었다.
<푸른 장미는 다른 장미에 걸린 모든 저주를 무효로 만들 수 있으니까요.>
체이서의 얼굴은 변함없었다. 웃는 그대로였다.
“……네가 푸른 장미라 내 능력이 통하지 않는 건 맞아. 이아나.”
체이서는 담담히 인정했다. 다정하게 휘어진 눈웃음과 함께.
“그리고?”
“그리고라니?”
“그리고 더 궁금한 건 없어?”
그의 태도는 자연스러웠다. 마치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이. 오히려 상황도 잊을 만큼 자연스러운 시선으로 무슨 질문이든 받아주겠다는 태도였다.
흡사 이곳이 적진 한복판인 것을 잊은 사람처럼.
“아니면 이건? 내가 연회에서 네게 하려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체이서가 내 손에서 얼굴을 떼어냈다.
“이건 궁금하지 않아?”
조금만 더 가까워지면 날숨이 닿을 것 같았다.
붉은 수묵화 물감을 떨어트린 듯 온통 핏빛인 눈동자가 집요하게 나를 응시했다.
“돌아가자, 이아나.”
그는 마치 유람을 종결짓는 것처럼 부드러이 이야기했다.
소풍이, 피크닉이 여기까지인 것 같이. 우습지도 않은 이야기였다.
“가지 않으면?”
체이서의 눈이 둥근 곡선을 그렸다.
“내가 어찌 강제하겠어.”
그 답지 않은 말이었다. 아니, 발목에 족쇄를 채워둔 미친 인간이 할 소리는 아니었다.
“쇠사슬이라도 채워 끌고 가려고?“
“그럴 리가.”
체이서의 나긋나긋한 시선이 처음으로 내게서 떨어졌다.
붉은 시선이 향한 곳은 내 발치였다. 조금 전부터 체이서를 향해 털을 곤두세우고, 사나운 소리를 숨기지 못한 푸딩을 향해서였다.
나는 황급히 말했다.
“건드리지 마.”
4년이 지난 지금,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긴 시간동안 감쪽같이 사라진 사람을 본 이라면 누구라도 짐작했을 것이다.
“왜? 처음부터 내가 잡아 온 것이잖아?”
체이서가 고개를 갸웃했다.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이 무구한 얼굴로.
그러나 이 남자가 지금 보이는 표정만큼 무구할 리가 절대 없었다. 나는 푸딩을 발로 슬쩍 뒤로 보내는 동시에 사납게 눈을 좁혔다.
“내게 준다고 했어.”
“이아나, 네 이 표정은 정말 오랜만인 것 같아.”
체이서는 경계를 풀라는 듯 부드럽게 웃으며 손바닥을 들어올렸다.
“조금 가까워졌던 하녀 아이에게 검을 겨눈 뒤로 처음인가?”
“체이서.”
“그래. 그때 그 아이는 독을 탔었지. 먹으면 단 3초 만에 심장이 멎고 마는 독을.”
잊고 있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체이서가 말하는 날은 내가 도뮬릿 저택에 오고 나서 그리 오래되지 않았을 때였다.
납치와 불바다를 겪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게 배정된 하녀였으며, 다정하고 친절한 소녀였다.
“그래, 네가 원하지 않으면 건들지 않을게. 저 수호신은.”
체이서가 순순히 물러났다. 그가 남긴 행간이 묘했다. 아니. 적어도 푸딩은 건드리지 않겠다는 것을 알아들었다.
그가 내 손을 놓은 덕에 우리 사이가 조금 떨어졌다. 그러나 그에게 붙잡힌 허리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잠시 고개를 뒤로 돌렸다. 뒤에는 난간뿐이었지만 난간 아래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또 층층마다 사람이 있을 것이며, 그중에는…… 리케도르안도 있을 것이다.
아주 잠깐, 그는 오지 않는 건가. 생각했다. 아니다. 차라리 오지 않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이아나, 우리 주변을 둘러싼 모든 것은 너를 노릴 거야.”
체이서가 나를 마주한 채로 단호하게 선언했다.
“너도 알잖아?”
헤르님은 완벽한 방패가 될 수 없어. 체이서가 황홀한 음성으로 나직하게 읊조렸다.
“나는 도뮬릿이 아니었잖아.”
“네 이름은 도뮬릿이지.”
“난 네 동생이 아니야.”
그러자 그는 말을 듣지 않는 아이를 보듯이 조금 난감한 얼굴을 했다.
“이아나, 조금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도뮬릿이 될 수 있는 건 핏줄만이 아니야.”
뒤이어 포근한 이불처럼 다정하고 깃털이 간지럽히듯 보드라운 음성이 조곤조곤 귀를 파고들었다.
그윽한 음성과 동시에 바람이 불었다.
그의 팔에서 몸이 자유로워졌다. 거리가 생겼으나 그에게 여전히 붙잡혀 있는 기분이 들었다. 이 감각은 생생하기만 했다.
고개를 들면 바람 사이에서 체이서의 시선이 느껴졌다.
“내 반려도 도뮬릿이 될 수 있는데.”
그가 선량한 오빠를 흉내 내듯 머리칼을 잡아 정돈하는가 싶더니, 몇 가닥 잡은 그대로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제 입술에 가져다 댔다.
그의 시선이 내게로 올라왔다.
줄곧 다정하던 눈으로 위험한 빛과 더불어 아슬아슬한 미소가 스쳤다.
허락만 한다면, 더는 참지 않겠다는 듯이.
“이쪽이 좋겠어?”
아찔한 음성과 함께.
<4권에서 계속>
감방에서 남자주인공을 만났습니다 3권
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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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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