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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발테이즈라 말한 리케도르안의 음성은 후회하는 것 같기도, 혹은 홀가분한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의문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그걸 내게 알려주는 이유가 뭐예요?”
리케도르안으로서는 내가 모르는 쪽이 나았을 사실이었다.
“……당신은 내가 모르는 쪽이 낫지 않아요?”
나는 리케도르안의 품 안에서 빠져나와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리케도르안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알려주고 싶었으니까.”
그는 내가 이곳에 계속 있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내가 돌아가고 싶게끔 마음을 먹게 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내 마음은 제쳐두고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내가 도망가면요? 그럼 어쩌려고요?”
그는 잠시 느릿하게 눈을 굴리다가 말고 하아, 숨을 내쉼과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얼굴을 쓸어내리는 손에 복잡함이 담겨 있었다.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벌써 후회하고 있으니까.”
마치 툭 치면 울 것 같은 낯이었다.
“하지만 이아나, 나는 당신을 감금하지도 납치하고 싶지도 않으니까요.”
내게 달려와 안겨 속삭이던 음성을 떠올렸다. 연신 미안해, 미안하다. 반복해 되풀이하던 음성을.
“……네가 하고 싶은 것이 생겼으면 좋겠어. 이아나.”
그는 한 손에 얼굴을 묻고 같은 말을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했다.
“당신이 좋아하는 것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이아나.”
왜 이리 말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평온했고, 평화로웠고, 큰 변곡점 없이 지내왔다.
“먹고 싶은 것도 해보고 싶은 것도 당장 내일 하고 싶은 것이, 간단해도 좋으니까 뭐든 생겼으면 좋겠어. 당신은 그저… 창문만 바라보니까.”
조금만 적응하고 순응하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상이었다.
“내가 가슴 아파 미칠 것 같아…….”
나는 늘 느긋하고 또 안락하게 살아왔는데. 오히려 감방에서 더 오래 머물렀을 리케도르안이 고생을 했지 않았나. 왜 이렇게 힘들어하는 것인지.
“음, 나 잘 살아왔어요. 대공님.”
그렇다고 좋아하는 게 없어서, 하고 싶은 게 없어서 이상한 사람이냐. 이런 논쟁은 하고 싶지 않았다. 할 생각도 없었고. 나는 손을 뻗어 내 손을 가져와 제 뺨에 기대고는 그 상태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이 침묵을 기다려주었다.
“그래요, 이아나.”
침묵 끝에 그는 이렇게 속삭였다.
“그럼 여기서 만들어 봐요. 좋아하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
“이것만 부탁할게.”
그가 천천히 눈을 들어 올렸다. 그윽함이 담긴 시선이었다. 이렇게 애타게 바라보지 않아도 들어줄 수 있는 이야기인데. 그는 세상 서럽게 부탁하고 있었다.
“들어주면, 안 돼요?”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나는 끄덕였다. 어렵지 않은 부탁이었다.
한편으로는 다른 생각이 들었다.
-인간, 우린…… 안전한 거냐, 냥?
‘글쎄.’
르나그가 날 찾고 있다. 그 남자는 역할에 언제나 충실했고, 지금도 날 염려해 찾고 있는 것일 거다.
‘말해준 걸로 보아서, 만약 도뮬릿이 날 찾았다면 이 또한 말해주었겠지.’
이상하고도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파고들었다. 왜 체이서는 가만히 있는 거지?
<내 사랑스러운 동생.>
날 위해 웃으며 어떤 일이든 서슴지 않고 할 수 있는 악당. 본래 그는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일 사람이었다. 설사 체이서가 르나그 뒤에 있는 것이라 한들 발테이즈 이름으로 움직이게 하진 않았을 거다.
나는 그를 잘 알았다.
오히려 내가 알아차릴 수 있게 도뮬릿의 이름으로 행동할 사람이었다. 그러니 발테이즈가 날 찾는 것은 르나그의 독자적인 결정일 거다.
‘끙, 걱정 많이 했나 봐.’
나도 이럴 작정이 아니었으니 어쩔 수 없었으나, 이후 르나그에게만은 소식을 전할 방법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입술을 물었다가 떼어냈다.
“이아나.”
난 고개를 들었다. 리케도르안이 뜻을 알 수 없는 시선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까 말했듯이 곧 내 저택에서 가신 회의가 있어요.”
그는 뺨을 묻은 채로 다른 이야길 했다.
“……음. 사람이 많이 와요?”
나는 기꺼이 그의 화제 돌리기에 동참해 주었다.
“싫은가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나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상념도 일단 함께 떨치면서. 뒤에 가서 한번 생각해보자. 르나그에겐 소식을 전달할 수 있을지. 지금은 당장 고민해봐야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다. 나는 그 사람에게 폐도 염려도 끼치고 싶지 않으니 반드시 찾을 생각이었다.
“줄곧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사람이 많이 모여 있는 자리나. 그런 거, 이번 황궁 연회가 처음이라서요.”
그보다 속으로 줄곧 리케도르안에게 묻고 싶던 말이 있다.
당신은 내가, 체이서의 동생이라도 괜찮은 걸까?
“이전까지는…… 장례식에서 본 것이 전부예요.”
“장례식?”
난 잠시 멈칫했다가 말했다. 이미 뱉어버린 말이다.
“전 도뮬릿 공작의 장례식.”
“아…….”
리케도르안의 하얗고 청초한 낯에 형언할 수 없는 증오가 서서히 떠올랐다. 그러나 날 보는 순간 이것은 사라졌다.
그럼에도 똑똑히 보았다.
<고심 끝에 돌아온 것이 ‘푸른 장미’의 존재였습니다.>
이 순간 머리를 적신 것은 지나간 제이르의 말이었다.
<푸른 장미는 다른 장미에 걸린 모든 저주를 무효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이 밖에도 많은 능력이 있지만 저희가 필요한 능력은 이렇습니다.>
리케도르안은 내가 푸른 장미인 걸 알고 있다.
그리고 그날 제이르의 말을 통해서 나와 체이서가 친남매가 아니란 것도 알고 있음을 알았다.
<오빠여도 좋고.>
너는 날 애타게 여기지만, 내가 그곳에서 살아왔던 시간을 부정할 수는 없으리라.
<오빠가 아니어도 좋고.>
나는 알았다. 리케도르안이 나를 애달프게 여기는 만큼.
<내 이아나.>
나는 여전히 그 남자의 가장 소중한 무언가이리란 것을. 이 순간 유혹할 듯 황홀하고 관능적인 음성이 스쳐 지나갔다.
<언제든 기다릴 수 있어. 네 곁에서.>
……그 남자는 날 포기하지 않겠지.
-인간, 괜찮나, 냥!
‘괜찮아. 아무것도 아니야.’
눈을 깊게 감았다가 떴다. 언젠가는 한번 나눠야 할 화제였다.
줄곧 그것을 피한 것은 이것이 그에게 상처가 될까 봐 염려되어서였지 않은가. 나도 마주하기 싫어서였기도 했지만.
이제는 피할 곳이 없었다.
“당신은 도뮬릿이 싫지 않아? 내 오빠도.”
“물론 그 남자가 싫어.”
리케도르안의 말이 짧아졌다. 그것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증오스럽고, 혐오하지.”
리케도르안이 부친에게 가진 모순된 감정을 알고 있다. 학대의 기억에 고통받으면서도 억울한 죽음에 화를 내고야 마는 정의로운 성격이었다.
“그런데, 이아나. 사실 나는…… 네 생각 이상으로 나쁘고 못된 인간이기도 해.”
그가 뺨에 대고 있던 내 손을 겹쳐 쥐었다. 그러고는 ‘언젠가 네가 표현한 악당처럼.’ 하고 덧붙였다.
“이 순간에 내가 내 부친을 죽인 사람을 계속 미워하고 있다면.”
푸른 눈동자로 깊은 불꽃이 일렁이는 것 같았다. 그는 수줍고도 애달프게 미소했다. 우연하게도 그는 검은 장미 문신이 그려진 손목에 입을 맞췄다.
“네가 날 더 봐주지 않을까, 불쌍히 여겨주지 않을까.”
아마도 저대로 이를 꾹 누르면 그 남자의 문신이 나올지도 모를 자리에 입술을 보니 긴장감이 들었다. 그가 천천히 눈을 들어 올렸다.
“못된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푸른 눈이 날 것에 가깝게 일렁이고 있었다. 긴 속눈썹이 반그림자를 그렸다.
그림자에 잠긴 눈은 아찔할 정도로 깊고 선정적인 느낌을 자아냈다. 잠시 청초함이 가려질 정도로.
“내가 망가질 정도로, 너를 원해. 이아나.”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할 말은 많았지만 빠져나오지 못한 채 목 끝을 맴돌았다.
할 말도 할 말이지만 그것보다도 다른 곳에 시선을 빼앗겼다. 줄곧 리케도르안의 입술이 향한 곳.
검은 장미 문신이 있는 곳.
그가 저기서 힘만 조금 더 준다면…… 피가 맺히듯 문신이 나타날 것이다. 괜스레 등줄기가 펴지고, 뻣뻣한 긴장이 느껴졌다.
문신이 나타나면 자연스럽게 체이서와 연결될 거야.
이 상황에서 그리되는 건 좋지 못했다. 그것도 그가 체이서를 향한 진한 증오와 환멸을 드러낸 순간이라면 더욱더.
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며 손을 쥐었다가 폈다.
리케도르안은 내게 ‘부친을 죽인 사람을 계속 미워하고 있다면.’ 라고, 말했다. 그건 다시 말하자면 씻을 수 없는 증오가 이미 존재한다는 말도 되었다.
그런데 이마저 내게 연민을 얻는 도구로 쓴다니.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동시에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잘 알았다.
“그런 생각 하지 마.”
나는 손가락을 살짝 움직였다. 그대로 오므려 그의 손가락을 잡았다. 거머쥔 손이 잠시 움찔했다.
“당신 마음은 잘 알았어.”
망가질 정도로 누군가를 원한다는 마음은, 대체 어떤 마음일까 짐작도 가지 않았다.
“내게 이런 말 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가 4년 전과 다르지 않은 것이 있다면 이런 것이었다.
“그런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는 항상 온몸으로 부딪쳐왔다. 결과는 생각하지 않고, 이렇게 날것에 가까운 시선과 낯으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줄 것처럼. 4년 전 철창에 매달려 울 때의 당신도 이러했다.
“있어.”
“어?”
“자격, 있다고.”
내가 빠져나가려 하는 것을 느낀 것인지 그가 좀 더 애타게 손을 붙잡았다.
이제 이 손을 잠깐 놓아도 나는 도망가지 않을 텐데도.
“당신에게 자격이 왜 없어요?”
이제는 숫제 내 손을 양손으로 쥐고 이마에 가져다대며 이렇게 말했다.
“내, 모든 것을 주고 싶은데.”
마치 신에게 기도하는 듯 경건한 모습이었지만 흘러나온 음성은 낮고 쉬어서 끊어질 듯 연약했다.
“……나로는 부족해요?”
그가 물속에 빠져 다급해진 사람처럼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푸딩의 발톱이 콕콕 가슴을 찌를 때처럼 살짝 가슴이 아릿했다.
안타깝고.
나는 굽은 등을 보다 잡히지 않은 손을 뻗었다.
리케도르안의 얼굴을 잡아 위로 끌어올렸다. 곧 물기 어린, 그러나 애써 눈물을 참아 붉어진 낯이 나를 향했다.
“이렇게 굽은 등을 보려고 한 소리는 아니야.”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의 눈 밑을 살살 문질렀다. 그가 음미하듯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뜬다.
“그리고 당신에게 부족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아요. 내가 판단할 일도 아니고.”
여전히 붙잡힌 문제의 ‘손목’을 보다 날숨과 함께 토해냈다.
“그저 당신이 좀 더 스스로를 소중히 했으면 하는 생각에 한 말이에요.”
4년 전에 바란 것도 그것뿐이었는데. 이것만은 진심으로 바랐건만.
<각하께서 지옥 같은 부작용을 견디고, 어떻게서든 해내셨으니까요.>
리케도르안은 내가 바랐던 한 가지만 그대로인 채 등장했다. 제이르의 말에서 추론하기론 그가 각성의 대가로 얻었던 것은 보통의 부작용이 아니었을 것이다.
건강히 살아만 달라고 부탁했더니, 말은 들어주지 않은 채로 과거보다 더욱더 애타는 시선과 함께 서 있었다. 여기에 울음을 품었지만 이제는 더욱 깊고 형언할 수 없는 것을 잔뜩 품은 눈을 한 채로.
나는 이런 눈을 본 적 있던가?
비슷한 것을 본 적은 있다.
‘체이서.’
하나 분명 체이서가 보이던 집착과는 달랐다.
“이제 그래도 되는 위치잖아.”
나는 그의 부작용을 입에 담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입술에 맴돌던 것을 끝내 참지 못하고 덧붙였다.
“이렇게 되기까지 어떤 고통을 겪었어요?”
리케도르안이 멈칫했다. 내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를 리 없을 거다.
“아팠죠.”
물음이 아닌 확신이 담긴 내 말에 그는 시선을 잠시 내리더니, 다시 나를 보았다.
“그저, 아주 잠깐 아팠을 뿐이야, 이아나.”
그는 고통을 부정하지 않았다. 4년 전에 아픔이 아픔인 줄 몰랐던 때와는 달랐다. 그건 다행이지만. 리케도르안이 내 손을 엄지로 매만졌다. 유혹하려는 몸짓은 아니었다.
“네가 아픔을 알려준 덕분에 나는 아픈 것을 알았는데.”
그의 엄지가 손바닥을 꾹 눌렀다. 아프진 않았지만 리케도르안이 뭔갈 참는다는 건 느껴졌다.
“이제 당신이…….”
이리 말을 하던 리케도르안이 돌연 작게 웃었다. 환한 미소보다는 조금 쓴 미소에 가까웠다.
“대답을 강요하진 않을게요.”
그는 내가 대답하지 않은 것을 정확하게 짚었다.
“그렇게 행동해봐야, 그 남자와 다를 것이 없으니까.”
그러고는 고개를 내려 내 손끝에 입술을 맞췄다. 이리 하는 행동은 틀림없이 체이서와 같은데.
“기다릴게요.”
청초하고, 처연하게 그리고 눈을 내리깔며 섧게 웃는 얼굴은.
<지금부터 너를 납치할 거야.>
나를 납치한 순간 체이서가 언뜻 잠시지만 겹쳐 보였던 감상을 지우고, 또 다른 것을 남겼다.
당신은 다르구나.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