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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사실. 최악의 결과.’
나는 줄곧 한 가지 생각에 빠져 있었다. 전부 제이르가 이야기한 말들이었다.
리케도르안이 이성을 잃은 모습일 때, 어떤 모습이 되는지는 잘 알고 있다. 언제나 내 말을 잘 들어주는 그였지만 이 모습일 때에는 가장 말을 듣지 않기도 했고. 조금은 멋대로고 충동적이었으며……. 가장 당황스럽게 한 모습이기도 했다.
아무튼 간에 제이르의 이야기를 듣고 시간이 조금 지난 지금 생각을 정리하고서야 깨달은 점이 있다.
……보통, 이 정도를 두고 최악의 결과라고 하던가?
리케도르안의 문제를 가볍게 취급하려는 게 아니다. 엄밀하게 상황을 따져보았을 때, 리케도르안은 현재 대공으로서 굳건히 잘 해내고 있다. 대외적 위치라든지, 업적이라든지. 체이서가 경계할 정도로 무섭게 세를 불리면서.
물론 제이르는 이것이 상당히 아슬아슬하게 이루어졌다고 얘기했으나, 어쨌거나 크게 보았을 때 성공이었고 여기까지 왔다는 거다.
지금까지의 성공과 앞으로 올지 모를 아슬아슬한 상태 속 위험, 보통은 이를 두고 위험하지만 조심스러운 상태, 라면 모를까 ‘최악의 결과’라고 까지는 말하지 않는다.
거기다 제이르는 충성스러운 사람이지 호들갑을 떠는 이는 아니었다. 능글맞음 속에 영리하게 치고 빠질 줄 아는 이였다. 또한 맺고 끊음이 정확하단 거다. 이처럼 계산속이 정확한 남자가 섣불리 ‘최악’을 말할 리 없다.
반복해 되짚어 본 끝에 결론을 내렸다.
‘내게 말을 하지 않은 게 있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아귀가 들어맞는다.
“허. 어처구니없네.”
연신 심각한 척하더니 정작 중요한 것은 말을 안 한 거다. 이 능구렁이 같은 인간이.
뭐.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었다. 내 신분도 신분이겠다. 믿지 못할 수도 있겠지. 그래도 말이지…….
거기까지 생각하는데 손끝이 간질간질했다.
아니, 조금 전부터 간지러웠지만 이젠 그저 무심히 넘길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저기.”
이에 나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이가 함께 머리를 들었다. 은발이 사르르 흩어졌다. 조금 전부터 내 옆을 차지한 이였다.
“나한테 화 풀린 거야?”
내 질문에 리케도르안은 푸른 눈동자를 느릿하게 감았다가 떴다. 머리색과 같은 속눈썹이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조각이던 것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주책스러운 감탄을 불러일으켰다.
……뉘 짐승인지 몰라도 미모 하나는 정말 끝내주네.
“……안 풀렸습니다.”
리케도르안이 툭 읊조렸다. 듣기 좋은 음성이 가져다주는 울림은 좋았지만 아쉬웠다.
저 입술에서 나오는 말도 듣기 좋으면 좋으련만. 나는 턱을 괴었다.
“나한테 입까지 맞췄으면서, 풀리지 않았단 거야?”
“…….”
“옷까지 반쯤 벗겼으면서.”
리케도르안이 차게 굳혔던 얼굴을 휙 돌렸다. 워낙 새하얗던 귀 끝이 붉게 물들었다.
동백꽃 꽃잎이 톡 물든 것처럼.
이런 모습을 보아선 모로 보나 이성이 있는 쪽이다. 4년 전의 그가 그러했듯이 인격은 바뀌어도 기억은 공유하는 듯했다.
뺨까지 붉어진 얼굴이 증거였다.
“아, 안 풀렸습니다.”
“누가 뭐래요?”
나는 턱을 괸 채 피식 웃었다. 웃음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다.
‘안 풀렸다면서 뺨은 왜 붉히는데?’
아무래도 그날 방까지 달려온 쪽은 이성이 있는 쪽이 맞는 듯했다. 이쪽은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걸 봐서는 다음에 다른 인격이 나와서 날 덮쳤던 거고. 정말 휙 바뀌었단 말이지. 성장한 만큼 파괴력은 무시무시했고. 나는 흘끗 손을 보았다.
‘손은 잡고 있으면서.’
리케도르안은 고개를 돌린 채로 내 손을 꾹 잡고 있었다. 고백건대 이 남자, 10분 전 내 방에 들어오자마자 이랬다. 멍하니 앉아 창문을 보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열고 조심히 들어오더니, 대뜸 내 옆에 쪼그리고 앉아 손끝만 잡는 게 아닌가.
그러다가 내가 보지 않으니 손을 움찔 움직이기도 하고, 엄지로 살살 문질러도 보고. 손을 처음 핥아보는 강아지도 이러지 않겠다 싶었다. 그러면서 화 풀렸냐고 물었더니, 또 아니란다.
“저기요, 대공님. 화 안 풀리셨다면서.”
나는 손끝을 살짝 움직였다. 그가 움찔했다.
“손은 왜 놓지 않는 건데요?”
그의 고개가 흘끗 나를 향해 돌아왔다. 그는 나를 보더니 다른 손의 손등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안 풀렸는데…….”
가려봤자 눈 밑이 발긋 물든 걸 이미 보았는데도 다시 휙 고개를 돌리며.
“……손이 멋대로 잡고 있는 거야.”
이런 소리나 해주시었다. 이 커다란 저택의 주인께서 말이다.
나는 웃음이 나오려던 것을 꾹 참았다. 우리 남주님은 손과 머리의 인격이 따로인가 보다. 4년 전 저세상 숙맥 삼중인격에 이어서 4년 후인 지금엔 손에까지 인격을 부여하셨단다. 놀랍기도 하지.
그르릉. 그르릉.
내 발밑에는 짐승이 둘이었다. 하나는 왜인지 대공씩이나 되어서 의자 끝에 걸터앉은 리케도르안이 그러했고. 내 발목 옆에 머리를 가져다 대며 골골골. 이마를 비비적거리고는 꾸벅꾸벅 조는, 오늘도 고양이 모습인 3살 수호신님이 그러했다.
참 웃음이 나오는 광경이었다.
“근데, 왜 말이 높아졌다, 반말이었다. 반복해?”
불편하지 않나? 그냥 물어본 건데, 리케도르안은 어찌 느꼈는지 표정을 굳혔다.
그러고는 생각에 잠겨 있다가 천천히 입을 떼었다.
“……높임말을 쓰는 쪽을 좋아하나?”
“아니, 뭐. 어느 쪽이든 상관없는데.”
어쩐지 떠보는 듯한 어조라, 괜찮다는 의미로 담백하게 대답했다. 나야 불편할 건 없다.
“당신이 불편하지 않나 싶어서 물었지.”
이리 답하자 그는 왜인지 잠깐이지만 눈꼬리를 축 내렸다. 얼른 원래의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왔지만.
근데, 본인은 모르나?
반쯤 붉어진 얼굴로 차가운 표정을 해봐야…….
‘음, 알려주지 말아야지.’
보기 좋으니까.
내가 싱긋, 눈웃음을 흘리자 리케도르안이 슬쩍 시선을 돌렸다. 대신 내 손끝을 잡은 힘이 조금 더 강해졌다.
방 안은 고요했다. 하기야 그와 나, 그리고 이 조그만 수호신밖에 없으니 당연했다.
여기 오자마자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푸딩은 내가 리케도르안에게 가라는 말을 더는 하지 않자, 안심했는지 몇 시간 전부터 모습을 드러냈다. 우스운 건 리케도르안도 푸딩의 모습을 보았는데, 보고도 모른 척한다는 거다. 서로가 붉은 장미의 힘을 느끼면서 말이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초원에 서식하는 물소와 가젤같이 서로를 모른 척한다. 그저 웃겼다.
‘똑같은 것들끼리 뭐 하는 거람.’
납치당한 입장에 평화롭다는 것이 그저 신기했다. 내 다리에 얼굴을 비비던 푸딩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내 다리 사이를 통과하며 그릉그릉 울다가 양 앞발을 허벅지에 올렸다.
-냥, 인간아. 이 집은 신기하다 냥. 비명이랑 울부짖음이 들리지 않는다, 냥.
‘그거야, 암살하러 달려오는 놈이 없잖아.’
푸딩의 푸른 눈이 끔뻑였다.
-아하, 냥. 이제 안전한 거냐?
‘글쎄.’
나는 슬그머니 손목을 향했다.
벌써 이곳에서 머문 지 일주일이 넘어가건만…….
‘체이서가 말을 걸지 않아.’
나도 검은 장미 문신은 제대로 써보지 않아 어떤 기능을 하는지 모른다. 혹시 내 쪽에서만 말을 걸 수 있는 건가?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위급할 때, 불러줘. 이아나.>
어쨌거나 나는 체이서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이 무슨 결과를 초래할지 알면서도 하지 않은 것이기도 했다.
숨이 살짝 넘어간다.
‘상상이 가. 다음 상황이.’
나는 리케도르안에게서 손을 빼내어 손목을 덮었다. 눈을 감고 지워낸다. 이런 고민은 조금만, 조금만 더 보류하자. 그러고는 눈을 떴다.
“하아…….”
일단은 생각을 정리할 겸 좀 걷자.
어차피 리케도르안이 내준 방은 체이서가 내준 방 못지않게 무척이나 넓었다.
어디 나갈 것 없이 가볍게 걷기엔 충분했다는 거다. 한데 우스운 건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두 짐승이 졸졸 쫓아왔다. 걷다 말고, 눈을 깜빡였다.
아니……. 푸딩은 둘째치고. 리케도르안은 왜?
“왜 쫓아와요?”
“……안 되나요?”
“아니, 안 될 건 없는데.”
방 안에서 움직이는 건데? 의아함이 들었지만 이내 몸을 돌려 움직였다. 꼬리를 두 개나 줄줄이 이어 달고서.
‘진짜 높임말 쓰네.’
덩치도 이렇게 큰 사람이. 눈치 보면서 쓰는 건 또 뭐람.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나, 산책해도 돼요?”
사실 내 말도 높임과 반말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했으니 남 말 할 처지는 아니었다.
“원한다면.”
리케도르안에게서는 의외로 선선한 허락이 떨어졌다. 의외네. 한 번쯤 왜라거나, 안 된단 말을 할 줄 알았는데. 발목이 너무 가벼운 것도 조금 이상하고.
“어딜 가보길 원하지, 아니. 원해요? 안내해줄 수 있어요.”
“푸흡, 그건 무슨 말이에요. 존대도 아니고 반말도 아니고.”
어딜 가보고 싶으냐라. 딱히 정하고 물은 건 아니었다. 일단은 굳이 찾자면 정원을 구경하고 싶은데. 나는 괜스레 발목을 살랑 흔들어 보았다가 창문 근처로 가보았다.
나를 쫓아온 리케도르안이 물었다. 그는 찬기 어린 낯으로 조금 망설이다가 물었다.
“이아나.”
토라졌다기엔 참으로 달콤한 부름이다.
“하고 싶은 건 없나요?”
차가운 얼굴을 한번 대면해서일까, 이성이 있을 때의 높임말은 영 자연스럽지 못했다. 대공 노릇이 익숙해졌단 얘기겠지. 스스로도 느낄 텐데도 애써 자행하는 어색함이 조금 귀엽게 느껴졌다. 이렇게 덩치가 크고, 물먹은 백합처럼 청초한 사람이 절절매는 것도. 나쁘지 않고.
“하고 싶은 거요?”
“네.”
“없는데.”
난 고개를 갸웃했다. 리케도르안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갖고 싶은 건?”
“없어요.”
“좋아하는 건.”
“없어요.”
“……먹고 싶은 건.”
“……아무거나 잘 먹어요?”
그의 어조가 갈수록 딱딱해졌다.
“그럼. 해보고 싶은 건.”
“……같은 질문이지 않나요?”
처음이랑. 나는 눈을 크게 깜빡였다.
“난 하고 싶은 것도 갖고 싶은 것도 딱히 없어요.”
그렇게 말하고는 한마디 더 붙였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를 모르니…….
“……그게 꼭 있어야 하나?”
그러자 리케도르안이 잠깐이지만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울면, 눈물을 닦아줘야 하나. 그리 생각했지만 그는 울지 않았다. 그저 침묵할 뿐이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가 싶어 등을 돌려주었다. 창문 밖을 구경하는 척할 요량이었다.
마침 창문 밖이 꽤 시끌시끌했다. 조금 전까진 고요했는데, 무슨 일이지? 시선을 주는 척하려다가 시선을 빼앗겼다.
-인간, 사람이 아주 많다!
‘그러게.’
푸딩의 말처럼 사람이 아주 많았다. 왜 보지 못했나 싶을 정도로 바글바글했다. 차림을 보아서는 대부분이 시중인 같은데.
“사람이 왜 저리 많지?”
작게 중얼거리는데, 허리로 단단한 것이 파고들었다. 그리고 등으로 벽 같은 것이 느껴진다. 나는 나를 파고든 리케도르안을 밀어내지 않고 그냥 두었다.
“곧 커다란 행사가 있어서 그래요.”
곧 내 중얼거림에 대한 답이 돌아왔다. 아주 작게 말했는데, 어떻게 들은 걸까. 그보다. 나는 온몸을 긴장했다. 끝을 느릿하게 늘리는 어조. 쉬어버릴 듯 잔뜩 낮아진 음성. 목소리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가신 행사가…… 있을 거거든.”
절로 등줄기가 펴진다.
이건, 다른 쪽 리케도르안이다.
당황스러운 기분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변화가 갑작스럽기 짝이 없네.’
하나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숨을 살짝 들이켰다.
“저기.”
“응.”
촉.
“저기 있잖아?”
“응.”
촉.
“리케도르안…….”
“네.”
촉.
“모, 목에 그만…….”
대답 한 번에 목으로 잔 키스가 이어졌다.
나는 참지 못하고 목을 한 손으로 가렸다. 그러자 피식, 바람 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이번엔.
촉.
손등 위로 푹신한 감각이 느껴졌다.
“……싫어요?”
그걸 그렇게 물으면. 아니 이렇게 파고들어서 물으면 싫다고 어찌 말하나? 나는 얼굴을 싸매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건 정말이지 반칙이었다. 귀에다가 이런 식으로 속삭이는 게 어딨어? 감각이 예민해지다 못해 달팽이관 솜털도 곤두서겠다 싶었다.
아니. 이게 짐승이야, 사람이야.
커다란 몸에 푹 안긴 채로 한숨을 폭 쉬었다. 하나 이미 이런 모습을 익히 여러 번 본 바로 말하건대, 붙잡혔을 시점에서 해결책은 없었다.
‘그래, 네 맘대로 해라.’
반쯤 체념한 채로, 이성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데, 그가 돌연 내 목에 얼굴을 파묻었다. 목이 간지럽다. 오히려 이런 모습에 배 속에서 송골송골 열이 맺히는 것 같았지만 모른 척했다. 그는 이 상태로 한참을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미안해요…….”
수분 뒤 차분해진 음성이 돌아왔다. 돌아온 것인지 한결 가라앉고 한숨이 섞인 음색이었다. 나는 그의 손등을 톡톡 두드려주었다.
“괜찮아요. 적응 한번 해볼게.”
반쯤은 내 책임도 있겠다. 그의 인격이 통합되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를 아직 듣지 못했지만, 어찌 됐건 협조할 생각이었다.
왜인지 내 말에 리케도르안은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날 안고 있던 팔이 풀리지도 않았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궁금한 거나 물어보자 싶었다.
“아직 진정되지 않았으면, 대화나 나눠 봐요. 궁금한 것도 있으니까.”
“응…….”
그가 내 허리에서 팔을 풀지 않고서 대답했다. 끝이 늘어지는 대답이다. 미묘한데. 아직 오락가락하는 건가?
“정신 꽉 붙잡고.”
“…응…….”
나는 그가 정신 차릴 수 있게 손끝을 톡 잡았다 놓았다.
“있잖아, 당신 오래전에 목에 구속구를 차고 있었잖아요. 그거, 어떻게 풀어낸 거예요?”
그에게서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손이 조금 굳어있다. 나는 이에 덧붙였다.
“음, 대답하기 싫으면 하지…….”
“억지로 잡아 뜯어서.”
“아, 억지로 잡아 뜯어……. 응?”
잠시만. 뭐라고?
얼떨결에 그의 말을 되풀이 하다 말고 멈칫했다. 잠깐만. 그 구속구, 프란시아가 풀어준 거잖아.
……그럼 프란시아가 맨손으로 잡아 뜯었다고?
말도 안 된다 생각하려 하는데, 문득 오래전 한번 보았던 프란시아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수호신인 곰을 안고 있는 모습이라거나. 거대한 망치를 가볍게 들고 있는 모습.
생각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가능하려나?’
보고 경험한 것이 인식을 확 뒤바꿔놓은 것이다. 음, 우리 여주는 가능할 것 같은데. 솔직히 지금쯤 그 아기곰이 성인곰으로 진화, 아니. 성장했을 것 아니야.
‘몇 년째 똥괭이인 이놈과 다르게 말이지.’
-똥고양이라닛, 냥! 이 몸은!
‘그래그래.’
푸딩이랑 때아닌 머릿속 싸움을 이어가는데, 뒤쪽에서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슬슬 걱정되려는 찰나, 리케도르안이 작게 숨을 내쉬었다.
등 뒤로 소름이 오오소 돋았지만, 유혹하는 행위라기보다는 한숨에 가까운 것 같았다.
“이아나.”
그가 고개를 숙였다. 숨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같아지고 싶지 않으니까…….”
그가 내게 얼굴을 파묻은 채로 중얼거렸다.
같아져? 무엇과?
뜻을 알 수 없는 말이었지만, 귀를 기울였다.
“말할게요.”
“뭐를요?”
리케도르안이 천천히 일어나더니 나를 돌려세우지 않은 채로 속삭였다.
“……당신이 여기 온 지 일주일이 넘은 지금.”
창문 밖에는 여전히 마차가 들어서고 수많은 이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누군가 대대적으로 사람을 풀고.”
잔디밭 위 사람들이 움직이는 사이에서, 그의 음성이 선명하게 들렸다.
“당신을 애타게 찾는 가문이 있어요.”
그 말에 나는 체이서를 떠올렸다. 당연히 도뮬릿이리라 생각했다.
“그래요?”
나는 옷자락을 쥐었다가 놓았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은 아니었다. 도뮬릿에서 어떤 생활을 했는지 떠올리면,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
‘……그렇게 사라졌으니.’
벌써 추적의 규모가 커진 건가. 이미 추적이 없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도뮬릿이야?”
“아니.”
그러나 리케도르안에게서 나온 것은 전혀 다른 이름이었다.
“발테이즈.”
리케도르안은 전혀 말하고 싶지 않다는 음성으로 말했다.
“발테이즈야, 이아나.”
발테이즈, 노란 장미.
……르나그의 가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