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46/87)

***

“으음…….”

잠시 후, 우리 셋은 의도치 않은 삼자대면을 가졌다.

“오해라고요.”

정정한다. 정확히는 나와 제이르의 대면이었다. 리케도르안은 내게 몸을 묻은 채 잠이 든 탓이다.

<각하?>

제이르가 들어온 지 수 분도 지나지 않아, 우리가 소파에 마주 앉자마자 리케도르안은 내 몸에 쓰러지듯 고개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처음엔 눈만 감은 줄 알았는데, 다음 순간 들려오는 깊은 숨소리로 알았다.

<잠들었는데요?>

잠들었단 걸. 그것도 아주 깊이 말이다. 수 초 만에 이럴 수 있나 싶었지만 그럴 수도 있겠지 싶었다.

“아가씨?”

내가 제이르에게 답변하는 대신 리케도르안만 보고 있자, 제이르가 한마디 했다.

“……잠을 자지 못하긴 하셨습니다.”

나는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그저 리케도르안이 워낙 불편하게 자고 있어 괜찮을까 싶어 쳐다본 것이었다.

“왜 못 자요?”

많이 바쁜가? 나는 지난 시간 리케도르안을 떠올렸다. 매일같이 내 방에 오길래…… 그리 바쁘지 않은 시기인 줄 알았는데 말이다.

“바쁘시니까요. 그리고 자의로 주무시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안 잔다고요?”

“예.”

“설마, 한숨도?”

“네. 한숨도 안 주무셨지요.”

미묘한 뉘앙스에 나는 혹시나 하고 물었다. 그리고 놀라운 대답이 돌아왔다.

“매일 밤을 아가씨 방 방문 앞에 기대고 앉아 계셨습니다.”

“네?”

“저희가, 저희가 대신 서 있겠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듣지 않으셨지요.”

제이르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리케도르안이 하겠다는데 누가 이기겠냐면서.

“……제가 여기 온 지 일주일이 다 되어가는데.”

아무리 리케도르안이 짐승 같은 체력을 가졌다지만. 내내 한잠도 자지 못했다고? 심각한 일이다. 사람이 엿새나 자지 않고 버틸 수 있을 리 없다. 리케도르안씩이나 되니까 가능했겠지.

“예.”

제이르의 표정을 보아, 그에게도 쉬운 일이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대체 왜요?”

“그거야, 아가씨가 사라지지 않길 바라시니까요.”

제이르는 웃으며 말했다. 하나 눈만은 진지했다.

“아가씨께서 도망치셔도 도망이 성공할지는 둘째치고, 각하가 잡으실 수나 있을지 의문이었지만 말이지요.”

“그건 또 왜.”

“저희가 쳐다보는 것도 아까워하시는데, 오죽하겠습니까.”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동안 리케도르안이 고집스럽게 식사를 가져오고, 매일같이 눈도장을 찍던 것이 스쳐 지나갔다.

참으로 아득한 느낌이었다.

본래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것 앞에서 대면할 때 도피를 택하거나 보류를 택하곤 했다. 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제이르에게 물을 것은 아니다.

조금 전 그가 보인 거칠고 널을 뛰는 감정의 파도에 나도 같이 휩쓸렸다. 싫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신중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나는 섣부른 감정과 관심이 어떤 결과를 부르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뼈저리게 느꼈다. 내 실책이란 생각에 뼈가 아팠다.

잠깐의 유예를 두고, 다른 것을 묻기로 했다.

“그보다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내가 말을 돌리는 방식은 썩 세련되지 않았지만 제이르는 기꺼이 응해주었다.

‘제이르는 푸른 장미에 대한 것도 알고 있었지.’

나는 푸른 장미와 조금 전 리케도르안을 비교하다 먼저 한쪽을 택했다. 급한 것부터 물어보자.

“조금 전에 리케도르안의 상태가 약간 이상했는데요?”

“이상했다니요?”

제이르의 자세가 달라졌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충실한 오른팔인 모양이다. 그의 눈빛이 진중했다. 나도 거기 응하듯 진지하게 임했다. 조금 전 리케도르안의 상태를 빠르게 설명했다.

그의 변화를 빠르게 눈치채지 못했단 죄책감이 남아있었다.

“굳이 같은 예시를 찾자면, 4년 전 감방에서 성장한 모습을 마주한 느낌이었거든요?”

“예. ……부작용 말이지요?”

“네. 그 모습요. 분명 처음 방에 들어왔을 때의 모습과 이질적이었어요.”

“그럴 겁니다.”

제이르가 쓰게 웃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가씨는 감이 좋으시군요. 한눈에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도 있어서요.”

덤덤한 수긍이었다. 하나, 씁쓸함이 담긴 어조였으니까.

“알아보지 못한다는 건.”

“예. 생각하신 그대로입니다.”

웃고 있던 제이르의 얼굴이 처음으로 흐려졌다.

“4년 전, 각하의 인격이 3개로 나뉘어져 있었던 걸 기억하실 겁니다.”

그는 손가락을 3개 뻗었다. 왈왈 짓는 짐승 같은 모습, 이성이 있는 모습, 그리고 성장한 모습. 모두 기억한다.

“4년이 지난 지금 그 인격들은 아직도 모두 통합되지 못했습니다.”

나는 눈을 크게 깜빡였다. 제이르의 손가락이 모두 펴지며 그의 손이 나를 가리켰다.

그의 눈이 말하는 것 같았다.

리케도르안은 여전히 인격 혼동을 겪고 있다.

그리고 이건, 나와 관련이 있다고.

4년 전이라 하면 나와 만났던 때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물었다. 이런 건 직설적으로 묻는 편이 좋겠지.

“지금 그게 나와 관련 있다는 건가요?”

나와의 일 외에도 많은 일이 있을 수 있겠지만, 제이르가 굳이 4년 전이라 콕 짚어 말한 이유가 있을 거였다.

내가 아는 제이르는 녹록지 않은 인물이었다. 4년 전 캄브라캄에서 선한 얼굴로 시킨 행동을 떠올려보라. 저 때도 저리 생글생글 웃으며 새벽에 날 지하감방에 가게 만들었지.

“하하, 경계하실 것 없습니다. 아가씨.”

그에게서 대답 대신 엉뚱한 말이 흘러나왔다. 제이르는 내게 경계를 풀라는 듯이 양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러나 나는 넘어가지 않았다.

“지금 대답하지 않으셨는데. 한 번 더 여쭐까요?”

“흐음. 참, 그냥 넘어가실 것 같으면서도 틈이 없는 아가씨란 말이죠.”

리케도르안이 잠들어 있는 탓일까. 그의 말투가 조금 가벼워졌다. 마치 감방에서 편히 대화를 나누던 그날처럼 친근하기까지 했다. 그가 그러건 말건 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내 탓이에요?”

제이르가 잠시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아가씨 탓이라…….”

그의 얼굴에서 잠시지만 장난스러운 미소가 가셨다. 선량한 눈매로 진지함이 어렸다.

“글쎄요, 솔직하게 말해서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잘 모르겠다니요?”

아니,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거지. 잘 모르겠다는 뭐야. 회색지대에 머문 대답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4년 전 이후로 의심할 요소가 너무 많아서 무엇인지 저도 짐작할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아가씨.”

“많다고요?”

“네. 아가씨도 이 중 하나를 차지하는 요소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전적으로 아가씨 탓인지는 모르겠네요.”

뜬구름을 잡는 듯한 말에 갈피가 더욱 멀어진 기분이었다.

“어떤 것이요? 그 요소가 뭔데요? 애매하게 말하지 말고, 제대로 얘기해봐요.”

모름지기 난 직구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직구 아니면 사구다. 대면하거나 철저히 피하기. 어중간한 건 질색이란 얘기다. 이번 또한 굳이 돌려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4년 전 아가씨께 설명해드린 적이 있지요. 감방에서 보셨던 각하의 짐승 같은 모습은 대대로 내려오는 저주와 같은 것이라고요.”

“네.”

자세히 설명한 적은 없지만 그리 말하긴 했지. 나는 제이르가 설명하지 않은 것까지 알고 있었다.

“각하는 이상하게도 그 저주를 특히 강하게 타고 나셨습니다.”

내 안에 잠들어 있는 수호신을 떠올렸다. ……이건 아마 푸딩이를 잃은 탓이 크지 않을까? 합당한 추론이었다.

“각설하고, 이 저주를 풀기 위해서는 즉, 인격 통합을 위해서는 3가지가 필요했지요.”

“3가지라면…….”

제이르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하고 손가락을 세 개 펼쳤다.

“첫 번째, 각성을 앞두고 의식을 견딜 수 있는 튼튼한 몸.”

나는 리케도르안이 여주인공을 만났던 시기를 생각했다. 확실히 성인이 된 후였지.

“두 번째, 날 때부터 주어진 구속구를 풀어내는 것.”

제이르가 검지와 중지로 제 목을 톡톡 두드렸다. 리케도르안의 목에 있던 것을 기억하냐는 말에 끄덕였다.

“세 번째로 ‘동반자’의 존재.”

제이르의 손가락은 이제 검지 하나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세 번째? 동반자?

조금 이상했다.

“아, 이 부분은 생소하시겠군요.”

제이르는 내가 알아듣지 못했다 여긴 것인지 ‘동반자’에 대한 설명을 이었다. 당연하겠지만 내가 동반자에 대한 것을 모를 리 없었다.

왜 모르겠어. 여주와 남주를 꿰뚫는 핵심이었는데.

“……해서 연인이자 영혼을 계약한 관계라는 겁니다. 평생을 함께하는 존재이죠.”

“아, 네.”

내가 묘하게 여긴 건 그 부분이 아니었다. 제이르의 설명이 조금 이상했다. 왜 구속구와 동반자를 나눠서 설명하는 거지?

이 둘은 묶여 있는 개념이 아닌가?

책 속에서 프란시아는 리케도르안이 날 때부터 차고 있던 구속구를 풀어낸다. 그리고 훗날 그녀가 ‘동반자’였기에 구속구를 풀 수 있었다는 설명이 나온다. 두 가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란 소리다.

한데 지금 제이르의 설명은…….

“각하의 경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 겁니다.”

제이르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어떤 문제요?”

“각하의 몸은 성장함에 따라, 각성을 견딜 수 있는 튼튼한 몸을 갖추셨습니다. 그리고 유달리 강대한 힘도 마법을 사용해서 미리 진정시켜두었지요……. 아가씨 덕분에 말입니다.”

나는 질문을 보류하고 그에게 집중했다.

“그리고 그날이 왔습니다. 각하께서 계신 지하 수감실에 나타난 이가, 구속구를 벗기는 것을 도왔지요.”

……프란시아다.

원작대로 두 사람이 캄브라캄에서 만났다는 이야기일 터. 그래서 지금 리케도르안이 대공이 되었을 테니까.

여기에 무슨 문제가 있었다는 거지?

“문제는 여기, 여기에서 최악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나는 숨을 삼켰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리케도르안은 여전히 소리 없이 깊이 잠들어 있었다.

“각하의 구속구를 풀어버린 이와 ‘동반자’가 각기 다르다는 최악의 사실 말입니다.”

나는 손을 움찔했다. 내 떨림에 리케도르안이 깨지 않길 바라며 흘끗 잠든 그를 바라보았다가 시선을 옮겼다.

“……다르다는 건.”

“말 그대로입니다.”

제이르는 더는 설명하지 않았다.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이라 생각한 것일 거다.

“여기서 어떤 결론이 나오겠습니까?”

“…….”

제이르의 생각처럼 나는 그가 말하지 않은 것들을 느꼈다. 더는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충분히.

“저주는 반드시 조건이 충족될 때 풀립니다. 튼튼한 몸, 구속구를 푸는 이와 동반자가 일치할 것.”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저희는 이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

“최악의 문제. 최악의 결론.”

전혀 냉정하지 않은 음성으로 말하건만 모든 말들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겁니다. 구속구를 푼 이와 동반자가 서로 다른 이일 거란 건.”

제이르가 쓰게 웃었다.

“하아…… 또 다른 문제는 천년의 역사를 통틀어서도 이런 사례를 찾아보기가 어렵다는 점이지요.”

그는 소맷자락으로 제 얼굴을 슬슬 문질렀다. 정신을 차리려는 듯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리 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하나 가끔 일어나는 충동성 강한 모습이 각하를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도 해서…….”

그가 길게 숨을 내뱉었다.

“강하신 분이지만 적이 적인 만큼 언제나 안전할 수는 없으니까요.”

적, 굳이 도뮬릿을 입에 담는 대신 돌려 말해준 모양이다. 굳이 배려해주지 않아도 되는데. 제이르의 설명으로 대부분의 의문이 풀렸다. 하나 여전히 풀리지 않은 것도 있었다.

“한 번씩 이성이 사라지고 충동에만 내맡기시는 건 염려가 됩니다. 아주.”

푸딩은 제가 있어야 각성이 완성된다 하였다. 본래는 붉은 장미 후계자 몸속에 당연히 존재해야 할 수호신이 없다. 동반자도 곁에 없다. 그럼에도 구속구를 풀고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리케도르안의 현재 상태는 힘도 불안정한 거란 건가요?”

“아니요. 각하께서는 각성하셨습니다. 힘만은 완전한 붉은 장미이시지요.”

이는 푸딩이 말한 것과 일치했다. 각성했다고.

“……그게 어떻게 가능하죠?”

“각하께서 지옥 같은 부작용을 견디고, 어떻게서든 해내셨으니까요.”

제이르가 담담히 말했다. 그러나 그의 음성은 담담하지만은 않았다.

“지옥 같은 부작용?”

본디 과거의 나라면 그랬구나, 하고 넘겼을 일이었다. 굳이 들으려 하지 않았겠지. 그러나 이젠 달랐다. 그렇기에 물었다.

“그게 뭔데요.”

“그건…….”

제이르가 입술을 뻐끔거렸다. 그는 말을 하려다 말고 멈칫했다.

“하아, 각하께 들으시지요. 제가 말씀드릴 것은 아니니.”

그렇게 말하는 제이르는 더 물어도 대답해 줄 것 같지 않은 얼굴이었다. 나는 깔끔히 포기하고서 다른 것을 물었다.

“좀 엉뚱한 질문인데, 그 구속구를 풀었다는 사람. 리케도르안과 연인은 아니죠?”

이리 묻는 내 말엔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인지 생뚱맞은 질문임에도 제이르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대꾸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이건 무슨 질문이냐는, 어처구니없음이 보이는 낯에 나는 슬쩍 미소로 무마했다.

아이고, 역시나.

리케도르안의 상태를 보고 짐작했지만. 원작의 두 주인공 관계는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른 관계가 된 모양이다. 이 남자가 한 번에 둘을 마음에 품을 성격이라고는 생각 안 했으니까.

그러니까 그 ‘동반자’가 그래.

어, 음…….

나는 뺨을 쓸어내렸다.

‘소거법으로 나란 소리인데.’

그러나 곧 헛웃음이 새어 나간다. 소거법까지 갈 게 있나. 이미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이 될 리가 없지.

‘후보자도 선택지도 나밖에 없잖아…….’

나는 복잡함을 가득 담아 미소를 지었다. 이 대책 없는 짐승을 어쩌면 좋을까? 아무 생각 없이 색색 잠든 이 커다란 똥강아지 짐승의 코를 퉁 때리고 싶었다.

-흐암, 인간? 무슨 일이냐. 감정이 강렬한데. 냥…….

‘일어났어?’

때마침 내 안에 잠들어 있던 푸딩이 일어났는지 말을 건네왔다.

‘너, 잘 일어났다. 한 대만 맞자.’

-냥? 무, 무슨 말이냐?

곤히 자는 사람을 때릴 수는 없잖아. 나는 한차례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고서야 생각을 정리했다. 후, 내게서 차분한 날숨이 새어 나왔다.

“그럼 말이에요, 제이르 씨.”

한 가지 더 확인해볼 게 있다. 아니, 이건 한 가지 가정이었다.

“더는 왈왈 짓지는 않는단 얘기죠?”

지금 맥락상 리케도르안이 더는 개처럼 짖는 건 아닌 것 같고.

“예, 아마도요. 그런 모습은 몇 년간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건 다행이네요.”

하기야 그랬다면 공식 석상에 나가거나 활동도 어려웠겠지. 그런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두 가지란 말인데.’

결국 지금 나눠진 건 이성이 있느냐, 이성 없이 본능만 남은 짐승처럼 구느냐 이건 것 같다. 조금 전 내게 닿는 게 세상 전부인 양 굴었던 그의 모습처럼.

“만약에 ‘동반자’가 다시 나타난다면 돌이킬 방법이 있나요?”

돌고 돌아 내가 그의 곁에 오지 않았던가. 숨을 잠시 참았다가 덧붙여 물었다.

“인격을 통합할 방법이요.”

“아니요.”

제이르의 대답은 너무나도 단호했다.

“기회는 이미 지나가 버렸습니다. 구속구를 푼 이상 그 방법은 쓸 수가 없더군요.”

전대 대공이 살아있을 적 헤르님에서는 리케도르안에게 구속구를 다시 채우고, ‘동반자’가 재차 푸는 방법을 제시했으나, 이미 풀어버린 구속구는 다시 채울 수도 채울 방법도 없다고 하였다.

“이제는 ‘동반자’가 나타난다고 한들……. 각하의 힘을 좀 더 안정시키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을 겁니다.”

이후 전대 대공은 죽고, 몇 년간 제이르와 헤르님 측근이 수만 가지 문서를 뒤지며 찾아낸 결론이었다 한다.

“그렇게 뭐든 뒤져보다가 찾아낸 것이 ‘푸른 장미’였던 거지요…….”

제이르가 씁쓸하게 말을 맺었다. 그러더니 그는 부드러이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했다.

“아가씨,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인데. 저희가 방법을 찾아 헤맨 건 각하가 아가씨를 찾아 헤맨 것과는 관련 없습니다.”

“네, 뭐. 리케도르안이 나를 도구로 보고 있지는 않다. 이런 말을 하고 싶으신 거죠?”

내 적나라한 말에 제이르가 움찔하더니,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

오해 안 한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거기다 의심 할만한 요소조차 그가 직접 지워버린 참이다. 나는 무심히 잠든 리케도르안의 얼굴을 담았다가 고개를 들었다. 참 잘 자네. 날 베고서.

‘불편해 보이는데 말이지.’

어쨌거나 대화의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방법은 없는 건가요?”

“……수많은 고민과 실패 끝에 하나 찾아낸 것이 있습니다.”

오, 방법이 없진 않다. 나는 귀를 기울였다.

“돌고 돌아 본론입니다만,”

제이르는 진지한 낯으로 나를 응시했다. 지금까지가 그냥 커피였다면 마치 이제부터는 ‘T’를 붙여야 할 것 같은 얼굴로.

저희가, 하고 운을 떼었다.

“고심 끝에 돌아온 것이 ‘푸른 장미’의 존재였습니다. 한데 그 또한 아가씨였던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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