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45/87)

***

며칠이 흘렀다. 리케도르안은 하루에 한 번씩은 꼭 방에 머물렀다.

“…….”

하나 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단 점이었다. 그래도 초반에는 필요한 말 몇 마디는 했다면, 최근 들어서는 단호한 침묵. 정말 한마디를 하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까지 말을 하지 않겠다, 의지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나? 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사실 나는 리케도르안이 몸 건강하고 아프지 않고 뭐. 잘 먹고 지내면 충분했으니까.

무관심한 것이 아니라 미안한 게 있는 만큼 크게 바라는 게 없었단 거다. 그의 심기와 멘탈 쪽은 괜찮지 않아 보였지만.

우스운 것이, 그는 이러면서도 내가 바라는 것을 꼬박꼬박 들어준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서, 이틀 전. 뭔가 바라는 게 있냐는 말에.

<나 죄수복이 입고 싶어.>

……하는 내 엉뚱한 요청에도 찡그릴 뿐 순순히 들어 주었던 것이다.

물론 세상 이상한 표정을 간간이 짓기는 했지만. 죄수복은 아니지만 죄수복과 비슷한 편안한 옷을 입게 되었으니 만족스러웠다.

어찌나 부드러운지 도뮬릿 저택에서 입었던 최고급 잠옷 치마 못지않았다.

그곳에서 입었던 건 불며 날아갈까, 걸리면 찢어질까 조심스러웠지만 이건 그럴 일이 없어서 좋았다.

<막 만들었는데.>

막 만들었다는 대답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벌써 나흘이 지났지만 리케도르안과의 관계는 이처럼 지지부진했다. 소 닭 보듯 닭 소 보듯 했단 얘기다.

물론 나 말고 리케도르안쪽이.

처음에는 눈치를 보던 나도 슬슬 리케도르안을 신경 쓰지 않고 이것저것 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저 멍하니 하늘만 봤다. 익숙한 행동이었다. 다음엔 방 구경을 했다.

-인간, 신기하다, 냥! 창살이 없다, 냥!

‘도뮬릿 저택에도 없는 곳 있었잖아.’

-거긴 인간, 네 방이 아니었잖냐 냥.

‘……그러네?’

창살이 없는 창문이 신기했다.

하도 많이 봐서인가. 공기처럼 익숙한 것이 없어지고, 변화한 환경이 신기했다.

<넓기도 넓고.>

방을 살펴보면 쾌적했다. 호화롭지 않은 건 아니지만 화려함만을 가득 채우던 도뮬릿의 방과는 다른 느낌이랄지. 사실 그곳은, 호화로우나 ‘황금’으로 된 수감실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밖을 실컷 구경한 뒤에 다음으로는 옷을 갈아입었다. 다음에는 소파에 앉아 책을 읽었다.

이상하게 밖으로 나가고 돌아다니고 싶지 않았다.

익숙해져서일까.

한편으로는 도뮬릿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의 의지나 기분과 상관없이 드는 생각이었다.

마치 그래야 하는 것처럼.

‘신기하기도 하지.’

그러나 이런 생각들은 내 느긋한 귀찮음을 이기지 못했다.

등 따시고 배만 부르면 되는 안락한 라이프 추구는 여기서도 비슷했다. 암. 내 ‘복잡한 세상 편하게 살자’ 신조가 톡톡히 발휘될 수 있는 훌륭한 환경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오늘, 누군가 문을 열고 낯선 인물이 등장했다.

“안녕하세요, 아가씨.”

등장까지는 낯설다고 생각했던 인물은 익숙한 얼굴이었다.

제이르였다.

“제이르?”

“예.”

그는 기다란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저것 또한 낯설지 않다. 마쉬멜도 저런 걸 입고 있었으니까. 다만 우리 조그만 흑마법사님은 좀 더 귀엽고 앙증맞고, 새까맸지.

“오랜만입니다.”

정든 조그만 마법사님을 지워내며 제이르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이젠, 도뮬릿 영애라 불러야 하나요?”

“상관은 없지만…….”

나는 흘끗 시선을 옮겼다. 제이르 뒤로 리케도르안이 들어왔다. 리케도르안은 팔짱을 낀 채 언제나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등을 기댈 뿐이었다.

“……그냥 부르던 대로 불러주세요. 그게 편하고 좋겠어요.”

제이르가 그러시다면야, 하고 장난스레 웃으며 허리를 까딱 조아렸다. 동작은 꽤 우아했으나 동시에 광대가 관객에게 하듯 익살스러움이 묻어나왔다.

“이렇게 만날 줄이야 어찌 알았겠습니까? 저는 꼼짝없이 그때가 마지막일 줄 알았는데요.”

“은근히 말이 많은 건 여전하시네요.”

“저희 꽤 친하지 않았습니까?”

“없던 말을 지어내시는 것도 여전하시고.”

“섭섭합니다.”

“그래요?”

그가 말한 시기는 아마 4년 전 감방에서의 시기를 말할 터 내겐 오래 전에 지나간 시간이었다. 심드렁하게 응답하는데도 제이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정식으로 저를 소개해야겠군요. 헤르님 대공님의 보좌 겸 마법사 제이르입니다.”

“이아나예요.”

“하하하, 아가씨 또한 여전하시네요.”

그가 손을 휘저을 때마다 긴 로브 자락이 펄럭였다.

이쪽은 원작대로 남자주인공의 가장 충실한 부하 겸 유능한 마법사로 자리를 차지한 모양이다. 본래 리케도르안의 오른팔 격이었으니 참으로 잘된 일이었다.

“말씀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나는 제이르 뒤로 말없이 팔짱을 낀 리케도르안에게 자꾸 시선이 가는 것을 멈추며, 제이르에게 집중하려 했다.

“말이라니요?”

물론 쉽진 않았지만, 예의가 아니다 싶어 시선을 억지로 고정했을 때였다.

“예? 이미 아시지 않습니까?”

그 순간이었다. 제이르의 한참 뒤쪽, 등을 기대고 있던 리케도르안이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그보다 뒤를 보지 못한 제이르가 빨랐다.

“아가씨가, 파란 장미의 후계자시라면서요?”

멈칫. 나는 그대로 동작을 멈췄다. 제이르의 말에 관심 없어, 무심하게 쥐었다가 펴던 손끝마저도. 잠시동안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제이르가 이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이상하네.

‘이아나’가 파란 장미다.

난 이게 아주 비밀스러운 일일 거라 생각했다.

하나 나는 바보가 아니었고, 그렇기에 빠른 시간 내에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본래 샹들리에 밑 그림자는 보지 못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등잔 밑이 어둡단 이야길 하면서 웃는 제이르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정말 놀랐습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눈동자를 굴렸다. 당신도 내 시선이 향하는 것을 알고 있겠지.

제이르가 아는 것을, 리케도르안이 모를 리 없다. 마침내 리케도르안과 허공에서 눈이 마주쳤다.

‘아…… 이거 때문에 날 데려온 건가?’

나는 망설이지 않고 생각을 얼굴에 드러냈을 것이다. 나를 보던 그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이곳에 오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우습게도 하필 이 생각을 하는 순간에 왜 저런 표정을 보여주나 싶었다. 그렇구나, 하고 생각해 버릴 것 같잖아.

“아가씨, 아가씨?”

그나 제이르가 어떻게 이 사실은 알았는지 궁금했지만, 실상은 나만 빼고 모두가 알고 있던 사실인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은가.

‘이아나’는 원래 이 시점엔 죽은 인물이다. 책 속에서든 현실에서든 없는 인물. 원작에서는 그녀가 죽은 뒤에 밝혀졌을지도 모르지. 왜 추측이냐면 책에 나오지 않은 장면인가 싶어서다. 거기다 두 번째 이유로 나는 줄곧 갇혀 있었다.

무지란 새장 속에 갇힌 새, 그게 나였지. 무심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시선을 돌리면, 염려스러운 표정을 한 제이르가 있었다.

“……네, 뭐.”

내가 오해한 걸까.

아니다. 연회날 밤 리케도르안의 얼굴은 진심이었다. 이를 알아보지 못할 만큼 바보는 아니다. 다만 약속을 못 지킨 내가 원망스럽던 것 말고도 그에게 이유가 더 있었나 싶긴 했다.

만약 그런 거라면 조금은 섭섭할 것 같은데. 나라도.

“혹시 푸른 장미 질문에 기분이 상하셨습니까? 무례했다면 사과를…….”

“아니요.”

나는 시선을 내리며 뜻을 나지막하게 흘려냈다. 심장께에 남아있던 미련이 함께 흘러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 미련이었다.

***

“상관없어요.”

리케도르안은 아니라고 하려던 입술을 멈췄다. 그가 입술을 멈춘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어떤 이유에서 날 데려왔든.”

아니라고 대답해야 했다. 그녀가 무언가 오해를 한 것 같은데.

그건 오해고, 사실과는 다르며 전혀 그렇지 않노라고. 이야기해야 했다.

“지금 여기 있는 마당에, 그다지 들을 필요 없는 이야긴 것 같으니까요.”

이아나의 자색 눈동자로 긴 속눈썹이 나붓이 내려앉았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평온한 낯이다.

“안 그래요?”

희고 창백한 낯에 서린 심드렁하고도 무심하던 것. 그것들이 그를 미치게 했다.

리케도르안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는 모를 것이다. 그녀가 실로 얼마나 리케도르안을 미치게 하는지!

리케도르안에게는 기민한 육감이 있었다. 힘을 얻는 순간부터 날카롭게 벼뤄진 제 6의 감각이었다.

그의 감은 틀리는 법이 없었다. 그러니 제이르의 말을 듣는 순간 이아나는 무언가 오해를 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자신의 정체 때문에 데려왔다던가, 하는 터무니없는 것들을. 웃기지도 않는 추측이었다.

푸른 장미라 데려왔다?

하, 가당치 않았다.

그는 자신했다. 이아나가 제국의 가장 낮은 곳 오염수로 가득한 로펠 거리 빈민가에 있는 노예였더라도, 한번 들어가면 자유는 절대 얻을 수 없는 최악의 노예민 식민지인 아스콰르 탄광에 있었더라도. 설사 최악의 범죄 도시 칸탈라에 있었더라도.

세상을 뒤져서라도 찾아냈으리라. 고귀하든 가장 낮은 자리에 있든. 리케도르안은 어떡해서든 그녀를 데려왔을 것이다. 그에겐 이미 이아나가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었다.

그녀는 그저 그녀일 때.

그저 그녀인 것만으로 의미 있는 존재였으니까.

“흐응, 내가 꽤나 의미 있는 존재였나 보네요.”

하나 리케도르안이 아니라고 말하려던 행동을 끝내 멈춘 것은.

“신기하네.”

저 무심해 보이는 낯이 아무렇지도 않아 보여서. 이전부터 그는 모든 것을 멀리 보는 듯한 저 눈에 담기고 싶어 언제나 노력했다.

<내가 어디 있는 줄 알고.>

4년 전에도 3년 전에도. 그리고 얼마 전 쉬르멜라에서도.

하나 결과는 언제나 같았다.

무심해 보이는 낯.

<말했잖아요, 대공님.>

아무것도 관심 없다는 눈동자.

<나는 당신과 약속을 지킬 마음이 없었어요.>

끝내 저를 뿌리치던 손까지.

리케도르안의 손이 주먹을 쥐었다.

나쁜 짓을 하고 싶다.

아니, 네게 악인이 되고 싶다.

그리해서라도 네가 날 본다면, 차라리 네게 최악의 인간이 되고 싶다.

……끝내 애원해서 얻을 수 없는 마음이라면.

그랬는데…….

왜일까. 그는 덜컥 겁이 났다. 이래도 되는 걸까? 밉다고 해서. 원망한다고 해서. 그에게 그런 자격이 있는가? 이러다 정말로 자신을 싫어한다면? 그의 손이 얼굴을 부여잡았다.

리케도르안의 안에서 수없이 많은 생각이 회오리쳤다. 가늠할 수 없는 것들이 파도처럼 마구 범람해 어지럽혔다.

<이 쓸모없는, 개새끼.>

리케도르안의 어깨가 발작하듯 움찔했다.

시야로 새카만 방, 정신없이 번쩍이는 별이 스쳐 지나간다. 하늘에 뜬 별은 아니었다. 그 별은 그를 고통스럽게 하지 않았으니까.

그의 부친이 살아있을 때, 고통이 고통인 줄도 몰랐던 때의 이야기였다.

리케도르안은 그대로 발걸음을 멈췄다.

“그럼, 아가씨. 푹 쉬십시오. 부족함 없이 모시겠습니다.”

이미 제이르가 모든 설명을 끝낸 참이었다. 헤르님이 푸른 장미를 오랫동안 찾아왔던 것까지.

리케도르안은 말리지 않았다. 그에겐 몇 번이고 제이르의 입을 멈출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는 그저 이아나가 여전히 변화 없는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에 집중했다.

그리고 끝내 아무렇지 않은 낯을 보며 그는 한 차례 더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복도를 걷는 길, 제이르는 연신 그의 눈치를 보았다. 오래 함께한 이답게 리케도르안의 변화에 민감했다.

리케도르안은 속으로 조소했다.

이처럼 나는 눈에 보일 듯 구는데도, 왜 너는 보지 못하는지.

“저, 각하. 제가 너무 서두른 겁니까?”

리케도르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푸른 장미의 행방은 오래전부터 유명했다. 어딘가에 존재해서 유명한 것이 아닌 ‘존재하지 않기에’ 유명했다.

잠적한,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린 장미.

그러나 리케도르안을 비롯한 ‘장미’들이 알고 있는 것은 달랐다. 아니, 장미 가문의 가주가 되는 순간, 알게 되는 사실이 있다. 이는 바로 오직 흑장미만이 ‘푸른 장미’의 행방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리케도르안 또한 자격을 갖춰 대공 위에 오르며 알게 된 것으로, 현재 벨테이즈 후작과 도망 중인 흰 장미, 로제니아의 가주도 알 터.

그리고 그 남자, 도뮬릿 공작은 당연히 알고 있었으리라.

‘아니, 그는 이미 소유하고 있었지.’

헤르님은 오랜 조사로 아주 어렵게 푸른 장미의 명맥이 유지되고 있으며, 생존한 푸른 장미가 엄중히 보호받고 있다는 것까지 알아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알 수 없었다.

고심과 고생 끝에 알아낸 한 가지.

전 도뮬릿 공작 소생 자식은 아들 단 한 명이란 것, 그리고 그럼에도 딸이 있다는 점이었다.

푸른 장미 아닐까요?

조심스러운 추론을 시작으로 근거와 독기를 가지고 조사에 들어가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때 그는 그저 체이서 루브 도뮬릿이란 작자를, 도뮬릿을 무너트리고 싶었다. 또한 자꾸만 생각나는 감옥에서의 가녀린 여인을 잊고 집중할 구석이 필요하기도 했다.

“각하.”

누군가 조용히 리케도르안을 불렀다.

리케도르안의 눈앞에 진한 암녹색 머리칼을 가진 사내가 있었다.

그는 헤르님의 공작원을 담당하는 부하 쉐로였다.

“드디어 알아냈습니다.”

들에서 거칠게 굴러온 사냥개같이 무뚝뚝한 얼굴에 보기 드문 희열이 어려 있었다.

“각하께서 가장 원하시던 것입니다.”

글쎄, 그가 원하는 것이라.

이 순간 단 하나밖에 없을 터인데.

리케도르안은 자조했다. 스쳐 지나가는 초연하고도 심드렁한 낯, 분홍빛 머리칼, 이아나의 모습이다. 스스로도 꽤 중증이란 건 알고 있었다.

하나 어찌하겠나? 깨닫기도 전에 앓아버린 열병인 것을.

리케도르안은 차갑게 서류를 받아 훑었다. 평소보다 무심하고 무감각한 낯이었다.

하나, 서류를 읽을수록 그의 허리가 곧게 펴졌다. 리케도르안의 눈동자가 더는 커질 수 없을 만큼 커다랗게 뜨였다.

“……이게 사실이야?”

“예, 드디어 밝혀진 겁니다.”

쉐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뮬릿의 감시가 얼마나 철저한지 아시지 않습니까.”

체이서 루브 도뮬릿의 철옹성은 세상 어떤 성보다도 단단했다. 그 정점을 찍은 곳이 그가 머무는 저택이었다.

그동안 들여보낸 자들이 족족 죽거나 행방불명되었다. 그러기를 1여 년, 헤르님은 방법을 바꿔 들여보낸 자들에게서 연락을 받지 않는 쪽을 택했다.

“그동안 도뮬릿의 수호신이 얼마나 철저했습니까? 도뮬릿 공작 본인의 성정이야 말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지요.”

연락을 취하려는 순간, 도뮬릿 공작의 수호신에게 잔인하게 죽임을 당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 간단한 사실 또한 수 없는 희생으로 알게된 것이다.

쉐로는 보고서에 적혀 있는 내용 외에도 기입되지 않은 것을 보고했다.

“2년이 지나서야 알게 된 겁니다. 하, 대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은 건지. 잠입한 공작원이 무사히 돌아왔습니…… 각하?”

하나 리케도르안은 모두 듣지 않았다. 아니, 다 듣지도 않고 등을 돌렸다. 걸음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장미의 힘을 가진 그의 걸음은 보통 사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다.

그는 순식간에 왔던 복도를 가로질러 갔다.

걸음을 디딜수록 숨이 거칠어졌다. 그는 붉은 장미의 축복을 받아 지치지 않는 체질을 타고났다.

-이아나 로즈 도뮬릿 관련 보고.

그러니 이 숨소리는 오로지 그가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다.

-감금.

<안녕, 이아나. 지금부터 널 납치할 거야.>

이상하게도 이리 빨리 달리건만, 속도는 느리게만 느껴졌다.

-발목에 족쇄.

<……묶지 않아?>

그는 물에 빠진 듯 숨이 턱턱 막혔다.

-족쇄와 이어진 쇠사슬을 차고,

<나 인질이잖아. 그럼 묶어둬야 하는 거 아닌가?>

3년간 의아할 정도로 변하지 않은 그녀의 성정은, 사실 정말로 변하지 않았던 걸까?

-한시도 저택을 벗어날 수 없었음.

<묶을 거라면 발목이 좋겠어.>

리케도르안은 이아나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똑똑했다. 머리가 좋았다.

그녀와 함께 있던 시간에도 상식에 무지했을 뿐 짐승 같은 감을 갖추고 있었다.

-흑장미의 감시가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지독해 보임.

이 순간 짤막하게 느끼던 기묘한 위화감이 하나의 퍼즐을 완성했다.

-4년간 저택을 벗어난 숫자.

-0회.

벌컥. 그는 문을 열었다.

“하아, 하아…….”

그리 거세게 뛰지도 않은 것 같은데. 아니다. 세상에 태어나 가장 애타게 달려보았다.

다름 아닌 한 사람을 위해서.

고요한 방 안엔 이아나가 그림같이 앉아 있었다.

-이외. 수시로 있던 정적의 암살 시도.

<독은 없는 거지?>

<뭐?>

<농담이야.>

갈망하듯 하늘을 바라보던 얼굴, 감옥에서는 볼 수 없던 건조한 낯빛. 왜 이제야 보였나? 왜 이제야 알았나.

그는 그녀를 보며 언제나 사색을 즐긴다고 여겼다. 이곳에 와서 자신을 봐주지 않는다 여겼다.

-저택에서 할 수 있었던 것이 많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

<나 죄수복이 입고 싶어.>

바라는 것이 있냐는 질문에 여전히 엉뚱한 사람이라 여겼다.

하나 만약에…….

바라는 것이 좁디좁던 감방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면. 아니, 만약 철창 너머 자유로이 웃고 있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었던 거라면…….

나는 무슨 짓을 한 건가?

리케도르안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흐려졌다.

<나를 안 보니까.>

그는 체이서 루브 도뮬릿이 싫었다. 도저히 좋아할 수 없을 정도로 환멸하고 증오했다.

<미워하게라도 해야지.>

한데 그가 체이서와 다를 것이 무에 있나?

<안 그래?>

달빛 아래 저 가녀린 손을 잡았던 그의 손은, 웃음은.

잘못과 미움을 방패 삼아 그가 그녀에게 했던 짓은?

자신이 추악하게 느껴졌다.

“……리케도르안?”

쾅. 그의 힘을 이기지 못한 문이 몇 번이고 벽을 두드렸다.

그때였다. 창문을 바라보던 이아나의 얼굴이 무심히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그의 이름을 부르고도 놀란 것인지 놀란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납치.

리케도르안은 그 순간 깨달았다.

사실은.

네가 나를 싫어하지 않기를 바랐어.

“당신……. 왜 그래?”

너에게 나쁜 인간으로 남길 바란 게 아니야.

나는 그저.

“……미안해요.”

당신이 보고 싶었어.

“미안해……. 미안…….”

남자의 손이 그의 얼굴을 덮고, 커다란 몸이 알맹이 잃은 허물처럼 무너져 내렸다.

“리케도르안?”

자박자박, 달려오는 이아나의 자그만 발소리가, 너무나 가벼워서. 그는 밀려오는 수많은 것을 참지 못했다.

자신은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왜 그래, 진짜 어디 아파요? 응? 많이 아파?”

그녀는 아픈 이에게 몹시도 다정했다. 4년 전, 빛조차 들지 않은 지하에 네가 오면 이것이 빛이고 봄이며, 낮인가 싶었다.

평생 그런 따듯함을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해서.

잡고 싶었다.

그는 스스로가 지독하게 혐오스러워졌다.

하나 그에게 뻗어지는 손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구차하고 구질구질하게라도 놓고 싶지 않은 손이었다.

이아나는 순식간에 저를 덮친 몸에도 가만히 있어 주었다. 4년 전 약속하던 날처럼.

“내가…… 잘못했어.”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정녕 미움과 증오라도 받는 수밖에 없었나.

아니다.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툭 떨어졌다.

“나, 버리지 마.”

애원밖에는 길이 없었던 거다.

“제발…….”

빌고 또 빌면서.

4장. 잘하고 싶어요

머뭇거리던 내 손이 리케도르안의 어깨를 덮었다.

‘어떡하지.’

난 위로엔 영 소질이 없는데.

정확히 무슨 일 때문에 이리 서럽게 가지 말라며 우는지 몰라도. 입조차 안 떼고 냉정하게 나갔던 이가 돌아올 만큼 심각한 일이란 건 알겠다. 스스로 이건 햇살같이 다정한 손이다. 약손이다. 속으로 세뇌하듯 되뇌고는 그의 어깨를 어색하게 두드렸다.

책 속의 그는 눈물이 없던 사람이었다. 언제나 정의롭고 은빛 검 끝은 옳은 것만을 향했다. 이런 남자를 보면서 참으로 신기했었다.

이 남자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으며 결코 순탄치 않았다. 그럼에도 곧게 자란 성정이 신기하기도 했고, 안타깝기도 했다. 비록 19금에 피폐함이 섞인 소설이라도 주인공의 성정이 드러나지 않은 건 아니었으니까.

가끔은 정의롭기 위해 억지로라도 노력하는 것처럼도 느껴졌다. 절벽 위에 선 위태로이 선 맹수 같기도 했다.

하나 그랬던 사람이 형편없이 무너진 채 내 품에 고스란히 안겨 있다. 영락없는 싸움에 져 쫓겨난 듯 엉망인 몰골로.

어깨가 낮게 들썩이는 걸로 보아선…… 물을 때가 아닌 듯하다. 그렇게 이유를 묻는 대신 조용히 위로를 건네는 쪽을 택했다. 서투를지라도 전달되기를. 부디 어색함은 얼른 지워지고, 온화하고 다정하게 느껴지길 바라며 오래도록.

아주 오래도록.

어깨가 축축하게 푹 젖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옷이야 갈아입으면 되지 뭐.

리케도르안은 내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떼어낼 줄 몰랐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실컷 울고 일어나란 마음이었다, 나도.

‘그보다…… 엄청 크네.’

그의 떨림이 살짝 잦아든 틈을 타 손을 벌리고, 어깨 길이를 재봤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4년 전에 잠시 마주했던 그의 성장 버전과 비교했을 때 기억하는 모습보다 더 큰 것 같다.

‘더는 그때처럼 안기 힘들겠네.’

그래서 내게 파고든 건 리케도르안이지만 그가 안은 건지, 내가 파묻힌 건지 모를 구도가 되어버렸다.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던 것 같은데…….

그리 생각할 즈음, 리케도르안이 고개를 들었다.

무심히 그의 얼굴을 향하던 나는 그대로 멈칫했다.

“……이아나…….”

짓무른 얼굴은 눈물로 엉망이었다. 흐트러진 은빛 머리칼 아래 붉어진 귀와 뺨, 눈 밑까지…….

숨 막히도록 아찔하고 선정적이었다.

거기다 얌전히 매고 있던 목장식과 단추는 어디로 간 건지 뜯어져 패인 셔츠까지. 항상 빈틈없이 깔끔하고 성스럽기까지 하던 청초한 낯이 이토록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으니.

나는 숨을 꼴깍 삼켰다.

이럴 때가 아닌데, 생각하면서도 괜스레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때, 리케도르안이 조심스럽게 내 손을 잡았다. 그것도 4년 전 감방에서가 떠오를 만큼 조심스럽고 미약하며 아프지 않게. 그러고는 그 손을 눈물로 촉촉한 제 뺨에 얹었다.

“제발, 나 버리지 마요.”

손끝에 물기가 고스란히 괴였다. 파르르 떨리던 속눈썹이 느리게 뜨였다. 그 사이로 시리도록 투명한 눈동자가 드러났다.

“……응?”

……이제 와 갑자기 존댓말 하는 건. 작정했단 소리인가. 엉뚱한 소리로라도 이 긴장을 쫓고 싶었다.

아니면 손끝이 떨릴 것 같았으니까.

“……갑자기 왜 말을 높이는 건데요?”

“처음부터 그랬으니까.”

숨 막히고 야릇한 공기가 내 목을 꼿꼿하게 잡아당기는 것만 같았다.

“계속 이러고 싶었어.”

이러고 싶었다고?

“……용서하지 말랬잖아.”

그가 나지막하게 털어놓았다.

“날 아프게 만드는 사람을.”

나는 입을 다물었다.

“정의로운 것도 좋지만, 그게 어려울 땐 차라리 악당이 되어도 좋다고 해서, 줄곧 그렇게 행해왔어.”

네 말대로. 하고 생략된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이별은 잊고, 좋은 기억만을 남겨달라는 말에 너와의 기억만 수천 번 곱씹었어.”

너의 모든 말을 성서처럼 지켰노라고.

“…….”

“네가 약속을 지키지 않은 날에도. 그것만을 생각하고 곱씹었어, 수천 번을. 그래도 나는 네가 원망스러웠어.”

그의 목소리가 천천히 낮아졌다.

“하지만 이아나……. 너만은 미워할 수 없는 것 같아.”

목 안쪽을 거칠게 긁는 듯 애처로운 소리였다.

내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구나. 4년이나 지난 말을.

내가 쏜 화살이 내게로 돌아오는 기분은 오묘하고도 난감하며, 이상한 설렘을 불러왔다.

“이아나, 제발.”

한 손으로 내 손을 잡은 그가 한 손에 감싸 쥐고는 다시 내 품에 파고들었다.

“떠나지 마…….”

묵직한 건 어깨인데, 심장에 돌을 얹은 것처럼 느껴졌다. 시간이 흘러서 이토록 요망해진 이를 어쩌면 좋은지.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나는 이 순간 알아차렸다.

이건 보류해왔던 선택의 순간이란 걸.

-대답을…… 못 하는 거야? 아니면.

선택해야 할 때였다

-대답, 안 하는 걸까.

체이서에게 돌아가느냐.

혹은 리케도르안에게 남느냐.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아니, 자연스럽게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래.”

항상 마음이 가는 대로 해왔다. 감방에서도. 족쇄를 찬 도뮬릿 저택에서마저도.

“여기 있을게.”

동시에 머리 한구석에서 도뮬릿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의지와는 상관없이 강하게 들었지만, 무시했다.

적어도 내 의지로 있고 싶어진 첫 장소였다.

“정말?”

“그래.”

고개를 들어,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을 한 그에게 ‘내가 언제 약속 지키지 않은 적 있냐…….’ 하고 말하려다가.

멈칫했다.

‘아. 안 지켰지, 나.’

스스로의 양심 없음을 짧게 반성했다. 침울해하진 않았다. 앞으로 같은 실수를 다시 하지 않으면 되지 않겠나.

“……진짜니까 그런 얼굴 하지 말아요.”

나도 신뢰를 줄 수 없어서 미안한 마음이니까. 이렇게 덧붙이려다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가 나른한 눈으로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새삼 더는 소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품에 나를 가둔 채로.

……이상하네. 분명 그가 먼저 달려들었는데, 언제 이렇게 된 거지?

숨 막히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조금 전과는 다른 의미의 정적이었다.

“그래. 이제 곁에 있어 주는 거구나.”

그의 눈이 집요하도록 나를 담았다. 흡사 솜털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꼼꼼하게 관찰하고, 응시하면서.

“곁에…….”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울음 후에 응당 오는 권태가 섞인 미소는, 봄비 이후 피어난 물망초처럼 청초하고도 사람을 홀리듯 황홀했다.

“이아나.”

그 미소에 눈을 빼앗겨 방심하는 사이, 그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앗차’ 싶었을 때는 그의 얼굴이 가까워진 뒤였다.

“……해도 돼요?”

대공이 된, 아니, 성인이 된 모습으로 건네는 존댓말은 상상 이상의 파급력을 불러일으켰다. 이거, 묘한 상상력을 자극하잖아. 거기다 흰 셔츠 사이로 자꾸만 탄탄한 선 따위가 보이는 게…….

꿀꺽 숨이 넘어간다. 시선을 피하고 싶어도 피할 곳은 없었다.

“……내가 오해하게 말하지 말랬지.”

나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눈을 마주했다.

“이건 기억 안 나?”

“나.”

그의 말은 숫제 반말과 높임말을 오갔다. 이게 그 유명한 반존대인가 싶었다. 아, 홀리면 안 되는데.

“그러니까 해도 돼?”

아니, 그러니까. 뭐가. 물으려던 말은 그의 청초한 눈웃음에 지워졌다. 아울러 몹시도 야살스러운 웃음이었다.

“……그래. 해. 해.”

뭐든 간에 일단 해보란 말을 담은 순간.

입술로 푹신한 것이 내려왔다. 흡, 소리를 내기가 무섭게 아랫입술을 가르고 무언가 들어섰다.

눈을 뜨면 나를 바라보던 리케도르안이 느릿하게 눈을 휘었다.

네가 허락했지 않느냐는 듯.

동시에 허리로 단단한 팔이 파고들었다. 그 팔은 마치 거대한 밧줄 같았다. 어디에도 갈 수 없을 것만 같이 나를 붙들었으니까. 손을 들어 흔들리는 저 머리칼을 콱 잡아챌까 생각도 했지만, 그 생각은 곧 마구 흐려졌다.

그가 생각씩이나 하도록 두지 않았던 탓이다.

“하아….”

조급한 숨소리 섞인 소리가 귓구멍을 파고들었다. 뱀처럼 깊은 곳까지 파고든 소리에 나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리케도르안은 내가 물러나도록 두지 않았다.

입술은 떨어지지 않았다. 추격자같이 집요하게 쫓아온 입술이 다물지도 못하게 혀로 파고들어 내 안을 가득 채웠다. 오고 가는 소리란 숨소리밖에 없었다. 치열을 핥고 입천장을 가득 메우는 혀가 갈급함을 채우는 짐승의 것과 다르지 않았다.

4년의 간격을 오늘 이 시간으로 모두 채우기라도 하듯 사납게 덮쳐오는 기세를 막을 길이 없었다.

까슬까슬한 손이 옆머리를 뺨을 쓸어내렸다. 굳은살인지 우둘투둘한 감각이 예민하게 살갗에 감겼다. 오싹 소름이 돋는다. 그는 점차 내려와 파르르 떨리는 목을 그대로 감싸 안았다. 커다란 손에 감긴 내 목이 막 태어난 사슴의 것처럼 너무나 가녀리고 연약하게 느껴졌다.

“흣, 흐으…….”

긴긴 입맞춤이 이어지는 사이 숨이 모자랐다. 그마저 사막에 표류된 듯 오아시스마냥 갈구하던 리케도르안이 잠시 멈췄다. 그도 잠시 다시 움직였지만 이전과는 달랐다.

날것에 가까운 혀와 입술의 움직임이 점차 느려지더니 잠시 떨어졌던 입술이 틈을 허락했다. 잠깐이지만 물밖에 나온 사람처럼 거친 날숨을 콜록 토해냈다. 리케도르안이 움찔하더니, 머뭇거리며 입술을 쪽쪽 쪼아댔다. 그뿐 아니라 입술 옆, 턱에도 마구 키스를 남겼다. 좋아 어찌할 줄 모르는 아기 짐승 같았다.

나는 기침을 하면서도 공연히 흘러나오는 웃음을 막을 길이 없었다. 뒷목에 감겼던 손이 뱀처럼 스르륵 타고 내려와 차례로 빗장뼈와 우묵하게 파인 쇄골의 골을 간지럽혔다. 처음 만져보는 것처럼 조심스럽지만 여전히 갈급함을 품은 채로.

간지러워. 난 숨소리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가 눈을 마주했다. 푸르른 눈에 아득한 무언가가 휙 스친 것 같았다. 깊고 집요했다. 그것으로 모자라 그는 자신의 손을 덮은 내 손을 입술로 가져와 툭 건드렸다.

손끝에 닿는 말랑거리는 입술의 감촉이 나쁘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손끝에 입술을 촉 맞추다가 그대로 톡 깨물었다. 선홍빛 혀가 새어나온 것이 보인다. 몹시도 선정적이었다. 이런 와중에도 그의 시선은 한시도 내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꿀꺽 나는 숨을 삼켰다. 어느새 손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

잠시간 느슨해졌던 선이 다시 팽팽하게 당겨진 것 같았다.

그가 손을 놓기 무섭게 다시 입술이 다가왔다. 나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뜬다. 그의 다른 손이 가슴에 놓인 끈을 만지작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스르륵 당겨진 끈을 방관했다.

그가 내 허리를 잡아 번쩍 들어 올렸다.

잠시 떨어진 입술에서 쌕쌕, 숨이 새어 나왔다. 체력이 이래저래 좋아 보이는 그보다 한참 모자랐던 탓이다. 어느새 무릎을 세워 한쪽 다리에 날 앉힌 리케도르안이 아래에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윽, 소리를 내며 물러서는데, 등으로 벽이 닿았다. 맞닿은 다리로 작은 진동이 넘어왔다. 리케도르안이 작게 소리 내며 웃는 탓에 넘어온 것이었다.

“이아나.”

낮게 쉰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심장에 얼음을 와르르 쏟아 넣은 듯 짜릿함이 느껴졌다.

자세가 바뀌었다. 나는 벽에 등을 기댔고 그는 나를 덮는 듯한 자세였다. 살짝 벌어진 다리 사이로 단단한 허벅지가 파고들었다. 스친 허벅지로 단단해진 그의 분신을 느꼈다. 기억하는 것보다 더 커다랗게 느껴진다.

조금 놀랐지만 움츠러들지는 않았다. 도리어 나도 모르게 그의 허벅지를 꾹 조였다. 그러자 새하얀 이마가 구겨지는 것이, 찡그려 생긴 곡선이 무척이나 매혹적이었다. 숨을 참을 만큼.

스르륵 흘러내린 천을 느꼈다. 어느새 얇은 옷의 천이 내려가 어깨를 드러내고 있었다. 지금 가슴을 붙잡아 잡고 있지만 얇은 속옷의 선이 노골적으로 보일 터였다. 잠시 그의 시선이 흔들린 것도 같았다. 바닥을 보았다가 돌아온 그의 시선이 더욱 색정적으로 진해졌다.

“……나, 잘하고 싶은데.”

“뭐를?”

난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리케도르안은 그사이 내 손에 깍지를 조심스레 끼고는 제 상체를 안으로 기울였다.

그가 훨씬 큰 탓에 그는 몸을 꽤 숙여야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그제야 깨달은 거지만 그의 옷도 엉망이었다. 거친 몸짓에 단추가 몇 개 터져나갔다. 이는 탄탄하게 굴곡진 가슴 때문인 것 같았다. 새하얀 살결 아래에 꽉 조여진 근육의 결이 선명하게 보였다.

“알려주면 안 되나?”

눈물로 울긋불긋한 눈이 반달을 그렸다. 탄탄한 골격을 갖춘 몸이라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청초했으나 모순적으로 야릇한 얼굴이었다.

입술이 목선을 따라 촉촉, 버드 키스를 남기며 내려온다. 어느새 선명하게 드러난 가슴골 위, 아슬아슬한 곳에서 입술이 멈췄다.

“응? 알려줘요.”

붉어진 그의 얼굴은 수줍음과 농익음이 공존했다. 나는 침을 삼켰다.

뭘 알려줘. 여기서 이 뜻을 모르면 바보 되는 거 아니냐고. 말을 잇는 대신 숨을 꾹 눌러참았다. ……이거 어째, 잘 차려진 밥상 같은데. 냄새가 좋다고 냅다 달려들어도 되는 건가.

그는 사납게 달려든 것이 언제냐는 듯 얌전히 모든 손길을 멈춘 채로 허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우리 자세가 건전하느냐, 내가 손만 떼어내면 살결이 그대로 보일 터였다. 다른 손은 리케도르안이 끌어다 제 가슴에 올려놓은 뒤였다. 얇은 천 아래의 몸이 자꾸만 궁금해졌다. 위험한 호기심이다. 자고로 눈앞에 미남이 유혹하는데 장사 없댔는데. 추가 자꾸만 기울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지금 내가 보는 리케도르안은 처음 이 방에 달려왔을 때와 비교해서 웃는 모습이라거나 표정 변화가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마치 4년 전 마법으로 인해 강제로 나타났던 성장 모드로 보았던 모습처럼……. 농염하게 익은 모습에 얼굴을 붉힐 것 같다가도 기묘한 붉은 경고등이 땡땡 경종을 울렸다.

하지만 오래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리케도르안이 가슴 위에 있던 내 손을 잡고 제 입술에 비볐으니까. 이것으로 모자라 허리를 더욱 숙여 나와 눈을 마주했다. 그는 한쪽 무릎마저 접어 가슴에 멈춘 옷자락을 쥔 손등에 입을 맞췄다. 경건하지만 결코 이대로 넘어갈 수 없는 팽팽하고도 외설적인 시선을 품은 채로.

“허락해줬잖아요.”

그가 나른하게 눈을 깜빡였다.

“이아나가 알려주면 좋겠어. 알려주면 안 되나?”

눈물로 인해 붉어진 입술을 끌어올리며, 녹진한 음성과 함께.

“잘하게 될 때까지.”

……지금 이 남주님이 뭐라고 하는 거야. 나는 당황 어린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이 남자가 무얼 두고 이런 말을 했는지, 모를 리가 없다.

그만큼 그의 의지는 노골적이었다.

문제는 첫 번째.

‘오해할 것 같잖아!’

말의 내용에 오해할 여지가 많아도 매우 많았다는 점이었다. 이미 분위기에 휩쓸려 그렇고 그런 걸 성큼 진행한 뒤지만 이 뒤는 또 다른 얘기였다. 나는 입술을 뻐끔뻐끔 움직였다. 그에게 붙잡힌, 가슴 옷자락을 꾹 쥔 손을 보기도 했다.

저건 특히나 상상이 어디까지 튈지 모를 말이기도 했다. 그 증거로 내 망상은 폭주 기관차처럼 날뛰고 있었으니까.

아마 리케도르안이 내 손을 잡고 있지 않았다면, 얼굴을 마구 비볐을 거다.

그만큼 어찌할 줄 모를 기분이었다.

‘덩치는 이렇게 커져서는.’

체이서가 온갖 요망을 떨어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는데, 리케도르안에게는 그게 잘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느낌이 비슷한 것도 아니다. 둘 다 황홀한 듯 야릇하게 웃어도 감상은 전혀 달랐다.

체이서는 유혹에 타고난 사람처럼 능글맞고, 다정했으며 그 사이로 사람을 살살 녹일 듯 웃는 남자였다. 미소에 능한 만큼 그가 작정하고 흘리면 심드렁하던 나조차도 잠시 잠깐씩 시선을 빼앗기곤 했다.

하나 반면에 리케도르안은 미소에 인색했다.

이건 4년 전에도 마찬가지라, 수줍어하고 쩔쩔매는 모습은 있어도 생각보다 잘 웃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미소가 흔치 않았고, 유혹할 듯 흘리는 웃음은 더욱더 희귀했다는 거다.

심지어 얼마 전까지 내게 무척이나 차가웠지 않았던가? 그랬던만큼 대비를 이루는 모습이 더욱 아찔했다. 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고개를 돌렸다.

‘이게 더 요망해지면 다야?’

괜히 시선을 빼앗기지 않으려 속으로 투덜거려 보았다. 별 소용은 없었지만. 리케도르안은 더 입술을 앗는 대신 허공에 뜬 내 손을 잡아 입술을 묻은 채 가만히 있었다.

추측하자면 기다리는 것 같은데…….

‘하는 짓이 밥 주기 전의 푸딩이랑 똑같냐.’

푸딩이 들으면 발끈 화를 낼 이야기였지만 푸딩은 현재 내 안에서 잠들어 있었다. 아주 가끔 잠 비슷하게 조용해지곤 했는데, 이것이 인간이 잠을 자는 행위와 다를 것이 없어서 나는 잠을 잔다고 표현했다.

아퀼라와 라탄은 이러지 않았던 걸 보면, 아무래도 진짜 주인이 아닌 사람과 계약한 탓인가 싶기도 했다. 그건 그렇고 본론으로 돌아와 그가 얌전히 기다리는 모습은 정말 붉은 장미의 조그만 수호신과 다를 바가 없었다.

다른 점이라곤 저 푸른 눈이 요망하기 짝이 없다는 거라지. 나는 리케도르안의 손이 느슨해진 틈을 타 손을 빼냈다. 빠져나간 손을 턱, 그의 눈 위에 올렸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좀.”

망설임 끝에 나온 목소리는 내가 들어도 연약하고 미약했다. 그래서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리케도르안은 눈이 가려진 채로 양쪽 입술 끝만 끌어올렸다.

“어떤 시선요?”

“그렇게 웃지도 말고.”

리케도르안이 눈을 가린 내 손을 쥐고 살짝 내리더니,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럼, 좋아해 줄 거야?”

반쯤 가려진 눈을 본 순간 숨이 절로 넘어갔다. ……홀딱 벗기는 것보다 반쯤 벗기는 게 더 야하다더니 반만 걸친 시선은 더욱 진하고 농밀하게 느껴졌다.

여기가 호화로운 방이 아니었다면 감방인 줄 착각했을 거다. 리케도르안의 덩치가 한참 큰 것도 간과하고서.

‘이건 개인지 사람인지.’

여기서 나온 두 번째 문제.

뭔가 이상했다.

‘……분명 리케도르안이긴 한데.’

분명 눈앞에 있는 건 리케도르안이건만 느낌이 색달랐다는 거다. 조금 전 눈물을 뚝뚝 흘리며 가지 말라고 할 때까지는 그 차갑던 사람과 동일 인물 같았는데…… 그땐 적어도 이질적인 느낌은 들지 않았단 거다. 하나 지금 나를 올려다보는 그는 느낌이 달랐다.

굳이 같은 감상을 찾자면……. 4년 전 감방에서 마법을 걸고, 처음으로 성장한 그의 모습을 마주했을 때와 비슷했다.

아니다. 똑같다.

‘만약 그때 그대로 성장했으면.’

이런 모습일 것 같은데.

생각할 시간은 길지 않았다. 리케도르안이 내 손을 가만히 두질 않았으니까. 나는 망설이다가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일단 조금 전처럼 무턱대고 입술을 부딪치진 않았다.

‘싫지 않긴 했지만.’

그렇다고 차가운 모습이라거나 얼핏 보였던 이성이 있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체이서와 3년이나 보낸 탓에 내가 사람에게서 느끼는 감은 매우 발달한 상태였다. 어제까지 얌전히 시중을 들던 이가 독을 넣고 단검을 목에 들이밀던 환경이었으니 말이다.

“이아나.”

그가 낮은 음성으로 나를 불렀다. 그치고는 너무 낮고 쉰 음색에 나도 모르게 흠칫 어깨를 떨었다.

“나, 언제까지 기다리면 돼요?”

“……존대를 하든 말을 낮추든 둘 중의 하나만 해.”

리케도르안은 대답 대신 눈을 휘었다.

“이렇게는 안 돼?”

그의 엄지가 손바닥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이쪽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아서요.”

엄지가 멈춰 선 곳은 손목 안쪽, 쿵쿵 맥박이 뛰는 곳이었다.

“네 심장이.”

더 좋아하긴 뭘 좋아해. 나는 바싹 마른 입술을 축이며 그의 머리를 살짝 밀었다.

“알았으니까. 일단 뒤로 물러나요.”

“왜?”

“왜긴 왜야. 일어나야지. 다리 아파.”

그러자 리케도르안은 망설이면서도 순순히 물러나 주었다. 아니, 그런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몸이 붕 뜨더니 단단하면서도 따뜻한 것에 앉혀졌다. 그의 허벅지 위였다.

“여긴, 편할까?”

흐트러진 머리칼이 흔들리며 그의 푸르른 눈을 살짝 가렸다가 다시 드러냈다. 다시 한번 숨 쉬는 소리마저 느껴질 만큼 가까워졌다.

“……떨어지기 싫어요.”

나는 설레는 대신 옷자락을 쥔 채 그를 지그시 응시했다. 역시, 이상했다. 이런 게 싫은 건 아니지만 널을 뛰는 변화는 이질감만 불러일으켰다.

지금의 그는 내가 보았던 여러 모습이 공존하면서도 어우러지지 않은 느낌이었다. 숨이 차차 가까워질 즈음, 달칵. 문 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벌컥.

“각하.”

문이 열리고 나타난 제이르는 그대로 들어오려다 말고 멈칫했다. 어깨가 다 드러난 내 모습과 막 입술이 닿을 듯 말듯한 우리를 발견한 탓이겠지. 한숨을 쉬고 싶었다.

곁눈질로 본 제이르의 낯에 진동이 일었다. 보는 게 다가 아니라고 말해도 늦었을 성싶었다.

“…눈 돌려.”

“감은지 오래입니다!”

제이르가 어색하게 웃었다.

“각하…….”

지금 너무 가까워 리케도르안의 표정을 잘은 볼 수 없었지만, 웃음이 사라진 건 알겠다. 허허허, 제이르의 헛기침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어른이 되셨군요?”

그 순간 나와 리케도르안은 약속이라도 하듯 차게 식은 표정으로 제이르를 쳐다봤다. 아니, 리케도르안은 잘 안 보이니 몰라도 나는 그러했다.

한심을 담아서.

지금 뭐라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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