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44/87)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 리케도르안이 내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던 것처럼 침묵만이 묵직하게 공기를 눌렀다.

새삼 압박받지는 않았다. 이런 걸로 겁을 먹을 정도로 세월이 녹록했던 건 아닌지라. 이 문신으로 소통을 해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이 문신이 숨소리까지 전해 주는지는 몰라도 체이서 또한 문신을 통해 고요한 침묵을 느낄 것이었다.

도드라진 검은 꽃잎을 보노라면 새삼 신기한 기분이기도 했다. 이건 체이서가 내게 건 ‘보험’이었다. 언젠가 그와 거리가 떨어지면 이용할 수 있도록. 그동안 납치당할 일은 없던 터라 쓸 일이 없었지만…….

그도 이런 상황은 생각하지 못했으리라.

-이아나?

체이서의 음성이 나지막하게 이어졌다.

-……들려?

나지막하지만 초조함이 스민 것이 느껴졌다.

-대답을…… 못 하는 거야? 아니면.

잠시 끊김 뒤로 그가 다시 말했다.

-대답, 안 하는 걸까.

옆에서 푸딩이 털을 곤두세웠다. 금방이라도 하악질을 할 것 같은 태세였다. 그러나 내가 얼른 검지로 입술을 가져다 대자, 내 의지를 느꼈는지 애써 소리를 참았다.

잘했다는 듯이 푸딩을 쓰다듬고는 문신을 쓰다듬었다. 검은빛이 손바닥에 가려졌다. 이내 나는 핏줄을 아플 정도로 꾹 눌렀다.

1, 2, 3…….

수초가 지나고, 손을 들어 올리자. 어느새 빛은 꺼져 있었다.

“하아…….”

다시 원상태로 복구된 손목을 확인하고, 그제야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아이고.”

절로 곡소리가 흘러나왔다.

소파에 앉는 걸로 모자라 도뮬릿 저택에서 했듯이 그대로 늘어졌다. 어디서 자든 내 집같이 편안히. 라는 신조였기에 내 자세는 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 본래 어떤 위험한 상황이든 등 따시게 잘 자야 하는 법이다.

‘그래야 머리가 돌아가지.’

푸딩이 기다렸다는 듯 허벅지에 올라타 몸을 말고 앉았다.

-인간…….

내 허벅지에 엎드린 푸딩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날 담았다. 하얀 귀가 쫑긋쫑긋 움직였다.

-괜찮은 거냐, 냥?

늘어진 채로 피식 웃었다.

“괜찮겠냐.”

감히 대악당의 연락을 씹어먹어 주었다. 이것이 고의인지 아닌지 그는 판단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일종의 유예 시간이다.

한순간의 기지. 아니, 꼼수로 시간을 벌었지만 얼마 가지 못할 것이다. 나는 아마 선택해야 할 거다.

“이곳에 머물지, 돌아갈지.”

눈을 감았다. 애옹애옹, 고양이 모습을 한 작은 수호신님이 위로하듯 길게 울었다.

머릿속으로 인간, 너는 어찌하고 싶으냐는 어린 음성이 들려왔다.

“어쩌긴 뭘 어째.”

나는 눈을 감은 채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었다.

“납치냐 감금이냐.”

곧 나를 찾아 추적할 오빠와,

내게 애증을 품어 차가워진 리케도르안.

선택지가 뭐 이러냐. 어느 쪽도 참 곤란하다 싶어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다 눈을 떴다.

엄밀히 따지면 체이서는 납치는 안 했지만 감금했고, 리케도르안은 감금은 안 했지만 납치했고.

……이 소설 남주진이 참 환상적이네.

소리 내어 웃다 말고 웃음을 그쳤다. 나야 등 따시고 배부르면 그만이긴 한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등을 뉘인 곳이 도뮬릿이 아니란 생각을 할수록 도뮬릿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은 기분.

누가 머릿속에서 넌 돌아가야 해, 종용하는 기분이었다.

참 이상했다.

내가 그리 느끼지 않는데, 그런 느낌을 받다니…….

하나 그보다 늘어진 몸이 생각을 이겼다.

“아, 졸립다.”

내 성화 때문에 드레스는 몸을 조이지 않았다. 그 덕에 이 순간 훌륭한 잠옷이 되어주었다.

사실 난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리케도르안이 나를 붙잡아 이동하는 동안 내가 쓸 수 있는 수단이 없지는 않았단 걸.

지난 3년간 참 무수히 많은 암살 기도가 있었다. 습격은 만연하여 세기도 귀찮았다. 체이서와 마쉬멜은 나에 위험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했고, 그 결과 만에 하나 홀로 남겨졌더라도 빠져나올 구멍쯤은 내게 만들어 주었단 거다.

내 손목의 그 문신처럼.

하다못해 푸딩의 힘을 빌렸다면 그 아프지 않게 잡힌 손쯤은 너끈히 뿌리쳤을 거고.

“난.”

그리고 내가 머물고 싶은 곳은…….

“여기 있고 싶어.”

처음으로 나온 내 의사에 푸딩이 움찔했다. 그러나 나는 더는 말없이 눈을 감았다.

“……밥이나 잘 주면 좋겠네.”

나한테 화났다고 굶기진 않겠지? 그럼 푸딩이라도 잡아먹어야 하나.

-다, 들린다, 인간!

그런 끔찍한 소리를!

농을 이해 못 한 푸딩이 벌떡 일어나 펄쩍펄쩍 뛰는 통에 진지하던 분위기가 뿜뿜 뿜어지는 털과 함께 흩어진다.

자의로 택한 감금 첫날이 그렇게 흘러갔다.

***

다음 날.

달칵, 문이 열리고 조용히 들어오던 리케도르안은 소파에 늘어져 있는 나를 보고 움찔 놀랐다.

어찌 알았냐면, 차가운 얼굴도 잊고 놀란 눈이었다.

리케도르안은 천천히 나를 관찰하더니 눈을 깜빡였다. 당황스러움을 지우지 못한 채로.

“……적응 한번 참 잘하는군.”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마구잡이로 늘어진 채로 어디선가 이불 비슷한 것을 끌어와 덮고 늘어져 있었다.

정말 세상 편한 자세였다는 거다. 나는 빙긋 웃었다.

“내 주특기야, 적응력.”

어디서든 끝내주게 적응하지. 어째 말하고 보니 자랑할 거리는 아닌 것 같았지만.

뭐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런데 그건 뭐야?”

리케도르안은 손에 무언갈 잔뜩 들고 있었다. 이내 각종 쟁반과 접시를 내려놓는 모습을 보며 이번엔 내가 놀랄 차례였다.

나는 본래의 서늘한 낯으로 돌아온 그를 응시했다. 그러고는 의문을 품었다.

“먹도록.”

이걸 먹으라고?

정말이지 호화스러운 차림상이었다. 도뮬릿에서 온갖 사치와 호화에 익숙해진 나도 놀랄 만큼 많고 다양하다.

……나 여기서 죄수 아니었어?

물론 진짜 죄수는 아니긴 한데. 잔뜩 화를 내고 갈 사람이 줄 상은 아니었다.

“……여기는 대공님이 직접 배달도 해줘?”

그 말에 리케도르안이 옅게 미간을 찌푸렸다.

하나 무어라 말을 하는 내 맞은편에 앉을 뿐이었다. 그저 음식이나 먹으라는 듯이.

으음, 저렇게 앉는단 건 내가 먹는 걸 보겠다는 건가…….

“독은 없는 거지?”

“뭐?”

“농담이야.”

내겐 워낙에 익숙한 대화라, 나도 모르게 절로 나온 질문이었다. 리케도르안은 오묘한 표정이었다.

“어제부터 넌…….”

하나 그는 그리 중얼거리다가 끝내 끝까지 이어주지 않았다.

거, 사람이 제일 갑갑할 때가 하려던 말을…….

이처럼 끊어 버리는 거란 걸 모르나. 궁금했지만 묻지는 않았다.

당장 온몸으로 쓸데없는 짓 하지 마, 하고 꼬리를 치켜세운 저 대공님에게 무슨 말을 하겠나.

그저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마침 배가 고프던 참이었다. 연회에서는 긴장한 탓에 아무것도 먹지 못했으니까. 과연 당신은 알까? 당신과 마주칠까 잔뜩 긴장했던 나를.

“사실 난 네가 날 굶기기라도 할 줄 알았어.”

워낙 살벌하게, 거기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얼굴로 날 데려갔으니.

순순히 따라가면서도 걱정을 좀 했다. 밥은 잘 먹어야 하는데 하고.

“……넌 여전히 태평하고.”

“새삼스럽게.”

나는 소파에 엎드린 채로 고개만 들어 팔에 얼굴을 괴었다.

내 분홍색 머리칼이 사르르 흘러내렸다. 연회를 위해 정성껏 관리된 머리칼은 내 것이지만 그 윤기에 감탄이 나오곤 했다.

“넌,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변하길 바랐어?”

“…….”

왜일까. 이야기할수록 감방으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더는 16살 소년이 아닌 커다란 체구의 성인이 눈앞에 있음에도.

그래서일까.

“나한테 화는 풀렸어?”

나도 모르게 철창 속 그날처럼 다정하고 나긋하게, 어르듯이 물었다.

“전혀.”

리케도르안은 딱딱하게 대꾸했다. 잠시 침묵하던 그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네가 약속을 어긴 것, 잊지 않았어.”

읊조리는 목소리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얼음 파편처럼 박힌 말의 조각은 그와 나 양쪽에 생채기를 남겼다. 그 말을 하는 그의 얼굴이 결코 편안해 보이지 않았으니까. 묵직해진 음성이 가슴에 남긴 영향력은 컸다.

“네가 내 손을 뿌리친 것도.”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내가 보기도 싫다는 얼굴로, 눈을 떼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는 참으로 많은 것이 어려서 가늠하기 어려웠다.

“잊을 수 없겠지.”

그가 짓씹듯이 뱉었다.

“나는 기다렸으니까.”

하나 왜일까.

“하지만 화가 났든 나지 않았든.”

갈수록 그의 음성은 처음의 차가운 느낌보다는 당황이 어린 딱딱함처럼 느껴졌다.

“……처음부터 굶길 생각은 전혀 없었어.”

하나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얼굴을 홱 돌렸고, 몸까지 돌려버린 통에 나는 얼굴도 뺨도 볼 수 없었다. 그저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 보이는 귓등을 응시할 뿐.

아니, 마지막으로 보았던 차디찬 얼굴을 생각할 뿐이었다.

“……변했을 거라 생각했지.”

리케도르안의 서늘한 음성이 천천히 이어졌다.

“이렇게, 변함없을 줄은 모르고.”

주어가 없었으나 나를 향한 말임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살짝 보이는 저 귓등의 붉음이 내 착각일까, 아닐까를 가늠했다.

그러다 깔끔히 포기했다.

내가 언제부터 하나하나 계산해서 움직였다고. 고개 숙여 웃고는 입술을 열었다.

“어떻게?”

리케도르안의 시선이 돌아오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 변하길 바랬어, 너는?”

나는 쓰러지듯 턱을 괴던 팔을 풀어냈다. 그러고는 돌아선 그에게 미소를 돌려주었다.

전혀 달라진 얼굴을 향해서.

“바라는 대로 해줄게.”

리케도르안에게 속죄해야 할 것이 있었다. 글쎄, 그때는 ‘속죄’ 할 것이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가벼운 일이었다. 난 당신이 내게 가벼운 깃털이 될 줄 알았지. 멀어지면 훨훨 날아가 버릴. 그때의 가벼움을 후회하게 될 줄은 결코 몰랐다.

너무 쉽고 편하게 생각했던 걸까?

당신이 이토록 오래 힘들어할 줄 알았다면. 그대로 나를 단순히 원망만 하는 게 아니란 걸 알았다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텐데. 이건 이렇게 변해버린 모습을 보았다고 실망하고 서운해 하는 게 아니다. 이렇게까지 그를 변하게 한 것에 대해 안타까움과 미안함을 느꼈다.

내가 아니더라도 많은 아픔과 시련을 겪을 사람이었으니.

그때였다. 그가 벌떡 일어났다.

“방금 뭐라고 했어.”

“……어?”

“뭐든지?”

그러니까 그가 무엇을 말하든 들어줄 생각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만약 그가 도뮬릿 저택을 원하면 당장 줄 수 없지 않은가.

물론 이런 말을 하진 않겠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성큼 다가오는 건 생각지 못한 일이었는데. 우리는 이제 네모난 테이블 하나만을 사이에 둔 채 가까워져 있었다. 리케도르안은 그대로 허리를 숙였다.

“뭐든지, 해줄 건가?”

하얀 손, 3년 사이에 잔뜩 흉터가 늘어버린 손이 테이블을 짚었다. 뼈마디가 굵고 손가락이 길다. 그의 얼굴만 보아서는 쉽사리 상상할 수 없는 여전히 청초하며 성스럽기까지 한 얼굴과는 대비되는 손이었다.

“이아나.”

낮은 목소리가 나를 불렀을 때 나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정녕 뭐든 해줄 수 있냐고 물었어.”

조각처럼 우뚝 솟은 얼굴이 나를 지그시 쳐다보고 있었다.

찬 얼굴인데, 여기에다 한기가 쌩쌩 도는데…… 짙푸른 눈동자만은 푸른 불꽃처럼 일렁이는 것 같았다. 열기에 놀라 목에서 타는 갈증을 느낄 만큼.

리케도르안이 점차 가까워졌다.

챙.

접시와 접시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그의 손에 밀려 부딪힌 탓이다.

밀려나 테이블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접시, 하나 여기에 시선을 보낼 겨를은 없었다.

조금만 더 가까워지면 숨결이 느껴질 것만 같았다. 나는 밀어내지도 그렇다고 응하지도 못한 채 그를 응시했다.

그는 그저 쳐다만 볼뿐인데 공기가 진동하는 것같이 느꼈다. 실제로 내 안에서 박동이 둥둥 울리고 있다는 것도.

그가 고개를 휙 꺾었다.

느릿하게 꺾인 고개가 더욱 아래로 내려갔다. 막 닿을 것만 같던 입술을 스쳐서…….

귓바퀴에 숨이 닿았을 때, 절로 등줄기가 펴졌다. 손가락이 옷자락을 꾹 잡았다.

“식사해.”

숨소리가 거둬진 음성이 귀로 푹 파고들었다. 리케도르안은 떨어졌지만 이미 심장이 파문을 그린 뒤였다.

나는 목소리가 남긴 파문에서 아니,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식사를 하란 말이야? 식사는커녕 식도에 숨도 넘어가지 않겠다 싶었다.

쟤 나 꼬셨잖아. 꼬신 거잖아. 아니야?

‘나이가 들더니 더 요망해져서는.’

분명 4년 전에도 잠시 성인이 된 그의 모습을 보았건만 또 다른 느낌이었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그때는 이렇게 차갑지도 않았으니까.

그보다 왜 말을 굳이 귀엣말로 하는지 모를 일이다. 나는 몸을 뒤로 물린 채 가슴에 손을 얹고,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러고 보면 리케도르안은 언제나 수줍음을 타고 쑥스러워했고, 빨개지곤 했으나, 아주 가끔은 무엇이 문제냐는 듯 순진한 얼굴을 하곤 했다.

<당신은 내게, 쿠키를 줄 때 이렇게 잡아줬잖아.>

아주 대담한 행동을 하고서 말이다.

<……싫었어요?>

고개를 들면 그때 소년의 맑은 시선이 겹쳐 보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4년 후의 현재 리케도르안은 가만히 서 있었다. 기다리는 것 같았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고 자세를 바로 했다. 그리고 스푼을 들었다. 어떻게든 스푼은 들었으나 밥이 꿀떡꿀떡 넘어갈 리 없었다.

‘……부담스러워.’

-인간, 배가 안 고프냐, 냥?

‘아니, 고팠는데…….’

조금 전까지 위장을 마구 자극하던 배꼽시계가 망가졌다고 할지. 배고픔은 흰 빨래에 진 얼룩처럼 세탁된 지 오래였다.

“……왜 안 먹지?”

내가 스튜를 몇 숟갈 뜨지 못하고 놓자, 리케도르안이 말했다. 그의 눈이 미미하게 찡그려졌다.

조금 당황한 듯이.

“입맛에 맞지 않나.”

웃음이 슬쩍 나왔다. 우스웠다. 뻔히 납치해서는 인질의 입맛을 챙겨주는 납치범이 어딨어? 그건, 우리 집 미친 인간에게만 해당하리라 생각했는데. 물론 이 미친 인간은 체이서다.

“입맛에 안 맞는 건 아니야.”

오히려 맛은 아주 훌륭했다. 체이서가 대륙을 뒤져 데려왔다는 주방장의 실력에 버금갈 정도였으니.

“원래 소식해.”

거짓은 아니었다. 다만 앞쪽에 들어갈 ‘아주아주아주 가끔, 약 3년에 한 번쯤?’이란 말을 생략했을 뿐.

내 신조가 잘 먹고 잘 자는 게 최고인데, 밥을 마다할 리 없다.

심지어 체이서가 빤히 쳐다보거나 다정하지만 살벌하게 웃을 때, 무시무시한 시선 앞에서도 편히 식사했는데, 리케도르안 앞에선 되지 않았다.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리케도르안은 이젠 못마땅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굳이 입술로 이야기하진 않았으나 음식을 바라보는 시선이 딱 그거였다. 더 먹지 않고 무얼 하느냐.

‘저렇게 보니까 푸딩이랑 닮았다.’

-냥! 나는 저렇지 않다!

‘왜, 너랑 색도 똑같고. 뚱한 표정도 같네.’

-뚱한?

‘있잖아. 너 딱 삐쳤을 때 뾰-족해지는 거.’

-뭐냐, 냥? 위, 위대하신 이 몸은 삐지지 않아, 냥!

3살 수호신님이 머릿속에서 난리도 아니었다. 웅냐냐냐, 웅냐냐냐. 나는 울음소리 반, 말소리 반인 음성을 흘려버리고 시선을 들어 올렸다.

푸딩은 리케도르안에게 모습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밖으로 나오면 내가 리케도르안에게 보내버릴까 끙끙대고 있는 것 같았다. 마음이 연결되어 있다 보니 모두 느껴졌다.

이 와중에도 여전히 나를 응시하는 시선이 느껴진다. 나는 참지 못하고 천천히 말했다.

“나, 안 먹고 싶은데.”

아니, 의사를 강력하게 피력했으나 리케도르안의 얼굴엔 변화가 없었다.

“말했을 텐데. 굶기지 않을 거라고.”

오히려 이렇게 대답할 뿐. 이상한 데서 고집이 세네.

나는 짓궂게 웃었다. 그가 내려다보고 내가 올려다보는 이 구도가 감방에서와 반대란 생각이 들었던 탓이다.

“정히 먹이고 싶으면.”

그가 당장이라도 질색할 말을 골랐다. 그러고는 고개를 기울였다.

“네가 먹여주던지.”

현재 그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나 건드리지 마 소리치는 고슴도치 같았다. 어차피 여기서는 어르고 달래든 소용없을 테니. 차라리 질색해서 나가주면 고마운 일일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리케도르안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먹여?”

의도대로 되었겠거니, 생각할 때였다.

성큼 다가온 그가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그러더니 정성껏 스푼을 움직였다. 나는 놀라 그의 손에 들린 빵과 고기가 둥둥 뜬 스푼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왜 해주는 건데?

이 차가운 버전 리케도르안이 당연히 거절할 줄 알았던 말을 들어주었다. 당황스러웠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지?”

“……대공님이 이런 거 해도 돼?”

“무슨 착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전투가 치열하게 이어질 때는 내가 직접 부상병의 시중을 들어주기도 했다.”

그가 잠시 고민하다가 한마디 덧붙였다.

“……인력이 부족했으니까.”

그러니 닥치고 드시란 소리 같은데, 지금은 전투 상황도 손이 모자란 것도 아니잖아?

“그보다 왜 그렇게 보는 건지 모르겠군. 너도 곧잘 해주었던 행동 아닌가?”

“그거야…….”

너는 쇠사슬과 구속구에 꽁꽁 묶여 있었잖아. 손발도 목도. 그렇게 생각하다 말고 리케도르안과 마주한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가 애를 잘못 키웠구나.

차가운 얼굴을 했으면서 서리 같은 얼굴엔 그냥 스치면 보지 못할 빛이 어려 있었다. 4년 전 그를 안다면 알아볼 수 있을, 지금의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순진함이 어린 눈빛.

“뭐가 문제지?”

나는 헷갈렸다. 설마 얘가, 지금 뭘 모르고 하는 얘긴가? 아니, 그렇다기엔 성인이고 무려 대공이다.

나는 받아먹으면서도 찝찝했다. 리케도르안의 얼굴은 태연한데 왜 속아 넘어가는 기분이지? 연기 좀 하는 악당과 3년을 함께 했다. 웬만한 가식은 알아볼 수 있다 자신했다.

“이러고 있으니 꼭 감방에서 같네…….”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말에 스푼이 멈췄다.

무려 시중씩이나 들어주던 리케도르안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물먹은 백합처럼 청초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다. 그래, 장미보다는 백합이나 물망초가 어울릴 것 같은.

“그때를 기억한다고?”

“왜 기억 못 하겠어.”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닌데. 오히려 지금도 눈감으면 가끔 생각나곤 했다. 사기꾼이지만 유쾌한 남작 아저씨와 다정했던 샐리. 나름 친절했지만 계산적이던 간수들…….

분명 갇혀 있었지만 자유롭던 시간을. 늘 이렇게 떠올리곤 했다.

“너랑 처음 만났잖아.”

그리고 리케도르안을 만난 인상적인 첫 만남도 잊을 수 없지. 그러고 보니, 말 못하는 짐승으로 변하던 건 이제 괜찮은가?

“근데, 당신…… 이전에 짐승이 되던 건 괜찮은 거야?”

리케도르안이 멈칫했다.

“……그건 왜 묻는 거지?”

“그야. 걱정되니까……?”

나는 눈을 끔뻑였다. 대공씩이나 된 리케도르안이 멍멍, 왈왈 짖으면 안 되잖아?

물론 원작에서 여주인공을 만났을 때는 짐승 모드에서도 말을 하는 모습, 즉 야성적인 모습에 그쳤었지만.

원작이 어찌 바뀌어 있을지 모르는 거니까. 더 물어보려 했다.

“넌 항상 그런 식이지.”

갑자기 튀어나온 말에 의아함이 들었다. 그러나 리케도르안의 낯을 바라본 순간 더는 말할 수 없었다. 유려한 낯이 화를 참는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이윽고 스푼이 접시 위에 놓였다.

“……모든 걸 다 줄 듯하면서.”

그가 고개를 숙여 제 얼굴을 문질렀다.

“또 헷갈리게 하지.”

그가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우리… 대화 잘 하는 것 같았는데? 얼른 대화를 되짚었다. 어디서 문제가 생긴 거지? 그는 내게 복합적인 감정을 품었고, 이것은 흡사 조울증과도 같아서 끓어오르는 불과 물을 오가게 한 건 아닌가 싶었다.

하나 정정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리케도르안이 일어나서 문으로 다가갔기 때문이었다.

“……저녁…….”

저녁…… 하고, 무언갈 말하려더니 입술을 달싹이고는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문을 열고 나가버렸으니까.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나는 문과 남겨진 음식을 한 번씩 눈에 담았다.

음식에서 모락모락 김이 난다. 채 식지 않은 시간이었다.

“흠,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좀 모르겠다.”

내 중얼거림에 화답하듯 눈앞에 조그만 고양이가 나타났다. 푸딩이 꼬리를 살랑 흔들며 내 다리에 머리를 비볐다.

-인간은 어렵다, 냥.

어린아이 목소리와는 어울리지 않은 꽤 진지한 어조였다.

-하지만 그 후계자 말이다. 이 몸은 후계자가 어떤 기분인지 알 것 같다, 냥.

“어떤 기분인데?”

오, 이 3살 수호신님이 그런 복합적인 감정을 안단 말이야? 나는 작게 감탄했다. 하나 푸딩은 대답 대신 나를 삐쭉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인간, 네가 날 멋대로 보내 버릴 때의 기분 아니겠느냐, 냥!

냐냐냐냥, 냐냥, 애옹애옹!

장렬하고도 긴 울음소리 및 잔소리에 난 딱 한 마디만 던져주었다.

“너도 보내버린다?”

-시, 싫다, 냥!

푸딩이 고개를 가로젓고는 내 품에 마구 파고들었다. 푸핫, 웃음이 터졌다.

“착각할 수가 없겠다, 야.”

질색하면서도 삐쭉 노려보는 푸딩의 눈이 리케도르안과 완전히 같았다.

“이렇게 같아서야.”

나는 푸딩의 연분홍 코를 톡 두드렸다.

“안 그래?”

-뭐가 말이냐, 냥.

“아냐.”

이 순간 원래도 사랑스럽던 내 3살 수호신님에게 애정이 더욱 샘솟는 것은.

리케도르안 당신 때문이 아닐까. 입술이 절로 올라간다.

“그냥, 싫어할 수도 없겠다…… 싶어서.”

나는 소리 내어 웃었다.

문득, 아주 오랜만에 웃는 기분이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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