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43/87)

***

“체이서 루브 도뮬릿 공작님과 공작님의 여동생 이아나 로즈 도뮬릿 영애 드십니다!”

우렁찬 확성기로 고래고래 귀빈을 알리는 건 어디선가 본 풍경과 같았다. 어디서 보았겠나. 책 어딘가에서 보았겠지.

거대한 문이 열렸다.

새로운 곳을 향하는 긴장은 없었다. 어차피 금방 나올 곳이었으니까.

“표정이 좋지 않네.”

옆에서 흘끗 나를 보던 체이서가 말을 흘렸다. 그 말에 사람과 홀 장내를 보던 것을 멈췄다.

“무슨 일 있어?”

“……그런 것 아냐. 없어.”

그리 말했음에도 체이서의 시선은 떨어지지 않았다. 한참 걸어가 멈췄을 때까지도. 아직 황제는 등장하지 않았다. 아마도 체이서까지 왔으니 곧 나타나지 않을까 싶었다.

기다리는 사이 체이서는 엉뚱한 것을 물었다.

“발테이즈 후작이 가면 아래 눈과 머리칼에 대해선, 무어라 안 했어?”

“어…… 별말 없었는데.”

실제로 르나그는 내 머리칼과 눈동자 색이 체이서와 같은 색이 된 것에 대해 언급이 없었다.

“뻔히 보이는 걸 언급 못 할 겨를의 말이 오갔다는 거구나.”

실제론 그것보다는 르나그가 원래 잘 묻지 않은 성격인 듯했으나 대답하지 않았다. 찔리는 게 있으니 괜히 태연한 척하려다 티 내는 것보다는 나았다. 이런 내 반응에 체이서는 흐응, 하고 아찔하게 눈을 휠 뿐 더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 순간이었다.

“리케도르안 폰 헤르님 대공께서 입장하십니다!”

조금 촌스럽다 여긴 확성기 소리가 다시 한번 홀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저벅저벅 걸어왔다.

몹시도 당당한 걸음이었다.

우리에게로 한창 다가오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까딱, 묵례를 올렸다. 잠시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돌아왔다. 심호흡할 시간이 필요했다. 눈을 뜨면 그곳에는 새하얀 예장을 갖춘 리케도르안이 보였다. 어깨에 얹힌 견장이 찬란한 금빛을 반사했다. 나도 모르게 손을 뒤로 감추고 꾸욱, 눌러 쥐었다.

휙 고개를 돌린 리케도르안이 잠깐 나와 눈을 마주쳤다. 착각이거나 우연인 듯 그의 고개가 무심히 돌아간다. 마주침은 이로 끝이었다.

그 이후로는 사람들이 들이닥쳐서 생각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 다가오는 이들은 호기심과 가시적인 미소 둘 중 하나를 달고서 나타났고, 나는 배운 대로 내 이름을 말하며 인사만 남겼다.

“미안하네만, 내 동생이 오늘 몸이 좋지 않아서 말이야.”

참 편하게도 이렇게 한마디 인사만 하면 뒤는 체이서가 알아서 해주었다.

‘빨리 황제가 왔으면.’

그럼 물러날 수 있다지?

그렇게 막 12번째로 나타난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을 때였다.

저벅저벅. 누군가 사람을 헤치고 걸어왔다. 아니, 처음엔 헤쳤을지라도 금방 사람들이 알아서 힉 소리를 내며 길을 텄다.

“오랜만이군, 공작.”

눈앞에는 리케도르안이 있었다. 오늘의 규칙을 지키듯 하얀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몹시 얇고 작아 쓰나마나였다.

망사가 달린 것만 제외하고 비슷한 형태의 체이서의 것처럼.

“흐응, 이게 무슨 일일까.”

체이서는 들고 있던 잔을 휙 돌렸다.

“감히 대공께서 날 찾아주시고.”

잔 속 샴페인이 휘휘 돌았다. 회오리가 치고 있다. 잔 속에도 여기. 내 마음에도.

“쉬르멜라로부터 그리 오래지 않았을 텐데?”

체이서가 일부러 쉬르멜라를 언급했음에도 리케도르안은 눈 한 번 깜짝하지 않았다.

“가급적이면 공작, 네 얼굴은 금방금방 잊고 있지. 기분을 위해서.”

“쉬이 잊을 수 있는 낯이 아닐 텐데. 대단하군 그래.”

체이서는 사납고도 서릿발 같은 음성을 잘만 받아넘겼다. 그러더니 눈매를 잠시 가늘게 늘어트렸다.

“망각이 그토록 쉽다니, …참으로 부러운 능력이야. 난 그게 참 어렵거든. 어떤 기억은 평생을 가.”

체이서는 자찬을 하며 태연히 말을 받았다. 의미심장한 말에 리케도르안의 푸른 눈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것보다 도뮬릿의 가장 귀한 이가 특별히 행차했다고, 들어서 말이지. 직접 구경하러 왔는데.”

하나 리케도르안이 곧 입술을 끌어올렸다. 차게 웃는 비웃음에 가까웠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리케도르안의 얼굴답지 않았다.

“나처럼 빼앗기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테지. 안 그런가.”

“그대의 부친 말인가?”

리케도르안의 미소가 더욱 차가워졌다.

“……그래.”

천천히 미소를 지운 리케도르안이 나를 향했다. 나는 작게 숨을 삼켰다. 입안이 말랐다.

하나 인사를 해야 했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틈에서 나는 비교적 태연히 입술을 열었다.

“대공을 뵙습니다.”

배운 대로 인사를 해야…….

“……도뮬릿 공작님의 여동생입니다.”

“이런 무례는 처음이군.”

리케도르안이 바로 내 태도를 지적했다.

“공작, 그대의 동생은 무례하기 짝이 없는 것이 그대와 같은데. 피는 속이지 못함인가.”

리케도르안이 시린 눈으로 고개를 꺾었다.

“얼굴도 이름도 없이 인사라니. 소개가 원래 이런 식인가?”

체이서의 손이 내 어깨 위로 올라왔다.

“내 여동생 마음이지. 이해해주겠어? 도뮬릿에서 가주보다 높은 이라. 뫼셔야 해.”

“사라지면 곤란하다?”

리케도르안이 나와 체이서를 번갈아 보았다.

“확실히 그대와 똑같은 색이 둘이나 된다라, 참 반가운 일이지.”

체이서가 피식 웃었다.

“그러는 대공은 이리 찾아와 시비 거는 태도를 무례라 생각지 않은 얼굴인데, 그래?”

“아, 그래. 그저 소문이 자자하다는 인물을 확인해두러 온 길이니까.”

리케도르안의 눈이 나를 향했다. 온기가 없는 무표정에 가까웠다. 이내 그는 무심하게 돌아섰다. 돌아가는 발걸음에 미련은 전혀 없어 보였다.

어째서 아쉬움이 드는 건지. 아니, 아쉬웠던 거지. 막상 알아보지 못했으니까.

‘섭섭해서.’

나는 고개 숙여 피식 웃었다.

다음 순간 황제가 입장했다. 본격적인 연회의 시작이었다.

***

“피곤해, 쉬고 싶어.”

이 말을 꺼낸 것은 파티가 시작되고 약 한 시간이 흐른 뒤였다. 체이서는 막 다가온 시종에서 눈을 떼어냈다. 나른하던 그의 낯에 걱정이 어렸다.

“같이 갈래?”

“아니, 혼자 가.”

체이서를 찾아온 시종은 무려 황제 직속 시종이었다. 황제가 체이서를 불렀다고, 이는 아마 나도 함께 데려오란 신호였을까 싶기도 하지만.

“더는 긴장하고 싶지 않아.”

줄곧 긴장이라곤 전혀 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태연히 거짓을 말했다. 어차피 이는 체이서도 눈치채고 있을 거다.

하나 피곤한 건 사실이었다.

사람이 많은 곳과 상성이 맞지 않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이전 세계에서도 시내에서 오래 견디지 못하곤 했다.

“그래, 그럼 다녀올게. 그동안 발테이즈…….”

“아니.”

나는 체이서의 옷을 살짝 붙잡고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르나그를 보고 싶지 않았다. 아니, 이 피로한 정신으로 마주 하고 싶지 않달지.

<답은 언제든 편히 주십시오.>

아무리 나라도 고백한 당사자와 당일 재회는 부담스러웠다.

“……다른 사람 없어?”

체이서는 잠시 묘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미소를 떠올렸다. 못내 기쁘단 표정이었다.

상황을 가늠하는 듯한 시선도 함께였다.

“그래, 마쉬멜을 불러둘게.”

마쉬멜이라면 편한 상대다. 거기다 걱정 없겠네.

“황제 폐하 뵙는데 나는 같이 가지 않아도 괜찮은 거야?”

난 아직 황제를 보지 못했다. 보통 이런 자리에서 인사를 올리는 것이 예일텐데. 하지만 체이서는 내 얼굴을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이 정도는.”

체이서의 손이 뺨 위로 올라왔다.

“네가 하고픈 대로 해줄 수 있으니.”

안심해. 낮은 목소리가 느릿하게 울렸다. 뺨에서 움직이는 손가락이 차갑다. 나는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다녀와서 할 얘기가 있어.”

그가 잠시지만 머뭇거렸다. 그답게 머뭇거림은 오래 가지 않았다.

“네게 채 하지 못했던 얘기지. 꼭 들어주길 바라.”

다녀올게. 작게 속삭이고는 멀어졌다. 나는 그의 뒷모습에 시선을 오래 두지 않았다. 그의 우아한 걸음이 눈을 뗐음에도 잔상처럼 일렁인다. 그 위로 저택에서 보았던 망설이던 체이서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처음 보던 낯이었기에 기억에 콕 박혀 있던 것이었다.

……할 얘기라면 ‘이아나’의 짐을 건네줄 때 끝내 못하고 지나간 얘길 말하는 거겠지.

푸른 장미에 대해 들을 수 있는 걸까.

베일에 휩싸인 이아나의 정체. 의문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이아나’가 체이서를 사랑했다. 반면 체이서는 ‘이아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앞뒤가 맞지 않았다.

나는 나를 보던 붉은 눈을 떠올렸다.

망설이던 얼굴을 보아서일까? 무슨 이야기가 나오든 이 일은 가볍게 이야기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툭. 벽에 얼굴을 기댄 채로 눈을 스르륵 감았다.

잠시 후, 나는 한적한 발코니에서 숨을 내쉬었다. 옆에는 체이서의 부하에게 불려온 마쉬멜이 함께였다.

“무슌 한슘을 그로케 쉬나?”

마쉬멜은 긴 망토를 두르고 있었는데, 어찌나 천이 긴지 발끝에서 끌리는 걸 아는지 모르겠다.

“무슌 일 있었어?”

마쉬멜 치고는 덜 퉁명스러운 말에 나는 살짝 웃었다. 일이라……. 없는 건 아니었지.

난 뺨을 긁적였다. 그러고는 가장 고민하던 것을 쏙 빼놓은 채 말했다.

“고백받았어.”

옆에서 쿨럭, 앙증맞은 기침 소리가 들렸다.

“……뉴, 뉴구한테? 살아 있뉸 거냐?”

“르나그.”

내 말을 듣더니, 마쉬멜이 아. 하고 깨달은 듯한 음성을 흘렸다. 그러고는 눈을 찌푸린다.

“뭐야, 아가씨. 구건 이미 알고 이써쨔나?”

이미 읽어서 알고 있었지. 눈치챈 것과는 조금 달랐지만 끄덕였다.

“그렇지?”

“아가씨뉸 모두 알고 있짜나. 새샴스럽께.”

마쉬멜이 주먹을 제 뺨을 꾹 눌렀다가 뗐다.

“주인님의 마음두.”

하필 그 순간 강한 바람이 부는 바람에 바로 대꾸할 수 없었다. 바람이 가시고 무어라 막 입을 떼려는데 발코니 문이 열렸다. 돌아보면 낯선 사내가 서 있었다.

“저…… 혼자이십니까, 레이디? 아까부터 쭉 보았는데.”

평범하게 생긴 이 남자는 나름 용기를 낸 것인지 우물쭈물하면서도 말을 건넸다.

“일행 있어요.”

“지, 지금은 없지 않습니까?”

이거 곤란한데.

평소 같으면 그냥 거절하고 자리를 떠났을 텐데 어째 그냥 돌아갈 것 같지 않은 인상이다. 그렇다고 내가 떠나고 싶지도 않았다. 딱 그만큼 피로했다.

그때였다.

쯧, 마쉬멜이 혀를 찼다.

“아가씨뉸, 미꾸라지랑도 엮이나? 귀찮께.”

그와 동시에 남자가 어어, 소리를 냈다. 남자의 몸이 절로 뒤로 물러나지더니 안쪽으로 던져진다. 문이 저절로 탁, 닫히고 철컥 잠겼다. 촤악, 커튼까지 알아서 내려가 더는 안이 보이지 않았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쾅쾅.

하나 소리만은 감출 수 없었다. 마쉬멜은 이것만으로도 안 되겠네 중얼거리더니 조그만 손가락으로 이마를 꾸욱꾸욱 눌렀다.

“아가씨, 이 은혜뉸 꼭 갚아. 아라써?”

마쉬멜에게서 검은빛이 흘러나오나 싶더니 어느새 그 자리에 커다란 남자가 서 있었다.

나는 같은 색 머리로 마쉬멜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보았다.

“와, 대단하네요.”

그의 양 귀에서 길게 흘러내린 귀걸이가 찰랑 흔들렸다. 그는 날 노려보며 귀걸이를 떼어냈다. 이내 그것이 긴 지팡이가 되었고, 이걸 흔들었다.

곧 쾅쾅 소리나도록 문을 두드리던 소리가 조용해졌다.

“흐응.”

나는 짧게 박수를 쳤다.

“마쉬멜이에요?”

“……그래.”

어쩐지. 책 속에서 아는 모습은 분명 성인이었는데. 이상하다 싶었지.

“성인이 될 수 있던 거예요?”

“오래 유지는 못 해.”

그가 짧게 대꾸했다. 신경질적이고 무심한 얼굴과 썩 잘 어울리는 말투였다. 잘생겼네.

“미남이었구나.”

“허, 아부해도 아무것도 안 나와, 아가씨.”

그는 허탈한 듯 웃음을 토했다. 한데 말투는 아기일 때와 전혀 다르지 않다. 난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그사이 커튼이 걷혔다.

“이렇게 하면 귀찮은 일은 덜 하겠지.”

“어떤 귀찮은 일요? 나한테 집적대는 사람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거?”

“잘 아네.”

그러고도 남지, 뭐. 나는 부정하진 않았다.

그의 짙푸른 머리색은 달이 동동 뜬 하늘과 무척이나 잘 어우러지는 색이었다.

“그보다.”

마쉬멜은 나를 흘끗 보다 툭 던졌다.

“그게 고백받은 사람의 얼굴이냐?”

“왜요.”

“……아가씬 참 알다가도 모르겠어.”

“아, 그런 의미로 알다가도 모르겠는 사람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

“뭔데.”

“그 모습이 된 김에 음료 하나만 가져다주면 안 될까요?”

“……허?”

마쉬멜이 혀를 찼다. 예민한 모습도 저런 미남이 하니 잘 어울리는구나 싶었다.

“목이 너무 말라요. 오빠의 일이 길어지는 것 같은데, 내가 나가면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아서요.”

그건 그랬다. 체이서가 사라지기 무섭게 사람들이 달려드는 통에 여기 온 거였으니. 사실 퍽 귀찮은 일이라 흑마법사님이 거절해도 그러려니 하려 했다. 실제로도 귀찮다는 듯한 얼굴을 했으니까.

곧 마쉬멜이 머리를 쓸어 올리더니, 손이 더럽게 가는 아가씨네. 하고 중얼거렸다.

“빨리 올 테니. 잠시 기다려.”

내 주변으로 은은한 검은 빛이 돌았다. 마쉬멜의 마법인 성싶었다. 그렇게 마쉬멜이 나갔다. 오매불망 그를 기다리며 흘끗 유리문 밖을 보던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오, 젠장.

조금 전 날아갔던 남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도 저 같은 영식 여러 명과 함께.

……포기를 모르네.

저들의 방향은 뚜렷했고, 이대로 부딪치면 귀찮아질 게 분명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여기까지 와서 피를 보는 것보다야 낫겠지. 약간의 귀찮음을 감수하고 테라스를 나섰다.

‘어차피 마법 덕에 마쉬멜은 내 위치를 알겠지.’

복도에 자욱하게 깔린 어둠은 나를 충분히 가려주었다. 저쪽에서는 눈치 못 챈 듯했다.

어디로 가나, 싶다가 어느새 복도 끝이었다. 자그만 정자가 보였다. 낮이라면 화사했을 법한 정원이었다.

‘저기도 장미가 피었네.’

정원으로 들어가 장미를 보았을 땐 꽤 깊이 들어간 뒤였다.

마쉬멜이 얼른 찾아오길 바라며 천천히 상체를 바로 했을 때였다.

솨아아아-.

거센 바람이 불고 검게 물든 머리카락이 마구 흩날렸다. 애써 머리칼을 붙잡아 내리니, 눈앞에 낯익은 인영이 있었다.

“또 보는군.”

리케도르안이었다.

또 본다. 이 말은 모든 모습에 해당했다. 감방의 이아나에게도 쉬르멜라의 하녀에게도 그리고 연회에서 보았던 지금의 나에게도. 어느 쪽을 말하는 것인지 모르나 그는 태연하게 내게 말을 건넸다.

나는 나도 모르게 여전히 검게 물든 내 머리칼을 보았다. 마법은 변함없었다. 여기에 자신감 아닌 자신감을 얻고 고개를 숙였다. 이대로 숙이고 돌아갈 요량이었다.

“잠깐.”

그가 부르지 않았다면.

“실례하고 싶습니다.”

갑작스레 말을 높인 리케도르안이 다가왔다.

“분수대가 어디인지 아십니까?”

다가와 묻는 그의 모습엔 체이서 앞에서 보인 차갑고 삐뚜름한 태도는 어디에도 없이 정중했다.

“……몰라요.”

……나도 처음 오는데 어떻게 알아.

움츠러드는 마음이 컸다. 마음에 밟히는 것이 많은 자의 비겁함이다. 나는 주춤 발을 뒤로 물렸다. 그가 더는 다가오지 않길 바랐다. 하나 이는 바람으로 그쳤다.

“그럼 저와 함께 찾아보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없어요.”

“그럼 절 데려다주시는 건.”

“싫어요.”

리케도르안이 멈칫했다. 당황한 기색은 아니었다. 그는 나를 관찰하며 턱을 문질렀다.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은 도뮬릿 가주의 동생. 어쩜 이리 거절만 하시는지, ”

나는 움찔했다.

“가슴이 아픕니다. 하나 태도에서 보이는 정중함은 오라비랑 다르군요.”

단답으로 무엇을 알 수 있다고, 변함없이 단정한 태도를 보아선 이게 비꼬는 말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참으로 궁금한데, 가면 아래 얼굴은 당신의 오빠와 닮았습니까?”

“……색을 보면 모르시나요.”

나는 대충 얼버무리며 주변을 살폈다. 이상하게도 마쉬멜이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뿐 아니었다.

……주변이 기묘한 정도로 고요했다. 이런 이상함을 느꼈음에도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나는 하려던 말을 당황하지 않은 척 자연스럽게 이었다.

“대공님은 현명한 분이시니 이로 판단하시겠지요.”

“안 닮을 것 같습니다.”

눈이 리케도르안에게로 돌아갔다. 어느새 리케도르안이 제 가면을 벗고 있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정중한 어투가 딱 잘라 말한다, 차갑고 삐딱한 시선이 동시에 느껴졌다. 아니. 그보다는 더 깊게 가라앉았다.

“네 머리색이 아니니까.”

가면을 완전히 벗은 그가 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서 내 가면이 떨어져 나간다.

“그렇지, 이아나?”

바람이 분홍빛으로 물드는 머리칼을 흔들었다.

“다시 이야기할까.”

마지막 순간 당신은 분명 울고 있었다. 마음이 절절해지도록.

한데 왜 지금은 웃고 있는지.

“안녕, 이아나.”

다시 만난 날 리케도르안은 전혀 다른 얼굴로 미소했다.

시리도록 깜깜한 밤하늘이었다. 오직 그의 은빛 머리칼과 같이 진한 은색 달만 뜬 아래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늑대 같은 이의 발이 내 그림자를 밟았다. 사박사박. 뒤로 물러남에도 거리는 조금도 멀어지지 않았다. 마침내 가까워지면.

그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지금부터 너를 납치할 거야.”

한줄기 웃음이 그의 뺨을 가로질렀다. 애증이 서린 시선이 낯설었다.

“나를 안 보니까.”

화를 내고 싶은 건지, 기쁘게 웃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미워하게라도 해야지.”

기억 속 그가 절절히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사라진다. 바람이 불고, 눈앞의 리케도르안이 웃으며 말했다.

“안 그래?”

어둠 속에서 짐승의 눈이 번뜩였다.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할 말이 많은데, 정말로 많은 건지 모르겠다. 마음속 수조에 물이 한가득 담긴 것 같은데 들여다보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정돈되지 못한 머리칼이 이 마음처럼 바람에 마구 흔들렸다.

나는 리케도르안에게서 희미한 빛을 느꼈다. 그를 본 순간부터 계속 은은하게 돌았던 것이다.

붉은빛.

내게 걸린 마법을 벗겨 버린 빛이었다. 아울러 그가 가진 장미의 힘이기도 했다.

마쉬멜은 이미 밝힌 바 있다. 마법과 장미의 힘은 물과 기름과도 같아 반발할 것이라고.

이를 생각해보면 4년 전 제이르가 리케도르안에게 마법을 걸어달라고 한 것은, 마법과 리케도르안의 힘의 반발을 노리고 힘의 안정화를 당기려 한 것은 아닌가 싶다. 실제로 마법을 건 뒤에 그는 청년 모습을 오가며 내내 부작용을 겪지 않았던가.

지금 생각하면 이 또한 리케도르안을 생각했다는 사람치고 할 방법인가 싶지만.

짧은 순간 이처럼 많은 상념이 드는 것은 리케도르안이 깊고도 알아보지 못할 것을 함께 눈에 담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단 한 번도 이 남자가 이렇게 어둡고 축축한 눈을 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리케도르안.”

오히려 상처받을지언정 빛나고 정의로운 존재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내게 당신은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이제야 날 부르는구나?”

감방의 잔인한 쇠사슬도 훗날 광영과 고귀함을 묶어두지 못하리라 여겼다. 그래서 할말을 찾지 못한 입이 뻐끔거렸다.

그러나 나는 이미 늦었단 것을 깨달았다. 발밑에 펼쳐진 푸르른 마법진이 제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미 한 번 본 적 있던 것이었다.

‘체이서가 썼던 것……?’

비슷한 형태였다. 세부적 모양은 좀 달라 보이지만, 정황상 어떤 기능을 하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내가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거센 바람이 불었다.

본능적으로 눈을 찡그리며 손을 올렸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거칠게 흩날리는 리케도르안의 희고 푸른 망토였다.

“윽…….”

눈을 뜨고 얼굴을 가린 손등을 내렸을 때, 나는 전혀 다른 공간에 서 있었다.

처음 보는 방 안이었다.

아무도 없는 실내, 보이는 것이라곤 달빛에 의존한 채 보이는 가구와 흩날리는 커튼, 창문이 열러 바람 소리가 들린다. 자연을 제외하면 몹시도 고요했다. 색색. 숨 쉬는 소리만이 들렸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아나.”

서린 듯 아닌 듯 오묘하고도 낮은 미성이 나를 불렀다.

“내 성에 온 것을 환영해.”

연이어 부는 바람에 공기가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음성으로 이 방의 정체를 알았지만, 무어라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내가 널…… 납치한 거야.”

어둡게 가라앉은 눈동자, 흔들리는 은빛 머리칼. 애증이 서린 목소리. 그의 눈이 이렇게 묻고 있는 것 같았다. 넌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하고.

내가 여기에다 대고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되어버린 것 같은 이 남자에게.

바람은 끊임없이 불었다.

아쉬우면서도 미안하고, 미안하면서도 서글픈 마음은. 대체 어디로 가야할지 모를 방황하는 바람과 이 바람과 같이 마구 요동쳤다. 가라앉지 않는 폭풍은 리케도르안의 손을 거절했던, 그리고 뿌리쳤던 데에 대한 후회이리라.

“이아나.”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난 그 상황으로 다시 돌아가더라도 똑같이 행동했을 거란 것을. 이를 두고 리케도르안 너를 위해 그렇게 행동했다고 말하는 건 의미 없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나는 이 순간 솔직히 말했다. 날 붙잡은 그의 손을 물끄러미 보면서. 우습게도 그가 날 잡은 손의 방식은 4년 전과 다를 바가 없었기에 서글프고 기쁜 모순된 희열을 느끼면서.

건드리면 날아갈까.

쥐면 깨져버릴까.

손은 이토록 조심스러우면서. 낯만은 한겨울 나뭇가지처럼 서늘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상관없어.”

리케도르안이 원하는 대답은 아닐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차갑던 표정이 이지러졌다.

“내가 만약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면.”

내 말은 끊어지지 않았다.

“나는 몇 번이고 똑같이 행동할 거야.”

너를 만나러 가지 않을 것이며, 네 손을 뿌리칠 거다.

“너를 위해서.”

그가 믿든 믿지 않든 상관없이 저지른 일이니까, 많은 걸 바라진 않았다. 그래서 이 대답에 좋은 반응이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얼굴이 무섭도록 일그러졌다.

“나를 위해서라고?”

그의 낯이 더욱 사나워지는 것으로 모자라 음성이 더욱 낮아졌다. 이젠 숫제 동굴에서 웅웅 울리는 것처럼 나직해진 목소리가 뚝뚝 이어졌다.

“웃기지 마.”

“…….”

그가 씹어먹을 듯 나를 노려보았다.

“네가 진정 나를 생각했다면 넌 이미 최상의 방법을 알고 있었어.”

이 순간에도 달빛에 비춰 황홀하도록 아름다운 푸른 눈동자를 어둡게 빛내면서.

“왜, 모르겠어.”

그가 자조하듯 중얼거렸다. 싸늘한 비웃음과 함께.

“그 비열하고 잘나신 공작의 하나뿐인 여동생인데.”

그가 입술을 비틀었다.

“너, 똑똑하잖아?”

그 남자처럼. 그가 작게 속삭였다.

“네가 내 마음을 몰랐을 리 없잖아.”

얼음송곳 같은 목소리는 정확하게 의표를 뚫었다.

“난 말이야, 항상 궁금했어. 네가 그날 나오지 않았던 것은 왜일까?”

잠시지만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프진 않았지만 그 대신 체감했다. 물러나려 해도 물러설 곳은 없었다.

“아픈 걸까, 사정이 있었던 걸까. 날 잊진 않았겠지? 잊었으면 어떡할까. 아니 설마, 너에게도…… 나와 같은…… 아버지가 있나.”

나는 움찔했다.

리케도르안 스스로 제 입에 담은 아버지의 이야기가 무엇을 말하는지, 모를 리 없었다.

“바보 같던 소년은 이것을 장장 3년이나 고민했어. 신뢰가 헌신짝처럼 버려지고 갈기갈기 찢어진 약속을 곱씹다 증오가 되어가는 마음을 외면하면서.”

그가 미소 지었다. 왜인지, 심장을 저미는 미소였다.

“네겐 그토록 쉽고 간단했나?”

당신과 나의 약속이 그토록 가볍고, 그래서 어겼느냐.

‘처음엔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난 작게 고개를 저었다.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될 듯했다.

“아니었어.”

하나 차분한 대답은 그를 더욱 자극한 기폭제가 된 것 같았다.

“거짓말, 네 입으로 얘기했잖아. 뻔뻔하고 이기적이라고.”

분명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그럼에도 무릎 꿇고 싶었지.”

순식간에 흐려졌던 눈동자가 바로 제 빛을 되찾았다.

“널 다시 보는 순간에 곱씹던 것도 잊고. 처량하고, 간절하게 손을 내밀었어!”

쉬르멜라에서의 일을 반추한 그가 보인 것은 더욱 깊고 습해진 감정이었다.

-인간…….

안절부절못하는 푸딩의 음성이 들려온 건 그때였다. 나는 괜찮다는 듯이 손을 쥐었다가 폈다.

‘괜찮아, 걱정하지 마.’

아마 푸딩은 리케도르안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던 것이리라. 그건 나에게도 고스란히 느껴졌으니까.

“그런데 너는 도뮬릿의 공주님이시더군. 그 남자의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

돌아올 것이 왔다. 나는 눈을 내리며 가늘게 감았다가 떴다.

“왜, 대답이 없지? 아닌가?”

차갑던 목소리에 약간이지만 초조한 기색이 스쳤다.

“아니. 맞아.”

이미 밝혀진 사실은 돌릴 수 없다. 연회에서 어차피 모두 밝혀질 사실이었다. 갓 데뷔한 고위 귀족은 적어도 한 번은 황제 앞에서, 혹은 대중 앞에서 소개를 해야 했으니. 황제야 만나지 못했더라도 이미 대중 앞에 보인 뒤였다.

이를 피하기 위해 꼼수를 썼지만 지금에야 다 무슨 소용인가.

“나는 이아나 로즈 도뮬릿, 네가 말한 대로 도뮬릿의 사람이야.”

이아나의 정체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곳에서 몸담은 4년을 없던 일로 하는 것도.

담담한 내 소개에 리케도르안은 더욱 화가 치민 듯했다.

“하, 그럼 처음부터 날 속인 건가?”

이제는 며칠 굶어 막 튀어 나가기 직전의 사나운 맹수처럼 아슬아슬한 기분이 들었다.

“감방에서 마주한 날부터, 네가 누군지, 정체를 숨기고 접근한 거냐고.”

“아니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닌 말이었다. 비난을 받더라도 오해는 쌓게 두고 싶지 않다.

다급한 마음에 그의 손가락을 잡아당겼다.

“너를 만난 그날, 나는 나도 내가 누군지 몰랐어.”

“그 말을 믿으라고?”

“정말이야.”

그의 손을 힘주어 잡는 순간 그의 손가락이 움찔했다.

“나는 기억을 잃었었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말을 했다. 다른 영혼이니 내 몸이니 하는 것은 차차 밝히더라도.

“감방에 들어가기 전과 들어간 후의 나는 달라.”

당장은 그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그가 믿을 수 있는 것부터 말하고 싶었다.

“네가 만약 나에 대해 조사했다면 알고 있을 텐데, 내가 심장마비로 심장이 멈췄다가 다시 뛰었다는 걸 듣지 못했어?”

리케도르안은 답이 없었다.

“리케도르안, 나는 줄곧…….”

입술을 깨물고, 말을 잇는데 이 순간을 가로막듯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무시하고 지날 수 없을 만큼 절제되고 묵직한 소리였다.

“대공님, 여기 계십니까?”

노크만큼이나 진중한 음성이 잇따랐을 때, 줄곧 변화 없던 리케도르안의 얼굴이 반응했다. 눈썹이 축 치켜 올라간 것이 느껴졌다.

“‘계획’이 어그러졌습니다.”

돌아오셨지요?

급한 건입니다. 묵직한 목소리가 남긴 말에 리케도르안의 눈동자가 느릿하게 굴러간다. 이내 그의 입술이 열렸다. ‘문 열어.’ 그 말과 함께 문이 열렸다.

문틈 사이는 몹시 어두워 누가 서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이아나, 도망가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나머지 얘기는 다음에 듣겠다는 듯이 뒤돌아 가려는 모습이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이대로 뿌리칠 거라 생각했는데, 그는 멈춰 섰다. 잠시 내 손을 어찌할지 모르겠단 서린 눈으로 보면서.

의외였다.

“……묶지 않아?”

나는 빠르게 용건을 말했다. 급해 보이니 할 말만 할 요량이었다.

“뭐?”

“안 묶느냐고.”

리케도르안의 표정은 묘했다. 아니, 이상했다.

“나 인질이잖아.”

“…….”

“그럼 묶어둬야 하는 거 아닌가?”

그 남자처럼. 나는 태연하게 이었다.

“묶을 거라면 발목이 좋겠어.”

어차피 갇힌 곳만 달라졌다고 생각하면 편했다.

“너…….”

그 순간이었다. 리케도르안의 얼굴이 형편없이 무너졌다.

마치 못 들을 것을 들은 사람같이.

숨 막힐 듯한 침묵이 흘렀다. 팽팽하게 당겨진 공기 속에서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리케도르안이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이내 다시 차가운 얼굴로 돌아온 그가 낮게 제 뜻을 밝혔다.

“안 묶어. 안 가둬. 내가 제일 증오하는 짓 따위 안 해.”

그러고 보니, 그렇겠다. 어린 시절부터 쇠사슬과 감방이 세상의 전부라 할 만큼 갇혀 있던 이 아닌가. 납득할 수 있는 이유였다.

하나 나쁜 짓에 차등을 두는 건가. 이상했다.

“……저기, 납치라고 말한 시점에서 이미 나쁜 짓 아니야?”

뭐가 다른지 모르겠는데.

“…….”

한차례 나를 다시 보던 그가 돌아섰다. 내 질문엔 대답하지 않은 채로.

“어디에도 가지 마.”

분명 도망가지 말라는 말일 터인데…… 명령이 애원하는 청처럼 들렸다.

“네게 소홀할 생각은 없으니 도망갈 생각은 미리 지워두는 게 좋을 거고.”

딱딱한 대공의 말투로 돌아간 그가 고개마저 홱 돌렸다. 그러나 왜일까 조금은 어색한 티가 남은 어조였다.

“왜?”

왜 그렇게까지 하는데. 내가 밉다며. 이제는 애증이 어린 눈으로 보아놓고서는.

“내가 왜 대답해야 하지?”

하지만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분명 들은 것이 분명할진대 저 말만 남기고는 대답하지 않고서 나가버렸으니까. 차가운 대답에 새삼 상처받지는 않았다. 그저 그럴 수도 있겠지. 오히려 이해가 가는 바였으니까.

나는 그가 사라진 문을 쳐다보다 천천히 바닥을 응시했다.

-인간…….

어느새 모습을 드러낸 흰색 고양이가 내 발치에 걱정스럽게 몸을 비벼왔다.

-괜찮은 거냐, 냥…….

나는 쓰게 웃었다. 계약한 뒤로는 어렴풋이나마 푸딩의 감정이 머리로 넘어왔다.

푸딩이 걱정하는 것을 알았다.

-인간 인간, 이제 어떡하냐? 응?

나는 피식 웃으며 푸딩의 머리를 장난치듯 콩 두드렸다.

“내 이름. 그렇게 알려줘도 한 번을 안 부르지. 응?”

나와 계약한 뒤로 나와 모든 일상을 공유한 푸딩은 많은 것을 알고 느꼈다. 그 범주가 아직은 조금 어린 인격의 한계에 머물렀어도 제법 깊게 생각한단 소리다.

그래서 이렇게 걱정하는 게 비단 리케도르안의 사나운 모습 때문은 아닐 것이다.

“……괜찮아.”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내 손목에는 찰랑, 두 개의 팔찌가 달려 있었다.

오래전 제이르가 선물한 것이다. 어쩌다 보니 마법을 다 쓸 일 없이 보유한 것인데, 여기까지 가져와 버렸다. 체이서도 마쉬멜도 이것에 관해선 몰랐다. 내가 이들의 눈앞에서 쓰지 않았으니까.

언제 납치당할지 모르니 아무도 모르는 내 보험이기도 했다.

물론 이걸 쓰기도 전에 족족 나타난 체이서와 수호신, 그의 유능한 부하들 덕에 안전해졌지만.

“하아…….”

나는 팔찌에 오랜 시선을 주지 않았다. 팔찌를 풀어 손에 쥔 뒤, 다음으로 향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손목 아래쪽이었다.

밑에서 마구 몸을 비비는 푸딩을 진정시키며 얕게 숨을 내쉬었다.

한숨 뒤로 손목을 꾹 누르자, 피가 몰렸다. 그러다 천천히…… 손목 위로 하나의 문양이 그려졌다.

검은 장미였다.

나는 떠오른 새카만 장미를 꾹 눌렀다. 그와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나직하고 황홀한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 이아나.

화를 감추듯이 낮고도 위험한 목소리가.

-지금 어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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