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39/87)

***

“너 어디 소속이지?”

나는 질문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깜깜한 밤을 배경으로 선 남자가 보였다.

바람에 흩날리는 은색 머리칼은 이 밤에 더없이 잘 어우러졌다. 은빛 별마저도 그를 위한 장식 같았다.

나는 대답을 잠시 유보하고, 주변을 흘끗 보았다.

현재 이곳은 풀벌레 소리가 들려오는 고요한 정원이었다. 나는 대답을 유보하는 대신 머릿속으로 시산을 가늠했다. 어쩌다 이렇게 시간이 후다닥 지나갔더라.

아, 그래. 냅킨을 가져다주는 것을 끝으로 하녀의 업무가 모두 끝나고 돌아왔지. 마쉬멜이 기다릴 걸 생각해 하녀들이 비번끼리 술이나 한 잔 하자는 것을 거절하고 방으로 돌아와 인사했다.

그리고 시간이 순식간에 흘렀다.

리케도르안이 만나자고 한 시간은 금방 다가왔단 말이다. 그리고 그가 제안한 시간은……. 저녁.

“저, 파티에 가지 않으셔도 괜찮으신가요?”

파티가 한창일 시간이었다.

리케도르안은 나를 흘끗 보더니 찬 얼굴로 뱉었다.

“내가 먼저 물은 것 같은데.”

어째 어제보다도 더욱 차디찬 느낌이다. 재회하고서 내내 냉정하긴 했는데…….

“아, 죄송합니다.”

어째서 이 시간에 약속을 잡은 건지 몰라도 파티에 갈 생각은 있었던 듯 그는 멋들어진 제복 차림이었다.

거, 참. 잘 컸네.

딱 떨어진 어깨선을 보며 괜히 흐뭇한 기분을 숨기지 못했다. 그 사이 리케도르안이 한마디 더 뱉었다.

“양 일간에 네 몸에 걸친 하녀복의 형태가 달랐지.”

나는 품 안의 푸딩을 꼬옥 안았다. 오늘도 회색 고양이 모습인 푸딩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의미 없이 냥냥 울 뿐이었다. 고민하다 리케도르안이 궁금해하는 답변을 주었다.

“아, 쉬르멜라 소속은 아니에요. 오늘은 동료가 실수로 물을 쏟아서, 빌린 옷이었거든요.”

나는 소매를 팔랑 흔들어 보였다. 아무래도 이쪽은 체이서처럼 저택별 하녀 옷까지 술술 외우는 타입은 아닌 모양이었다.

하기야 책 속에서도 두 남자 주인공은 극과 극의 대비를 이루었다. 체이서가 음모, 계략, 흑막 등 온갖 암공작에 능하고 치중했다면, 남자주인공 리케도르안은 정의의 주인공답게 압도적이고 강한 입으로 불도저처럼 모든 걸 밀어버리는 쪽이었다.

실제로 그만큼 강력한 힘을 가지기도 했었고.

오늘 대뜸 검을 날린 것만 봐서도 책이랑은 얼추 비슷한 모습이 된 거구나 싶었다.

괜히 엉뚱한 상상이 들었다. ……그럼 감방에서 흐뭇하고 므흣한 장면들은 모두 지나간 건가. 아니야. 아니야. 지펴지는 빨간 상상을 얼른 고개를 흔들어 지워냈다.

“그래서 어느 소속인데. 대답하지 않았다.”

아까부터 이쪽은 왜 소속에 집착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알려주는 건 어렵지 않지만…….

“……그리고 체이서 루브 도뮬릿과는 무슨 사이지?”

이렇게 눈을 차게 희번덕거려서야…… 나왔던 말도 쏙 들어가겠다. 거기다 무슨 사이냐니.

“오늘 처음 보았는데요…….”

남매 사이지, 대외적으로 알려진 사이는 말이야. 솔직하게 말해보려던 생각도 사라지고 그래선 안 될 것 같다. 그리고 내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적어도 이 얼굴로는 처음 보았지 않았나? 나는 뻔뻔하게 응수했다.

“그리고 소속을 알려드리는 건 어렵지 않으나…….”

너 알면 눈 뒤집어질 것 같아서 말 못 하겠다.

“제게 말씀하실 때 너는 타가문의 하녀고, 다신 마주칠 일이 없으니 여쭐 것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얼굴 안 볼 사이라 마음껏 털어놓을 거라며.

이리 대답을 피한 건 다 이유가 있어서다. 오늘 낮에 있던 일로, 체이서와 리케도르안의 갈등이 생각 이상임을 알았다. 장난이 아니었다고 할지.

“그래서?”

물론 몰랐단 건 아니지만 실제로 보는 건 또 다른 느낌이었다.

벽에 구멍이 나고 사람이 피를 철철 흘리는데, 아랑곳없이 서로를 사납게 노려보는 시선들만 봐도 말이다. 특히나 현재 체이서는 여주인공과 엮이지 않았다. 원작과 다르게 감방에도 가지 않았단 얘기다.

이처럼 두 사람은 여주인공으로 엮이지 않았음에도 원수지간이었다.

그것도 꽤나 깊은 앙금을 가진.

이런 상황에서는 무슨 말이든 쉽게 못하겠다. 아주 작은 것으로라도 날 유추하면 어떡해?

“각하께서 이리 말씀해주셨으니… 제 소속을 알려드리면 소용없는 것이 아닐까요?”

원래라면 체이서는 프란시아가 일으킨 일로 감방에 한 번은 갔어야 했다. 아무래도 이건 내가 프란시아를 일찌감치 풀어준 탓이 큰 듯했다.

그럼에도 리케도르안이 구속구를 풀어낸 건 정말이지 다행이지만.

“……그런가.”

그렇지만 나는 그래서 당신에게 미안했다.

하마터면 당신의 운명을 최악으로 바꿨을지도 모른단 가능성을 뒤늦게야 알았기 때문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프란시아와 리케도르안이 만나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어. 뒤늦게야 후회했다.

그럼 푸딩을 보냈더라도 죽을 뻔했다. 이는 내가 온갖 무리를 하며 이곳에 온 까닭이기도 했다. 나는 당신이 죽지 않기를 바랐다. 설사 이것이 이제는 정이 든 마쉬멜을 곤란케 해도. 여기까지 온 게 들켰을 때, 그렇지 않아도 작았던 자유가 아주 사라지더라도.

풀벌레가 우는 밤은 낭만적이었다. 그러나 여기 선 나와 그는 낭만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선이 벼려진 그는 날카로워진 선만큼이나 세상을 깨달았을 것이다. 이제는 그때의 감방에서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만큼이나.

리케도르안이 차게 웃었다.

“질문이나 하라, 이 소리군.”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지만 어른거리는 불빛에 알았다. 그의 눈이 더욱 차가워져 있다는 것을.

“어찌 이런 것마저 비슷한지.”

“네?”

그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래. 이토록 비슷하니, 이제 그만 해답을 알 수도 있겠어.”

리케도르안이 저벅, 한 걸음을 좁혔다.

“조금 전에 왜 파티에 가지 않나 물었나?”

그는 내가 대답해줄 틈을 주지 않고 연이어 말했다.

“첫 번째, 내가 가지 않아도 난장판을 만들어줄 내 부하가 있을 것이다. 두 번째 그럼에도 자리를 지켜야 하지만…… 간절하게 궁금한 것이 있어서지.”

우리가 있는 정원은 정원에서도 외곽 쪽이라 불빛이 거의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그의 등 뒤로 보이는 저택의 환한 불빛이었다. 어둡지만 그의 표정 정도는 알아볼 수 있었다.

“실오라기라도 잡고 싶을 만큼 간절하게 답을 바라거든.”

간절함을 입에 담은 얼굴이 얼음처럼 차게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지나치게 수려해진 외모는 이런 은은한 분위기에 독이었다. 눈을 뗄 수 없었으니까.

“네가 답을 해주겠나?”

“……어떤 질문인가요?”

나는 당황하지 않으려 담담하게 물었다. 그의 눈썹이 씰룩 움직였다.

막상 입에 담으려니 망설이는 것도 같았다.

“……네가 만약 약속을 어겼다면, 약속을 지키지 않은 건 무슨 이유에서지?”

“네?”

“너라면 말이다.”

리케도르안이 입술을 꾹 물었다가 떼어냈다.

“너라면, 너 같은 사람은. 약속을 지키지 않을 때 어떤 생각을 하나?”

쿵. 흔들리는 가슴을 꾹 부여잡았다. 이미 가까워진 거리는 멀어질 새가 없어 보였다. 리케도르안은 마치 당사자가 앞에 있는 양 나를 압박했다. 심지어 자신의 말투가 미묘하게 달라진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대답해봐.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때 무슨 생각을 했지?”

나는 머뭇거리다가 한 가지를 물어보았다.

“저, 실례지만 저는 그 사람이 아닌데요…….”

그제야 리케도르안이 멈칫했다. 그는 순간이지만 낭패한 기색이었다. 나는 이를 틈타 물었다.

“그런데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해.”

이제 와서 하녀가 이렇게 궁금한 거 말해도 되나 다시 한번 의문이 들었지만, 그냥 이었다.

“한 사람이 남긴 질문이라고 하셨는데…… 그 질문이 어떤 질문인지는 알았어요. 어떤 사람이 남긴 건가요? 고민을 해보려고 여쭤요.”

나는 입술을 매만졌다. 어째 답을 알 것 같긴 한데. 나는 철창 너머 서던 그때처럼 눈앞에 문을 앞두고 있었다.

“솔직한 대답을 위해서요.”

문고리를 잡을 것인가 말 것인가.

“……여인이다.”

여인? 그게 다인 건가. 이것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었다.

“조금 더요.”

“오래전에 잠깐 알던 이다.”

“그리고요?”

리케도르안의 낯에 망설이는 기색이 스쳤다.

“추억하면, 씁쓸하고. 여러모로 보고…… 싶은 이라 봐도 좋겠군.”

나는 긴가민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대꾸했다.

“첫사랑인가요?”

“뭐?”

이성이고, 잠깐 만났는데, 오랜 시간 잊지 못했고 추억하는데 씁쓸한데 생각나고 보고 싶은 사람.

아닌가?

“그건…….”

리케도르안의 시선이 잠깐이나마 흔들렸다. 흔들림을 가리려는 듯 그는 손을 얼굴을 잠시 가렸다.

그의 머리로 쏟아진 빛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가 고개를 좌로, 우로 한 번씩 흔들었던 까닭이다.

잠시 후 손이 떨어졌을 때, 커다란 손 사이로 사라졌던 작은 얼굴에 다시 어떠한 감정이 떠올랐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차차 열이 오른 낯을 보았으니까.

“……쓸데없는 소릴 하는군.”

그는 귀를 살짝 물들인 채 고개를 휙 돌렸다.

“아니다.”

그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런 게 아니야.”

마치 자기 자신에게 되뇌듯이. 목소리는 얼음장같이 차갑기 그지없었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과는 다르게.

“……미워하고 있다.”

나는 이 순간 조명 빛이 밝은 것에 고마워해야 할지, 당황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동시에 깨달았다. 나는 생각보다 더 이 남자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구나.

“미워하고 있다.”

미움을 읊조리는 남자의 얼굴은 새빨갛게 붉어져, 감방의 어느 날을 떠올리게 했다.

즐겁고 평온했던 시간을.

“그렇구나.”

떼어지지 않은 입을 애써 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다지 답변하고 싶지 않았다.

이건 하녀 옷을 입은 낯선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이아나가 할 답변이었다. 그리고 나는 묻어둔 이야기를 다시는 꺼낼 생각이 없었다.

잡지 못한 줄과 가지 못한 길은 잊는 쪽이 낫다.

그저 안타까움과 후회만 부를 뿐이니까. 그래서 나는 잘 적응하고 살았는데… 그의 말은 내 무심함에 돌을 던져 파문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제는 나를 빤히 보는 남자에게 답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저라면…… 하고 물어주셨으니까. 그 사람이 저라고 생각하고 답변드릴게요.”

그래, 기왕 이렇게 된 거 하녀의 탈을 쓴 그때의 그 이아나라고 생각하고 들어주면 좋겠다.

그때 당신을 찾아가면 할 이야기가 많았던 것 같은데. 미안해. 나는 3년간 많은 것을 잊었어.

“우선 저는 이기적이에요.”

그가 고개를 홱 들어 올렸다.

“그리고 뻔뻔하죠.”

놀란 푸른색 눈이 불빛에 흔들렸다.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면…… 미안해하겠죠? 이기적이고 뻔뻔한 사람이라고 미안함을 모르는 건 아니에요.”

나는 품 안의 푸딩이 가진 온도를 느끼며, 푸딩의 보드라운 발을 만졌다가 떼어냈다. 이 순간 푸딩이라도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 잊었을 거예요. 어쩔 수 없었지, 하고. 이게 바로 이기적인 거죠.”

“……네게 사정이 있었다면?”

나는 작게 웃었다.

“사정이 있었다고 한들 어쩔 거예요? 어차피 그 사람은 모를 텐데. 그 사람에게 나는 약속을 안 지킨 뻔뻔하고 못된 사람으로 남았을 테니까. 그러려니 할 것 같아요.”

당신에게 떠나지 않았던 날, 그렇게 생각했다. 당신은 이제 나를 뻔뻔하고 못된 사람으로 생각하겠구나.

시간이 지나며, 생각했다. 차라리 계속 미워해주고 있으면 좋겠다. 그럼 추억으로라도 남을 테니. 진실을 알아봐야 추억에 흙을 뿌리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진심으로 조언했음에도, 결국 리케도르안은 제 부친을 죽인 체이서를 증오했다.

“그러다가 잊었을지도 모르죠.”

“…….”

“잊고, 행복…… 으음. 행복은 모르겠고 평안하게 살았을지도요.”

덥석. 나는 팔에 치이는 감각에 시선을 옆으로 흘렸다. 어느새 리케도르안이 내 팔뚝을 잡고 있었다.

아프지는 않았다. 그저 옷을 쥔 하얀 손을 보며 잠시 상념에 잠겼을 뿐.

짐승 버전의 그가 이렇게 잘 잡았었지, 하고 말이다. 낑낑대면서.

“잊었다고?”

그래.

……지금처럼 이런 표정으로.

“저라면 그랬을 거란 말이에요, 대공님.”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대신에 보일 듯 말 듯 옅게 웃었다. 그가 내 얼굴을 샅샅이 훑든 말든 모른 척하면서.

“대답이 되셨을까요?”

그의 손을 바라보면서 이야기하니, 손끝이 한번 파르르 떨린 것 같았다.

그러더니 속절없이 툭, 떨어졌다.

“……그래.”

고개를 들면, 갈무리하지 못한 표정이 엿보였다. 그는 흔들리는 눈을 잠시 손등으로 가렸다.

등 뒤에서 쏟아지는 조명의 세기가 약해졌다. 누군가 불을 하나 끈 모양이었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 짙푸른 눈동자가 드러났다.

“대답이 됐다.”

그가 입술을 짓씹듯이 뱉었다.

“아주, 잘.”

그의 음성에는 서리가 다닥다닥 붙어 찌르듯이 아프고 차가웠다.

“믿을 생각은 없지만.”

읊조리는 음성의 온도는 변할 줄 몰랐다. 나는 툭 뱉은 그의 말에 눈을 깜빡였다.

“어디까지나 참고 의견이니까. ……그래. 그렇지.”

리케도르안은 그렇게 작게 중얼거리더니, 고개를 느릿하게 기울였다.

“잊었다면, 잊게 두지 않으면 되니까.”

입안으로 들어간 작은 음성은 뒤로 갈수록 들리지 않았다. 나는 ‘잊었다면’을 겨우 들었을 뿐이었다. 이윽고 그에게서 혼란이 가득하던 표정이 차차 사라졌다. 이내 평온하게 돌아온 얼굴로 물었다.

“대답이 됐다. 그래서 네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지?”

그는 곧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애초에 하나씩 주고받기로 한 것이었으니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나는 이런 반응에 묘한 기분을 느꼈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작은 한숨을 삼키며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물러난 걸음만큼 팔을 쭉 뻗었다.

“대공님께 고양이 좋아하시냐고 물었던 것을 기억하세요?”

“기억한다.”

시간이 없었다. 난 더는 본론을 숨길 생각이 없었다.

“저는 대공님이 이 고양이를 키워주셨으면 좋겠어요.”

리케도르안이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어째서지?”

겨우 이런 걸 바라냐는 듯한 낯이었다. 난 속으로 웃음 지었다. 겨우 이런 게 아닐걸.

“들어주지 않겠다는 건 아니다. 하나 뜬금없는 말이군.”

“네, 저도 느꼈지만.”

나는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무례하고 이상한 제안인 것을 아는데, 사정이 급해서요.”

푸딩은 갑자기 들어 올려졌음에도 울지 않고 얌전했다. 내게 말을 걸지도 않았다. 어제 리케도르안을 마주 하고서부터 계속 이 상태였다. 충격받은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나면 좀 나아지려니 했다.

난 애정을 담아 엄지로 푸딩의 이마를 비비적 쓰다듬었다.

“제가 무척이나 아끼는 고양이인데, 사정이 생겨서 더는 키우지 못하게 되었어요.”

어차피 나도 내가 하는 말이 말도 안 되는 부분이 있다는 것쯤은 알았다. 하나, 상관없었다.

“저는 곧 떠나야 하는데…… 거처를 구할 수가 없어서요.”

오늘 밤이 지나면 더는 보지 않을 테니. 좀 머리가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면 어떤가.

나는 그야말로 필터를 거치지 않고 말하기 시작했다.

“누군가 대신 키우게 된다면 기왕이면 돈 많고, 잘생긴 사람이 좋아서요. 제 고양이가 호강했으면 좋겠어요.”

리케도르안이 떨떠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네가 내 추종자라고 했던가?”

“네, 그렇습니다.”

팬클럽을 대신할 말이 없어서 냅다 붙인 말이긴 한데, 어감이 조금 이상하긴 하다.

“제안한 이유는 이해했다.”

리케도르안이 곰곰이 고민하더니 이어 말했다.

“그럼 네가 내 저택에 와서 키우면 되지 않나?”

“네?”

폭탄을 툭 던져놓고, 그는 태연한 기색이었다.

“키우라고, 직접.”

……예?

“그렇게 아끼는 고양이라면 같이 가면 될 것 아닌가.”

아니……. 내가 진정한 애묘인이라면 그럴 수도 있긴 한데. 아니아니. 잠깐만. 푸딩을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닌데……. 이건 좀 너무 파격적인 제안 아닌가.

“네 말대로 내가 키우는 것이니 나도 들여다보지. 하나 모든 시간을 할애할 수는 없어.”

그는 갑자기 논리적이었다. 논리적으로 앞뒤 좌우를 설명했다는 거다.

“네가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나, 정황상 타 가문이나 다른 지역이겠지? 그곳보다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겠다.”

조금 전에 모르는 하녀를 붙잡고 너라면, 운운할 때는 언제고. 왜 갑자기 타당하고 합리적으로 말하는 건데.

“내게도 이 고양이를 맡아 전담할 사람이 필요하다. 그걸 네가 해라.”

내가 실제로 고양이를 맡기려 했다면 정말 반가운 제안이었다. 그래 단순히 환경상 키우지 못하게 된 거라면 말이지…….

내가 도뮬릿에 묶인 처지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나는 어색하고 난감한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

“말씀은 감사드리지만…….”

“어째서 거절하는 거지?”

리케도르안은 고개를 갸웃했다.

“체이서 루브 도뮬릿에게도 같은 제안을 받았을 텐데.”

나는 멈칫했다.

어……. 낮의 대화를 들었을 거란 생각은 했는데, 이걸 언급할 줄은 몰랐다. 그의 신체 능력이 예사롭지 않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 않나.

“물론 공작의 의도는 나와 달랐겠지.”

심지어 체이서를 깠다. 아주 적나라하게.

“나는 더러운 제안은 하지 않아.”

대답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머리가 내게로 기울어졌기 때문이었다. 그의 눈으로 얼핏 서릿발같은 것이 스쳐 지나갔다.

“아니면…… 설마 이미 도뮬릿의 제안을 받아들인 건가?”

가까워진 만큼 그림자에 잠겼다. 그의 얼굴이 일순 어둠에 잠긴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니요!”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내가 걔 제안을 왜 받아들여?

“받아들였다면 전 지금 공작님의 방에 있지 않았을까요?”

여기까지 말하니 리케도르안도 수긍한 기색이었다.

“뭐 어쨌거나, 받아들여주면 좋겠군. 그토록 아끼는 동물이니 직접 키우는 쪽이 좋지 않은가?”

아무래도 이쪽은 호의로 제안해준 것 같은데. 체이서와 같이 뒤가 구린 느낌은 들지 않았다.

생각해줘서 참 고마운데…….

다시 한번 거절을 하려는데, 문득 내 손이 절로 올라갔다. 리케도르안이 푸딩을 잡고 있던 내 한 손을 빼내 제 입술로 가져왔으니까. 내 손등에 닿을 듯 말듯 입술이 스쳤다. 접촉도 아니건만. 등줄기가 곧게 퍼졌다.

금욕적이고 정결한 입맞춤은 오히려 야릇한 상상력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이미 그가 내 손을 붙잡고 어떤 짓까지 했는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받아들여 줬으면 좋겠어.”

그가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기억 속 청아하던 목소리는 몹시도 낮아져 있었다.

시간이 흘렀다고 쩌렁쩌렁 선언하듯.

“네게 고마워하고 있으니까.”

한낱 하녀에게 귀족에게 하듯 인사를 남긴 건 그가 말한 고마움에서인 듯했다. 존중의 의미였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낀 인간에 대한 호의니 받아 들여주면 좋겠군.”

역시나 이런 호의는 참 고맙고 고마운데 말이지…….

어떻게 거절을 해야 하나. 그냥 냅다 푸딩이를 품 안에 던지고 도망가 버릴까, 실현 가능성 적은 도피성 생각까지 미쳤을 즈음이었다.

“그리고 동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애정을 주도록 노력…….”

리케도르안이 돌연 손을 뻗어 푸딩의 머리를 만졌다. 그러더니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흠칫.

푸딩의 몸이 긴장한 것이 느껴졌다. 그 긴장이 전염되듯 나도 푸딩이를 품 안으로 가져왔다.

리케도르안이 한 걸음 물러나, 나를 노려보고 있었으니까.

“너, 정체가 뭐지?”

……왜 상황이 이렇게 된 거지? 당황스러웠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긋하게 풀려난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었다.

웨애애애옹!

푸딩이 돌연 길게 울었다.

-이, 인간!

푸딩이 나를 다급하게 불렀지만 대답할 틈이 없었다. 리케도르안이 한 손을 검에 올리고 있었으니.

“네가 뭔데, 왜 내 힘을…….”

리케도르안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 말에 대답해주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손에서 붉은빛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체이서가 힘을 쓸 때는 흑색이, 프란시아가 힘을 쓸 때는 백색이 돌았다. 자연히 저건 리케도르안의 힘일 터였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짙푸른 눈에는 오직 경계뿐이었으니까.

“바른대로 말해, 왜 네게서 내 힘이 느껴지는 거지?”

……나? 이 고양이한테서가 아니고? 나는 입술을 뻐끔거렸다. 아무래도 그는 조금 착각을 한 듯했다. 이럴 때가 아니라, 오해를 풀어야 하는데.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대공님, 뭔가 오해를 하고…….”

“오해라고?”

리케도르안의 손이 움직였다.

“하. 내가 내 힘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지금 날 기만하는 건가?”

아니, 그러니까 그 힘을 내가 아니라 이 똥괭이한테서 느낀 거라니까.

“아니요! 그 힘을 어디서 느끼신 건지, 다시 생각해보세요!”

나는 결국 서론은 집어치우고 핵심을 꺼냈다.

“뭐?”

“잘 생각해보시라고요.”

리케도르안은 분명 프란시아와 접촉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수호신에 대해 모를 리가 없었다.

나는 리케도르안이 몸에서 푸딩을 빼앗기게 된 정황을 모른다. 시기를 통해 유추해 보건대 아주 어린 시절 일이라 기억 못 하는 건가, 추측만 할 뿐.

내 입으로 네 수호신이다, 하는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 정답을 알려주는 꼴이니까.

‘물론 여기까지 얘기한 시점에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꼴이지만.’

나는 그의 손에서 시선을 떼어내지 않았다.

“그 검 뽑으면 후회하실 거예요.”

내 음성에 확신이 실렸다. 동시에 그에게 혼란이 스치는 것을 똑똑하게 확인했다.

“부탁인데, 더는 묻지 않고 데려가 주시면 안 될까요?”

약간이나마 남아 있던 정중함도, 하나 마나였던 하녀 흉내도 집어치웠다.

“약속하셨잖아요. 들어주시겠다고.”

약속, 그 단어가 나온 순간 그의 얼굴이 묘해졌다. 그가 검에서 손을 떨어트렸다. 하나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 붉은 빛은 지워지지 않은 채였다.

-인간, 인간! 내 말을 들어라, 냥!

푸딩은 연신 웨옹웨옹 울며 앞발로 내 손목을 긁었다. 나도 듣고 싶은데, 상황을 봐.

나는 주춤 뒤로 물러났다. 이대로 쉽사리 받아줄 것 같지 않은데. 이제 어떡하지?

……정말 사실대로 말하는 수밖에 없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짧은 결심을 끝내고 그를 마주했을 때였다.

나는 흠칫 떨었다.

어느새 붉은 아지랑이가 피어난 손이 뺨 바로 옆에 있었으니까. 툭, 정말 가볍게 붙었다 떨어진 손이었다.

하나.

<아가씨, 알게찌?>

그의 뒤로 마쉬멜의 말이 둥둥 울렸다.

<이 마법은 생각뽀다 잘 풀린단 마리야. 주인님이랑 마주치면 안대. 특히나 쭈인님이 힘을 쑬 때는 절때.>

왜?

<본디 마법이랑 장미는 댸척점에 있는 물과 기름 가튼 관계니까.>

그가 말했던 이유는 이랬다. ‘장미는 기본적으로 마법을 풀어버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경고했다.

<풀릴 꺼야.>

사아아아.

한순간 뒤에서 강한 바람이 불었다. 내 뒤에서 몰려온 바람 덕에 나는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느새 길게 풀려버린 머리칼, 시야를 가린 머리칼 때문에 앞을 볼 수 없었지만…….

흩날리는 이 머리칼이 분홍색이란 것은 알았다.

나의 원래 머리색이었다.

‘들켰다.’

머리칼을 천천히 거둬내는 순간, 눈앞에 찢어질 듯 커다래진 눈이 보였다.

마침 타이밍 좋게 우리를 밝히던 마지막 불이 꺼졌다. 방의 불을 모두 꺼버린 모양이었다. 우리는 이 칠흑 같은 어둠 속 달빛만을 조명 삼아 침묵 속에서 마주했다. 침묵을 깬 것은 리케도르안이었다.

어둠 속에서 어렴풋한 표정과 턱 부분만이 겨우 보인다. 그가 입을 달싹였다.

그의 얼굴로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이 마구 스쳐 지나갔다. 계절이 바뀌는 것을 본 것 같았다. 한순간 온도가 올라, 들끓는 시선이 나를 간절하고도 애타게 담았다.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그는 말이 나오지 않는 듯 입을 몇 번 뻐끔거리다가 손을 뻗었다.

“이…….”

“안 되지.”

낮은 목소리가 가르지 않았다면, 그의 손이 뺨에 닿았으리라.

내 몸이 느릿하게 뒤로 당겨졌다. 단단한 것이 등 뒤로 닿는 것과 동시에 낯익은 향기가 느껴졌다.

“이아나, 찾았잖아.”

사람을 유혹하듯 진득한 향기, 이따금 지독하게 정신을 빼놓는 향기였다.

“이러면 안 되지, 대공.”

익숙한 목소리에 허리가 절로 펴졌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체이서였다.

“내 잠시 시선을 놓친 사이에, 내 것에 손대려 하다니.”

이에 리케도르안이 움찔했다. 그는 뻗었던 손을 제게로 가져와 쳐다봤다. 손이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리케도르안의 시선에서 차츰 흔들림이 가셨다.

“……네 거?”

그는 체이서에게 시선을 빼앗긴 듯했으나, 잠시 밑을 바라본 나는 알 수 있었다.

바닥에서 심상치 않은 검은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디선가 아스라이 음악이 들려왔다. 이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경쾌하고 우아한 음악이었다. 하나 기분 좋은 춤곡은 이 상황을 더욱 이질적이고 팽팽하게 느껴지게 했다.

긴장감으로 당겨진 공기 속에서 리케도르안이 눈을 살벌하게 빛냈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푸딩!”

나는 안고 있던 고양이를 작게 불렀다. 푸딩이 파르르 떨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푸딩을 재빨리 들어 올려 최대한 이 고양이에게만 들리게 속삭였다.

“가, 어서!”

지금이 기회였다. 체이서의 발밑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빛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다.

마치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감이 땡땡 경종을 울렸다.

거기다 체이서가 나를 알아챈 지금,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아니다. 없을 것이다. 상황이 급했다.

“지금이 기회야, 어서! 빨리!”

그러나 왜인지 이 회색 고양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손톱을 세운 발로 내 손을 마구 잡았다. 소매에 발톱이 걸리고 내 살갗을 긁었다. 그것조차 모를 만큼 다급해 보였다.

-시, 싫다, 냥!

싫다고? 나는 당혹스러웠다.

-왜, 왜…… 보내려 하냐 냥!

왜 보내냐니…….

그거야, 넌 리케도르안의 수호신이니까. 거기다 네가 가지 않으면 리케도르안의 목숨이 위험하다며. 자기마저 사라진다고.

그 말을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데. 이렇게 나오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싫다, 인간!

그러나 푸딩은 필사적으로 내게 손을 비볐다.

-부, 붉은 장미 후계자에게는 내가 더는 필요하지 않다!

푸딩이 그렇게 뱉었지만, 나는 쉬이 믿을 수 없었다.

-날 버릴 거냐, 냥……?

애옹애옹, 우는 소리가 구슬피 들렸다. 나는 멈칫했다.

푸딩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나는 짐승이 구슬피 우는 소리에 약했다.

<낑, 끼이잉, 낑! 끄응…….>

정확히는 짐승 흉내를 내던 소년으로부터 시작한 습관이었다.

-나, 나…… 안 갈래.

짐승이 필사적으로 울며 내게 매달렸다. 회색, 아니 은빛 털을 가진 고양이에게서 은발의 소년이 겹쳐 보였다.

-조금만…… 더 같이 있어, 있어 줘. 인간.

<약속. 지킬 거죠……?>

-버리지 마라, 냥.

다신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묻어둬서 더는 꺼내지 않겠다 생각한 기억이.

-……가고 싶지 않아.

<약속, 지킬 거잖아요.>

확신에 찬 척했지만 한없이 덜덜 떨며 나를 애타게 바라보던 시선이.

“이아나!”

울먹이는 소년이 지워지며, 그곳엔 완연한 성년이 된 그가 외치고 있었다.

쾅!

눈앞에서 붉은빛과 흑빛이 격돌했다. 푸드드득. 체이서의 짐승, 아퀼라가 커다란 날개를 펼쳤다.

“……정말 가지 않아도 돼?”

-가지 않을 거다, 냥.

“정말, 리, 후계자는 너 없이도 괜찮아?”

상황이 돌아가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여차하면 이대로 들어 리케도르안에게 던질 수도 있었다.

내 뜻을 알아차린 건지, 푸딩이 더욱 애타게 매달렸다.

-정말이다, 냥. 후계자는 내가 필요 없어 냥, 나는 인간 너랑 있고 싶다, 냥!

“……그렇게 말하고 탈이 나면 용서하지 않을 거야.”

내가 말한 ‘탈’이 무슨 의미인지 푸딩은 모르지 않을 터였다. 양쪽의 죽음이었다. 푸딩 쪽은 사라지는 거겠지만 내게는 죽음과 다르지 않았다.

푸딩은 대답을 망설였지만 곧 다시 한번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러고는 내 팔에 완전히 얼굴을 묻었다.

-……인간, 너는 외로워했잖아.

외로워했다고 내가?

그사이 검은빛은 다리까지 올라와 나와 체이서의 발을 감쌌다. 시험 삼아 움직이려 했지만.

‘발이 움직이지 않아.’

나는 어느새 거대한 검을 한 손에 든 리케도르안을 바라봤다. 내 시선이 향하기가 무섭게 그가 나를 바라봤다.

“사람을 납치하는 취미도 있었던가?”

리케도르안 눈이 증오로 가득 차올랐다.

“체이서, 네가…… 또. 또 내 소중한 것을.”

“오해한 것 같은데.”

푸딩이 매달리지 않은 손이 그대로 들려 체이서의 손에 잡혔다. 손끝으로 입술이 느껴졌다.

“이쪽은 처음부터 나와 있었어. 대공.”

체이서는 그대로 입술을 꾹 눌렀다.

“안 되지. 이쪽은. 내 이아나거든.”

내 이아나, 체이서가 이름을 담았다. 평소에 하던 내 동생 하는 호칭 대신에.

“……내 이아나?”

리케도르안의 눈이 어둠 속에서도 알아볼 만큼 커다란 지진을 일으켰다.

안타깝고, 또 의미를 알 수 없는 시선이었다.

리케도르안의 입술이 작게 움직였다. 할 말을 찾지 못한 것처럼. 잠시간 그는 길을 잃은 아이처럼 혼란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곧 정돈된 낯에서 날것에 가까운 감정이 터져 나왔다.

“왜?”

여기서 나는 느꼈다.

저곳에 3년 전의 그가 있었다. 아마도 약속 날 나를 애타게 기다렸을 17살의 리케도르안이. 나를 미워한다고 생각했는데. 아니, 지독히 미워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묻어두었다. 넌 날 미워하겠지 하고.

“가지 마.”

리케도르안에게서 울 듯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는 검을 놓고 손을 뻗었다. 체이서의 검은 빛이 그의 손목에 생채기를 남겼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마구 뻗었다.

파직, 파지지직.

억지로 파고든 손이 거의 나에게로 와 닿았다. 내가 조금만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손을 잡아, 이아나!”

손끝이 툭 닿았다.

“나랑…… 나랑 가.”

이대로 붙잡는다면 리케도르안을 잡을 수 있었다.

“……다시 만나자고 했잖아.”

그가 울먹일 듯 속삭였다. 나는 말없이 내 다리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검은빛은 허리까지 올라온 뒤였다.

“말했잖아요, 대공님.”

나는 탁, 그의 손을 쳐냈다.

“나는 이기적이고 뻔뻔하다고.”

다시 한번 미안해. 다리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야 이야기하지만, 처음부터 당신과 약속을 지킬 마음이 없었어요.”

왜 항상 타이밍이 이렇게 되는 걸까. 생각해보면 단 한 가지 결론이 나왔다.

……연이 아닌가 봐.

나는 작게 웃었다.

입 모양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건강해서 좋네요.’

그가 보았을까. 보지 않았어도 상관없었다.

‘잘했어요.’

나는 오래 전날, 이성이 있던 그에게 혹은 짐승 모습을 한 그에게 하듯이 작게 칭찬했다.

‘착해.’

이렇게 무사한 걸로 됐다. 홀로 각성한 것도 무사히 대공 위에 오른 것과 당신이 이룩한 것들도 사실은 뿌듯했다.

‘하지만 이번엔 진짜 안녕이겠네.’

한데 어째서 마지막 얼굴은 당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을까.

“안녕.”

다시 한 3년이 지나면 잊으려나. 그렇게 생각하면서.

한순간 스쳐본 그의 얼굴엔 더는 슬픔만이 담겨 있지 않았다.

“……누구 맘대로?”

구슬픈 애달픔 사이로 소름이 오싹 돋을 만큼 집요함이 느껴졌다.

마침내 그의 얼굴이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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