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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르멜라에서 사흘째. 리케도르안이 말한 상담 시간은 생각보다 아주 빠르게 다가왔다.
<아가씨, 산책운 다 헀냐?>
마쉬멜은 어제 낮부터 방 안에만 콕 박혀 있는 나를 보며 의아해했지만 한편으론 만족하는 기색이었다.
그저 금방 싫증을 냈겠구나, 여기는 얼굴이었다.
실제로 그와 공부하며 종종 있던 일이기도 했다. 나는 그가 가르치는 것에 흥미를 드러냈다가도 금세 잃었으니까. 이처럼 그는 내 스승이나 다름없었기에 말이 짧은 것이기도 했다. 체이서도 허락한 일이다.
어린아이한테 극존칭을 받는 건 묘한 느낌이라 내가 먼저 청한 일이기도 했고.
어쨌거나 나는 그동안 리케도르안에게 넘길 방법을 강구하느라 바빴지만 정신만 바빴던 게 아니다. 오늘은 하녀들 사이에 끼어 일을 도왔다. 방 안에만 있으려니 좀이 쑤시기도 했고.
누가 일손이 부족해 도와달라 찾아온 거기도 했다.
“어머나, 너 손끝이 꽤 야무지다, 얘.”
“그래요? 감사합니다.”
잠깐 일하면서 느낀 건 의외로 집안일이 적성에 맞다는 거였다. 돌아가면 전직할까. 엉뚱한 생각을 하며 동료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건 오늘 파티에서 쓰일 냅킨을 접는 일이었고, 이 냅킨을 옮길 거라나. 그래도 나름 평화롭게 돌아가네. 딱 그 생각을 했을 즈음. 일이 터지고 말았다.
쾅!
꺄악! 하녀 중 누군가 작게 비명을 질렀다. 애써 참았는지 반 토막 난 비명이었다. 눈앞에 벌어진 일에 나는 눈을 크게 깜빡였다. 놀란 건 동료뿐 아니라 나도 마찬가지라 심장이 콩콩 뛰었다.
여긴 십자로 교차 된 복도로 여기서는 저쪽 복도가 한눈에 보였다. 그리고 내가 서 있는 복도에서 멀지 않은 끝에서 먼지 바람이 폴폴 인다. 바람이 가라앉은 사이엔…….
부서져 내린 벽이 보였다.
“끄으으…….”
그리고 그 아래서 웬 사내가 신음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눈처럼 새하얀 은빛 갑주를 가슴에 걸친 기사인 듯했다.
갑주에 새겨진 붉은 장미를 본 순간,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는 먼지 너머로 고요히 서 있는 리케도르안을 봐서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맞은편에는 그와 견주어도 지지 않을 체구의 남자가 서 있었다. 늘씬한 실루엣을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체이서였다.
두 사람 간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느릿한 시선으로 바닥을 훑던 체이서가 침묵을 거두고 작게 웃었다.
“이런, 실수.”
그는 검은 장갑을 낀 손을 심드렁하게 탁탁, 털었다. 표정을 보아선 보란 듯이 저런 거다.
“내 갈 길을, 그대 부하가 막아서 이 사달을 만드니.”
체이서는 손으로도 모자라 구두 앞굽을 툭, 바닥에 내려놓았다.
“너무나 충성스러운 부하를 키우고 있군. 대공.”
리케도르안이 찡그린 채로 미소했다. 차디찬 낯이었다.
“사달?”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행동에서 금방이라도 달려갈 듯한 기세가 엿보였다.
“남의 저택 세간을 부수고, 애꿎은 기사를 잡아다 팬 공작의 변명치고는 대단히 조잡한데. 변명은 그게 단가?”
“아아.”
체이서가 빙긋 웃었다. 내게 하듯 다정한 웃음은 아니었다.
“그대는 기사의 입단속을 시키는 게 좋겠다 싶어.”
그의 붉은 눈은 여유로운 듯 낮게 가라앉아 있었으니.
“그건 내 기사에게 직접 듣지.”
리케도르안은 일견 성자 같은 얼굴로 삐뚜름하게 미소를 걸더니,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도뮬릿 공작의 심기를 거스르다니 기특하여 어떤 치하를 해주면 좋을지 모르겠다고.”
그 순간이었다.
쾅!
순식간에 사라진 리케도르안이 체이서의 옆에서 나타났다.
“이런, 그런 게 궁금하면 내게 물어주지 그러나?”
체이서가 든 책이 무언가를 튕겨냈다. 놀랍게도 떨어진 건 꽃잎이었다. 칼날처럼 빳빳해진 꽃잎.
“그대 기사가 불경한 시선으로 보지 않던가, 헤르님 공작? 따끔한 교육이 필요하겠다 싶었어.”
리케도르안은 옆을 보는가 싶더니, 빠악. 살벌한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나가떨어지는 인영이 보였다. 곰 같은 덩치의 커다란 기사였다. 그런 이가 리케도르안의 가벼운 검짓 한 번에 날아간 것이다.
“그것 참 고맙군.”
리케도르안은 자세를 살짝 낮춘 그대로 웃었다.
“겸사겸사, 그대의 어깨에 먼지가 앉았기에. 필요 없는 어깨인가 싶어, 치워 주려 하는데.”
체이서를 바라보는 리케도르안의 눈은 차가운 불 같았다.
“쓸모없는 짓만 하는 팔 같으니, 언제든 필요 없어지면 말해주게. 도뮬릿.”
푸르게 타고 있지만, 그 어느 것보다도 뜨거운.
“그대 부친처럼 세상에서 없애주지.”
체이서는 리케도르안의 검을 막아낸 엷은 막 안에서 여유롭게 마주했다.
“내 사지까지 챙겨주니 그저 고마운 마음이군. 난 또. 그대를 오해할 뻔하지 않았어.”
측근이 나가떨어졌음에도 체이서의 음성은 너그럽기만 했다.
“놀라울 만큼 깔끔한 기습에 쥐새끼도 이러지 않겠다, 싶을 만치 치졸한 인사인가. 의문을 가졌잖나.”
아울러 친우에게 하듯이 친근했다.
“하기야 하도 조용히 일을 처리하니. 쥐도 새도 모르게 쉬르멜라의 주인이 바뀐 것처럼 말이지.”
리케도르안은 비웃음을 돌려줄 뿐이었다.
“우습군. 내 것을 드러내는 게 무엇이 문제지?”
어느 쪽도 물러나지 않는 상황이었다.
‘워. 살벌하네.’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팽팽한 상황에서 돌연 움직인 건 체이서였다. 체이서는 나긋한 웃음으로 자신의 어깨를 툭툭 터는 것으로 모자라 그대로 돌아섰다.
돌아섰…… 이쪽으로 오잖아?
하필 체이서와 거리가 멀지 않았다. 여기서 허둥지둥 움직이는 건 오히려 눈에 띌 듯했다.
‘마쉬멜이 절대 눈에 띄지 말랬는데.’
제 주인이라면 내가 개미 새끼가 되어서 지나가도 잡아 올 거라며. 가만 보면 체이서를 지나치게 고평가하는 말이지만 일부는 동의했다. 흘끗 곁눈질하니, 동료 하녀는 허리를 깊게 조아리고 있었다. 주변 시중인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는 허겁지겁 그들의 행동을 따라 했다.
저벅저벅.
검은 구두가 시야에 들어왔다. 지나가는 걸음이 우아하고 매끄럽기 그지없었다.
지나가라. 지나가라. 얼른 지나가라…….
하나 곧 등줄기로 싸늘한 식은땀이 흘렀다.
우뚝.
마침내 내 앞을 지나갈 때 검은 구두가 멈췄기 때문이었다.
“흐음.”
머리 위에서 익숙하리만치 선명한 소리가 들렸다. 손바닥이 축축해졌다.
‘아직 푸딩을 넘겨주지 못했는데.’
들킬 것이 걱정되는 건 들키는 순간 일어나는 일을 너무나 잘 알아서였다.
‘강제 송환이겠지.’
그리고 앞으로는 마쉬멜도 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이는 시간이 지나면 바꿀 수 있으니 괜찮다.
푸딩을, 리케도르안의 수호신을 돌려주지 못했다. 채 이루지 못한 목표가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그사이 체이서 손을 뻗었다.
“고개 들어볼래요?”
나긋나긋한 목소리였다. 하나 내게 하듯이 다정한 음색은 아니었다. 여기에 가능성을 느끼며, 머리를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가슴 즈음에서 시선을 멈췄다.
“더.”
하나 체이서는 이런 나를 그냥 두지 않았다.
“더 들어요.”
결국 숨을 삼키며 고개를 완전히 들었다.
마주한 시선은 잔잔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배불리 사냥하고 만족스럽게 늘어진 짐승의 형상이 그의 뒤로 어른거리는 듯했다.
“혹시 어디 소속이지?”
나도 모르게 내 옷을 내려다봤다. 살짝 회색빛 도는 검은 옷이 이렇게 반가울 데가 없었다.
<어머, 어떡해! 미안해!>
한 시간 전. 물동이를 이고 가던 하녀의 실수로 옷이 흠뻑 젖어, 이곳의 옷을 임시로 빌렸던 참이었다.
운이 이렇게도 따르는구나.
“보, 보시다시피…….”
나는 일부러 말을 떨 듯 더듬었다. 체이서, 나 아니야. 시위하듯이.
“아, 쉬르멜라 소속.”
체이서 또한 한눈에 알아본 듯했다.
내가 보기엔 가문마다 입는 하녀복이 비슷비슷한데, 어찌 알아보는지 모를 일이었다.
“흐으음, 참 이상하네. 낯선 여인에게서 반가운 기분이 드니.”
체이서가 손끝으로 제 턱을 비비적 문질렀다.
“첫눈에 반한 건가?”
옆에서 누군가 헉, 숨을 삼켰다.
“아니면 이것도 연인가?”
나는 내밀어진 손을 얼떨떨하게 바라봤다. 손을 달라는 건가? 내가 머뭇, 망설이면서 손을 주자 체이서는 손등에 입을 맞췄다. 내게 하듯 손끝에 진득하게 남기는 방식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상한 생각이 들긴 했다. 이건 절대 그냥 하는 인사가 아니었으니까.
“혹시 그대 저택을 옮길 생각은 없나? 도뮬릿은 좋은 곳이지.”
……얘 지금 나 꼬시나?
내가 실제 쉬르멜라의 하녀였다면 씨알도 안 먹힐 소리였다.
도뮬릿의 악행은 시중인들 사이에 자자하게 퍼져 있었으니까.
“이런, 농이야.”
체이서는 그리 말하고는 내 손을 놓아주었다. 자유로워진 손에 안심했다.
“하지만 생각이 있다면, 이 밤이 지나기 전에 내 소속 기사에게 말하도록.”
체이서는 붉은 입술을 끌어올리더니 휙 고개를 기울여 귀로 속삭였다.
“내 방에 직접 찾아와도 괜찮고.”
고개를 숙였다뿐이지 주변 이들에게도 전부 들렸을 것이다. 목소리를 전혀 낮추지 않았으니까.
체이서가 그대로 물러났다. 체이서가 멀어지자마자, 동료 하녀가 고개를 들어 웬일이니! 하고 말하며 내 어깨를 퍽퍽 두드렸다. 그녀의 얼굴은 새빨개진 채였다.
“공작님 목소리 너무 좋으시다. 세상에.”
동료의 입은 조잘조잘 멈출 줄 몰랐다.
“이런 쪽에는 관심 없으신 분인 줄 알았는데……. 어머어머! 조금 전 목소리 들었니? 얘, 갈 거야? 응?”
“아야, 아야, 아파요.”
만난 지 채 3시간도 되지 않았건만 과하게 친화력이 좋은 사람이었다. 감방의 샐리가 생각나기도 하고……. 나도 여러모로 나쁘진 않았지만.
어깨는 좀 아팠다.
“왜! 도뮬릿 공작님, 여인에게 관심 주지 않으시기로 유명하잖니!”
그 체이서가 말이지. 참 아이러니하게도 세상 사람 모두 홀릴 것처럼 생겼으면서 여인에게 시선 한 번 준 적이 없단다.
그토록 많은 염문은 모조리 상대의 짝사랑이었다나. 심지어 남자도 있었댔지. 분명 책 속에서는 방탕한 이랬는데, 참 신기한 점이었다.
“어쩔 거야? 어쩔 거니, 응?”
“어쩔 거냐고 하셔도…….”
내일이면 도뮬릿으로 돌아갈 텐데요. 돌아가면 실컷 볼 인간이었다. 그럼에도 하녀는 신분 상승이 따로 있겠냐며 성화였지만.
“그냥.”
해프닝으로, 그리 말하려다 말고 멈칫했다.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면……. 복도 끝에 한 인영이 남아 있었다.
리케도르안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무서운 얼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