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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일은 필연이요,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설마하니 이런 식으로 재회하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전혀 말이다. 무려 3년 만의 재회에서 숨 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으니 평소 스스로를 꽤 뻔뻔하다 여긴 나조차 할 말을 고르지 못한 상태였다.
내가 한동안 대답하지 않자 리케도르안은 나름의 답을 내린 것 같았다. 나를 관찰하다 말고 눈을 좁히며 ‘하녀?’ 하고 중얼거린 듯했으니까.
그사이 그를 훔쳐볼 수 있었다.
그는 기억하는 것보다 더 커다란 키를 제외하면 완연히 성장한 그의 모습이었다. 3년 전 푸딩이를 통해 잠깐이나마 보았을 적 그때는 어두운 감방에서 보아서였을까. 밝은 곳에서 보니 더욱 반짝이는 은빛 머리카락이 도드라진다. 거기다 높고 길게 뻗은 콧날, 유려한 턱선까지. 그렇지않아도 청초한데 성숙함까지 더해지니…… 위험할 정도였다.
‘……정말 잘 컸네.’
속으로 한숨을 흘렸다. 허. 침은 안 흘렀지? 난 괜히 손등으로 숨을 훔치는 척했다.
“하녀가 이런 곳에서 무얼 하는 거지?”
이 말엔 조금 당황했다. 으음, 원래 이렇게 차갑게 묻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역시 시간은 사람을 변하게 하는 걸까.
“눈에 띄어 죄송합니다.”
눈을 슬쩍 굴리며 대답하려니 습관처럼 태평하고도 무심한 음성이 나왔다.
“산책하기 좋은 날씨라. 그만.”
그 말에 리케도르안이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입술을 달싹이더니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이대로 가버릴 법도 한데, 의외로 계속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왜 안 가는 거지?
나야 그에게 볼일이 있는 처지에 그냥 가버려도 문제긴 하나 이렇게 쳐다보는 건 부담스럽달지.
“내려오지 않는 건가?”
내려간다. 생각하지 못한 문제였다. 나 하녀였지, 참? 하녀는 내려와서 인사를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이 생각에 미치는 순간 난감해졌다.
‘지금 푸딩의 힘을 쓰고 있는데.’
앉아있는 곳은 높이가 있었다. 힘을 쓴 상태에서는 이 정도는 가볍게 뛰어내릴 수 있다. 문제는 평범한 하녀가 보이기엔 비범한 움직임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방법으로 내려가자니 생각이 나지 않았다.
……기어서 내려가야 하나? 그러나 이 또한 푸딩의 힘을 쓰는 동안엔 평범한 움직임은 안 나올 거다.
“……푸딩. 나 원래대로 돌려줘.”
나는 안고 있던 푸딩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몸에서 힘이 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대로 꾸물꾸물 움직였다. 다행히 나무는 여기저기 잔가지가 많았고, 내가 밟고 온 자리도 얼추 보였다.
그래. 조금 아슬아슬하지만 저걸 밟고 어떻게든 내려가면 되지 않을까. 이렇게 시도한 나는 한걸음 시도 만에 내가 아주 잘못 생각했음을 깨달았다.
‘더는 못 내려가겠어!’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제 와 푸딩의 힘을 빌리기도 뭐 했다. 리케도르안의 시선은 여전히 등 뒤에 꽂혀 있었으니까. 흘끗 돌아보면 그는 차가운 표정으로 관찰 중이었다.
에잇, 그냥 뛰어내리자.
온 힘을 다한 덕에 반은 내려왔으니, 괜찮을 것 같았다. 그렇게 밑을 한번 보고는 눈 딱 감고 뛰어내렸을 때였다.
“으아!”
생각보다 더 높잖아! 속으로 비명을 지르는데, 허리로 단단한 것이 감겼다. 내가 숨을 힉, 몰아쉬며 눈을 뜨면 바로 앞에 새하얀 낯이 있었다. 잘 빠진 콧날과 입술, 섬세하다 싶을 만큼 촘촘한 속눈썹이 깜빡 움직였다. 리케도르안은 나를 시리고도 무심한 시선으로 보더니 그대로 내려놓았다.
“부주의하군.”
얼음을 갈아 넣은 듯 서늘한 음성에 찔려 시선이 괜히 하강곡선을 그렸다.
‘음, 역시 아니구나.’
사실 그가 더는 내가 아는 모습이 아니라는 자각이 그에게 안긴 충격보다 더욱 컸다. 하기야 여기서 서운해 하는 건 양심이 없는 짓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리케도르안은 날 내려놓은 그대로 돌아서서 갈 뿐이었다.
“자, 잠시만요. 대공님!”
나는 황급히 뛰어서 리케도르안의 앞에 섰다. 그는 미려한 미간을 미미하게 찌푸렸다. 당장 ‘뭐지?’ 하고 묻는 눈에 나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냅다 푸딩이를 들어 그의 얼굴에 내밀었다.
“뭐 하는 건가?”
“저기…….”
나는 침을 꼴깍 삼키며 말했다.
“느껴지는 것 없으세요?”
냥?
어째서인지 푸딩이도 내게 말을 걸지 않고 냥, 한 번 울었다. 너도 긴장한 거냐. 리케도르안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나와 푸딩이를 번갈아 보았다.
“……난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대답은 그뿐이었다. 그는 그대로 자리를 떠나버렸다.
***
“아가씨, 왜 이불을 계셕 거더차고 있냐?”
마쉬멜의 방 안, 이불 밖으로 조그만 흑마법사님의 목소리가 둥둥 울렸다. 나는 이불 밖으로 고개를 슬쩍 내밀었다. 아니나 다를까 나를 한심하게 바라보는 얼굴이 있었다.
“왜 그로냐고!”
리케도르안과 재회한 지 반나절, 저녁이 될 때까지 이러고 있는 나를 이해하지 못한 시선이었다.
“이유라도 먈해죠야 알지 않겠나, 왜 구래?”
“……혼자 있고 싶네요.”
“요긴 내 방이야.”
알고 있다. 내 얼굴에 걸린 마법이 언제 풀릴지 몰라 방을 같이 쓰기로 했으니까. 말이 같이 쓴다지 저쪽은 따로 내준 서재에서 자고 온대나. 쓸데없이 매너가 좋았다. 아무나 붙잡아 물어봐야 6살짜리 흑마법사님을 흑심 있는 남정네로 보진 않을 텐데.
‘본다면 성적 기호에 큰 문제가 있는 거고.’
마쉬멜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아까부터 유룡 본 얼굴을 하고 이쪄?”
“유령이겠죠, 아니에요…….”
나는 그대로 다시 드러누웠다.
머릿속은 리케도르안과 만났던 순간을 재생했다. 리케도르안과 마주치고 나서야 문득 든 생각인데. 나는 그저 그에게 푸딩을 넘기는 것만 생각했다. 딱 거기까지만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 푸딩이 뭔지 알게 되면, 내 정체도 알게 되는 거잖아.’
푸딩을 빼앗고, 봉인한 사람은 체이서다. 내게서 체이서를 떠올리지 않을 리가 없다. 내가 감방에서 만난 이아나라는 걸 알게 되는 것과는 별개로…… 리케도르안의 손에 처단될지도 모를 상황이다.
물론 이아나라는 걸 밝혀도 문제다. 내가 체이서의 동생임을 아는 건 시간문제일 테니까.
‘그냥 눈 딱 감고 던져주고 올까.’
거기다 감방을 나왔다는 건 목의 구속구도 풀었다는 거고, 그걸 풀었다는 건…… ‘동반자’를 만났다는 소리다.
잘 흘러갈지 걱정했는데, 무사히 원작대로 흐른 건가.
여주인공을 풀어줄 때만 해도 내 미래는 괜찮을까. 걱정을 조금 했었는데 말이다. 일단 괜히 밀려오는 씁쓸함을 참고, 그에게 체이서의 끄나풀이란 오해를 받지 않으면서 푸딩만 던져주고 오는 방법을 찾아보자.
‘그냥 하녀인줄 알 때 던져버리고 튈까?’
그리고 푸딩이는 리케도르안과 둘이 남고 나서야 제 진짜 모습을 드러내는 거다. 그때 가서야 내 정체를 알아도 이미 나는 도뮬릿으로 돌아온 뒷일 테니. 상관없었다.
‘근데, 왜 얘는 아까부터 말이 없지?’
푸딩이 조금 이상했다. 이전 같았으면 꼬리로 나를 퍽퍽 치며 한심한 꼴은 그만 보여라, 마쉬멜과 자주 보더니 말투가 옮아 그 채로 잔소리를 했을 텐데.
푸딩은 고양이 모습 그대로 내 옆에 등을 보이고 누워 있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툭 등을 건드렸다.
“푸딩.”
콕.
“야.”
콕.
-하지 마라 인간, 냥.
탁. 꼬리가 침대 바닥을 두 번 두드렸다. 심기가 불편하다는 얘기였다.
“너 왜 그래? 어디 아파?”
나는 그제야 상체를 들어 올렸다. 마쉬멜은 저 인간이 또 그러려니 하는 눈으로 자리를 피해주었다. 저녁이라 자러 갈 모양이었다.
-이상하다, 인간. 이상해, 냥.
“뭐가?”
나는 마쉬멜이 문을 꼭 닫고 나간 것까지 확인하고서 눈을 돌렸다.
-인간, 그 인간이 진짜 헤르님의 후계자가 맞냐?
뭐? 나는 눈을 깜빡였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너무 이상한 얘기를 들었더니 대번에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당연하지?”
리케도르안은 틀림없는 헤르님의 후계자였다.
“왜 그래?”
-후계자가 아닌 것 같아.
“뭐? 어째서? 뭘 근거로?”
푸딩이 이제 숫제 몸을 휙 돌려서 내게 마구 파고들었다. 이전 종종 겁을 먹을 때면 내게 하던 행동이었다. 꼬리가 내 손을 휘감았다.
-그 인간……. ‘완성’을 했다, 냥.
각성이라니.
“그거 ‘동반자’를 만나면 하는 거?”
-아니다. 그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나를 만나야 가능한 걸 말하는 거다. 후계자는 나와 한 몸이 되어야 완전해진단 말이다. 냥!
귀를 잔뜩 구긴 채 푸딩이 파르르 떨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냥.
들릴 듯 말 듯 작은 음성이 새어 나왔다.
-후계자가 나 없이 완성됐다. 나 없이도 완전해졌다는 말이다, 냥!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아는 분야면 조언이라도 해볼 텐데 내가 무어라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정말 리케도르안이 후계자인지 느끼지 못한 거야?”
-사실은…… 느꼈다, 냥. 하지만 각성한 것을 느끼고 무서워졌다, 냥.
푸딩은 미지의 상황에 겁을 잔뜩 먹은 듯했다.
“네가 잘못 안 걸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네가 없어도 괜찮은 건 아닐 거야.”
나는 천천히 감방에서의 리케도르안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도 그는 성인의 모습을 보였다. 거기다 신체 능력이 우월했고, 감방에서 달릴 때는 힘을 쓰기도 했다.
나를 훌쩍 들어올릴 때는 또 얼마나 힘이 셌……. 큼큼.
만약 힘을 쓰는 데 각성이란 게 필요했다면 푸딩이 없는 그는 불가했을 일이었다.
그래. 그럼에도 성장한 모습을 보였었지.
‘제이르가 마법을 쓴 것과 관련 있는 건 아닐까?’
오히려 푸딩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염려가 들었다. 그때도 그는…… 성장한 모습을 겪거나 힘을 쓴 뒤에 크게 앓았다.
열에 달뜬 그를 보며 이러다 숨넘어가는 건 아닌가 걱정할 때도 있었다. 만약 지금의 모습이 구속구를 벗고, 각성하는 데에 푸딩이 없어 부작용을 겪어서 나타난 거라면, 적어도 이건 그저 열병에 시달리는 걸로는 끝나지 않을 부작용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훗날 생명에 큰 위협이 되는 건 아닐까?
나는 다급하게 속삭였다.
“아냐, 리케도르안에겐 네가 꼭 필요해.”
나는 내가 본 장미 셋을 생각했다. 다들 공통적으로 제 수호신을 오래 떼어놓지 않았다.
“내가 보증해.”
체이서의 수호신들도 간간이 내게 놀러 오는 것을 제외하면, 항상 그의 곁에 머물렀다. 리케도르안이라고 다르지 않을 터였다.
적어도 그것이 당연한 관계인 거다.
“일단 다시 확인해보자.”
쉬르멜라 회의는 총 3일에 걸쳐서 열린다. 그리고 3일의 마지막에는 작은 연회가 열리고, 그길로 파하고 다시 흩어진다.
오늘이 지나면 이틀이 남은 셈이었다. 적어도 리케도르안에겐 푸딩이 제 수호신임을 당장 티 내지 않으며, 푸딩을 완전히 넘기는 방법.
그럼 첫마디를 뭐라고 해야 하는 걸까.
***
“고양이 키울 생각 없으세요?”
그 말을 했을 때, 리케도르안은 황당하다는 눈이었다.
그래, 감히 하녀가 대뜸 이런 말을 하다니 당황스럽기도 하겠지. 물론 나도 당황스러웠다. 그를 바로 만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푸딩과 이야길 나누고 어서 넘겨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만날 길이 없는 거다!
마쉬멜은 내가 바람 좀 쐬겠다고 고집부린 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자유롭게 두는 데다 하녀로 위장까지 해줘서 눈에 띄지 않는 건 좋은데, 대신에 행동의 제약이 생겼달까.
고심 끝에 다음 날 혹시나 싶은 마음에 비슷한 시간에 어제 그 장소로 찾아갔는데, 거짓말처럼 그가 서 있었다.
기적 같은 우연이 아닌가.
심지어 호위나 보좌도 없이 혼자였다. 대공님이 이쪽 산책길을 좋아하신 거라면 나야 매우 고마운 일이었다.
“……갑자기 말을 건 것은 둘째치고, 어제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 것 같은데.”
그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무슨 하녀가 이딴 걸 묻느냐, 따지지 않아서 다행이긴 한데. 나도 할 말이 요원해졌다.
“그럼 동물을 안 좋아하세요?”
푸딩이 변형도 가능하니까 기호만 알면 되지 않을까.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그런데 하녀가 왜 내게 이런 걸 묻는 거지?”
“……죄송합니다.”
입장을 바꿔도 궁금하긴 할 것 같다. 대뜸 만난 하녀가 고양이 키울 생각 없냐니.
“혹시 네 주인의 질문인가. 넌 어디의 하녀지?”
이럴 수가. 난감한 질문이 돌아왔다. 생각 없이 도뮬릿 하고 말하려던 입을 탓했다.
“비밀입니다.”
대신 엉뚱한 말을 지껄이면서 잠시 망했구나 생각했다.
“고양이에 대한 건 개인적으로 궁금했습니다.”
감히 대공을 이렇게 대하는 하녀가 어딨어. 이건 네 뺨을 때린 건 네가 처음이야에서, ‘네가’를 맡은 여주인공급 무례함이었다.
……이래서 사람은 안 하던 짓을 하면 안 되는 거야.
나는 급속도로 식은 리케도르안의 시선을 느끼며 자기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도 피해자인데, 괜한 연대책임을 지고 있는 거 아니냐? 체이서가 저지른 똥인데 말이다.
그렇다고 리케도르안을 죽게 둘 수는 없으니까.
푸딩이는 리케도르안이 홀로 각성했다고 하지만, 푸딩을 3년 안에 다시 데려가지 않으면 죽을지도 모른단 전제에서 벗어났을 진 알 수 없었다. 아마, 벗어나지 않았을 거란 게 내 생각이고.
그런데 막상 무작정 넘겨주겠다고 이러고 있으니 이른바 현타라는 감정이 찾아와 나도 모르게 느린 한숨을 쉬었다.
“무례를 범해 대단히 죄송합니다, 대공님.”
허리를 푹 숙였다. 어쨌거나 수습은 해야지.
“실은…… 하녀들 사이에 대공님을 추종하는 작은 모임이 있습니다.”
오래전 팔라디스 아저씨가 떠벌떠벌 조언하던 것 중 하나를 떠올렸다. 대개가 사기 치는 것에 관한 조언이었다.
“제가 그중 하나이고, 대공 각하의 취향이 너무 궁금한 나머지 감히 신분도 잊고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용서해주세요.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아저씨 말이, 사람은 사람 사이에 숨기라 했다.
그 말인즉, 내 생각을 내 생각이 아니라 수많은 이들의 생각으로 만들어서 상대가 이상함을 느끼게 하지 마라. 뭐 이런 말인데.
사실 뭐 틀린 말도 아니다.
말이 추종자지, 내가 아는 말로는 팬클럽이고. 굳이 따지자면 나도 리케도르안을 좋아한다.
특히 얼굴, 그중에서도 우는 얼굴을 좋아했지.
“……고개를 들어라.”
고개를 숙인 채 들으니, 그의 목소리가 많이 낮아졌구나 싶었다. 머리를 들면 이제는 아주 높아진 시선이 느껴졌다.
다리 참 기네.
“무엇이 궁금하지?”
“……네?”
난 감상에 잠기다 말고 얼떨떨하게 반문했다. 그러다 리케도르안이 인상 쓰는 것을 보고 황급히 표정을 바로 했다.
“어, 죄송합니다. 제가 혹시 잘못들.”
“들은 게 아니다.”
리케도르안이 눈을 좁히며 말했다.
“보통 때라면 한가로운 잡담에 어울려줄 시간이 없다 딱 자르겠지만. 나도 궁금한 것이 생겼으니까.”
“……제게요?”
물어볼 거라니. 그 순간 아닐 거라 생각하면서도 등줄기가 오싹했다.
‘들킨 건 아닐 텐데.’
푸딩을 슬쩍 내려다보자, 푸딩은 이제 아예 외면하기로 했는지 리케도르안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넌 타 가문에서 온 하녀겠지?”
“네? 네……. 맞습니다.”
그는 어째서인지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서늘함이라. 이전의 리케도르안에게 가장 어울리지 않던 것이 매달려 있었다.
순진했던 모습이 사라진 뒤에는 서릿발 같은 차가움뿐이었다.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지만 그가 가진 색들이 이런 분위기를 더욱 크게 부각시키는 것 같았다.
“앞으로 웬만해선 나와 다시 마주할 일이 없겠지.”
그의 얼굴에 스쳐 가던 망설임이 완전히 사라졌다. 리케도르안은 고개를 기울인 채 입술을 쓸었다.
“그럼 답례로.”
“네.”
그 순간 바람이 불었다.
“……하나 해주면.”
“……네? 죄송합니다. 들리지 않아서.”
바람 때문에, 그리고 중간에 그의 목소리가 너무 작아지는 바람에 못 들었다. 뭐라고 한 거지?
“……상담 하나를 해주면, 네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했어.”
그의 말이 썩둑 짧아졌다. 묘하게 예전이 생각나는 말투라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아니, 당장 이런 것은 상관없는데. 부탁? 그가 하녀에게 말인가?
“제게 부탁씩이나 한단 말씀이신가요?”
“그래, 넌 내게 원하는 게 있는 것 같은데.”
그건 그랬다. 나는 슬쩍 푸딩과 리케도르안의 가슴을 번갈아 보다 작게 끄덕였다.
“있습니다.”
“그래, 그럼 교환하지.”
나는 뭔가 이상하다 싶으면서도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급한 건 내 쪽인 데다 손해 볼 게 없었으니까.
그나저나 대공씩이나 되는 사람이 이름 모를 하녀에게 할 상담이란 게 뭐지? 설마 안심시킨 척 데려가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려는 건 아니겠지. 체이서의 옆에서 잘못 길이 든 상상이 마구 뻗어 나갔다.
“그, 한데, 제가 들을 상담이란 게 뭘까요? 미리 여쭤도 될는지요.”
궁금하면 솔직하게 물어보는 게 낫겠지. 너무 직구였나? 다행시럽게도 그는 기분 나쁜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승낙하듯 고개를 작게 끄덕이더니 잠시 말이 없었다. 제가 제안했으면서도 망설이는 것 같았다.
“내가 오래 전 알고 지냈던 사람이 하나 있는데…… 그 사람이 내게 남긴 질문이 있거든. 이 질문에 답을 해주면 좋겠다.”
왤까. 기시감이 들었다.
“몇 년간 고민했지만 답을 내리지 못해서, 몹시 궁금하던 차야.”
“왜 그걸 제가…….”
“네게서 비슷한 느낌이 나니까.”
그 순간 리케도르안의 눈빛이 변했다. 날카롭게 벼려져 짐승같이 사나운 시선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흠칫 놀라 뒤로 물러나기도 전에, 그의 얼굴이 앞에 있었다. 리케도르안은 너무 가까워지지 않은 채로 고개를 내 어깨와 목 사이에 가져다 댔다.
“……분명 냄새는 다른데 왜일까.”
그러고는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그 느낌이 드는지.”
꿀꺽. 목울대가 넘어간다. 어찌 말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눈치챘나? 아니. 아니다. 저 눈과 얼굴에서 알아챈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화가 났다거나, 놀랍다거나, 당혹스러워한다거나. 그런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으니까.
나도 모르게 뺨을 더듬었다. 푸딩의 마법은 감쪽 같았다. 다른 건 몰라도 흑마법에선 체이서가 칭찬을 건넬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었다.
‘얼굴은 감쪽같이 변했는데.’
그럼 대체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한 거지?
“왜 말이 없지?”
아. 나는 퍼뜩 어깨를 떨었다. 어느새 제자리로 돌아온 리케도르안이 보였다. 나쁜 얘기는 아닐 텐데. 이리 말하는 그는 대수로울 것 없는 얼굴이었다.
“아, 네, 네. 좋아요.”
그의 말대로 내게 나쁠 것 없는 이야기였다.
좀 의문스러워서 그렇지. 나지막하게 영광입니다, 하고 덧붙였다.
“그럼 내일 저녁에 이곳에서 다시 보지.”
리케도르안이 장소와 시간을 말하기에 얼떨떨하게 끄덕였다.
지금 바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어? 내 이런 생각을 알아차렸는지 리케도르안이 무심히 덧붙였다.
“회의 시간이 다 됐으니.”
아. 그러고 보니, 마쉬멜도 회의 시간 운운하긴 했다. 이 시간엔 체이서도 회의실에 있을 테니 되도록…… 이 시간에 돌아다니라나. 아닌 척하면서 이것저것 잘 챙겨주는 조그만 마법사님이었다. 떽떽 거리는 마쉬멜을 떠올리다 말고 나는 손을 말아쥐고 웃었다. 그러다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럼 리케도르안도 슬슬 돌아갈 시간이란 건데.
왜 자꾸 빤히 보는지 모르겠다.
마법 지금 제대로 발휘되고 있는지 맞지? 내 얼굴 보이나, 얘?
리케도르안을 얼른 보내기 위해서라도 얼른 대답이나 하자 싶었다.
“네, 알겠습니다.”
한편으로 리케도르안은 회의실에서 체이서와 보게 되는 건가 싶기도 했다. 다들 막 도착한 어제는 가벼운 만찬만 했다고 들었으니까.
<분위기가 엉망이어따.>
그것도 리케도르안은 참석하지 않았다고, 마쉬멜의 투덜거림으로 알았다. 여기가 리케도르안의 영역이 된 거라면 여러모로 피 튀는 회의이겠구나 싶었다.
솨아아아. 바람이 부는 아래 귀를 매만지며 고개를 아래로 떨어트렸다.
나야, 내 일만 하고 돌아가면 되니까.
그사이 리케도르안의 발이 천천히 움직였다. 이제 가려는 모양이었다. 망토가 휙 흔들리고, 돌아서려는 그가 멈춘 것은 그 순간이었다. 그는 어째서 반쯤 몸을 돌린 상태에서 나를 다시 담았다.
“너.”
내게 휙, 휙 휘어지던 눈이 차가운 낯을 한 채 보는 건 역시나 적응이 되지 않았다.
“이름이 뭐지?”
리케도르안의 질문에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 고개를 숙이며 대꾸했다.
“베로니카입니다.”
리케도르안은 이름을 듣고서 기분이 살짝 나빠진 기색이었다. 미간의 못 보던 주름이 생겼으니까.
왜 기분 나빠한 거지? 물을 새도 없이 사라진 그에게 물을 시간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