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하녀의 시선이 느껴졌다. 단정하게 끌어올린 머리칼과 차분한 얼굴, 익숙한 사람이었다.
자주 보는 하녀 중 하나였다.
특이한 것이 있다면, 가끔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말을 걸거나 한번은 조심스레 간식을 몰래 건넨 것이랄까.
기억에 남았다.
“혹시 들고 가는 거 뭐야? 목록?”
하지만 오늘 여기 서 있는 목적이 있는 만큼 나는 얼른 고갯짓했다. 저 목록이 내가 생각한 게 맞다면 오늘의 목표였다. 내가 이곳에 멍하니 서서 기다린 목적 말이다.
“아, 네. 쉬르멜라 회의 참석자 명단이에요.”
쉬르멜라 회의, 이 제국은 무척이나 넓어 지방 세력을 견제하기 어려웠고 황실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매해 대도시 중에서 돌아가며 회의를 개최했다.
이것은 아무나 참석할 수는 없으며 오직 허락받은 고위 귀족만이 참여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체이서 같은 공작. 그리고 장례식에 참여한 이들에게 참석자를 묻는 질문이 있을 거라 들었다.
고위 귀족이 너나 할 것 없이 모인 자리니, 황실에겐 더할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으리라. 실제로 내가 찾는 기록지엔 장례식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의무적으로 참석하는 이들의 이름도 있을 거고.
장례식은 성당을 겸한 가장 넓은 홀에서 열렸고, 만약 오늘 누군가 기록지를 들고 간다면 이 길밖에 없을 거였다. 예상은 멋들어지게 맞아떨어졌다. 잠깐 봐도 되냐는 내 질문에 하녀는 망설이나 싶더니, 목록을 내밀었다.
“저, 아가씨는 나가지 않으시죠?”
“응? 그렇지.”
나는 무심하게 고갯짓했다.
“이거 때문에 어렵지 않을까.”
철그렁.
여전한 쇠사슬 소리가 유쾌하게 울려 퍼졌다. 하녀는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목록을 쭉 내려보며, 내가 찾는 이름 여부를 찾았고 확인하고서야 다시 내밀었다.
“고마워요.”
절로 흘러나오는 웃음을 막을 길이 없었다.
“가봐도 좋아요.”
하녀는 그런 나를 보다 말고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아가씨…….”
“응?”
3년이 지나도 내 말투는 존칭과 하대를 오갔다. 이건 잘 고쳐지지 않는 습관이었다.
“저희 어머니가 그러셨는데, 괜찮지 않을 때 웃는 것도 습관이 된대요.”
“……네?”
왜인지 하녀의 눈에 짧게 안타까움이 스쳐 지나간 것 같았다. 잘못 봤나.
그러나 더 물을 새도 없이 그녀는 인사 후 후다닥 가버렸다. 붙잡을까 무섭다는 듯이.
남겨진 나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뭐지?
“뭐야……. 내가 너무 뚱했나.”
-인간, ……너는 네 모습이 어떻게 보이는지 잘 모르는 것 같다, 냥.
3년이 지나 어느새 의젓한 목소리를 낼 줄 알게 된 푸딩이 대꾸했다.
내 품에 얌전히 안겨 있던 푸딩은 꼬리로 날 탁탁 두드리더니, 훌쩍 뛰어내렸다. 제법 커진 덩치가 고스란히 보였다. 이제 안기면 묵직하기도 했다.
-위대하신 이 몸이 슬슬 인간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느니라. 냥.
“뭐래, 징그럽게.”
나는 태연하게 무시하며, 등을 돌렸다. 한시가 바빴다.
-뭐냐, 왜 무시하냐, 냥! 인간! 인간!
웨옹, 왜애애애옹, 캬옹!
쟤는 분명 설표라고 했는데, 하는 짓은 고양이와 다를 게 전혀 없다. 같은 고양잇과라 그런가.
“시끄러워.”
찾아봤는데, 고양이 나이 3살이면 인간 나이로는 20살을 훌쩍 넘긴 청년기란다. 청년이 대신 푸딩, 이젠 푸딩이란 이름도 조금 언밸런스해진 청년기 설표님이 따라다니며 잔소리하는 것을 무시했다.
3년이 흘렀다.
시간이 흘렀다고 해서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저 내 머리카락 길이? 아, 그리고 슬슬 사교곈지 뭔지.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된 건 있겠다.
이 나라 법도 상 20살이 넘은 영식, 영애는 반드시 황실이 개최한 연회에 1번 이상은 참석해야 한다나. 그리고 이 시기엔 무조건 데뷔당트 연회에 참석해야 한단다.
내가 현재 22살이었으니 2년을 유예하고 참석하는 것이었다.
그게 언제라더라, 몇 달 뒤 열린댔나.
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몇 달 뒤면 늦어.’
계절은 봄이었다. 여름이 곧 다가올 시기였다.
3년이 지났다는 것은…… 지금쯤 원작이 제대로 시작되고도 시간이 꽤 흘렀다는 이야기다. 적어도 리케도르안이 감방에서 나올 시간은 되었단 거지.
나는 조금 전에 본 목록을 떠올렸다.
‘리케도르안 폰 헤르님.’
나는 보일 듯 말 듯 웃었다. 원작이 제대로 시작되었다.
그가 원수의 장례식에 참여했을 리는 없으니, 의무 참가자 명일 터다. 그도 그럴 것이 무려 대공이나 되는 이가 회의에 빠질 수는 없으니까.
나는 리케도르안이 대공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헤르님은 전대가 죽는다고 자연 계승되는 가문이 아니었다. 후계자라도 자격을 갖춰야 대공의 이름을 달 수 있다나. 여기에 리케도르안의 이름이 올랐다는 건 정식으로 대공이 되었단 얘기다.
-인간!
잔소리하다 말고, 먼저 지친 것은 푸딩이었다. 푸딩은 내 앞에 철퍼덕 드러누웠다. 서슴없이 배를 보이며 애옹애옹, 울었다.
-정말로 할 거냐, 냥?
나는 쪼그려 앉아 설표의 배를 쓸어주었다. 우리식의 화해 인사였다.
“해야지.”
-의기소침한 거 아니었냐, 냥.
“뭐 그랬긴 하지.”
나는 솔직하게 시인했다. 그를 만나러 가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웠었으니까.
“근데 3년이면……. 오래 지났지.”
3년이란 시간은 설레는 마음도 사라질 시간이었다. 그저 잠깐 지나간 계절이라 여기면서.
-이제 안 본다고 하지 않았나, 냥? 괜찮은 거냐. 냥.
“그건 그날 약속을 안 지킨 거고.”
3년 전 그날, 푸딩도 옆에 있었으니 모두 보고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와 리케도르안의 약속도 알고 있었고.
“이제 걔랑 잘 지내는 건 포기했으니까.”
갇혀 있긴 해도 소식 같은 건 간간이 들을 수 있다.
근래 들어 체이서의 세력이 부쩍 다툼이 잦아졌다거나. 기사단이 어디로 우르르 나간다거나. 들리는 소문을 조합해보자면 꽤 적극적이었다. 그럴 만도 한 게. 책 속에서 리케도르안이 감방에서 나와 가장 먼저 준비한 것은 원수를 갚는 일이었다.
“야, 너 이제 보내줘야지.”
3년. 푸딩을 처음 만났을 때 고지받았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푸딩이 리케도르안을 만나야 하는 시간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생명이 위험해진다고 했으니.
-근데 왜 하필 3년 뒤였던 거냐, 냥?
푸딩이 내 뒤를 졸졸 따르며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팔을 벌렸다. 푸딩이 기다렸다는 듯 품에 뛰어들었다.
“너 사고가 언제 가장 많이 일어나는지 알아?”
-모른다 냥,
나는 폭신한 머리털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방심할 때야.”
그와 연이 닿을 기회는 내 스스로 영영 묻어버렸지만, 이 사랑스러운 수호신을 그에게 돌려줄 의무가 남아 있다.
3년. 내가 말없이 기다린 이 시간은, 부디 그가 책 속처럼 완성되길 기다린 시간이기도 했다.
그가 좀 더 단단해지도록. 당장에 푸딩이를 돌려주려고 시도하려 해도 번번이 체이서가 마음에 걸렸다. 리케도르안이 약할 때 체이서가 수라도 쓴다면?
-……그 무서운 흑장미는 어떡할 거냐, 냥.
그는 죽이지 않고도 사람을 못 쓰게, 불구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방법을 얼마든지 않고 있었다.
“아아, 체이서 말이지.”
아니 그것뿐일까? 내가 준 상처를 마주 보고 싶지 않았던 거기도 했다. 난 내가 겁쟁이란 사실을 솔직히 인정했다.
그리고 이젠 더는 미뤄둘 수 없는 순간이 찾아왔다.
“괜찮아.”
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입술을 끌어올렸다.
“더는 후환이 두렵지 않아.”
체이서, 그 남자를 만나고 1년 뒤엔 이 남자가 내게 가진 집착의 깊이를 알았고.
3년이 지난 지금은.
내가 무엇을 해도 용서한다는 사실을 알았으니까.
“난 리케도르안을 만날 거야.”
***
쉬르멜라 회의는 순식간에 다가왔다.
이번 회의가 열리는 대도시, 쉬르멜라로 말할 것 같으면 도뮬릿의 영지에서 아주 가까운 곳이자, 황실만을 따르는 중립지역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비상중인 헤르님의 영역도 이미 기존 세력에 관해 장악력이 뛰어난 도뮬릿의 영역도 아니란 거다.
“그게 무슌 소리냐!”
마쉬멜이 탕, 탁자를 내리쳤다. 언제나 그렇겠지만 그의 조그만 손으로는 끄떡도 않는 책상이었다. 하지만 붉어진 손끝은 그의 기분을 보여주기엔 충분했다.
나는 체이서의 최측근이자 어려진 흑마법사를 빤히 응시했다.
“오늘도 참 앙증맞네.”
“뭐야?”
“아, 소리 내어 말했어요? 미안.”
마쉬멜은 곧 뒷목을 잡을 듯한 표정을 하더니 한 손으로 제 양 뺨을 잡았다가 놓았다. 오동통한 뺨이었다.
“안 대, 졀땨 안 댄다. 결쨔반대라고!”
“으음, 왜요.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고, 이상한 것도 아니고. 쉬르멜라 회의에 가고 싶다는 게 이상해요?”
나는 책상에 팔을 대고 뺨을 괴었다.
“나도 나가고 싶을 수도 있지.”
“누가 냐가지 마래? 몰래 갼다고 하니가 문쩨자나! 아가씨, 정신 챠려!”
“난 제정신이에요. 그리고 마시멜로 씨가 도와줄 거란 걸 잘 알고 있지.”
“누가 마시멜로야!”
3년이나 지났건만 발끈하는 부분이 여전했다. 이젠 적응할 만도 한데 말이다.
“쭈글 일 있어? 난 못 됴와.”
책 속에서 그는 충성스러운 부하였다. 하지만 현실에서 마주한 지, 3년. 생각했던 것과는 약간 다른 관계임을 알았다.
물론 충성하기는 하는데…… 여지가 있다는 소리다.
“흐음, 이렇게 나오기예요? 내가 이것저것 아는 게 있는데. 오빠한테 말해요?”
“뭐, 뭘…….”
“지난번에 쇠사슬로 실험해본답시고 내 손가락이 날아갈 뻔한 거랑, 쇠사슬 교체하면서 마법 하나를 깜빡해서 간만에 암살 당할 뻔한 거랑…….”
“…….”
“더 해요?”
이 남자는 체이서를 존경하고 따르면서도 동시에 아주, 매우매우 두려워했다. 뭐, 옆에서 보면 안 무서워하는 게 이상하긴 하다만. 워낙에 미친 인간이니.
나는 씩 웃었다.
“내가 바라는 건 어렵지 않아요. 그냥 잠깐 구경하고 싶다니까? 근데 이대로 가면 힘드니까 하녀인 척도 하고 캔디 씨가 얼굴도 좀 가려주고.”
“캔디가…….”
“아니죠. 네, 그럼요. 오빠한테 지금 바로 갈까요?”
“……이익.”
눈앞의 어린 얼굴, 오동통한 뺨이 빨개지고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정신은 성인이라지만 신체는 어쩔 수 없이 어린아이라 감정에 솔직했다.
이런 사람이 음울하다는 흑마법의 천재라니 신기하지만 말이지.
“으음, 오빠의 탄광에 자리가 남았던가…….”
“알아따! 알았따고!”
쾅쾅, 탁자를 두드리며 원통해하는 조그만 흑마법사님을 보면서 무심히,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악랄한 인간이다, 냥…….
그 모습을 보며 푸딩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며칠 뒤, 쉬르멜라 회의 당일,
도뮬릿은 회의 일정에 맞춰 이동했다. 고작해야 2시간 남짓 걸리는 도시였기에 다른 곳처럼 하루나 며칠씩 일찍 출발할 필요가 없었다.
쉬르멜라로 출발하는 날 오전, 체이서가 내 방을 찾았다. 정확히는 막 조찬을 하고 일어났더니 그가 밥을 먹으러 들어오는 게 아닌가?
나는 그가 앉는 모습을 보다 말고 앞에 앉았다.
“이아나?”
“먹어.”
나는 고개를 까딱였다. 신경 쓰지 말라는 듯이.
“혼자 먹는 밥은 빨리 식더라고.”
무심히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체이서와 사이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3년 전 그대로 멈춰 있는 것 같았다.
체이서는 그런 나를 묘하게 바라보다가 고개를 내렸다. 작게 웃는 것도 같았다. 그 웃음이 평소 같으면서도 이질적이었다.
그렇게 먹고 나서 내 방에 데려다준답시고, 함께 도착한 게 지금이었다. 그도 모자라 갑자기 내게 보여줄 것이 있다고 하더니, 뭔가 주섬주섬 꺼내더라.
“……그게 뭐야?”
나는 그의 손에서 나타난 것을 보고 아연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개 목걸이.”
“아니, 아니. 나도 개 목걸이인 건 알아.”
그걸 왜 할 것처럼 들고 있냐는 거지. 나는 황당했다.
“요즘 네가 지루해한다는 이야기가 들려서.”
“루머야.”
“한숨도 푹푹 쉬고.”
그건 몰래 나가는 거 고민하다가 쉰 한숨일걸.
“……오해야.”
“자극적인 게 필요할까, 싶었는데 네가 좋아하는 게 뭔지 고민해야 할 것 같았어.”
아니, 고민한 끝에 준비한 게 이거라고?
“이런 거, 좋아한다고 들었어.”
내가? 내가요?
금시초문이었다. 나는 이제 입마저 살짝 벌린 채 어처구니없음을 드러냈다.
간과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누가 그런 걸 좋아해?”
“음, 아니야?”
체이서가 개 목걸이를 입술에 톡 두드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감방에서 네가 헤르님의 후계자를 개처럼 가지고 놀았다던데.”
나는 이 순간 한숨이 터지는 걸 꾹 눌러 참았다.
“잠깐, 출처가 르, 아니 발테이즈 후작님 맞지? 그 후작님이지?”
말할 사람이 누가 있겠어. 어째서 이제 와 이야기한 건지 모를 일이었다.
“맞아. 들은 건 꽤 됐어.”
체이서가 손가락을 네 개 펴며 4년쯤? 하고 속삭였다.
아무래도 내가 감방에 있었을 당시에 들은 것 같은데. 왜 이제야 이러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체이서가 목걸이를 입에 가져다 댄 채로 배시시 웃었다.
“네가 좋아한다면 얼마든지 맞출 용의도. 있는데.”
“아니, 됐어. 그리고 안 좋아해.”
“정말? 숨길 필요는 없는데.”
그가 흐음, 하고 소리를 냈다.
“나무 막대기를 던지고 가져오게 하고, 짖게도 시켰다던데.”
“……와전된 거야.”
“그래?”
체이서는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출처가 감방 총관리장인데 퍽이나 그러겠다 싶었다.
나는 새삼 르나그를 원망하며 눈을 살짝 피했다. 체이서는 피한 시선을 좇아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아나.”
체이서의 손이 내 손을 잡아당겨 펼치게 만들었다. 그러고는 그는 제 얼굴을 거기 올렸다.
“……뭐 하는 거야?”
그의 눈이 반쯤 접혀 야릇한 미소를 지어냈다.
“짖으면 되나?”
그가 입술을 축였다.
“멍.”
미쳤나 봐. 나는 있는 그대로 속마음을 내뱉었다.
“……미쳤나 봐.”
체이서에게서 개목걸이를 뺏을 수는 없었다. 하나 결국엔 개목걸이를 든 채로 내 방에서 쫓겨났다.
‘왜 저렇게 기분이 좋은 거야?’
체이서의 얼굴을 얼추 알았는데, 오늘따라 기분이 매우 좋아 보였다. 식사하면서부터인 것 같은데. 내가 얼굴을 쓸어내리는 동안, 체이서가 밖에서 똑똑, 문을 두드렸다.
“나 다녀올게, 이아나.”
잘 지키고 있어 줘, 내 동생. 다정한 음성이 잇따라 들리더니, 이내 발소리가 뒤를 이었다. 나는 그 발소리가 완전히 멀어지기를 기다렸다가 들리지 않을 즈음 문을 열었다.
“푸딩, 준비됐어?”
애옹, 푸딩의 울음소리는 작은 주머니 속에서 들렸다. 좋아, 잘 들어갔네. 나는 방을 나서서 얼른 걸음을 옮겼다.
원래 내 방이 있는 복도에는 사람이 다니지 않는 데다, 오늘 있을 일정 때문에 아래층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혹시 몰라 머리까지 망토를 푹 뒤집어쓴 나는 마침내 한 방에 도착해서야 망토를 벗었다.
그곳에는 뚱한 표정의 마쉬멜이 있었다.
“……이게 잘하뉸 이린지 모르겠따 진짜.”
“그럼요, 잘하는 짓이지.”
나는 조그만 흑마법사님이 내미는 것을 얼른 받았다. 잠시 뒤, 칸막이 뒤에서 하녀복으로 갈아입고 나타났다.
“알고 있게찌? 너랑 나만 알아야 하뉸 비밀이다!”
“암 그럼요. 그럼요.”
오늘 가는 쉬르멜라 행에는 마쉬멜도 함께 간다. 그리고 나는 그의 시중 하녀로서 같이 가기로 했다. 아무래도 몸이 이 모양이라 그가 나갈 때면 꼭 한 명씩은 붙는다나.
“숀을 잡아.”
조그만 흑마법사님이 내 소매를 잡고 무어라 중얼거리자, 발밑에마법진 같은 것이 나타더니 검은 빛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눈을 떠, 거울을 보니 갈색 머리칼에 주근깨 있는 얼굴, 길을 가다가 흔히 볼 수 있을 것 같은 순한 인상의 얼굴이 나를 보고 있었다.
이야, 이거 효과 좋은데?
사람이 없을 때 움직여야 한다는 그의 성화에 얼른 움직였다.
마쉬멜이 체이서와 함께 간다고 해서 걱정이 많았는데,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쉬르멜라로 가는 마차는 10대가 넘어갔고, 그는 체이서와 타기는커녕 먼 마차를 탔다.
“쭈인님은 번짭한 걸 시러하신다.”
마차 안에서 나는 조그만 흑마법사님의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실컷 들었지만 한 귀로 흘려들었다.
곧 마차가 출발하고,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에 눈을 주었다.
‘정말 나가는 거구나.’
이렇게 쉽게. 하는 생각이 들었다가 지워졌다. 나가고 싶지 않은 건 아닌데, 부담이 너무 컸다. 체이서가 공작이 되면 조금 다를 줄 알았더니, 오히려 위협은 심하면 심했지 사라지지 않았으니까.
‘한동안 물밑싸움이 치열했지.’
얼마 전 있었던 도뮬릿 선대 공작의 장례식, 나는 이 장례식의 실상을 알고 있다.
선대 공작은 모종의 이유로 병환을 앓고 있었고, 체이서는 이 병환을 앓는 기간을 늘려왔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이 이상한 사람을 억지로 살려왔다는 거다.
오직 그가 만족스러운 시기에 공작 위를 계승 받기 위해서.
그렇게 그는 부친의 충성스러운 가신, 부하들을 모조리 치워내고서야 왕좌에 올랐다. 격차는 압도적이었으나 모든 싸움이 으레 그렇듯 잔인하고 잔혹했다.
그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옆에서 보며, 이렇게 원한이 쌓이는구나 싶었지만…… 애초에 체이서가 이기지 않으면 잡아먹히는 싸움이었기에 무어라 할 수는 없었다.
물론 체이서는 일신의 능력뿐만 아니라 주변에 유능한 부하가 많았다. 눈앞에 있는 이 조그만 흑마법사님도 외양의 단점에도 불구하고 체이서의 외출에 항상 위장해 따라 나가지 않던가.
‘신분이 뭐랬더라. 먼 친척의 아이랬나.’
생각하던 도중 마차가 멈췄다. 그리고 2시간을 연이어 떨어지던 조그만 흑마법사님의 잔소리도 드디어 멈췄다.
“됴착이다.”
창문 너머로 커다란 성이 보였다. 쉬르멜라다.
그리고 리케도르안이 있을 장소였다.
쉬르멜라의 영주성 정원에 멈췄을 때, 영주며 수많은 이들이 나와 체이서를 반겼다.
나는 몰래 뒤로 빠져나와 짐을 나르는 하녀들 사이에 끼었다. 아무리 신분을 위장했다지만 마쉬멜은 체이서를 따르는 측근이되, 눈에 띄어 좋을 것 없는 외형이라 따로 움직이곤 했다.
그렇다고 그가 움직일 때 같이 가기엔 체이서와 거리가 가까워져서 나는 따로 이동하기로 했다.
이 수많은 하녀들 틈에 묻혀서 말이다.
<쑬데없는 짓 하지 마시고, 빨리 와. 아가씨!>
염려와 걱정 가득한 마쉬멜의 음성이 귀를 스쳤지만 그는 염려할 것이 전혀 없었다.
나는 도망갈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으니까.
목숨을 위협받는 자유보다는 차라리 안락한 감금이 좋은데 왜 안 믿을까?
“얘, 그거 좀 옮겨줄래?”
“네에!”
나는 간드러진 음성을 흉내내며 열심히 짐을 옮겼다. 가끔은 다른 하녀가 내가 든 주머니를 보며 그게 뭐냐 물었지만, 내 개인 짐이라 하고 얼버무렸다.
푸딩아, 조금만 참으렴.
그렇게 하녀들 틈을 벗어난 건 그로부터 2시간 뒤였다.
“아이고, 허리야. 얘, 너도 고생 많았어. 가서 물이라도 마시고 올래?”
“네.”
같이 일하던 하녀의 친절한 권유에 나는 드디어 짐 더미에서 벗어났다. 나름 양심껏 일도 했겠다, 조그만 흑마법사님을 찾아 가볼 생각이었다.
‘그전에 구경 좀 해도 되려나?’
너무나 오랜만의 밖이었다. 그래도 밖을 향한 향수가 없었던 건 아니라, 발걸음을 정원 쪽으로 옮겼다. 어차피 마쉬멜의 방은 알고 있으니, 조금쯤은 괜찮겠지. 이 순간에 산책이라니 스스로도 조금은 태평하다 생각하면서.
쉬르멜라의 정원은 도뮬릿과 다르게 대개가 멋진 정원수로 이루어져 있었다.
나는 귀족들이 갈 만한 큰 길은 슬슬 피하면서 녹음을 마음껏 누볐다. 누군가를 마주치더라도 하녀복이 적절한 신분증명이 될 터다.
“푸딩.”
주머니를 향해 작게 속삭이자, 웨옹, 하는 울음소리가 돌아왔다.에고. 많이 답답했겠다 싶어 주변을 살피고는 얼른 천을 풀었다.
“괜찮아?”
-전혀 괜찮지 않다, 냥…….
푸딩의 얼굴은 지쳐 보였다. 나는 난감한 낯으로 웃으며 나무 근처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잠깐 나올래? 아, 근데…….”
얘 모습이 문제네. 설표의 모습은 너무 눈에 띄었다. 우연이라도 눈에 띄면 잊혀지지 않을 특이한 색과 생김새였으니까.
그러고 보니 아퀼라는 모습을 휙휙 바꾸던데.
“야, 너는 모습 바꿀 수 없어? 평범한 고양이라거나.”
푸딩의 귀가 쫑긋 움직였다.
-할 수 있다, 냥.
“그래, 못하더라도…… 뭐?”
된다고? 된다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장난해? 그럼 왜 지금까지 말 안 한 건데?”
-묻지 않았지 않냐, 냥!
푸딩은 당당했다. 나는 얼른 이 똥괭이의 뺨을 꼬집어 주었다. 하아아악, 하악질을 하는 요망한 코를 퉁 때려주면서.
-아프다 냥! 아프다고!
“뭘 잘했다고 울어. 응?”
-인간, 너는 손이 맵따! 냥!
“빨리 변신이나 해.”
곧 푸딩이 꾸물꾸물 움직이다가 모습을 변형했다. 털빛은 바꾸지 못하는지 영락없이 평범한 회색 고양이였다.
‘결국엔 고양이네.’
이 정도면 사람과 마주치더라도 눈에 띄지 않을 듯했다. 고양이가 된 푸딩이 내게 안겨 냥냥, 하고 울었다.
-그런데, 인간 좀 이상하다 냥. 분명 처음엔 되지 않다가…… 어느 순간부터 가능했다, 냥.
“변형 말이야?”
-그렇다, 냥.
그건 리케도르안의 상태와 관계가 있을까?
3년이란 시간 동안 변한 것은 리케도르안의 처지밖에 없었다. 푸딩은 이제 바깥 공기를 쐴 수 있는 것이 기쁜 듯 울음소리가 애교스러웠다.
‘이제 돌아갈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다 말고 문득 고개를 들었다.
와아. 조금 전까지 기대고 있던 나무가 생각 이상으로 컸다. 흡사 몇백 년 과장하자면 천년은 산 나무처럼 아주 굵고 우람했으며 높이 솟아 있었다.
어린 시절 마당의 나무를 오르던 기억이 떠올랐다. 다른 때, 저택에서 같았으면 전혀 하지 않았을 생각이 불쑥 솟았다.
“푸딩, 나한테 그거 좀 걸어줘 봐. 힘세지는 거.”
푸딩은, 냥? 하고 반문하면서도 내게 제 힘을 걸어주었다. 곧 몸이 가벼워지고 활기가 느껴졌다.
-엉뚱한 짓은 하지 마라, 냥.
3년간 이런저런 일에 써먹다 보니, 이게 걸어주는 것이 능숙했다.
“엉뚱한 짓은.”
나는 씩 웃고는 나무를 올랐다. 몸이 몹시도 가벼워 쑥쑥 올라가 가장 가까운 가지에 앉았다.
와. 역시.
2층에서 3층쯤 높이에서 보는 정원 풍경은 몹시 아름다웠다.
올라오길 잘했네. 건물 쪽을 바라보면 깨끗하게 닦인 유리창으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이들이 보였다.
무릎을 달랑달랑 흔들었다.
솔솔 불어오는 바람이 기분 좋았다. 안 하던 짓을 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그렇게 정원을 찬찬히 보던 나는 어느 부분에서 멈칫했다.
‘어라.’
눈을 크게 깜빡였다.
“……왜 붉은 장미가 저기에.”
있는 거지?
쉬르멜라의 정원 한중간, 중앙에서 오른쪽으로 치우친 곳에는 붉은 장미로 가득했다. 아니, 오로지 붉은 장미로만 채워져 있다. 나는 표정을 굳혔다.
봄이었기에 장미가 있는 것은 이상하지 않았으나…….
이 제국에서는 장미를 함부로 키울 수 없다는 법도가 있다. 특히나 저 색은. 귀족 사이에선 세력을 상징한다.
“……분명 여긴 중립지역이랬는데.”
현재 고위 귀족들이 모두 모이는 자리였다. 그런 곳이 정원에 붉은 장미를 키운다. 이는 하나밖에 없었다.
이곳이 리케도르안, 헤르님의 영역이 됐다는 것.
쉬르멜라가 헤르님의 밑으로 들어간 거다. 대체 언제? 분명 최근까지도 중립지역이라고 들었는데……. 내 일이 아님에도 절로 숨을 삼켰다.
이렇게나마 알게 된 리케도르안과 관련된 사실에 가슴이 쿵쿵 뛰었다. 설렌다기보다는 그가 정말로 이곳에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솨아아아.
바람이 불었다. 나뭇가지가 흔들리며 잎그림자가 춤을 추었다.이제 그만 내려가야 하나, 생각할 무렵 누군가가 나무 밑을 지나갔다.
키가 훌쩍 크고, 체격이 큰 남자. 무심코 시선을 주던 나는 눈을 크게 뜬다.
은발,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은발이었다.
“리…….”
리케도르안?
황급히 입을 막았다. 그러나 소리는 이미 새어 나간 뒤였다.
아니, 은발이라고 다 리케도르안일 리 없잖아?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그 일지도 모른단 감이 치켜들었다. 그도 그럴 게 나는 이미 알고 있다. 모를 수가 없었다.
……난 이미 성장한 모습을 봤잖아.
나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켜 소리가 흘러나갔다. 아주 작은 소리였으나 남자는 기민하게 반응하더니, 그대로 걸음을 멈췄다.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3년 만에, 푸른 눈을 마주했다. 정말로 리케도르안이었다.
“누구냐.”
하나, 다시 마주한 두 눈은 얼어붙을 것처럼 차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