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5/87)

***

―한 달 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그러나 흘러간 시간이 의미 없지는 않았다.

이곳은 여전히 한 해의 마지막 계절, 여름이었다. 모름지기 12월이 여름일 뿐 여름이 녹음의 계절인 건 마찬가지라 주변이 싱그러운 풀내음으로 가득했다.

도뮬릿의 정원에는 때에 맞지 않은 장미가 사시사철 피어 있었다. 하나 꽃의 색은 두 가지다. 주황색, 그리고 흑장미. 묻는 걸 깜빡했는데 말이다. 흑장미는 가문의 문양일터인데 주황 장미는 왜 키우는 걸까?

“여기!”

나는 꽃밭에서 꽃을 바라보다 말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멀리서 쪼르르 달려오는 인영이 있었다.

프란시아였다.

“찾았어요, 나!”

한 달이 그대로 스치듯 지나갔지만 이 시간의 의미는 바로 여기 있었다.

프란시아가 활짝 웃었다. 한 달 사이 그녀는 몰라보게 살이 붙은 얼굴이었다. 앙상했던 팔도 이제는 보통 아이의 것이라 얼추 표현할 만큼 좋아졌다. 놀라운 속도였다. 무엇보다 달라진 건 경계는 어디 가고 활짝 웃으며…….

“언니!”

하고 부른다는 점이다.

왼손을 가슴에 얹고는 윽. 내 심장이, 하고 중얼거렸다. 심장이 남아나질 않겠어.

볕을 반짝반짝 반사하는 머리칼에는 슬슬 윤기가 돌았다. 아직 살짝 패여 있지만 뺨에는 말간 복숭앗빛이 돈다. 내 노력의 대가였다.

이런 게 애 키우는 기분일까. 뿌듯함이 밀려왔다.

-인간, 나도 도왔다!

웨옹애옹!

-엣헴, 위대하신 이 몸이 찾은 것이나 마찬가지니라! 냥!

웨애애애옹!

“이 고양이는 너무 시끄러워요.”

“고양이 아닐걸.”

냅둬. 쟤는 요즘 자신이 맹수인지 고양인지도 모르는 똥괭이니까. 천지분간을 모르고 폴짝폴짝 나비를 쫓는 푸딩을 보며 잠시 고민에 잠겼다.

‘쟤, 저대로 리케도르안에게 보내도 되는 걸까…….’

……내가 너무 해맑게 키우는 기분인데. 애가 좀 뇌도 청순하고…….

내 육묘 이래도 되는 걸까. 고민하며 걸었다. 자연스럽게 작은 발걸음이 따라붙었다.

나는 흘끗 프란시아를 응시했다.

소녀는 경계가 무너진 순간 순식간에 마음을 열었다. 성벽을 찌른 나조차도 놀랄 정도로.

“몸은 좀 어때?”

그 말에 프란시아는 얼른 주변을 살폈다.

“괜찮아. 아무도 없어.”

가끔 주변을 맴돌던 아퀼라와 라탄도 없었다.

“많이 좋아졌어요. 이젠 회복도 될 정도로요.”

프란시아가 몰래 손을 폈다. 그녀의 손등엔 채 아물지 못한 상처가 벌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내 손등에 미미한 흰빛이 맴돌더니 놀랍게도 순식간에 상처가 절로 아물었다.

이는 흰 장미 후계자로서의 능력이었다. 회복. 그녀는 자가회복을 포함한 모든 치료가 가능했다.

“……장미들 중엔 너만 능력을 쓰면 그렇게 떠오르는 것 같아.”

프란시아의 왼쪽 눈동자에는 은은하지만 흰빛 장미 문양이 떠올라 있었다. 선으로 그려진 장미, 활짝 핀 장미 형상이었다.

가만 생각해보면 리케도르안이나 체이서가 능력을 쓸 때는 보지 못했지. 하나 리케도르안은 능력은 아니지만 장미 문양이 있었다.

바로 동반자를 찾지 못하면 떨어지는 문신 말이다.

“아닐걸요. 언니, 장미들은 모두가 몸 어딘가에 장미를 품고 있어요.”

프란시아가 언니! 하고 부를 때 기분이 뿌듯하면서도 묘했다.

원래 내가 여주인공 언니, 하고 부르던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반대가 됐으니까. 뭐 세상엔 이런 일도 저런 일도 있는 거고 좋은 게 좋은 거겠지.

“……내 오빠도?”

그렇게 물었다가 아차 싶었다.

그녀가 체이서에게 가진 증오와 미움은 도통 큰 것이 아니었다. 어째 책 속에서도 영 이유 없이 너무 미워한다 싶긴 했는데, 여주인공이나 악당이나 서로 만났다는 티를 내지 않아서 몰랐다.

특히나 프란시아는 전혀 티를 내지 않았는데, 뭐 불의의 사고로 기억이라도 잃나? 싶었다. 혹은 만약 이곳에서의 일이 끔찍해서 잊은 척한 거라면 그건 좀 이해 가면서도 안타까운 일이었다.

체이서가 내게 한 일을 여주인공에게 고스란히 했다고 생각하니 이해가 된달까. 잊고 싶었을지도.

“아, 아니다. 난 못 본 것 같아. 못 들은 걸로 해줘.”

“아니요…….”

그녀는 표정이 어두워지긴 했지만 멈추진 않았다.

“……나 그 남자의 몸 어디에 문신이 있는지 알아요. 왼쪽 가슴이에요. 언니.”

흡, 프란시아가 숨을 들이켰다.

“아버지랑 싸울 때 봤어요. 옷이 찢어졌거든요.”

나는 멈칫했다. 프란시아의 부친, 그녀는 훗날 아버지의 죄를 뒤집어쓰고 감방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부친을 입에 담는 프란시아의 눈엔 신뢰가 넘쳤다.

“그렇구나.”

나는 망설이다가 말을 돌렸다.

“다른 쪽 능력은 어때?”

“아, 그거요!”

프란시아는 두리번거리더니 밝게 웃었다. 주변에 아직도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쪼르르 달려 내 앞에 섰다.

그녀는 보세요, 하더니 아직은 가느다란 팔을 쭉 뻗었다.

이윽고 그녀의 손과 팔에 예의 흰빛이 맺히더니 꾸물꾸물 움직여 재빨리 하나의 형상을 맺었다.

나타난 것은 거대한 망치였다.

“이제 잘 나와요!”

“어어…….”

……이건 언제 봐도 놀랍네.

이미 체이서를 통해서 본 바, 장미들은 수호신을 제 전용 무기로 만들 수 있는 것 같았다.

체이서도 가끔 직접 나설 때면 라탄을 제 전용 무기로 탈바꿈시키곤 했다. 그 모습이 워낙 살벌해 별로 기억하고 싶진 않지만…….

이쪽도 위용이 대단했다.

아니, 저 물질 법칙을 위배하는 망치는 뭐냐고. 끝에서 번개가 살짝 이는 게, 피ㅇ츄……는 아니고, 음. 북유럽 신화 속 묠니르를 연상시켰다. 하기야 체이서가 불을 다루니, 여주인공이 번개쯤 다뤄도 뭐 그럴 수 있다고는 생각하는데.

어째, 갈수록 나타나는 비하인드 스토리들이 더는 19금 피폐소설처럼은 느껴지지가 않는데. 뭔 놈의 나오지 않는 설정이 빙산 밑둥 같나 싶다. 한가득이다. 책으로 치면 거의 초월 번역급이었다.

알고 보면 내가 판타지 소설을 읽은 건가 가끔 고민할 정도로 고민이 됐다. 물론 아직도 화끈한 3인용 씬들이 생생한 걸 보니 아닌 것 같지만.

프란시아는 신이 나서는 대단한 걸 보여주겠다며 정원수 하나를 조져놓았다. 참, 멋지긴 한데, 그녀는 부수고 나서야 사색이 되었다.

“괜찮아. 내가 보고 싶었다고 할게.”

이런 말 한마디면 체이서도 한 번쯤은 넘어갈 것이다. 그는 흰 장미의 능력을 아는 눈치였으니까.

사용인들은 조그만 흑마법사님의 마법으로 프란시아가 회복한 줄 알지만. 체이서만은 아니리라. 그만큼 그의 경계가 높아지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고민하는 사이, 시야로 프란시아가 발을 내밀며 짠! 하고 소리쳤다.

“이 아이도 잘 있어요!”

웨애애옹!

-인간, 저런 걸 막 들이대지 말라고 해라, 냥!

푸딩은 나보다도 먼저 반응했다. 앙증맞은 송곳니를 드러내며 하악질을 시작한 것이다.

눈앞에는 눈을 끔뻑이는 동그란 귀를 가진 생명체가 있었다. 새하얀 털, 두툼한 발까지. 언젠가 석화에서 보았던 흰 장미 옆 동물…… 바로 아기곰이었다.

“캬웅 아웅?”

아기곰은 프란시아와 같이 파이 아이를 고스란히 이어받아, 오묘한 녹빛이 잔잔히 섞인 홍채를 갖고 있었다.

인형처럼 귀엽긴 해도 크기가 프란시아의 작은 몸을 채우고도 넘쳐났다.

“귀엽죠?”

“……네가 완전히 각성하면 더 커질 거랬지?”

“네. 어른 곰이 돼요.”

어른 곰이라니. 쉬이 상상이 가질 않았다. 그저 지금 곰을 안고 있는 소녀가 귀여워 웃음이 나왔다.

“언니, 그때는 언니처럼 어른이 될 거예요. 성장할 테니까.”

18살, 성년의 나이임에도 유달리 작은 체구의 비밀은 여기서 밝혀졌다. 하얀 장미들의 특징이란다.

그리고 그녀는 그 시기를 얼마 앞두지 않았다고.

리케도르안과는 사뭇 다른 것 같아 물어봤다. 각성 조건이 장미마다 조금씩 다르단다. 수호신을 형상화하는 조건도 말이다.

푸딩도 비슷한 얘길 했었지.

“……그런데 왜 여기 잡혀 온 거야?”

줄곧 묻지 못했던 것이 툭 튀어나왔다. 생각하는 사이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다. 프란시아는 잠시 놀란 낯으로 나를 보긴 했지만 침묵하지는 않았다.

“아빠의 부탁을 들어주려구요.”

그녀가 어린 느낌이 불현듯 들 때는 지금처럼 아빠와 아버지를 혼용해서 쓸 때였다.

“아버지는, 그러니까 우리는 줄곧 어떤 사람을 찾고 있었어요.”

프란시아가 손을 꼼지락거렸다. 머뭇머뭇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다 추격을 받았고, 아버지는 범죄에 휘말릴 수도 있다며…… 사라졌어요. 체이서 도뮬릿과 다툼에서 나를 먼저 보내고 난 뒤의 일이에요.”

유쾌한 기억은 아닌지 프란시아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난 아빠의 부탁을 받아, 이리저리 헤매다가 신전에서 나온 사람들을 만났어요. 난 거기가 싫지만.”

“싫어?”

“자꾸 날 보고 성녀 하라 하잖아요. 그래서.”

신전으로부터도 도망쳤다고 이야기했다. 기억하는 여주인공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속사정이었다.

“도망치던 중에 아빠가 부탁한 일과 관련한 단서를 발견했어요. 그걸 알아내려고 무리를 했는데, 몸이 엉망이 되었고요…….”

“정말? 어떤 무리를 했기에…….”

괜히 안타까운 마음에 나온 말이었다. 그러니까 맹세코 그녀가 원하지 않는 말을 꺼내게 할 생각은 없었다는 거다.

그러나 프란시아는 입을 다물었다.

솨아아. 살랑살랑 부는 바람이 몇 차례 지나갔을까. 프란시아가 말문을 열었다.

“죽은 사람을 살리려 했어요.”

그녀는 기도하듯이 손을 잡은 채였다.

“저는 숭고와 정결, 회복의 하얀 장미니까요.”

조금 전 성녀도 싫고, 신전도 싫다고 말했지만…… 나는 결국엔 성녀가 되었던 그녀의 운명을 알았다.

“죽은 사람은 결정적인 단서를 갖고 있었어요.”

그래서일까 눈을 내린 18살 프란시아는 성스럽고 고결해 보이기까지 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할 수 있을 줄 알았죠.”

침울하게 중얼거리는 모습조차도.

“아빠가 그랬어요. 이걸 찾는 건 장미들의 숙명이라고.”

모든 것에 대부분 무심한 나라도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게 뭔데?”

프란시아의 서로 색이 다른 두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그녀의 수호신은 사라지고 없었지만 은은한 흰빛이 가호하듯 어려 있었다.

“푸른 장미요.”

프란시아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이제는 역사에도, 이면의 역사에도 도려내져서 사라져버린 것이죠.”

이어지는 뒷말에, 감방 속 석판을 떠올렸다.

누가 부숴버린 듯 뻥 뚫려 있던 푸른 장미를.

“그렇구나.”

한참을 침묵하다가 다시 말이 나온 때는 이미 정원을 모두 지나서였다.

나는 가까워지는 문을 보며 부러 말문을 틀었다.

“나가면 어디로 갈 거야?”

“다시 돌아다니다가…… 단서를 찾다가. 음, 확실하게는 모르겠어요. 가문 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져서. 그래도 신전에는 안 갈 거예요.”

좋지 않은 기억이 단단히 자리 잡았는지, 프란시아가 뺨을 부풀렸다.

“성녀는 안 해.”

“왜.”

나는 주먹을 살짝 그러모아 쥐고 입술을 막았다. 웃음을 꾸욱 참기 위해서였다.

저렇게 말해도 성녀가 될 텐데. 뒤에 가서 그녀가 나는 성녀다! 말하는 장면은 참 인상 깊었다. 따져보면 이게 웬 개연성 국밥이냐 싶으면서도 그녀가 성녀일 수밖에 없는 진행이긴 했다.

“싫어요, 신전에 잡혀 있고, 묶여 있고. 감금되다시피 한걸. 교황은 멋대로들 움직이는 게 당연하면서 성녀는 그러면 안 된대. 불공평하기 짝이 없어요.”

“교황?”

“네. 교황요. 신전의 우두머리 같은 거.”

들어보니 성녀와 비슷한 능력, 비슷한 직위를 가졌단다.

“그럼 교황 해.”

나는 가볍게 툭 던졌다.

“언니, 모르는구나. 교황 하려면 날 때부터 대단한 핏줄을 가지고 태어나야 한대요.”

“핏줄?”

“네. 그게 왜 중요한 건지. 금이라도 도배했나 싶다니까요. 그러니 내가 할 수 있겠어요?””

여기도 금수저란 개념이 있었나? 나는 살풋 웃음을 터트렸다.

“언니?”

“못할 건 뭐 있어?”

프란시아는 이제 뺨을 완전히 부풀리고는 못마땅한 눈으로 봤다. 제 뜻대로 이해하지 못할 때 이렇게 보곤 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음, 그래. 그냥 흘리듯 들어둬.”

내가 설핏 웃자, 프란시아가 멍하니 쳐다보며 끄덕였다. ‘언니는 자기 웃는 얼굴의 위력을 모르나 봐.’ 하고 뜻 모를 소릴 했지만 넘어갔다.

“지금은 네가 성녀 될 생각이 없고 신전에 갈 생각도 없지만 이건 만약에 간다 했을 때 얘기야.”

“간다면요?”

그녀가 호기심 어린 얼굴을 보였다. 나는 그녀의 미래를 가정하며 입술을 툭툭 두드렸다.

“나라면 교황을 내 손에 넣을래.”

감방에서 죄수를 옆에 두고서 보고 들은 건 범죄요, 악당 옆에서 듣고 본 건 공작뿐이었다.

“프란시아, 사실 이름은 큰 의미 없어.”

나는 쫙 손바닥을 펼쳐서 보여주었다. 그리고 천천히 오므렸다.

“중요한 건 어떤 힘을 가졌느냐야.”

지배당하기 싫으면 내 혀를 씹고, 이용당하기 싫으면 꼭대기 위에 서면 된단 말이 있다.

“끝에 가서 거머쥔 힘이 바로 내 이름이 되는 거지.”

나를 빤히 바라보던 프란시아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 힘은… 어떻게 가질 건데요, 언니는?”

“글쎄, 밑에서부터 조금씩 사람을 늘려가다가.”

권력은 사람의 손바닥이 겹쳐진 형상과 같다. 손바닥 뒤에는 다른 손의 손가락이 있었다. 손바닥에 가려 보이지 않게끔 교묘히.

“그러고 진짜 교황 하는 거지. 꼭두각시란 게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애한테 참 좋은 거 가르치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정작 이렇게 말하는 본인은 정치질에도 수작질에도 관심 없는 주제에.

뭐 어떤가. 꼭 국회의원만 정치 얘기하란 법 있나.

“네가 더 세다면, 그때는 망설이지 말라는 거지.”

사실 나조차도 프란시아가 실현할 거라 생각지 않았기에 가능한 조언이었다.

프란시아는 고개를 갸웃하며 내 손가락과 얼굴을 번갈아 봤다.

“……그러니까.”

그녀는 진지했다.

“내가 더 세면 망설이지 말고, 조지라는 거죠?”

으음. 체이서를 향해 죽어라, 망할 새끼야 하던 친구다웠다. 이럴수록 깊은 의문이 들었다. 아름답고 착한 영애는 3년 뒤에나 나타나나요?

“교황이 되면 그 악마 같은 새끼도 한 방에 때려눕힐 수 있을까요?”

……와, 애가 한결같은 게 정말 곰 같은 친구네. 그래도 내가 그 악마 같은 새끼의 여동생인데 말이지. 편들 생각은 없지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잊어버리라고, 한마디 했다. 그러고는 정원 문을 나섰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지만 마음 한구석은 줄곧 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언제 내보내지.’

탈출 시기는 계속 다가왔다. 안타깝게도 적기를 찾지 못했을 따름이다.

‘아니지.’

사실 시기는 적절한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체이서는 정기적으로 자리를 며칠씩 비우곤 했는데, 그 시기가 이번 달에도 찾아오고 있었다. 그게 3일 뒷일 거다. 오차는 2일 내.

따뜻한 여름은 곧 한해의 마지막을 맞이할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이만큼 흘렀다는 건……. 리케도르안과의 약속이 훌쩍 다가왔다는 얘기기도 했다.

<1년 뒤, 이, 이곳에서 벗어나는 날.>

<나, ……랑 만나주세요.>

시간이 벌써 이렇게 흘렀던가.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그와의 약속 날은 체이서가 외출하는 시기와 일치했다.

약속의 날.

프란시아와 보내며 줄곧 잊은 척, 잊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 날이었다.

“언니?”

“아. 아무것도 아니야.”

신중해야 했다. 실패해선 안 된다. 확신컨대 다음은 절대 없을 거다.

단 한 번.

이 한 번에 무조건 성공해야 했다.

……체이서에게 들키면 프란시아는 무조건 탄광으로 끌려갈 거다.

그러니 실패는 용납되지 않았다. 단 한 번. 이 한번을 절대적으로 성공해줄 수 있는 요인이 필요한데.

절대 실패하지 않는 그런 수가 필요했다.

복도로 들어서서, 저벅저벅 걷는 동안 나는 말이 없었다. 재잘재잘 말을 건네는 프란시아의 말에 어울려줄 뿐.

싱그러운 볕이 복도의 벽을 따사롭게 물들였다. 옆이 뻥 뚫린 회랑식 복도는 볕에 옆구리를 내어준 채 온화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 끝에서 나는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있으리라곤 모른 채 한참을 밑만 바라봤다.

조금 더 걸었을 때 옆에서 프란시아가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언니.”

그마저도 잔뜩 경계한 프란시아의 부름을 듣고서야 퍼뜩 앞을 볼 수 있었다.

“이아나 양.”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따뜻한 볕과 무척이나 이질적인 차갑고도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가 서 있었다.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얼려버릴 듯 냉혹한 눈, 이를 완화하지 못한 투명한 안경. 그리고 안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날렵하고도 커다란 체격까지.

르나그였다.

“오랜만입니다.”

바람에 늘어트린 그의 갈색 머리칼이 느리게 흔들렸다. 수틀리면 칼을 뽑아 들 것 같은 날 선 분위기도 보일 듯 말 듯 한 흐릿한 미소도 여전했다.

그러나 애써 부드럽게 편 얼굴은 차차 굳어졌다.

철그렁.

내 걸음에 쇠사슬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쳤다.

철컹.

한 번 더 바닥을 쳤을 때, 르나그의 얼굴에 가로줄이 생겼다. 이내 그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실례지만 이아나 양, 그건 뭡니까?”

왜일까. 그는 믿기지 않는 듯한 얼굴이었다. 어째서 세상이 무너진 듯한 얼굴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 쇠사슬요.”

나는 경계하는 프란시아를 토닥토닥 두드리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태연자약한 내 음성에 르나그가 손등으로 제 입술을 가렸다.

이어서 내 눈이 동그래졌다.

“나, 나는.”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 같던 살벌한 눈매가, 눈 밑이 붉어져 있었다. 그곳에서 진주알처럼 굵은 눈물방울이 하나도 아니고 뚝뚝 떨어졌다. 정말 처연한 모습을 자아내며.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왜 울어?

옆에서 프란시아가 내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저 사람 울어요? 하고 속삭였다. 쉿. 나는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댔다. 하나 이러는 나도 당황한 나머지 아무런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이 남자가 이토록 엉망으로 울 줄은 몰랐기에.

눈물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고 검은 원을 그려냈다. 애달프고 구슬프기까지 한 낯에 머릿속은 정지한 지 오래였다.

“……당신의 오빠가 한 짓입니까?”

목소리는 왜 또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리는 건지. 괜히 눈물에 휩쓸려 심란해질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미남이 울면 절경이라고 했다. 얼굴을 쓸어내리고 싶어졌다. 아니, 내 주변 남자들은 우는 게 취미인가. 왜…… 나만 보면 울지?

르나그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가 놓으며 달싹였다.

“이런, 이런 꼴을 보려고…… 당신을 내보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얼굴이 날카로웠지만 목소리만은 항상 부드러웠던 사람인데, 나직한 음성은 차갑고 딱딱하게 느껴졌다. 아니, 경직된 사람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가 굵고 큰 손으로 뺨을 만졌다. 어쩔 줄 모르는 사람같이.

나는 그제야 슬며시 입을 열었다.

“아니, 어……. 이게 르나그 탓도 아니고.”

자연스럽게 이름을 불렀다가 흠칫했다. 르나그 맞지? 마지막엔 이름을 불렀으니까…….

“어, 그러니까 후작님.”

“이름이 좋습니다.”

“예, 르나그…….”

음, 우는 중에 자기주장 확실하시네.

“저는 괜찮아요.”

저 소리를 쇠고랑, 아니 쇠사슬 차자마자 들었다면 아무리 나라도 찌이잉 와 닿았겠지만 적응한 지금에서야 신경 쓰이지 않았다.

아무 느낌 없었으니까.

“신경 안 쓰여요.”

그저 발을 툭 차고 웃었다.

“그러려니 해요.”

나는 뺨을 긁적이다가 손을 내밀었다. 머뭇거리는 손이 그의 팔을 톡 스치고 지나갔다.

그 순간 르나그의 표정이 더욱 흐려진 것 같았다.

“그리고 르나그 탓이 아니에요.”

그가 손으로 눈을 감싸 안았기에 오래 볼 수는 없었다. 턱 끝에 매달린 눈물로만 그가 아직 울음을 멈추지 못했구나 싶었다.

하얀 셔츠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당신 탓이 어딨겠어요? 그러니 그렇게 생각 말아요.”

진짜 아닌데. 이게 목숨도 구해줬고 말이지.

“……제 부주의 때문입니다.”

그가 손을 살짝 떼어냈을 때 빨개진 눈이 보였다. 안경 아래 날카로운 눈에 흠칫했지만 그보다는 떨어지는 눈물이 시선을 강탈했다. 이럴 때 손수건이 필요한데 내게 그런 세심함은 없었다. 프란시아라고 있지는 않을 것 같고.

프란시아가 눈을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 어색함이 가득한 얼굴인데, 호기심이 함께 깃들어 있었다.

조금 전 그녀의 수호신을 봐서인가, 내 뒤에 숨어 고개만 뻐끔 내민 모습이 이와 비슷해 보이기도 했다. 아기 곰 말이지.

“그보다는 저희 다른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분위기를 환기해보고자 그를 달래며 팔을 토닥이고는 말을 돌려보았다.

“어째서 여기 계신 거예요, 놀랐어요.”

책 속에서 체이서의 오른팔이었던 것과 다르게 지난 1여 년간 코빼기도 볼 수 없던 사람이었다. 하나 바쁘려니 했다. 감방 관리에 본인도 후작씩이나 되는 사람인데 직접 오가느니 부하를 보내지 않겠어?

내 노력이 통했는지, 아니면 가상했는지 르나그도 손을 떼어냈다.

살짝 붉어진 피부가 인상적이었다. 안경에 고인 물을 닦기 위해 벗었을 때, 나는 반쯤 내리뜬 눈을 보고 숨을 꼴깍 삼켰다.

다시 봐도 진짜 무섭고 날카롭게 생겼네.

검을 사람으로 만들어놓은 것 같았다. 너무 날카로워서 누구도 손을 대지 못하는 명검.

그런 사람의 눈에 눈물이 맺혀 있으니 이건 또 나름대로…….

“제가 여기 온 건 당신의 오빠에게 볼일이 있어서였습니다.”

때마침 르나그가 시선을 올리자마자 나는 얼른 시선을 피했다. 들릴 리 없을 텐데도 구경하다 든 생각을 들킬까 봐.

흠흠, 난 파렴치한이 아니야.

괜히 헛기침을 하며 환기했다. 르나그는 그런 나를 빤히 보다 한마디 했다.

“부하를 보내도 됐지만, 직접 오고 싶었습니다.”

“네? 아, 네.”

나는 끄덕였다. 감옥이 안락하긴 한데, 가끔은 답답하지. 이해한다.

“그런데 그는 저택에 없더군요.”

거기서 나는 멈칫했다. 체이서가 저택에 없다고?

“없다고요?”

“예, 밖으로 나갔다고 하던데, 며칠은 걸릴 거라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르나그를 반긴 건 집사와 조그만 흑마법사님이었던 모양이다. 잇따라 들려준 이야기로 알 수 있었다.

‘체이서가 외출?’

나는 그의 정기 외출을 떠올렸다. 이맘때 즈음 나가긴 했으니 때가 됐긴 한데…… 다른 달보다 빠르네.

나는 검지와 엄지로 아랫입술을 꾹 눌렀다가 떼어냈다.

만약 프란시아를 도망치게 한다면 지금이 ‘적기’였다.

‘이걸 놓치면 다시 한 달을 기다려야 해.’

그리고 다음 달엔 또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른다. 미래에 미지수를 남겨둘 순 없었다.

그럼…….

막 입을 떼어내려 하는데 눈앞에 손이 내밀어졌다.

“이아나 양, 저와 같이 밖으로 나가겠습니까?”

“네?”

갑작스러운 소리에 나는 얼떨떨하게 눈을 깜빡였다.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도와드리겠습니다.”

눈물이 멈춘 남자의 얼굴은 한없이 진지했다. 그래, 말씨가 부드럽긴 해도 한사코 예의 바르고 부드러운 남자였지.

“이미 한 번은 했던 일입니다. 두 번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 한 번이란, 감방에 받아들이고 그곳에서 편의를 봐준 일을 말하는 듯했다.

의아했다.

생각해줘서 해준 제안이 참 좋고, 고맙긴 한데…… 감방에서의 편의가 오빠의 명 혹은 청이었다면. 그렇다면 지금은?

“왜요?”

이런 걸 물을 때가 아님을 알았다. 그럼에도 솔직한 말이 튀어 나갔다.

“왜라니.”

르나그는 조금 당황했다. 이내 울기 전보다 더 담백한 음성이 돌아왔다.

“저는 당신의 약혼자니까요.”

“예?”

육성으로 놀람이 튀어나갔다.

누가? 누가 뭐의 뭐요? 내가 너무 놀란 얼굴을 했을까, 그가 더 놀란 얼굴을 했다.

“언제부터요?”

“……그야 당신의 오빠가 제안했을 때부터……. 제안을 덥석 받아들였지만…….”

“아.”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생각났다. 생각났어.

내가 이 책의 외전까지 돈 주고 구입했다는 것을 생각해냈다.

분명 책 속 조연 르나그는 악당 체이서에게 협조했다. 본편에서는 이 이유가 나오지 않았지만 그건…… 르나그가 체이서의 이름 모를 동생을 사랑했었기 때문이었지.

그래. 외전에서 그랬지.

‘약혼도 했었어?’

잊고 있던 사실이 수면 위로 떠 오르는 동시에 내 속은 퍽도 복잡해졌다. 이걸 왜 하필 지금 떠올린 거야! 더는 이 남자의 손을 이전같이 볼 수 없었다. 감방에서의 조금 이상했던 제안과 지나친 편의들도 이해해버렸다.

“아니, 아니에요.”

지금 나를 보며 뚝뚝 눈물을 흘렸던 얼굴마저도.

여동생을 사랑하는 건 알았는데, 약혼 관계이기까지 했어? 이거야말로 내 기억력 탓이다.

“……제안은 감사한데, 거절할게요. 당신이 싫어서는 아니에요. 르나그가 희생을 할 필요는 없어요.”

“희생이 아닙니다.”

나는 낯 간지러운 것들에 약했다. 내가 이 남자에게 가진 감정과는 별개로 나를 보는 시선이 목 뒤를 간지럽히는 것 같았다. 나랑은 거리가 멀었으니까.

“앞으로 함께 할 당신에게 당연한 거니까요.”

“아, 예…….”

이 남자의 간지러운 마음을 깨닫자마자 뺨이 근질근질한 것도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내 표정을 고쳐먹었다. 르나그가 체이서의 편이 아니라 내 편임을 안 이상.

내 뒤에 숨은 채 빼꼼 고개만 내민 프란시아를 느꼈다.

“그럼 저 말고 이 아이를 도와주세요.”

“아이?”

그는 내 편이었을 때 더할 나위 없이 든든한 아군이었다. 원래 나쁜 놈이 내 편일 때만큼 든든한 게 없더라고.

“네, 이 아이를 도와주는 게 절 도와주는 거예요. 이 친구를 밖으로 데려다주세요.”

또박또박, 울려 퍼진 내 목소리를 들었을 터였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가 잠시간의 시간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쉽게? 누군지, 아니면 이유라거나 묻지도 않고?

쉽게 대답했다고, 믿지 못하진 않았다. 이 남자는 알겠다고 한 것은 반드시 지키는 남자였다.

“들어드리겠습니다.”

그는 그리 말하며 다시 한번 손을 내밀었다. 전보다 더 내민 채로.

“당신도 나가십시오.”

네? 생각지 못한 말이었다.

“저 아이도 나가고 당신도 나갑니다. 내겐 어렵지 않습니다.”

끙, 어렵지 않기는. 날 내보내는 건 체이서와 척을 지는 거다. 내가 아는 것을 이 남자가 모를 리 없었다.

“어디로 가고 싶습니까?”

내 입술이 달싹였다. 막 튀어나오려는 말이 분명 있었다. 그러나 난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볼게요.”

그의 손을 잡았다. 손끝을 잡았을 뿐인데 르나그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시선을 피하며.

“이 아이를 데려다주고 나서 대답하면 안 될까요?”

여기서 간다고 하든 안 간다고 하든 시간을 잡아먹는다. 일단은 여주인공부터. 체이서가 나갔다면 빠르게 해결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프란시아가 내 옷자락을 꽈악 붙잡았다.

그녀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프란시아, 기억하지? 기회를 기다리다가 온다면.”

“……언제든 나간다.”

프란시아는 혼란이 어린 채로도 또랑또랑하게 대답했다.

“그래, 그거야. 기회가 왔네.”

그녀와 나는 약속했다. 아니, 언제 갑자기 나타날 이별에 미리 대응했단 얘기다. 그래서 이 순간에도 서로 당황하지 않았다.

“이쪽은 흰 장미의 후계자예요.”

“흰 장미의? 아…….”

르나그가 고개를 움직였다. 그의 안경 너머로 차가운 시선이 프란시아를 훑었다.

“알겠습니다. 사정은 이해했습니다.”

그도 흰 장미, 로제니아 가문과 체이서의 일을 모르진 않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협력자였으니까.

나는 르나그와 협의하여 지금 바로 프란시아를 내보내기로 했다. 르나그는 체이서가 자리를 그리 오래 비우지 않을 거라 예상했고, 나도 동의했다.

“프란시아, 조심해서 가고, 다신 붙잡히지 않아야 해.”

“걱정 말아요. 이제 몸도 나았으니까.”

프란시아가 씩씩하게 웃었다. 그러다 이내 울상을 지었다. 그녀는 우물쭈물하더니 다시 활짝 웃음을 지었다.

“언니,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요.”

그녀가 내 손을 꽉 잡고 눈물을 참았다.

“나…… 언니가 내 목숨을 구해준 거 알아요.”

여주인공은 비록 각성을 앞두고 신체 나이는 어렸지만, 속까지 그렇지는 않았다.

“내가 각성하면 황제 폐하의 눈치를 봐서라도 크게 움직이지 못할 거예요. 아빠가 그랬어요.”

여주인공이 제 가슴을 짚었다.

“나는 그 누구보다 강한 흰 장미가 될 거라고.”

그녀가 쓰는 무기를 생각하면, 쉬이 건들지 못할 것 같긴 했다. 갈수록 19금 피폐와는 거리가 멀어지는 듯해도.

“언니처럼 멋진 사람이 되고 싶어요.”

……나처럼? 양심에 찔렸다.

그사이 살랑 바람이 불어 밝은색 머리칼을 흔들어놓았다.

“언니, 내가 각성해서 멋진 여자가 될게요. 그때도.”

프란시아가 내 손을 꼬옥 붙잡았다.

“내 언니 해줘.”

나는 마주 웃었다. 그래, 하고 대답하면서.

길게 흔들리는 머리카락 뒤로 겹친 형상은 익숙한 얼굴이었다. 나는 과연 프란시아를 순수한 마음으로만 도왔을까? 누군가를 생각하지 않고, 겹쳐보지도 않고?

아니다.

이 순간에도 이런 생각을 했다. 리케도르안, 우리가 만난 시간이 조금만 더 길었다면… 나는 마지막 순간에 당신의 손을 잡고 웃어주었을까. 반드시 또 만나자, 약속을 하고 말았을까.

“또 봐, 꼭!”

프란시아는 짧은 인사를 남기고 저택을 떠났다. 내 손을 떠난 이상 이제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르나그가 나선 이상 일이 나쁘게 풀리진 않을 거다.

그런 믿음이 들었다.

<최대한 빠르게 돌아오겠습니다.>

르나그가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그렇게 두 사람이 떠난 뒤로 3일이 흘렀다.

르나그는 따로 연락이 없었다. 돌아오는 대로 바로 연락을 주기로 했지만.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아쉽진 않았다.

무소식이 희소식 아닐까.

나는 정원에 나와 멍하니 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체이서의 정원에 가득한 주황장미는 오늘도 활짝 피어 있었다.

‘곧 한해의 마지막.’

나는 개중 하나를 툭 건드리며 생각에 빠졌다.

체이서가 정기 외출을 할 때, 기간은 보통 일주일 정도 걸렸다. 그러니 3일이 지난 지금, 아직 돌아오기까지 4일이 남은 터.

그리고.

“날짜…….”

리케도르안과의 약속까지 이틀이 남았다.

체이서에게 물어본 적 있다. 여기서 감방까지 가는 데 얼마나 걸리냐고. 그는 대답했다. 공식적으로 가는 거라면 4일이 걸린다고.

르나그가 말해준 것과 일치했다.

<하지만 혼자 말을 타고 가는 거라면 다르지.>

체이서는 빙긋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지름길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설마하니 내가 감방으로 돌아가리라곤 생각하지 않은 듯했다.

<체첸, 그곳을 가로질러가면 이틀이 걸려. 이아나.>

“체첸.”

여기서 반나절 거리에 있는 그 도시는 도시라기보다는 무법지대에 가까웠다. 온갖 범죄와 도박, 향락이 교차하는.

그곳을 홀로 지나갈 수 있을까? 아니, 르나그에게 부탁하면…….

-인간, 표정이 왜 그러냐, 냥?

품에 안겨 있던 설표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 이 설표도 돌려주어야 하고.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

나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약속은 지키지 않으려 했지만.’

천천히 눈을 떴다.

“핑계는 충분하겠지.”

가야겠다는 마음을 숨길 생각은 없었다. 아니, 가고 싶었다. 감방이 좋은 건 아니었다. 편하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깔린 음울함을 좋아하지만은 않았다.

하나 설사 그런 감방에서 다시 지내더라도. 더는 그 남자가 사람에게 실망해서 울지 않기를 바라니까.

-인간? 인간? 어딜 가는 거냐? 냥! 넘어지겠다, 냥!

나는 황급히 돌아서는 것으로 모자라 걸음을 빨리했다. 뛰었다.

철그럭, 철그럭.

무거운 쇠사슬 소리가 내 발걸음을 따라붙었다. 이걸 어떻게 벗어나냐고? 나는 이미 방법을 알고 있었다.

조그만 흑마법사님은 이걸 벗는 방법을 안다. 그가 채웠으니까.

가끔 발목에 상처가 나거나 습기가 찼다고 징징 울면 한숨을 쉬며 떼주곤 했다. 체이서도 이 정도는 무어라 하지 않았고. 1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겐 이렇게나 가벼운 물건이었다.

그러니까, 방법은 있어.

길도 모르는 게 아니지 않은가. 이제 르나그만 돌아오면…….

“하아. 하아.”

정원 입구에서 발을 멈췄다. 아니, 절로 멈춰진 것에 가까울 것이다.

믿을 수 없게도 눈앞에는 체이서가 있었으니까.

“……오빠?”

다른 날과 다르게 내 음성에는 당황이 잔뜩 어려 있었다. 그럴 수밖에. 그도 그럴 것이 체이서의 몰골이 엉망이었으니까.

다 찢어진 옷과 흐트러진 머리칼. 검집은 어디다 버렸는지, 장검 끝에는 피가 말라붙고, 또 채 마르지 못한 피는 뚝뚝 바닥으로 떨어졌다.

체이서의 주변으로 손잡이부터 검날까지 새카만 단검이 둥둥 떠 있었다. 그의 수호신, 라탄이 변형한 무기였다.

“이아나…….”

그리고 이것들은 그가 비틀대는 순간 모조리 사라져 버렸다.

그가 저벅저벅 걸어왔다. 그의 걸음을 따라 손끝을 타고 피가 행적을 남긴다.

이상하지.

체이서가 피를 떨어트리며 오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피를 묻혀온 것도.

하지만 오늘따라 기분이 이상했다. 손끝이 떨리고, 심장이 둥둥 귀에서 울리는 것만 같았다.

그 소리는 체이서가 다가올수록 점차 커졌다.

왜지? 체이서가 처음으로 엉망인 몰골을 보여서? 머리도 흐트러지고, 옷도 찢어져서?

아니, 아니다.

가까이 다가올수록 깨달았다. 그의 손끝에서 떨어진 피, 저건 체이서의 피였다. 마침내 바짝 다가온 그가 고개를 숙였다. 입술까지 다가온 얼굴에 놀라 움츠러들었다.

하나 그의 얼굴은 내 얼굴을 스쳐 어깨로 툭 떨어졌다.

“잠시만…….”

평소라면 손부터 뻗었을 그가, 손은 꿈쩍하지 않은 채 말했다. 내 어깨에 이마만 가져다 댄 그대로.

“이아나, 잠시만 이대로 있어 줘. 부탁이야.”

그의 약한 소리에 꼼짝을 할 수 없었다. 연민과 경계가 파동을 그리며 마구 뒤엉켰다.

캬아아악! 하아아악!

어째서인지, 품 안의 푸딩이 풀썩 뛰어내려 체이서를 향해 털을 곤두세웠다. 꼬리가 위협적으로 세워지며 송곳니를 드러낸 모습이 처음으로 맹수같이 사나웠다.

왜 그러냐고 입 모양으로 물어도 푸딩은 이쪽을 보지 않았다. 체이서 또한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아나.”

체이서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을 보는 순간 심장이 쿵 떨어졌다.

설레서? 아니다. 영문 모를 불안이 심장까지 지배했으니까.

“드디어 죽였어.”

붉은 입술이 농홍한 미소를 지었다. 황홀하다는 듯이, 후련하다는 듯이.

“헤르님 대공을 죽였어.”

섬뜩하도록 아름다운 목소리가 가시처럼 가슴에 푹 박혔다. 어째서 이토록 아픈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이 남자에게 어깨를 허락한 것을 후회했다. 한순간이라도 흐트러졌던 것을, 정말 새카만 물은 아니라 믿었던 것을, 연민을, 후회했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가슴 속에서 무언가 사라지고 그 위로 검은 암막이 드리워지는 기분이었다. 연기처럼 흩어지는 것을 잡지 못했다.

나는 스스로 깨달았다. 약속을 지키자고 떠나려 했던 것은 그와 평온한 일상을 보내고 싶었던 거란 것을.

나는 그때를 참으로 좋아했다는 것을.

이젠 그와 평온한 일상을 보내는 것은 불가했다. 내 정체가 언제고 밝혀지면 결고 그 시간은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약속, 지킬 거잖아요.>

리케도르안과의 약조가 겨우 이틀이 남은 날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삼 일 뒤, 르나그가 이 저택을 방문했다. 그는 체이서가 있는 사실에 당황하긴 했지만, 기회를 보아선 내게 속삭였다.

떠나겠습니까?

나는 그리 제안하는 그를 물끄러미 보다가 화사하게 웃었다.

“아니요.”

시선이 교차하는 순간에 이 남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체이서가 나타난 지금은 더는 떠날 수 없었다.

부친이 리케도르안에게 가진 의미를 잘 알고 있다. 부친이 사라지고 나서 체이서에게 증오를 품었단 것도. 리케도르안은 앞으로 증오를 품은 채로 감방에서 칼처럼 벼려질 것이다.

<약속 지켜줄 거죠, 이아나?>

그리고 떠날 이유가 사라졌다. 약속 날짜는 지나버렸으니까.

2장. 원작이 시작되었다

-3년 뒤.

드넓은 제국에 단 세 개뿐인 고귀한 공작 가문, 이중 가장 강한 힘을 가졌다 칭송받는 곳, 도뮬릿. 도뮬릿 공작가는 다른 날과 다를 바 없이 몹시도 분주했다.

이곳의 주인인 도뮬릿 공작은 금욕적이고, 정결한 것을 좋아했다. 따라서 사용인들은 집사부터 말단까지 단추를 채우고, 항시 깨끗한 옷을 입어야 했다. 이는 항시 불편했지만 하녀복, 하인복에 돈을 아끼지 않는 데다 본인부터가 그런 모습이었기에 감히 토를 다는 이는 없었다.

이곳에 온 지 3년 차 되는 하녀 베로니카도 여기 해당했다.

“으으…… 무겁네. 무거워.”

주변 장식을 보며 중얼거리기가 무섭게 옆의 동료가 쉿, 하고 주의를 주었다.

‘알았다고.’

평소 조용하고 엄숙함을 요구하는 직장이긴 했으나, 오늘처럼 이렇게까지 빡빡하진 않았다.

베로니카는 주변 장식을 살펴보았다. 식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중간에 흐트러진 것은 없나 보는 것이다. 오늘은 다름 아닌 엄숙한 장례식 날이었으니까.

죽은 이는 도뮬릿 공작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도뮬릿 선대 공작이다. 2년 전 작위를 계승한 젊은 가주 체이서 루브 도뮬릿이 공작이 된 뒤로 뒷방에서 요양하며 한량한 세월을 보냈다 알려진 이였다.

젊은 시절부터 무수히 많은 악행과 악랄한 기행을 반복했으며, 패악으로 더 유명한 노인이었다. 그럼에도 이렇게나 조문객이 많은 것은 죽은 선대 공작이 아니라 젊은 현 공작의 권력을 증명하는 지표였다.

“우리 공작님이 최연소로 공작이 되신 거래. 공작님처럼 젊은 나이에 정식 작위를 받은 사람은 없다고 하던걸.”

“어머, 왜 없어? 그, 왜 그 붉은 장미…….”

“어우, 얘! 조용히 해.”

웅장한 장례식이 끝나감에 따라 사용인들 사이에도 여유가 살짝 생겼다.

“여기서 그분 얘기는 금지인거 몰라?”

“하기야 원수지간이었지…….”

베로니카는 동료와 함께 집사가 건넨 목록을 챙기며 흘끗 이야기 나눈 이들을 바라봤다. 하녀가 다른 하녀 입단속을 시키는 행동이 고스란히 보였다.

두 사람은 식장을 벗어나 저택 뒤쪽으로 향했다. 또 다른 건물로 향하는 중정 복도는 고요하기만 했다.

“어휴, 저렇게 입조심 안 하다, 조용히 사라지지.”

동료도 조금 전 입단속을 보았는지, 쯧쯧 혀를 찼다. 그건 맞는 말이었다.

베로니카는 그 말을 들으며 문득 한 기억을 떠올렸다. 3년 전 여기 막 들어왔을 즈음 저도 방정이었던 때가 있었다. 정확히는 눈이 방정이었다고 할까.

<못 보던 사람이네.>

그때 자신은 참 어렸고 서툰 하녀였다.

그래서 살면서 처음 본 아름다운 미인을 보며 표정 관리는커녕 빤히 보는 무례를 저지르고 말았다.

굽이치는 분홍빛 머리칼과 그 아래서 요목조목 이목구비가 들어간 작은 얼굴이나 무심히 깜빡이는 자색 눈을 보며 잠시나마 시간을 빼앗기지 않는 사람은 없을 듯했다.

그러나 그녀는 베로니카가 모셔야 할 주인이었다.

하나 그럼에도 두 번째로 시선을 떼지 못하고 발목을 본 순간 또 한 번 무례를 저질렀다. 사실 가녀린 발목을 감싼 쇠사슬을 보고 놀라지 않을 이는 없었을 거다.

그 순간만 생각하면 아찔했다.

<아, 내 발목?>

하나 무심히 눈을 내리며 피식 웃는 얼굴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을까?

<신기하긴 하지.>

다시 돌아가도 그건 어려울 터다. 아가씨는 베로니카보다 빠르게 베로니카의 시선을 알아차렸고, 쉬이 용서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그녀는 3년 뒤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이상한 아가씨셨다.

어느 날 감방에서 돌아왔다는 아가씨는 세상에 무심했고, 만사에 심드렁했으며, 흘러가는 물처럼 아무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염세적인 사람일까.’

무심한 건 맞을지도 모른다. 곁에 두는 것은 고양이인지 뭔지 모를 요상한 아기 동물과 가끔 찾아오는 약혼자뿐.

대부분은 정원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내곤 했다.

이 저택의 모두가 3년 전을 기점으로 그녀가 미소를 잃었음을 알았다.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원래도 잘 웃는 이는 아니었으니. 감방에 가기 전에도 그러했다나. 하지만 왜일까, 베로니카는 못내 마음에 걸렸다.

아가씨는 무정한 사람이 아니었다.

<한 번으로 끝내요.>

큰일 날라.

그날 쉿, 검지를 가져다 대며 웃는 모습만 해도 그러했다.

“어, 아가씨다.”

베로니카는 동료의 말에 얼른 고개를 들었다. 정말 눈앞에 아가씨가 서 있었다.

이아나 로즈 도뮬릿.

이 저택에 가장 귀한 보석과도 같은 이.

이아나는 검은 드레스를 걸치고, 멍하니 복도 옆 정원을 응시하고 있었다. 베로니카는 가녀린 실루엣을 흘끗 보며 절로 차분하고 처연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건 저 가냘픔 위태로움과 검게 드리워진 베일 때문이리라 생각했다.

실제로 이아나의 시선은 무심하기만 했다.

“아가씨를 뵙습니다.”

“아.”

이아나가 고개를 돌렸다. 이전과 다르지 않은 표정이었다.

“안녕.”

그녀가 성의 있게 손을 흔들었다.

장례 기간이기에 이아나 또한 상복을 걸쳤으나 그녀는 현재 장례가 열린 중앙 건물에 가지 않았다. 그녀의 오빠인 체이서의 명에 가지 못한 것이었다.

이곳이 그녀를 가둔 거대한 새장이나 다름없다는 건 저택의 사용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어느새 동료는 먼저 성큼 걸어가고 없었다. 동료는 아가씨를 부담스러워했다.

말을 걸었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까 봐 두려워하는 쪽이었다. 베로니카도 목이 달아날까 두렵지만…….

“……괜찮으세요?”

자색 눈동자가 베로니카에게로 돌아왔다. 이아나는 의아한 얼굴이었다. 그러더니, 아, 하고 제 베일을 만지더니 작게 웃었다.

“괜찮아.”

베로니카는 알고 있었다. 이아나는 저택의 주인인 체이서가 족쇄를 채운 것을 보고서도 저렇게 웃었으며.

“아버지긴 한데…… 별 느낌이 없어서.”

체이서가 피를 묻히고 나타나도 저리 웃었다.

“고마워요.”

가끔은 의문이 들었다.

아가씨는, 정말로 괜찮으신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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