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면인 줄 알았는데, 자장면 맛이 나는 걸 먹어본 적 있는가? 나는 없다. 하지만 비슷한 기분은 느낀 것 같다.
체이서가 그 말을 하던 바로 그 순간에 말이다.
나는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이아나와 체이서가 남매가 아니라니 이게 무슨 개연성 없는 소리야. 아니, 그래 내 쪽이 일찍 요절하는 캐릭터니까 양보하겠다 이거다. 하지만 그걸 치우더라도.
아니, 정말 이게 무슨.
“……무슨 개족보야.”
-개? 개를 찾았느냐, 냥?
얌전히 앉아 있던 푸딩이 머리를 갸웃했다. 귀가 쫑긋 움직이기도 했다. 그것으로 모자라 내 다리 사이를 지나다니며 머리를 부비부비 비비적댔다.
“야, 정신 사나워.”
웨옹?
“하지 말아 봐. 나 심각해.”
-왜 그러냐, 냥?
푸딩이 무슨 일이냐며 캬옹캬옹 울었지만, 나는 이 설표인지 괭인지 모를 동물의 머리를 밀어낼 뿐이었다.
체이서가 뜬금없이 폭탄을 떨어트린 뒤로 3일, 그는 아무렇지 않게 나를 대했다. 문제는 나는 전과 같이 그를 대하기 힘들어졌다는 거다. 아니, 당연히 껄끄럽지!
“……이제 좀 친근해졌나 싶었더니.”
이건 솔직한 내 심정이었다. 여기서 ‘친근함’이란 친애의 감정이 아니다.
이제서야 나는 다정하지만 원한엔 칼 같고, 수틀리면 칼 들고 모조리 조져버리며 피가 뚝뚝 떨어진 선물도 서슴지 않는 그놈의 미친 성정에 적응했단 얘기다.
그가 진짜 오빠가 될 거라곤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적응할 만한 인간이 되어도 감지덕지였단 말이다.
그런데 왜!
연거푸 얼굴을 쓸어내렸다.
사실 체이서의 폭탄 자체는 그렇게까지 충격적이진 않았다.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이상하다 여겼던 것 같으니까. 다만, 오빠가 제가 오빠가 아니라면? 하고 묻는 순간에.
‘리케도르안을 떠올렸지.’
얼굴을 얼른 비볐다. 잊자. 잊어. 이번엔 양손으로 함께였다. 옷에 쓸려 얼굴이 따끔거렸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제 와 도망가는 건 늦었다.
<원한다면 오빠로 있어 줄게, 이아나.>
그는 그렇게 말했지만 달리 말하자면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 때, 잘해 라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나는 고민 끝에 의자에 널브러졌다. 해결책이 나온 건 아니고 과부하에 걸렸다. 모르겠다.
“그저 편안히 살고 싶은 건데. 왜 이렇게 힘들어 보이지.”
그냥 생각을 말까. 그래, 그래도 좋겠다. ……어차피 오빠로 있어 준다고 하잖아?
굳이 다가오진 않을 모양이었다. 내가 얌전히만 있으면 말이다.
쇠고랑도 차 줬는데, 이쯤 모른 척하기야 식은 죽 먹기 아닐까. 누워서 침 뱉기 같기도 한데.
문득 내 얼굴에 침이 떨어지는 상상을 하다가 기분이 좋지 않아졌다.
어째 갈수록 알아서 구덩이에 빠지는 기분인데.
의자에 내팽개친 빨래처럼 널브러진 채 눈만 끔뻑였다. 사실 너무 머리 아픈 고민은 사서 하지 말랬다.
인간이 하는 고민의 8할은 쓸데없는 고민이라잖아.
뭐. 어떻게든 되겠지.
스스로도 해결을 찾고 고민을 끝내는 게 아니라 회피한다는 건 알았지만 알면서도 무시했다. 잠깐만 미뤄두자 생각하면서.
그리고 그날 낮, 나는 이 고민을 미뤄둬선 안 됐다는 걸 깨달았다.
“좋은 낮이야, 이아나.”
어느새 내 동생 운운하는 호칭은 어디론가 보내버린 체이서가 나름 상큼하게 인사했다.
형체가 보인다면 날아왔을 그의 하트를 잡아서 버리는 상상을 하며 그를 흘겨보았다.
체이서가 내 방을 찾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내 동생이란 말은 어디 갔어?”
“원한다면. 내 동생.”
선심 쓰듯이 덧붙이는 모습이 아니꼬운 건 왜일까.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내가 고민을 집어치우게 되는 건 모두 이 남자 때문이다. 내가 고민을 하건 말건 태연하게 웃고 있는 낯을 볼 때면 나도 아무 생각 없이 살까 싶으니까.
하나 그의 뒤를 이어서 들어오는 것을 본 순간 그 생각이 싹 날아갔다.
“……오빠. 저게 뭐야?”
이걸 물어야 말아야 하나, 혀끝을 잡아당기는 불안을 느꼈지만 결국 물었다.
“선물이야. 이아나.”
체이서는 기다렸다는 듯 입술을 끌어올렸다.
나는 얼떨떨하게 체이서와 그의 부하들이 내려놓은 것을 번갈아 보았다. 그래서 이게 무엇이냔 의미는 직접 전해졌으리라. 체이서는 바로 이를 알아채고 덧붙였다.
“마음에 걸렸던 이야기가 있었거든.”
“별로 듣고 싶지 않은데.”
그의 눈이 속삭이고 있었다.
들어야 할걸?
“친구가 없다는 네 말이, 마음에 걸렸어.”
그가 흘끗 내 품에 시선을 주었다. 내게 안겨 있던 푸딩이 흠칫 몸을 떠는 것이 느껴졌다.
-인간, 인간아! 저놈이 노려봤다! 봤느니라!
하아, 나도 아니까 조용히 있어. 나는 푸딩의 머리를 꾹꾹 눌렀다. 체이서 저 인간이 저런 눈을 할 때는 건드리면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이럴 때마다 반드시 야단이 났으니.
그러나 이번엔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선물이 ‘사람’인 건데?”
그랬다. 체이서 뒤로 끌려온 것은 물건도 동물도 아니었다.
‘사람’이었다.
대체 어떻게 곱게 미치면 이런 발상을 할 수 있는 거지.
“아니, 내 소중한 동생이 친구가 없어…… 조그만 새끼 동물에 의지한다기에.”
“새끼에 힘줘서 말하지 마.”
“잘못 들은 거야.”
다정한 음성이 시치미를 뗐다.
“그저 안타까운 마음에, 뭐라도 하지 않을 수는 없잖아.”
그가 붉은 눈을 위험하게 빛냈다.
“오빠로서.”
더는 뒷말을 요하지 않는 말에 나는 대꾸하는 대신 고개를 돌렸다.
체이서의 부하들이 이끌고 온 것은 사람, 체구가 아주 작은 여자아이였다.
<친구 하나 없는 삶이잖아?>
<‘친구’가 필요했다면, 말을 하지 그랬어.>
그때 그 대화가 이렇게 돌아올 줄이야. 나는 이 인간에 대해 더욱더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어쩐지 의구스럽게 퇴장하더니만. 그때 푸딩을 옹호한답시고 나온 말이 이렇게 돌아올 줄은 몰랐다.
나는 소녀를 빤히 보았다.
‘그나저나 쟤는 상태가 왜 이런 거야?’
바짝 마른 몸이었다. 거기다 겨우 얼굴만 씻긴 건지 몸은 꾸질꾸질한 흙먼지가 끼어 있었고, 옷은 제 것이 아닌 듯 너무나도 컸다.
이리저리 엉키고 구불구불 긴 머리로 겨우 여자아이인가 알아볼 수 있었다. 아울러 엉성하게 잘린 머리카락 사이의 뺨은 푹 패여 있었다. 나는 흠칫 놀랐다.
여자아이의 형형한 눈이 이쪽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으니까.
신비로운 눈이었다. 은을 갈아 넣은 듯 회색, 백색이 마구 뒤섞인 은색 눈동자. 하나 한쪽만 그러할 뿐 다른 한쪽의 눈은 회색과 녹색이 그러데이션 된 듯 녹빛이 녹아 있었다.
파이 아이(Pie eye), 오드 아이(odd eye).
한쪽에만 해당해도 보기 드문 요소가 겹쳐있었다.
내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허벅지로 소름이 쫙 돋았으니까.
미쳤어. 아니, 진짜 미쳤어.
그리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당연했다.
“흰 장미의 후계자야.”
이쪽은 그 유명한 원작 여주인공이었으니까.
“이 정도는 돼야 우리 이아나의 격에 맞을 듯해서.”
체이서의 말에 내 고개가 돌아갔다. 끼긱, 녹슨 로봇처럼 어색한 동작이었다.
“격?”
“……사랑스러운 내 동생 수준에 맞을 것 같아서?”
그리 속삭이는 남자의 얼굴은 완연한 성년의 것이었지만 한편으로 천진난만하게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나를 보는 눈은 광기 어린 듯 해맑았다. 투명한 핏빛 호수를 보는 듯이.
“어렵게 찾았어. 꼭꼭 숨어버렸거든.”
그러니까, 때가 덕지덕지 찬 저 머리칼과 더러워진 손발, 거기다 옷도 큼지막한 데다 막 끌려오다 찢어진 것 같은 구멍이 뚫리고 흡사 증오만 가득한 어린 소년 같은 행색의 소녀가…….
여주인공 언니라고.
내 안에서 환상이 와장창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버릇처럼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니다. 침착하자. 차분하게 생각해.
이 책 속에서 체이서는 여주인공에게 첫눈에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 정확히는 첫눈에 빠질 인물이 아니었다.
책 속에서 체이서는 간간이 이상한 뉘앙스를 흘렸다. 마치 이전부터 여주인공을 알았다는 듯한 그런 묘사와 행동들.
어차피 개연성은 중동에나 갖다줘버린 피폐 로맨스 19금 빨간 책이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어느 날 갑자기 내가 대신전의 성녀다! 하고 외치는 여주인공의 아주 뜬금없는 설정 같은 거라 생각했지.
‘……그런데 이런 설정이 숨어 있었냐.’
어쩐지 이상하더라니. 역시 악당 쪽은 여주인공과 이전에 만난 적 있는 모양이었다. 없는 머릴 돌려서 짐작해보자면, ‘이아나’는 본래 내가 이 몸에서 깨어나기 전 심장마비로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이 장면은 원작 전, 그리고 여주인공이 악당과 단독으로 만나는 순간이 되었겠지.
차분히 생각하니까 심사가 더 꼬이는 기분이었다. 상황은 이해됐는데 숨이 막혔다.
여주인공 언니가 노려봐. 노려본다고!
엄밀히 따지면 저쪽이 나보다 한 살인가, 어릴 테니 언니는 아니었다. 하지만 예쁘면 다 언니랬어. 내 안에선 예쁜 언니였다고!
간신히 현실로 돌아와 중얼거렸다.
“……오빠가 흰 장미의 후계자를 왜 찾은 건데?”
분명 내가 아는 여주인공은 아름답고 착한 영애이자 다정한 아가씨, 그리고 순진하고 호기심 많은 이였다. 고작 원작 3년 전인데 왜 저런 모습인 거냐고? 아무리 무심한 나라도 기가 막히고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말 나를 위해 데려온 거야?”
체이서의 눈이 반원을 그렸다. 달큰한 웃음과 함께 그가 내 어깨를 툭 두드렸다가 떼어낸다.
“그럼 정말이지. 난 네게 거짓말을 하지 않아. 그렇다고 말했잖아, 이아나.”
나는 속지 않았다.
“그래, 그럼 1순위 의도는 그렇다고 치고, 다음은?”
내게 거짓말은 하지 않아도 진실은 숨길 수 있는 남자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곤란하다는 듯 찡그리며 웃었다.
“흐음, 별거 아니야. 저 아가씨의 부친이 저지른 죄가 커서.”
“커서.”
“실종된 행방을 찾기 위해 딸을 찾은 거지. 거기다 마침 내 동생 친구로도 딱이고.”
이로써 그녀의 거처가 정해진 셈이었다. 막 이곳에 가둬둔다고 말을 한 것이니까.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오빠는 감금을 참 좋아해.”
“오해하지 말아줘. 이곳에 있기를 바라는 사람은 너뿐이거든.”
“말은 참 잘해.”
“말이라도 잘 해야 더 예쁨 받지?”
체이서가 그리 말하며 눈짓을 남겼다. 그러고는 팔짱을 끼며 소파에 몸을 깊게 기댄다.
“다들 네 나이엔 번듯한 시녀를 두곤 하지, 내 이아나.”
시녀, 지체 높은 영애 혹은 왕족 및 황족의 옆에서 보좌와 친목을 맡는 이. 상식을 되새기다 말고 후, 웃었다. 헛웃음이었다.
이 미친 새끼가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어느 인간이 납치되어 온 곳에서 편안히 시녀일을 하냐. 퍽이나 그러겠다.
난 무심히 입술을 끌어올렸다.
‘그게 선물이겠냐.’
나는 조금 전부터 살벌하기 짝이 없는 소녀가 아니, 여주인공 언니가 마침 입을 열었다.
“죽어, 망할 새끼.”
처음 말문을 트는 건데, 시원하고도 묵직한 한 방이었다.
난 절로 고개를 돌렸다. 체이서가 화사하게 웃었다.
“선물이야, 내 동생.”
……저 모습이 어딜 봐서 선물이냐.
“놔, 놓으라고!”
“흐음…… 교육이 필요할까?”
여주인공 언니가 마구 날뛰는데도 체이서는 태연히 팔짱을 낀 채 응시할 뿐이었다. 웃음기 없는 눈은 무언가를 가늠하는 듯했다.
그리고 난 결심했다.
“아니, 그냥 나 줘.”
그래.
“그대로 가질래.”
여주인공을 여기서 내보내야겠구나. 하고.
분명, 체이서가 저 눈을 할 때는 사람이 죽지는 않아도…….
<내 탄광엔 노예가 아주 많이 필요하니까.>
사라졌다.
***
“꺼져.”
이게 무슨 말이고 하니, 체이서가 가고 난 뒤에 여주인공 언니가 내게 해주신 첫마디였다.
말을 걸어줘서 영광이긴 한데, 조금 가슴이 아프다.
나는 이 언니의 말을 따라 얌전히 꺼져주는 대신 쪼그려 앉았다. 여주인공 언니의 얼굴이 더욱 사나워졌음은 물론이다.
-사납다, 사나워, 냥.
웨애옹!
보다 못한 푸딩이 한마디 하자, 그 울음소리를 듣고 득달같이 노려본다.
-봐, 봤냐 냥! 인간아, 쟤가 노려봤다 냥!
“좀 떨어져.”
이거야 원, 어느 쪽이 맹수인지 모르겠다.
“넌 인마. 맹수 실격이다, 야.”
쟤보다 패기가 없어. 엉? 나는 내게 매달린 아기 설표의 코를 톡 치고는 고개를 들었다.
<온전히 그대로 줘. 친구라며?>
체이서에게 엄포를 놓고 온전히 받아온 건 좋은데. 그녀의 몸은 꽁꽁 묶여 있었다. 날뛰다 못해 물어뜯으니 체이서의 부하들이 해 놓은 짓이었다. 저걸 풀어주고 싶은데, 기세가 저래서야 물어뜯기는 쪽이 내가 되기밖에 더 하겠나.
내 앞에는 물이 가득 찬 대야가 찰랑찰랑 흔들리고 있었다.
“음, 손이라도 씻으면 어떨까 하는데.”
“…….”
“……음, 그래요. 내키지 않구나.”
괜히 눈을 굴렸다. 손에 생채기도 많고 흙먼지를 씻어내고 약이라도 발라주려고 하는데.
이제 그냥 이름 부를 테다.
무안한 마음에 천장만 바라봤다. 미안해요, 나는 외모지상주의자였나 봐. 하고 농을 중얼거리면서. 물론 그래서는 아니고 지나치게 앳되고 어려 보이는 모습을 보니 언니라고 하기에 양심에 찔렸다.
책 속에서 리케도르안보다 한 살이 많았으니까 나랑도 한 살 차이인데, 이곳에서 성년인 18살이라기엔 그녀는 너무나도 작았다. 14살이라 했어도 믿을 정도였다. 나이가 18살은 맞는지 물어보고 싶은데 저래서야, 질문이 경계만 더욱 살 것 같다.
저기, 하고 말을 꺼내 봐도 온몸으로 꺼져!를 외치고 있으니.
나는 한숨을 쉬었다.
“……프란시아.”
그녀가 움찔했다. 잠시 의아해하던 눈은 더욱 사나워졌다.
나는 그녀에게 관심을 주는 대신 내 옆에서 쪼그리고 있던 푸딩을 들어 올렸다.
“야, 푸딩아.”
-인간! 내 앞발을 잡고 들어 올리지 마라, 냥!
“그래그래. 미안. 뭐 하나만 묻자. 너 혹시 아퀼라 같은 능력은 없니?”
아퀼라는 불을 뿜어내거나 만들 수 있었다. 다른 수호신인 라탄은 체이서의 그림자에 숨어 그를 보호하거나 기꺼이 무기 형태로 변하곤 했다.
여러모로 정신계 능력자인 그의 능력을 보완하는 수호신이었다. 그렇다면 얘한테도 뭔가 능력이 있지 않을까?
-으으음, 당연히 있지. 위대하신 이 몸께 없을 리가 없지 않으냐.
“말투.”
-있긴 있다, 냥.
“뭔데?”
-힘이 아주 쎄진다!
“……그리고?”
-정신이 아주 강해진다!
“오…….”
나는 휘파람을 불었다.
“되게 쓸모없네.”
-뭐라고? 아니다! 아니다 냥!
아기 설표를 놀린답시고 그리 말했지만 내 입술은 크게 호를 그리고 있었다.
“그거 나한테 걸어주라.”
아퀼라는 가끔 체이서와 함께 있지 않아도 불을 뿜어내곤 했다.
그 불은 체이서와 함께 있을 때보다 약하긴 했지만 같은 의미로 푸딩도 가능하지 않을까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가능은 한 듯 푸딩이 머뭇거리며 내게 앞발을 얹었다.
-나를 들어 올려 달라, 냥.
그 말에 얼른 들어 올리자, 푸딩이 조그만 젤리 같은 발로 내 이마에 얹었다. 곧이어 몸 안으로 시원하고 상쾌한 느낌이 들었다. 흡사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시험 삼아 근처에 있던 펜심을 구부려보았다.
‘오, 됐나 보네.’
그리고 프란시아는 이 무슨 황당한 광경이 있냐는 듯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고는 잠시 완전히 구부러진 펜심에도 시선을 주는 것 같았으나 이내 당혹스럽다는 듯 홱 고개를 돌려버렸다.
나는 씩 웃었다.
“프란시아.”
이번에도 움찔한 그녀는 눈을 매섭게 굴려 나를 쏘아보았다. 경계가 더욱 강해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당신 손 그대로 두면 곪을 것 같거든요, 상처 심한 것 같아서.”
“무…….”
“……슨 상관이냐면. 내 오지랖이라 해둡시다.”
어째 여기 주인공들은 다들 인간이기는커녕 사람 몰골 대신 짐승을 닮으려 할까. 리케도르안은 정신이, 이쪽은 신체. 완전 네발짐승이 금방이라도 튀어나갈 것 같은 자세다.
“내가 부상 당한 사람을 그냥 못 봐요.”
책임은 못 지는데, 치료는 해줘야 직성이 풀린달지.
성큼 그녀의 앞에 다가간 나는 풀썩 앉았다.
“그러니까, 실례할게요?”
“뭣? 악!”
그녀의 말은 썩둑 잘렸다.
참방. 미지근한 물이 닿자 그녀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하지만 이미 내가 그녀의 손목을 잡고 푹 담근 뒤였다.
설리반 선생님은 그러했지. 헬렌 켈러를 가르치기 위해 처음에 직접 몸으로 부딪치고 싸우고, 꼬집고 아무튼 몸싸움을 했다고.
숭고한 이름을 여기다 써서 죄송합니다, 선생님.
내가 하는 일도 비슷했다. 버둥대는 그녀를 붙잡고, 흙먼지며 때를 씻어내는 거였으니까.
“놔라, 놔! 이 악마야!”
물론 그녀가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푸딩의 능력이 효과가 좋은지 벗어나지는 못했다.
“자자, 씻지 않으면 먼지가 친구 하자고 할 거예요. 지지야, 지지.”
문득 짐승 모드 리케도르안을 떠올리며 어르고 달래다가,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프란시아가 손을 멈춘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유일하게 깨끗한 얼굴만 화악 달아올랐다.
“이, 이, 새끼 악마!”
아무래도 몸이 작으니까 언어체계도 아직은 발달을 못 하신 걸까. 욕이 다채롭지는 못했다.
어휴, 얼마나 씻지 못했으면 물이 금방 더러워지냐. 대야는 신기하게도 더러워진다 싶으면 왈칵 깨끗한 물을 토해냈다.
조그만 흑마법사님의 작품이었다. 마법물품이라지?
아무튼 문명의 이기를 믿고 그녀를 마구 씻겼다. 앙상한 손목을 붙잡고 씻으며 느낀 것은…… 그녀가 입은 부상이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거였다.
자상이었다. 이뿐 아니라 몸 여기저기가 칼로 입은 상처로 엉망이었다. 마치 칼날로 된 방 안에서 나왔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하나같이 심각했다.
먼지와 굳은 피가 엉겨 있기도 했으니까. 나는 그녀의 팔을 붙잡고 팔뚝까지 끌어올렸다.
“……세상에.”
안은 더 심했다. 진물이 뚝뚝 흘러나오는 상처를 보며 입이 절로 벌어졌다.
“놔!”
그녀는 숫제 나를 증오로 가득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이전에는 그저 단순한 경계였다면 체이서를 보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두려움과 증오.
“……내 팔을 자르려고? 네 오빠처럼?”
그럼에도 끝내 그녀의 손을 놓지 못한 탓일까. 프란시아가 있는 힘을 다해 내 손을 물고, 꼬집었다.
“자, 잠깐만요. 나는 그런 게.”
그 순간 프란시아가 다리를 퍽 차올렸다. 촤아악! 그리 무겁지 않은 대야가 순식간에 공중으로 떠올라 뒤집힌다.
뚝. 뚝뚝.
내 턱에서 물이 떨어졌다. 나는 흠뻑 젖은 채로 손등으로 느릿하게 턱을 닦아냈다. 묶여 있는 프란시아는 멀리 물러나지 못했다. 하나 노려보는 눈에는 이젠 두려움이 가득했다.
이렇게 물을 뒤집어쓴 건 그녀가 의도하지 않았으리라.
“괜찮아요.”
비록 때가 좀 묻은 물이긴 하지만. 뭐. 이 정도야 닦으면 되지.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인간! 괜찮으냐!
머리를 쓸어 올리며, 놀라 달려와 웨옹웨옹 우는 푸딩이의 머리를 톡톡 두드려주었다. 괜찮단 듯이.
떨리는 눈에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 두려움, 공포, 경계, 조바심, 당혹…….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요. 내 잘못이니까.”
미안함.
아무래도 프란시아의 성격은 아주 다르진 않은 모양이었다.
“……나, 난.”
“응. 억지로 올려서 미안, 저도 놀라서 그랬어요. 그래도 된단 건 아니지만.”
대야를 바로 세웠다. 언제 그랬냐는 듯 물이 가득 차올랐다.
“소독도 같이 되는 물이래요. 상처를 치료해주고 싶어서.”
나는 깨끗한 물에 보란 듯이 손을 씻었다.
“이거 봤죠. 물, 위험하지 않죠? 내가 뒤집어썼으니까.”
“…….”
톡톡, 내 뺨을 두드리며 웃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웃음을 지워냈다.
“여기서 나가고 싶죠?”
솔직하게 말했다.
지금은 서론을 걷어낸 말이 더 효과 있으리라.
“도망가게 해줄게요.”
나는 빠르게 이어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안 돼.”
찰나지만 기대가 스친 은빛, 녹빛 눈동자가 빠르게 식어갔다.
“때를 기다려요.”
그녀는 더는 욕을 하지 않았다. 욕도 고함도 공격도 없었다.
“난 당신을 나가게 할 생각이니까.”
두려움에 찬 시선 속에 의문이 꽃피는 것을 보았다.
“왜?”
나이보다 너무나 어려 보이는 소녀가 색이 다른 눈을 깜빡였다. 성녀라 하더니 눈동자만은 성스러울 만큼 신비로웠다.
“……너는 나를 붙잡아 온 도뮬릿의 동생이잖아.”
아, 체이서가 누군지 알고 있었구나. 하긴 모르는 게 이상한가. 여기저기 빤히 가문인장이 찍혀 있으니.
“그건 그렇죠?”
제국민이 흑장미를 모른다는 것이 이상했다. 그녀도 제국민이었으니까. 오히려 이쪽이 묻고 싶었다. 그쪽도 설정은 아름답고 착한 영애였는데 말이지.
“널 어떻게 믿어.”
반면에 눈앞의 소녀는 온몸으로 악을 쓰는 것 같았다. 진물이 난 상처 앙상한 팔, 파리한 안색까지.
꺼져, 내 몸에 손대지 마. 하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믿어주세요.”
어차피 말뿐인 신뢰는 종잇조각보다 못하다. 나도 잘 알고 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프란시아가 무어라 하기 전, 수마디 말대신 치마를 들어 올렸다.
“이걸 보면 믿겠어요?”
철그럭.
내 발목에서 움직이는 쇠사슬을 본 순간 소녀의 눈이 크게 뜨였다. 경악이 스친 것 같았다. 여러 번 내 목숨을 구한 쇠사슬은 어쩌다 보니 이번에도 큰 효과를 톡톡히 보였다.
프란시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아래로 내려간 눈에서 치열한 고민이 엿보이는 듯했다.
마침내 그녀가 고민을 끝냈다. 이것을 어찌 알았느냐고? 힘을 뺐으니까. 내가 잡은 손에서 힘이 빠진 것으로 그녀의 대답을 알아차렸다.
“어떻게 도와줄 건데?”
나는 대답하지 않고 웃었다.
“그리고 모르겠어. 왜 도와줘?”
“당신을 보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어서요.”
지금쯤 차가운 지하에서 잘은 먹고 다니나 싶은 사람, 소녀의 눈동자에는 그 사람의 색이 스며 있었다. 스치듯 떠오른 얼굴에게 잘 지내는지. 안부를 묻고픈 마음을 지워냈다. 여전히 나를 기다리던 얼굴이 희망을 꺼트렸을지.
“나는 그 사람을 창살에서 꺼내주지 못했지만 당신은 그래도 될 것 같아서요.”
탄광보다는 낫겠지.
친구라고?
말이 친구지, 체이서가 내게 애착이 생길 사람을 오래 둘 리 없었다. 왜냐. 지난 1여 년간 그가 그 눈을 했을 때, 사람이 사라지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단 한 번도.
“맹수가 어떻게 사냥을 하는지 알아요?”
색이 다른 눈동자가 이제는 얌전히 나를 응시했다.
“알아.”
흡사 짐승 모드였던 리케도르안을 길들였던 기분을 떠올리게 했다.
“뭔데요?”
“기다려. 먹이가 올 때까지.”
“네. 기다려요.”
쓰다듬고 싶은 손을 참으며 낮게 웃었다.
“얌전히.”
그녀의 눈을 보며 입을 달싹였다.
“때가 올 때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