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1년 전 약속의 날
며칠 전, 설표를 무사히 내 손안에 지켜냈다. 설표는 내게 임시지만 푸딩이란 이름을 얻었다. 별다른 이유는 없고 내가 흰색 푸딩을 좋아한다는 이유였다.
그날 먹은 푸딩도 흰색이고 얘도 흰색이 섞였더라고.
위엄이라곤 전혀 없는 이름이라며 설표는 반발했지만, 이미 내 안에서 똥괭이가 된 이놈의 이름은 푸딩으로 낙찰된 뒤였다.
다시 쫓아낸다, 한마디에 푸딩이도 조용해졌고 말이다.
<그날 내가 먹은 게 브로콜리나 양상추가 아닌 게 어디야.>
-브로콜리? 뭐냐, 냥.
<이거.>
브로콜리를 보여주니까 불만도 싹 거둬가더라.
그리고 이전과 조금 달라진 점이 있다면 라탄과 아퀼라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왔다는 점이었다.
거기다가 왜인지 각기 조그만 아기 재규어 모습이거나 작은 참새의 모습이었다. 아니, 아기 재규어는 둘째치고, 아퀼라는 왜 참새지? 걔 분명히 독수리 같은 외형이었는데…….
-와, 왔다, 냥! 인간, 왔단 말이다!
웨애애옹, 웨옹! 캬오오오!
-인간! 저놈한테서 날 떼어놔라, 냥! 부리로 쪼았다! 쪼았단 말이다!
캬앙! 웨옹웨옹 웨애애옹!
“알고 있어. 그보다 너, 울음소리랑 목소리 둘 중의 하나만 안 되니?”
머리랑 귀랑 양쪽으로 각각 울리니까 시끄러워 죽겠네. 하지만 조절이 안 된다는 답변이 돌아와 깔끔히 포기했다. 대신 고개를 돌렸다.
“안녕, 아퀼라.”
오늘은 라탄 없이 아퀼라만 홀로 찾아왔다. 검은 참새가 삑삑, 짹짹, 울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이 푸딩의 말은 알아들었는데, 왜 그동안 라탄과 아퀼라의 말은 알아듣지 못한 걸까.
이상하단 말이지.
찰나의 생각에 빠지는 동안 푸딩의 부드러운 발을 꼬옥 쥐었다 놓았다. 그 순간을 참지 못하고 아퀼라가 내 손가락에 올라타고는 짹짹 지저귀었다.
“알았어. 알았어. 안 잊었어.”
비록 말은 알아듣지 못해도 대충 몸짓으로 뜻은 알아들어먹었다.
“너는 나한테 말 못 걸어?”
짹?
아퀼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푸딩을 들어다가 아퀼라 앞에 들이밀었다.
-이, 인간! 무슨 짓이냐! 냥! 냐냥!
“너도 맹수씩이나 되는데, 냥냥 거리는 거 부끄럽지도 않니.”
-이, 이 몸은 나이가 어리다! 어리단 말이다 냥!
“어리긴, 너 태어나는 건 리케도르안이 날 때랑 비슷하게 태어났다며.”
-아니다! 그 태어난 거랑은 다르다. 우리의 나이는 현실에 구체화 되는 순간부터 먹는단 말이다!
“뭐?”
그 말에 나도 모르게 푸딩을 흔들던 것을 멈추고 아퀼라를 향했다.
체이서는 얘네 나이가 10살은 넘었을 거라 그랬는데…….
……그럼 체이서는 얘네를 구체화한 지 10년이 넘었단 말이야?
그럼 대체 언제쯤 힘을 갖췄다는 거지? 체이서는 이아나보다 고작해야 4살이 많았다. 10년 전이라 해도 14살이 채 되지 않았을 터였다.
‘뭐 하는 악당이지 정말.’
괜히 어깨를 움츠렸다가 펴며 푸딩을 내려놓았다.
푸딩이 잽싸게 내 뒤에 숨거나 말거나 나는 손가락에 앉은 아퀼라를 보았다.
“아퀼라, 그럼 넌 말 못해?”
짹?
“아니, 저 똥괭이는 시끄럽게 잘만 떠들던데. 넌 안 되나 해서.”
라탄과 아퀼라는 나를 좋아했다.
<쟤들은 널 좋아해, 내 동생.>
그동안이야 그러려니 하고 말았지만, 체이서의 말을 듣고 보니 새삼 미안해졌다.
나를 몇 번이나 지켜줬는데 말이지.
하지만 아퀼라는 그저 고개만 갸웃갸웃 흔들 뿐이었다. 으음, 말은 하지 못하더라도 내 말은 알아들을까?
“내 말은 알아들어? 저기 푸딩, 쟤 이름이 푸딩이잖아.”
웨애애애옹!
“저기 불만스럽게 떠드는 쟤. 아무튼 재는 자꾸 내 머릿속으로 떠들거든. 너도 가능하나 해서.”
나는 다른 손으로 새의 머리를 살살 문질렀다.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맨질맨질하네.
짹, 짹짹!
파드드득. 아퀼라가 조그만 날개를 마구 퍼덕였다. 음, 무어라 전달하고 싶은 것 같은데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미안, 아직은 새 언어는 초급인 것 같아, 그렇게 농삼아 말을 건네려던 순간이었다.
화아아악.
눈앞으로 새카만 빛이 터져 나왔다. 언젠가 아퀼라가 작게 변신할 때 보았던 검은 빛이었다. 검은 연기도 함께였다.
-인간!
매캐하지는 않았지만 시야를 가리는 연기에 절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전혀 낯선 공간에 서 있었다.
하나 나는 눈을 몇 번 깜빡일 뿐 당황하지 않을 수 있었다. 푸딩으로 인해 한 번 겪어본 적 있는 일이었다.
솨아아아.
눈앞은 비 내리는 풍경이었다. 회색 구름이 잔뜩 뭉쳐진 하늘, 먹구름이 잔뜩 끼는 아래 조금 우울하게까지 느껴지는 풀숲이었다.
나는 주변을 관찰하기 전에 현실 같은 이 풍경을 눈에 하나하나 담았다.
‘이걸 보여주는 건 아퀼라겠지.’
수호신들은 다 할 수 있는 건가 보네. 두리번거리는데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체이서였다.
하나 그는 여유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낯이었다. 오히려 조급하고…… 화가 난 얼굴이었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정녕 내가 같은 사람을 보는 것인가 싶은 의문이 드는, 급한 얼굴. 항상 가지런하던 눈썹이 형편없이 일그러져 있다. 그의 미간이 마구 구겨지고 입술이 앙다물렸다. 화가 났을 때조차 미소를 지우지 않던 사람이었는데.
그래서인지, 시선을 떼어낼 수 없었다.
솨아아.
비는 여전히 세차게 쏟아졌다. 송곳처럼 쏟아지는 아래서 그는 비를 맞은 채 누군가를 안았다. 무어라 중얼거리고 소리를 내려 한 것도 같았다. 턱턱, 숨이 막히는지 소리가 새어나오지 않았다.
일그러진 얼굴이 이 풍경과 더없이 음울하게 어우러진다.
빗속에서 그가 겨우 입술을 열었다.
“……이아나…….”
나는 눈썹을 까딱였다. 이아나? 체이서의 상체가 들리고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사람이 보였다.
“내 동생.”
안겨 있는 건 분명 나였다. 정확히는 ‘이아나’. 흘러내리는 빗물이 이상하게도 그의 눈물처럼 보였다. 쓰러져있는 인영을 자세히 보려 했지만 세찬 비에 가려, 분홍색 머리칼만 겨우 알아보았다.
“미……안해.”
남자의 사과는 무척이나 직선적이었다. 세상 처음 이런 소리를 토해 내본 사람처럼.
“……할게.”
거리가 떨어진 데다 비까지 내려 모두 들을 수는 없었다. 나는 그저 흑백영화를 보듯 남자를 물끄러미 볼 뿐이었다.
“……니까. ……아프지 마.”
너무나도 다정한 목소리를 끝으로 그가 빗속에서 웃었다. 참담한 웃음이었다.
“아프지마. 약속, 꼭 지킬게.”
선명한 목소리를 들었다. 빗소리 사이에서 이상하리만치 귀에 탁 꽂혔으니까. 여기에 무어라 입을 떼려 하는 순간 주변이 암전되었다.
다시 눈을 뜨니 익숙한 방 안이었다. 순식간에 이동한 것은 아닐 테고, 푸딩이 보여준 것과 비슷한 원리이리라.
나는 푸드득 나는 새에게 시선을 주었다.
“네가 보여준 거야?”
짹-. 짹짹!
이제는 제법 답변하는 꼴이 내 질문을 알아들은 듯했다. 뭐야, 지금까지는 알아들어 놓고 모른 척한 거야?
“뭐야, 너 그럼 이전에 내가 도망갈 길 알려달라 한 것도 알아들었던 거잖아?”
나는 검지로 새의 부리를 톡 튀겼다.
지금으로부터 9개월 전 즈음 체이서에게 도망치겠다고 한창 움직일 때, 나는 아퀼라에게도 말을 건 적 있었다. 너 길 좀 알면 알려달라고 말이다.
하도 답답해서 말을 건 거였는데, 그때도 알아들었던 거잖아?
물론 이후에 내가 온갖 원한이 도사린 험난한 상황에 있음을 깨닫고 그만뒀지만.
“이걸 보여준 건, 뭐.”
나는 툭 새에게 따지듯 심드렁히 말을 걸었다.
“체이서도 나쁜 사람만은 아니다, 이거야?”
아퀼라가 짹짹, 시끄럽게 울었다. 조그만 참새 모습으로 참 우렁차기도 하다.
“걔 나쁜 놈 맞는데.”
그러자 더 시끄럽게 울었다. 으음, 얘가 내 말을 알아듣는다는 건 알았는데, 문제는 내가 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겠다.
“그래. 알았어. 내 말이 맞다는 거지?”
아퀼라가 뭘 보여주고 싶었던 건지는 알겠다. 체이서가 여동생을 끔찍이 여긴다. 주인이 이런 사람이다 보여주고 싶은 거겠지. 이런 건 이렇게 보여주지 않아도 약 10개월 동안 보고 느꼈는데 말이지.
“근데, 아까 본 것에서 나는 뭐야? 아팠어?”
어차피 내 상태를 두고 기억상실로 알려져 있겠다. 편하게 물었다.
아퀼라가 눈을 끔뻑, 하더니 이내 지지배배 울었다. 아, 깜짝이야. 왜 갑자기 날아오고 그래. 나는 곧 손바닥에 앉아 꽥꽥 우는 새를 보며 아연함을 느꼈다.
째재재짹! 짹짹!
조금 전에 한 말 취소.
……이건 긍정이야, 부정이야?
단순히 생각하기로 이아나는 몸이 약했다고 하니, 그렇겠다 싶었다. 아픈 사람이 비를 쫄딱 맞고 있던 건 이상했지만 사정이 있었으려니 했다.
짹, 째액. 짹! 삑!
“알았어. 알았어. 사이좋게 지내라는 거잖아.”
삑, 삐익, 짹.
“그렇게 말 안 해도 잘 지낼 거야.”
나는 고개를 괸 채 무심히 대꾸했다. 체이서를 만난 초기까지 내가 체이서에게 가진 감정은 이질적이었다.
모순적이었단 얘기다.
양가감정이라고 들어봤나? 다정한데 그 다정함을 믿을 수는 없고. 뒤로 가서 제 광기를 드러냈고, 거기에 역시나 책 속 모습! 했지만 여전히 다정한 모습이 존재했고.
“알아, 열심히 나를 지켜주려 한 것쯤은.”
그 남자는 참으로 열심히 나를 지켰다.
철그럭.
얼마나 많은 위협이 있었는지, 일일이 설명조차 못 한다. 그만큼 많았고, 위험했으며, 이 모든 원한이 체이서 본인의 것은 아니었음을 알게 된 시간이었다.
도뮬릿 공작이 얼마나 나쁜 인간인지도 알게 된 시간이기도 했고.
“그래서 그냥 이렇게 살고 있잖아.”
체이서가 저지른 범죄도 있었지만 그 공작이 뻔뻔하게 아들이 한 일처럼 뒤집어씌운 것이 더 많았다.
‘어째 이 소설은 애비란 인간들이 전부 쓰레기람.’
스르륵 고개를 내리면, 발목에 달린 쇠사슬이 보였다. 이 쇠사슬도 또한 줄곧 내게 양가감정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왜 염려하는지 모르겠지만.”
그 남자는 내 일이라면 열 일 제치고 뛰어왔다. 이 쇠사슬은 구속의 상징이었을 것이나 내 생명을 구하는 이정표였다.
“날 구하다 다치기까지 한 사람을 미워하진 않아. 그렇게 모질진 못하거든.”
번번이 위기에서 목숨을 구해준 인간이 악당이었을 뿐이지. 나는 체이서의 손을 떠올렸다. 항상 검은 장갑을 끼고 다니는 손 아래에는 잔 상처가 많았다. 리케도르안과 달라서 그는 상처가 사라지지 않았다.
개중에 나를 구하려다 입은 상처가 태반이었다, 우습게도. 감금과 생존. 이곳은 모순을 껴안은 저택이었다.
이제는 그 양가감정조차 희미해졌지만.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조금 전 비 내리던 풍경과 다르게 몹시도 푸른 하늘이었다.
“산책이나 할까.”
엉덩이를 툭툭 털고 손을 내밀었다. 짹? 아퀼라가 고개를 갸웃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보니까 슬슬 뭐라고 하는지 대충 알 것 같네. 이렇게 새의 언어도 마스터하게 되는 건가. 엉뚱한 생각을 하며 손바닥을 흔들었다.
“같이 갈래?”
짹!
아퀼라가 기다렸다는 듯이 날아올랐다. 얘가 흥분을 감추지 못했는지 독수리 모습으로 돌아왔다.
“야, 야! 네 크기를 생각해, 우웁!”
졸지에 깃털에 얼굴을 파묻게 되고, 읍읍 숨을 토해냈다. 아퀼라에게서 체이서의 냄새가 났다.
나는 겨우 깃털을 치우고 한숨을 쉬었다. 이놈의 동물들은 왜 일단 머리부터 들이밀고 보는 거지.
그러거나 말거나 어느새 적절히 크기를 줄인 아퀼라는 독수리 형태로 내 뺨에 부리를 정신없이 비볐다.
푸드드득!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해.”
이러다 동물 조련사로 취직하는 건 아닌지. 고개를 젓고는 그대로 돌렸다.
“너도 그만 나와.”
-나, 나, 나…… 말이냐? 냥?
“그럼 누구겠어.”
손을 까딱까딱했지만 겁먹은 푸딩은 선뜻 다가오지 못했다. 겁먹은 모습은 어쩜 짐승 모습의 리케도르안이랑 저리 똑같은지.
“아퀼라.”
나는 아퀼라에게 화살을 돌렸다.
“나도 체이서랑 잘 지낼 테니까 너도 쟤랑 잘 지내.”
푸딩을 향해서 고개를 까딱했다. 누군가 그랬던가. 사람은 이름을 짓는 순간부터 애정을 갖는다고. 동물이든 물건이든. 나 또한 그랬다.
“내가 이름을 지어준 아이야.”
떠나보낼 것을 알면서도 저 조그맣고 불쌍한 아기 수호신에게 정을 주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래 줄 수 있지?”
선뜻 다정하게 말하며, 아퀼라의 부리 밑을 긁어주었다. 그러면서 작게 속삭였다.
비록 바깥을 불태우던 무서운 동물이지만. 넌 내게는 착한 새니까.
푸딩을 노려보던 아퀼라의 눈이 둥글둥글해졌다.
푸드득. 이 날갯짓이 화해의 제스처임을 알았다. 동물은 동물이 알아본다고, 푸딩도 느낀 듯 쭈뼛쭈뼛 다가왔다. 그러더니 내 손에 앉고는 손바닥에 뺨을 마구 비볐다.
-저 무서운 놈이랑 말을 하다니, 인간 넌 대단하구나. 다시 봤다 냥!
“네게만 무서운 새일걸.”
나한테는 참 착한 새거든. 나는 살짝 웃으며 문을 열었다.
스르륵.
어라, 문이 왜 절로 열려 있지? 마치 반쯤 열려 있었던 것처럼…… 문이 열리고 반 틈 사이로 서 있는 사람을 본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체이서?
“……오빠?”
네가 왜 거깄어? 이런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체이서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네가 보고 싶어서?”
“그런 질문은 안 했는데.”
“네가 말했어.”
그가 검지로 제 눈을 톡톡 두드렸다.
“눈으로?”
“아아.”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있었다는 건 아퀼라와의 대화를 들었단 건가?
“어디서부터 들었어?”
나는 스스럼없이 물었다.
“‘내가 이름을 지어준 아이야’부터? 뭘 하고 있었던 건지 궁금하다, 이아나.”
막 왔나 보네. 나는 끄덕이고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아퀼라랑 평화협정을 맺었지. 푸딩이랑 싸우지 말라고. 기념으로 다 같이 화해의 산책을 하기로 했어.”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까딱였다.
“산책할래?”
체이서가 멈칫했다.
붉은 눈이 놀란 듯 커진 것도 같았다. 그러나 찰나 간에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대로 돌아온 남자가 단정하게 고개를 움직였다.
“분부대로.”
우리는 금세 정원에 도착했다. 마구간 근처에 있던 을씨년스러운 풀숲과 다르게 저택 앞은 그럴싸하게 꾸며져 있었다.
찬란 볕 아래 싱그러운 정원수와 화사하게 활짝 핀 꽃들, 자욱하게 어우러지는 상쾌한 바람 향기, 저 멀리 모습을 드러낸 반짝거리는 유리온실까지,
사실 내가 막 이 저택에 왔을 때는 이렇지 않았다. 오히려 하루가 멀다 한 습격으로 초토화된 곳이었고, 누구도 복구하지 않았다.
<……산책하고 싶다고? 그래.>
이렇게 만든 건 이 남자였다.
“되게 예뻐졌네.”
“네가 걸을 길이니까.”
참, 극성맞게도 내가 가진 것, 내가 하는 것. 그게 뭐든 간에 최고로 만들지 않으면 참지 못하는 남자였다.
때로는 광기 어린 눈으로 검을 휘두르면서도, 이거 가져왔어. 뚝뚝, 피로 물든 보석을 내밀 때 느꼈지.
“앞으로도 넌 이런 길을 걸을 거야. 내 동생.”
참 270도쯤 돌아버린 도라이구나 하고. 그렇게 정의를 내리고 나면 차라리 마음이 편하더라고.
“이아나.”
그가 고개를 숙여 내 손끝에 입을 맞댔다. 이제는 익숙해진 인사였다.
끼이익!
하늘에는 아퀼라가 푸르른 창공을 마음껏 누비고 있었다. 아퀼라랑 나름의 화해를 한 덕인지 푸딩도 어느새 달려가 정원에서 폴짝폴짝 나비를 쫓고 있었다.
-이, 인간! 이거 뭐냐. 냥! 움직인다 냥! 냥냥!
허어, 저거 좀 보게. 설표는 무슨, 알맹이가 완전 고양이구만. 나비를 쫓는 모습이 영락없는 집괭이다. 나는 피식 웃었다.
“푸흐…. 하하하.”
그 모습은 어느새 활짝 웃는 웃음이 되었다.
푸딩이 빙구처럼 뛰는 모습이나, 아퀼라가 내게 보이겠다고 푸딩 주변에서 뱅글뱅글 도는 게 어처구니없게 귀엽고 우스웠던 탓이다.
팔랑팔랑.
해가 따뜻한 여름답게, 해바라기 같은 노란 꽃잎이 흩날렸다. 간간이 주황색 꽃잎이 섞여 있었다.
아마도 저기 활짝 핀 주황색 장미 일터다. 이곳에는 유달리 주황색 장미가 많다. 체이서는 여기 모든 식물을 직접 꾸렸다고 했으니 이 또한 그의 뜻이리라.
한참을 웃다가 고개를 돌리면 나를 쳐다보는 시선이 있었다. 체이서의 두 눈이 그 끝에 자리해 있다.
그는 웃고 있지 않았다.
……왜 이래?
“오빠?”
가뜩이나 묘한 눈매를 가진 남자가 웃지 않으니 아슬아슬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공연한 기분에 그를 불렀으나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몇 초가 지났을까, 그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이아나.”
내리꽂힐 듯 집요한 시선, 이유 없이 입술이 말랐다. 그가 훌쩍 다가왔다. 분위기에 순간 압도된 나머지 뱀 앞의 개구리처럼 꼼짝없이 서 있었다.
그가 느릿하게 상체를 기울인다. 내게 뻗어진 손이 무언가를 떼어냈다. 주황색 꽃잎이었다.
아, 하고 소리 냈지만 말이 더 나오지 않았다. 거리가 아주 가까웠다. 그는 떨어지는 대신 입을 떼었다.
“이아나, ……하나만.”
물어볼게.
낮게 가라앉아, 나직한 목소리였다. 어찌할 바를 몰라 시선을 내리면 그의 발이 쇠사슬을 꾸욱 밟았다가 떼어냈다.
“내가 미워?”
사람을 유혹할 듯 녹진한 목소리는 한없이 진지했다.
“……아니, 넌 날 싫어할까.”
평소와 같은 장난스러운 유혹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어리광을 부리는 아이같이도 느껴졌다.
쇠사슬을 채운 게 이제 와 신경 쓰인 건가? 그가 쇠사슬을 밟은 행동으로 추측할 뿐이었다. 갑자기 왜 묻는 거지? 이상한 인간이네.
“……딱히 싫어하지 않는데.”
눈을 굴리던 나는 이내 나직하게 뱉었다.
“밉지 않아.”
내 목소리는 차분하고 담담했다.
“밉지도 싫지도 않아. 됐어?”
그가 보고 있던 발목을 보란 듯이 짤랑 흔들었다.
“물론 이렇게 족쇄를 채우고 쇠사슬을 단 건 미친 짓이라 생각해.”
그가 잘해준다고 해서 뭐, 나는 행복하다, 이런 세뇌 같은 걸 당한 건 아니다.
나는 그가 좋지도 싫지도 않았다. 내가 쇠사슬을 인정한 건 효용성이 있기 때문이었고. 이 남자의 말도 안 되는 짓은 정당화할 수 있지 않았다.
<족쇄가 아니면, 뭐가 좋아?>
그저, 족쇄에 대해 답답하다 한마디 했을 때, 알았을 뿐이다.
쇠사슬을 풀어 다른 형태를 했다 한들. 그가 다른 형태로 나를 매어둘 성격이란 걸 알아서였다.
1여 년의 시간은 그걸 알기 충분했다.
“하지만 오빠는 미친놈이잖아?”
이른바 도찐개찐. 오십보백보.
나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 속마음을 적나라하게 토해냈다. 내 이런 직설적 표현에도 체이서는 피식 웃을 뿐이었다.
내가 알기로 그는 자신의 행보를 모르지 않았다. 적어도 이놈은 본인이 미친 인간이란 걸 아는 미친놈이었다.
“그래.”
체이서가 한 손으로 얼굴을 반만 가렸다.
“응. 이아나.”
그 순간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볕 아래 부드러이, 하지만 해사하게 눈을 휘며 웃는 남자의 눈으로 주르륵 무언가가 흘러내렸기 때문이었다.
사람을 유혹하는 여우처럼 야살스럽게 곡선을 그리는 아래, 주르륵 흘러내린 눈물은 농염하고 아름답게까지 느껴졌다.
왜 우는 거야? 속으로 중얼거리면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이토록 아름다웠으니까.
머릿속으로 ‘이아나’를 안고 있던 체이서의 모습이 그려졌다. 비 오는 풍경 속 웃던 얼굴도 함께.
……그것과 관련 있나?
체이서가 팔을 벌려 나를 품 안에 안았다. 별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저 그가 참 크긴 크구나. 반면에 내가 작긴 하구나 느꼈을 뿐.
그의 손이 허리에 파고들었지만 밀어내지 않고 덤덤히 있었다.
울음을 터트릴 사람에게 어깨를 빌려줄 용의는 있었다. 거기까지였지만.
“네가 영원히 곁에 있었으면 좋겠어.”
1여 년이 지났지만 내게 ‘이아나’와 체이서의 관계는 불가해의 영역이었다. 미지수, 값을 알 수 없는 값.
눈동자만을 굴려 곁눈질했다. 내 어깨에 이마를 가져댄 남자를.
저택의 이들은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괜히 친구가 없다고 한 게 아니다. 조그만 흑마법사님이 있어 심심하진 않았지만…….
그조차 무어라 하지 못할 만큼 바쁘긴 했지. 암살이다, 독이다 위협이다…….
“날 떠나지 마.”
나는 이 남자가 이아나를 감방에 보낸 못된 오빠 새끼라 생각했다. 처음엔 그랬고, 다음엔 사정이 있어서 어쩔 수 없었지만 그래도 나쁜 놈이라 여겼다.
그러나 이런 모습을 보면 검게 느껴진 물이 착각을 일으킨 양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럼에도 검은 물은 검은 물인데도.
눈물이 맺힌 농익은 붉은색 눈이 나를 향했다.
“……곁에 있어 줄 거지?”
역시, 책 속처럼 반쯤 미친 인간 같기도 하고. 뒷짐 진 손을 움츠렸다가 폈다.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았기도 하고…… 이 짐승처럼 커다란 덩치의 남자가 신경 쓰이지 않을 수는 없어서.
야릇하고도 관능적인 얼굴과 대비되는 몸은 우아하고도 육감적인 느낌을 자아냈다.
“오빠.”
그는 숫제 한 손만을 풀어 내 손을 쥐었다가 놓았다. 이내 다시 쥐어 제 입술로 가져왔다.
촉. 손톱에서 살갗까지. 다시 마디마디 사이로 입술이 쏟아진다.
나는 혼란이 일었다.
왜일까. 1여 년이 지나도 그전과 같아서? 이제야 독과 위협이 조금 가라앉고, 평화로워서? 평화로워서 다른 생각이 가능했기에?
등줄기로 느릿한 소름이 일었다.
혈류를 타고 벼락같은 깨달음이 휙 꽂혔다.
“오빠.”
“오빠여도 좋고.”
그가 내 손끝에 입술을 맞추다 말고 그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나른한 시선이었다.
“오빠가 아니어도 좋고.”
그대로 고개가 기울어진다. 사르르, 결 좋은 검은 머리칼이 흩어진다. 숨이 꼴깍 넘어갔다.
“……그건 좀 이상한데.”
나는 가까스로 입술을 열어 말을 이었다. 침이 말랐다.
“내가 기억을 잃었잖아.”
“응.”
평화롭지 않아서였던 거다. 그래서 미처 생각하지 못한 거였을 거다. 그가 손끝을 가볍게 깨물었다 놓았다.
“말해.”
그가 손가락에 입술을 비비적 비빈다. 손끝에 다시금 비처럼 쏟아지는 입맞춤에 이상함은 더욱더 크기를 키웠다. 이상하다 했지.
남매 사이가 지나치게 좋다고. 그렇게만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이곳에서 깨어나 상식을 비롯한 모든 것을 다 모른다고 해도.
“이건 오빠가 여동생에게 할 행동은 아닌 것 같아서.”
……정녕 이게 이상한 게 아닌가?
그저 남녀 사이에 친근한 손등 키스 정도는 보편적인 세상일 뿐이라 무심히 여겼다.
그러나 세계를 고려하더라도 이상해.
그렇기에 솔직하게 뱉었다.
“아니, 이건 아닌 것 같아.”
체이서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손가락에 뺨을 가져다 댄 채 피식 웃을 뿐이었다.
그는 그대로 고개와 함께 눈을 들어 올렸다.
“왜 안 돼?”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할 것 같은 붉디붉은 눈이 나를 붙잡고 자리했다.
“왜 안 되냐니.”
그거야…….
“우리가 남매…….”
“우리 남매 아닌데.”
솨아아아. 바람이 불었다. 자욱하게 느껴지는 꽃향기만이 우리의 침묵을 채웠다. 마침내 그가 소리 내어 웃었다.
“입양아.”
알아?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내가 공자.”
그가 내 검지를 잡아 제 뺨을 콕 찔렀다. 그러고는 검지를 짚으며 시선으로 날 가리켰다.
“네가 입양아.”
나는 그만 입을 쩍 벌렸다. ……이게 무슨 개 소리야. 갑자기? 출생의 비밀?
“거짓말하지 마.”
혼란스러워할 틈은 없었다. 그가 거리를 좁혀 휙 고개를 휘었기 때문이었다.
“기억을 잃어서 전할 틈이 없었나 봐.”
“……그걸.”
말이라고 하냐. 발끈하려던 말은 그대로 쏙 들어갔다.
“난 네겐 거짓을 고하지 않아. 이아나.”
나를 집어삼킬 것 같은 보석 같은 눈과 압도되는 분위기 앞에서 무시되었다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그리고 전하건 전하지 않건, 그건 중요하지 않잖아?”
그가 내 손을 뺨에 갖다 대며 말했다.
“넌 내 곁에 있어 줄 테니까 상관없잖아. 내 동생.”
다정한 목소리는 어느새 숨길 수 없이 색정적인 분위기를 담고 있었다. 동시에 네가 나를 벗어날 순 없지 않으냐 단정 짓는 것 같았다.
“오빠라며.”
“그래. 그런데 오빠가 아니라면.”
그가 눈매를 휘어 황홀한 웃음을 그려냈다. 낮은 음성에 그가 가진 능력이 푹 담긴 것 같았다. 내겐 이 능력이 소용없음에도 당장에 홀릴 것 같이.
“그럼 달리 봐도 돼?”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숨을 쉬고 있건만 입안이 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 같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대꾸했다.
“……안 돼.”
단호하게 말했음에도 그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마구 흩날리는 주황색 꽃잎, 그리고 어느새 뒤섞인 흑색 꽃잎 사이에서.
네 대답은 필요 없다는 듯이.
“그럼 기다릴까?”
처음으로 가슴 깊숙하게 경고등이 울렸다. 내가 악당 여동생임을 알았을 때도 닿지 못했던 경고등이 이젠 온몸을 둥둥 울리고 있었다.
“언제든 기다릴 수 있어. 네 곁에서.”
눈을 감았다가 뜨면, 눈앞에는 낯선 남자가 서 있었다.
찬란한 볕은 기꺼이 그를 밝히는 조명이 되어 주었다. 흩날리는 꽃잎마저 이 가려한 남자를 위한 장식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