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도 원작이 시작하는 시점까지는 3년이 더 남아 있었다. 그때까지 리케도르안이 살아 있다는 가정하에 시작되는 이야기였다.
“……얼마나 남아 있어?”
-3년이다, 냥.
아기 설표는 자기가 사라지는 시간이기도 하다며 설명했다.
3년.
남은 원작까지의 시간과 엇비슷했다. 원작 시작의 계절이 언제였더라? 설표의 말을 들어보니 원작이 시작하고 몇 개월 뒤였다.
몇 개월 차이, 그러니까 리케도르안의 수명이 몇 개월밖에 남지 않았을 때 여주인공을 만날 거란 거다.
그때까지는 자신과 꼭 만나야 한다고.
짐승은 달달 떨며 계속 리케도르안과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는 어찌 될지 모른다고 말했다. 나는 일단 설표를 가슴에 끌어안았다. 달달 떨던 아기 짐승이 나를 올려보는 것도 같았다.
“……일단 장소를 옮겨서 얘기해.”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이고야 내 인생.
여기까지 들은 이상 내칠 수가 없었다. 되도록 조용히 안락하게 살고 싶은 게 목표라지만, 리케도르안을 죽게 둘 수는 없고. 거기다 흔쾌히 돕기에는 현재 내 처지는 악당의 여동생이고, 이 조그만 수호신을 데려다가 봉인시켜놓은 악당이 내 오빠였다.
왜 그놈이랑 남매라고 느껴본 적 단 한 번도 없는데 죄책감 느끼고 있냐.
“내 방으로 갈 거야.”
당장은 무거운 이야기를 가벼운 쪽으로 털어냈다.
“그래, 이제 네 사정은 알겠어. 리케도르안을 보여준 것도.”
솔직히 간만에 보게 된 리케도르안이 반갑지 않은 건 아니었다. 심정이 좀 복잡미묘해서 그렇지.
조금 전 꿈속에서 내 손끝에 얼굴을 비비던 모습을 생각한 순간 다시 손이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왜 더 요망해져서는.
“근데 아직 한 가지 이해가 안 되는 게 있는데, 아까부터 왜 솔직해지라니 마니 그런 소릴 한 거야?”
이 야옹이가 했던 말 대부분은 이해했다. 이것만 빼고 말이지.
-나를 꺼낼 때, 그 인간을 생각하지 않았냐. 냥.
맹수인지 야옹인지 모를 설표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젠 제 본래 말투를 쓸 모양이었다.
“생각 안 했는데?”
-아니다, 했다.
뭐. 리케도르안의 가문 문양이었으니 그럴 수 있다 치고.
“그래, 그렇다 치고, 꿈 보여주면서 솔직하니 마니 했잖아.”
-그거야 꿈에서는 솔직해지지 않았느냐.
“말투.”
-위대하신 이 몸은 위엄 넘치는 이 말투……
“도와주지 말까?”
-……않았나 냥!
“그래. 꿈에서 솔직해졌다니?”
설표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 인간과 주둥이를 비비……
“아, 아아! 아아. 됐어. 됐어. 거기까지.”
나는 황급히 이 똥괭이의 말을 막다 말고 멈칫했다.
“뭐야, 그럼 네가 유도한 거야?”
-무슨 소리냐, 냥. 이 몸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강제하지 않았다 냥.
나는 문고리를 잡으려다 말고 설표를 내려다봤다.
-내가 한 것은 꿈에서 더 솔직하게 만들어주는 것뿐이었다 냥, 꿈은 원래 껍데기를 벗겨주는 곳이다, 냥!
이런 어린 목소리로 할아버지 같은 철학적인 말을 하는 것이 어색했지만 지적할 틈이 없었다.
-네가 날 꺼낼 때 간절히 떠올리던 인간이었다. 붉은 장미의 후계자인 줄은 몰랐지만 난 그 인간을 보기 위해 도와준 것뿐이다, 냥!
순진한 푸른 눈이 날 향했다.
-인간, 너는 거절할 수 있었다, 냥!
의표를 찌른 말에 나는 눈을 굴렸다.
-뭐든 할 수 있었다, 냥! 거기서 그 인간을 안거나…….
“그만, 그만해.”
나는 딱 잘라 말하고는 손등을 들어 올렸다. 괜히 손등으로 입술을 북북 문댔다.
“그만 얘기하자. 무슨 말인지 알았으니까.”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지 않은데. 이런 식은 곤란하잖아. 뺨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일단 나머진 가서 얘기해.”
내 방으로 가서 휴식 먼저 취해야 할 것 같다. 열이 오른뺨도 식히고.
그리 생각하며 문을 열고 몸을 휙 돌렸을 때였다.
“이아나.”
누군가 벽에 가벼이 몸을 기대고 있었다. 건들거려야 할 것 같은 자세마저 백조처럼 우아하게 느껴지는 남자, 이 익숙한 음성의 주인을 모를 리 없었다.
“네가 어딜 갔나 싶어서 찾았어.”
체이서가 그윽하게 몸을 돌렸다. 살랑 불어오는 실바람에 그의 머리칼이 잔잔히 흔들렸다.
“또 위험한 상황인가 싶어서……. 걱정했잖아.”
한없이 다정이 담긴 음성이었다. 하나 그의 새빨간 눈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이윽고 한곳에 멈췄다.
“그런데 이건 뭘까.”
등줄기가 딱딱하게 굳었다. 체이서가 보고 있는 것은 내 품 속 설표였다. 아울러 그의 옆에는 늘씬한 체구의 검은 재규어가 있었다.
“……이건 헤르님의 개네.”
그가 살갑게 웃었다. 눈은 전혀 웃지 않은 채로. 그런 모습을 보며 소름이 돋았음은 물론이었다.
“왜 여기에 있을까.”
체이서의 눈은 나를 향해 있지 않았다. 말을 꺼내는 순간부터 지금 이 말로 이어질 때까지, 저 붉은 눈은 오직 설표를 향해 있었다.
옆에서 바라보는 나도 말이 나오질 않는데, 조그만 설표에게 쏟아지는 압박이 어떨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이아나, 비켜줘.>
아기 설표가 내 가슴을 마구 파고들었다. 두려움으로 가득 찬 몸짓이었다. 나는 이를 거절하는 대신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죽여야 할까. 아니, 그래야겠다.>
나는 지난 1여 년간 그의 모습을 보아왔다. 칼을 들면 얼마든지 어디까지도 잔혹해질 수 있는 모습을. 그리고 그의 칼끝 앞에서 고개를 내젓는 내 모습을 떠올렸다.
“오빠.”
내 부름에야 비로소 체이서의 눈이 움직였다. 아니, 기다렸다는 듯 반사적인 움직임이었다. 이어서 내게 웃는 얼굴은 내 부름만을 기다렸던 것처럼 부드러웠다.
“여긴 어쩐 일이야?”
방금 체이서의 모든 말을 들어놓고도 뻔히 뻔한 것을 물었다. 일종의 평화로운 대화를 해보려는 시도였다.
체이서가 잠시지만 내 손을 곁눈질하는 것 같았다.
“널 찾으러 왔지.”
체이서는 더는 설표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대신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떨어져 있던 내 손을 붙잡았다. 설표의 발을 받쳐주던 손이었다.
그가 내 손가락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찰나지만 손끝에 입을 맞추던 리케도르안을 떠올렸다. 신기하게도 손에 입을 맞추는 두 사람의 방식이 비슷했지만 분위기는 판이했다.
“날 찾으러 여기까지 왔다니, 번거로웠겠네. 여긴 잘 다니지 않는 층이잖아.”
나는 꿀꺽 넘어가는 숨을 들키지 않으려 했다. 다행스럽게 표정도 목소리도 태연하게 내보일 수 있었다.
“그렇지.”
“염려하지 마.”
나는 보일 듯 말 듯 웃어 보였다.
“도망가려 한 것은 아니니까.”
나를 붙잡고 있던 체이서의 손이 멈칫했다. 나는 찰나를 놓치지 않고 이어 말했다.
“암살자가 나타난 것도 아니고. 독을 먹은 것도 아니야.”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선으로 잇는다면 비스듬한 교착 끝에 그의 눈이 반달 모양으로 휘어졌다.
“그래.”
내 손을 제 손으로 얽으면서. 그가 나붓이 읊조렸다.
“그럼 이건 뭘까?”
돌아올 것이 왔다. 그는 나긋하게 물었지만 나는 알았다. 이것은 거대한 검은 짐승이 웅크린 것과 같은 일촉즉발, 위험 직전의 상황이란 것을.
침을 삼켰다.
<죽일까?>
1여 년간 수없이 들어온 질문.
<죽이지 마.>
내 대답이 다음 순간 그의 말과 행동을 결정할 거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이건 헤르님의 짐승이야.”
내 입에서 태연하게 음성이 흘러나왔다.
“오빠가 직접 그렇게 말했잖아?”
내 음성은 조용하고도 차분했다. 이를 말하는 얼굴은 일견 심드렁하게까지 보였을 것이다.
물론 마음 한구석에서는 내가 이것과 무슨 상관인가 하는 생각이 있었다. 나는 딱 평범한 사람이 가진 만큼 이기적이었다.
그리고 딱 그만큼 동정을 품을 줄 알았다.
“그리고 이것이 내게 직접 말해줬어. 자기가 헤르님의 짐승이라고.”
아무런 말도, 울음조차도 내지 못한 채 달달 떨던 설표가 흠칫한 것 같았다. 나는 이를 느꼈음에도 멈추지 않았다.
“오빠가 데려왔다던데, 이런 걸 납치라고 하나.”
체이서가 미소했다.
“납치는 사람에게 쓰는 말이지.”
“그럼 밀렵이라 할까?”
나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글쎄, 이아나. 내가 누군가의 허락을 받거나 몰래, 잡을 필요가 있을까?”
그냥 사냥이 좋겠어. 체이서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이어서 그의 엄지손가락이 내 손바닥을 살살 문질렸다.
“아무튼 오빠가 데려온 거란 거네.”
“그렇지.”
체이서는 선선히 수긍했다.
“왜 데려온 거야?”
그러나 왜인지 이 질문에는 대답하는 대신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집요할 정도로 오래.
……지뢰 밟은 건가? 아니면 잘못 짚은 건가.
고민이 길어질 무렵 체이서의 얼굴로 다시 나긋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의 음성은 이전보다 더욱 낮아져 있었다.
“드디어 내가 궁금해진 거야?”
나를 훑는 시선을 마주한 순간 오싹. 등줄기를 타고 내려가는 오묘한 느낌이 들었다.
내게 본색을 드러내고서도 그는 가끔은 푼수처럼 굴거나 허당 같은 행동을 보이거나, 능글맞은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그러나 그의 본질은 변함없었다. 그는 항상 마지막에 검을 들었다.
<사, 살려주십쇼, 살려…….>
<꺄아악!>
검 끝이 나를 향하지 않음을 알지만 어떤 이들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잘 알았다. 눈앞에서 보았으니까.
“아무튼 간에 이아나.”
나의 침묵이 길어지자 체이서가 빙긋 눈웃음을 지었다.
“그거, 이리 줘.”
그의 음성은 친절하고 부드러웠으나, 거절할 수 없는 힘을 담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여기서 그의 능력에 홀려 몽롱해지거나 홀린 듯 끄덕이며 이 짐승을 넘겨주었을 것이다.
설표는 여전히 울음소리 하나 내지 못한 채 내 품속에서 덜덜 떨고 있었다. 조그만 발톱이 심장 부근을 꾹 눌렀다. 하필 심장이었다.
“그렇게 말해도 오빠의 능력은 내게 통하지 않는다면서.”
체이서의 능력은 매혹안, 그가 마음먹고자 한 인간을 완전히 세뇌할 수 있었다. 다만 이는 그에게도 제약과 제한이 있어 멋대로 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렇지.”
체이서가 눈을 굴렸다.
“하지만 쓰지 않았어. 그저 네겐 가장 좋은 목소리만 들려주고 싶을 뿐이야.”
“내게 그렇게 말해도 나오는 건 없는데.”
“왜 없어. 네가 날 바라보잖아?”
“……느끼하단 소리 많이 안 들어?”
“1여 년간 내내 그 소리네.”
체이서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넌 무서운 것보다는 부드러운 걸 좋아하잖아.”
그가 내 손을 살살 쓸어내리며 말했다. 핏줄을 쓰는 그의 손가락에 신경이 몰렸다.
그건 그렇지.
검을 들고 미친 짓을 하느니 차라리 이렇게 푼수같이 구는 쪽이 나았다. 하나뿐인 여동생을 아끼는 극성맞은 오빠처럼……. 미친 사람처럼 구느니 이렇게 구는 쪽이 편했으니까.
나는 체이서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더는 피할 수 없음을 느꼈다.
속으로 작게 숨을 내쉬었다. 주먹을 쥐었다 편 건, 내 나름의 각오를 다지는 행동이었다.
“주기 싫어.”
입술이 긴장으로 살짝 떨렸지만 축이는 척 느릿하게 움직였다.
“내가 가질래.”
나는 일부러 설표를 가슴에 꾹 끌어안았다. 어린아이가 하듯이. 그러나 표정은 느긋한 채였다.
“갖고 싶어. 이거, 나 줘.”
더는 오빠의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응시했다.
산더미처럼 쌓인 보석, 세상에서 제일 편안한 침대, 매일 같이 바뀌는 옷, 시선 한 번에 죽는시늉을 하는 하녀들.
“줄 거지?”
모두 그가 나의 안락한 감금에 선물한 것들이었다.
그가 웃었다.
“내 동생, 이것 말고 다른 것은 줄 수 있는데.”
“아하. 이건 안 된다고?”
체이서도 나도 알고 있었다. 내가 그가 선물한 모든 것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갖고 싶은 게 있어?>
1여 년간 그는 내게 습관처럼 물었다. 나는 이 순간 그를 흉내내듯 미소했다.
“갖고 싶은 게 생기면 말해달라고 했잖아?”
나는 부러 조금 거칠게 짐승을 안았다. 그러고는 체이서에게서 손을 가져와 양손으로 들어 올렸다.
“난 이게 갖고 싶어, 오빠.”
“…….”
체이서는 내가 타인에게 보이는 관심을 반기지 않는다. 내가 타인에게 관심을 보인 적이 거의 없긴 하다만은.
이건 물건에도 마찬가지였으니…… 동물에도 해당될 것이다.
참 이상한 남자였다.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물으면서도 정작 내가 그것에 관심을 주면 좋아하지 않으면서.
‘이아나’와 당신 사이에 무엇이 있었기에 이런 관계가 되었을까.
나는 관심을 무심히 지워냈다. 지금에 와선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다. 고로 중요한 건 나는 안다는 거다. 이렇게 말해서는 체이서의 뜻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그렇기에 한마디를 더했다.
절그럭.
내가 한 걸음 다가가자, 쇠사슬이 기다렸다는 듯이 철컹 움직이며 존재를 드러냈다.
“오빠, 나는 약 1년 전에 족쇄와 쇠사슬을 채웠을 때도 아무 말 안 했어.”
사실이었다. 근거지를 불태운 체이서가 내게 쇠사슬을 달았을 때도, 오, 이건 새로운 감방인가 하고 말았지.
탈출 시도를 두어 번 더 했었을지언정.
“불만도 불평도 안 했었지.”
똑똑한 인간이니 충분히 알아들으리라. 나는 네가 한 짓을 두고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이젠 그걸 내게 돌려달라고.
나는 팔짱 사이에 설표를 두고, 싱긋 웃었다.
“그러니까, 들어줄 거지? 이게 갖고 싶어.”
체이서는 악당이었고 도덕과 양심은 오래 전에 팔아먹은 인간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가 내게만은 그러지 않는다는 사실을 1여 년간의 시간으로 학습했다.
그러니까.
“……그래.”
이 남자가 허락할 것을 알고 있었다.
“네가 가져. 이아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마치 천에 감싸인 칼을 보는 듯했다. 부드러웠음에도 예기를 감출 수 없었다.
그 예기는 나를 향해 있지 않았다.
“널 위해 뭐든 못 해주겠어.”
굴절된 분노가 어린 짐승을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있잖아.”
크르르르. 나는 그의 옆에서 낮게 우는 검은 재규어를 보았다.
저 재규어의 이름은 라탄, 1여 년 전 불을 일으킨 검은 새와 마찬가지로 체이서를 수호하는 수호신. 그리고 체이서는 이것들을 제가 사역하는 짐승이라 불렀다.
조그만 흑마법사님의 설명과는 다르지만 나는 이쪽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저 동물들은 정말이지 체이서가 아니면 죽을 것처럼 충성스럽게 따랐으니까.
거기다, 체이서의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히이이익! 이, 인간. 치워줘, 치워다오! 냥!
지금까지 공포로 얼어붙어서 아무것도 못하던 설표가 라탄을 보고서는 하악질을 서슴지 않았다. 그나마 만만한 상대가 저쪽이라는 건가. 물론 검은 재규어 쪽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궁금한 게 있는데.”
설표를 안고 있던 손이 다시 체이서의 손에 잡혀 딸려 올라갔다.
“네가 이걸 갖고 싶은 게, 단순히 이것 때문이야?”
이것이 설표를 가리키는 건 알았다.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싶어서.”
손가락끼리 얽혀 들어가며 체이서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궁금한데, 이아나.”
피처럼 붉게 빛나는 눈동자가 내가 비칠 것처럼 근접했다. 긴밀한 거리에 나는 숨을 꾹 참았다. 손가락이 아프지는 않았지만 손마디에서 쿵쿵 박동이 뛰는 것 같았다. 긴장감 때문이었다.
체이서는 거짓말하는 이를 다그치듯 거리를 가까이 좁혀 날 관찰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나는 겨우 입술을 떼어냈다.
“이거 생긴 게 마음에 들었을 뿐이야.”
“네가 동물을 좋아하는지 몰랐는데.”
나는 1여 년간 한 번도 체이서의 동물들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는 이걸 꼬집어 말했다.
그야 당연하지.
“난, 귀여운 게 좋아.”
그 말에 반응은 내가 아닌 다른 것에게서 왔다. 낑, 아래에 있던 재규어 라탄이 울음소리를 낸 것이다.
“이런, 내 라탄이 슬퍼하는데?”
“……왜 슬퍼하는 건데?”
“그야, 네가 1년 동안 눈길도 주지 않았으니까?”
체이서가 내 손등에 가벼운 키스를 남기며 어깨를 으쓱했다.
“쟤들은 널 좋아해, 내 동생.”
체이서가 나를 붙잡지 않은 손을 뻗었다. 쐐애액. 눈앞을 지나간 무언가가 그의 팔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검은 새였다.
어느 틈엔가 나타난 것인지 모를 새는 우아하게 날개를 접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끼르르륵!
그러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 우는 게 아닌가. 어쩐지 이쪽도 평소랑 다르게 침울해 보이는 기색이었다.
“봐, 아퀼라도 섭섭해하잖아.”
섭섭해한다기보다는 화를 내는 것 같은데. 나는 새가 1여 년간 태워버린 것을 생각하다, 설표를 끌어안았다.
-이, 인간. 날 놓으면 안 된다 냥!
왜일까 설표를 보는 라탄과 아퀼라의 시선이 더욱 뾰족해진 것 같았다.
“왜 안 예뻐해 줘, 응?”
“그야.”
처음엔 두 동물에 관심이 없었던 건데. 사실 조금 전에 귀엽다고 한 것도 그냥 상황을 넘기려 한 말이었다. 물론 설표가 좀 더 귀여운 건 인정한다.
“……안 귀여우니까?”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어서 대충 흘렸더니. 이쪽이 더 실수였던 모양이었다. 이제는 숫제 쿠쿵, 충격받은 눈으로 나를 보는 짐승 두 마리를 발견했으니까.
“어라, 충격받았는데.”
“아니, 충격을 왜 받아. 쟤네 다 컸잖아…….”
“아니야. 이쪽도 태어난 지…… 아. 10년은 넘었네.”
“봐.”
동물 수명으로 10년이면 쟤네는 애 낳고 손주도 보는 나이야. 봐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일 때였다.
파아앗!
눈앞에서 검은빛이 터졌다.
“이런…….”
좀처럼 당황하지 않는 체이서의 난감한 목소리와 함께였다.
그리고 검은 빛과 연기가 사라진 순간 체이서의 팔에 있던 독수리 같은 새는 온데간데없었다.
삑!
대신에 아주 작은 검은…… 참새 같은 것이 삑삑 울고 있었다.
……참새? 참새 맞지?
나는 갑자기 변한 모습을 황당하게 바라봤다.
“봐, 토라져서 이러는 거잖아.”
“아니. 왜 토라지는 건데……?”
체이서가 어깨를 으쓱였다. 보면 모르겠냐는 의사표현이었다. 돌아보면 라탄 쪽은 재규어가 아니라 조그만 고양이가 되어 있었다. 아니, 이쪽도 재규어긴 한데 설표만큼이나 작아졌다.
두 동물은 작아져서도 별다른 반응을 이끌어 내지 못하자,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았다.
“저기, 넌 귀엽진 않아도 충분히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난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난 멋있는 것도 좋아.”
그러자 외면받았던 라탄의 귀가 쫑긋 섰다. 얼른 다가와서 내 다리에 얼굴을 마구 비볐다.
허, 이런 단순한 동물들 같으니. 순간 이쪽이 정말 수호신이 맞나 싶었지만 고개를 내저었다.
뭐든 불태우는 아퀼라나 침입자는 끝까지 추적해서 해치우는 라탄이나 두 동물의 위력은 이미 체감한 바였다.
“……일단 돌아가서 쉴래.”
팽팽했던 긴장감이 이 두 동물의 변신으로 인해 느슨해지다 못해 해파리처럼 느물느물해진 것 같다. 이것도 재주라면 재주인데, 내게 나쁜 일은 아니었다.
“얘기 끝났으면 가도 되지?”
가까워진 거리를 좀 늘리고 싶은데 손은 여전히 그에게 깍지 잡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남자와 리케도르안의 공통점이 하나 더 있었네.
둘 다 손을 잡을 때 깍지를 끼는 걸 좋아한다. 평범하게는 잡지 않더라고. 난 깍지를 낀 손은 벗어나지 못하는 느낌이라 가끔은 선뜩하던데.
“내 동생, 너는 내게 허락을 묻지 않아도 돼. 아니, 묻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사람이야.”
“그래. 돌아갈게.”
“그런데 말이야, 이아나.”
그의 음성이 스폰지라면, 꾹 눌렀을 때 달콤한 꿀이 배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늘 이런 음성으로 살벌한 말도 서슴지 않던 사람이다.
“정말 아무런 이유도 아니야?”
지금처럼 이렇게 의표를 뚫는 말조차 태연스럽게 던지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냥 이게 마음에 들어서?”
“그래. 마음에 들어서.”
나는 그렇게 말했다가, 다시 입을 열어 덧붙였다.
“조금 적적해서 그래. 오빠랑 조그만 흑마법사님이 있지만……. 친구 하나 없는 삶이잖아?”
‘이아나’에게 친구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아는 거라곤 이 친구가 일찍 요절했다는 것뿐이었으니, 이 나이쯤 죽었다면 참 일찍 죽은 거긴 했다. 젊은 나이였으니까.
“친구?”
체이서를 설득할 생각에 꺼낸 말이었는데, 어라.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생각보다 잘 먹힌 것 같았다. 그가 미소를 지우며 고민에 잠겼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입술을 끌어올렸다.
“나로는 부족했어?”
여기서는 맞다고도 아니라고도 하면 안 될 것 같아 그저 침묵했다. 그는 이전과 같이 씩 웃고는 말았다. 아울러 근사한 미소를 걸고서도 전혀 웃지 않는 눈이 잠시 나를 훑듯 보다가 떼어졌다.
“그래……. 친구란 말이지.”
체이서의 손이 떨어졌다.
“‘친구’가 필요했다면, 말을 하지 그랬어.”
“……어?”
“알아들었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면 됐어.”
그가 웃음을 내걸었다.
“그걸 가져도 좋아. ……대신 나보다 좋아하지는 말아줘.”
세게 잡힌 것도 아니건만 손이 얼얼한 기분에 괜히 뒤로 숨겨 쥐었다가 펴고는 설표를 고쳐 안았다.
“푹 쉬어, 내 동생.”
왤까, 저 쉬라는 말이 단순히 쉬라는 말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다른 무언가의 서막처럼 느껴지는, 요상한 불안감을 무시한 채 돌아서서 걸었다.
절그럭절그럭.
이 저택 어디서든 내 존재를 알리는 맑은 쇠사슬 소리와 함께.
<3권에서 계속>
감방에서 남자주인공을 만났습니다 2권
안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