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31/87)

“안녕, 리케도르안.”

다행히 내 목소리는 떨려 나오지 않았다.

“잘 지냈지?”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려다 말고 멈칫했다.

근데 참 이상하지. 이게 가짜든 뭐든 마지막으로 본 리케도르안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성이 있는 그의 모습은 아직 앳된 모습이 남아 있었는데.

나는 이곳을 짐승이 만든 환상 속이라 여겼다. 하나 그렇게 생각했을 때 이상한 것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보통 환상 속에 보지 못한 모습이 나오던가?

고작 1여 년 사이에 왜 이렇게 큰 거지. 내가 보지도 못한 모습을 무의식중에 상상이라도 한 걸까?

허공에 멈춰 있던 손에 온기가 닿았다. 그가 내 손을 끌어당겼다. 그는 내 손을 제 머리로 끌어와, 나붓이 내려놓았다. 그 상태로 시선이 마주치자, 눈물이 턱 끝에 매달린 얼굴로 살짝 웃었다. 그가 내 손등을 잡고, 살살 머리를 쓰다듬게 했다.

“나는 잘…… 못 지냈어요.”

나는 그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감고 내 손을 내려서 뺨에 기댔다.

“보고 싶어서.”

눈물길이 손바닥에 고스란히 느껴졌다. 감방의 한기까지 재현한 걸까. 식은 눈물은 차가웠다. 그러나 그의 뺨은 열이 나듯 따끈했다.

“있잖아요, 이아나.”

코앞에서 길고 끝이 살짝 말려 올라간 은빛 속눈썹이 팔랑팔랑, 나비처럼 움직였다. 나비의 날갯짓 같은 떨림이 내 심장에 내려앉았나 싶었다.

“곧 약조한 1년이야.”

“아…….”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가 이런 말을 할 만큼 시간이 흘렀나. 아니. 흘렀지.

“당신도 잊지 않은 거죠?”

“그…… 렇지.”

잊을 수 있을 리가.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 얼굴로 헤어졌는데, 어떻게 잊겠어.

하지만 이를 입술에 담지는 않았다.

“……당신 좀 마른 것 같다.”

“간수는 내가…… 키가 컸다고 했어요.”

“응, 그런 것 같네요.”

“열심히 먹었어요. 당신이 그렇게 하라고 했으니까.”

내가 마지막으로 건넸던 인사에는 잘 먹고 잘 자란 이야기도 있었다.

나는 이 열악한 환경에 뻔히 힘든 것을 그에게 바랐다. 그가 잘 지내길 바랐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칭찬을 기다리는 듯한 얼굴로 지내왔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당신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내내 당신을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지.

<이아나!>

<쿨럭! 쿨럭…….>

<해독쩨를 가져왔습미다! 해독마법을 시행하겠씁니다!>

잔잔히 흘러갈 줄 알았던 내 삶은 생각보다 전쟁 같았다.

내 느긋함은 급박한 상황에 적응하게 도왔지만, 그렇다고 상황의 위급함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잘했어요.”

하나 이런 근황을 그에게 전하는 대신 손을 움직였다. 예년보다 부드러운 뺨의 감촉이 손끝에 휘어 고스란히 느껴졌다. 비단처럼 보드라웠다.

왜일까, 그가 더욱 유려해진 기분이다. 아니, 사람은 성장하니까 당연한가. 이전엔 붉어진 얼굴이 참 귀엽기도 했는데. 내가 키운 것도 아니건만 조금은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이제 짐승의 모습은 나오지 않는 거야?”

그러자 그가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직…….”

아직 고쳐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원작이 시작하려면 멀었지. 그때까지 그 짐승의 모습으로도 말을 할 줄 알게 되는 건데.

그게 가능하긴 한 걸까.

“그래요? 다행인 일은 아닌데…….”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걸 아는데 나는 좀 기쁘기도 하고 그러네요.”

당신에게 미안한 소리이긴 하지만.

“그쪽도 리케도르안 당신이니까.”

나는 그의 볼을 콕, 한 번 찔렀다.

“꽤 좋아했거든요, 그쪽을.”

그쪽 짐승 모드도 참 귀여웠더랬지. 시간이 지날수록 처음 경계한 모습은 어디로 가고 귀여운 강아지처럼 나를 참 잘 따랐었다.하나를 떠올리자, 기다렸다는 듯 새록새록 떠오르는 추억에 사로잡혔다. 그러다 보니 내가 뱉은 말에 오해의 여지가 있을 수 있음을 간과했다.

“……그, 어……. 했어요?”

“네?”

“다, 당신도 나를…….”

리케도르안이 내 손을 잡지 않은 손으로 내 치맛자락을 잡고 있었다.

“조, 좋아한다고. 방금.”

아. 그제야 내가 한 말을 깨달았다.

“……어, 그렇긴 한데. 그거, 짐승 쪽 모습이 좋다고 한 건데요. 당신 귀엽다고.”

“귀, 귀…….”

“귀엽다고요.”

화아아악.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얼굴이 화르륵 타올랐다. 이전과는 다르게 부끄럽거나 창피해서인 듯 내 시선을 확 피해버렸다.

나는 문득 우리의 첫 만남이 떠올라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내가 무안하게 했나? 미안해요.”

리케도르안은 고개를 숙인 채 대답을 하지 못했다. 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모습을 보니 안심과 아쉬움이 미묘하게 교차했다.

“건강한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잘 지내길 바랐지. 제이르가 학대를 막아주겠다고 했는데, 그건 어떻게 됐을까? 그의 몸을 살짝 훑었지만 알 수가 없었다. 워낙에 치유력이 좋아 이전에도 상처들이 금방금방 낫는 것으로 모자라 흔적도 없이 사라지곤 했으니까.

그러니 그가 여전히 학대를 받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차마 물어볼 수도 없었고. 초롱초롱하게 날 바라보는 눈을 보며 난감한 기분을 느꼈다.

“으음, 이제 아프지 않아요?”

살짝 돌려 질문했다.

“……아프지 않아요.”

그가 내 눈을 보며 우물우물 말했다. 하지만 왜인지 말하던 도중에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아니, 아파요. 아파요!”

“아프다고요?”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의 몸은 멀쩡해 보였다. 안 아파 보이는데?

“그…… 아픈데.”

“어디가요?”

“……그게.”

그의 목이 거북이처럼 쏙 들어가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지켜보았다. 그는 뺨에 기댄 내 손을 조물락 만지더니 눈만 살짝 들어 올렸다.

“……아프면, 걱정해줄 것…… 같아서.”

“허, 참. 사람이 이렇게 귀여워도 돼요?”

“네?”

“나 참.”

나는 그에게 잡히지 않은 손으로 눈을 문질렀다. 좀 커진 줄 알았더니 심장에 해로운 건 여전하잖아? 나도 모르게 실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눈 끔뻑이는 것 좀 보게. 허. 이렇게 요망해서야.

거기다 키가 나보다 더 커졌으면서, 굳이 몸을 굽혀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게…….

“울리고 싶네.”

“……네?”

“음, 아뇨.”

실수로 마음의 소리가 튀어나가 버렸다. 착한 생각. 착한 생각.

간만에 착한 생각을 외치고, 동시에 내 손등을 입술에 꾹 눌렀다가 뗐다. 리케도르안이 얼른 내 손끝을 잡았다.

“다쳤어요?”

“응? 나요?”

엉뚱한 소리에 손을 입에서 떨어트렸다. 그가 바라보는 것이 내 손인 것 같았다.

“손가락에.”

“손가락에……? 아.”

검지 끝에 길게 생채기가 나 있었다. 마치 종이에 베인 것처럼 얇고 긴 상처였다.

피도 났었던 건지 굳은 피가 묻어 있다.

‘아픈 줄도 몰랐네.’

난 손가락을 쥐었다가 폈다. 그 순간이었다. 툭. 상처가 터지며 피가 맺혔다.

“피, 피가 나요.”

“그러네요.”

겨우 이 정도 상처에 피가 왜 나는 거지? 상처의 크기를 간과한 것인지 생각보다 피가 나오는 양이 많았다. 붉은 구슬처럼 맺힌 피를 대충 닦으려 하는데, 그보다 리케도르안이 빨랐다.

“리케도르안?”

불렀을 때는 이미 그가 손가락을 입술에 집어넣은 뒤였다.

“무슨, 흐…….”

혀가 마디를 쓸었다. 나도 모르게 발음이 잘근 씹혔다. 혀가 손가락을 휘감는 느낌이 생소했다. 그가 더 당황할 것이라 생각했건만 웬걸, 리케도르안은 진지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시리게 느껴지는 푸른 홍채에 어깨를 굳혔다. 한순간이지만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아니, 그보다는 성장했을 때의 모습같이…….

입안은 따끈하고도 축축했다. 물컹한 혀가 상처를 헤집고 감싸니 나도 모르게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등줄기가 절로 펴진다.

“리케도르안, 그만. 그만해요.”

하지만 리케도르안은 내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서 그만둘 생각이 없는 듯했다.

보통 이럴 땐 화들짝 놀라 먼저 놓아야 하는데.

그가 상처를 모두 쓸어내리고 나서야 입술에서 손가락을 빼냈다. 길게 늘어진 은빛 실에 뺨을 붉혔다.

“……아프지 말라면서.”

그의 혀가 타액이 흘러내리는 입술을 훑었다. 안 된다, 생각하면서도 눈이 떨어지질 않았다.

“당신이 아프면 안 되잖아요. 이아나.”

피는 멎었지만 심장에서 쿵쾅쿵쾅 요동치며 혈류를 내뿜고 있는 것 같다. 도무지 진정이 되질 않으니.

“응?”

하필 그의 고개가 막 귀 언저리에 있던 터라 귓바퀴로 낮은 숨이 절로 느껴졌다. 굳었던 어깨가 이번엔 잔뜩 굽어졌다.

하필 입술에 손가락을 넣은 뒤라 그런지 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발가락이 곱아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리케도르안에게 잡힌 손목에 절로 집중되었다. 그는 자각하는 것인지 아닌지, 손가락이 손목 안쪽 여린 살을 사악 쓸어내렸다. 오소소, 등에 소름이 돋았다.

“……알았어, 알았어요.”

이건 실수야.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생각해보니 이 상처가 어디서 난 건지 짐작이 간다.

헤르님의 짐승, 그 똥고양이를 꺼낼 때 손이 따끔했던 것도 같았다. 기어이 그 짐승 때문에 피까지 보았다 생각하니 부아가 치밀었다. 하나 이는 나타났던 것보다 빠르게 사라졌다. 그래, 화내 봐야 뭐 하겠어.

“아프지 말아요.”

손등으로 온기가 옮겨왔다. 그는 내 손을 잡고 작게 중얼거렸다.

“……건강한 모습으로 나 데리러 와주기로 해요.”

목 안을 긁는듯한 음성이 잊었던 긴장을 자아냈다. 내 울대가 꿀꺽 넘어갔다. 기억나지 마. 기억나지 마라.

“당신도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으니까요.”

그의 뺨이 발긋 붉어져 있었다. 그는 그 채로 시선을 느릿하게 내렸다. 청아함과 야릇함이 공존한 모순적인 얼굴로.

“두 달 뒤에, 데리러 와 줄 거죠?”

피할 수 없는 질문이 도달했다.

“그럴 거죠?”

나는 대답을 하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침묵을 지키지도 못한 채, 입술을 달싹였다.

“대답해주지 않겠다. 그렇죠.”

이 침묵에 그는 상처받지 않은 것 같았다.

“어차피 꿈이고, 당신은 늘 그래왔으니까.”

꿈? 그 한마디에 뜨거워지던 온도가 잠시 멈췄다. 막 달아오르려던 뺨도.

‘꿈이라니.’

내게는 모든 것이 생생했다. 이 공간도, 눈앞의 리케도르안도. 지나치게 생생한 공기가 시간을 돌린 것처럼 느껴질 정도인데…….

“꿈이지만…….”

리케도르안은 이를 자신의 꿈이라 말하고 있었다.

“꿈이니까. 괜찮은 거죠?”

“뭐가?”

잠깐 감방 천장을 향했던 눈이 다시 그를 향했다. 그러고는 흠칫 등을 물렸다. 그러나 물러날 곳은 없었다. 등으로 차가운 벽이 느껴졌으니까. 처음부터 내가 있던 곳은 감방 벽 앞이었다. 줄곧 그에게만 집중하느라 간과한 점이었다. 물러날 곳 없는 상황에서, 그의 얼굴이 바로 앞에 있었다.

리케도르안이 여즉 잡고 있던 내 손을 들어올렸다. 손목에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파묻고는 눈을 감았다. 여린 속눈썹이 파르라니 떨렸다.

“꿈에서만이라도, 그리워하게 해주세요.”

“……리케도르안.”

지금 당신,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어. 그 말은 흡 목 뒤로 넘어갔다. 그가 더욱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그거 알아요? 긴 시간 동안…… 겨우 두 번째란 걸요.”

“두 번째……?”

“당신이 내 꿈에 나온 숫자요.”

그러니까 나는 당신 꿈이 아니래도. 등줄기로 선연한 식은땀이 흘렀다. 손가락을 꼼지락 움직였지만, 이는 그를 더욱 자극했던 모양이었다.

촉. 입술이 가볍게 맞았다가 떨어졌다. 잘못 느꼈나 싶었지만 아니었다. 그가 목이 마른 듯 혀로 입술을 축였다. 붉디 붉은 입술에서 시선을 떼어낼 수 없었다. 벽을 짚은 단단한 팔이 천천히 내려가 자신의 가슴으로 올라왔다. 하필 열린 셔츠 안으로 새하얀 골이 보였다. 시간이 괜히 지난 것이 아닌지 더욱 탄탄해진 근골이 보였다. 얼굴이 절로 빨개질 것만 같았다. 그의 팔이 내려와 내 옆을 짚었다. 그러고는 휙 그의 고개가 꺾인다.

그의 눈 밑이 물을 들인 것처럼 발긋 색조로 물들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귀마저 새빨갰다.

“꿈이니까…… 괜찮은 거잖아요. 여, 여기서 만큼은 나와 당신뿐이니까.”

그가 눈을 들어 올린 순간, 그 순간 나비처럼 움직이는 속눈썹에 나는 사로잡힌 것처럼 꼼짝하지 못했다.

“피하지…… 말아요. 응?”

이어서 그가 입술을 살짝 벌리는 것이 천천히 흘러가듯 보였다. 서툴고도 질척한 입술이 내 입술 근처를 툭툭 맴돌다가, 그대로 벌어지더니, 붉은 혀가 나를 맞이했다. 다음은 불가항력이었다.

내 입술을 사탕처럼 머금는 입술에 못 이겨 아랫입술이 절로 벌어진다. 동시에 그가 파고들었다. 움찔. 내 손목이 움직여 안착한 곳이 하필 맨살이 느껴지는 가슴이었다. 탄탄한 가슴에서 연신 심장이 뛰고 있었다.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그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내 소매 안쪽을 파고든 닿는 순간.

눈앞이 암전됐다.

“하아…….”

온기가 사라진 손을 얼른 응시했다. 리케도르안의 손은 사라졌건만 여전히 붙잡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게…… 뭐야. 대체.’

장소는 다시 체이서의 저택 방 안이었다. 돌 부스러기가 떨어진 것이 시간이 전혀 흐르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그래, 그 이상한 짐승을 꺼낸 시점이었다.

“대체…….”

-보았느냐, 인간!

기다렸다는 듯이 짐승의 울음과 아이의 음성, 양쪽 목소리가 들렸다.

웨오애오애옹! 캬앙.

그대로 눈만 굴렸다. 설표인지, 똥괭인지 모를 짐승은 내 허벅지에 발바닥을 댄 채로 당당하게 울어대고 있었다.

“너 지금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설표는 내 손에 한 줌 쥐일 정도로 아주 작고 가벼웠다. 나는 짐승을 콱 잡고 그대로 들어 올렸다.

-놔, 놔라! 무슨 짓이냐! 놓지 못할까!

“빨리 말해!”

갈 곳 잃은 발이 허공에서 마구 유영했다. 내가 놔주지 않을 기세자, 설표는 충격에 빠진 표정을 보였다.

-도, 도와준 거다, 냥!

“냥? 냥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사람한테 이상한 환상을 보여주고 뭐?”

-아흑, 흔들지, 마라, 냥!

급하니까 본래 말투가 나오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이쪽이 진짜 말투인 듯했다.

-환상이 아니라 꿈이다!

“꿈?”

설표가 웨옹웨옹 울며 얼른 끄덕였다.

-그래! 거기 인간이 있었지? 그 인간의 꿈이니라.

내가 짤짤 흔드는 것을 멈추자마자 설표의 말투가 다시 요상한 조상님체로 돌아갔다.

“허?”

뭘 꿈이니라야, 꿈이니라는. 확 꼼짝 못 하게 흔들어 버릴까 보다. 내가 다시 흔들자, 설표가 히익 소리를 냈다.

-도와준 이 몸에게 무, 무슨 짓이냐, 무례하느니라!

“돕긴 뭘 도와.”

그보다 그 인간이라니, 헤르님의 짐승은 리케도르안을 잘 모르는 것처럼 굴었다.

“저기, 너 걔 몰라? 방금 있던 애.”

-꿈속의 인간을 말하나? 모르느니라! 나는 그냥 그 인간의 꿈을 보여준 거다!

“왜 몰라?”

-모른다, 이 몸이 본 건 인간 너와 주둥이를 맞부딪, 냥! 흔들지 마라 냥!

“쓸데없는 소릴 하고 있어.”

나는 설표를 마구 흔들었다. 두툼한 꼬리가 내 손등을 쳤지만 솜방망이라 전혀 아프지 않았다.

-꿈에서는 솔직해지지 않았느냐!

“솔직해?”

-너는 그 인간을 생각하면서 나를 풀어줬다! 그래서 보답으로 보여준 거다. 냥!

설표는 억울하다는 듯이 ‘나를 풀어준 이유를 모른 것 같아서 보여준 거다! 냥!’ 하고 덧붙이며 마구 울어댔다. 웨옹애옹, 억울함이 가득한 울음소리였다.

“……너 걔가 누군지 정말 몰라?”

-모른다 하지 않냐, 냥!

“왜 몰라? 걔가 헤르님 후계자인데?”

설표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렇게 놀랄 일인가?

-후, 후, 후계자?!

“그래.”

아니. 색깔부터가 자기랑 찰떡이구만. 설표의 털색과 눈동자는 리케도르안과 정확히 일치했다.

“그렇게 볼 것 없어. 헤르님 후계자 맞아.”

원래라면 리케도르안의 수호신이 될 거 맞지? 그런 것 같은데.

“원래 네 주인 맞지?”

-주인이라니!

“아, 깜짝이야.”

-위, 위대하신 이 몸의 주인은 없다! 수호신과 계약자는 주종관계가 아니다, 냥!

“그래그래. 주인‘은’ 아니라는 거지?”

아기 설표의 눈은 혼란으로 가득하다 못해 잔뜩 진동했다.

-어, 어쩐지. 꿈속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했다, 냥. 본래 수호신은 계약 후보의 꿈에만 들어갈 수 있는데…….

“……그걸 이제 깨달았다고? 바보니?”

-이익, 이 몸은 바보가 아니다!

“그래그래, 그럼 망충이.”

-히익!

하아아악, 하아악!

이제는 이 똥괭이가 숫제 하악질을 했다. 어리긴 해도 훌륭한 고양이라는 건가. 나는 이제 이것을 맹수 취급도 하지 않았다.

“그래, 아무튼 그렇다 치고. 왜 위대하신 멍충이께서 이 저택에 있는 건데?”

-멍충이 아니다, 냥! 그리고 난 봉인 당한 거다!

“그래. 봉인. 왜 봉인 당한 건데?”

-그건…….

머릿속으로 들리는 아이의 음성이 흐려졌다. 아기 설표의 솜방망이 같은 발도 파르르 떨렸다. 혼란이 고스란히 넘어오는 기분이었다.

-모르겠다…….

“모르겠다고?”

-나……. 이 몸은 본래 태어나시자마자 후계자 후보의 몸 안에 있어야 했다. 냥.

설표가 더듬더듬 말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인간이 나를 붙잡더니 눈 떠보니 깜깜한 공간이었다, 냥. 그리고 어딘가에 봉인되었다. 냥.

웨옹웨옹, 구슬픈 울음이 함께했다.

-바깥을 볼 수 있지만, 누구도 이 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냥.

“볼 수 있었다고?”

-그렇다, 냥. 벽을 타고 다닐 수는 있었지만…… 나를 알아차리는 인간은 없었다, 냥…….

벽을 타고 다녔다니. 나는 내가 이곳까지 찾아올 수 있던 조각조각 난 문양을 떠올렸다. 관련 있는 건가?

-……나를 붙잡아 온 인간을 제외하고서.

설표가 파르르르 떨었다.

-인간, 네가 처음이었다 냥!

조그만 발바닥이 척, 내 손등 위로 올려졌다. 설표는 그대로 폴짝 내 허벅지에 뛰어들었다. 털이 폭신하기 짝이 없었지만 동시에 불안했다.

-그러니까 위대하신 이 몸을 도울 기회를 주겠다!

“거절할게.”

역시나. 나는 이런 촉이 참 좋았다. 이를테면 다분히 귀찮아지거나 힘들어질 만한 일들에 말이다.

-어째서냐! 위대한 이 몸을 도울 일이다!

“응, 기각.”

-왜지? 왜냐!

“나는 똥고양이는 안 도와줘요.”

-내 덕분에 솔직해질 수 있지 않았느냐!

“그 조상님체는 버릇이야? 왜 자꾸 하오체를 써.”

설표가 말하다 말고 하오체? 하며 조그만 머리를 갸웃했다. 나는 네가 쓰는 말투, 하고 가르쳐주었다.

-이, 이건 전대가…… 이렇게 하면, 위엄이 너, 넘칠 거라고.

전대?

“혹시 헤르님 대공의 짐승을 말하는 거야?”

헤르님 대공도 능력이 있다고 했으니 어쩌면 그쪽에게도 짐승이 있을지 몰라 물었다.

-그렇다, 냥.

“응. 집어치우자. 전혀 안 어울려.”

-시, 싫다! 위대하신 이 몸은 위엄이 넘치는 수호신이 될 것이다!

고집 세네. 그래, 네 맘대로 해라. 난 고개를 살짝 내저었다.

“그래그래. 위대하신 어, 음 그래. 너 다 해먹어.”

그리고 다시 저 안에 들어가주지 않으련? 나는 얼른 돌아가라는 의미로 깨진 돌 부스러기와 설표를 번갈아 바라봤다.

-아, 안 들어갈 거니라!

“그 말투 안 고쳐주면 당장.”

-고치겠다, 고쳐!

설표가 소리를 빽 질렀다.

-안, 안 들어갈 거다 냥!

“그래도 넣을 건데.”

안 넣는다고는 안 했단다. 그러자 설표도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듯 발톱을 세워 나를 붙잡았다.

-너, 너무한다!

“응응, 그래 무 많이 해. 나는 양상추 할 테니.”

-이, 이상한 소리 마라! 냥, 내가 이렇게 있으면 안 된다!

웨애애애옹!

그 순간 설표가 필사적으로 외쳤다. 나도 모르게 시선을 떼어내고 다시 설표를 향했다.

왜 떠는 거지?

-사, 사라지기 싫다 냥…….

“너 왜 그래?”

아기 짐승의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이전의 놀란 떨림과는 달랐다. 그제야 내 얼굴도 심각해졌다.

-원래는 나와 계약자 후보의 몸은 하나이다. 그런데 이렇게 오래 떨어져 있으면…….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음성이 훌쩍훌쩍 울고 있었다.

-계약자 후보가 죽을 거다. 나도 돌아갈 곳이 사라진다, 냥. 나도 사라질 거다.

“……죽는다니? 무슨 말이야. 자세히 이야기해 봐!”

짐승의 물기 어린 푸른 눈이 나를 담았다. 리케도르안이 나를 보는 것 같은 기분에 기분이 서늘해졌다.

-나, 나는 붉은 장미의 수호자다. 우리는 훗날의 계약자, 계약하기 전의 상태를 계약자 후보라 부른다. 냥. 그리고 붉은 장미의 계약자가 완전한 히, 힘을 갖추는 날, ‘각성’할 때에 계약한다.

각성, 나도 모르지 않는 말이었다. 원작에서도 나온 용어였으니까.

-원래라면 나는, 계약자 후보의 몸에 잠들어 있어야 했다 냥. 그런데 날 누가 억지로 떼어내갔다, 냥.

“그래서?”

-계약자 후보는 수명이 짧고 불완전한 상태가 되었을 거다, 냥. 붉은 장미의 특성이다. 우, 우리는 한 몸이야.

조그만 설표가 양발에 제 머리를 묻었다.

-나도 계약자 후보를…… 알아보는 능력을 잃었지 않으냐. 냥.

아기 짐승이 쿨쩍 울며, 조금 전에 꿈속에서 리케도르안을 보고도 바로 제 능력을 떠올리지 못한 걸 말했다.

-이, 이 몸은 멍청하지 않다, 냥. 꿈속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도, 잊을 만큼 약해진 거다 냥!

이건 자신이 멍청한 게 아니라 불완전하기 때문이라고……. 들을수록 상황이 심각했다.

“너뿐 아니라, 후계자 후보도 불완전하다고?”

-원래 나와 후계자 후보는 함께 있음으로써 성숙해지니까…… 냥.

왜일까, 스쳐 지나간 것은 리케도르안의 모습. 그중에서도 왈왈 짖던 모습이었다. ……분명히 책 속에서 그런 내용을 읽은 적 없지? 그땐 왜 남자주인공이 짖냐, 신기하네. 하고 말았다.

사실은 이게 단순히 원작 이전의 시간이라서가 아니었단 말일까. 속단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각성 준비를 마치고, 후계자 후보가 각성을 도와줄 ‘동반자’를 만나면 나도 바깥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거다, 냥.

동반자, 이건 원작 여주인공을 가리키는 것일 터, 내 표정이 가라앉았다.

“너. 울지 말고 나 봐봐. 착하지? 너를 봉인시킨 사람이 누구야? 기억해?”

더는 귀찮아지고 싶지도 안락함을 버리고 싶지도 않았지만 그럼에도 입이 절로 움직였다.

-기……기억한다, 냥! 어린 인간이었다. 검은 머리털…….

아기 짐승이 생각하는 것만으로 두려운 듯 내 손바닥을 마구 파고들고 머리를 묻었다.

-다, 다른 인간은 그 인간을 ‘체이서’라 불렀다. 기억한다 냥!

체이서.

범인의 이름을 듣는 순간 심장이 가라앉았다. 가슴에 손을 얹자, 쿵쿵, 고동소리가 들린다. 들리되 아득한 느낌이었다.

역시나. 예상이 맞았지만 혹시나 싶었다. 체이서가 아닌 도뮬릿 공작의 짓일 수도 있었으니까. 한편으로는 의문이었다. 대체 어린 체이서는 어떻게 리케도르안에게서 이 짐승을 꺼내온 건지, 의혹이 또아리를 튼 뱀처럼 맴맴 맴돌았다.

그러나 짐승에게 모든 걸 꺼내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내 손가락에 얼굴을 묻고 달달 떠는 아기 짐승을 냉정하게 내치지도 못했다.

“있잖아, 헤르님은 원래 수명이 짧은 걸로 아는데… 동반자를 만나지 못하면 죽는다며.”

붉은 장미 문신, 헤르님들이 타고나는 이 문신은 장미의 잎이 모두 떨어질 때까지 운명의 반려를 찾지 못하면 죽음으로 이끌었다.

-맞, 맞다 냥. 하지만…… 이 상태로라면 후계자 후보는 더 빨리 죽을 거다 냥.

리케도르안이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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