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망가지 못할 감방이 저택에도 있으면 좋겠다.>
1여 년 전, 불타오르던 근거지에서 체이서에게 구출된 나는 그길로 체이서에 의해 쓰고 있던 방을 바꿨다.
발에는 지금보다 굵은 족쇄가 채워졌다.
곧이어 나만을 위해 완성된 방을 보며 어처구니없는 기분이 들었다.
……이 무슨 감방보다 리얼한 감방이래.
그때는 쇠사슬도 지금보다 짧았다. 겨우 집안을 걸어 다닐 수 있을 정도?
이후 길어진 것도 체이서의 부하이자 어느 흑마법사인 인물이 마법을 걸어서 가능한 일이었다나.
체이서가 본모습을 드러내자, 저택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 모습에 적응했다. 아니, 시중인들은 이쪽의 모습에 더욱 익숙한 듯했다. 저택은 언제 고요했냐는 듯 수많은 사람이 오갔다. 물론 갇힌 상태였던 나는 보지 못했다.
<으아아아!>
그저 저택이 떠나가라 지르는 비명으로 아, 많은 이들이 왔다 갔구나, 결코 반가운 일로 터진 비명은 아닐 거란 생각을 했다.
놀라긴 했지만 생소하진 않았다. 무섭고 말고를 떠나서 그래, 이게 바로 악당 저택이지 하는 기분이 들었다고 할까.
사실 내가 적응이 빠르단 건 알았지만, 나도 내가 이렇게까지 무던할 줄은 몰랐다.
설마하니 족쇄에 적응할 줄은 누가 알았겠어.
하지만 상황은 내가 여기에 놀랍도록 적응하게 만들어주었다.
쨍그랑!
내가 체이서로 인해 족쇄를 찬 지 한 달째 되는 날이었다.
<악마 같은 도뮬릿! 너희는 전부 죽어야 해! 네 아비로 인한 원한을 돌려주마!>
갑자기 날아온 단검에 유리잔이 깨지고 손이 길게 베였다. 움직일 수는 없었다. 검이 바로 앞에 있었으니까. 범인은 이 저택에서 무려 11년을 일해온 집사였다.
<악마의 자식들! 죽어! 죽어라! 아비의 죄를 받아라!>
거기다 그의 원한은 체이서가 아닌 도뮬릿 공작, 체이서의 부친을 향했다.
현재 치명적인 부상을 입어 은밀한 곳에서 요양 중인 도뮬릿 공작은 집사의 원한을 받을 수 없었다. 그것은 위치가 굳건하고 강한 체이서 대신 나를 향했다.
<……미안해, 이아나.>
달려온 체이서가 검에서 피를 뚝뚝 떨어트리며 사과했다. 울먹일 듯 그윽한 눈동자만은 진심처럼 보였다.
처음엔 자신 대신 칼을 맞은 것을 말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이게 아니란 걸 다음에 나온 말로 알았다.
<청소가 덜 됐나 봐.>
그 후로는 식사에 독이 나왔다. 도뮬릿 공작이 오래 전 벌인 학살의 피해자가 범인이었다. 체이서는 그날로 주방의 모든 인원을 교체했다. 나는 깨달았다.
아, 모든 게 체이서를 향한 원한만은 아니구나.
<미안해.>
이 체이서가 악당이 되기 전에 이미 도뮬릿 공작은 악랄한 인간이었다. 그가 저지른 일이 고스란히 도뮬릿으로 돌아왔다.
체이서를 향한 원한마저도 연좌된 원한이었다.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그동안 그는 이 모든 것을 홀로 떠안고 있었다는 것을.
<……그래도 도망치는 건 안 돼, 내 이아나.>
한국인은 삼세번, 의지의 한국인, 뭐 이런 말을 본 따 두 번 더 탈출 시도해 본 끝에 나는 알았다.
아하, 내 얼굴이 그의 적에게 낱낱이 알려졌구나.
어디로 나가도 내 인기가 최절정을 찍었다. 원한 적 없는 데다 부정적으로 찍은 불명예였다. 덕분에 이런 살해 시도 덕에 나가서도 평안히 살기는 글렀다는 사실을 체감했다.
1층을 거닐던 도중 암살 시도가 있었을 때에 방의 침구가 싹 바뀌었다.
절그럭.
그때 즈음에 발목을 감싼 족쇄와 쇠사슬의 효용을 알았다. 체이서는 내가 어디에 있든 이 쇠사슬로 알 수 있다. 내가 목에 막 칼침을 맞기 직전에 그가 달려올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아나!>
내가 위험할 때, 그는 거짓말처럼 달려왔다.
……생각보다 괜찮잖아?
급박한 상황에서 제정신인가 싶은 발상의 전환이었지만 나름대로 만족했다는 결론이다. 어쩌겠나. 여기서 밖에서 유유자적 못살아? 내 불행한 인생, 하고 울어봐야 상황이 바뀌겠나.
상황을 바꿀 수 없다면 마인드를 뚝딱뚝딱 바꿔서 편안히 영위하면 된다.
그게 뭐 어렵겠나.
그냥 악당 여동생 하지 뭐.
이게 배부르고 등 따시면 그만인 내 안락 감금 라이프의 시작이었다. 그야말로 ‘만만’ ‘편안’ ‘편리한’ 감금을 위하여였다. 적어도 밥 굶기지 않고, 항상 최상급으로 주고 거기다 가끔 섞여오는 독도 걸러주었으니.
“좋은 게 좋은 거지.”
나는 늘어지게 앉아 배를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통통. 배를 두드리는 내 손을 아니꼽게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다.
“뭘 그렇게 봐요?”
나는 시선을 보내는 사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앞에서 새하얗고 찹쌀떡같이 몰랑몰랑할 것 같은 뺨이 씰룩였다. 복숭앗빛 도는 뺨을 저리 부풀려봐야 딱히 무섭지 않은데.
“아, 이렇게 말해야 하나요.”
팔을 들어 탁상에 올리고 나는 턱을 괸 채로 씩 웃었다.
“뭘 그로케 봐쏘요?”
잔뜩 발음이 뭉개지며, 마치 아기가 웅얼거릴 법한 내 음성에 쾅, 상대편이 탁자를 두드렸다.
쾅쾅!
이것으로 모자라 조그만 주먹이 참지 않고 연달아 두들겼다.
“이봐, 아가씨! 내가, 그로케 말하지 말래찌!”
어린아이의 것과 같이 조그만 주먹이 내려친들 이 튼튼한 탁자가 흔들리기나 할까. 눈앞의 사람은 어린아이 같은 게 아니라 어린아이다 못해 완전히 아기였지만.
“아하. 그럼 오토케 말할까요?”
“써꺼 말하지 마!”
눈앞의 이가 발끈했다.
살랑거리는 짙은 하늘색 곱슬머리, 더욱 진한 녹색 눈동자는 구슬을 콕 박아넣은 것처럼 동그랗고, 얼굴은 조막만 했다.
세워 놓으면 겨우 6살이 될까 싶은 이 아이, 아니 사람은 체이서의 부하, 흑마법사 마쉬멜이었다.
현재 제 몸이 감당하기 힘든 지팡이를 들고 성을 내고 있고, 저 지팡이로 보다시피 내 족쇄에 마법을 걸어준 흑마법사이며 사슬을 연장해준 장본인이다.
“왜 그래요, 마시멜로 씨. 장난 좀 친 거 가지고.”
“누가 마찌멜로냐!”
“발음이 어렵잖아요. 쉽게 줄여요.”
이름이 발음하기 어려워서 대충 줄여서 마시멜로라 부른다.
“무슌 소리냐. 그건 쭈린 게 아니쟈나!”
아, 그러네, 줄인 건 아니구나.
“에이, 실수예요. 실수. 작은 거에 성내지 말아요. 키 안 큰다?”
“내 키는 다 커써! 내 뵨체는 커따고!”
“뵨체가 아니라 본체겠죠.”
“뵨체!”
“네네. 그래쪄요?”
보다시피 쪼그만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속 알맹이는 멀쩡한 성인 남자다.
‘저런 체구로 잘도 움직이네. 아, 날아다닌댔나.’
책에서도 본 적은 있었다. 체이서의 온갖 뒷일을 맡아 하는 보좌 겸 왼팔을 맡은 흑마법사.
현재 저렇게 된 건 흑마법을 연구하다가 얻은 부작용이라나?
지금은 원래대로 돌아오는 방법을 연구 중이라는데, 해결방법을 찾기란 요원해 보인다. 체이서가 워낙에 일을 많이 시켜서 말이지.
배척받는 흑마법사의 특성상 체이서의 옆에 붙어 있는 쪽이 그에게도 좋은 일일 터였다. 아기 모습으로는 멀리 도망가지도 못할 테니까. 어쨌든 리케도르안에게 마법사 제이르가 있다면, 그에 상응하듯 이 사람이 체이서의 보좌 같은 존재였다.
확실히 능력 또한 출중했는데, 내 발목에 달린 쇠사슬과 그 쇠사슬 길이를 늘인 솜씨를 생각하면 대단한 마법사인 것 같긴 하다.
제이르를 생각하면 상당히 귀여운 비주얼이긴 하지만.
“아악! 아가씨만 아니묜!”
이렇게 사납다.
“바라, 얼른 바! 책을 바.”
그가 작달 만한 손바닥을 탁탁 내리쳤다. 그래 봐야 위엄은 쥐뿔도 없으나 나는 집중하는 척했다.
그는 내 선생이었다. 이렇게 말이 확 짧은 까닭도 거기 있었다. 나도 아기가 극존칭쓰는 모습은 별로라 그러마 했다.
“근데 왜 내가 제국의 역사를 공부해야 하나요?”
최근 체이서는 바쁜 흑마법사 부하를 기꺼이 공부 파트너로 붙여주었다.
“푠하게 살고 싶댜며?”
“그건 그렇죠.”
“등 따찌고 배때지 부르고 싶다묘? 개돼지초롬.”
“……그 얼굴로 개돼지라 하지 말아요.”
나는 떨떠름하게 답했다.
나는 공부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여기서 이 조그만 흑마법사님의 불행이 시작되었다.
“그롬 자기지비 모하는지는 아라야 할 거 아냐.”
우리 집이, 우리 가문이 뭐 하는지 알아야 한다라. 나는 심각하게 반문했다.
“굳이 내가 그런 걸 몰라도…… 오빠는 날 먹여 살리지 않을까요?”
“이 기섕츙!”
“네네. 기왕이면 예쁜 나방 시켜주세요.”
그렇게 실랑이를 벌이다가 겨우 책을 보았다.
‘진심인데.’
체이서가 나를 놓아주지 않을 거란 것 말이다. 거기다 빗발치는 원한 덕에 나가 살기도 요원했다.
이런 상황에서 체이서가 내게 공부를 시킨 까닭을 모르진 않았다. 이곳에서의 성년 기준은 18세, 그러나 나는 상식이 부족했다. 원한 찬 공격으로부터 보호받는 동안은 불필요하다 여겼지만 이젠 아니라고 판단한 거겠지.
찰그랑. 사슬이 흔들렸다.
나는 한 넉 달 전 즈음부터 훨씬 가볍고 얇아진 사슬을 보다 발을 흔들었다.
“모하나. 빨리 일고라!”
……가끔 이 사람 발음은 아기 같은 게 아니라 우리나라 말이 서툰 외국인 발음 같기도 하단 말이지. 아니면 유치를 막 뺀 7살 아이의 말투 같기도 하다.
나는 책을 바라봤다.
「그리하여 태초의 제국에는 무려 다섯 개의 가문이 있었다-.」
역사책의 한 구절이다. 귀족 누구나 알아야 하는 교양이란 제목에 걸맞게 어렵지 않은 단어로 풀이되어 있었다.
개중에 나는 익숙한 문양을 발견했다.
기하학적인 도형과 각 자리에 새겨진 문양들, 아주 오래전 보고는 잊고 있던 것이었다. 기억 속에서 이걸 끄집어냈다.
“저기, 마시멜로 씨, 이 문양은 뭐예요? 설명해주세요.”
“마시멜로가 아니라구 해찌!”
“네네. 알았어요. 푸딩 씨. 그래서 이게 뭐라고요?”
그나 앙증맞은 얼굴을 씩씩 대면서도 눈은 착실히 내렸다. 나는 웃음을 꾹 참았다. 그러나 마시멜이 책을 확인한 뒤 돌아온 건 한심하다는 시선이었다.
“아가씨, 너 이룐 기본됴 모루냐?”
“아가씨든 너든 하나만 해요. 네, 몰라요. 나 무식한 거 몰랐어요?”
나는 당당했다.
“……왜 댱당한 고지?”
흑마법사님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하면서도 내게 설명해주었다.
“이곤 고대로부텨 내려온 주술 문양이댜. 오직 황실과 쟝미가문마니 쓸 수 있뉸 고라 제국민드른 다 알고 있찌.”
황실과 장미 가문만이 쓸 수 있는데, 제국민 대부분이 아는 문양, 나는 대충 그의 말을 해석했다.
“축제에도 빈본히 나오는 거다. 좀 아라도라. 주인님 먕신시키지 먈고. 아랐냐?”
“알았어요, 아주 기본적인 거란 거죠?”
나는 유심히 문양을 봤다. 이상하네. 이거, 아무리 봐도 감방에서 본 건데. 지하 감방 내 동굴 안에서 본 문양이었다. 그러나 모양이 아주 많이 달랐다. 굳이 말하자면 석판에서 보았던 거에서 덜어내고 약식으로 표현한 느낌?
그리고 변형도 된 것 같다.
누구나 알아보기 쉽게 간단하게 그려져 있었으니까.
거기다가 중앙에 있는 문장이 파내져 있지 않았는데, 푸르른 것 대신에 날개가 확 펼쳐진 동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마쉬멜 말이 황실의 문양이란다.
동굴 내 석판에는 부서져 있긴 해도 이 문양이 있었다기엔 크기가 맞지 않는 것 같은데.
알아본 건 순전히 장미와 장미화 함께 그려진 요상한 동물 형상 때문이었다.
나는 조각난 문양을 하나하나 보다가 한 곳에 시선을 멈췄다.
화사하기 짝이 없는 붉은 장미, 리케도르안, 그의 문양이었다.
“저기, 타르트 씨, 이 동물 같은 건 뭐예요? 너무 궁금한데.”
“……아가씨, 날 제대로 부를 마으미 없뉸 고지?”
“에이. 알죠알죠. 마쉬멜 씨.”
조그만 흑마법사님이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 봐야 조그만 뺨이 우물거리는 게 귀엽기만 했지만 그 사실은 숨겼다. 본인이 귀엽단 걸 잘 알아서 귀엽다고 하면 화를 낸다. 위엄어린 흑마법사가 되고 싶다나.
“장미 가무네 대해서는 아나?”
“네, 대충은요.”
“장미드른 특수한 능력을 가지묜소 각짜 수호신을 가진댜. 이걸 ‘누멘’이라구 하며, 신쑤라고도 하지.”
“수호신…….”
오빠한테도 있는 그거 말이구나.
나는 1년 전 납치당했을 때 보았던 새를 떠올렸다. 종종 불을 일으키던 새. 1여 년이 지난 지금은 침입자 머리를 활활 태우는 새의 모습에 익숙해져 있었다.
이어서 그는 흑장미, 도뮬릿은 신수를 둘이나 가지고 있는 가문이라고 알려주었다.
나 또한 새 말고도 오빠가 가진 또 다른 짐승을 본 적 있었다. 재규어였지. 이어지는 설명에 끄덕였다. 조그만 흑마법사님은 경청하는 태도를 좋아했다.
아니나 다를까 오냐, 하는 얼굴을 지나쳐 문장을 향했다. 붉디붉은 장미 쪽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그럼 이건 리케도르안의 수호신이구나. 수호신, 단어가 묘하게만 느껴졌다.
“불근 장미를 보눈 거냐?”
“응? 그냥, 신기해서요.”
수호신이라, 그런 게 있었다면 그 남자는 조금 더 편한 생을 살았을까. 이런 게 있었다면 왜…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낸 거지?
그 남자란 당연히 리케도르안이다.
장미와 장미들의 힘에 대해 자세하게 알게 된 건 순전히 마쉬멜 덕이었다. 체이서가 유난히 강하고 또 강력한 힘을 가졌다고 말해주었으니까. 장미 가문 내에서도 강한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는 이가 있고,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이 약한 힘을 가지고 태어나는 이가 있단다.
“봐바야, 소용업따. 거기 수호신은 이제 유명무실하니까.”
“와, 그 얼굴로 어려운 말 쓰니까 신기하네요. 간장공장콩팥, 한번 해봐요.”
“놀리지 마랸마랴!”
아무튼 이 능력을 두고, 전대에서는 헤르님 대공만 가지고 태어났다나. 하나 대공의 능력은 그리 강하진 않았다고. 차차 듣다보니 리케도르안을 향한 학대의 이유가 뻔히 보였다.
‘이제 와 생각이 났다라.’
그렇게 몇 마디 더 나누다가 이야기는 끝이 났다. 수업을 빙자한 수다나 다름없었다. 수업인지 수다인지 모를 시간이 끝나고, 나는 방 안에 홀로 남겨졌다.
주변을 살펴보다가 복도로 나왔다. 그러고는 걸음을 한참 옮겨 익숙한 문을 열었다. 1여 년 전 여기 처음 왔을 때, 체이서가 내게 주었던 방이었다. 오랜만에 왔건만 내부는 깨끗했다.
지금 사용하는 방으로 온 뒤로 더는 여기에 들어갈 일이 없고, 이제 와 방 탈출 아닌 방 탈출을 할 생각은 없지만. 조금 전 마쉬멜과 대화로 호기심이 들었다.
“‘거기 수호신은 유명무실하다’라. 이게 무슨 소리일까.”
마쉬멜이 붉은 장미 수호신을 이야기했을 때 그냥 모르는 척 흘려들었지만 궁금했다. 그저 조그만 흑마법사님 앞에서 타인에 대한 것을 궁금해할 순 없었기 때문에 묻지 못했던 거다.
나는 내가 타인에 대해 가지는 관심을 체이서가 어떻게 여기는지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이건 그저 가벼운 호기심이고, 나는 안락하게 지내고 싶었다.
‘그러니 조금만 보자. 약간의 호기심만 충족하는 선에서.’
이전에 보았던 것처럼 천장식을 들어 올렸다. 벽에 새겨진 것은 여전히 있었다.
“여기서 반쪽.”
나는 옆방으로 갔다. 그곳에도 여전히 벽에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 붉은색과 흰 장미.”
남주와 여주의 가문 문양인 붉은 장미, 흰 장미가 있다. 그리고 흰 장미 옆에는 수호신이 있었다.
하나 붉은 장미에는 수호신이 없다.
“찾으란 얘기지, 이거?”
1여 년 전에는 당장 여기서 튀기 바빠 보기만 해두고, 잊었던 것이다. 이 순간 기꺼이 방 탈출을 해보기로 했다. 할 일이 딱히 없다는 점이 컸다.
그리고…….
<……약속. 지킬 거죠……?>
나는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집중할 것이 필요했다.
첫 번째 방이 그랬듯 이 방에도 칼로 긁어놓은 듯 기호 같은 것이 문양 밑에 있었다. 아마도 이 문양에 없는 것을 찾는 단서일 거다.
산과 태양처럼 그려진 것과 아래 화살표가 보였다. 산 사이에 태양이 뜨고 있다. 그리고 방위 기호에서 동쪽에 해당하는 부분에 동그라미가 쳐져 있다. 그리고 이건 책장을 그린 것 같은데. 네모 안에 책 같은 것이 가득했다.
“아래층에서 동쪽 두 번째, 책장 옆?”
나는 중얼거리다 말고 얼른 걸음을 옮겼다. 얼마 가지 않아 목표했던 방에 도착했다.
문을 열자마자 책장으로 다가갔다. 헷갈리진 않게 책장은 하나뿐이었다. 나는 책장 앞에 쪼그리고 앉아 책장 옆, 조그만 장식 화분을 치운 나는 씩 웃었다.
빙고.
그곳에는 조그만 짐승이 그려져 있었다.
“찾았다.”
그러나 나는 이내 고개를 갸웃했다.
……답을 찾았는데 이제 어떡하지?
뺨을 긁적였다. 뭔가 시작하자마자 탈출로를 찾은 느낌이었다. 음, 어떡하지.
‘너무 싱거운데.’
그리 생각하며 동물 형상을 톡톡 두드렸을 때였다.
푹.
어라? 손가락이 푹 꺼졌다. 이게 뭐야. 놀랄 새도 없이 동물이 새겨진 부분이 끼긱 돌아갔다.
이게 뭐야. 벽돌이 돌아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손이 홀린 듯이 내밀어졌다. 누군가가 강제로 끌어들인 것 같았다.
꽤 거친 당김에 팔에 달려 있던 팔찌와 보석이 달랑 흔들렸다. 그리고 보석이 석판에 닿는 순간, 익숙한 빛이 흘러나왔다. 언젠가 감방 구멍에서와 같은 과정이었다.
“윽, 뭐야…….”
눈부심에 잔뜩 찡그리고 눈을 꾹 감았다가 떴을 때, 못 보던 것이 앞에 있었다.
조그마한 형상이다. 아니, 홀로그램인가 착각할 정도로 반투명했던 것이 차차 실체를 가졌다. 곧이어 조그만 것의 눈처럼 보이는 까만 눈망울이 깜빡깜빡 나를 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동그란 귀, 흰 바탕에 회색 줄무늬와 검은색 땡땡이가 콕콕 박힌 털, 생김새는 아기 치타 같으면서도 꼬리가 두툼하고 길었다.
하지만 회색과 푸른 눈, 짐승의 시리도록 맑고 투명한 눈을 바라보는 순간 한 남자를 떠올렸다.
“리케도르안?”
생각은 길지 않았다. 짐승이 캬옹, 이를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인간아!
나는 눈을 끔뻑였다. 기다렸다는 듯이 동물의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동시에 머리로 조그만 흑마법사님의 말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 이 동물이 뭔데요? 얘만 이상하게 생겼잖아.>
<보묜 모르냐! 이건.>
“……설표?”
얼떨떨하게 중얼거렸다. 은색에 가까운 하얀 회색털이라거나 푸른 눈동자까지 리케도르안에게서 모조리 따왔나 싶을 정도로 비슷했다.
-엣헴, 인간아, 네가 나를 구해주었느냐.
“안 어울리게 웬 조상님체…….”
분위기가 확 깨는 기분이다. 그만큼 눈앞의 설표가 너무너무 작았던 탓이다. 그러나 그러거나 말거나 설표는 내게 다가와 몸에 비해 큼지막한 발바닥을 내 허벅지에 탁 올렸다.
컁컁! 웨옹웨옹!
-나를 뫼셔라! 뫼시거라!
신기하게도 짐승의 울음소리와 사람의 목소리가 같이 들렸다.
크아앙!
-영광을 주겠따!
문제는 사람의 목소리 쪽이 조그만 흑마법사님처럼 영락없는 어린애 목소리였다.
“……영광이고 나발이고. 넌 뭐야?”
컁컁, 날카로운 느낌의 짐승 소릴 듣고 있으니 그리운 모습이 하나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묘해지는 감상을 얼른 지워냈다.
……하필 색도 같아가지고.
웨옹! 컁컁! 캬오오!
-진심을 숨길 것 없느니라. 나는 다 알고 있나니! 날 깨운 것은 네가 간절히 그리워했기 때무니라!
“뭔 도를 믿으세요, 같은 소릴 하고 있어.”
-어허, 인간, 뫼셔라! 아무나 날 꺼내줄 수 있는 줄 아느냐!
“……너야말로 애 같은 목소리로 그러지 말아줄래?”
그리고 내가 꺼내준 거면 내가 더 대단한 거 아냐? 나는 심드렁한 눈으로 눈을 깜빡였다.
어째 사고를 친 것 같은데. 머릿속에는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안 돼. 내 평화로운 생활이!
-솔직하지 못하구나!
그러니까 대체 뭐가?
“……너 헤르님의 신수지?”
-그렇다!
설표가 이빨을 드러내며 캬웅, 울었다.
-봉인에서 드디어 풀려난 위대하신 이 몸을 뫼시거라! 무려 9년 만이다!
송곳니도 채 나지 않는 분홍색 잇몸 덕에 위엄이라곤 개미 발가락 때만큼도 없는 모습이었다.
“그게 자랑은 아닌 것 같은데.”
-뭐야?!
왜애애애옹!
허어, 이게 고양인지 맹순지. 나는 복슬복슬한 꼬리를 치우며 한숨을 쉬었다. 뭔 놈의 꼬리가 이렇게 두툼해.
머리로는 조그만 흑마법사님의 음성이 쟁쟁하게 울렸다.
<봐바야, 소용업따. 거기 수호신은 이제 유명무실하니까.>
설마하니, 이게 그 소리였어?
정황이 맞아떨어졌다. 헤르님의 신수인가 뭔가가 여기 있다.
거기다 설표가 제 입으로 봉인이라 했다. 시간을 들으니 딱 떨어지는 것 같고. 거기다 리케도르안이 딱 저 시기 즈음 감방에 갇힌 걸로 아는데.
설마 이거, 체이서의 짓이야?
그럼 더 심각해지는데. 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부서진 벽돌과 돌 부스러기, 설표를 번갈아 봤다. ……이거 봉인은 다시 어떻게 하는 거지.
“널 가둔 게 혹시 체…… 아니, 아니다. 너 다시 들어가면 안 되니?”
나는 짐승의 머리를 꾸욱꾸욱 눌렀다. 벽에 안 들어가지나?
“들어가주라.”
그러자 설표가 충격받은 얼굴을 했다. 벌어진 입, 하늘색 눈으로 울망울망 물기가 차올랐다.
-무슨 소리냐! 위대하신 이 몸을 가두겠냔 마링냐! 싫다! 시르다!
캬아아앙! 웨옹! 웨애애애웅!
“혹시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는 게 미숙하니? 왜 말투가 오락가락해. 근데 들어가주라.”
-네, 네 마음을 아느니라! 소, 솔직하지 못하구나!
“그러니까 뭐가 솔직하지, 아니 됐다. 내가 지금 너 때문에 곤란해졌거든? 부탁이니 돌아가 주라.”
내가 무어라 더 하기도 전에 솜방망이 같은 두툼한 발이 입술을 막았다.
-내…… 내가 이렇게까지는 안 하려 했느니라! 솔직해지란 말이다!
“읍, 읍읍!”
그러니까 대체 뭐가! 뭐에 솔직해지란 건데!
조그만 발을 치우기도 전에 눈이 절로 잠겼다. 난데없는 수마였다. 저항하려 했으나 누가 때린 것처럼 강제로 눈이 감겼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전혀 새로운 공간 속에 있었다.
나는 후, 낮게 숨을 내쉬었다. 이게 뭐냐고. 복잡하고 난감한 마음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얼떨결에 휘말린 느낌이다. 그것도 아주 골치 아픈 일에 말이지.
이런 기분은 1여 년 전 체이서가 날 납치한 놈들 근거지를 활활 태우던 걸 본 이후로 처음이다.
“……난 평화롭게 살고 싶다고.”
이 공간이 뭔지는 몰라도 깜깜하고 답답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도 한몫했다. 저 설표가 바라는 것이 있을 텐데…… 아무 말 안 하고 버티고 있으면 내보내주지 않을까.
버티자.
일명, ‘존버’를 해보기로 했다.
나는 말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꾹꾹 다지며 옷자락을 쥐었다가 놓았다.
그때였다.
공중에서 새하얀 손이 나타났다. 그러고는 내 손을 가볍게 쥐었다. 힘을 준 것도 아닌 아주 약한 힘이었다.
엄마야!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손을 뿌리쳤다. 아, 깜짝이야. 귀신인 줄 알았네. 그러나 손은 머뭇거리더니 나를 다시 한번 붙잡았다.
“……말아요.”
익숙한, 아니 이제는 낯설어진 음성에 어깨를 굳혔다.
이 목소리는.
“피하지 말아요.”
어둠 속에서 그림자가 차차 걷혀졌다. 팔에서 어깨가, 어깨에서 얼굴이…… 천천히 드러나는 모습을 본 순간,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절로 입술이 벌어졌다.
“……안, 피하면 안 돼요?”
눈앞에는 눈물범벅이 된 리케도르안이 서 있었으니까.
“당신이죠?”
그의 뺨으로 눈물이 뚝 떨어진다.
“정말 당신인 거죠?”
날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당신 없는 낮이 길었어요.”
그가 그대로 고개를 떨어트렸다.
“흡…… 밤은, 더 길었어요”
뚝. 뚝뚝. 떨어진 물방울이 바닥에 검은 동그라미를 그렸다. 어느새 나는 힘이 스르륵 빠져, 돌바닥에 앉아 있었다.
감방이었다.
“리케도르안?”
왜 내가 감방에 있는 거지? 어째서?
홱홱, 연신 돌아가는 시야가 주변을 가득 담았다. 횃불과 차가운 벽,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 한기. 아무리 봐도 감방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볼 때와 달라지지 않은 옷을 입은 리케도르안이 있었다.
“그, 그래도 나, 잘 기다렸어요.”
그가 더듬더듬 말을 이어간다.
눈물이 이슬처럼 맺혀 떨어지는 낯은 조금 낯설었다. 희고 청초한 것은 여전했으나 물씬 물이 들고 있는지 보지 못한 성숙함을 자아냈다. 겨우 1여 년인데 그가 훌쩍 큰 것처럼 느껴졌다.
그가 고개를 든 순간, 내가 착각한 것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시야가 맞던 얼굴이 어느새 나보다 위쪽에 있었다.
그가 촉촉이 젖은 눈으로 내 손끝을 가져와 뺨에 비볐다.
“……나 잘 기다렸어요?”
칭찬을 갈구하는 듯한 젖은 음성, 침이 바싹 마르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여기 와 준 거예요?”
입술을 축이는데, 그의 시선이 내 입술에 꽂혀 떨어지지 않았다. 눈물이 매달린 투명한 눈동자였다.
“나. 잘 기다리고 있는 거죠? ……말해줘요.”
왜 이제 말을 더듬지 않는 건지. 괜스레 조금 쉰 음색에 집중되어 가슴이 울렁거릴 것 같았다.
나는 왜 당신 앞에 있는 걸까.
감상에 젖은 시간은 길지 않았다. 머리에 스친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 그…… 똥고양이!
헤르님의 수호신은 어느새 똥고양이로 격하되어 있었다. 모름지기 그것을 잡는 순간 잠이 왔으니 그게 범인, 아니 범묘일 게 분명했다.
하지만 공간 어디에도 그 짐승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있는 것이라곤 리케도르안뿐이었다. 대체 이 모습을 뭐라고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환상? 가짜?
일단 침착하게 심정을 가라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