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29/87)

***

그는 이어서 나온 저택을 구경하고 싶다는 내 말에 수긍했다.

“사람을 붙여 주지 않아도 되겠어?”

“혼자가 좋아. 감방에서도 혼자였고.”

응접실에서야 다른 이들과 지내지만 감방은 기본적으로 홀로 지내는 구조였다.

“그렇구나. 하지만 이젠 더는 혼자가 아닐 거야.”

그는 상체를 기울여 나와 눈높이를 마주했다. 홍옥처럼 아름다운 눈동자가 나를 오롯이 담았다.

“더는 절대.”

엉뚱하고 경악스러운 면이 있긴 해도 정말 부드러운 남자였다.

하지만 그에겐 말하지 못해 미안하지만 나는 줄곧 감방에서 혼자가 아니었다.

“조금 뒤에 봐.”

리케도르안이 있어 혼자라 느낄 시간이 거의 없었으니까.

새삼 깨달은 것이 있었다. 리케도르안은 내 지루함을 지워 준 한편, 다가왔을지도 모를 외로움까지 지워 준 것인지도 모르겠다.

외로움도 오면 그러려니 하는 편이지만. 어쨌거나 나도 즐겁고 정이 들었던 건 사실이었으니.

나는 홀로 남기 무섭게 걸음을 바삐 옮겼다. 어째서인지 나와 체이서가 있던 층은 사람이 전혀 없었지만, 내려가자 간간이 시종들이 보였다.

나는 개중 친절해 보이는 이들을 잡아 물어물어 움직였다.

대부분이 내가 말을 걸면 흠칫하거나 연신 주변을 돌아보곤 했지만 나 혼자인 것을 알고 대답을 해 주곤 했다.

그렇게 나는 하인들에게 물어 마구간에 도착했다.

히히이잉.

말들이 우는 소리가 우렁차다. 마구간이라길래 말 몇 마리 넣어 둔 것을 생각했는데, 축사가 매우 본격적이었다.

멀리서 보면 작은 집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하기야 저택의 규모가 이런데 말을 적게 키우겠어. 난 사람 집보다 클 것 같은 공간을 질린 듯이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조그만 길이 보였다.

“저 길인가 보네.”

저게 아까 그 마담이 말한 곳인가? 생각보다 쉽사리 도착했다. 나는 주머니를 뒤적이고, 천천히 손바닥을 펼쳤다.

내 손바닥엔 작은 보석들이며 금화들이 들려 있었다.

조금 전에 옷을 갈아입으며 몰래 챙긴 것들이었다. 나는 감방에서만 살았지만 이 정도의 금화가 어느 정도 가치인지 잘 알았다.

<금화 하나론 말일세, 평민들이 무려 한 달을 먹고산다네.>

한가한 팔라디스 아저씨는 쓸데없이 많은 것을 알려 주었으니 말이다.

“지금 바로 갈 수도 있긴 한데 말이지.”

나는 마구간 옆으로 난 길 하나와 마구간을 지키는 것으로 보이는 기사 둘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래, 그렇지. 지키는 사람이 없을 수가 없지.

그리고 말없이 떠난다면 추적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제 와 여동생에게 잘해 주려는 남자가 사라진 걸 그대로 두고 보겠어.

이럴 거면 감방에나 보내질 말지.

아무리 사정이 있었다고 한들 죄를 뒤집어씌워 동생을 감방에 보내는 건 내게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이후 나를 지키기 위해 감방에 넣는 거였다는 진실을 듣긴 했지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내가 현대인이었기에 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 처사인지도 모른다.

더욱이 지금처럼 미안해하고 아끼는 모습을 보이면서 말이지. 후회한들 지나간 버스는 돌아오지 않는단 말도 모르나?

“일단 당장은 힘들 것 같은데…….”

아무래도 당장 탈출은 힘들 듯하다. 나는 작게 중얼거리고는 체념했다. 그렇게 돌아서서 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안녕하세요, 아가씨.”

갑작스럽게 들린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긴 장화를 신은 내 또래 소년이 서 있었다. 언제 온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도움이 필요하신가요?”

낭랑한 목소리였다. 하인복에 짧은 머리. 유심히 보던 나는 이 사람이 소년이 아니라 소녀라는 걸 알아차렸다. 머리가 아주 짧은 소녀였다.

“저는 마구간 담당 하인 유스나예요. 혹시 뭔가 필요하신 게 있나 하셔서…….”

“응? 아. 아니에요.”

“그런가요? 저 길을 보고 계셨던 건 아니신가요?”

지켜보던 이마저 눈치챌 정도로 노골적으로 보고 있었나 보다. 나는 순순히 인정했다.

“맞아. 음, 저 길은 어디로 통하나 싶어서.”

또래다 보니 말이 절로 편하게 흘러나왔다.

“저 길은 밖으로 통하는 길이에요. 후문과 이어져 있죠!”

“아하. 그렇구나.”

나는 익히 아는 사실만 확인을 받고는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좋아, 맞게 찾아왔단 말이지. 이대로 인사한 뒤에 돌아갈 요량이었다.

“저, 혹시 나가고 싶으신 거예요?”

소녀의 작은 속삭임이 나를 붙잡지 않았다면.

“밖으로 나가고 싶으신 거라면 도와드릴게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녀를 쳐다봤다. 그녀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조금 노골적으로 길을 봤기로서니 보통 그렇게 생각하나?

기이함과 이상함에 나는 도리어 미소를 지으며 거절하려 했다.

“아가씨는 예전에도 하인들에게 돈을 주고 나가셨잖아요. 다른 아저씨들에게 들었어요.”

그 순간 소녀에게서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이런 데서 ‘이아나’의 이야기를 들을 줄은 몰랐는데. 그 이야기가 발을 붙잡았다.

그사이에 유스나라는 소녀는 내 손에 들린 것을 흘끗 보았다.

“도와드릴게요.”

그녀가 콕 하나를 가리켰다. 일순 탐욕스러운 시선이 스쳐 갔다.

“금화 하나만 주시면 돼요.”

금화 하나, 나는 금화와 소녀의 앳된 눈동자 사이에서 갈등했다. 갈등은 길지 않았다.

“저기 기사가 있어서 금방 들킬 텐데?”

“마구간지기들만 이용하는 샛길이 있어요. 말똥 냄새가 난다고 다른 길을 쓰게 했거든요.”

나는 아주 잠시 고민을 이었다. 여기서 나가는 건 너무 순진한 선택일까. 그렇긴 하다.

그러나 하다못해 건장한 하인이나, 혹은 하녀가 내게 이런 제안을 했다면 바로 거절했을 텐데.

순전히 금화만 보며 욕심 어린 눈을 보이는 철없는 소녀가 이렇게 말하니, 흔들리긴 했다.

‘여전히 나갈 생각은 없어.’

오늘은 날이 아니다. 하나 어차피 나가지만 않는다면 길을 알아 두는 것도 나쁘지 않지.

“좋아.”

그렇게 소녀와 나 사이에 계약 아닌 계약이 성립되고, 나는 소녀의 뒤를 따라 쪼르르 걸었다.

수풀이 꽤 억센 길이었지만 황량한 감방 정원에 익숙해진 내게 그리 어려운 길은 아니었다.

“잘 걸으시네요. 보통 아가씨 같은 분들은 힘들어하시는데.”

“너도 감옥 다녀와 봐.”

소녀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저택에 아가씨 소문으로 가득해요.”

“그러니? 근데 그럴 것 같더라.”

굳이 듣고 싶지는 않았다. 관심이 없었으니까. 그 체이서 동생에다 감방에 다녀온 동생. 대충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겠다는 감이 온다.

“전혀 다른 사람이 되신 것 같아요.”

하지만 그 말에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태연하게,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그래? 많이 달라 보여?”

“네.”

어느새 길 끝에 다다라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나무로 된 문이 보였다. 저게 후문이 모양이었다.

왜인지 활짝 열린 채 지키는 이도 없었다.

“그래서 좋아요.”

문을 바라보던 시선이 돌아갔다. 소녀가 생글생글 웃었다.

“지금은 석 달에 한 번 식료품이 올 시기라 감시 인원이 없어요.”

아, 그래서 사람이 없는 거구나. 나는 납득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이제 돌아가…….”

“제 사람이 수월하게 들어올 시기이기도 해요.”

저절로 입을 다물었다. 소녀가 말한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가씨가 돌아오신다는 얘길 듣고 정말 열심히 준비했는데, 조금 허탈하기도 하네요.”

“그게 무슨…….”

“이전의 아가씨는 경계심이 지나치게 많았거든요. ……귀찮을 정도로.”

소녀의 눈이 샐쭉 날카로워졌다.

“거기다 오빠이신 소공작께서 어찌나 사고 도시는지.”

그녀는 웃으며 말을 멈추지 않았다. 주춤, 뒤로 물러났지만 발이 돌부리에 걸렸다.

“다들 아가씨를 노리느라 혈안이 되어 있을걸요? 체이서, 그 남자에게 복수하기가 도통 쉽지 않으니.”

그와 동시에 퍽, 살벌한 소리가 들렸다. 흡. 나는 배와 목에 강렬한 충격을 느끼고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토하면 어쩌려고 배를 치냐. 이 나쁜 새끼. 배가 미칠 듯이 아팠다.

“별 감정은 없어요.”

가물거리는 시야 사이로 맑게 웃는 소녀가 금화를 던졌다가 받았다.

“그저 당신의 오빠가 지나치게 잔인했고. 수많은 원한을 남겼고.”

소녀가 얼굴을 더듬자, 신기하게도 소녀의 얼굴이 나이 든 여자의 얼굴로 바뀌었다.

제이르의 마법 같은 건가.

“당신이 바보 같았던 거지. 아가씨.”

문득 내 친구 사기꾼 아저씨가 해 준 말이 떠올랐다.

<이아나, 명심하게. 사기꾼은 가장 착한 사람의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는 것을.>

음, 이미 늦은 것 같아요, 아저씨.

몸이 번쩍 들려 어디론가 향하는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리케도르안, 당신은 이런 고통을 주기적으로 겪었던 거구나.

……좀 더 덜 아프게 약을 발라 줄걸.

***

오랜 시간 뒤에 눈을 떴을 때, 눈앞이 새카맸다.

단순히 이 공간이 어두운 걸까 생각했지만 금방 아니란 걸 알았다. 창문 밖이 어두웠다.

밤이었다.

음, 얼마나 잠든 걸까? 하루? 이틀? 아니면 당일인가.

나는 생각보다 태연하게 주변을 돌아보았다. 내가 바보 같았음은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잘 먹여 주길래 이 세상이 좀 더 순진하게 돌아갈 줄 알았지.

아니, 적어도 책 후반부만큼 원한이 빗발치는 상황은 아닌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대체 원한을 얼마나 산 거야.”

길만 잠깐 살펴보고 오는 게 봉변의 지름길이 될 줄은 몰랐다.

뭐, 반성은 이 정도로 해 두고.

이제 여기선 어떻게 벗어나나.

“손목이 단단히 묶인 것 같은데.”

배가 아직도 욱신욱신했다. 하지만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니, 그 아줌마는 체이서에게 맺힌 원한을 내 배에다 풀고 그런데.

일단 주변에서 날카로운 것을 찾아보자. 한숨을 쉬며 주변을 연신 살펴보았다.

어디까지 온 걸까. 정황상 체이서에게 원한을 품은 세력의 근거지 이런 곳일 텐데.

어떻게 탈출한담.

눈은 연신 공간을 헤매면서 동시에 머리는 생각에 빠졌다.

그러다 문득 다리 쪽으로 향했다. 다리도 묶였네. 근데 가만, 묶인 거? 번개처럼 머리를 스치는 아이디어가 있었다.

‘그게 있었지.’

손가락으로 손목을 더듬어 보니 곧 끈 같은 것이 잡혔다. 예스. 제이르가 준 팔찌다.

“여기에 걸린 마법이 통하지 않으려나?”

제이르가 걸어 준 마법 횟수는 아직 남아 있었다. 나는 곰곰이 고민해 보다가 자물쇠를 여는 마법을 써 보았다.

스르륵.

놀랍게도 마법을 쓰는 동시에 손목에서 밧줄이 풀렸다. 한 번에 듣는 마법인지, 발목마저도 풀렸다.

“……와, 용하네.”

제이르가 준다고 할 때 잽싸게 받길 잘했다. 발목을 몇 번 주무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행히 약간 쥐가 나는 느낌은 있어도 걷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이곳에서 빨리 벗어나야 했다.

“내가 이래 봬도 감방에서 짐승 길들이던 몸이었단 말이지.”

괜스레 스스로에게 농을 건네며, 긴장을 풀었다. 귀족 죄수들 사이에 죄질이 나쁜 자가 없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귀족이란 미명하에 꽤나 큰 죄를 저지르고도 있는 이도 있었다. 좀 더 감시를 더 받았으니까. 그래서 이런 상황에 대한 공포가 덜했다. 무던한 성격 탓도 있겠지만.

나는 곧 이곳이 물류 창고 같은 곳임을 알았다. 주변에 나무 박스가 잔뜩 쌓여 있었다. 개중에서 적당한 파이프를 찾아낸 나는 그걸 들고 문에 살금살금 다가갔다.

문은 잠겨 있겠지?

어떡해야 하나. 마법을 한 번 더 쓸까. 누가 오기를 기다릴까.

문밖의 상황이 어떤지 모르니 판단을 내리기 어려웠다.

거기다 마법을 쓸 수 있는 횟수는 한정되어 있다. 혹시나 썼다가 여기가 깊숙한 곳이라 또 잠긴 문을 발견하면 낭패였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급했으니까. 한쪽으로 마음을 굳히고 파이프를 고쳐 잡는 순간 바깥에서 무언가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착각인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쾅!

소리가 더욱 거대해졌으니까.

뭐지?

“……자기들끼리 싸움이라도 벌이나?”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굉음이었다. 거기다 무기 부딪히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괜스레 긴장하며 파이프를 꽉 잡았다.

그때였다.

코로 매캐한 냄새가 느껴졌다.

“……타는 냄새?”

언젠가 실험할 때 혹은 부엌에서 맡아본 냄새였다. 무언가를 태웠을 때 나는 냄새. 거기다 눈도 살짝 따가웠다.

“불이야! 불!”

“불이다!”

작지 않은 고함이 넘어왔다. 불이 났다고? 마음이 다급해졌다. 불이라면 밀실에 있어 최악의 조건이었다. 여기서 연기가 들어차면 꼼짝없이 질식행이었다.

일단 이 문을 열어야…….

문고리를 잡았을 때였다. 어라라. 고리가 절로 움직이더니 바깥으로 문이 휙 열렸다.

“으아아악.”

누군가 뛰어 들어오다시피 몸을 던졌다.

“헉, 허억, 헉…….”

이곳으로 뛰어 들어온 사람은 낯익은 이였다. 바로 소녀 흉내를 냈던 중년 여인이다.

“흐윽…….”

그녀는 제 배를 부여잡고 있었는데, 어디서 입은 상처인지 복부에서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야.’

피에 당황하기보다는 경악이 먼저 들었다.

“사, 살려 줘, 쿨럭. 살려 줘!”

중년 여인이 내 옷자락을 잡았다. 찢어진 옷 사이로 배며 가슴이 보였다. 이미 몸 곳곳이 엉망이었다. 그보다 더욱 놀란 사실을 발견했다.

“……남자?”

중년 여인인 줄 알았던 사람은 경악스럽게도 중년 남자였다. 살집이 두툼하고 목소리가 중성적이고 생김새도 애매해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놀랄 시간은 오래 주어지지 않았다.

“제발, 쿨럭. 제발, 살려 달라고, 살려…….”

“뭐야, 나를 붙잡아 온 건 그쪽이면서 무슨 소리야!”

“제발, 전해 줘, 나, 나는 원한을 잊을게.”

남자가 내 치맛자락을 구세주의 옷자락이라도 되는 양 붙잡았다.

“사, 사실 나는 원한도 없었어. 그, 그저 한탕 크게 해 보려고. 원한 가진 놈만 모아서. 헉, 허억! 제, 제발! 목숨만은, 목숨만은 살려 달라고 전해…….”

전해 달라니, 대체 누구에게?

“이아나.”

낮디낮은 음성이 귀를 파고들었다.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여기 있었구나.”

황홀하도록 다정한 음성은 고함이 빗발치는 이곳에 소름 끼치도록 이질적이었다.

그제야 문이 열린 풍경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건물의 천장이 반은 날아간 채로, 수많은 이들이 쓰러지거나, 흑색 제복을 입은 이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바깥에서는 거센 불이 치솟고 있었다.

저벅저벅. 멀지 않은 거리, 불을 배경 삼아 걸어오던 이가 멈췄다. 그러고는 나붓하게 웃었다.

체이서였다.

불을 배경으로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그의 검은 머리칼을 불꽃 너울같이 흔들어 놓았다. 그 모습이 당장 지옥에서 막 올라온 아름다운 악마의 모습처럼 느껴졌다.

“찾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아서 다행이다.”

뺨에 피가 알알이 튀어 번져 있었으나 사람을 녹일 듯한 미소와 소름 끼치도록 잘 어울렸다.

“걱정했잖아.”

끼긱. 끼기기긱. 체이서의 긴 검이 바닥을 긁었다. 눈동자를 굴리면 그 검에는 검게 변한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그는 내 앞에 다가와 상체를 기울였다. 이내 내 옷자락을 붙잡고 있던 중년 사내가 뒤로 날아갔다. 쿨럭. 남자가 피를 토하는 기침 소리가 요란했다.

그러나 체이서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몸을 숙였다.

다정한 눈이 눈앞에 도달했다.

“왜 도망쳤어?”

나는 알았다. 이 남자가 줄곧 이런 모습을 일부러 내게 보이지 않았다는 걸.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도망, 치지 않았어.”

“아, 그럼 이렇게 말할까?”

몸이 떨리면서도 눈을 떼어낼 수 없었다. 이 부드러운 눈동자가 그의 뒤에서 일렁이는 화마와 왜 이리도 잘 어울리는 것인지.

“왜 도망치려 계획했나?”

이 모습이야말로 책 속의 체이서 루브 도뮬릿이었다.

“너를 혼자 둘 때부터 아닐 거라 생각했지만, 날 배신했잖아.”

그에 그와 헤어지던 순간이 떠올랐다. 저택을 보고 싶다는 말에 순순히 물러나던 그의 모습.

“이아나, 사랑스러운 내 여동생.”

모든 것을 줄 듯 나긋한 음성이 녹진하게 귀를 적혔다.

“왜 내게서 또 도망치려 한 거야?”

체이서가 손을 들어 뺨을 훔쳤다. 뺨에 튀었던 피가 찍 늘어나며 번졌다. 새하얀 도자기에 번진 붉은 그림 같았다. 현실감이 없었다.

“아니. 듣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

그러나 불 그림자는 여전히 일렁이고 있었다.

“나는 널 보내는 실수는 두 번 하지 않아.”

책 속의 악당이 보드랍게 속삭였다. 그가 손을 내려 내 손을 잡았다. 움찔했다.

그는 가져온 내 손을 제 뺨으로 가져다 댔다.

“……많은 걸 배웠거든.”

여린 것을 대하듯 조심스럽기 짝이 없는 손이었다. 호의를 품고 이토록 다정한데도……. 나는 저 눈에서 광기를 느꼈다.

“아, 그러고보니 궁금하겠다.”

미소를 품은 눈이 뒤를 잠시 곁눈질했다. 중년사내가 날아간 방향을.

“이것들은 네가 캄브라캄에서 출소한다는 것을 아는 순간부터 잠입한 놈들인데, 아마도 저택에는 더 있겠지? 여기에도 살아 있는 인간이 남아 있을 거고. 모두 걱정하지 마.”

체이서가 칼을 뻗었다. 쭉 뻗은 팔로 검은 무엇인가가 날아왔다.

……새?

커다란 새였다. 새카만 새였지만 부리로 겨우 종을 알 수 있었다. 독수리? 독수리인가? 눈동자마저도 신기하게도 흑요석같이 새까맸다.

온통 새카만 깃털을 가진 새 밑으로 검은 깃털이 너울너울 떨어진다. 마치 검은 장미 꽃잎 같은 것을 보다 문득 깨달았다.

벽에 새겨진 석판 속, 흑장미……. 그리고 흑장미 옆에 있던 동물의 형상. 새. 새랑 뭐였지?

거기까지 생각에 도달한 동시에 새가 길게 울었다.

“모조리, 이 세상에서 존재를 지워 버릴 테니까.”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음성과 함께 체이서의 등 뒤에서 새빨간 불꽃이 치솟았다.

동시에 새가 가진 검은 눈이 그의 것처럼 빨갛게 변했다.

“……네 목소리 안 들려줄 거야?”

나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오빠.”

그에게 만족스러움이 피어올랐다.

“항상 아쉬웠어. 이아나.”

붉디붉은 눈동자가 내게로 돌아왔다. 보는 이를 매혹시킬 것 같은 아찔한 웃음과 함께.

“왜…….”

새카만 머리칼이 바람에 거세게 흔들렸다.

“내 능력이 네게만 통하지 않을까. 내 동생.”

리케도르안이 가진 특수한 능력은 인간 같지 않은, 엄청난 신체 능력. 그리고.

그의 적, 대적자. 체이서 루브 도뮬릿이 가진 능력이란.

……모든 이들을 매혹시키는 ‘매혹안’이었다.

말 그대로 그의 눈을 보고 목소리를 듣는 모든 이들을 세뇌할 수 있는 능력.

이것으로 제국의 지하를 한 손에 넣은 사람이었다. 적어도 훗날의 리케도르안이 파훼법을 만들어 낼 때까지 그러했다.

그 붉은 눈이 광기와 매혹을 담고서 오롯이 나를 향했다.

“그래서 이아나. 언제 알려 줄 거야?”

불을 만들어 내는 독수리. 체이서의 능력, 석판 속 흑장미……. 모든 것이 뒤죽박죽되었다.

“내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잖아.”

지금 내게 대답을 종용하는 아질한 목소리, 그러나 하나도 놓치지 않아선 안 된다는 건 분명했다.

체이서의 모습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줄곧 나를 보는 내내 위화감이 없던 태도. 자연스러운 대응…….

자연스럽게 연상되었다. 적어도 감방에서 잠깐 마주쳤던 때를 제외하면 그는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는 것을.

절로 내 입술이 열렸다.

“……오빠, 사실 나 기억을 잃었어.”

체이서가 자연스럽게 웃었다. 눈이 우아하게 휘어졌다.

“응. 기억을 잃은 건 이제 말해 주는구나.”

그제야 깨달았다.

이 남자는 줄곧 내게 져 준 척한 것뿐이었다는 것.

내가 무언가 이상해진 걸 아는 채로 침묵했던 거란 것을.

모든 걸 상기하곤 소름을 꾹 참아냈다.

“괜찮아.”

그의 손이 부드러이 내 뺨을 쓸고 떨어졌다.

“그래도 넌 언제나 내 동생인걸.”

붉은 눈동자가 천천히 굴러간다.

사랑스러운 내 동생. 그의 입술이 움직인다.

“걱정 마.”

그것이 슬로모션을 보는 것처럼 아득하고도 느릿하게 느껴졌다.

“네게 해를 끼치는 것들은 내가, 모두 태워 버릴 테니까.”

유려한 필체만큼이나 난연한 미소, 그리고 농염한 목소리.

“언제든 지켜 줄게.”

불꽃이 마구 이는 사이에서도 그의 말은 분명하게 전해졌다.

“도망가지 못할 감방이 저택에도 있으면 좋겠어.”

4장. 익숙해진 감금 생활

1년이 흘렀다.

시간은 쏜 화살과도 같아서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다는 말이 있듯, 어찌저찌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지나갔다. 정확히는 1년이 아니라 9개월, 10개월쯤? 1년에 살짝 못 미치는 시간이었다.

절그럭. 절그럭.

내 발걸음에 가벼운 사슬 소리가 따라붙었다. 이제는 숨소리만큼이나 익숙해져서 신경도 쓰이지 않는 소리였다.

발목을 보지 않으면 내가 족쇄를 차고 있다는 것도 잊곤 했다. 가끔 뒤를 보다가 쇠사슬이 있었지 하기도 한다.

복도 앞에 멈춰선 나는 슬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계절은 다시 흘러 풀벌레 소리가 경쾌히 울리는 여름이 훌쩍 다가왔다. 이미 한번 언급한바 있지만 이 제국은 특이하게도 한해의 마지막을 겨울이 아닌 ‘여름’으로 마무리했다.

이전 세계의 호주처럼 겨울이었을 달이 여름이란 소리다. 적응되지 않았던 부분이었는데 이도 두 번째로 맞이하니 그럭저럭 적응된 것 같다.

여름이 다가왔다는 건, 곧 한해의 끝이 다가온다는 얘기기도 했다.

즉, 내가 출소한 지 1년 되는 날이 한 3개월쯤 남았단 얘기다.

1년이라, 날짜를 꼬박 세어보던 나는 문득 떠오르는 은발의 소년에 눈을 돌렸다.

곧 그 모습이 눈꺼풀에서 지워지며, 새로운 인영이 나타났다.

“아가씨.”

하녀복을 입은 이가 깍듯하게 인사했다.

“식사 준비가 되었습니다.”

정갈하게 빗어넘긴 머리칼은 잔머리 하나도 용서하지 않을 것처럼 빽빽하게 넘겨져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흘끗 시선을 주었다가 무심히 옮겼다.

“못 보던 사람이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번에 새해를 앞두고 사람을 뽑았다더니 그중 하나인가.

하녀는 나를 보지 않고서 어딘가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러다 퍼뜩 정신을 차린 듯했다.

“아…….”

하녀가 얼른 고개를 조아렸다. 그녀의 눈이 떨어진 곳을 확인하고는 왜 그리했을지 이해했다.

모르는 이들은 늘 내 발목을 보고 놀라곤 했다.

하기야 멀쩡한 사람이 발목에 족쇄에다 꼬리처럼 쇠사슬을 질질 늘어트리고 다니니, 나라도 신기하게 보았을 것 같다. 나는 무심히 입술을 열었다.

“아, 내 발목?”

그녀가 화들짝 놀랐다.

“신기하긴 하지.”

“죄, 죄송합…….”

“할 건 없고요.”

나는 보일 듯 말 듯 웃으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쉿, 하고 비밀을 속삭이듯 작게 속살거렸다.

“한 번으로 끝내요.”

큰일 날라.

그러고는 그녀의 앞을 스쳐 지나갔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건지 하녀가 허둥지둥 달려와 내 앞을 걸었다.

이곳에서 이렇게 어리버리하면 안 될 텐데. 나는 속으로 이 언니가 딱 머리 올린 스타일만큼이나 똑 부러지게 정신을 차리길 바랐다. 또 ‘오빠’의 검 앞에 달려가기 싫거든.

그러나 잠시 후 내가 도착한 곳은 식당이 아니었다. 뭐 내가 줄곧 식당에서 식사를 한 건 아니었지만.

“살, 살려만 주십시오! 제발, 제발…….”

나는 눈을 흘끗 움직여 방 안 곳곳을 훑었다. 사태를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오래 볼 것도 없이 금세 상황이 파악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주 있던 일이라 파악할 것도 없었다.

“살려달라.”

감미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어떡할까, 이아나?”

전과 비교하면 고작 1년이 채 안 된 시간이 흘렀건만 남자의 음성은 더욱 농홍하게 익어 있었다.

“고민이 돼.”

아니, 그보다는 저 능력에 더욱 능숙해졌다는 말이 맞겠지만.

“살려주세요, 저, 저는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요. 아무, 아무것도!”

그런 걸 감안하더라도 황홀하리만치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나는 흘끗 눈동자를 굴렸다.

체이서에게 대답하지 않은 채 살려달라 꽥꽥 소리치는 사람을 무심히 흘려보냈다. 이미 반쯤 피투성이가 된 몰골이지만 치명상은 없는 것 같다. 그러니 꽥꽥, 소리 지를 힘이 있는 것 같은데.

“제, 제발! 나는, 나, 나는 아무 짓도 안 했어! 안 했다고! 악!”

방구석 정경이 보였다. 놀랄 만치 푹신한 침대와 다양하게 들어찬 아기자기한 소품들, 천장에 늘어진 하늘하늘한 레이스들.

어딜 봐도 저 남자의 방은 아니었다. 당연했다.

여긴 내 방이었으니까.

“이아나, 대답을 기다리고 있어.”

마지막으로 향한 곳에는 긴 다리를 꼰 채 얼굴을 괸 남자가 있었다. 근 1년 가까이 되는 시간 사이에 길어진 앞머리가 눈썹을 덮을 듯 말 듯 간지럽혔다.

“왜 물어.”

아니, 대뜸 남의 방에 이렇게 데려와서 물으면 뭐 어쩌라는 건지.

“당연히, 네 조언을 들으러 왔지.”

체이서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감미로운 목소리와 대조되게 내 목소리는 심드렁했다.

“내 의견은 중요하지 않을 것 같은데. 어차피 하고 싶은 대로 할 거 아니야.”

“그런 말은 저 사람을 쳐다보면서 해야지.”

“……쳐다보면 쳐다봤다고 뭐라 할 사람이 있는 것 같은데.”

잠시 옆에서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내 눈이 체이서를 향하고 나서야, 그는 모양 좋은 입술을 열었다.

“우리 이아나는 날 너무 잘 아는데.”

난 대답 대신 그럼 거의 1년 동안 봐왔는데, 모르겠냐. 하는 시선을 보냈다.

그가 턱을 괸 고개를 휙 기울였다.

“죽일까?”

살벌한 말은 조곤조곤하고도 나긋한 음성 속에 담겼다.

실제로 홍옥처럼 붉은 눈에는 다정함이 담긴 채 변함이 없었다. 이런 살 떨리는 말과 자신이 무슨 상관이냐는 듯이. 나는 침묵을 유지하다가 물었다.

“무슨 죄를 저질렀는데?”

“음…….”

그린 듯한 반듯한 콧날 아래 그윽한 각도가 만들어졌다.

“살롱 주인에게 접근해 모종의 거래를 했어. 시종으로 들어올 예정이었나. 잠입이었던 것 같네.”

그다음은 듣지 않아도 뻔했다.

“어쨌든 들켰네.”

“응. 맞아. 이아나.”

그가 달콤하게 웃었다.

“이미 살롱 주인의 배신은 두 달 전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그의 음성이 나붓이 귀에 내려앉았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그가 여유롭게 앉아 까딱 휘두르는 다른 손, 그 손에 쥐인 칼에는 이미 피가 묻어 있다는 것을.

내 의상실, 플로네 의상실이면 3개월을 함께한 곳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지금까지 거친 의상실 중에는 가장 길었다.

“됐고, 식사나 가져와.”

나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가뜩이나 식당이 아니라 방에서 밥을 먹는데, 이렇게 만들어놓으면 어쩌란 건지.

“배고파.”

나지막한 내 목소리에 답이 돌아왔다.

“저 사람을 죽이면?”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사람이 죽는 건 참 안타까운 일이지만, 최근에 방문한 살롱 주인이랑 한패라면 어쩔 수 없을 터였다. 나는 심드렁히 고개를 틀었다.

그 살롱은 내게 독을 먹여 거의 성공할 뻔했으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사람이 죽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긴 한데.

나는 오랜 경험으로 알았다.

“마음대로 해.”

내가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 그도 관심을 떼어낸다는 것을.

그리고 체이서는 알고 있었다.

눈앞에서 사람을 죽이려 들면 내가 당장 검 앞에 뛰어들 거란 것을 말이다.

이처럼 1년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우리는 서로를 학습했다.

“관심 없어?”

체이서가 고개를 갸웃했다. 기울어지며 틀어진 시선은 일견 순진해 보였다.

하나 순진? 우스운 소리였다. 저 남자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있다면 그것일 테니까.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체이서의 시선은 쭉 이어졌다.

찰그락.

발목에서 미약한 쇠사슬 소리가 들렸다. 쇠사슬과 족쇄가 부딪쳐 난 소리였다.

약속이라도 한 듯이 두 쌍의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먼저 웃음 지은 건 체이서였다. 그는 미소한 채로 손을 흔들었다. 기다렸다는 듯 뒤에 있던 기사들이 나섰다.

“자, 잠깐, 날 어디로…… 어, 어디로 데려가는, 고, 공작 대리 나리! 공작 나리! 공작님!”

사내가 황급히 소리쳤다. 체이서의 부하들에게 질질 끌려가면서도 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결국 체이서가 눈길을 돌렸다.

“죽이진 않을걸.”

그의 눈이 유혹할 듯이 접혔다.

“내 탄광엔 노예가 아주 많이 필요하니까.”

그러나 그를 바로 옆에서 보던 나만 보았으리라. 유려한 깜빡임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는 전혀 웃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아악, 으아아악!”

저 사내는 체이서 산하 탄광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끌려가 어떤 대우를 받는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저렇게 소릴 지르는 것일 테지.

난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무리 나를 죽이려 했다지만 그럼에도 사람이 끌려가는 게 보기 편한 광경은 아니었다.

모든 사람이 나간 방은 몹시도 고요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오빠가 옆자리에 앉아 있음을 알고 있다. 그저 한마디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범상치 않은 존재감을 드러내는 사람이었으니까.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성큼 다가온 체이서는 곧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가 뻗은 손으로 인해 줄곧 심드렁하게 턱을 괸 채 딴 곳을 바라보던 내 고개가 돌아갔다.

눈앞에 새카만 머리칼이 보였다. 칠흑 같은 머리칼은 그림자처럼 그의 이마 위에서 한들거렸다. 내 앞에 무릎을 꿇은 그가 입술을 끌어올렸다.

“무슨 생각해?”

“별생각 안 했는데.”

무슨 생각씩이나 하나.

그의 입술 사이로 작은 숨소리가 새어 나갔다. 세상을 어지럽히기 위해 지옥에서 막 뛰쳐나온 악마같이 매혹적인 웃음이었다.

그는 그대로 내 발목을 잡아 천천히 들어 올렸다. 나는 미간을 미미하게 찌푸렸다.

“발목은 왜.”

“그냥.”

한 줌이 되지 않는 발목은 그의 커다란 손안에서 얇게만 보였다.

“내려놔.”

단호하게 명하는 내 말에 체이서는 웃음으로 마무리할 뿐이었다. 다정함을 가득 담은 눈이 반달 모양으로 휘어졌다.

찰그랑.

“불편하진 않아?”

나는 흘끗 그에게 잡힌 발목을 보고는 눈을 돌렸다.

“배고픈데.”

내 입술에서는 답변 대신 다른 말이 흘러나왔다. 그가 내 발목을 잡거나 말거나.

그의 손끝에서 쿵쿵 뛰는 맥박이 고스란히 느껴졌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팔짱을 꼈다.

“밥 줘.”

동요하지는 않았다. 더는 동요할 일이 아니었다 해두겠다.

이 남자는 1여 년 전 내게 본모습을 드러낸 이후로 쭉 이런 식이었다.

“밥 말고는?”

“말고는 필요 없어. 배고프니까.”

그가 고개를 숙여 내 발등에 입술을 맞췄다. 스스럼없는 행동이었다. 부드러운 눈매에 움찔했다.

“……발등에 그러지 마. 더러운데.”

“그런가? 그럼 씻어줄래?”

뭐를? 입술을?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어. 숨을 작게 내쉰 나는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조만간 비가 온대, 입 벌리고 서 있어.”

거기서 닦던가, 내 소리에 우리의 시선이 교차했다. 웃음을 터트린 쪽은 체이서였다. 그는 손등으로 뺨을 닦았다.

“그렇게 말하지 않기로 했잖아.”

“그럼 앞으로 발 씻지 말까?”

“내 동생, 직접 씻겨주길 바라?”

이리 말하던 체이서가 흥미롭다는 듯 제 턱을 문질렀다.

“아…… 좋은 생각 같은데, 실천해 봐도 돼?”

“……생각해보니 비 올 때 나도 같이 서 있을게.”

이 변태 같은 인간이 뭐라는 거야. 네가 씻겨주느니 비 맞는 게 낫지. 그가 내 발목을 살짝 쥐었다가 놓았다. 절로 족쇄의 감촉이 느껴졌다.

방 안엔 몹시도 세상에서 제일간다는 고급스러운 침구와 백 마리의 거위 털을 뽑아 만들었다는 베개가 즐비했다. 여기에다 제국을 다 뒤져도 채 열 개가 되지 않는다는 희귀한 보석부터, 1년 12달을 입어도 반 바퀴도 돌지 못할 옷과 신발, 10년에 한 번만 채취 가능하다는 풀로 만든 방향제까지.

호화로움을 형상화하고, 풀어놓은 것들로 가득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체이서의 어깨너머를 응시했다.

방 안에 있는 커다란 기둥, 그 기둥에는 검은 사슬이 둘둘 감겨 있었다. 기둥은 도르래처럼 돌아가는 식이었다. 그것도 마법의 힘이랬나. 저걸 모두 풀면 이 저택을 둘둘 감을 수 있댔나.

저것 덕분에 이 족쇄를 달고도 저택 안 정도는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다. 동시에 묶인 것이기도 했고. 나는 눈을 기둥에서 떼어내, 내게 이것들을 선사한 남자를 향했다.

감금.

그래, 지난 1여 년간 나는 감금되었다.

어떠냐고?

편안히 감금당하는 중이시다.

어차피 세상은 배부르고 등 따시면 그만.

나는 인생을 즐기기로 했다.

“빨리 밥 줘.”

약 1여 년 전, 이렇게 생각하기까지는 단 석 달도 걸리지 않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