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날 오후.
오전에 튀자고 굳게 마음먹었지만 바로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모름지기 빈 몸으로 갈 수는 없지 않은가. 이 구역 지리는 알고 가든가. 세간 살림 몇 개를 슬쩍하든가.
준비에 오래 걸리진 않을 거다. 나는 욕심이 크게 없었으니까.
고위 귀족으로 탱자탱자 먹고 살겠다는 로망은 멀리 사라지고 말았지만, 한적한 동네에 빵집에서 일하며 좀 바삐 평범하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암, 목표를 이렇게 소박하게 잡는 것도 능력이다.
갑자기 빵집 타령을 하는 건 아니고. 오래전 수감 생활을 할 때 빵집에 대한 이야기를 감방 동기인 자작 영애한테 들은 적 있다.
그녀는 이복 오빠들이 괴롭힌 탓에 하녀처럼 지내 왔는데,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그녀의 이야기에서 이 제국은 생각보다 도시 체계가 잘 되어 있고, 밀이 주식이라 한적한 도시에는 빵집이 꼭 하나씩은 있단 것을 알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튈 궁리를 하는 동안 이 저택에 대해 알게 된 점이 있었다.
“……또 간식이네.”
이곳은 오전에 아침을 먹고 왜인지 한 시간에 차려진 디저트를 먹고, 거기에 한 시간 뒤 티타임이랍시고 차까지 먹였다.
그래서 알았다.
아, 여기는 인심을 잃기 전 한국처럼 사람 한번 배불리 먹이는 인심을 갖고 있구나. 배부른 인심과 악당 저택이라니 모발 이식과 대머리독수리처럼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배불리 먹긴 했다. 책 속처럼 혹독한 곳에서 눈칫밥 먹느니 정 많은 저택이 낫지.
터질 것 같은 배를 두드리고 있을 때, 체이서가 들이닥쳤다.
아, 정정한다. 들이닥친다 싶을 만큼 거칠지는 않았고, 문을 열고 몹시도 우아한 걸음으로 나타나더라.
“이아나, 잘 잤어?”
나는 대답 대신 하늘을 바라봤다. 어느새 오후 2시를 훌쩍 넘긴 시간은 잘 잤냐를 묻기 적절한 시간은 아니었다.
“그걸 묻기에 적절한 시간은 아닌 것 같은데.”
내가 웃지도 그렇다고 심통 맞지도 않는 낯으로 답하자, 그가 살짝 미소 지었다.
전날과 다르지 않은 다정히 잔뜩 묻어나온 미소였다.
“그래도 언제나 궁금한걸. 또 궁금해 왔고. 네가 잘 자는지, 잘 먹고 지내는지.”
그런 거라면 감방을 보내지 않았으면 된 거 아닌가. 거기까지는 내뱉지 않았다.
체이서는 전날 내가 말없이 잠들어 버려 화가 난 기색은 아니었다. 오히려 전보다 더 나긋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것도 같았다.
“보다시피 건강해.”
“응, 그래 보이네.”
그는 아무렇지 않게 맞장구를 치고는 성큼 내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보여 줄 게 있어.”
“보여 줄 거?”
아무래도 그는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이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로 한 모양이었다. 어제는 긴가민가했지만 이젠 확신이 들었다.
그는 몹시 즐겁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갈래?”
그러고 보니 이쪽도 제국의 대단하신 공작이었다. 아, 지금은 아닌가?
그렇더라도 공자인 지금 또한 세력으로 떵떵거릴 직위. 할 일이 많을 것이었다. 리케도르안의 부친이 집 안에서만 쓰레기였다면, 이쪽의 부친은 외부에서도 쓰레기였다.
권위적이지만 채우기보다는 쓰는 것에 바쁘고 휘두르는 것에 쾌락을 느끼던 사람이었던가.
이 때문에 체이서가 어린 시절부터 공작 대리 일을 처리해 왔고, 이는 그를 서술하는 문장에도 있었다.
이걸 기억하는 이유는, 이 남자가 이걸로 나는 나쁜 놈이지만 사연도 있고 불우했어 하고 감성팔이를 했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짠하구나 했었지.
“안 바빠?”
“응, 안 바빠.”
체이서가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아 손등에 입을 맞췄다.
“네 앞에 있는 나는 언제나 바쁘지 않을 거야.”
그는 오늘도 깔끔한 차림이었다. 적당히 조여 맨 크라바트나 주름 하나 없는 정장 바지를 보고 있노라면 얼굴과 다르게 참 금욕적인 차림이구나 싶었다.
이러면서도 책 속 그는 침대에서는 참……. 그렇고 그런 남자였지. 몸도…… 큼큼. 착한 생각. 착한 생각.
나는 엄한 상상을 지워내며 배를 쓰다듬었다.
“미안한데, 못 갈 것 같아. 배가 너무 불러서.”
“배가 부른 것 때문이야? 못 걸어서?”
“……그렇지?”
그의 웃음이 진해졌다. 나는 불안을 느꼈다.
“그럼 안고 가면 되겠다.”
“뭐?”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몸이 쑥 들렸다.
아니, 이 남자는 무슨 사람 몸을 이렇게 가볍게 들어? 당황할 새도 없이 흔들리는 중심에 얼른 그의 옷자락을 쥐었다.
아무리 웃고 있어도 악당인지라 조심스러운데, 할 말은 해야겠다는 성정이 불쑥 튀어나왔다.
“저기, 허락은 구하지 않아?”
고심 끝에 예의는 밥 말아 먹었냐를 나름대로 귀족적으로 표현해 보았다.
“예의는 아침 스테이크 썰 때 같이 썰어 버린 건 아니지?”
그는 가볍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대답했다.
“해결해 준 거지. 해결.”
……해결? 배부르다고 들어 준 걸?
난 콧방귀를 뀌었다. 왜 입으로 방귀를 뀌지.
“이런 걸 해결이라 부르지 않아.”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하. 다음부턴 그럴게. 이번에 배웠어.”
그의 얼굴을 보았지만 싱글 웃는 얼굴은 내려달라고 한들 내려 줄 것 같지 않았다. 정색이라도 하면 내려 줄 건 같은데, 여기서 반발해 봐야 좋지 않을 것 같다.
아울러 어차피 오래 볼 얼굴도 아니었다. 굳이 실랑이 벌여 봐야 뭐하겠나 싶어 나는 빠르게 포기했다.
“어디 갈 건데?”
“가까워.”
그는 나를 안고도 성큼성큼 잘만 걸어갔다. 흔들림이 없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만큼 이 남자의 몸이 단단하단 증거일 터였다.
그는 기사는 아니었다. 정확히는 공작이었기에 기사 작위를 굳이 갖지 않아도 되는 입장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가 몸도 머리도 잘 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머리를 쓰든 몸을 쓰든 모든 게 비정상적이고 비범했던 탓이지.
책 속 그의 무기도 정상적인 검은 아니었다.
“여기야.”
리케도르안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내가 본 바와 같이 인간 같지 않은 비정상적인 신체 능력이었다.
그리고 그와 대적자, 적인 체이서에게는…….
그의 능력을 떠올린 나는 숨을 삼켰다.
달칵, 문이 열렸다.
무엇을 상상하든 마음의 각오를 해 두자, 싶던 나는 방 안의 풍경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 안의 풍경은 생각보다 평범했다.
아니, 원작의 사건 정리인지 체이서의 악행 일대기인지 모를 연대표 때문에 피비린내 나는 상상을 했던 것과는 달랐단 소리다.
대신 다른 의미로 견디기 힘들었달지.
‘……마피아 보스도 아니고.’
방 안에는 어제 복도에서처럼 수많은 이들이 양옆으로 서 있었다.
방 안이니만큼 어제보다 사람은 적었지만 수많은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오셨습니까.”
모두 일시에 허리를 숙였다. 칼군무도 아니고, 제각각 체격의 사람들이 칼같이 각도를 맞춰 인사하는 모습이 경이로웠다.
또한 그들 중 누구도 체이서에게 안긴 내 모습을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이로 보아, 이아나가 평소에 안겨 다닌 적이 있었나 싶었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이들 중에서 방 한가운데 서서 인사하는 사람이 세 명 있었는데, 그들은 검은 하녀복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색깔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체이서가 성큼 걸어가 나를 내려놓았다. 푹신한 의자였다. 그러더니 자신도 내 옆에 앉았다.
“대체 이게 뭐야?”
웬만하면 이 남자와 말을 좀 덜 섞자 싶었지만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체이서는 씩 웃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일렬로 서 있던 하녀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곧 눈앞에 휘황찬란한 것들이 나타났다. 동시에 나는 이들이 하려 한 일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드레스, 보석, 신발.
어떻게 이렇게 가져다 놓았나 싶을 만치 품목도 물건도 아주아주 많았다. 고급스러운 쇼룸을 통째로 빌렸다면 이런 기분이었을까? 신데렐라 요정도 이렇게나 가져올 수는 없겠다 싶었다.
솔직히 말해 이렇게 보고 있으니 옷 갈아입히기 게임 속 기본 아바타가 된 기분이었다.
“이전의 물건이 전부 타 버려서, 새로 가져오게 했어.”
“……타?”
“응. 살던 곳에 불이 나서.”
“불이 왜 나?”
“그러게.”
그가 세상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미소를 살살 지워냈다.
“세상엔 이상한 사람이 너무 많아.”
체이서가 시무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미소가 사라진 미인의 낯은 처연하게 보일 법했지만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거 혹시 댁이 두들겨 팬 누군가의 보복 아니야?
그런 말이 목 끝까지 솟았다. 순화해서 두들겨 팬 거지, 누군가의 아들 혹은 딸을 세상과 작별시켜 준 걸지도 모른다.
머리가 아팠다. 이제야 현실이 현실로 다가온 느낌이었다.
“그래서, 어때?”
그가 턱을 괴더니, 그윽한 시선을 보내왔다. 그가 턱짓한 곳에는 수많은 물건이 있었다.
“마음에 드는 건?”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게 내가 다 사 줄게, 1억 2천 모두 현금 줄 것 같은 얼굴을 해도. 정작 본인이 받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는 걸 어쩌겠나. 고전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의 주인공이 된 기분인데, 그 로맨스 코미디가 전혀 로맨틱하지 않다는 점에서 코미디가 되어 버렸다.
“……없는데?”
내 발언은 가벼웠지만 파급력은 전혀 가볍지 않았다.
“그렇다는데?”
그는 그저 웃으며 고개를 까딱했을 뿐이었다.
와르르르!
쿵!
누군가 가져온 커다란 상자에 모든 물건이 일시에 쏟아지는 소리였다. 나는 놀란 눈으로 하녀들을 쳐다봤다.
“뭐 하는 거야?”
“버리는 거지.”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무슨 이런 미친 소리가 다 있지?
“내 어여쁜 동생.”
체이서는 내 손을 가볍게 쥐었다가 놓았다. 그러고는 내 손끝에 인사를 남겼다.
“마음에 드는 게 나올 때까지 골라도 돼.”
그의 눈동자는 어여삐 여기는 이에게 향하는 다정으로 가득했다.
“여기 없으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꺼낸 물음은 미소로 돌아왔다.
“걱정 마. 원한다면 세상 모든 보석을 가져다줄 수 있으니까.”
내게 보내 준 편지 속 필체처럼 부드러운 어조였다. 하나 나는 그 안에 담긴 뜻을 알아들었다. 설마하니 세상에 네 마음에 드는 게 하나 없겠어? 그가 말하는 사이에 모든 물건이 교체되었다.
새로 내어진 물건을 얼떨떨하게 바라봤다. 하나같이 번쩍번쩍하다. 나는 침을 삼키고는 하나를 가리켰다.
“이게 좋겠어.”
“저기서부터 저기까지 다 줘.”
……예?
“탁월하신 선택이십니다.”
지금까지 말없이 있던 드레스를 입은 이가 접은 부채를 살랑 흔들며 손등을 뺨으로 가져갔다.
아무래도 저쪽이 상인이었나 보다.
“저희 살롱의 물건은 확실하지요. 호호호.”
“그럼, 마담의 실력은 잘 알지.”
“예. 아가씨에게 정말 잘 어울릴 겁니다.”
그녀는 왜인지 줄곤 나와는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체이서가 내 게 보석을 슬쩍 대어보는 순간까지도.
“잘 어울릴까, 마담?”
“예. 제가 잘 알지요. 하늘색이 정말 잘 어울리실 겁니다.”
아니, 보지도 않고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뺨을 긁적였다. 이후로도 나는 들이밀어진 물건마다 하나씩 골랐고, 체이서는 기다렸다는 듯 색깔별로, 혹은 비슷한 것들을 사재꼈다.
진짜 산 게 아니고 사재꼈다.
나는 질린 얼굴로 물건들을 바라봤다.
“아가씨, 이건 입어 보시겠어요?”
“좋아요.”
고르는 데 지친 나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갈아입고 올게.”
속으로는 저놈 멱살을 잡고 비명이라도 쏟아내고 싶었다. 내가 이런 돈지랄에는 면역력이 없어요. 면역력이. 체이서는 하얗게 질린 내 얼굴을 어찌 보았는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응, 다녀와.”
나는 그렇게 옆방에 놓인 칸막이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어떤 명령을 받은 건지 갈아입는 것을 도와주는 이들은 나에게 일절 말을 걸지 않았다.
아니면 이게 예의인 건가?
나는 새삼스럽게 리케도르안에게 미안해졌다.
내가 체이서의 여동생인 줄 알았다면 잘해 주지 말걸.
아니, 더 잘해 줬어야 했나? 가뜩이나 순탄하지 않을 그의 삶에 짐덩이를 얹은 것 같은 기분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괜찮아. 다시 만날 일은 없을 테니까.
새 원피스로 갈아입은 뒤 옷자락을 펼치는 사이, 누군가 다가왔다. 드레스를 입은 중년 여인 중 하나였다.
“어머나, 잘 어울리세요.”
그녀는 성큼성큼 걸어와 서슴없이 허리를 숙여 치마를 바로잡아주었다. 주름이 이렇게 져야 이쁘다면서. 내려다보았지만 무슨 차이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가 기쁘다는 듯 가식을 담아 웃었다.
“역시 부름에 부랴부랴 후문으로 들어온 보람이 있네요!”
“후문이요?”
내 대답에 여인이 잠시 멈칫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내 부드러운 웃음을 지었다.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호호. 후문은 저희같이 급히 불려온 살롱관리자, 상인이나 하인들이 다니는 문이랍니다.”
그녀는 그리 말하면서도 호기심 어린 눈을 숨기지 못했다. 체이서가 보지 못하는 곳이라서 말을 거는 것으로도 모자라, 시선을 숨기지 않고 보이는 듯했다. 나는 다정한 체 휘어진 시선 가득 담긴 감정을 알아차렸다. 악의는 아니지만 가십을 향한 욕망이다. 으레 감방 죄수들이 신문을 통해 바깥을 욕망하듯이.
일단 소문이라는 말은 그대로 흘리고 말꼬리를 잡았다.
“정문은 이용하지 않나요?”
“예? 예. 현재 도뮬릿의 정문은 폐쇄되어 있습니다. 주인께서 외출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신 것이지요. 이럴 땐 손님도 누구도 이용할 수 없습니다.”
폐쇄? 그러니까 문이 후문 하나란 말인가.
“그럼 불편하진 않고?”
“음 후문이, 사실 아주 불편하긴 하지요. 저택 뒤쪽 마구간과 이어진 유일한 길이라 저 같은 드레스 장인은 꺼리는 곳이니까요. 진흙이 튀기라도 하면…….”
내 시선에 그녀가 말을 딱 멈췄다. 본래 한번 물꼬가 트이면 끊임없이 쏟아내는 사람인 모양이었다.
“호호, 죄송해요. 말이 길었네요. 중문이라도 열어 주시면 좋을 텐데.”
그녀는 서둘러 말을 마무리했다.
나는 갈아입은 옷을 체이서에게 보여 주었다. 체이서는 예쁘다며, 미소와 함께 예의 황홀한 음성으로 속삭여 주었다.
“예뻐, 이아나.”
참 볼수록 사람 꾀는 데 일가견 있는 사람이었다. 공포를 통해 엄숙함을 유지하던 시종인들도 저도 모르게 그를 보았으니까.
“저기, 이렇게나 많이는 필요 없어.”
잠시 뒤 나는 잔뜩 쌓인 것들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이미 차고 넘칠 정도로 사들인 게 많은 것 같은데 체이서는 멈출 줄 몰랐다. 공작가 재산은 화수분인가?
소시민으로서는 예상도 못할 재화가 오가는 장면에 이미 질릴 지경이었다. 내가 본디 옷이면 편하면 다지, 안락우선주의란 점도 한몫했다.
‘나는 세상에서 제일 편한 옷이 죄수복인 줄 알았다고.’
내가 끝내는 난감한 얼굴로 거절하자, 그는 만만치 않은 곤혹스런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모르는 이가 보았다면 흡사 버려진 짐승처럼 괜히 마음 쓰이게 하는 그런 얼굴이었다.
“이아나, 내가 해 주고 싶어서 그래. 너를 곤란하게 했어?”
마음이 약해지기는커녕 단호하게 말하려 입을 연 순간이었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오빠?”
체이서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나보다 한참 낮아진 그의 모습을 경악한 채로 보았다.
“뭐해? 일어나. 왜 꿇는 거야?”
“이아나, 이것만은, 허락해 주면 안 될까? ……캄브라캄에서 돌아온 네게 뭐든 해 주고 싶어. ”
긴 손가락이 내 손을 잡았다. 손이 얽히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것이 지난 시간에 보상이 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해 주고 싶어.”
그윽하게 눈을 내리깔았던 남자가 천천히 눈을 들어 올렸다.
“안 돼?”
혼란스러웠다. 분명 이 남자는 책 속 악당 체이서가 맞는데. 내가 아는 그 남자는 사랑과 광기에 미친 남자일지언정 누군가에게 이렇게 다정하지도 정중히 부탁하지도 않았다.
애가 달면 온화하게 웃으며 칼부터 들던 남자였다.
“……일단 일어나 줘.”
……댁네 시종들이 경악한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거든?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받을게. 받을 테니까.”
어차피 받아도 쓰지 못할 물건일 텐데. 체이서는 눈앞에서 해사하게 웃었다.
“응…… 네가 원한다면 이 저택도 줄 수 있어.”
“필요 없어.”
농홍하게 휘어진 눈꼬리가 아득한 느낌을 자아냈다.
“그럼 날 줘야 하나?”
내 거절이 한 차례 더 이어졌다. 무슨 소리야. 체이서가 택배로 오면? 환불 신청해도 모자랄 판에.
한숨이 흘러나왔다. 왜 이 남자는 전혀 안 어울리는 얼굴을 하고서 푼수떼기처럼 구는 거야? 흘끗 보면 그는 시무룩한 얼굴을 한 채로 꽃받침을 하고 있었다.
“이것도 싫다니. 내 동생은 언제나 까다롭네.”
꽃받침이라니 얼굴엔 어울리는데, 내 안의 캐릭터는 거의 붕괴상황이었다. 거기다 자기 자신을 준다니, 나한테 공작가를 주기라도 한다는 건가? 훗날 무슨 보복을 받으라고.
줄 거면 금화 한 봉지만 주고, 다음엔 쫓아 보내 주면 좋겠다.
그렇게 이 남자와의 기묘한 쇼핑이 끝이 났다.
하녀들에게 물건 정리를 새로 시킨 뒤 체이서는 나와 밖으로 나왔다.
“여기서부터는 혼자 갈게.”
체이서는 나를 잠시 보았지만 순순히 놓아주었다. 붙잡고 있던 건 아니지만 고개를 끄덕여 허락했단 소리다.
다만, 붉은 입술로는 어리광 부리듯 한마디 하면서.
“혼자 두기 싫은데.”
내 손에 입술을 가져다 댄 채 그의 눈이 요염하게 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