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으음…….”
눈을 떴을 때, 마차가 멈춘 것이 느껴졌다. 여전히 마차 안인 것 같은데……. 어느새 늦은 오후가 된 듯 해가 많이 기울어져 있었다. 창문을 보던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와, 무슨 건물이 저렇게 커?
“허…….”
엄청난 대저택이 눈앞에 있었다.
과장이 아니고 정말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규모였다. 여기서 일부만 본 것만으로 어마어마해 보였으니까.
저기 사는 사람은 어떤 기분일까, 고민하다가 그러고 보니 그게 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으으, 잤는데도 피곤하네.
마차의 의자는 너무나도 푹신했지만, 역시 누워서 자는 것만큼은 되지 못했다.
“아…… 함.”
늘어지게 하품을 하다 말고 멈칫했다. 눈앞에서 턱을 괸 채 나를 물끄러미 보는 한 쌍의 눈과 마주했기 때문이었다.
흠칫 놀랐다.
뭐야, 왜 인기척도 내지 않고 있어.
“……오, 빠?”
“응.”
체이서가 빙긋 웃는 그대로 대답했다. 영 오빠란 호칭이 입에 붙지 않는 나와 다르게 자연스러운 대답이었다.
“도착한 거야?”
“응.”
대답하는 음성이 꿀을 살살 녹여 놓은 듯 다정하고 달콤하기 짝이 없었다.
“언제?”
“한 시간 전쯤?”
“뭐?”
한 시간 전에 도착했으면, 왜 사람을 깨우지 않고서? 아니면 나를 두고 먼저 내리든 들쳐 업고 가더라도 방법이 있을 건데.
어째서 그도 얌전히 기다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왜 내리지 않고서?”
“고민이 돼서.”
고민? 어떤 고민?
“네가 너무 곤히 잠들어서 깨울 수가 없었어.”
그가 곤란하다는 듯이 미소했다. 나는 잠자코 그를 계속 응시했다.
“안고 가는 것도 고민했는데.”
그는 턱을 잡고 그대로 기울였다. 몹시도 고민이었다는 듯이.
“내가 안고 가더라도 넌 깰 테니까. 그럼 미안하잖아.”
이상하네. 내가 아는 체이서라면 웃는 얼굴로 물을 끼얹어 깨울 것 같은데.
오히려 그렇게 했으면 아, 맞아, 저런 놈이었지. 이해했을 것 같다.
책 속에서 워낙 미친 짓을 많이 했어야 말이지. 내용을 아는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저 손에 날아간 팔다리며 목숨이 셀 수 없이 많았다.
한숨 푹 자고 일어났지만 여전히 책 속과 다른 그의 모습에 적응이 되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냥 몸을 흔들지 그랬어.”
“그럼 네가 깨잖아.”
“그게 왜? 일어나면 내리면 되지.”
뭐 그게 어려운 일이라고? 나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그래? 그럼 안고 갈 걸 그랬나.”
체이서가 부드러이 웃었다.
“그럼 내릴까?”
그가 그렇게 말한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열렸다. 체이서는 자리에서 먼저 일어나 마차에서 내렸다. 그를 따라 마차에서 내리려는데, 눈앞으로 손이 불쑥 내밀어졌다. 체이서의 손이었다.
그의 손은 하얗고 큰 데다 단단해 보였다. 의외로 손끝에 흉터가 보여서 신기했다.
‘흠, 악당 일하다 저리됐으려나.’
그와 그의 손을 번갈아 보았다.
아, 여기서는 이런 것도 하나하나 잡아 주나 보네. 내가 살던 곳과는 확실히 기본 매너가 다르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손을 올리는 순간이었다.
시야가 휙 뒤집혔다. 몸이 그대로 들렸다. 눈을 크게 뜬 나는 얼른 손에 잡히는 단단한 것을 잡았다.
“앗.”
다행히 금방 발이 땅에 닿았다.
그러나 발이 땅에 닿고도 나는 그의 단단한 어깨를 잡은 채 눈을 깜빡였다. 무슨 사람을 이렇게 가볍게 휙 들어?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놀랐어?”
“어, 어? 조금…….”
그가 눈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섬세하도록 촘촘한 속눈썹이 고스란히 보였다.
“미안해. 그 점을 생각 못 했네.”
그윽한 목소리가 귀를 잔뜩 적셨다.
와, 이 사람이 심야 라디오를 했다면 전국의 여성 청취자들이 불면증 좀 단단히 걸리겠구나 싶었다.
나는 단단한 어깨에서 손을 떼어냈다. 조금 궁금하긴 했다.
그가 내 반응들에 일일이 토를 달지 않는 건, 내가 하는 행동이 ‘이아나’와 비슷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감방을 다녀온 지금 반응이 달라도 이해하는 쪽이려나.
문득 생각난 것이 있었다.
“오빠, 혹시 감방을 들렀을 때 나와 만나서 손수건을 준 일 기억해?”
체이서가 멈칫했다. 돌아보았을 때 그는 부드러운 얼굴이었다.
“기억하지. 왜?”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한 마디를 더 이었다.
“그 전의 만남은 생각나지 않아?”
“전의 만남? 생각 안 나는데…. 왜? 기억해야 해?”
이렇게 대답하면서 등으로 살짝 식은땀이 흘렀다. 잘 대답했으려나. 그러나 별일 아니었는지 체이서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 틈을 타 나는 궁금한 것을 물었다.
“그때 준 손수건, 왜 우리 가문이 아닌 걸 준 거야.”
내 말에 체이서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흐음, 하고 소리를 냈다.
“글쎄. 마침 가지고 있던 것이 그것뿐이기도 했고.”
했고?
“그 지방은 천이 아름답게 나오기로 유명해. 개중 아인테로 바쳐져 수놓아지는 천은 최상등급이지.”
체이서의 손이 내 어깨를 살짝 두드리고 떨어졌다. 나는 다른 생각이 들었다.
……삥 뜯은 거야?
에이 설마. 삥이 아니라 합법적으로 뜯었겠지. 체이서의 업적을 기억하던 나는 금세 수긍했다.
조각상처럼 아름답게 생겨서는 범죄의 제왕이란 이름이 걸맞은 인간이었다. 그사이 체이서가 나긋하게 웃었다.
“네가 쓸 건데 작은 거라도 쓸모없는 걸 줄 수는 없잖아?”
나는 그를 보다 가벼이 끄덕였다. 내가 엄청난 오해를 하게 되어 버린 손수건의 시발점이 궁금했을 따름이었다.
“들어갈까?”
그가 손을 내밀었다. 하나하나가 참 자연스럽단 말이지. 나는 ‘이아나’가 어떻게 행동했을지 생각하다 그 손을 잡지 않았다.
“응. 들어가면 돼?”
어차피 나는 이전의 이아나가 될 수 없다. 알지 못할뿐더러 안다 한들 자연스러워질 자신도 없고.
그렇다면 처음부터 나를 보여 주는 쪽이 낫겠지. 뭣하면 나를 여기서 쫓아내 줘도 좋고, 여기서 계속 살더라도 비교적 평화롭게 살 수 있으면 좋겠다 싶으니까.
잠을 푹 잔 지금에 와서는 어느 정도 머리가 돌아갔다.
나로 있는 쪽이 낫다는 판단이 들었다.
“이쪽으로.”
체이서는 내가 손을 잡지 않고 그대로 무시했음에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이런 걸 보면 역시 감방에 다녀온 여동생이 어찌 나오든 뭐든 받아들이겠다, 쪽인 것 같은데.
좀 더 두고 볼 일이다.
체이서와 저택 안쪽으로 들어간 나는 이내 방 하나를 안내받았다. 의외인 점은 다른 누군가에게 맡기지 않고 그가 직접 나를 안내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방에 도착했을 즈음에 나는 거기 놀랄 기력이 없었다.
“여기가 네 새로운 방이야.”
“어어…….”
아마 내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을 거다. 나조차도 내가 하얗게 질린 것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체이서가 방을 안내하겠다고 나서기 직전에 보았던 장면 때문이었다.
그것인즉슨 아주 긴 복도에 처음부터 끝까지 쭉 사람이 도열한 채 우릴 맞이했던 것이었다.
왜, 대통령 개선식을 하는 것처럼 검은 시종복, 혹은 하녀복을 입은 사람들이 빈틈없이 반듯하게 서 있었다.
<……헉.>
사람이 이렇게 많으면 시선은 또 얼마나 많겠나. 인간이 눈은 한 쌍, 그리고 곱하기 n배 무서운 사실을 체감하고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나답지 않게 등줄기를 세우게 만든 긴장은 관심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편이란 사실이 한몫했다.
나는 무던하고 느긋하게 살고 싶은 사람이지…… 이런 식으로 주목을 받고 싶은 사람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체이서는 시종인들에게 친절하고 호의적이었다.
<물러가 봐도 좋네.>
그들에게 말하는 목소리는 나긋나긋하기만 했으니까.
이 또한 생경했다.
분명 책 속에서 보여 준 모습이나 내용으로 추리해 보자면 아랫사람을 공포로 압제하면 했지 이렇게 부드럽게 나올 사람은 아닌데.
아무튼 그 구간을 지나온 지금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도 진이 빠졌다. 그래서 체이서가 내 새로운 방에 대해서 무어라 설명하는 데에도 집중하지 못했다.
“새로운 방이 마음에 들지 모르겠다. 이전에 쓴 방은 더는 쓰지 못하니까.”
“응? 아, 응.”
그제야 고개를 들어 문고리를 바라봤다. 몹시도 고급스럽게 생긴 문고리다. 새 같은 것이 음각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까지 걸어오는 동안 새라거나 네발 달린 고양잇과 짐승? 같은 조각이 여기저기 새겨져 있는 걸 본 것 같았다.
가장 많이 보이는 건 다름 아닌 검은 장미였지만.
“일단 해가 졌으니까 저녁 시간까지 푹 쉬도록 해. 식사에 맞춰서 방문할게.”
나는 문고리를 당기려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직접 온다고? 왜 사람을 보내지 않고서.
“왜 직접 오는 거야?”
이번에도 내 입술은 머리를 거치지 않고 열렸다. 이에 그의 눈이 잠시 내게로 향하는 것 같았다.
“그러고 싶으니까?”
이렇게 웃음이 많은 남자였나, 웃음이 많기는 했지.
다만 웃으며 칼이든 손이든 휘둘러 여러 사람 골로 보내고 피를 봐서 그렇지. 책 속 묘사는 광기 어린 미남, 그 자체였는데. 이 부드러움 속에는 어디에도 그런 글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 알았어.”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여독이 다 풀린 건 아닌지라 들어가서 쉬고 싶은 마음이었다.
체이서의 얼굴을 뒤로한 채 문을 닫았다. 한숨과 함께 머리를 든 나는 그대로 깜짝 놀랐다.
“……뭐가 이리 넓어?”
눈앞에는 웬 운동장만 한 거실이 있었다.
다시 보니, 방이었다. 방이 거실보다도 컸다.
말이 거실이지, 보통 아파트의 거실을 몇 개나 붙여 놓은 것처럼 컸다.
문제는 내내 나 하나 들어가면 그만인 작은 감방에서 살아온 내겐 너무나 생소했다는 거다.
이전 세계에서도 소시민이었던지라 더욱더 적응되지 않았다.
“이거야, 원. 무슨 신데렐라가 된 기분이네.”
나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긴 머리칼은 아무렇지 않게 풀어헤쳐 놓았지만 걸친 원피스는 어울리지 않게 고급스럽고 몹시 부드러웠다.
이건 출소를 앞둔 일주일 전쯤 체이서가 선물로 준 것이었다.
그때는 그저 다정한 오빠가 준 것인 줄 알았지.
“마침 출소할 때 입을 사복이 없기도 했고.”
이아나는 놀랄 만큼 제 물건이 없는 죄수였다. 오죽하면 출소할 때 죄수복을 입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으니까.
“죄수복을 더는 안 입어서 좋긴 한데.”
이게 과연 좋은 상황일까?
줄곧 감방 안에서 내가 그려온 청사진은 감방에서 편안히 출소를 기다린 뒤, 출소하고 나서는 목가적인 풍경이 그려지는 곳에서 유유자적 한적하게 사는 것이었다.
좋게 말하자면 욜로, 나쁘게 말하자면 팔자 좋게 늘어지는 것 말이다.
뭐 어때. 기왕 모르는 세계에 왔는데 불편한 거보다는 편한 거, 안 힘든 게 좋잖아.
돈 안 벌어도 놀고먹는 백수는 모두의 꿈, 고로 귀족 죄수에다 높은 가문인 게 감사하기만 했는데.
그런데 문제는 내 가문이 어느 동쪽의 평화롭고 곡창지대라는 대백작 가문이 아니라…… 앞으로 태풍의 눈에 있을 악당 집안이라는 거겠지.
나는 숨을 푹 내쉬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침대까지 무려 3분은 걸어간 느낌이다.
더럽게 넓네.
나는 원피스를 허벅지까지 걷어 한 다리를 다른 허벅다리에 걸치고 거기에 팔은 얻은 채 턱을 괬다.
이상하네.
“심각한 일이긴 한데. 어째 긴장감이 안 드냐.”
그 체이서란 인간이 책 속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줘서일까?
비단 그것만은 아닐 거다. 나는 나를 잘 알았다.
나는 평소에도 지인들에게 어쩜 그리 여유가 넘치냐 야유를 듣곤 하던 태평한 성격이었다. 수능 칠 때도 긴장이란 걸 해 본 적이 없었다. 어차피 한 만큼 나올 텐데. 이런 마음이었다.
이는 지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나저나 진짜 푹신하네. 엉덩이로 콩콩 뛰어 보았다.
충격을 흡수하는 것이 천국이 따로 없구나 싶었다.
침대를 신기하게 바라보던 나는 침대 머리맡에 새겨진 글자를 보았다. 이아나의 몸에서 눈을 뜬 순간부터 이 세계의 글은 읽을 줄 알았다. 그러니 편지도 썼던 것이었다.
글자는 나무를 깎은 조각에 아름다운 필기체로 새겨져 있었다. 천천히 철자를 읽어 보았다.
“……이아나.”
‘이아나 로즈 도뮬릿.’
입안에 넣고 웅얼웅얼 굴려 본다.
“이게 내 이름이구나.”
손으로 글자를 살살 문질러 보다가 그대로 등을 눕혔다.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중얼거렸다.
“……이아나 로즈 도뮬릿.”
이름 예쁘네.
장미에서 태어나서 이름도 장미인가.
차원을 넘었다고 한들 본질이 바뀌겠나. 나는 단순한 동물이라 등 따시고 배부르면 잠이 왔다. 지금은 배가 부른 상태가 아니었지만, 등을 눕히니 잠이 솔솔 쏟아졌다.
“아, 오빠가 직접 온다고 그랬는데…….”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이미 눈꺼풀에 옮겨붙은 것은 세상 그 무엇보다 무거운 수마였다.
나는 눈을 끔뻑끔뻑하다가 이윽고 눈을 깊게 감았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침대 옆에서 무언가 움직인 것 같았지만. 나는 몸에 걸쳐진 것만 꽈악 쥔 채 몸을 돌렸다.
왜일까, 하늘을 붕 날았다가 다시 가라앉은 꿈을 꾼 것도 같았다.
***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눈보다 귀로 먼저 밖을 접했다.
짹짹짹.
맑게 지저귀는 새소리가 귀를 경쾌하게 울렸다. 그 소리를 알람 삼아 눈을 뜬 나는 눈을 비비며 상체를 일으켰다.
아주 늘어지게 잔 것 같은데.
“……어라, 아침이네.”
창밖에 보이는 건 누가 보아도 상쾌한 아침 하늘이었다. 그것도 해가 중천에 가까운 오전의 하늘.
잠시만, 아침?
헉. 나는 눈을 번쩍 떴다. 몽롱한 잠기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끙, 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와, 하루 반나절을 꼬박 잔 거야?
아무리 피곤해도 그렇지 내 둔함과 무신경함에 이번엔 나조차도 감탄이 흘렀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단하네.”
그러나 금방 잊었다. 이미 자 버린 것을 어떡하겠어. 자리에서 일어난 것도 잠시, 나는 슬리퍼를 신다 말고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네. 내가 침대 정 가운데서 잠들었나?
분명 체이서가 올지도 모른단 생각에 불편하게 잠들었던 것 같은데.
‘뭐 굴러갔나 보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슬리퍼를 끌고 문 앞으로 다가갔다. 옷은 어제 입은 그대로였다.
배가 고픈데. 일단 나가서 사람이라도 불러야 하나.
그렇게 문을 연 순간이었다.
“네, 네가 해. 응?”
“싫어. 네가 해! 너한테 맡기셨잖아.”
문을 열었을 때, 웬 여성 두 분이 멀지 않은 곳에서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나는 문 위쪽을 슬쩍 바라봤다.
문이 되게 소리 없이 열리네. 역시 돈을 들여서 다른가.
“안 돼! 자, 잘못하면…….”
“안녕하세요.”
하녀복을 입은 두 분이 어깨를 움찔했다. 끼익끼익, 그녀들의 고개가 돌아간다.
그렇게 공포영화 속 귀신 보듯이 보지 않아도 괜찮은데요.
“아, 안녕하세요, 아가씨. 죄송합니다. 저희의 소리가 커서…….”
“아뇨, 아뇨. 그건 괜찮고.”
나는 그저 손을 내저었을 뿐인데 그녀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입을 다물었다.
그중에 한 명은 옆 사람을 툭 건드리며 입 모양으로 무어라 중얼거렸다. 고개를 숙여서 보이지 않을 거라 생각한 모양인데…… 봐, 내 말 맞잖아. 이런 뉘앙스인 것 같다.
“음, 배가 고픈데.”
“당장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어이쿠. 이렇게 우렁차지 않아도 괜찮은데. 도리어 눈을 껌뻑이며 놀랐다. 하나 창백한 얼굴을 한 그녀들을 보며 티를 낼 수는 없었다.
“다시, 다시 모시러 오겠습니다.”
나는 허둥지둥 돌아가는 그녀들을 보며 뺨을 긁적였다.
“이런 걸 보면…….”
악당 저택은 악당 저택이네.
사실 어제의 체이서 모습만 보고 착각할 뻔했지 뭔가.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고 말이다.
문을 닫고 들어간 나는 방을 쭉 살피다 한 곳으로 쭉 걸어갔다.
잠시 후, 내 손에 든 건 양피지와 펜이었다. 다행히 펜은 새것인 듯 언제라도 쓸 수 있게 촉이 잉크로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어제 못한 걸 해 봐야지.”
어제는 연장된 수감생활로 몸도 피로하고 체이서 등장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이 겹쳤다. 몸이 좀 가벼워진 지금, 내가 하려는 것은 간단히 일들을 적어 보는 것이었다.
줄곧 책, 주연, 악당……. 염불 외듯이 반추하곤 했지만 정확하게 내용을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저 남자주인공이 감옥에 갇혀 있었지, 악당이 라이벌이고 서브남이었지, 두루뭉술하게 좋은 게 좋은 거려니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태풍의 눈으로 들어오게 되어 버린 이상 어떡하겠나. 기억을 돌이켜서라도 내가 잘살 길을 찾아봐야지.
“……여동생이 있다는 건 알긴 했는데 말이지.”
그게 난 줄 어떻게 알았겠어.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탁상과 소파가 있는 쪽으로 걸었다. 그러다 문득 걸음을 멈췄다.
“카펫?”
내 방이 크다 보니 별의별 게 다 있겠다고는 싶었다. 근데 무슨 카펫을 벽에다가 걸어 놓은 거지, 싶어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춘 거였다.
바닥에 이미 두툼한 카펫이 있는데 말이지. 유심히 보던 나는 이것이 카펫이 아니라 천 장식이란 걸 알았다.
어휴, 나도 참 무식하기도 하지. 한번 웃고 넘기려는데 다시 고개를 돌렸다.
“어라?”
장식에 새겨진 것은 기하학적인 도형이었다. 그런데 이 도형이 낯설지 않았다.
어디서 봤더라, 입술을 탁탁 두드리며 생각에 빠졌다. 그러다 손이 멈칫했다.
“……지하 감방에서 본 거잖아?”
커다란 원이 겹치고 다시 그 안에 작은 원들, 가장 안쪽에 있는 원에는 다이아몬드 혹은 마름모꼴 도형의 배치까지. 상당히 흡사했다. 그것도 지하 감방 벽에 구멍이 뚫리고 그 안에서 본 것과 말이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천 장식 근처로 더욱더 다가갔다.
감방에서 본 것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는 여러 송이의 장미가 그려져 있었지.
“여긴 검은 장미뿐이네.”
다이아몬드 안쪽에는 흑장미가 새겨져 있었다. 동시에 새의 날개로 보이는 것이 장미를 감싸듯 펼쳐져, 짐승의 이빨과 발톱이 가시처럼 줄과 함께 엮여 있었다.
으음, 이게 과연 우연일까.
아니면 내가 이 세계에 대해 모르는 거라서, 흔한 건데 이제야 본 걸까.
장식의 재질이 신기해서 잡아당겼는데, 웬걸 이게 생각보다 재질이 하늘하늘했던 모양이다.
부우욱!
찢어져 버렸다.
“허어…… 별로 힘주지도 않았는데.”
나는 나풀나풀 흩날리는 천과 찢어진 부분 뒤로 드러난 벽을 보다 난감한 웃음을 흘렸다.
어, 어떡하지…….
‘……혹시 이런 걸로 쫓아내진 않겠지.’
아니, 쫓아내도 괜찮긴 한데. 쫓아낼 때 약간의 돈만 같이 달라고 하면 구질구질하려나.
“구질구질하지.”
나는 자기파악을 잘했다. 일단 찢어진 조각을 돌돌 접고, 어떡해야 하나 다시 벽 쪽을 보았다.
어라라. 곧 손을 움직여 너덜너덜한 부분들도 걷어냈다.
“어라. 벽에 똑같은 문양이 있었잖아?”
천 장식에 수놓아져 있던 기하학적인 모양이 벽 쪽에도 새겨져 있었다.
천과 다른 것은 문양이 반으로 조각나 있다는 점이었다. 반 토막뿐이었다.
거기다 천에는 흑장미만 있었다면 이쪽에는 감방에서처럼 여러 장미가 보였다. 거기다가 짐승인지 모를 동물의 형상도 감방에 있던 것과 똑같다. 반은 잘렸지만.
음, 어디 보자. 저 빈자리가 붉은 장미랑 흰 장미가 있던 자리인가?
하필이면 남주와 여주의 상징만 없다니 어쩐지 좀 찝찝하게 느껴졌다. 벽을 유심히 훑어보는데, 반 토막 난 문양 옆으로 조그만 기호가 보였다.
“기호? 아니, 그림 같은데…….”
문 그림이었다. 그것도 꽉 닫힌 문. 문 옆에 또 다른 문이 그려져 있었다. 이쪽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는데, 열린 쪽으로 화살표 모양이 같이 그려져 있었다.
“별걸 다 보네.”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눈을 떼어내지 못했다.
하필이면 악당 집안에 새겨진 문양, 빈자리는 리케도르안과 여주인공 언니의 자리라니.
아, 그렇군요. 평소처럼 무심하게 정신을 놓을 수가 없었다.
찬찬히 보던 나는 그길로 발걸음을 박찼다. 이렇게 귀찮게 움직이고 싶지는 않았지만. 처지가 바뀌었으니.
문을 열었을 때 복도는 조용했다. 지나가는 이조차도 없었다.
여기에 이상함을 느낄 겨를도 없이 나는 바로 옆의 방문을 열었다. 설마, 설마 싶었지만. 혹시나 싶은 것이 있을 때 지나치지는 말자는 주의였으니까.
옆방은 텅 비어 있었다. 내 방과 비슷한 구조였지만 침대를 제외하면 가구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침대랑 책장 위치는 비슷한데. 그럼.”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이 방에도 천 장식이 달려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이 천 장식은 아무런 문양이 없고 붉은색 민무늬였다. 나는 지체 없이 다가가 천을 홱 들어 올렸다.
역시나.
설마 하던 가정이 맞았던 모양이다.
드러난 벽에는 나머지 반쪽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허어, 진짜 정답이었네.”
나는 찾은 것이 신기한 한편 어처구니없는 기분이 들었다.
이 무슨.
……방 탈출도 아니고. 진짜 웬 방 탈출이야.
내 방에 그려진 문 그림은 내 방문과 옆 방문을 가리켰다. 옆방의 문에 화살표가 그려져 있었으니 들어가 보라는 거겠고.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설마하니 이게 맞을 줄은 몰랐지만.
그리고 이 방에는 또 다른 기호,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내 방의 문 그림도 그렇고 이것도 그렇고, 벽에 새겨진 것이 아니라 누군가 칼로 긁어 장난쳐 둔 것 같았다.
누가 이렇게 그려 놨을까. 이런 식으로 하나씩 찾아가면 뭐가 있는 거지?
나는 벽을 바라보며 눈을 좁혔다.
“근데, 빨간 장미 옆에 다른 게 없네. 동물이었나.”
감방에 있던 그림은 붉은 장미 옆에 묘한 생김새의 동물이 있었는데, 이 벽에는 붉은 장미뿐이었다.
흰 장미 옆에는 감방에서 보았던 것과 마찬가지의 장미를 안 듯이 웅크린 짐승이 옆에 있는데 말이다.
일단 나는 방으로 돌아왔다. 더는 움직였다간 눈에 띌 터였다.
그리고 나는 탁상 앞에 쪼그리고 앉아 양피지와 펜을 들고 하려던 일을 시작했다. 원작을 반추해 보는 일 말이다.
장미와 짐승들, 문양이 대체 무슨 연관 관계인지는 몰라도 일단 이것부터 해치우고 난 뒤에 해도 늦지 않을 거다.
“좋아, 시작이…….”
여주인공이 죄를 뒤집어쓰고 캄브라캄 감방에 가는 것에서부터였지. 펜이 양피지를 꾹 눌렀다. 잠시 방 안에 양피지를 긁는 소리만 들렸다. 이내 펜이 멈췄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이거 19금 피폐 삼각 로맨스인데. 꾸금을 빼면 무슨 내용이 있다고.”
씬 몇 회, 감방에서 함, 침대에서 함, 잔디밭에서 함, 그리고 세 명이서……. 까지를 쓰다 말고 일명 ‘현타’란 놈이 찾아왔다.
“아니, 아니. 일단 감방에서 나온 뒤를 생각해 보자.”
나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잣잣, 씬이란 글자에 줄을 긋고, 차분하게 내용을 되새겼다.
이번에는 점점 정상적인 내용이 줄을 이었다.
그렇게 손이 쭉쭉 적어 내려갈수록 내 표정이 점차 묘해졌다.
“……이게 야해서 19금만은 아니었구나.”
나는 내가 적은 글자들을 쭉 읽어 내렸다.
-감방에서 여주 손잡은 죄수 죽음 (손목 잘림)
-출소 후 여주 마차를 태우고 인신매매 시도한 사람 끌려가 사망
-여주와 눈이 마주친 사람 탄광으로 끌려감
-여주의 뒤를 캐내려던 기자, 갑자기 불구
-사교계에서 여주에게 집적거린 귀족 남자 의문의 사망…….
……
……
-원한을 품은 이들이 악당의 집을 폭탄으로 터트림
-감금된 여주 탈출…….
여기까지 읽는 순간 나는 숨을 꼴깍 삼켰다. 결말까지 쓰긴 했으나, 더 읽을 필요도 없었다. 생각나는 것도 있었지만 더 쓸 필요 없었다.
이미 판단을 굳혔으니까.
잣됐네.
어쩌다 보니 다시 쓴 글들이 죄다 악당의 기행이었다.
전부가 체이서는 아니고 르나그의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체이서의 짓이란 건 변함없었다.
하기야 이 소설이 그렇게 굴러갔었지? 괜히 삼각 피폐 로맨스가 아니라고…….
앞으로 감금당할 여주 언니를 심드렁하게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내 모가지가 먼저 날아가겠는데?”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고 진짜였다. 뒤의 내용은 체이서가 전반부에 뿌려 놓은 업보의 대가를 받는 거였고. 그는 이를 혼자 겪는 게 아니라 이 저택이 통째로 날아가는 보복을 겪었다.
마지막까지 무사하단 점에서 참 대단한 최종 흑막이셨지만. 과연 나 또한 그러할까?
내가 생각했을 때, 나를 재질로 따지자면 한지와 같았다. 금방 찢어진다고. 오빠인 그놈은 재질로 치면 잘리지 않는 강철, 미친 재질. 그냥 재질 미쳤어요. 싶은 인간이었다.
지금 체이서 그놈이 왜 다정하고, 왜 이렇게 부드럽냐, 네가 비단이냐, 이런 고찰을 할 때가 아니었다.
나는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좋아.”
양피지를 산뜻하게 접고 물이 찰랑이는 대야에 담았다. 잉크가 살살 풀리며 물이 검게 물들었다.
나는 그것을 바라보며 고개를 들었다.
“튀자.”
내 목소리는, 산뜻하기 그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