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간이 다시 흘렀다.
그 누구도 잡을 수 없는 것이 계절과 시간이라 하더니, 순식간에 흘러간 시간 끝에 대망의 날이 밝았다.
바로 내 출소날이었다.
-놀랍네요.
며칠 만에 다시 연락이 온 제이르는 놀람을 숨기지 못했다.
-이런 큰 소식을 전해 주시지 않고서요. 이런 친절은 전혀 반갑지 않은데 말이지요.
“에이, 당신에게 말할 의무는 없잖아요?”
아무도 없는 방 안을 확인하고는 마음 편히 답변했다. 현재 간수는 아직 오지 않은 상황이었고, 나는 이미 여러 경험으로 감방이 방음이 잘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적어도 이 정도 속삭이는 음성이 들리지 않음을 안달까.
이미 제이르에겐 리케도르안이 원래 상태로 돌아왔음을 알린 뒤였다. 그는 안심하고 이렇게 나를 놀리는 것이다.
-출소는 중요한 소식이지 않습니까. 의리가 없습니다. 아가씨.
왜 내 출소 사실을 알리지 않았냐면서, 말이다.
“이상하네, 왜 토라지신 것 같죠?”
그쪽과 나한테 지킬 의리가 어디 있다고. 나는 웃음을 삼켰다.
-왜 토라지지 않을 거라 생각하시죠?
“한밤중에 가녀린 죄수를 밖으로 나가게 한 것이 누군데요?”
-……세상에! 그런 파렴치한이 있다니 놀랍군요.
“태세 전환하시긴.”
나는 삐딱하게 미소하며 팔찌를 가볍게 흔들었다.
“내가 출소하는 건 어떻게 알았나, 궁금하긴 한데 입만 아프니까 묻지 않을게요.”
-섭섭하네요. 열심히 설명드릴 자신 있는데 말이죠.
자신은 무슨. 간수 중에 누군가를 포섭했겠지. 아니면 처음부터 헤르님의 사람이었거나.
-신기한 건 아가씨의 가문을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는 거지만.
봐봐. 마지막이라고 이제 숨기지도 않네. 나는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팔찌를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팔찌 하니까 생각났다.
“저 궁금한 게 있는데 진짜로 팔찌에 다른 마법은 안 걸었어요?”
-예. 안 걸었대도요? 아까도 물으시더니 무슨 일인데, 자꾸 물으십니까? 고장이라도 났답니까.
“뭐…… 그런 건 아니고요.”
감방에 있던 구멍에 대해서 팔찌가 일으켰던 일에 대해서 물으려 했는데, 제이르는 한사코 다른 마법을 걸진 않았다고 했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근데 고장도 나요, 이거? 지금 불량품 준 거야?”
-아니요! 그건 아닙니다. 음…… 다만 마법 물품이다 보니 강력한 마력과 부딪치면 오류를 일으키기도 하지요. 아가씨가 그걸로 상급 기사와 싸우기라도 한 게 아니면 그럴 일은 없었을 겁니다.
“강력한 마력…….”
-예. 대표적인 예로 이 감방의 총관리인 같은 괴물이 있지요.
“가만 보면 당신은 총관리인을 참 무서워하는데, 무슨 능력이 있다고 그래요?”
-아가씨는 모르실 겁니다. 저같이 마력을 다루는 사람에게는 쥐약인 능력입니다. 공간을 지배하는 인간이거든요…….
“공간?”
-예, 항상 쓸 수 없어서 그렇지, 그 사람은 이 감옥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 수 있습니다. 마법을 쓴 이를 볼 수도 있고요.
“아하.”
강하다 이 말인가. 뭐 그렇지. 나도 투명 마법을 건 채로 들킨 적 있지 않은가. 르나그 정도 되면 강하다 말할 만했다.
최고 악당의 오른팔인데 아무렴 그렇지 않겠나.
나는 금방 지하 감방의 일을 잊었다. 출소하는 마당에 뭐.
-그래서 아가씨는 어떤 가문의 영애이신 건지요?
“알아서 뭐 하시려고요? 피차 볼일 없는 사이일 텐데.”
-에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나는 옷을 정리하다 말고 툭 던졌다.
“대애단한 가문이에요. 됐죠?”
이름이 뭐였더라, 아, 아이씨? 아닌데. 남작 아저씨가 얘기해 줬는데 잊어먹었다. 분명 동쪽의 대백작 가문이었지.
이름을 외우는 한편 동시에 찝찝함이 들었지만 그러려니 했다.
-나 참, 그런 사실이야 이미 알았습니다. 저희가 알아내지 못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라고요.
“네네. 대단하시네요.”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하는 탓에 개인적인 호기심은 풀지 못하게 됐지만요.
그러니까 내 가문이 궁금한 게 개인적인 호기심이셨다? 나는 헛웃음을 토했다.
“그 관심 오늘부로 잊어 주시고요.”
난 이렇게 말하고는 팔찌를 톡 두드렸다.
“근데, 이 팔찌는 어떡하나요? 돌려줄 시간이 없을 것 같은데.”
그랬다. 리케도르안의 간병과 내 출소까지 기간은 극단적으로 짧았기에 제이르와 접선할 시간이 없었다. 비록 마법이나 이 세계에 대해 문외한이지만 이 정도 되는 물건이 평범한 물건은 아님은 알고 있다.
-아, 그냥 가지십시오.
그런데 걱정이 무색하게도 제이르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가지셔도 됩니다.
“……그냥 준다고요? 그러기엔 너무 귀한 것 같은데?”
-그만큼 귀한 일을 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생명을 걸고 도와주셨고요. 충분히 가질 자격 있으십니다.
생명, 그의 말에 나는 내가 한 일을 반추했다. 하기야 옳은 말이다. 만약 그저 그런 귀족 죄수가 내가 했던 일을 했다면…….
그날 밤 복도에서 르나그를 만난 순간 이 세상 사람이 아니지 않았을까. 그리 생각하니 오싹……하지는 않고 그러려니 했다. 일어난 일은 아니니까. 지나간 일에 만약을 따질 필요가 있나.
“뭐. 주시면 감사히 받고요.”
이 팔찌에는 아직 제이르가 부여한 마법이 남아 있었다. 팔찌는 두 개였으니 제이르에게 통신을 걸 수 있는 것과 여러 마법이 걸린 것, 이렇게 두 개가 생긴 셈이다. 앞으로 살면서 어떤 일을 겪을지 모르니, 나로선 나쁜 일은 아니었다.
-네. 즐겁게 사용하시길. 저랑 연락할 수 있는 것도 버리지 마시고요.
“어떻게 아셨대. 버리려 했는데.”
-농담이시죠?
팔찌로 웃음소리가 넘어왔다.
어쩌지. 농담 아닌데.
-가지고 계셔 주시지요. 언제 한번 제가 아가씨께 도움을 드릴 수 있을지 모를 일 아닙니까?
“……일정 거리에 있어야 통한다면서 무슨.”
나는 그렇게 투덜거리긴 했지만 팔찌를 두 개 다 챙겼다. 뭐. 살다 보면 우연찮게 한 번은 원작의 뛰어난 마법사 조연의 도움을 받을 일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면서.
물론 없을 확률이 크겠지만. 나는 만약의 확률을 놓치지 않는 쪽이었다. 여기서 눈을 뜬 것만 해도 누구도 생각하기 힘든 일 아닌가.
“아무튼 잘 지내세요.”
미운 정도 정이라면 제이르와는 단단히 들었을 것이다. 애틋하단 소리는 아니고, 지나고 나면 이런 양심 없는 부탁을 한 인간이 있었지, 생각나는 정도?
-와, 성의 없는 인사 감사합니다.
제이르 또한 내 인사를 가벼이 받아들였다.
-아가씨께는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도 나처럼 가볍게만 생각하는 줄 알았는데, 의외로 이어서 꽤 진지한 목소리가 넘어와서 놀랐다. 갑자기 왜 이런대.
낯간지럽게.
-아가씨 덕분에 제가 생각을 잘못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리케도르안을 아프게 하자고 한 거요?”
-예.
그때 한 번 뭐라고 했다고, 깨달은 게 많은 모양이었다. 앞으로 리케도르안의 미래를 생각하면 나쁜 일은 아니었다.
“잘됐네요.”
-네. 아가씨에게 말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그럼 하지 마세요.”
-……나가실 분이니 해도 좋지 않을까 싶네요. 다 듣지도 않고 매정하시긴. 제가 제 사람을 통해 들을 소식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죠?”
그게 나랑 관련 있는 일인가? 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어쩌면 귀한 분이 다신 이곳에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도 이야기 드린 적 있지요.
제이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아무래도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헤르님 대공이 앞으로도 이 감방에 온다는 얘기였다. 아무리 출소하는 마당이라지만 간과할 수 없는 얘기였다.
“그래서, 그냥 두겠다고요?”
-아니요.
그가 단호히 답변했다.
-그동안 저희가 소극적으로 움직였던 것은 공자님이 각성할 때까지만 기다리면 된다고 판단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잘못된 판단이었음을 깨달았지요. 그래서 방향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그의 말이 이어질수록 살살 흘려듣던 나는 점차 자세를 바꿨다.
-앞으로 저희는 그분을 외부의 폭력으로부터 최대한 보호할 것입니다.
외부의 폭력, 단연 친부인 헤르님 대공의 폭력과 학대일 것이었다.
“방법이 있단 말인가요?”
-예. 완전하지는 않을지도 모르지만……. 노력할 겁니다.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그게 무엇이냐, 물으려 했다. 그러나 입술을 열지 않았다. 마치 눈앞에 선이 그어진 것처럼.
나는 깨달았다. 그래 이 선을 넘지 말고 여기까지만.
“하나만 물어볼게요, 혹시 리케도르안이…….”
나는 시선을 내렸다. 차가운 돌바닥, 마지막으로 보는 것일지도 모를 감방 바닥이었다.
“1년 뒤에 출소할 수 있나요? 내게 1년 뒤에 출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어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제이르의 대답은 단호했고, 안타까움이 스민 음성이었다.
-어떤 상황에서 나온 말인지 압니다. 하지만 그건 지켜지지 않을 겁니다. 대공, 그 귀한 분께서는 변덕스러우시니까요.
그는 담담히 설명을 이어갔다.
-적어도 공자님은, 완전히 각성하실 때까지는 절대 밖으로 나오실 수…… 없을 겁니다.
나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떴다. 그래, 이미 알고 있던 사실 아닌가? 나는 리케도르안을 흔들어 놓았으나 책임질 자신은 없는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내가 한 일은 그저, 최소한의 양심으로 도의로 아량으로. 사막의 표류자에게 죽지 않을 만큼의 물을 준 것밖에 되지 않았다.
각성.
그건 리케도르안이 부친이 제 목에 건 구속구를 풀었을 때야 가능한 것이었다.
“그렇구나. 대답 고마워요.”
-혹시…….
제이르는 내게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다. 그러나 내 단호한 인사 때문인지, 곧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고 마무리했다.
-건강히 지내세요.
그렇게 제이르와의 대화가 끝이 났다. 보석의 빛이 꺼지고, 나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응시했다.
‘이제 이 천장도 마지막이구나.’
난 꽤 오랫동안 몰랐지만 이 나라는 여름과 겨울이 정반대였다.
다시 말해 열두 달이 여름으로 시작해 여름으로 끝난다는 소리였다. 곧 한 해가 지날 터였다. 그리고 다시 새해가 밝을 거고. 그러고 나서 다시 3년이 지나면…….
원작이 시작되고, 리케도르안이 밖으로 나오겠지.
생각보다 까마득하구나.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더는 생각하지 않아도 될 일이다.
그렇기에 나는 마지막으로 리케도르안을 찾지 않았다.
우리의 작별 인사는 이미 끝났으니까.
“그나저나 간수가 늦네.”
잠시 상부에 다녀오겠다더니 금방 온다던 사람이 한참이나 늦었다. 제이르와 오래 대화를 나눴음에도 나타나지 않은 걸 보면 중간에 문제라도 생겼나 싶고.
“죄수라도 하나 탈출했나.”
나는 심드렁히 중얼거리며 책상을 응시했다. 책상 위, 나무 상자 안쪽엔 내 짐이 들어 있었다.
대부분이 이곳에 있을 때 오빠와 주고받은 편지라거나, 이아나가 줄곧 지니고 있던 낡은 회중시계, 그리고 오빠가 선물한 보석 꽃 따위였다.
순 오빠랑 관련된 물건뿐이네.
그건 당연한가. 감방에서는 주는 밥 먹고 주는 옷만 입으면 되니까.
그렇게 기지개를 쭉 켤 즈음이었다.
드르르륵.
감방 문에 달린 창문이 열렸다. 죄수가 얼굴만 보일 수 있게 창살이 달린 창문이었다.
“이아나!”
창살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줄곧 내 감방을 담당했던 간수였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인지 그가 다급한 표정을 하고 있는 탓이다.
“무슨 일이에요?”
“저 그게…….”
본래 이렇게 뜸을 들이는 사람이 아닌데. 간수는 뜻밖에 우물쭈물한 얼굴로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했다.
“……오늘 출소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네?”
나는 입을 벌렸다. 아니, 어째서?
“왜요?”
“그게, 황제 폐하의 명이십니다.”
황제 폐하? 너무나 뜬금없는 인물의 등장에 나는 얼떨떨하게 눈을 끔뻑였다. 아니, 그 황제님이 여기서 왜 나와.
“200년 전, 대량 학살마 로웰턴을 잡아들인 날을 기념하여, 올해는 특별 기간 동안 모든 감옥의 사면을 금하겠다고……. 명하셨기에.”
“사면 금지요?”
보아하니 학살마면 그 시대의 매우 나쁜 대악당쯤 될 성싶었다. 아니, 광복절 특사면 특사지, 악당 놈을 잡아들였다고 그걸 기념해서 아무 죄수도 못 나가게 해?
어처구니가 없었다. 누가 날 위해서 몰래카메라를 했다고 해도 이렇게 황당하진 않을 터다.
“총관리장께서도 사죄의 말을 전하고 싶으시다고…….”
그러나 어쩌겠나. 르나그까지 언급되며 안 된다고 한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것을. 나는 생각보다 빠르게 수긍했다.
“그래요. 어쩔 수 없죠.”
어차피 눈 뜨는 순간부터 오래 살아온 곳이니 좀 더 머물러도 달라질 건 없었다.
“기간이 끝나는 동시에 바로 나가실 수 있을 겁니다. 이건 약조 드린다고 하셨습니다.”
“알았어요. 근데 그 기간이 얼마나 되는데요?”
“……3개월입니다.”
“으음, ……그래요.”
간수는 르나그가 바빠 제가 대신 전하게 되었다는 말을 함께 했다. 아무래도 그는 이 명으로 지금 황실로 불려 갔다는 모양이다.
나는 편하게 받아들이고는 그대로 침대에 앉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짐을 풀었다.
그 길로 시간이 흘렀다.
나는 긴 3개월의 시간 동안 감방에서 거의 나가지 않았다. 밥이야 식당으로 가서 먹었지만 응접실이나 산책 같은 것을 거의 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리고 리케도르안의 감방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리케도르안의 감방에 가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르나그의 집무실에도 가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르나그와의 약조는 리케도르안을 만나는 시간만큼 그와 보내는 것이었으니까.
별다른 이유는 없었고, 그냥 그러고 싶었다.
사람이 이유 없이 감성적이 될 때가 있는 법이지……는 사실 아니고. 출소가 확정된 이상 감방에 있는 주연들과 더는 가까이 있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이따금 제이르가 통신을 걸기도 했으나 무시했다.
한번은 내가 의기소침할까 염려한 간수들이 리케도르안에게 가 보겠냐고 물었지만 웃으며 거절했다.
가끔 르나그가 간수를 통해 나를 부르기도 했지만 내가 거절했고,
혹시 르나그 쪽에서 찾아올까 염려했지만 거절했다고 해서 찾아오지는 않았다. 이상한 지점에서 매너가 좋은 남자였다.
그동안에 나는 이전엔 시간이 짧아서 미처 하지 못했던, 샐리나 팔라디스 남작 아저씨 등등 친분이 있던 이들과 작별 인사도 나눴다.
“오, 이아나. 밖에 나가서도 우리의 인연을 잊으면 안 되네. 알겠나?”
“물론이죠.”
아저씨의 사기 경험으로 똘똘 뭉친 연은 아마 끊어지지 않을 거예요, 괜스레 장난스럽게 대답하는 동안 샐리가 코를 훌쩍였다.
“큽, 이, 이아나. 내가 꼭, 동쪽, 아, 아인테에, 놀러, 갈 흐어엉엉.”
“응, 놀러 와요. 언제든 환영이야.”
나는 웃으며 샐리를 토닥였다. 그러고 나서 응접실도 가지 않으니 남은 시간은 자연스레 침묵이나 독서 명상이 주를 이뤘다.
홀로 조용히 보내는 시간도 그다지 싫어하지는 않아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출소까지 남은 시간을 꼬박 채운 건 의외로 오빠와의 편지였다.
「……미안해.」
그는 제 탓이 아닌데도 내게 미안해했다. 황제의 변덕이 그의 잘못이겠나 싶었다.
「괜찮아.」
나는 짧게 답변했다.
「이렇게 훼방을 놓을 줄이야, 황제 폐하를 어떻게 해 볼 걸 그랬어.」
가끔은 무리한 위로에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황제를 어찌해서 어쩌려고. 이런 허세도 부리는 오빠구나 싶었다.
「……네가 없는 하루가 길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까? 난, 쭉 기다리기만 하는 것 같아. 그래도 괜찮아.
너니까.」
또 가끔은 어리광을 부리기도 했다. 이런 날에는 유려한 필체를 두고 지그시 응시하기도 했다.
이 남매는 얼마나 사이가 좋았던 걸까? 남들보다 꽤 다정했던 건지. 이 세계는 이게 당연한 건지…….
주변의 사례를 볼까? 샐리가 있지. 동생이 죄를 짓고는 샐리에게 뒤집어씌워 보내 버린……. 음. 죄수 동료들은 보통의 예시가 안 될 것 같다. 나는 가늠하기를 포기했다.
그리고 마침내 다시 날이 다가왔다.
두 번째로 다가온 출소날이었다.
“으으, 이날이 오긴 오는구나.”
다행히 두 번째 출소날에서는 갑자기 달려오는 간수는 없었다. 대신 밝은 표정의 간수가 오늘은 정말로 출소할 수 있다고 알려 주고 갔다. 그도 나름 정이 들었던 건지, 줄곧 감방에만 콕 박혀 있던 나를 염려하던 눈치였다.
착한 사람이네.
나는 절차를 마치고 돌아온 간수에게 말했다.
“있잖아요, 잠깐 산책하고 와도 되나요?”
이미 서류상으로는 거의 절차가 완료되었던지라 내 청은 쉽게 받아들여졌다.
나는 감사 인사를 전하고 익숙한 길을 걸었다. 내가 가는 방향엔 상급 간수가 서 있었지만 그는 흔쾌히 자리를 비켜 주었다.
“출소하신다면서요? 축하드립니다.”
“네, 고마워요. 잘 지내세요.”
내가 생긋 웃자, 상급 간수는 쑥스러운 미소를 보였다. 마지막이니 딱딱한 얼굴을 풀고 진짜 표정을 보여 주는구나 싶었다.
나는 그대로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 소리도 마지막이라 그런지 유쾌하고도 아쉽게 들린다. 곧 익숙한 지하 창살을 마주했다.
철그렁.
3개월씩이나 듣지 못했음에도 거짓말처럼 익숙하게 느껴지는 쇠사슬 소리가 들렸다. 나는 창살을 넘어가는 대신 창살 바깥에서 가장 안쪽으로 들어갔다. 내가 기억하는 쇠사슬 길이가 맞다면…….
“리케도르안.”
철컹! 철컹철컹, 철그렁!
그래. 여기서는 그도 창살에 닿을 수 있었다. 예상대로 창살을 잡는 손을 보며 나는 보일 듯 말 듯 웃었다.
“오늘은 들어가지 못해서 미안해.”
머쓱하기도 했고,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빛이 희미해 잘 보이지 않는 것에 감사했다.
“낑, 끼이잉, 낑! 끄응…….”
그리고 이 순간 그가 어떤 모습도 아닌, 짐승의 모습인 것에도 감사를 느꼈다.
“이건 타이밍이 좋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끄응, 끙, 끙. 낑!”
“응, 나야. 잘 지냈지?”
나는 그대로 쪼그려 앉았다. 이 정도 거리가 아마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의 거리였다. 딱 이 거리에서 처음 그를 보았다.
“오늘은 정말로 마지막 인사를 하러 왔어.”
짐승일 때도 생각하는 머리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그래서인지 낑낑 우는 그의 목소리가 구슬프게 커졌다.
상급 간수에게 전해 들었다. 리케도르안도 내가 출소하지 않고 3개월을 더 머물렀음을 알고 있다고, 간수가 말해 주었다고.
당신은 오지 않는 나를 두고 어떻게 여겼을까. 난 묻지 않을 생각이다.
“언제, 어떤 일이 있든 밥 잘 먹어. 튼튼해져야지.”
나는 그의 손을 살짝 쥐었다 놓았다. 짐승 버전의 그는 애가 타는 듯 놓친 내 손을 보며 더욱 슬프게 울었다.
“크르르, 왕 왕왕! 끼잉, 끼이잉…….”
“마지막이니만큼 사람의 말을 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이쪽이 나은 것 같기도 해요.”
사람의 말을 한들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거든.
“마지막으로 충고할게요.”
내게는 거창한 의지가 없다. 당신의 구속구를 어떻게 해 보겠다거나, 당신의 삶을 더 좋게 바꿔 보겠다거나.
나는 악당처럼 나쁘지 않았고, 그렇다고 성자처럼 착하지도 않았다.
이 적당한 정이 당신에게 독이 될 것임을 알면서 방관했다.
그렇지만 이를 사과하지 않음으로써 내 마음 편하고자 하는 대신 속죄할 테니까.
“좋은 기억만 남겨 두세요. 이별은 잊어요.”
다신 만나지 않을 테니까.
나는 웃으며 그의 뺨을 부드러이 감싸 쥐었다. 짐승이 된 남자의 뺨은 눈물로 엉망이었다.
“다가서는 사람, 함부로 믿지 말아요.”
봐, 정을 주었더니 이렇게 도망가잖아.
“얕게 주는 정을 믿지 말아요. 나처럼 이기적이니까.”
나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모든 걸 주지 않으면, 당신 것을 주지 말아요. 되도록 당신을 이렇게 가두고 아프게 한 사람을 용서하지 말고요.”
당신에게 모든 것을 내줄 여주인공만을 사랑하며, 당신을 이렇게 만든 부친을 용서하지 않으면 좋겠다.
책 속에서 붉은 장미는, 헤르님은 정의를 수호했다. 붉은 장미는 열정을 상징했고, 리케도르안의 시리고도 푸른 눈동자는 정의와 기개를 상징했다고.
하나 타인에게 정의롭던 부친이 그에게 정의롭지 못했는데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정의로운 것도 좋지만, 그게 어려울 땐 차라리 악당이 되는 것도 좋겠네요.”
그것이 어려울 거란 걸 알면서도 나는 조언했다.
뭐. 그렇게 된다면 좋은 거고 아니더라도 그가 한 번쯤 다시 생각해 보면 좋은 거지.
“울지 말아요.”
나는 눈물범벅이 된 눈가를 엄지로 살살 훔쳐냈다.
“아르르르, 왕, 끼잉, 끄응, 끙, 끙! 끄으으…….”
거친 손이 나를 잡아채며 마구 고개를 내저었다. 끙끙, 이 순간조차 차마 사람의 울음소리도 내지 못한 채로.
이건 당신에게 다행인 일일까. 나에게 다행인 일일까.
나는 손을 빼내는 대신 그대로 그의 양 뺨을 잡고 고개를 숙였다.
그의 이마로 입술이 스쳤다.
“잘 지내요.”
제이르는 앞으로 헤르님 대공의 학대를 최대한 막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했다. 내가 한 것은 그 정도면 됐다.
“안녕.”
나는 쇠사슬이 닿는 범위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가 힘을 주기 전에 손을 빼내는 방법도.
그렇게 막 멀어지는 순간 손끝이 덥석 붙잡혔다.
……붙잡혀?
절대 닿을 수 없는 거리였다.
뚝뚝.
아니나 다를까, 붉은 것이 바닥으로 뚝 떨어져 검은 자국을 만들었다.
“리케도르안!”
“……약속.”
그의 손목이 찢어져 있었다. 억지로 늘린 쇠사슬 때문에 팔에 핏줄이 선 채 부들부들 떨린다.
찢어진 상처에서 피가 샘솟듯이 흘렀다. 상처를 보고 싶었지만, 겨우 잡힌 손끝이, 손끝을 잡은 손이 너무나도 간절해 보여 움직일 수 없었다.
“지킬 거죠……?”
빛이 희미한 자리였다.
나는 웅크리고 있는 리케도르안이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없었다. 이성이 있는 쪽인지, 아니면 성장한 쪽인지.
“약속, 지킬 거잖아요.”
갈라진 목소리가 어느 쪽으로도 짐작할 수 없게 했다.
“……상처 꼭 치료해요.”
나는 주머니를 뒤져 그의 손에 연고를 전해 주었다. 처음부터 이걸 주러 온 것이기도 했다.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럴게요. 나는 당신의 말을 잘 들었으니까.”
여전히 어느 쪽인지 알 수 없는 리케도르안은 그대로 내 손끝에 입을 맞추고는 천천히 놓아주었다. 아프지 않게 하겠다는 듯이.
그의 손끝이 파르라니 떨렸다.
나는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약속 지켜 줄 거죠, 이아나.”
그는 반복하듯 말했다. 절대 잊지 않게 하겠다는 듯이.
천천히 고개를 든 그의 시선이 올곧이 나를 꿰뚫었다. 투명한 바다처럼 푸르고 깊은 눈동자 앞에서 나는 눈을 깔았다가 다시 들어 올렸다.
“그래요.”
그러고는 활짝 웃었다.
“1년 뒤. 당신이 출소한다면.”
리케도르안의 얼굴이 꽃처럼 피어난다.
이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