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24/87)

***

나와 제이르의 생각은 멋지게 먹혔다. 헤르님 대공이 방문을 포기한 것이다.

물론 이 소식은 바로 전해 들은 것은 아니고 며칠 뒤 르나그가 소식을 전해 줬다. 그날 달려간 간수가 소식을 잘 전한 모양이었다.

그 후 상부에서 직접 리케도르안의 상태 확인을 거쳐 르나그에게까지 도달한 것이라고. 나는 그동안 옆에서 구경이나 하며 척척 해결되는 과정을 보았다. 분명 감방이고 간수들이기에 보통 군대나 기사들과는 다르지 않을까 생각했건만, 상상 이상으로 체계가 잘 잡혀 있다는 생각을 했다.

흡사 진짜 기사단처럼.

이를테면 이 감옥에서 누가 탈옥이라도 시도했다간 금방 잡혀 오겠단 생각을 했달까. 물론 그 누가 내가 될 일은 절대 없겠지만. 아무튼 간에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나는 착실하게 리케도르안을 간병했다.

이번에야말로 약조를 어기고 싶지 않았으니까.

또 마지막이기도 하고.

“흐으…….”

리케도르안은 정말이지 끙끙 앓았다. 열도 높고 몸도 여기저기 아픈지 연신 밭은 숨과 신음을 흘렸다. 간간이 보던 간수마저 심각해질 정도였다.

그리고 참다못한 내가 당장 제이르에게 연락해 따질 정도로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마침내 내 성질이 펑 터졌다.

“적당히 아프다면서요? 이게 뭐예요!”

리케도르안이 아픈 지 딱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분명 그렇게 설정했습니다.

제이르는 당혹스러운 음성으로 답변을 주었다. 그도 생각지 못했던 일인 듯 빠르게 항변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내게는 변명 아닌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래, 그렇게 설정했는데 왜 아직도 아파요? 분명 이틀 정도만 아플 거라고 했잖아요.”

-그게 조금 이상합니다. 분명 그렇게 만들었는데……. 다른 외부 요인이 끼어든 것 같습니다.

팔찌 너머의 제이르는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감방 내에서 여전히 모습이 바뀐다고 하셨지요?

“네, 맞아요.”

-그 변화 때문에 과부하가 온 것이 아닌가 합니다.

“……몸에 부담이 됐다는 말인가요?”

-예.

나는 황당함을 숨기지 않았다. 이게 무슨 소리야. 애초에 그 변화를 겪게 만든 사람이 제이르였다.

“애초에 그 변화를 겪게 한 게 당신 의견이었잖아요?”

-결과적으로 길게 보자면, 공자님의 몸에는 좋은 일입니다.

“허…… 단기적으로는 이렇게 계속 아프고요?”

조삼모사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나는 화를 꾹꾹 눌러 참았다.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 이렇게 화내 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당신도 방법이 없다, 이거죠?”

-예, 시간이 지나는 수밖에 없습니다. 저건 공자님이 스스로의 힘에 적응하는 과정이니까요.

당신 순 돌팔이잖아. 이렇게 쏘아붙이려던 말이 쏙 들어갔다. 힘없이 말하는 제이르의 목소리는 괴로워하는 것처럼 들렸다.

-……아가씨께서 가진 약도 듣지 않는다고 했죠?

“네, 맞아요. 듣질 않더라고요.”

오빠가 보내 준 약은 진작 사용해 봤다. 감기약부터 몸살약, 진통제까지. 효과가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렇군요.

그가 침울하게 대답했다.

지금까지 리케도르안을 함부로 다룬다고 생각했는데, 애정이 없는 건 아니었나 보다.

“일단 특별한 일이 있으면 다시 연락할게요.”

-예, 이틀 뒤에나 연락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이틀 뒤요?”

-네.

제이르의 목소리가 살짝 낮아졌다.

-내일은 이곳에 있는 제 사람에게 무언갈 전달 받아야 해서 말입니다.

허. 이젠 내게 숨기지도 않는다. 명목상으론 본인도 죄수면서 말이다. 감방에서 참 바쁘시기도 하네. 나는 조소했다. 제이르의 사람이라면 리케도르안의 사람이기도 할 터 다시 말해 헤르님 측 사람이 이 감방에 꽤 많이 잠입해 있는 모양이었다.

이 무슨 땅따먹기도 아니고 말이지. 어쨌거나 나랑 상관없는 일이니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말았다.

“저 한 가지만 물어도 돼요?”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든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물었다.

“이렇게까지 리케도르안을 돕는 이유가 뭐예요?”

-예?

그냥 궁금했다. 원작이 시작하기 전, 지금의 리케도르안은 당장 대공가 안에서 아무 힘도 없는 아이이자 부친에게 학대받는 사람일 뿐이었다.

실제로 헤르님 대공도 죽기 전까지 리케도르안을 후계자로 생각하지 않았고, 방계를 데려왔었다는 구절도 있었다. 훗날 리케도르안에게 쫓겨나긴 해도 말이다.

어쨌거나 아무런 권력도 힘도 없는 소년을 지금부터 따르는 이유가 있는 걸까. 그저 순수하게 궁금했다.

-의외의 질문이군요.

“그냥 궁금해서요. 별 뜻은 없고요. 사실 내가 본 리케도르안은 가끔 상처를 달고 나타나는 죄수일 뿐이라서 당신이 말한 고귀함도 난 잘 모르겠어요.”

-오해이십니다.

“글쎄, 나뭇가지를 물고 왕왕 짓는 공자님이 어디 있겠어요.”

-……크흠.

“그러니 궁금할 만하지 않아요?”

제이르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이내 나름대로 납득했는지 나직한 목소리가 넘어왔다.

-공자님께 도움을 받은 적 있습니다.

짧고 굵은 한마디였다. 그러나 진심을 담은 듯한 한마디는 그 한마디로도 충분한 힘이 있었다.

나는 더는 묻지 않고, ‘그렇군요’ 하고 말았다. 리케도르안이 어떤 도움을 주었는지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거기까지 파고들고 싶진 않았으니까.

-제 생각에 공자님의 상태는 하루만 더 두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5일까지는 걸리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기분이라고요?”

-마법사는 감이 좋아요, 아가씨.

금세 평소의 장난스럽고 여유로운 음성으로 돌아온 그였다.

반면에 난 영 미심쩍음을 숨기지 못했는데, 팔찌 너머에서 이를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진지하게 진짭니다, 하고 덧붙였다.

뭐. 그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알았어요, 그럼 이틀 뒤에 봐요.”

-예, 그때까지 공자님을 잘 부탁드립니다.

그는 장난기를 지우고 진중한 음성으로 부탁했다. 그리고 통화는 그길로 끝이 났다.

팔찌에서 손을 떼어낸 나는 천천히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눈앞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다행이네요.”

땀에 젖은 앞머리는 푹 가라앉아 있었지만 젖지 않은 부분은 솜털처럼 부드러웠다.

“당신을 이렇게 생각해 주는 사람이 있어서.”

뭐. 나중에야 원 없이 사랑받을 사람이지만 당장은 아니잖아. 이 어린 사람이 차가운 지하에 홀로 남겨진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아리단 말이지.

그의 머리칼을 잡고 끝을 휘휘 접었다.

어리다고 표현한 사람과 진하게 입을 맞춘 기억은 잠시 잊어두기로 했다. 그게 내 이성에 좋을 것 같다. 심장이 방망이질 치는 건 나로서도 곤란한 일이라.

“조금만 참아요.”

그의 눈꺼풀이 움찔했다. 붉은 입술 사이로 거친 숨이 튀어나왔다.

“흐으, 으…….”

“곧 행복해질 거예요.”

그가 손을 더듬었다. 꿈을 꾸는 걸까? 내 옷자락을 잡는 손가락을 떼어내고 손을 잡아 주었다.

꽈악.

꾹 쥐는 손이 제법 매서워, 아픔이 느껴졌지만, 그냥 두었다. 이렇게 손을 잡아 주는 사람도 있으면 좋겠지. 4년이 지날 때까지 당신 기억에 온기 하나 정도는 남아 있어도 좋지 않겠어.

나는 붙잡힌 채 그의 얼굴을 살살 훑다가 목에 걸린 구속구를 톡 두드렸다.

“이거, 얼른 풀어요.”

왜일까, 그 순간 그가 쥔 손에서 힘이 빠졌다. 살짝 놀라 그를 바라보면 색색 조금 안정된 숨을 뱉고 있었다.

잠에 빠진 걸까.

“여기 바닥은 너무 차갑단 말이지.”

사람이 머물기엔 정말 안 좋은 환경이다. 그것도 열여섯 한창 자랄 사람을 두기에는 더욱더.

“엉덩이가 시렵다고.”

냉골에 애 키우면 입 돌아간다는 말도 모르나. 나는 작게 투덜거렸다. 그러다 눈을 돌렸다. 내 한 손은 여전히 구속구를 만지고 있었다. ……이렇게 차갑고 무거운 걸 매달고 있는 건 어떤 기분이려나.

분명 좋지 않겠지.

잠든 리케도르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눈을 덮어 주었다. 지난번에 오빠가 이렇게 눈을 가렸을 때 안정감을 느꼈던 것이 떠올라서였다.

“이걸 풀면 더 행복해질 거예요.”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렇게 정이 들어 버렸으니까 기왕이면 행복해지세요. 덧붙이면서.

한순간 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린 것 같았지만 착각인 듯했다.

***

다음 날, 감방에 들어간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리케도르안이 멀쩡한 낯으로 나를 반겼기 때문이었다. 이뿐 아니라 상처 났던 곳까지 회복된 것을 보여 주며, 뛰어난 신체 능력을 증명하듯 자리에서 금방 일어나기까지 했다.

나는 그저 얼떨떨하게 쳐다보기만 했다. 아니, 어제까지 끙끙 앓던 사람이 저렇게 펄펄 뛰는데 황당하지 않을 수가 있겠냐고.

거기다 막 지하 수감실로 들어갔을 때의 그는 이성이 있는 버전이었다. 버전이라 하니 조금 이상하긴 한데, 무튼 볼을 살짝 붉히며 내게 인사했다.

“어, 어서 오세요.”

그러고는 슬쩍 옆으로 물러나 제가 앉았던 자리를 톡톡 두드렸다.

……앉으라는 건가?

그가 비킨 자리에는 담요가 깔려 있었다. 오래전에 내가 한스의 허락을 받고 넣어 준 것이었다.

아 저거 빨긴 해야 하는데 말이지.

“아, 앉으라는 거죠? 고마워요.”

리케도르안은 어쩐 일인지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보일 듯 말 듯 작게 끄덕였다.

“……네에.”

뭐지. 왜 이제 와 내외하는 걸까. 가끔 얼굴이 빨개지는 것이 완전히 열기가 가시지 않은 것도 같고. 아직 마법의 영향이 남아 있는 건가?

“저, 이마 좀 짚어도 되나요?”

“네? 느에, 네? 네?”

“……뭘 그렇게 놀라.”

나는 뒤로 멀찍이 물러난 그와 뻗은 내 손을 번갈아 보았다.

“싫으면 말고.”

나는 손을 휙휙 흔들고는 그대로 다시 가져왔다.

“빨리 돌아와요, 쇠사슬 때문에 아프겠다.”

나는 팽팽히 당겨진 쇠사슬을 톡톡 두드렸다. 리케도르안은 눈치를 보는가 싶더니 살금살금 다가왔다. 그러고는 한 세 뼘은 떨어진 곳에 슬금슬금 엉덩이를 붙이는 모습이 코미디였다.

흡사 삐지긴 했는데, 주인 곁은 떠나기 싫은 강아지를 보는 느낌이랄까. 그가 삐졌다는 건 아니지만. 나는 턱을 괴고 차차 빨개지는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왜 빨개져요? 내가 뭘 했다고.”

“네? 아, 그…….”

나는 고개를 슬그머니 기울였다.

“아아. 내가 그렇게 좋나?”

그 순간 나는 순식간에 빨개진 토마토를 목격했다. 그래, 토마토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아니면 붉은 동백꽃?

두 사람 다 말이 없어, 침묵이 흘렀다. 이 침묵이 조금만 더 지나고 리케도르안에게 이유를 물어볼 요량이었다.

왜 갑자기 나았는지, 몸은 이제 가벼운 건지, 아직 아픈 곳은 없는지.

왜, 전과 다르게 갑자기 이렇게까지 빨개지는 건지.

그러나 그에게 물어볼 순간은 찾아오지 않았다. 이 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엉뚱한 이가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왕!”

손님은 짐승 모드의 그였다. 오랜만에 짐승 쪽 모습. 나는 해맑게 짖는 그를 보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좋니?”

“왕, 왕왕!”

“아, 알았어. 쉬이. 잡아당기지 말아.”

나는 들고 있던 것과 눈을 끔뻑이는 그를 번갈아 보다가 이내 손에 든 리본을 휙 던졌다.

“물어 와.”

“왕왕!”

그가 신나게 달려가 리본을 물고 왔다. 물론 던진 건 쇠사슬이 닿을 범위로만 살짝 던졌다. 다치면 안 되니까.

다만, 이와 별개로 황당한 심정이 들었다.

“있잖아. ……넌 왜 ‘갖고 와’보다 ‘물어 와’를 좋아하는 거야?”

“왕?”

짐승 버전의 그는 던지고 물어오는 걸 그리 좋아하면서도 ‘가져와’라고 말하면 꿈쩍도 안 했다. 대체 어떤 미친놈이 이렇게 길을 들인 거야.

…이제 그만 인간의 존엄성을 갖추면 안되겠니, 응?

물론 이렇게 말해 봐야 소용없는 것을 아니, 입을 닫는 쪽을 택했다. 대신에 양손을 들어 내밀었다. 그대로 그의 양쪽 뺨을 붙잡고 쭉 늘렸다.

“……찹쌀떡 같네.”

“낑?”

그는 이제 짐승 모드여도 내게 이를 드러내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는 막 붙잡아 온 맹수 같더니만. 이젠 마당에 키우는 강아지와 다를 바가 없었다.

지금도 보라. 무구한 눈으로 나에게 붙잡은 채 고개를 갸웃할 뿐이다.

“이리 온.”

나는 그대로 쭉 늘렸던 손을 안쪽으로 밀었다. 절로 그의 붉은 입술이 붕어처럼 톡 튀어나왔다. 놀란 건지, 맑은 푸른색 눈동자가 깜빡 움직였다.

“나, 네가 아까 빨개진 이유 알아.”

“웡?”

이쪽 버전에게 이야기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지만, 이젠 알잖아. 각각이 서로를 기억한다는 걸.

솔직히 조금 전엔 생각하지 못했다. 갑자기 마구 빨개지는 얼굴을 보고 이상하다고만 여겼지. 아니, 기억하지 못했달까.

“너, 나랑 입 맞췄던 거 모두 기억하는 거지?”

“낑?”

리케도르안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낑낑댔지만 나는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사실 기억하지 못했으면 했는데 말이지.’

못할 줄 알았다. 그가 갑자기 앓기도 했고, 꿈이라 여기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뒤에 가서는 그를 간호하느라 다급함 속에서 깜빡하기도 했지만. 아무튼 간에 여기 계신 리케도르안 씨는 마지막에 입을 맞추다가 이성이 돌아왔고, 이를 모두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이제 와 꿈이라 해도 안 믿을 거지? 뭐 그렇겠지.”

“끼잉, 낑낑!”

“나라도 안 믿을 것 같으니까. 음, 이것만 알아 두자.”

나는 그의 뺨을 살짝 놓아주었다. 리케도르안이 제 뺨을 잡고 그렁그렁한 눈을 보였다.

짐승인 쪽이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물지 않다니. 장족의 발전이다. 잠시 상황도 잊고 감동을 느꼈다.

아, 이럴 때가 아니지.

“이것만 알아 두는 거야. 사실 첫 키스…….”

나는 그의 커다란 눈을 보다가 얼른 정정했다. 키스라니. 아니야.

“첫 뽀뽀에 대해서 말인데 사실 첫 뽀뽀를 하는 사람이랑 말이야.”

그의 귀에 입을 가져다 대고 속닥속닥 목소리를 낮췄다. 이곳엔 우리 둘뿐이라 굳이 낮출 필요가 없을 텐데도.

“일 년이 지난 뒤에 다시 한번 뽀뽀를 못하면 영원히 만나지 못한대.”

물론 개 뻥이었다.

첫 키스에 관해 뭐, 첫눈이 올 때 첫 키스를 하면 사랑이 오래가네 하는 로맨틱한 썰들은 들어봤지만.

이건 개소리 중의 개소리니까. 나는 양심의 가책도 없었다. 솔직히 신나게 혀가 오간 걸 두고 뽀뽀라 미화한 거부터 글러먹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양심이 없어, 리케도르안. 사기꾼 아저씨와 신나게 어울리다가 뻔뻔함까지 옮았나 봐.

당연하겠지만 짐승 버전의 리케도르안은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그저 눈만 껌뻑였다.

나는 씩 웃고는 그대로 그에게서 멀어졌다. 아니, 그러려 했다.

일어나는 순간 내 옷자락을 쥔 손만 아니었다면.

“……에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어느새 양 무릎을 얌전히 꿇고 있는 그가 있었다.

“……리케도르안?”

조금 전까지 네 발로 서듯 쪼그려 앉아 있던 그였다. 지금은 자세부터가 달랐다.

“정말이에요?”

살랑, 흔들리는 앞머리 아래로 잔뜩 붉어진 뺨이 언뜻 보였다. 어정쩡하게 선 각도에서는 높은 코언저리와 뺨만 겨우 보여서 표정이 어떤지는 알 수 없었으나, 입술을 꾹 깨문 것만은 볼 수 있었다.

그는 내 옷자락을 쥐었던 손을 놓고 제 허벅지의 바지 자락을 꾸욱 눌러 잡았다.

“아, 아버지가 그랬어요.”

아버지? 헤르님 대공? 여기서 그의 이름이 왜 나온단 말인가. 그대로 도망가려다 말고 멈칫했다.

“마…… 말만 잘 들으면, 차, 참으면. 일 년 뒤 꺼내주겠다고.”

순간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 참으면. 그 말에서 많은 것을 짐작했으니까. 무엇을 참겠는가. 학대로부터 오는 고통이겠지.

난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내가 그의 얼굴을 볼 수 없듯이 아래를 바라보고 있던 그는 나를 볼 수 없었다.

“야, 약속해 줘요.”

핏줄이 도드라진 주먹이 꽉 쥐여졌다가 풀어졌다가. 다시 꾸욱 쥐여지기를 반복한다.

“일 년 뒤, 이, 이곳에서 벗어나는 날.”

리케도르안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나, ……랑 만나 주세요.”

화아악. 꽃처럼 붉어진 얼굴은 이 차가운 감옥에서 유일하게 핀 봄이며 꽃이었다. 무심히 가 버리려던 내 걸음도 붙잡아 둘 정도로 화사한 꽃.

“보……고 싶어요.”

나는 눈을 깜빡였다. 내가 무어라 대답해야 할까. 내가 굴린 돌의 대가였다. 알고 있었다. 그에게 정을 준 순간부터 어쩌면 이런 시간이 올지도 모른다고. 내가 각오해야 했던 것, 마주하게 될 것을 말이다.

“그래.”

그는 몰랐겠지만 나는 무심했고 이기적이었다. 사기꾼과 죄수들과 잘 지낸다는 것은 그들의 본질과 어우러질 수 있단 얘기다.

“근데, 있잖아. 이건 말해 둘게.”

나는 웃으며 그의 이마를 톡 두드렸다.

“내가 아까 했던 말, 다 뻥이야.”

“네, 네?”

그가 빨개진 채로 눈을 크게 굴렸다.

“아, 이 말은 모르는구나. 거짓말이라고. 새빨간 거짓말이야.”

나는 활짝 웃으며 그의 앞에 다시 주저앉았다.

“일 년 뒤에 뽀뽀를 다시 하지 않으면 만나지 못한다느니. 그런 말은 세상에 없어.”

그대로 허리를 들어 그와 눈높이가 딱 떨어질 정도에서 멈췄다. 그의 눈 밑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톡 터트릴 듯 붉었다.

“그래도요…. 그래도…….”

내가 무어라 하기도 전에 리케도르안이 나를 덥석 잡았다. 저가 잡아놓고는 화들짝 놀라 얼른 놓았다.

하지만 동시에 내게서 시선을 돌리지는 않았다.

“1, 1년 뒤에 정말로 출소한다면요. 당신이 이곳으로 다시 와…… 줄 수 있나요?”

푸른 눈과 붉어진 분홍빛 뺨이 대조를 이루었다.

“당신이 머, 먼저 출소할 테니까.”

“와 달라고?”

끄덕. 그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제, 제가 가도……. 만나 줘요?”

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어디 있는 줄 알고.”

“마, 만나 주세요!”

“글쎄.”

“만나…… 주세요. 만나 줘요.”

“음…….”

“……이, 이아나.”

“그런 눈으로 보지 말고.”

금방이라도 툭 눈물을 떨어트리며 울 것 같은 얼굴이라니, 이건 언제 봐도 반칙이었다. 이쯤 되면 눈을 먼저 피할 법도 한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내가 대답을 할 수밖에 없게끔 그는 아주 오래 기다렸기에 결국 항복하고 입을 떼었다.

“그래.”

만나는 거야 어렵지 않겠다 싶어 알겠노라 했다.

“그럴게요.”

다만, 정말 만날 수 있다면 말이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근데 당신 그때 출소할 수 있을까? 쓴 미소가 함께였다.

적어도 그는 더욱더 오래 여기 머물러야 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1년 뒤 헤르님 대공은 그를 여기서 놓아주지 않았으니까.

“약조, 해 줄 거예요?”

“네. 그래요.”

그래서 알았노라 했다.

나가지 않을 거라,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은 채.

그에게 설렜지만 설렘을 무시할 수 있을 만큼 나는 이기적이었다.

미안하지만 리케도르안, 한 번만 다시 말할게.

나는 양심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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