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23/87)


“저기!”


하나 이와 동시에 뒤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쿠쿠쿠쿵!


이전과는 전혀 다른 울림이었다. 그의 어깨너머로 돌아본 나는 입을 쩍 벌렸다. 진짜로 통로가 닫히고 있잖아? 말 그대로 뒤로 복도가 사라지고 있었다. 저 멀리서부터 책장을 덮듯 벽이 좁혀져 턱턱 붙어버리더니 길이 사라졌으니까.


“리, 리케도르안, 더, 더 빨리!”


내 목소리의 다급함을 알아챈 듯 그의 발이 더욱 빨라졌다. 차르륵. 쇠사슬 소리가 거칠게 울렸다.


조금만, 조금만 더……!


그리고 막 벽이 우리에게 닿을 찰나, 콰쾅! 거대한 울림이 눈앞에서 멈췄다. 나는 등으로 느껴지는 쓰라림을 느낄 새도 없었다. 그저 헉헉, 숨을 몰아쉬며 앞을 바라볼 뿐이었다.


“하아…… 구멍이, 사라졌어.”


눈앞에는 구멍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있었다. 그저 벽뿐이었다.


심지어 처음 봤던 모습 그대로 리케도르안의 쇠사슬을 고정한 채로 벽이 되어 있었다.


나는 얼떨떨함을 숨길 새도 없이 천천히 눈을 깜빡이다 리케도르안의 눈과 마주했다. 그는 줄곧 그래 왔다는 듯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벽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은 것 같았다.


“……봤어요?”


내 물음에 그는 그저 고개를 느릿하게 기울일 뿐이었다. 나는 허탈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나만 놀란 거냐고.’


눈을 뜬 이후로 가장 큰 이슈라 할 법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정작 나와 함께 겪은 사람은 이렇게나 태연한 얼굴이다. 어찌 어처구니가 없지 않겠는가.


나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러다 문득 주머니를 더듬었다. 다행히 내가 이곳에 가져온 주머니가 그대로 팽개쳐져 있었다.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서 본 나는 헉, 숨을 삼켰다.


시간이 없었다. 아니,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났다. 나는 주머니에 있는 무언가를 손에 쥐었다가 폈다. 리케도르안을 바라보면 그는 여전히 성인의 모습이었다.


“아, 놀라라. 언제 옆에 왔어요?”


“계속 있었는데.”


그가 장난치듯 고개를 내려 내게 얼굴을 내밀었다.


거참. 이성이 있는 리케도르안 쪽은 한참 힘겹게 고개를 내밀던데, 이쪽은 참 쉽기도 하구나 싶었다. 물론 부담스러울 정도로 잘생긴 건 마찬가지였지만.


“……얼굴부터 내밀지 말아 줄래요?”


“응.”


“대답만 잘하지 말고.”


나는 주춤 그의 가슴을 뒤로 밀었다가 이마저 붙잡혔다. 그에게 붙잡힌 손을 슬쩍 보았다가 느리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에게 붙잡힌 그대로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구멍으로 놀란 건 놀란 거고. 일단 뚫렸던 구멍은 사라졌고, 벽은 그대로 돌아왔다. 밖에 이 소란이 어떻게 들렸는지는 몰라도…….


분명 진동이든 지진이든 간에 무엇이든 전달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얼른 하려던 일을 진행해야 했다.


하려는 일이란, 단연 헤르님 대공이 오지 못하게 하는 일, 그를 앓게 하는 일이다.


일단 고개를 들어 그의 모습을 담았다. 이건 되도록 이성이 있는 쪽에게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나는 손을 뻗어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잘 들어요.”


리케도르안은 옷자락을 잡은 내 손을 놓게 하더니 그 손에 천천히 깍지를 꼈다. 그러고는 고개를 기울였다.


“언제나 잘 들고 있어.”


……대체 이런 건 어디서 배웠을까.


상황도 잊고 궁금했지만 중요한 건 이게 아니었다. 나는 깍지 낀 손을 어색하게 바라보다 얼른 시선을 올렸다.


“이제부터 내가 나쁜 짓 하나 할 거거든요? 날 용서하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줄곧 할까 말까 망설였다. 그래서 이성이 있는 리케도르안 쪽에게 일부러 ‘나쁜 짓’이라 강조하기도 했다.


그가 싫다고 하면 하지 않으려고도 했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조금 전의 지진 혹은 흔들림이 위쪽에 어떻게 전달되었을지 모르는바, 일단은 이걸 진행해야 할 성싶었다.


“나쁜 짓? 어떤 나쁜 짓?”


그는 잠자코 나를 바라보며 집중했다. 횃불의 흐릿한 불이 그의 반듯한 콧날에 그림자를 그렸다.


나는 주머니에서 무언갈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제이르가 내게 건넨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새로운 마법이 걸린 마법도구, 또 하나의 팔찌였고.


다른 하나는…….


“사탕?”


“네. 사탕이에요.”


바로 이 사탕이었다. 이 사탕으로 할 것 같으면 제이르의 마법이 담긴 특별한 사탕이라나.


<아가씨, 원하는 간식이 있어요?>


제이르가 묻기에 얼떨결에 대답했는데, 설마 거기에 마법을 걸어 버릴 줄은 몰랐다. 물론 나로서는 쿠키와 사탕 중에 고민했던 문제였다. 둘 다 리케도르안이 가장 좋아하고 자주 먹던 것이었으니까.


“이 사탕 먹어 줘요.”


“이게 뭔데?”


“그냥 먹어 줘요.”


나는 그와 깍지를 낀 손을 잡아당겼다. 분명 나보다 훨씬 큰 그인데도 선선히 내게 당겨져 왔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미안하지만 이 사탕, 먹으면 많이 아플 거야.”


나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굳이 속일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내가 당기긴 했지만 그는 그보다도 더욱 내게 다가왔다.


“아프다.”


너무 가까워 숨소리가 바로 앞에서 들릴 것만 같았다.


“아, 아픈 대신…… 이아나가 곁에 있어 주나요?”


깍지 낀 손에서 박동이 쿵쿵 뛰는 듯했다. 분명 그는 조금 전에 전력으로 뛰었음에도 조금도 숨을 몰아쉬는 기색이 없었다. 땀을 흘린 흔적도 없었다.


오히려 솔솔 좋은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나, 칭찬해 줘.”


“칭찬?”


“주인님이 아니라, 이아나라고 불렀잖아.”


이성이 있을 때와 다를 바 없는 청아한 향이었다. 그런데 왜일까 조금 더 녹진해진 느낌이었다. 아울러 작은 막대가 심장 한켠을 쿵쿵 두드리는 것처럼 묘한 기분이 들었다.


“먹으면, 계속 곁에 있어 줄 거야?”


나는 그를 보며 눈이 떨리지 않게 눈꺼풀에 힘을 주었다. 그러한 채로 천천히 끄덕였다. 기대하지 않았던 대답인지 푸른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이내 바다같이 깊은 홍채로 이채가 스민 것도 같았다.


“정말?”


“……그래. 네가 나을 때까지만.”


제이르가 이 마법은 오래 앓게 하지 않을 거라고 했다. 그럼 적어도 출소 전까지는 간호할 시간이 있으리라. 그리 생각했다.


그의 얼굴로 얼핏 실망한 기색이 스쳤다. 아주 잠시였지만 바로 가까이에서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다음?”


숨소리가 바로 앞, 입술에서 느껴졌다.


“날 떠나?”


흠칫 내 손이 떨렸다. 그 떨림은 나를 쥔 손에 금방 삼켜졌다. 그는 깍지를 낀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떠날 거야?”


그래. 이제 이쪽은 다른 인격을 거의 기억하고 있었지. 나는 난감하게 시선을 굴렸다. 하나 어차피 마주할 일이었다.


“맞아. 난 떠날 거야.”


출소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거였다. 처음부터 나는 내 죄가 아닌 죄를 뒤집어쓰고 이곳에 온 것이었으니까. 비록 입소도 출소도 내 뜻대로 된 것은 아니나 내겐 나간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하지만 약속할게.”


나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에서 시리도록 차가운 눈동자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네가 다 낫기 전까지는 떠나지 않아. 맹세해.”


이건 내 책임감의 문제기도 하다. 적어도 내가 스스로 연루하길 바랐던 일이니 성격상 꼭 마무리 지어야 했다.


“곁에 있을 거야.”


리케도르안은 어떤 생각을 한 걸까. 그저 아래를 바라보는 시간이 길었다. 그러고는 느린 속도로 눈동자를 굴렸다.


“그럼, 좋아.”


짐승 버전의 그도 이성이 있는 쪽도, 그리고 여기 성인이 된 그쪽도 모두 어린애 같은 구석이 있었다. 만족했을 때는 이런 식으로 포식자처럼 웃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그래서 휘어진 입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마침내 그가 대답했다.


“그거 네가 먹여 줘.”


“……알았어.”


“입술로.”


“알았…… 뭐?”


그가 입술을 씩 끌어 올렸다.


“입술로. 먹여 줘, 이아나.”






3장. …내가 걔라고요?






나는 사탕을 쥔 채 그대로 굳고 말았다. 지금 이 남자가 무슨 개소릴 하는 거야? 어처구니없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허락? 당연히 허락할 리 없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니까. 내가 인상을 찡그리며 단호히 거절하려 할 때였다. 그가 홱 고개를 들어 올렸다. 흡사 나른히 누워 있던 짐승이 벌떡 일어나 경계를 세우듯이 그의 눈이 한순간 날카롭게 빛을 드러냈다.


“아, 사람이 오는 것 같다.”


그가 천장을 본 채로 중얼거렸다.


“뭐, 사람?”


“응.”


리케도르안이 끄덕이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여러 사람, 둘? 셋? 아니. 많아.”


나는 천장을 올려다봤다. 당연하겠지만 내게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고요한 감방만 느껴질 뿐이었다.


하지만 리케도르안의 감각이 틀릴 리 없다. 조금 전의 놀라운 신체 능력을 본 뒤라 더욱더 신뢰가 갔다. 나는 입술을 꾹꾹 깨물었다.


여러 사람이 다가온다니, 왜? 보통 이곳에는 상급 간수 하나 정도만이 입구를 지킬 텐데? 그마저도 르나그가 시켜서 했을 뿐 위험한 일은 전혀 없어 편하기 그지없다는 말을 하곤 했다. 상급 간수가 직접 말한 걸 들은 거라 잘 알았다.


‘조금 전의 동굴에서의 진동이 밖에도 전해진 걸까?’


아니, 이것밖에 없었다.


마음이 초조해졌다. 정말 간수가 이쪽으로 오는 거라면, 그들이 도착할 때쯤에 리케도르안은 끙끙 앓고 있어야 했으니까. 간수들이 이를 눈으로 보아야 했다.


“어떡할까, 주인님.”


리케도르안은 이런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 손바닥을 엄지로 살살 문질렀다. 까슬까슬한 손이 손바닥을 긁는 느낌이 은밀하고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어떡하긴, 얼른 먹어.”


“먹여 주면.”


그와 실랑이를 벌일 시간이 없었다.


그때였다.


달칵.


희미한 소리, 이번엔 나도 느꼈다. 분명 쇠가 부딪치는 소리였다.


“문을 연 것 같아.”


지하로 가는 길목엔 긴 나선 계단이 있었다. 내 걸음으로 한참 걸렸으니……. 저들의 걸음으로도 꽤 걸릴 거다.


나는 사탕과 그를 번갈아 바라봤다. 뚜벅. 희미한 구두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긴장감이 만든 환청인지 덩달아 긴장감에 감이 예민해진 건지는 몰라도 이젠 시간이 정말 없었다. 이제 와 그의 입에 억지로 먹인다고 한들 그가 순순히 먹을 기색은 아니었다. 그는 상황의 심각성을 전혀 모르고 있었으니까.


일일이 설명할 시간조차 없어졌다. 아니, 급했다.


나는 그의 가슴팍 아니, 멱살 쪽의 셔츠 옷깃을 꽉 부여잡았다. 그러고는 잠시 떨어져 상체를 세웠다.


절로 그의 얼굴이 아래로 보였다.


“너, 후회나 하지 마.”


모든 건 당신이 자초한 거다. 나는 깊이 관여하지 않으려 했어. 나는 그렇게 비겁하게 스스로를 위한 벽을 세웠다.


그는 성자와 같은 얼굴로 그저 고개를 기울일 뿐이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는 듯이. 이럴 때 무구한 시선을 보이다니 반칙이다 싶었지만. 그래, 시간이 없지.


나는 조금 삐뚠 마음을 안고 그대로 고개를 휙 휘었다. 손에 쥔 사탕이 순식간에 내 입으로 사라졌다.


“입, 벌려.”


그러고는 그의 멱살을 쥐고 잡아당겼다. 그의 눈이 커지는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대로 눈을 감았으니까.


눈을 감으니 다른 감각이 선명하게 살아났다.


“흐, 읍.”


입술에서 입술로 사탕이 넘어간다. 신기하게도 그의 입술로 넘어간 순간 사탕이 기다렸다는 듯이 살살 녹아들어 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것을 내 것으로 살짝 건드려 보고는 얼른 입술을 떼어내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이었다.


“뭐, 읍…… 흐, 흐흣.”


허리로 단단한 팔이 감겼다. 뱀처럼 엉킨 팔은 순식간에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내 허리에 엉켰다.


그가 그대로 가볍게 힘을 주었다. 번쩍 들린 몸이 아무렇지 않게 그의 허벅지에 안착했다.


졸지에 다리 사이가 벌어지고, 단단한 허벅지에 앉게 된 나는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그의 허벅지에서 선명하게 도드라진 그의 일부가 느껴졌으니까. 이게 몽둥이 같다는 것에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크기가 미쳤잖아?’


그러나 입이 가로막힌 탓에 말을 토해낼 수는 없었다. 나도 모르게 들썩였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신음이 섞인다. 눈을 뜨면 리케도르안의 시선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나른히 시선이 접혔다.


동시에 그가 더욱 파고들었다. 마치 잡아먹힐 것 같은 키스였다. 숨이 막혔다. 날숨이 거칠게 오가는 키스는 숨뿐만 아니라 혈류마저 막은 것처럼 쿵쿵, 거칠게 심장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요령이 있는 키스는 아니었다. 서툰 면모가 분명 느껴졌지만 또 어떤 느낌에서는 노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등줄기를 훑는 손에 발끝이 절로 곱아들었다. 아찔함에 눈이 자꾸만 감겼다.


그래, 이렇게 된 거 사탕이 잘 녹기나 하는지 확인하자.


나는 손을 더듬어 그의 등 위로 올렸다. 성난 등 근육, 다시 어깨, 스르륵 내려와 단단한 가슴, 가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을 더듬다, 손끝에 정점이 걸렸다. 그가 짐승이 내뱉는 으르릉거림에 가까운 신음을 토했다.


귀로는 밖의 소리에 기울였다. 뚜벅뚜벅. 전보다 더 선명해지는 발소리가 들렸다.


혀로 건드려 본 사탕은 반쯤 녹아 있었다. 녹는 속도가 상당히 빨랐다.


“으응…….”


제이르는 반드시 사탕을 모두 녹여 먹어야 한다고 했다. 까다롭게도 만들었지.


이건 어쩔 수 없었다. 내가 그에게 최대한 부작용이 적은 마법을 요구했으니까. 그럴수록 시동 조건이 까다롭다나.


“흐, 하아…….”


애써 다른 생각을 하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것에 의해 금방 끌어 올려졌다.


천천히 떨어진 사이로 거친 숨이 오갔다. 대부분이 내 것이었다. 리케도르안은 손등으로 제 입술을 닦아냈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내려 다가왔다.


“……이렇게 좋을 땐, 뭐라고 하면 돼?”


“하아…… 뭐?”


“좋아서 뭐든, 부수고 싶을 때는 뭐라고 해? 이아나. 응?”


“하고 싶은 대로 해…….”


우리 둘 다 목이 잔뜩 쉬어 있었다. 긁어내리는 것 같은 거친 음성이 내 귀를 마구 파고들었다. 그의 손이 위험한 곳까지 내려가고 있었다.


“그럼 좋아서, 미칠 것 같은 때도?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러나 나는 밀어내지도 쳐내지도 못한다. 눈앞에 홀릴 듯이 아름다운 눈동자가 있었으니까. 나는 그를 떨어트리는 것도 잊고 멍하니 바라보았다.


느릿하게 핥아 내리는 것에 나도 모르게 놀라 입술을 벌렸다. 그의 혀가 안으로 파고들며 안쪽 곳곳을 핥고 쓸었다. 입술을 살짝 깨무는 감각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키스였지만 동시에 짐승에게 잡아먹히는 듯한 감각을 지워 낼 수 없었다. 얇은 상의 안으로 파고든 손을 느꼈다. 매끄러운 허리선을 살살 쓰다듬는 손에 읏, 참지 못하고 신음이 흘렀다. 차가운 손은 뜨거워진 체온에 쥐약이었다. 이 자극적인 상황에서 더욱 열을 부추기는 것만 같았다. 망할, 싫지 않은 것이 더 문제였다.


상의 안으로 걸친 얇은 속옷 너머 아슬아슬한 곳까지 열기가 파고들었다. 절로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툭, 엉덩이에 자꾸만 걸리는 그의 분신 또한 내 신경을 더욱 예민하게 돋았다. 흐, 눈앞이 흐려지는 것 같다.


뚜벅, 여전히 소리는 점차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사탕은 모두 녹았을까?


그는 이제 숫제 내 입술을 잘근잘근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모조리 가지겠다는 듯이. 나는 그의 입술을 살살 벌려 확인하려는 듯이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그의 양 뺨을 잡았다.


“잠시만, 그대로 있어 봐요.”


이제 와 손을 넣어서 확인할 수도 없으니 급한대로 혀를 움직였다. 고개를 그대로 꺾자, 동시에 내 허리를 감싼 팔에 힘이 들어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그의 어깨가 조금 낮아진 것 같은데. 분명 조금 전까진 한없이 높아 팔을 기댔던 어깨였다.


내 혀가 느릿하게 치열을 훑고 입천장을 건드렸다. 사탕은 없나? 이상하게도 그의 혀가 파르라니 떨고 있다. 너무나 놀란 것처럼. 그의 몸이 조금 작아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아니, 착각이 아니었다.


그의 입속에서 사탕이 모두 녹아내린 것이 느껴졌다. 동시에 쥐고 있는 뺨이 조금 뜨겁다 생각했다.


“……흐읍,”


이건 내 신음이 아니었다.


그 순간 눈이 마주쳤다.


“리케, 도르안?”


잘게 떨리는 눈동자, 그리고 눈꼬리에 길게 매달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건, 이성이 있는 리케도르안이잖아.


언제, 대체 언제 바뀐 거야?


잔뜩 붉어진 눈가를 본 순간 얼른 떨어지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나를 잡아챈 손이 빨랐다.


“가지, 말…….”


손마저 빨간 채로 나를 붙잡는다.


“하아……. 가지 말아요.”


애가 탄 얼굴이었다. 자기 자신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길 잃은 아이 같은 얼굴.


“떠, 떨어지지 마.”


그는 잔뜩 빨개진 얼굴로 나를 놓지 않았다. 그러고는 눈을 질끈 감고는 내게 입을 맞췄다. 그전의 행위가 우스울 정도로 정직하게 입술을 부딪쳐 오는 행위였다.


그러나 왜일까. 이 서툰 행동에 심장이 밖으로 던져진 것처럼 거칠게 쿵쿵 뛰었다. 여기서 입을 열면 심장 소리가 그대로 들릴 것만 같았다.


이미 상의로 파고든 손이 어찌할 줄 모르고 내 허리를 툭 건드렸다. 만져놓고서 본인이 더 놀란 것 같았다.


“……후.”


살짝 떨리는 내 손이 주춤 아래로 내려갔다. 보드라운 그의 머리칼을 스쳐 그의 뒷목에 닿았다.


손끝에 걸린 것은 목에 채워진 구속구였다. 이것은 헤르님 대공이 직접 채운 것으로, 언젠가 여주인공 언니가 풀어줄 예정이었다.


무의식중에 손끝에 걸린 것을 툭 건드렸다. 왜일까 이게 크게 달칵, 흔들린 것 같았다. 마치 풀리기라도 할 듯이.


조금 놀라 눈을 아래로 내리면 족쇄는 그대로였다.


혹시나 싶어 몰래 당겨 보니, 착각이었다는 듯 단단한 그대로였다.


……그래, 착각이겠지.


뚜벅. 다시금 들려오는 발소리에 얼른 그의 몸을 밀어냈다. 발소리가 아주 가까웠다.


거의 근처에 온 것처럼.


나는 황급히 그를 쳐다봤다. 그의 몸이 너무 순순히 밀린 것 같아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몸이 그대로 스르륵 쓰러졌다.


“리케도르안!”


나는 차마 소리치지도 못한 채 최대한의 크기로 그를 불렀다. 하지만 그는 그대로 내 어깨에 추욱 늘어질 뿐이었다.


기절? 기절했어? 놀라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잠, 잠이 든 건가?”


손을 더듬어 그의 이마를 짚었다. 그의 이마가 몹시도 뜨거웠다.


……마법이 발동한 거구나.


입을 꾹 다물었다. 이런 반응을 기다렸던 것이었지만 실제로 보게 되니 유쾌하지는 않았다.


그를 바로 눕혔을 무렵 쇠창살이 끼이익, 비명을 토해냈다. 활짝 열린 쇠창살 사이로 사내가 들어왔다.


“이아나 씨.”


얼굴이 익숙한 상급 간수였다. 나는 그를 보았다가 당황했다. 이곳에 들어온 사람은 단 한 사람이었다.


“이아나 씨?”


“네? 네.”


나는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다름이 아니라 시간이 꽤 지나서 말입니다.”


보통 때라면 시간이 아무리 오래되든 간수가 안쪽으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기다리면 기다렸지.


그런 내 시선을 느꼈는지 간수가 조금 난감하게 웃었다.


“그것도 있고, 부름이 있었습니다.”


“부름이요?”


“예, 총관리장께서 부르십니다.”


아……. 르나그. 그가 불렀단 말에 자연히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들은 르나그의 말을 하늘처럼 따르니까.


“이제는 이쪽에 올 시간입니다, 라고 전하면 아실 거라고 했습니다.”


“네에…….”


나는 알아들었다는 듯 끄덕였다. 그러고는 잠시 천장을 보았다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열었다.


“저기, 혹시…… 조금 전에 이상한 소리를 듣지 못했나요?”


“이상한 소리 말입니까?”


간수는 고개를 갸웃했다.


“네, 땅이 흔들렸다거나…… 아니면 바위 같은 것이 쿵 떨어지는 소리라거나. 아무튼 조금 이상한 소리요.”


“글쎄요……. 쭉 입구를 지켰지만 그런 것은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만.”


간수는 대답 뒤로 리케도르안의 감방을 쭉 훑었다. 관찰하는 듯한 눈이었다.


“이곳은 깊은 지하다 보니,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라거나 작은 돌이 떨어지는 소리도 크게 울리지요. 놀라신 마음도 이해합니다.”


그의 눈을 따라가 보니, 깊은 웅덩이가 보였다. 지난번에 비가 온 뒤로 미처 마르지 않은 웅덩이였다. 그 옆으로 꽤 커다란 돌 몇 개가 떨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예민했다고 말하고 싶은 모양이다.


그 덕에 하나는 알았다. ……밖에는 아무것도 전해지지 않은 건가? 간수의 반응으로 보아 그런 듯했다.


하나 의아한 일이었다. 분명 땅이 크게 흔들리고 천장에서 사람 얼굴보다도 훨씬 큰 돌들이 떨어졌다.


그 한가운데 있던 사람으로서 어찌 이상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여기가 지하라고 한들 바깥에 영향이 없을 수가 없는 일이었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나는 잠시 감방의 벽을 곁눈질했다. 이제는 그저 벽이 된, 조금 전엔 거대한 구멍이 자리했던 곳을.


대체 이곳, 이 감옥은 뭐 하는 곳이지?


등줄기로 옅은 소름이 돋았다.


“이아나 씨?”


“아, 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의아한 얼굴을 한 간수에게 가벼운 미소를 보였다.


“갈게요, 저…… 그런데 말이에요.”


나는 간수에게 보이지 않게 리케도르안의 손을 살짝 붙잡았다.


그가 깨어 있는지 지쳐 잠든 것인지, 아니면 기절한 것인지 모르지만. 더는 그와의 약속을 어기진 않을 생각이었다.


그건 한 번으로 충분하니까.


“이 죄수가 많이 아픈 것 같아요.”


“네?”


“열이 아주 높아요.”


나는 처연한 표정을 만들어 내며 그대로 눈을 내리깔았다.


“저랑 같이 있는데 갑자기 쓰러져서…….”


많이 놀랐어요, 같은 말을 흐릿한 목소리와 함께 덧붙였다. 간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나와 리케도르안을 번갈아 보다가 리케도르안의 이마를 슬쩍 건드려 보고는 이내 심각한 얼굴을 했다.


“아…… 큰일이군요. 그는 특별한 관리를 요하는 죄수라.”


간수는 심경이 복잡한지 제 턱을 비비다가 머리를 털듯이 비볐다.


“저, 일단은 상부에 보고를 드리고 오겠습니다.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네. 여기서 기다릴게요.”


나는 웃음을 속으로 삼키며 얼른 끄덕였다. 기왕이면 르나그에게 전해 준다면 나야 좋은 일이었다.


중요한 건 간수들이 보고를 하는 일이었으니까. 이는 이미 나와 제이르가 의견 합치를 본 사안이었다. 제이르 또한 윗선으로 보고가 들어가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했다.


간수가 멀어진다. 나는 그가 계단을 완전히 올라간 것을 확인하고서야 숨을 토해냈다.참았던 숨이 넓디넓은 감방에 울려 퍼진다. 돌아오는 내 메아리를 듣다 헛웃음을 들이켰다.


시야를 돌려 색색, 숨을 거칠게 내뱉은 리케도르안을 바라봤다. 조금은 안타깝고, 안쓰럽게.


“……약속, 지켰죠?”


나는 그의 손바닥을 톡 두드렸다가 그의 하얀 손끝을 짧게 잡았다. 착각인지는 몰라도 손끝이 움찔 떨린 것도 같았다.


그러나 높은 열로 달뜬 숨을 토해내는 그가 내 손을 잡았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착각이겠지.


나는 길게 날숨을 뱉었다.


“자, 이제 한고비 넘겼네.”


이젠 우리 남자주인공의 간병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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