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22/87)

“당신과 함께한 여성이 무거운 걸 들고 있으면, 한 번쯤 물어봐요. 아, 바로 들어 줄 필요는 없고, 이렇게.”

나는 그의 손을 잡아다가 횃불을 들고 있던 팔 위에 올렸다.

“손이나 팔이 조금 파르르 떨리고 있다 싶으면 물어보면 어때요. 들어 줄까? 하고. 분명 그 사람은 당신을 더 좋아하게 될걸요?”

여주인공 언니를 상정한 말이었다. 이 남자는 훗날에서야 하나씩 이런 것들을 배워 가는 모양이니 한 가지쯤은 미리 배워 둬도 좋겠지.

리케도르안은 깨끗한 유리구슬 같은 커다란 눈을 굴려 나와 횃불을 번갈아 응시했다.

이내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마저 말 잘 듣는 짐승 같았다.

“……들어 줄까요?”

조심스러운 음성에 내가 뿌듯한 마음으로 고개를 주억이는 순간이었다.

휙, 시야가 뒤집혔다.

……어라? 어라라라.

“아니, 리, 리케도르안. 잠시만요.”

발이 덜렁 들려 있는 기분이 묘하기 그지없었다. 왜 발이 떴느냐. 이 남자가 등불을 들랬더니, 나를 들어 올렸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공주님 안기로.

그러고서는 무엇이 잘못되었냐는 듯 순진무구한 낯으로 날 응시했다.

“저, 이게 아니라요!”

“들어 올렸어요, 이아나.”

“아니, 그러니까…….”

내가 아니라고 이 사람아.

“이렇게 가벼운데. 그런데 이 정도가…… 이아나한테는 무거운 거군요.”

그가 해맑게 웃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무언가 결심한 듯한 얼굴로 얼굴을 굳히기까지 했다.

“……기억해 둘게요.”

나는 얼른 고개를 거세게 가로저었다. 아니야. 아니라니까, 선생님? 무언가 단단히 오해한 듯한 미소를 보며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이아나, 당신 너무 가벼워요.”

“그건 당신이 힘이 센, 아니 됐어요. 그보다 내려 줄래요?”

“……싫어요.”

그를 바라보자, 그가 시선을 슬그머니 피했다. 그의 눈꼬리가 추욱 처졌다.

“싫은 건 싫다고 얘기, 하라고…….”

“내가 알려 준 거 여기다 써먹지 말아요.”

이 남자가 싫은 건 싫다고 말하라 시켰더니 나한테 써먹네. 그가 시무룩한 얼굴을 하면서도 단단한 팔에는 힘을 풀지 않았다.

“……안 돼요?”

“그 얼굴 하지 마요. 반칙, 반칙이야.”

그렇게 그와 한창 실랑이 끝에 바닥에 내려올 수 있었다. 등불은 그가 든 채로 말이다.

“후, 어쨌든 시간이 많이 없으니까 얼른 가 봐요.”

그는 왜인지 뿌듯한 얼굴로 나를 쫄래쫄래 쫓아왔다. 아마 여차하면 그러니까 다리가 아프면 그에게 다시 안기겠다는 약속을 받아 낸 후부터였다. 어째 갈수록 하는 짓이 짐승 중에서도 갯과 짐승을 보는 기분이네.

……아니, 앉아를 외칠 때부터 운명이었던 건 아닐까.

그나저나 여기 너무 어두운데, 더 밝힐 것은 없는 걸까? 나는 벽 쪽으로 다가서서 재질 따위를 확인했다. 이쪽도 감방 벽과 마찬가지로 돌이었다. 횃불이 꽂혀 있을 리는 없겠고, 그런 자리라도 없나?

“……너무 어두운데.”

그렇게 중얼거린 순간이었다.

촤르르륵.

탁.

탁.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불이…… 켜졌네요?”

타이밍 좋게 불이 촤르륵 켜졌으니까. 그것도 파도 타듯이 켜지는 기이한 광경을 목격했다.

“리케도르안, 뭐 했어요?”

그는 꿀 먹은 벙어리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슬쩍 제이르의 팔찌를 보았다.

설마 이게 또?

팔찌가 무언갈 어떻게 했다기엔 지극히 잠잠했다. 돌려보아도 희미한 불을 내고 있을 뿐 아무런 특별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 불이 켜지면 좋은 거지.

불이 켜지긴 했지만 아주 밝은 것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불빛의 색은 짙은 푸른빛이었으니 을씨년스러운 느낌마저 들었다.

이는 벽 곳곳에 푸른빛을 내는 보석 아니, 광물 같은 것이 일렬로 콕콕 박혀 있는 탓이었다. 자세히 보면 동굴 속 사파이어나, 크리스털 느낌이기도 했다.

왜 하필 푸른 보석이람. 보통 푸른 조명은 공포 영화에나 쓰일 법한 조명 아니냐고.

괜스레 지난 공포 영화들이 생각나는 기분에 어깨를 떨었다. 밝긴 한데 분위기는 음산해진 느낌이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 보고 돌아갈까.

이제는 멀리 가고 싶은 마음마저 싹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길은 더는 이어지지 않았다. 얼마 걷지 않아 길 끝에 닿았던 것이다.

“여기가 끝인가 본데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조금 넓어진 공간을 확인했다. 앞서 걸어온 곳이 긴 복도식이었다면 여기 공간은 광장처럼 동그란 형태였다.

그리고 여기엔 푸른 광물이 드문드문 박힌 대신 다른 색의 광물이 섞여서 박혀 있었다. 그 덕에 복도에서보다 앞이 더 선명하게 보였다.

찰칵.

쇠사슬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리케도르안이 손목에 묶인 쇠사슬을 잡아당겨 보고 있었다.

“제 쇠사슬이 저기 연결된 것 같아요.”

“그러게요, 저게 뭐지?”

사슬의 끝은 이 공간의 가장자리, 높이는 사람 허리쯤 오겠다 싶은 원형 기둥에 묶여 있었다.

기둥은 흡사 제단과 비슷한 형태였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앞을 응시했다. 줄곧 눈에 띄었지만 공간부터 살펴보느라 꺼내지 못한 것이었다.

“대체 저게 뭘까요?”

눈앞에는 거대한 석조 판이 있었다. 유적? 비석? 아니, 판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겠다. 오래전 역사책에서 볼 법한 거대한 석조 판에는 칼로 후벼 내고 베어낸 것같이 날카로운 그림들이 있었다.

이걸 벽화라고 해야 하나?

리케도르안에게서는 답이 없었다. 아마 그도 모르는 것이리라. 나와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저건…… 장미 같죠?”

벽화는 거대한 원과 그 안으로 수없이 많은 원이 겹쳐져 있었고, 알아들을 수 없는 문자들이 중간중간 자리해 있었다.

원뿐 아니라 삼각형, 오각형 등 다양한 도형들이 등장해 기묘하고도 기하학적인 느낌을 자아냈다. 이는 어느 고고학적 유적을 훔쳐보는 느낌이었다. 눈으로 쭉 훑다보면 이 형언할 수 없는 문자와 도형의 나열에서 그나마 알아볼 수 있는 그림이 있었다.

꽃 모양이었다. 그것도 봉긋하고 동그란 모양이 흡사 ‘장미’같은… 아니, 장미였다.

“……그런 것 같아요.”

리케도르안도 장미만은 알아볼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나는 색이 붉은 장미. 그의 가문 문양이었으니까. 어린 시절엔 저택에서 살았으니 어디에서든 보았겠지.

장미는 총 다섯 송이였다.

네 개의 장미는 마름모 혹은 다이아몬드 형태로 배치되어 있었다.

나는 천천히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빨간 장미.”

빨간 장미가 있는 곳에는 붉은 염료로 칠해진 장미 그림 외에도 크고 붉은 보석이 꽃잎마다 알알이 박혀 있었다.

반짝반짝.

보석은 신비로운 붉은색을 드러냈다. 그러나 왜인지, 보석 중 몇 개는 깨지거나 빛을 잃은 채였다.

멀리서 보기엔 꽃잎을 몇 장 잃은 장미처럼 보였다.

“저 보석, 얼마나 할까요?”

“……네?”

내 엉뚱한 소리에 그가 눈을 끔뻑였다.

비싸 보이는 게 건들면 안 되겠지? 이전 세계의 게임이나 영화에서 보았던 비슷한 환경의 경우를 보자, 늘 이런 곳에선 아무거나 건드리면 안된다는 교훈을 남겼다. 아쉽다. 리케도르안이 이상하게 보거나 말거나 나는 잠시 일확천금의 꿈을 품었다가 놓았다.

그래. 참자. 안 그래도 요상한 공간인데 잘못 건드리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단 생각이 드니까.

“보여요? 붉은 장미 옆에는 이상한 게 붙어 있는 것 같은데요?”

그 외에도 붉은 장미 옆에는 동물인가 싶은 묘한 동물 형태가 그려져 있었는데, 대번에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생긴 건 고양이 같은데 귀가 동글고 작았으며…… 털은 회색 바탕에 검은 점박이, 그리고 꼬리가 아주 길었다.

저렇게 생긴 동물을 오래전에 본 것도 같은데. 뭐라고 했더라?

리케도르안에게 물었지만 모르겠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은…… 노란 장미?”

손가락이 오른쪽으로 내려간다. 그곳엔 샛노란 장미가 피어 있다. 막 개화를 앞둔 듯 꽃잎이 하나하나 나뉜 붉은 장미와 다르게 활짝 핀 모습이었다.

이뿐 아니라 번쩍번쩍한 황금 띠를 두르고 있었다. 붉은 장미의 꽃잎이 보석이라면 이쪽은 금박을 입힌 듯 번쩍번쩍해 보이는데……. 마찬가지로 장미 옆에 동물이 붙어 있었다.

“저건 알겠다. 뱀이네.”

노란 장미의 옆에는 새하얀 색의 뱀이 가시와 잎을 둘둘 감고 있었다.

장미와 뱀이라니.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 생각하면서도 묘하게 잘 어우러졌다.

손가락이 다시 한번 아래로 내려간다.

이번엔 아래쪽, 붉은 장미와는 반대편 대치되는 자리에 있는 장미였다.

흑장미다.

“……그런데 저건 좀 이상하게 생겼는데?”

“망가진 것 같아요.”

“네, 그렇게 보이죠?”

잠자코 있던 리케도르안도 끄덕일 만큼 흑장미의 모습은 조금 이상했다.

다른 장미들이 피기 직전이거나 봉오리인 것과 다르게 이것은 홀로 누가 검게 낙서해 둔 것처럼 짓뭉개진 느낌이었다.

타 버린 것처럼 너덜너덜하게 찢겨져 있기까지 하다. 바라보고 있으면 심장이 쿵쿵, 뛰고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불길하네요.”

더군다나 흑장미 중심을 장식했던 것 같은 보석은 산산이 조각나 있었다. 저게 원래 형태였다면 보석은 블랙 다이아몬드쯤이 아니었을까? 조각으로 겨우 짐작해 볼 수 있을 정도였다.

“……누가 부쉈나. 꼭 그런 느낌이네요.”

으스스한 느낌을 지워 내며 장미의 주변을 살폈다. 흑장미 주변으로도 짐승 같은 형태가 보이긴 했다.

하나 신기하게도 두 마리였다.

“한쪽은 독수리? 까마귀 같고, 하나는 고양이? 재규어인가.”

이쪽은 장미색이랑 통일이라도 한 것인지 둘 다 새카만 색이었다. 특히 새 쪽은 날개는 까만데 부리가 독수리처럼 구부러진 느낌이라 어느 종인지 알기가 어려웠다.

손가락이 거의 한 바퀴를 돌았다. 나머지 자리는 흰 장미가 차지하고 있었다.

“흰 장미도 영 상태가…….”

이상하네. 흰 장미는 반쯤 핀 형태였지만 선을 그리듯 촘촘히 박힌 흰 광물이 누가 봐도 오염된 듯 검은 반점이 찍혀 있다. 멀리서 보면 벌레 먹히거나 병충해에 시들시들해진 장미 같기도 했다.

신기한 건 광물 중에 몇몇 개는 느리지만 제 흰빛을 되찾아 가고 있다는 거였다.

스스로 재생하려 하는 것처럼.

처음의 붉은 장미의 조각들이 아예 빛을 잃은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다른 장미들처럼 흰 장미 쪽에도 동물 형상이 있었는데, 흰 장미 옆에는 귀가 둥그런 형태의 동물이 장미를 품듯이 웅크리고 있었다.

“흠, 곰인가, 저건?”

손가락이 한 바퀴를 모두 돌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중간으로 이어진다. 신기하게 네 개의 장미와 각기 선으로 이어진, 한중간의 장미는 푸른 장미였다.

“허, 저건 또 왜 저래.”

다만 이건 누가 도려내 가기라도 하듯이 꽃 부분이 푹 파여 있었다.

남은 건 잎과 줄기뿐이었다.

푸른 장미였다는 것도 가장자리에 조그맣게 남은 푸른색으로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쪽은 장미 옆에 있을 동물 형태도 누가 푹 도려낸 까닭에 뭐가 있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도려내진 것을 봐서는 긴 몸통에, 꼬리가 긴 형태였겠거니 짐작할 뿐이었다.

“멀쩡한 건 노란 장미뿐이네.”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리케도르안을 향했다.

“노란 거 말고는 하나같이 멀쩡한 게 없네요, 그죠?”

“네.”

그가 날 보며 끄덕였다. 사실 리케도르안은 석판 쪽에 관심이 통 없어 보였다.

그저 내가 바라보고 있으니 얌전히 기다려 준 느낌이었다.

“저게 뭘 뜻하는 것 같아요?”

리케도르안은 큰 눈을 깜빡이며, 모르겠어요, 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나도 그에게서 별다른 대답이 돌아올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마음에 걸렸을 뿐이지.

……붉은 장미, 그리고 제국을 대표하는 ‘장미’.

<이 제국엔 타국에 없는 특별한 세 가지가 있다고 하지 않나.>

남작 아저씨가 말한 특별한 것 중 세 번째는 능력을 가진 ‘장미’였다.

<여기서 장미란 제국의 다섯 가문을 일컫는단 얘기가 아주 유명하지.>

과연 저 그림과 아저씨에게 들었던 다섯 가문과 전혀 무관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아주 적겠지.

리케도르안의 가문 문양은 ‘붉은 장미’다. 무엇보다 저 벽화 속의 붉은 장미, 꽃잎 하나하나마다 보석이 박혀 있고, 몇 개는 빛을 아예 잃었다.

……그리고 리케도르안은 몸에 그려진 장미의 꽃잎이 사라지기 전까지 ‘동반자’를 찾아야 한다. 다시 말해 시간이 지날수록 꽃잎이 떨어지지.

다 떨어지기 전까지 찾지 못하면 죽는다.

저 벽화와 아주 비슷하지 않은가?

“허…….”

그렇다면 여주인공의 것은 흰색일 거고. 나는 반점이 찍힌 흰 장미를 보다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흑장미는 체이서의 것일 텐데.

‘왜 저건 부서져 있지?’

뜻을 알 수가 없는 그림이었다. 뭔갈 상징하는 것 같긴 한데 정보가 너무 없어서 어렵다고 할까. 어쨌거나 나와 상관있는 일은 아닌데 괜스레 마음에 걸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 세계는 책, 즉 주연들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저 벽화의 모습들이 주연들에게 변고가 생겼음을 뜻한다면…….

나비효과처럼 내 삶도 순탄하지 못할 수 있었다.

일단은 저게 연관이 있든 없든 기억해 두자.

그리고 이보다……. 나는 난감한 눈으로 기둥과 벽화를 번갈아 바라봤다. 처음에 분명 감방 벽을 원래대로 돌릴 방법이 있을까 싶어서 온 거였지. 하지만 도착한 이곳엔 저 요상한 벽화와 기둥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어떡하죠…….”

이대로 돌아가면 리케도르안의 감방은 금세 들키게 될 거고, 문제가 커질 터다.

헤르님 대공을 돌려보내기는커녕 그가 바로 달려올지도 모르고. 나는 끙끙 숨을 흘렸다. 옆을 바라보니 리케도르안이 내가 하는 양을 따라 하며 끙끙대고 있었다.

아니, 이 사람은 왜 이러는 거야?

“당신은 왜 끙끙대는 거예요?”

“……히, 힘들어 보여서요. 아, 안아 줄까요?”

“네?”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이 남자가 부끄러움도 모르고. 뭐라는 거야. 지금. 나는 코를 찡긋 찡그렸다.

“……본인 입으로 말하고 그렇게 빨개지고, 눈도 마주치지 못할 거라면 하지 말지 그래요.”

“그, 그래도…….”

그가 시무룩한 얼굴로 어깨를 살살 흔들었다. 애교라도 피우듯이. 그의 어설픈 몸짓에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웃다 시선을 떨어트렸다.

아, 팔찌.

제이르의 팔찌가 여전히 희미한 흰빛을 드러내고 있었다. 허겁지겁 손을 들어 올렸다.

“팔찌의 빛이…….”

한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바로, 그의 쇠사슬이 이어진 기둥이었다. 나는 쇠사슬과 기둥을 번갈아 보다가 천천히 기둥으로 다가갔다.

“이아나.”

“아, 리케도르안, 거기 서 있어 봐요.”

나는 기둥 앞에 쪼그려 앉아 쇠사슬을 들어 올렸다. 언제 들어도 묵직하네.

“그대로 움직이지 말아요.”

나는 쇠사슬과 이어진 부분을 유심히 살펴봤다. 팔찌가 괜히 이쪽을 가리킨 건 아닐 거다. 뭔가 없을까? 이렇게 보다 말고 조심스럽게 톡 팔찌로 건드려 봤을 때였다.

쿵.

땅이 흔들렸다. 나는 얼른 눈을 들었다. 방금 뭐야? 그러나 이미 팔찌의 보석은 기둥과 완전히 닿은 뒤였다.

쿠쿠쿵. 쿵!

발밑이 마구 흔들렸다.

“뭐야, 지진?”

정말 지진이야? 미친. 이건 스케일이 너무 크잖아! 나는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고, 리케도르안을 본 순간 멈칫했다.

“리케도르안?”

그가 상체를 숙인 채 양손으로 제 배를 부여잡고 있었다.

나는 지진도 잊고 황급히 그에게로 달려갔다.

“리케도르안, 리케도르안! 어디 아파요? 괜찮아요? 정신, 정신 차려 봐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그였다. 그런 그가 순식간에 식은땀을 흘리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벌어진 그의 입술로 밭은 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땅은 여전히 흔들렸다.

팔찌를 닿게 하면 안 되는 거였나? 내가 어떡하면 되는 거였어!? 괜스레 스스로를 자책했지만 자책한다고 해결책이 나오는 건 아니었다.

“리케도르안, 정신 잃으면 안 돼요, 우리 돌아가야 해!”

흔들리는 땅이 심상치 않았다. 이곳은 아주 오래된 곳이라 하지 않았나? 어쩐지 튼튼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여기서 무너지기라도 하면 끝장이었다!

그러나 그의 몸을 마구 흔들다 말고 나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어라. 리케도르안의 몸이…… 조금 전보다 커진 것 같은데.

이는 착각이 아니었다.

천천히 고개를 드는 얼굴은 조금 전보다 더 길어진 머리칼이 이마와 눈을 살짝 가렸다. 땀에 반쯤 달라붙은 머리칼 사이로 나른하게 깜빡이는 눈매가 보였다. 날 담는 순간 긴 눈매가 느슨하게 휘어졌다.

“주인님.”

난 입술을 깨물었다. 이 상황에도 농을 할 기력이 있을까.

“이아나라고 했지, 내 이름.”

난 얼른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보다 시간 없어, 일어나.”

어느 쪽 인격이든 간에 데리고 이곳에서 나가야 했다. 아니나 다를까 툭, 투툭. 천장에서 돌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대체 왜 갑자기 무너지려 하는 건지 몰라도 얼른 빠져나가야 한다. 리케도르안은 잡힌 손을 잠시 보는가 싶더니 내 손을 떼어냈다. 그러고는 제 손을 휘감았다.

“나, 걱정해 주는 거야?”

가늘어지는 눈은 방금 막 천국에서 뚝 떨어진 천사인가 싶게 황홀하고도 아름다웠지만, 여기에 빠져 있을 시간이 없었다.

“지금, 나, 꼬실 시간이 없다고! 일어나, 못 들었어?”

그가 배시시 웃었다.

“뭐야, 꼬시는 건 알고 있었어?”

“뭐?”

“그럼…….”

내 어깨 위로 양팔이 올라왔다. 상황도 잊고 묵직함에 흠칫 놀랐다.

“넘어와 주나?”

“진짜, 내 입에서 욕이 튀어나오길 바라?”

일단 이 남자 입부터 막아야 하는 건 아닐까. 천이라도 찢어서 입을 막아 놔야 한다. 그리 생각하는데, 리케도르안이 자리에서 홱 일어났다. 이어서 강하게 나를 잡아당기고, 시야가 흔들렸다.

눈을 뜨면 리케도르안의 품에 기대어 있었다. 내가 있던 자리에는 꽤 커다란 돌이 떨어져 있었다.

“……봤지? 급한 상황인 거.”

우리 얼른 여기서 나가야 해, 나는 들릴 듯 말 듯 속삭였다. 돌을 보고 놀란 가슴이 쿵쿵 뛰었다.

아, 목소리가 너무 작았나.

입을 열기도 전에 따뜻한 손이 내 손을 쥐었다.

“알았어.”

그가 유혹하듯 성자 같은 낯으로 미소 지었다.

“네 말은 뭐든 들을 거야.”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휙 내 몸을 들어 올렸……. 왜 들어 올려?

“잠시만, 말을 잘 듣는 거랑 들어 올리는 건 무슨 상황인데?”

“네가 말했잖아? 무거운 건 들어 달라고.”

“허, 뭔가 이상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보다 난 무겁지 않, 흡!”

가까워진 얼굴에 난 급히 입술을 다물고 머리를 물렸다. 그의 팔이 단단히 날 붙잡고 있는 통에 떨어지진 않았지만 일정 거리 이상 멀어지지도 않았다.

리케도르안은 당황하는 대신 그대로 눈을 접어 아름답게 웃었다.

“아, 아까워라.”

한껏 낮아진 음성을 귓가에 흘러내면서. 쿵쿵. 손끝에서 뛰는 것이 내 박동인지 그의 가슴에서 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 됐고. 일단 들었으면 달려, 어서!”

쿠르릉.

진동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었다. 리케도르안은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돌렸다.

“분부대로.”

주인님, 날 놀리는 듯한 호칭을 잊지 않으면서.

그는 놀랍게도 나를 안은 채 한 손에는 등불까지 들고 달리는 기행을 보였다.

거기다 목과 손, 다리에 쇠사슬이 늘어진 것이라곤 믿을 수 없는 속도였다. 뒤를 살짝 보면 흔들리는 땅이 보였다. 벽이나 바닥이 쩌적 갈라지는 모습을 보자니 소름이 돋았다.

“……어쩐지 통로가 닫히는 기분인데.”

“잘못 본 게 아닐걸.”

그가 대답했다. 리케도르안은 짐짓 진지한 음성으로 낮게 중얼거렸다.

“앞쪽 통로도 좁아지고 있어.”

달리고 있는 그가 말하는 거라면 맞을 것이다. 나보다 감각이 훨씬 좋은 남자였으니까.

“어떡하지, 주인님?”

그의 음성은 여유롭게만 들렸지만, 바로 옆에서 듣는 나는 알 수 있었다. 목소리 끝에 작게 어린 긴장을.

“……주인이 아니래도.”

“그래, 이아나.”

우리는 애써 긴장을 지우기 위해 하잘것없는 대화를 주고받았다. 다음은 본론이었다.

“좀 더 빨리 달려도 될까? 그래야 할 것 같은데.”

그 말에 나는 흘끗 그의 다리 쪽을 보았다. 그러고는 앞을 보았다. 푸른빛이 깜빡이는 복도는 아직 끝이 보이지 않았다.

“……가능하겠어?”

“해 봐야 하지 않을까.”

리케도르안이 나른하게 웃었다.

“이아나를 살리려면.”

“……그런 농담은 하지 말아 줘.”

내 삶을 감방에서 마감한다니,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단 말이다.

“이거 내가 안고 있을게.”

나는 품 안에 안은 등불을 톡톡 두드렸다. 횃불이 마구 일그러지고 있었다.

“이렇게 들면 앞이 잘 보이지?”

앞을 보고 달리던 리케도르안의 시선이 잠시 내게로 돌아왔다. 뜻을 알 수 없는 시선이었다.

“당신은 할 수 있을 거야.”

물론 나는 그가 성인이 된 모습을 볼 때마다 그의 표정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긴 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했다.

“걱정 마. 내가 이걸 꼭 안은 채로 옆에서 빛이 될 테니까.”

유리 돔을 톡톡 두드려 영화 속 주인공인 양 과장스럽게 말했건만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이상함에 고개를 들었다가 깜짝 놀랐다. 앞만 봐도 모자랄 사람이 나만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으니까.

“앞, 앞을 봐!”

“이아나.”

깊고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나를 불렀다.

“……그 말 꼭 지켜야 해?”

무슨 말? 이걸 안고 있겠다는 말? 나는 고개를 갸웃하다 말고 얼른 끄덕였다. 상황이 급했으니까. 그러자 그는 웃으며 다시 중심을 잡고 달렸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마치 이전까지는 연습 게임이라도 됐다는 양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속도였다.

“……몸이 가벼워, 이아나.”

리케도르안이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으나 나는 가벼이 받아들일 수 없었다.

본래의 그는 16살, 그리고 그의 신체도 16살일 거다. 하지만 지금은 억지로 미래의 모습을 끌어온 것이라 하지 않았나. 훗날 각성을 위해서 말이다.

제이르의 설명이 이랬었지.

그러니까 미래의 힘을 끌어다 쓴다는 건 결국, 현재의 그에겐 부담이 되는 것이 아닐까?

이를 뒷받침하는 것들이 있었다. 변화를 겪고 나면 정해지기라도 한 듯이 몸이 뜨거워지고 열이 나던 리케도르안이었다. 따라서 지금 모습으로 무리하듯 뛰는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이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었으니 나는 별일 없길 바라며, 한 손으로 횃불을 꼭 껴안고 다른 손으로 그의 가슴을 붙잡은 채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한참 이어질 것만 같던 복도에 드디어 끝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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