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알아요.”
“……알아요?”
“네, 알아요!”
미심쩍은 물음에 그가 발끈하여 더욱 크게 말했다.
워 깜짝이야. 상급 간수로 바뀌며, 더는 쇠창살 밖에는 감시 인원이 없어서 들을 사람이 없단 게 다행이었다. 아니었으면 저 밖까지 작게나마 들렸을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발끈한 거지?
“아니, 그렇게 발끈할 일……. 뭐. 그래요.”
그래. 그럴 수 있지.
“그럼 어떤 의미인데요?”
우리 사이는 여전히 가까웠다. 리케도르안은 불편하지도 않은지 내 양옆을 짚은 자세를 유지했다.
덕분에 나는 그의 눈동자를 포함해 그의 목에 걸린 구속구마저도 선명히 볼 수 있었다. 잔뜩 붉어진 그의 목울대가 꿀꺽 움직이는 것까지도.
“이건…… 알아요.”
청아하던 목소리가 살짝 낮아졌다. 이건 이상한 느낌을 자아냈다. 괜스레 발바닥에 땀이 나는 것 같달까. 동시에 옆을 짚었던 그의 손이 살살 움직였다.
“메리다가 알려 줬어.”
손끝과 손끝이 닿았다.
“피가 섞인 사람과 친구는 이렇게 손을 잡을 수 없다고.”
두 쌍의 눈동자가 정면으로 마주쳤다. 수줍게 내 손등 위를 맴돌던 그의 손이 손가락 사이로 파고든 건 그 순간이었다.
“이아나.”
나는 목 안쪽을 살짝 긁는 듯한 음성에 움찔했다.
“당신은 내게, 쿠키를 줄 때 이렇게 잡아 줬잖아.”
리케도르안의 손끝이 파르라니 떨렸다. 얼마나 긴장을 한 것인지 손끝으로도 알 수 있었다. 이상하지, 그 긴장이 내게로 넘어오는 기분이었다. 찬 손끝이 내 손을 깊이 파고들 때마다 숨이 절로 넘어간다.
……리케도르안이 이렇게 컸나? 아니, 성장한 것은 아니었다. 잔뜩 붉어진 얼굴은 내가 아는 순진한 얼굴 그대로였다. 하지만 나는 그가 소년 모습에서도 나보다 크거나 비슷하단 사실을 다시 한번 인식할 수 있었다.
리케도르안의 얼굴이 나보다 미묘하게 높은 위치에 있었다. 고개를 꺾으면 금방 입술이 닿을 것처럼.
“……싫었어요?”
아니……. 싫고 말고를 떠나서 그건 당신한테 마법을 써 주려고 넘겨줄 때 이야기잖아.
“아니, 싫지는 않았는데.”
“그럼?”
“좋다고 말할 상황도…… 윽.”
나는 눈을 난감하게 굴렸다. 반쯤 눈을 내리뜬 청초한 낯이 피할 새도 없이 앞에 있었다.
“일단 더는 다가오지 말아. 거기서 얘기해.”
이 얼굴은 반칙이잖아.
“……도대체 그런 잘못된 개념을 심어 준 사람이 누구예요? 메리다? 그 사람은 누구죠?”
지난번에도 리케도르안에게서 한 번 나온 적 있는 이름이다. 나는 애써 상황을 피할 궁리를 하며 말을 돌렸다.
“메리다는 나이 든 하녀였어요. 가끔 내 옷을…… 가져다주고 물을 가져다주는.”
일종의 유모 역할을 한 사람이었던 걸까. 내가 기억하는 이름은 아니었으니 알 수 없다. 주요인물은 아니었을 것이다. 적어도 리케도르안 생에는 꽤 중요했던 사람 같지만.
“음, 그래요. 중요한 사람이었구나.”
나는 이렇게 말하며 살살 손을 들어 올렸다. 리케도르안이 잡고 있는 통에 그의 손도 같이 딸려 올라왔다.
“그런데요, 뭐, 친구나 남매라고 이렇게 손을 잡을 수 없는 건 아니거든요?”
성별이 다른 친구면 확실히 좀 유별난 거고, 친남매면 경우에 따라서 절대 못 할 일일지도 모르겠다 싶지만 그건 얘기하지 않았다.
오빠가 했던 행동이나 르나그를 보아선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스킨십이 보편화 되어 보이는 이 세계는 다를 수도 있는 거잖아?
“그러면요?”
“뭐가 그러면요예요?”
“이것도 되는 건가요?”
리케도르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요?”
묻다 말고 아차 싶었다. 이틈을 틈 타 손을 빼려 했었는데, 손이 다시 붙잡혔다. 아프지는 않았다. 차르르륵, 그저 늘어진 쇠사슬의 감촉이 선명하게 손목에서 느껴졌을 뿐.
“메리다가 그랬는데. ”
리케도르안의 상체가 천천히 기울어졌다. 그리고 나는 나보다 큰 몸에 파묻힌 꼴, 거의 안기다시피 한 자세가 되고 목덜미로 그의 숨이 느껴졌다.
“이렇게도 함부로, 해선 안 된다고. 정말…… 그래요?”
이상하게도 소년에게서는 지하의 꿉꿉한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다. 도리어 좀 더 시원한 듯한 상쾌하고도 청아한…… 백합 향이 나는 것 같았다. 설마 이런 것도 주인공 보정인가? 애써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눈을 굴렸다.
“이렇게…….”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몸을 크게 떨었다. 홱 얼굴을 들어 올렸다.
지금, 무슨…….
목덜미, 아니, 상의가 살짝 내려온 빗장뼈 근처로 푹신한 감촉이 내려앉았었다. 날숨이 닿았던 감각이 생생했다. 분명 이건.
입술이었다.
“……하는 것도, 안 돼요?”
“뭐, 뭐, 뭘…….”
그가 내 머리보다 아래에서 눈만 살짝 굴려 나를 향했다. 리케도르안의 속눈썹이 살랑 움직였다. 뜻밖의 순진한 시선이었다. 그것도 저 붉은 입술을 달싹이면서.
“나랑 하면 안 돼요? 할래요?”
“……주어든 목적어든 붙여 줄래요?”
오해하기 딱 좋은 말이니. 나는 뒷말을 꾹 삼키며 그의 손을 잡았다. 어느새 내 등까지 살짝 올라온 손이었다.
세상 요망한 짓은 다 해 놓고서 얼굴과 시선은 제가 무슨 일을 한 거냐는 듯 무언가 배워도 단단히 잘못 배운 아이처럼 순진하기 짝이 없었다.
“그, 목에 입술을 묻…… 아니, 그런 건 어디서 배웠어요.”
“메리다가 하면 안 된다고 했어요.”
“그거야 당연하죠. 아니, 당연하니까 하지 말아요.”
아마도 메리다란 하녀를 만났을 당시의 리케도르안은 아주 어린 아이였을 것이다. 어린아이가 친근한 어른에게 얼굴을 비비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이렇게 커진 채로 할 만한 행동은 아니란 거다. 거, 제가 오해했네요, 메리다 씨. 아주 잘 가르치셨습니다.
“잘 배우셨네요. 하지 말아요.”
“그럼, 여기지 않아 줄 거예요?”
“네? 뭘요?”
“남동생.”
그가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잔떨림이 남아 있는 목소리가 어째서인지 청년인 그의 모습보다 더욱 큰 긴장을 불러일으켰다.
“……그건 그냥 느낌이.”
그랬다는 거지, 실제로 당신을 남동생처럼 보겠느냐, 이런 말을 해야 할 텐데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이건 다 이 남자가 대담하게 손목을 잡은 주제에 나보다 더 떨고 있어서다.
뺨도, 목소리도, 손끝도.
나는 순순히 인정했다. 이 크기와 떨림은 결코 귀여운 옆집 동생으로 여길 수준이 아니었다.
“이래도요? 아무렇지 않게 느껴져요?”
“뭘 이래도요, 에요? 이렇게 떨고 있으면서.”
정곡으로 지적했더니 그가 움찔 떨었다. 곁눈질로 보이는 옆얼굴에 얼핏 열기가 스쳐 지나간 것 같았다. 잘못 본 것이 아니라 새하얀 귀가 발긋 물드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치만 나, 나는 이렇게 하고 싶은데.”
조금 탁하지만 여전히 청아한 음성이 말을 살짝 더듬으며, 슬그머니 머리를 내렸다.
“당신 탓이야.”
툭. 머리의 무게가 어깨에서 고스란히 느껴졌다.
“왜, 오늘은 나를 보지 않아요?”
그는 내 오묘한 기분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이 핵심을 찔렀다. 왜 보지 않느냐니,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눈까지 마주쳐서 어떡하라고.
“내가 어떡하면 나를 봐줄…… 거예요?”
하지만 이쪽은 오늘 작정하고 날을 잡은 것인지 심장에 매우 무리가 가는 얼굴로 나를 빤히 응시했다.
저 하얀 낯을 잔뜩 붉히면서.
“벼, 별로예요? 보기…… 싫어요?”
그럴 리가 있겠나. 그저 나를 관짝에 보내려고 작정한 게 아니라면 보고 싶지 않을 따름이지. 나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오늘따라 왜 없던 어리광이 느셨을까?
“그럴 리가 있겠어요.”
“그럼…….”
“일단 놔 봐요. 우리 놓고 얘기하죠. 네?”
리케도르안은 머뭇거리면서도 내게서 떨어졌다. 이렇게 닿은 것도 닿은 것이라고 체온이 떨어지자 조금 으슬으슬한 느낌이 들었다.
예전에 짐승은 인간보다 체온이 더 높다고 들은 건데. 설마 리케도르안도 그런 걸까?
가만 보면 이 지하에 있으면서도 추위에 떠는 걸 거의 본 적이 없다. 부친에게 맞아서 아픈 것 때문에 으슬으슬 떤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리케도르안은 내게서 떨어졌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여전히 내 손을 놓지 않겠다는 듯 살포시 깍지를 낀 채, 눈치를 보듯 내 눈을 보았다.
마치, 여기까지는 돼요? 하고 묻는 것처럼.
……이것 참 요망한 건지, 순진한 건지.
나는 작게 헛숨을 들이켰다.
그러고는 그의 손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조금 전부터 신경 쓰이던 것이 있었는데……. 곧 내 시선이 한곳에서 멈췄다.
아, 역시나.
그의 손목은 수갑에 살짝 긁혀 붉어져 있었다. 아까 쇠사슬 당겨지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다고 했어.
그는 내 시선을 머무는 곳을 바라보더니 무엇이 문제냐는 듯 내 시선을 따라 고개를 모로 돌렸다.
“……손목 안 아파요?”
아픈 걸 아프다 말할 줄 모르는 무구한 아이, 아니 짐승을 보는 기분이었다.
“아프지 않아요.”
그에게서 작게 흘러나오는 음성을 듣고 웃어 버렸다. 이 남자를 어쩌면 좋을까. 생각하면서.
“그래요, 지금은 모르지만 언젠가는 아픈 게 뭔지 알았으면 좋겠어요.”
아무래도 이건 내가 알려 줄 수 있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나는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아픔을 깨닫는 건 중요하니까.”
그가 발그레해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픔은 더 큰 위험을 경고하는 신호이기도 해요. 당신이 더 위험해지지 않게. 그러니까 무시하지 말아요. 그리고 나를 아프게 하는 것들을 그냥 두지 말아요.”
“…아프게 하는 것들.”
“그래요, 지금 당장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요.”
나는 그의 손을 잡지 않은 손을 들어 올려 가슴 위에 올렸다.
“기다려요. 기회를.”
내가 알려 주는 것이 뭐 얼마나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상식을 알려 주는 것 정도는 괜찮을 테다.
“언젠가 모두 돌려줄 날을요.”
이날은 당신에게 꼭 올 테니까.
그는 전부 이해하지는 못한 것 같았지만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죠?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기, 상처는 싫다고 여기세요. 자, 따라 해봐요. 싫어요, 안 돼요, 안 살 거야.”
나는 장난스레 끝말을 덧붙였다. 옥장판 안 사요. 물론 여기서는 통하지 않을 농이었다. 리케도르안은 앞쪽의 표현만 이해했는지 되풀이했다.
“싫다고요?”
“응. 싫다고요.”
그가 싫다, 싫다…….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고개를 바로 했다.
“……기억, 할게요.”
시리도록 청아한 푸른 눈이 나를 눈에 박아 넣듯이 올곧게 응시했다.
“아무도 내게…… 알려 주지 않았어요.”
그가 깍지를 낀 손에 힘을 주었다.
“당신 말고는.”
기뻐 보이는 얼굴이었다. 언젠가 유기견이 자신을 데려가는 입양자를 보며 환히 웃음을 터트리는 영상을 본 적 있다. 말을 할 줄 모르는 동물도 이토록 선명하게 웃을 수 있구나 신기했다.
지하에서 처음으로 꺼내 준 것이 나니까 이런 반응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바꿔 생각해 나였다 하더라도 내게 이렇게 해 준 사람을 잊을 수 없을 것 같으니까.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아무리 무언가를 해 준다 한들 여기까지라는 걸.
“그리고 한 가지만 더요.”
나는 입술을 끌어 올려 장난치듯이 미소 지었다.
“내게 정 주지 말아요.”
명확히 하자. 내가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기한도 한계도 명확하기 때문이란 것을.
“전에 한 말 기억나죠? 먹을 거 함부로 받아서 먹지 말라는 말.”
그가 멈칫했다.
“누가 언제 어디서 당신을 속이고 당신의 등을 칠지 몰라요. 그러니까 나조차도 믿지 말아요.”
나는 그저 알량한 호의만을 베풀고는 사라질 사람이니까.
“……싫어요.”
“네?”
“싫은 건, 싫다고 말하라고 했어요.”
그가 퍽 단단한 눈길로 말했다. 나는 이에 조금 놀란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와……. 빨리 배우네.”
이렇게 말하는 한편 우습게도 장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사람을 향해 이러면 안 되겠지만, 반려동물을 키우는 기분이 이런 기분일까 싶기도 했다.
“근데 내가 한 말은 사실이니까 새겨들어요. 나한테 정 줘서 당신에게 좋을 것 없어요.”
“왜……. 그렇게 말해요?”
그는 슬픈 얼굴이었다. 이해가 어려운 표정이기도 했다. 나는 그의 뺨을 콕 찔렀다.
“일단 나는 당신의 손목이 이러해도 약을 가져오지 않는 한 바로 치료해 줄 수 없고.”
시선을 흘끗 내려 그의 손목을 느릿하게 훑고 떼어냈다.
“또…… 지금 당신에게 나쁜 짓을 하나 하러 온 거니까요.”
나쁜 짓, 암. 그래. 나쁜 짓이지. 제이르가 주었던 도구를 떠올린 나는 속으로 쯧 혀를 찼다.
“나쁜…… 짓이요?”
여기까지 말하면 아무리 리케도르안이라도 경계할 법하겠다 싶었다. 그렇게 나오면 어쩔 수 없다 여기고 물러날 생각도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남자를 일부러 아프게 하는 짓은 내 원칙에도 양심에도 맞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한 것과 동시에 몸이 살짝 딸려 움직였다.
“그럼, 그 나쁜 짓, 당하면.”
“어…….”
“옆에 있어 줄 거예요?”
리케도르안이 당기는 것은 좋았는데, 내가 당황한 나머지 균형을 잡지 못했다.
그대로 무너지려는 몸을 리케도르안이 잡았다. 그러나 그도 급작스럽게 잡은 통에 대비하지 못한 것인지 균형이 기우뚱 기울었다.
어, 엄마야?
결국 리케도르안의 몸도 뒤로 기울었다. 시야가 뒤집히는 것과 함께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쿵!
꽤 커다란 소리가 났다. 그런데 이상하지,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그저 살짝 얼얼하고 푹신한 느낌이 들었을 뿐.
눈을 뜨자 하얀 셔츠가 눈에 고스란히 들어왔다. 동시에 눈을 감은 채 찡그린 리케도르안이 보였다.
“리, 리케도르안? 세상에, 괜찮아요?”
“으…….”
아무리 그라도 감방 벽에 정면으로 박은 건 아픈 모양이었다. 살짝 나른한 신음을 흘렸다. 상황도 잊고 얼굴을 붉힐 뻔했지만, 얼른 정신 차리고 몸을 일으켰다.
“세게 부딪친 거예요? 아니, 그러게 사람을 왜 잡아, 아니. 아니지.”
나를 붙잡은 사람을 탓하면 되나. 나는 내 뺨을 찰싹 두드리고는 얼른 그를 살폈다.
그의 쇠사슬이 워낙 무거운 탓에 뒤로 넘어질 때 더욱 하중이 실린 듯했는데, 다행히 부딪친 것 외에는 큰 부상은 없어 보였다.
나는 괜스레 족쇄와 쇠사슬을 노려봤다.
그러다 한숨을 쉬었다.
“……피가 안 난 것을 다행이라 말해야 한다니. 유쾌하지는 않네요.”
“괜찮…….”
“괜찮다고 하지 말아요. 안 괜찮아 보이니까.”
나는 그의 몸에서 내려와 그를 일으켰다. 아울러 이 쇠사슬이 얼마나 무거운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내 몸이 절로 딸려 내려갈 만큼 묵직했으니까.
얼굴도 보지 못한 헤르님 대공에 대한 욕이 절로 흘러나왔다.
“저기요, 리케도르안. 내가 할 말은 아닌 걸 정말 잘 아는데 말이죠.”
나는 못마땅한 낯으로 수갑을 잡았다.
“웬만하면 당신에게 이거 채운 사람은 용서하지 말아요. 알았죠?”
“……용서요?”
그는 무구한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어느새 아픔은 잊은 듯 맑은 눈이었다. 참 회복도 빠르기도 하지.
“네, 용서요. 당신 같이 어린 사람한테 이런 걸 채우는 게 제정신이에요? 이 지하만 해도!”
물론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훗날의 리케도르안은 모든 걸 용서한다는 것을. 그런 것으로도 모자라 자신을 학대한 부친을 죽인 악당 체이서에 대한 원한을 숨기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그는 어쨌거나 정의로운 가문 헤르님의 수호자, 그 고결한 정신을 이어받은 남자주인공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이렇게 누군가를 도무지 미워할 수 없을 것 같은 눈을 하고 있는 걸까.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아픔을 모르는 사람, 미움도 증오도 훗날 모두 용서하는 사람에게 내가 말을 해 봐야 어찌하겠나. 왠지 계속 이야기했다가는 댁네 부친이 아주 그냥 개새끼여, 하고 말해 버릴 것 같은 심정에 입을 얌전히 다물기로 했다.
“……용서하지 말아요?”
“네? 아니…… 아니에요. 그냥 흘려들어요.”
나는 수갑을 잡았던 손을 놓으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빠르게 그의 손에 붙잡혔다.
“그렇게 하면, 그렇게 해서 당신이 편하다면 안 할게요, 용서.”
“……네?”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마치 회사 나가는 주인의 옷자락을 잡는 강아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아뇨, 그러지 말아요. 날 위해서는 더더욱.”
나는 망설이다가, 결국 하려던 말을 툭 뱉었다.
“나 곧 출소해요.”
“출소?”
“이 감방을 나간다고요.”
다른 손으로 그의 손등을 덮었다.
“우린 아마 다시 보지 못할지도 몰라요.”
잘은 모르지만 그렇지 않을까. 아니, 그럴 거다. 확실했다.
훗날 리케도르안이 감방을 나가게 되면 이 나라에서 가장 고귀한 신분이 된다. 바로 대공이라는 대단한 신분이. 그에 반해 나는 뭐, 나쁘지 않은 가문임이 분명했지만, 가문의 후광을 입고 뭘 할 예정이 아니라서 말이다. 중앙으로 나올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난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나쁜 짓 하나 하러 온 거예요.”
이쯤 얘기하자 리케도르안이라도 어쩔 수 없었는지 그의 눈동자가 속절없이 떨리는 것이 보였다. 역시, 대놓고 나쁜 짓 한다는 얘긴 조금 그렇겠지?
이리 생각한 순간이었다.
“나……간다고요?”
“네? 아, 네. 맞아요. 나가요, 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그에게 확인사살과 같았나 보다. 그의 시선이 거세게 흔들렸다.
“여기서…….”
음, 아무래도 충격이 없을 수는 없었겠지? 나는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을 주고자 잠시 침묵을 유지했다. 그와 동시에 슬쩍 시선을 옮겼다. 나라고 정이 쌓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니 그렁그렁한 그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 유쾌하지는 않았던 터다.
괜스레 애꿎은 벽만 바라보며 살살 문지를 때였다.
달칵.
어라, 이건 뭐지.
손가락이 한곳에 덜컥 걸렸다. 분명 일정한 배열의 벽돌을 만지고 있었던 것 같은데. 나는 손을 떼어냈다. 그러고는 다시 만져 보았다. 이건 홈 같아 보이는데.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조금 어둑하긴 하지만 유심히 보면 이 벽돌만 다른 벽돌과 조금 다르게 생긴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여기만 더 어둡기도 하고? 평소에 리케도르안이 늘 등지고 있던 곳이라 보지 못한 부분이기도 했다. 나는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이것이 무엇인지 겨우 깨달을 수 있었다.
“……꽃? 아니, 장미?”
무언가를 덧그리듯이 홈을 파둔 것 같은데, 이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짐작이 가질 않았다.
꽃, 그중에서도 장미 같아 보이는데.
어느새 리케도르안마저도 의아한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아, 저기 여기에 이상한 것이 있어서요.”
내가 돌을 툭툭 조금 힘 있게 두드리며 홈을 살짝 긁을 때였다. 팔에 감겨 있던 것이 흔들림을 이기지 못하고 찰랑 부딪쳤다. 팔에 찬 것은 단연 제이르가 준 팔찌였다.
그리고 보석이 벽돌에 닿은 순간.
파아아앗,
새하얀 빛이 터져 나왔다.
“……빛? 이게 무슨…….”
“이아나!”
차르르륵! 쇠사슬이 거칠게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눈부심에 못 이겨 뒤로 물러난 몸을 단단한 것이 붙잡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대로 눈을 꽉 감았다. 괜스레 로맨스 판타지 소설 속이란 것도 잊고 이 무슨 판타지 같은 일이야. 욕을 한 바가지 하면서. 따끔한 고통에서 천천히 눈을 뜨자, 눈앞에 거대한 공동이 보였다.
“……동굴?”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리케도르안을 늘상 구속하던 쇠사슬이 있던 벽면, 그쪽이 뻥 뚫려 있었으니까. 고개를 돌려 리케도르안을 바라보자, 그도 얼떨떨한 얼굴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노파심에 묻는 건데 당신은 이런 게 있단걸 알고 있었어요?”
그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도 상당히 놀란 눈이었다.
“그보다 당신 쇠사슬이…….”
쇠사슬이 꽂혀 있던 벽이 사라졌으니 당연히 그의 쇠사슬 또한 잘려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목과 팔, 다리와 연결된 쇠사슬은 어디론가 연결되어 있었다. 시선이 쇠사슬을 쭈욱 따라 기차가 지나가듯 이어졌다.
놀랍게도 그의 쇠사슬은 구멍 안쪽으로 길게 연결되어 있었다. 어두운 탓에 안쪽을 볼 수는 없었다.
“엄마야, 어떡해…….”
나는 눈을 찌푸렸다. 지금 당장은 리케도르안이 숨죽여 살아도 모자랄 기간이었다. 오히려 제이르의 마법도구를 받아다가 그를 일부러 앓게 해도 모자랄 상황이었고.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이런 구멍이 뚫린 것이 상부에 알려지면 어떻게 될까?
르나그뿐만 아니라…… 헤르님 대공마저 알게 되면?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상상은 결코 좋은 쪽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헤르님 대공이 이 상황을 좋은 쪽으로 해석하든 나쁜 쪽으로 해석하든 문제였다.
사고를 친 거라면 사고를 쳤다고 좋아하지 않을 것이고, 이걸 리케도르안이 했다고 믿어도 문제였다. 각성했다고 믿을 테니까. 그러다 아직 실제로 각성하지 못한 그의 모습을 보고 실망하기라도 한다면, 더한 학대가 이어질지도.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떡하지?
이대로 밖으로 나가 상급 간수에게 알릴 수는 없다. 일이 너무 커질 것이다. 그때, 내 눈에 제이르의 팔찌가 잡혔다. 왜인지 이것이 깜깜한 구멍 앞에서 홀로 희미한 빛을 드러내고 있었다.
‘빛이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어.’
흰빛은 마치 나침반이라도 된 양 동굴 안쪽으로 뻗고 있었다. 마치 우릴 향해 들어가 보라고 등을 밀듯이.
“저, 리케도르안……. 지금부터 저기 들어갈 거거든요? ”
나는 꼴깍, 숨을 삼켰다.
“만약, 내가 저기 들어가서 나오지 않으면요. 아주 커다란 소리를 내서…….”
“시, 싫어요.”
“네? 아니, 저도 금방 나올 거예요. 혹시 모르니까.”
“가…… 같이 가면 안 돼요?”
차르륵. 리케도르안이 손을 뻗자, 쇠사슬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내 옷자락을 붙잡고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저도, 같이 가요.”
그가 입술을 깨물고는 굳은 얼굴을 했다. 그런 그를 보며 조금 무심히 리케도르안이 산책이 아니면 이렇게 쇠사슬에서 자유로울 일이 또 언제 있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요, 그럼 같이 가 봐요.”
어째서 갑자기 이 벽이 날아가 버렸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문제의 해결책은 늘 가까운 곳에 있다는 말처럼 저 안에 뭔가 실마리가 있진 않을까? 밖에 알릴 수 없는 상황에서 지푸라기라도 잡아야겠다 싶은 심정이었다.
“그럼…… 가 볼까요? 이전에 혹시나요, 조금이라도 위험하겠다 싶으면 우리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는 거예요. 도망, 알았죠?”
“네, 알았어요.”
그가 얌전한 얼굴로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였다. 그 모습을 보며 잠시 나와 리케도르안이 돌아서서 함께 달려가는 상상을 했다. 뭐랄까, 흡사 개와 사람의 경주 느낌인데.
거기까지 상상한 뒤에 리케도르안의 옷자락을 잡았다.
“저기, 여차하면 나 잡고 뛰어야 해요? 무섭다고 두고 가면 안 돼요……. 귀신 돼서 쫓아갈 거야.”
“네? 아, 네. 알았어요.”
그가 말 잘 듣는 짐승처럼 고개를 움직였다. 반쯤은 농담이었는데. 어쨌거나 내가 한 농에 내가 긴장이 풀렸다.
나는 수감실 한쪽에 장식된 등을 빼냈다. 간수가 주기적으로 등불 혹은 횃불을 갈아 끼우곤 했는데, 운이 좋게도 오늘은 유리 돔 같은 것 안에 있는 횃불로 이런 거라면 촛불보다 오래가는 편이었다.
“좋아, 가 볼까요?”
나는 리케도르안의 손끝을 살짝 붙잡고 걸었다.
“손…….”
“응? 왜요?”
리케도르안이 무어라 하려 했으나 눈이 마주치자 얼른 고개를 저었다. 횃불 위로 뺨이 살짝 붉은 것도 같았다.
구멍 안쪽은 상당히 어두웠다. 어찌나 깜깜한지 횃불로도 거의 세 걸음 앞쪽만 겨우 보일 정도라 자연히 걸음이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너무 깜깜하죠?”
“네에…….”
안 쪽은 꽤 서늘했고 따라서 손에 든 횃불과 서로 맞잡은 손만이 유일한 온기였다.
“그러고 보니 말이에요.”
잘은 보이지 않지만, 리케도르안의 쇠사슬이 끝도 없이 앞으로 이어지고 있었으니 이 공동은 긴 복도 형식인 것 같았다. 그나저나 대체 어디까지 이어진 거야?
“혹시 이 감방에 대해서 들은 적 없어요?”
당연히 들어본 적 없을 거라 생각하고 던진 질문이었다. 리케도르안은 아주 어린 시절에, 멋도 잘 모를 시절에 이곳 지하에 갇혔을 테니까.
“들어 본 적 있어요.”
하나 의외롭게도 답변이 들려왔다.
“들어 본 적 있다고요?”
“네……. 그 예전에 아버지에게서…….”
거기까지 들은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어떤 상황에서 들은 이야기인지 듣지 않아도 빤했다.
“음, 하기 힘든 이야기라면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네? 아뇨,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생각해 보고 있었어요.”
예상과는 다르게 그의 목소리는 평이했다. 덕분에 이 공간이 주는 어딘가 무겁고 음침한 공기가 이 청량한 음성으로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아버지가 말하길…… 여긴 아주 오래된 공간이라고 했어요. 상상도 할 수 없이 오래전에 지어진 것이라고요.”
이에 대해선 나도 들은 바 있다. 남작 아저씨가 신난 듯이 늘어놓은 것 중에 이 감방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으니까.
<이 제국엔 타국에 없는 특별한 세 가지가 있다고 하지 않나. 고대시대부터 이어져 지어진 지 천년이 넘는 이 감옥 ‘캄브라캄’.>
이외에도 두 가지가 더 있었던 걸로 아는데, 바로 황궁과 장미였지? 아무튼 간에 고대시대부터 이어져 천년쯤 된 감옥이라면…….
확실히 이것 같이 요상한 것 하나쯤은 있을 법했다.
“나도 들은 적 있어요. 고대시대부터라고 했나? 지어진 지 천년이나 되었다던데. 그럼 뭔가 있을 법도 하네요.”
나는 끙 소리를 내며 턱을 톡 쳤다.
“근데 고대시대란 건 뭘 말하는 걸까요?”
나는 아직 이 세계에 대한 기본 지식이 부족했다. 한국으로 치면 고조선, 웅녀, 환웅 뭐 이런 시조나 역사 같은 건 아예 모른단 얘기다.
남작 아저씨 얘길 들어선 여기가 뭔가 역사 깊은 곳이란 건 알겠는데 그게 뭔지 모르니, 지식이 전무한 거나 마찬가지다.
“그건 이 제국이 세워지기 이전의 시대를 말하는 걸 거예요.”
“네? 알아요?”
나는 조금 놀란 낯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대답을 들려줄 거라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조금은요? 아버지랑 메리다가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있어서.”
그놈의 헤르님. 그 망할 대공은 애를 때리면서 강의라도 했다는 거야? 뭐야. 헤르님 대공에 대한 인식이 더욱 나빠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좋게 생각할 수가 없는 인간이었다.
“아버지 말로는 장미가 활짝 피어 있던 시대였대요.”
“장미요?”
그렇게 물은 나는 아, 하고 탄음을 토했다. 장미, 저것이 그냥 의미 그대로의 장미는 아닐 것 같았다.
<장미란 제국의 다섯 가문을 일컫는단 얘기는 아주 유명하지. 그리고 각기 가문들이 가진 특별한 능력도 말일세.>
‘가문’을 이야기하는 거겠지?
“그때는 음, 장미가 왕이 될 수도 있던 시대라, 단 한 사람의 황제만 모시면 됐다고, 그래서 더 좋았다고 말한 적 있어요.”
한 사람의 황제? 여기는 제국이었다. 따라서 황제가 있는데, 얘기에 나온 왕과 황제는 서로 다른가? 대충 영주가 영지를 다스리는 게 아니라 왕들이 나라를 다스리고 그게 모여서 제국이 되었다, 이런 말인가.
“황제요? 지금도 황제가 있지 않나요? 왕은 또 뭐예요? 달라요?”
“네. 조금, 다르다고 들었어요.”
“어떤 것이요?”
“왕은 오직 장미만을 지배하는 사람이라고, 사실 무슨 뜻인지 저도 모르겠지만.”
잠시 멈칫했던 리케도르안이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아버지가 꼭 찾아야 한다고 했던 건 들은 것 같아요.”
꼭 찾아야 한다라, 적어도 지금의 헤르님 대공은 못 찾고 죽을 것임이 분명했다. 기억하는 내용 속에 그런 것은 없었으니까.
여긴 여주인공과 남자주인공, 악당 간에 빨간색 넘치는 19금 로맨스였지. 아마? 새삼스럽게 리케도르안의 어린 얼굴을 바라보다가 다시 앞을 응시했다.
그러고는 손등으로 끙 턱을 치다가 그쪽을 다시 바라봤다.
“감옥 얘기는 그렇다치고요, 리케도르안.”
“네?”
나는 빙글 몸을 돌려 그를 마주했다. 그의 모습을 쭉 훑는다. 열여섯, 나보다 두 살 어린 데다 어린 시절부터 갇혀 지낸 소년. 그래서 상식은 전혀 익힐 일이 없었고.
이렇게 보고 있을수록 왜 책의 내용이 시작부터 날것에 가까웠는지 익히 이해가 갔다.
여주인공 언니, 나중에 나한테 고마워했으면 좋겠네.
“당신, 나한테 조금만 배워야겠다.”
“배……워요?”
사실 내가 들고 있는 돔 안의 횃불은 상당히 무거웠다. 철제를 심으로 사용한 데다가 돔의 무게까지 더해지니 묵직하다 못해 팔이 조금 아리다고 할까.
아마 리케도르안이 이걸 들고 내가 저기 굴러다니는 철 막대기 하나 드는 쪽이 위기에 대응하기 쉽지 않을까 싶다.
만약 이 불을 버리더라도 나는 멀리 던질 수조차 없을 테니까.
“응. 다음에 말이에요, 그러니까 나중에요.”
나는 그와 쥔 손을 달랑 앞뒤로 흔들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