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20/87)

***

다음 날 오전.

전날 새벽에 제이르가 무사히 내게 새로운 마법이 걸린 물건을 건네주었다. 이번에 건넨 마법이란 본래 걸어 주었던 종류 말고도 내 쪽에서 그에게 말을 걸 수 있는 마법이었다. 제이르가 대답할 상황이면 답을 할 수 있다나.

문제는 그 새벽에 등장한 ‘간수’가 그 본인이란 거였지만.

<매수한 간수가 당신이었어요?>

<정확하게는 그 간수는 날 대신해 내 감방을 지키고 있겠지요.>

허? 이 남자가 위험한 줄을 모르네.

그러나 한시가 바빴으므로 다른 날처럼 대화를 나눌 여유는 없었다. 하지만 궁금한 건 있었다. 그래서 바쁜 그를 붙잡고 부득불 물었다.

예전에 제이르와 대화할 때 그가 분명 리케도르안이 성장하는 건 ‘일시적’이라고 했는데.

그게 아니었으니까.

이런 점을 자세히 물어볼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시간이 짧아 겨우 한마디만 질문할 수 있었다.

<대공자님이 종종 성장한 모습을 보여 주셨다고요? 성인처럼 보이는 모습을요?>

<네, 그렇다니까요.>

<……으음, 직접 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그것도 길지 않을 겁니다. 나쁘지 않네요. 그건 ‘과도기’란 소리거든요.>

뚜렷한 대답은 되지 않았다. 난 오히려 찌푸린 한편 제이르는 이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 보였다.

<이건 대단하신 겁니다. 보통 힘이 강할수록 과도기가 긴 것이니까요.>

……아닌 척하더니 팔불출 같은데, 이 사람.

어쨌거나 이렇게 건네받고 날이 밝아 지금이었다.

나는 곧바로 리케도르안에게 달려갔다. 바로 리케도르안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나 도착했을 때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난관을 맞이했다.

“죄송합니다, 이아나 씨. 오늘까지 보수해야 할 것 같습니다.”

계단 보수로 인해 지하 감방으론 간수만이 다닐 수 있다는 것. 아무리 이야기해도 위험을 이유로 거절당했다.

어찌할 도리 없이 돌아서야 했다.

초조한 마음을 꾹 누르면서.

***

이튿날, ‘특별 면회의 날’이 밝았다. 바야흐로 귀족 죄수들이 가장 기다리던 날이었다.

아침에 식당으로 들어간 나는 깜짝 놀랐다. 평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으니까. 단순히 들떠 있다는 소리가 아니었다. 사람들이 정말로 평소와 달랐다.

“세상에….”

대체 다들 어디에서들 가져온 것인지 화려한 숄이나, 망토, 거기다 꽃이 장식되거나 멋스러운 모자를 걸치고 싱글벙글이었다.

남녀 할 것 없이 보통 때와 전혀 다른 차림이었다.

<간단한 예장이나 망토가 허용되니 뭐 어떤가.>

나는 그제야 예장이 허용된다는 것이 어떤 뜻인지 이해되었다.

따로 티타임 시간도 주어진다고 했지? 그것도 번듯하게.

놀란 건 식사 시간에서뿐만이 아니었다. 식사 이후 응접실에서 시간 또한 다들 평소 자연인에 가까운 편안함은 어디로 던져버린 건지 고상함을 깃털처럼 펼쳐 보였고, 나는 놀란 눈을 숨기지 못했다.

“이아나, 내가 망토를 빌려줬잖니.”

샐리는 나만 평소와 같은 차림이라며 애정 섞인 타박을 주기도 했다.

“하하, 미안해요.”

이 모든 것을 보는 한편으로 내 마음은 편안하지 않았다.

모두가 웃고 떠드는 동안에도 밝게 웃지 못해 주위로부터 안 좋은 일이 있냐는 염려를 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저 이번엔 가족이 오지 않아서 그렇다.’ 라는 좋은 핑계를 댔고, 동료들은 모두 이해하고 넘어갔다.

내가 기다리는 건 휴식 시간뿐이었다.

리케도르안에게 가고 싶었으니까.

그렇게 드디어 시간이 지나 나는 복작복작 모여 있던 곳을 떠나 지하 감방에 도달했다. 오늘도 감방을 지키는 상급 간수와 적당히 인사를 나누고 창살 안쪽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

시간상으론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닌데 느낌이 그렇다고 할까.

하도 매일, 그것도 오전 오후로 봤더니 고작 그저께 저녁하고도 하루 못 봤다고 오래 보지 못한 기분이었다.

‘거기다 조금 찔리는 것도 있고.’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리케도르안에게 식사 후에 다시 찾아간다고 했지만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약속은 꼭 지킨다 호언장담까지 해놓고서는.

계단 공사를 핑계 삼을 수 있겠지만 그러고 싶진 않았다.

부끄러운 일이네.

물론 논 게 아니라 리케도르안을 돕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인 시간이었지만, 그렇다 해도 미안한 마음이 드는걸. 만나면 사과부터 해야겠다. 그리 마음먹고 고개를 들어 올린 때였다. 나는 그대로 눈을 깜빡였다. 창살 안쪽에서 자그만 숨소리가 들린다.

“리케도르안?”

눈앞에 새근새근 잠든 소년이 보였다.

자고 있어? 리케도르안이?

처음엔 또 기절한 건가 싶어 그의 코밑에 손을 가져가 보니, 색색 규칙적으로 숨을 쉬고 있었다.

……놀라라.

사실 그가 자는 걸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리케도르안은 매번 내가 올 때마다 눈을 뜨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니, 처음 만났을 땐 잠든 것 같아 보였지만…… 가까이 다가가자 깼었지?

이처럼 리케도르안은 본능적인 경계가 심한 편이었다. 우리가 가까워질 때까지 손만 들어 올려도 흠칫 놀라곤 했으니까.

짐승 같은 그의 면모나 능력을 생각할 때 위험을 감지하는 감각이 뛰어난 게 아닐까 싶었다.

학대로 인한 습관도 있겠지만.

그런데 지금 그는 이렇게 가까이 있어도 깨어나지 않았다.

나는 망설이다가 톡 그의 머리카락을 건드려 보았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살짝 파고들어 살살 만져 보았다. 와, 지하에 사는데 머리가 왜 이렇게 부드러워? 지난번보다 더 부드러운 것 같은데.

그나저나, 나는 흘끗 그를 곁눈질했다.

“신기하네. 이래도 안 깨어나고.”

바로 그때였다. 눈꺼풀이 서서히 움직이더니, 이내 작은 숲 같은 속눈썹 사이로 몽롱한 눈동자가 빛을 드러냈다.

“으응?”

나는 쓰다듬던 손을 그대로 멈췄다. 리케도르안이 눈을 깜빡깜빡하더니, 자신의 눈을 비볐다. 베고 잔 팔에 눌려서인지 코가 살짝 빨갰다. 마구 눈을 비벼도 잠이 깨지 않는지 미간 근육을 마구 찡그렸다.

“……온 거예요?”

이런 모습은 진짜 귀엽네. 심장에 좋지 않은 모습이야. 건전치 못한 생각을 지우며 그의 머리칼을 살살 매만졌다.

“응, 왔어요.”

“……이것도 내 꿈인 거죠.”

“으응?”

이게 무슨 소리야. 나는 눈을 크게 끔뻑였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를 다시 보면 마치 며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아이처럼 여전히 잠에 취한 얼굴이었다. 잠이 덜 깬 건가?

리케도르안의 손이 내 손목을 더듬는가 싶더니, 손끝이 파르라니 떨렸다.

“당신은 이젠 꿈에서만 나오니까. 여기서는 안 버릴 거죠?”

“네?”

“버리지 않는다고 해줘요…….”

나는 찬찬히 그를 관찰했다.

비비느라 반쯤 붉어진 눈가, 아슬아슬하게 내려와 나붓이 내려앉은 채 파르르 떠는 은빛 속눈썹, 그리고 속눈썹 끝에 위태롭게 매달린 눈물방울과 커다란 셔츠가 흘러내려 살짝 드러난 하얀 목덜미까지…….

아니, 잠시만. 착한 생각. 착한 생각!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이야기한 적 있지만 지하 감방은 창문 하나 없었고, 작디작은 횃불이 아니었다면 앞이 보이지 않았겠다 싶을 만큼 깜깜했다.

그는 이런 공간에서 잘도 낮과 밤을 구분했다.

하나 이건 다시 말하자면 한 번 엇갈리기 시작하면 시간 감각이 흐트러지기에 십상이란 말도 되었다. 그에게는 더욱 많은 시간이 흘렀던 걸지도 모른다.

리케도르안이 내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네? 버리지 말아요.”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를 얼굴로 리케도르안을 응시했다. 이 순간 느껴지는 건 미안함이었다.

<난 항상 약속 지켜. 다시 온다고 할 때마다. 돌아왔어요.>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은 지켰지만, 밥을 먹고 다시 오겠다는 말은 지키지 못했다.

거기다 다음 날 하루마저 공사로 인해 방문하지 못했지, 간수에게 말을 전해 달라 했지만 상황을 보아 전달되지 않은 것 같다.

내가 없던 반나절하고도 하루 동안 리케도르안은 밤새 날 기다렸던 걸까?

당신은 대체, 이 깜깜한 곳에서 어느 정도의 시간처럼 느낀 걸까. 내겐 짧은 시간이었다. 많은 일에 잠시 잊을 정도로. 그러나 그에겐 약속의 의미가 이토록 컸던 거다.

난 입술을 꾹 깨물었다.

하지만 곧 꾹 깨문 입술은 허물어지고 말았다. 고개를 든 리케도르안이 날 마주한 순간 주르륵 그의 뺨으로 무언가 흘러내렸기 때문이었다.

뚝.

“리케도르안?”

잠시만.

“나…….”

“아니, 아니 잠깐.”

내가 손을 뻗었지만 이미 늦었다. 뚝 눈물이 떨어져 내린다. 황급히 손을 들어 그의 눈물을 닦아냈다.

그러나 유리구슬 같은 굵은 물방울은 닦기 시작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뚝뚝 떨어졌다. 흡, 흐흡, 그가 숨소리마저 가냘프게 느껴지도록 흐느꼈다. 이어서 그가 얼굴을 들었을 때 나도 모르게 멍하니 쳐다봤다.

미친, 우는 것도 왜 이렇게 예뻐?

“정말 버릴 거야? 싫어졌어요?”

“어어?”

“흡, 흐흡. 대답, 안 해 주는 거예요?”

“아아니.”

“내가 싫어져서…….”

나는 어어, 우물우물하다가 얼른 대답했다.

“아니야!”

“버려?”

“안 버려. 안 버린다고. 진정 좀 해!”

물기 어린 눈이 천천히 나를 향했다. 뚝. 다시 한번 눈물이 떨어졌다.

“내가 뭘 잘못했어요……. 알려 주면, 흐끅, 고칠 수 있는데. 왜.”

……이건 당장 석고대죄를 해야 할 것 같은 상황인데. 그래, 해야 돼! 나는 차분하게 무릎을 꿇었다. 일단 꿇고 봐야겠다.

리케도르안은 눈높이가 낮아지기 무섭게 살짝 고개를 숙여 내 손바닥에 뺨을 비볐다.

“놓지, 마요….”

이 사람 지금 자기가 하는 행동을 자각하고 있는 걸까?

나는 드물게 매우 당황했다. 문제는 그가 나보다 두 살 어린 것치고는 꽤나 키가 크단 점이었다.

물론 완연한 성인의 것은 아니었지만 몸을 세우면 나와 눈이 마주칠 정도로 크다는 점. 이는 다음 순간 야릇한 자세를 유도했다. 그러니까 이렇게 앉은 채로도 상체를 세우면!

“흡.”

……얼굴이 닿을 듯 가까워지잖아.

나한껏 가까워진 그의 얼굴에 놀라 고개를 물렸다. 그러나 그가 소매를 잡아 멀리 떨어지지 못했다.

“어디, 가요?”

“아니, 가까워서요.”

그러자 리케도르안이 얼굴을 들어 올렸다. 거리가 더 가까워졌다.

“가까우면 안 돼요?”

……아니. 안 될 건 없는데. 아니다! 내가 위험해요. 내가!

여전히 눈물을 눈꼬리에 대롱 매단 그의 눈은 청초하면서도 아슬아슬한 느낌을 자아냈다. 붉어진 뺨 아래로 살짝 내려간 셔츠와 희게 보이는 빗장뼈 때문에 숨을 삼킬 때마다 내 입술이 잘게 떨렸다.

나는 가느다랄 것 같지만 단단하고 선명한 어깨선을 보며 꿀꺽 숨을 삼켰다. 이 친구는 나보다 두 살 연하다. 연하다. 동생이다…….

아니, 입술은 왜 이렇게 붉은 거야!

“알았으니까, 잠 좀 깨요!”

“시, 싫어요.”

그가 입술을 지그시 사리물었다. 덩달아 내 소맷자락을 잡은 힘이 더욱 강해졌다.

“……깨어나면 사라질 거잖아요?”

“누가 꿈이라는 거예요?”

나는 참지 못하고 그의 양 뺨을 잡았다. 설렘이고 부끄럼이고, 요상한 죄책감이고 모르겠다.

“얼른 일어나! 얼른 잠 깨란 말이야! 나중에 이불 얼마나 차려고 그래요?”

나는 말하다 말고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찰 이불도 없잖아? 도리어 마음만 조금 아파졌다.

그사이 리케도르안이 눈을 크게 깜빡였다.

“꿈이…… 아니라고요?”

“네. 아니에요. 얼른 정신 차려.”

그렇게 말했음에도 멍하니 바라보는 시선은 떨어질 줄 몰랐다. 나는 그의 뺨을 쥔 채로 설핏 웃었다.

“그렇게 내가 보고 싶었어요?”

나는 검지로 그의 코를 톡 튕겼다. 이에 불현듯 그의 눈동자가 커진다. 다음 순산부터 깨끗한 지중해 바다 같은 깨끗한 눈동자가 가늘게 진동했다.

“아, 그……. 그.”

이어서 천천히 손가락이 따끈해졌다. 손가락부터 시작한 열기는 손바닥까지 타고 이어졌다.

그의 뺨이 빨갛게 익다 못해 잔뜩 붉어진 탓이었다. 이제는 완연한 토마토가 된 리케도르안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 그…… 뺨.”

“뺨?”

“……놓아주, 세요.”

나는 물론 놓지 않았다. 이제 와서? 괘씸할 노릇이다.

“싫은데.”

그의 눈썹이 잘게 떨렸다.

“네가 먼저 나 잡았잖아요?”

나는 시선으로 눈짓했다. 그가 아직도 붙잡고 있는 손을 향해서였다.

“당신도 내 소매 아직도 잡고 있는데.”

리케도르안의 눈이 대지진을 일으켰지만 그는 왜인지 끝내 내 소매를 놓지 않았다. 오히려 잡은 채로 조심스레 시선을 올렸다.

“……잡고 있으면 안 돼?”

……반말?

쿵. 심장이 떨어지는 느낌에 나도 모르게 가슴 쪽을 살짝 잡았다. 엄마야. 얘가 오늘 날 관짝에 들어가게 하시려고 이러나.

“그……쪽이 먼저, 약속 안 지켰잖아.”

눈치를 보면서 흘려낸 한마디는 대단한 파급력을 불러왔다. 붉어진 얼굴과 살짝 반항 어린 음성이 아슬아슬한 불균형과 함께 묘한 매력을 일으켰으니까.

“……요.”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덧붙이는 말에 나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왜, 할 거면 끝까지 해 보지 그래요, 반말.”

“……그치만.”

“그렇지만?”

리케도르안이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그런 채로 눈동자만 들어 내게 고정했다.

“당신이… 날 싫어할까 봐.”

그가 소매를 꾸욱 잡았다.

“……싫어하지 말아요.”

내게서 작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갔다.

“시치미 뚝 떼는 거예요? 이미 할 거 다 해 놓고.”

“네?”

“넣고 빼고 다 했으면서.”

내 소매에 손을 말이지. 그가 정상으로 돌아오자 도리어 장난기가 반짝 고개를 들었다.

“아니…….”

“아니?”

게다가 내 앞에서 빨개지는 얼굴을 보면서 이런 생각하지 않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요. 내가 그렇게 좋았구나. 꿈에서도 나만 생각할 만큼.”

내 목소리에 노래하듯 음률이 담겼다.

“아니야?”

초등학생이나 할 법한 유치한 목소리였지만 효과적이었던 모양이다. 이어서 귀와 목까지 빨개지는 모습을 보자니, 조금 전의 아슬아슬한 야릇함과 긴장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저 귀엽다는 감상밖에 남지 않았다.

이렇게 보니 나보다는 어리다는 느낌이 물씬 들었다. 나도 모르게 손을 들었다. 폭신. 내 손이 그의 은색 머리칼 위로 내려앉았다. 그대로 그의 머리칼을 살살 문질렀다.

“난 당신이 그렇게 생각해 줘서 기쁜데.”

그저 깨달았다. 내가 널 위해 이렇게나 열심히 달려왔던 건, 그만큼 네게 정이 들어서였구나 하고.

처음 우리를 갈라놓았던 쇠창살, 나는 그 쇠창살만큼의 거리가 있다고 생각했고 좁히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역시 사람 일은 모르는 건가 봐.”

그러자 리케도르안은 무어라 입술로 뻐끔거리더니, 초점이 내게로 돌아왔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도 되는데 말이지.

하나 빨개진 얼굴로는 찔러도 하지 않을 것 같아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다른 얘기 할까요?”

“……다른 얘기, 요?”

여전히 그의 머리칼 위에 내 손이 있었지만 그는 지적하지도 떼어내지도 않았다.

“실은 나, 그저께 오빠를 만났어.”

내 말이 불쑥 짧아졌다. 리케도르안은 흠칫했다. 하지만 그가 놀란 것은 내 손이 움직여 그의 머리를 다시 쓰다듬어서인 것 같았다. 내 말에는 그저 고개를 갸웃하고 말았으니까.

그러고 보니 리케도르안에게는 형제가 없었지?

“근데 참 이상하단 말이지.”

“뭐가……요?”

나는 그에게서 손을 살짝 떼어냈다.

“오빠랑 여동생이랑 그렇게 다정할 수 있나?”

이 말은 혼자 중얼거리는 것에 가까웠다. 나는 조금 전의 리케도르안처럼 고개를 기울였다.

“막, 그…… 이렇게, 저렇게…… 음.”

나는 손으로 허공을 잡다가 이내 끙 숨을 흘렸다. 리케도르안은 알아들을 수 없다는 듯 커다란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남매가 그리 다정할 수 있나?’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오빠를 막 만났을 때는 놀람과 얼떨떨함 때문에 생각하지 못했고, 또 간수를 상대하느라 생각하지 못했지만.

“이렇게 볼도 톡톡 만져 주고.”

그, 거리가…… 지나치게 가깝, 아니. 다정했던 것 같은데.

여기가 다른 세상이라서 그런가? 스킨십에 자유로워서?

“……손등에 입도 맞추고 말이지.”

르나그만 봐도 아무렇지 않게 손등에 입을 맞추지 않던가. 뿐만아니라 응접실의 귀족 죄수들의 행동을 보아도 중근대 유럽식 예식에 익숙해 보였다.

뭐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만.

사실 이리 고민하는 이유는 나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이전 세계에서 외동이었으니.

주변 이야기를 들어 보면 보통 남매는 핏줄만 공유했을 뿐 남보다도 못한 사이라 하던데.

‘손만 닿아도 그날 손을 뻑뻑 씻어야 한다’고, 지인의 과장된 이야기를 떠올리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이렇게 고민해 봐야 답이 나오진 않을 것 같다.”

나는 날 의아하게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를 보면서 씩 웃었다.

“당신도…… 아, 아니. 당신은 형제가 있어요?”

여기서 아는 척하면 안 됐지, 참. 나는 시치미를 뚝 떼며 물었다. 리케도르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없어요.”

“아하, 나도 없어요. 아니다. 없다고 믿었어요.”

난 이전 세계의 나를 떠올리다 말고 말을 정정했다.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오빠를 만난 거거든요.”

“오빠…….”

“응, 근데 실감은 안 나요.”

실제로 봤다 해도 말이지. 눈이 가려져서 본 거라곤 늘씬한 뒷모습뿐이었고. 설사 봤다 한들 갑자기 애틋한 감정은 들지 않았을 거다.

“심적으로는 여전히 외동 같은 기분이니까. 그럼 나도 당신도 외동이다, 그죠?”

나는 쪼그려 앉은 그대로 생긋 웃었다. 왜인지 리케도르안은 나와 고개를 마주하지 못했다.

왜 그러지? 아직도 부끄럽나.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슬슬 다리가 저려 그대로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오늘도 돌바닥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사람을 왜 이딴 데다 가둬 두는 건지 모를 일이란 말이야. 죄도 없는 사람을.

속으로 쯧쯔, 혀를 차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느새 손은 자연스럽게 그에게 뻗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당신이 나보다 연하잖아요.”

“……연하요?”

“아니에요? 딱 봐도 나보다 어려 보이는데.”

리케도르안이 눈을 깜빡거리다 말고 내게 나이를 물었다. 그러고는 내 나이를 듣더니 조금 놀란 기색을 보였다.

“왜 놀라요?”

“아, 아뇨. 놀라지 않았어요.”

놀라지 않긴 눈을 이렇게 동그랗게 뜨고서. 왜 놀라는 걸까. 객관적으로 봐서 내 얼굴은 어려 보이지도 그렇다고 나이 들어 보이지도 않는 얼굴이었다. 다들 내 나이를 들으면 아, 그쯤 되어 보일 것 같다 얘기를 하는 얼굴이랄까.

“아무튼 당신이 나보다 어리니까 드는 생각인데. 이러고 있으니 꼭 당신이 동생 같아요. 남동생.”

이래저래 그를 열심히 챙겨 준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 먹이고 재우고 산책시키고……. 이 정도면 동생 같은 느낌이 들 수 있을지도.

마음 한구석에서 동생보다는 ‘반려동물’에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슬쩍 외면했다.

그래, 뭐. 사람한테 ‘앉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뭐.

“남동생…….”

리케도르안은 왜인지 내가 한 말을 잠시 중얼거렸다. 고민에 잠긴 기색이었다. 이내 그는 머리를 홱 들어 올렸다.

“엄마야, 놀랐잖아요.”

아, 놀라라. 하마터면 부딪칠 뻔했네. 고개를 물리는 게 조금만 더 늦었으면 접촉 사고가 날 뻔했다.

하지만 놀랄 겨를은 없었다. 리케도르안의 얼굴이 훌쩍 가까워졌기 때문이었다.

철컹.

묵직한 쇠사슬이 움직이는 소리, 그리고 팽팽하게 당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왜 이러는 거지?

생각해 보면 저 사슬, 엄청 굵고 무거워 보이는데, 리케도르안은 어떤 인격이든 간에 너무나도 쉽고 가볍게 당겨 버린단 말이지.

나는 꿀꺽, 숨을 삼켰다.

의식하지 않으려 했지만, 어린 성자 같은 그의 얼굴이 바로 앞에 있었으니까.

“저,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다가온 거니?

뒷말은 차마 나오지 않았다. 내 다리 사이로 파고든 그가 너무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몸을 뒤로 물리면 좋겠지만 섣불리 뺐다간 뒤로 넘어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내가 그를 가둔 건지 그가 나를 잡아먹으려 하는 건지 모를 이 아슬아슬한 자세에서 나는 겨우겨우 입술을 열었다.

“왜…….”

“……은 싫어요.”

“네?”

“남동생은 싫어.”

나는 눈을 크게 깜빡였다.

“어…….”

그걸 이 자세에서 하면 상당히 미묘한 분위기로 들리는데?

“저 혹시 내가 잘못 들었나요?”

“아니요. 싫다고, 했어요.”

우리가 워낙 가까운 탓에 느릿하게 깜빡이는 속눈썹의 움직임마저 선명하게 보였다.

“아니, 하지만 당신은…….”

나는 당황하지 않은 티를 내지 않으며 애써 천천히 말했다.

“남동생이, 어떤 의미인 줄도 잘 모르잖아요?”

그를 무시하는 건 아니다. 하나 그는 처음에 ‘산책’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모르지 않았던가. 이를 보아서 그는 겪지 못한 것,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형제가 없으면서 동생에 대한 의미라거나 느낌을 알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 말에 그는 정곡을 찔린 것처럼 얼굴을 살짝 물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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