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지만 나는 이런 시도를 실현하지 못했다. 내 방으로 돌아온 지 얼마 있지 않아 불려갔기 때문이었다.
“안녕하세요, 이아나 양.”
나를 부른 건 다름 아닌 르나그였다. 하기야 여기서 나를 부를 사람이 또 누가 있겠냐마는. 시계를 보면 이제는 저녁보다 밤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갑작스러운 부름에 놀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니에요.”
저녁에 불려온 게 이상하긴 했지만 티를 내진 않았다. 짐작 가는 바도 있었으니까.
오빠 얘기이려나.
그가 내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흔들리는 머리칼에 시선을 주었다. 초조한 마음이 쿵쿵 뛰고 있었다.
그는 이런 나를 눈치채지 못한 채로 팔을 내밀었다. 나는 마음을 애써 누르며 그가 안내한 자리에 앉았다.
“오빠를 보셨다지요.”
“아…….”
곧바로 이런 얘기가 나올 줄 몰랐다. 나는 대답 대신 탄음을 흘렸다.
오빠가 찾아왔다도 아니고 보았다라니. 이건 꼭.
“알고 계세요?”
“네. 그가 제게 말해 주고 갔으니까요.”
아. 오빠가 얘기했구나. 그럼 뭐. 나는 조금 편해진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참아 달라 수어 번은 얘기했건만 기어코 오자마자 당신을 바로 찾아갔더군요.”
부드러이 흘러가는 르나그의 음성은 강물처럼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왜일까 나는 솜털이 삐죽 서는 느낌을 받았다.
한순간이지만 그의 눈이 벼린 칼처럼 날카로워진 것을 보았으니까.
그렇지 않아도 날카롭게 생긴 사람이 표정마저 굳히니 상황도 잊고 침을 꿀꺽 삼킬 뻔했다.
살벌하네.
“죄송합니다. ……놀라셨을 텐데.”
“아뇨. 아니에요.”
나는 황급히 손을 흔들었다.
“총관리장님이 사과하실 일이 아니니까요.”
오빠가 동생을 찾아왔다. 그것도 보고 싶어서. 그게 르나그가 무에 사과할 일이겠나.
“……당신의 오빠가 감방을 한차례 뒤집어 놓았지요. 당신도 보셨을 겁니다.”
“아하하. 네.”
물론 오빠 쪽에서 절차나 규범 같은 걸 싹 무시하고 움직인 느낌이 들긴 했지만…….
“분명 그리할 것 같았는데. 당신에게 피해가 갈까 싶어 염려했습니다.”
머뭇거리던 그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한 번이라도 더 막을 것을 그랬습니다.”
“아니에요.”
그러나 르나그는 내 만류에도 고개를 살짝 숙였다.
“당신을 불편하지 않게 하는 것이 내 역할입니다……. 그런데.”
아휴. 이 덩치 큰 남자가 시무룩해하는 걸 보니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네.
저 금색 눈에 미안한 기색이 보이니 더욱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이 되었다.
아니. 이렇게 날카롭게 생겨 가지고 왜 이 순간엔 소심한 건데.
악당이긴 해도 내겐 늘 곧던 남자가 숙인 모습을 오래 보고 싶진 않았다. 줄곧 잘해 줬는데.
“아뇨. 저도 오빠는 보고 싶었고…… 그, 자책하지 마세요.”
그 순간 르나그가 고개를 빠르게 들었다. 안경 속의 눈이 조금 커져 있었다.
“보고 싶으셨다니. 설마 화해하신 겁니까?”
나는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주억였다.
어, 이게 맞겠지?
오빠가 용서 운운했으니까……. 흐음. 오빠도 비슷한 소릴 하더니. 아무래도 이 남매는 거하게 싸웠던 게 맞는 모양이다. 거기다 날카로운 인상의 이 남자가 평소 표정도 잊고 이만큼 놀란 걸 보니 아웅다웅한 수준은 아니지 않을까 가늠했다.
“……괜찮으신 겁니까?”
르나그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조심스러웠다.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 말씀하셨지 않으십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멈칫했다. 응? 왜 멈칫했지. 내가 멈췄다기보다는 몸이 절로 멈춘 기분이었다. 마치 몸에 버릇처럼 반응하는 습관이라도 있듯이.
“그래서 줄곧 당신의 오빠는 편지만 보내왔고. 저는 당신이 답장마저 보내지 않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다신 보고 싶지 않다 하셨지 않습니까.”
흐음, 나는 잠시 말을 골랐다.
“네. 그랬지만 괜찮아요.”
한마디를 하고는 한마디를 더 얹었다. 같은 말이지만 조금 더 명료하게.
“이젠 괜찮아요.”
나는 이전의 ‘이아나’가 아니다. 그러니 앞으로 내가 쌓아 갈 것도 달라질 수밖에 없지. 거기다 이미 질러 버리지 않았나.
오빠가 내 대답에 왜 그리 놀라나 싶었더니. 퍼즐이 풀리는 듯했다. 손절 할 정도로 싸우고, 다신 보고 싶지 않다 말했었다는 거네.
이전의 이아나가. 그렇지?
“아무래도 눈을 뜬 이후로 느끼는 것이 많았나 봐요.”
그는 내가 말하는 것이 어떤 때인지 알아차린 것 같다.
바로 내가 이 몸에서 눈을 떴을 때였다. 그때 이아나의 심장은 한 번 멈췄었다고 했다. 아무래도 사람이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면 사람이 변하기도 한다지 않는가.
충분히 이해될 만한 이유였는지 르나그가 조금 굳은 얼굴로 동의했다.
본인 나름대로 해석한 듯했다.
“이아나 양, 저는 언제든 당신의 도움이 될 겁니다. 무엇이든지요.”
왜인지 더욱 과열된 눈을 보이는 것 같은데? 대체 왜죠. 선생님, 무엇이 당신의 엔진에 불을 지른 겁니까. 왜 갑자기 불을 태우시는 건데.
무슨 알고리즘인지 몰라도 나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르나그는 입술을 얇게 사리물고는 종이에 꾹 눌린 글씨처럼 한 글자 한 글자 눌러 말했다.
“저는, 저희 관계가 오래가길 바랍니다.”
날 보는 금색 눈이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반사적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왜인지 눈을 휙 피해 버린다.
우리 관계?
아, 감방에서 도와주는 관계를 말하나 본데. 계속 도와주겠다면 나야 고마운 일이었다.
이게 아니더라도 그에겐 늘 고마운 마음이지만.
“네. 감사해요. 총관리장님께 항상 감사한 마음이에요. 든든하고요.”
“정……말입니까?”
조심스레 묻는 얼굴은 여전히 날 쳐다보지 못했다. 갑자기 왜 그러지?
“네? 물론이죠.”
그제야 르나그의 눈이 차차 내게 굴러들어왔다.
곧 나보다 머리 하나에서 하나 반 정도 클 악당이 내 눈치를 보듯 날카로운 눈을 가만히 마주해 왔다.
금색 홍채는 뱀을 연상시켰지만 그보다는 더 우아했다.
“그럼…….”
“네.”
그를 보고 있던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의 눈 밑이 차차 어느 한 색으로 물들었다.
“……이름으로 불러…… 주시겠습니까?”
이번에는 정말,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단 한 번만이라도.”
이 커다란 악당이 나를 보며 귀를 물들이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선명하게.
“불려 보고 싶습니다.”
“아.”
나는 눈을 깜빡였다.
아니,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야. 당황스러움이 뺨으로 솔솔 번졌지만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그의 청을 들어주었다.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 르나그 총관리장님?”
“직책은 빼주셔도 됩니다.”
“르나그 님.”
“저를 존칭하실 필요는 없으십니다.”
뭐야. 무서워. 왜 이렇게 단호하게 박력적인 건데.
나는 머뭇거리다가 마지막으로 정정했다.
“……르나그?”
그 순간 펑! 소리가 난 것 같았다. 물론 난 것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다. 저 남자가 내게서 고개를 홱 돌려 버렸지만 똑똑히 보았으니까.
뺨까지 새빨갛게 붉어지는 것을.
어딜 보아도 냉혹한 악당에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책 속에서는 최종 악당의 부하, 그중에서도 제일 센 총사령관 수준이었는데.
“그런데 이름은 왜 갑자기 말씀하셨는지. 음, 어 여쭤봐도 되려나요.”
360도로 회전하던 놀이기구에 올라탄 것처럼 괴리감이 머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납득했다. 살다 보면 사람이 이름을 불려 보고 싶을 수도 있는 거지.
“이 자리에 앉고서 이름을 불리는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렇구나. 관직에 오래 있는 사람들이 으레 그러지들 않나. 자기를 어려워하는 사람뿐이니 친근하게 불릴 일이 없다고. 저기다 얼굴까지 저리 살벌해서야.
“아, 네.”
나는 그리 대답하고는 머뭇거리다 덧붙였다.
“그럼 저라도 괜찮으시다면.”
“안 괜찮을 리가 있겠습니까!”
“네? 네.”
아니, 가끔은 괜찮지 않으냐고 물어보려 했는데. 왤까. 이 얼굴은 매번 불러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 박력은 뭘까. 이게 바로 그를 이 자리에 앉힌 악당력의 원동력인가.
“그럼 르나그, 더 하실 말은 없으신가요?”
르나그는 대답이 없었다. 대신 그는 가슴 부근을 지그시 누르는 것 같았다. 저거 본 적 있는데.
그에게 실례겠지만 내 친구가 팬사인회를 가서는 차마 말 걸지 못하겠다고 나를 보내던 때의 모습과 겹쳐보였다.
“……네. 없습니다.”
아무래도 오빠가 갑작스레 방문한 것 때문에 부른 거였나 보네. 놀랐을까 봐 불러 주다니 고맙긴 했다.
세심하게 신경 써 준 거니까.
나중에 출소하게 되면 나가기 전에 선물이라도 해야겠다. 여길 나가면 더는 볼일 없을 테니 마지막으로라도 성의를 보이면 좋겠다 싶었다. 정말 고마운 마음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문득 다른 생각에 도달했다. 여기 오기 직전 줄곧 고민하던 것이었다.
“저,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것이 있는데.”
르나그, 하고 이름을 부르려던 나는 그대로 삼켰다. 불러 달라더니 막상 부르면 눈을 마주치지 않으니 말이다. 르나그도 눈치챈 건지 잠시 아쉬운 얼굴을 했다. 하나 이는 잠시뿐이었다.
“뭐든 여쭤 주셔도 됩니다.”
“혹시 말씀해주신 헤르님 대공은 예정대로 방문하나요?”
르나그가 아, 하고 중얼거린다. 태연히 물었던 탓인지 르나그는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긴 듯했다.
“그거 말입니다……. 가장 우려했던 부분이 충돌이었는데 아시다시피 당신의 오빠는 다녀갔고.”
“네. 그렇죠.”
“헤르님 대공 쪽도 방문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건 아직 확실하진 않습니다.”
“그런가요?”
헤르님 대공이 방문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그럼 좋은 일인데. 하지만 왜?
거기다 확실치 않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예. 당신의 오빠가 탄 마차가…… 사실 황실의 것이었더군요. 어쩐지 비정상적인 속도로 도착했다 싶었습니다. 아무튼.”
뭐? 잠시만. 어디의 마차? 그러나 르나그가 자연스레 넘어간 탓에 지적할 타이밍을 놓쳤다.
“함께 있던 황실의 칙사가 당신의 오빠가 벌인 소동을 직접 목격한 탓에 폐하께서 화를 내신 것 같습니다. 당신의 오빠가 신성한 감방에서 무언가 일을 벌이리라 오해한 것 같습니다.”
“오해요?”
“예. 실제로는 그저 당신과 조용히 만나고 싶었던 걸 테지만요.”
조용히 만남이라니. 조용했던 건 만남뿐이고 많은 걸 뒤집어 놓은 것 같은데. 나는 이야기 속 스케일에 묘한 기분을 느꼈다. 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
“이렇게 된 까닭에 헤르님 대공은 방문하지 않을 가능성이 생겼습니다. 그는 충신이고, 황제 폐하가 한동안 감옥을 주시할 때 이곳에 오는 것은 그분을 불편하게 하는 행동인지라 하고 싶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그렇군요.”
어쨌거나 만에 하나 헤르님 대공이 방문하지 않으면 그건 오빠 덕이라는 건데. 얼굴 모를 오빠의 호감이 불쑥 커졌다.
일이 이렇게만 해결되면 참 좋을 텐데.
그러나 세상일은 쉽게만 풀리지 않는다.
“하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그는 왜인지 언제나 이 시기에 당연한 듯이 꼭 방문했던지라.”
그렇겠지. 리케도르안을 시기마다 반드시 방문했었으니까.
“마지막으로 연락이 왔을 때 꼭 자식을 봐야겠다고 하더군요. 감방은 계약상 그가 원한다면 이곳의 문을 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 말에 나는 가슴속으로 다짐을 하나 다졌다. 일단 확실치 않은 것에 기대지 말고 방법을 찾아보자고.
“아하. 호기심이 풀렸어요.”
나는 생긋 웃었다.
“감사해요, 르나그.”
르나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지만.
이대로 그와의 대화는 끝인 줄 알았으나, 잠시 침묵을 가지던 르나그가 천천히 아아, 낮은 음성을 뱉었다. 마치 제 목소리가 잘 나오나 확인하는 것처럼.
그러고는 나를 보지 않은 채 말했다.
“그리고 이아나 양, 드디어…… 정해졌습니다.”
“네? 무엇이요?”
르나그가 어느새 차분해진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의 출소날 말입니다.”
나는 재판을 선고받은 죄수처럼 눈을 크게 끔뻑였다. 실상 다르지 않은 처지였지만 생경했다.
“이아나 양, 당신은 열흘 뒤에 출소할 겁니다.”
2장. 왜 내가 동생이야?
르나그의 집무실에서 나온 뒤 쿵쿵 뛰는 심장을 진정할 길이 없었다.
그래 일단 급한 것부터 생각하자.
나는 짝짝 내 뺨을 쳤다. 출소일이야 일단 조금 지난 뒤에 생각하자. 중요한 건 헤르님 대공이 당장 이틀 뒤에 온단 거니까.
르나그에게 헤르님 대공이 올 확률이 반반이 되었단 이야기는 들었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물론 이렇게 만들어 준 오빠에 대한 호감도는 올랐지만.’
르나그의 방을 나선 시간은 깜깜한 밤중이었다.
리케도르안의 감방을 방문하려 하니, 보수가 아직 덜 끝났다나. 밤이라서 그을린 계단이 위험하니 기다려 달란 말이 돌아왔다.
‘왜 하필 지금 불이 나서는.’
초조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쨌거나 나는 방법을 강구하기 위해 돌아간 길로 방에 콕 틀어박혔다. 시간은 오늘 밤과 내일, 그리고 모레. 셋뿐인데. 거기다 모레는 면회 행사 시작 날이다.
“문제는 제이르를 어떻게 만나냐는 건데.”
나는 침대에 양반다리를 한 채로 이불을 내려다봤다. 이불 위에는 제이르가 준 팔찌가 올려져 있었다.
끙 숨을 내쉬었다.
‘이 팔찌, 내 쪽에서는 연결 안 되나?’
당연하겠지만 나는 마법을 못 쓴다. 마법은 고사하고 제이르를 만나기 전까지 이런 게 가능한 줄도 몰랐는데.
주인공들이 특별한 능력을 하나씩 가지고 있지만 책 속에서는 이를 고대 주술이라 불렀다.
아무튼 이런 의미에서 나는 계속 의미 없이 팔찌를 흔들어 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팔찌를 팍 던졌다.
아오, 어떡하라는 거야.
그저 복세편살, 복잡한 세상 나 하나 편히 살자 1인 협회의 회장쯔음 되는 나로서는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신경 쓰는 것도, 신경 쓰이는데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도.
“좀, 뭐라도 해 봐.”
꼬집어 보면 될까. 꼬집어 보고 끊어지지 않게 당겨도 봤다. 보석끼리 부딪쳐도 보고.
결국 성질에 못 이겨 주먹으로 쿵쿵 내려칠 때였다.
우우우웅!
“엄마야.”
깜짝 놀라 손을 떼어냈다.
착각이 아니었다. 팔찌가 작게 진동하고 있었다.
어, 이거. 지난번에 제이르한테 연락 올 때도 이랬던 것 같은데.
황급히 팔찌를 팔에 찼다.
-아가씨?
팔찌를 차기 무섭게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제이르!”
나도 모르게 소리를 높이려다가 문을 보고 황급히 낮췄다.
“내 목소리가 작아도 이해해요. 나 지금 내 방 안이니까.”
-네. 그건 괜찮습니다. 혼자 계십니까?
제이르는 조금 얼떨떨한 목소리였다. 이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연결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다행입니다. 감옥의 주인이 있을 때는 감시가 더욱 삼엄해져서.
르나그가 있을 때는 연락이 힘들단 소리인가 보다.
-몇 번이고 시도했지만 실패했거든요.
“잘하셨어요.”
나는 그를 칭찬하듯 팔찌를 툭 두드렸다. 물론 그는 느낄 수 없겠지만 답답하던 차에 매우 반가웠으니.
“당신 기다리느라 밥도 안 먹었어요.”
-네?
“아니, 그렇게 끊기면 신경이 안 쓰여요?”
내 타박하는 말에 제이르가 웃음을 흘렸다.
-예, 감사합니다.
“네. 고마워하도록 하세요. 온종일 기다렸으니까.”
제이르에서 처음 만난 날처럼 안정된 음성이 흘러나왔다. 아니, 조금 장난스럽기까지 했다. 나도 가벼운 대답을 돌려주었고.
중요한 건 이게 아니었다.
“그런데 저한테 연락하신 이유가 뭐예요? 급하신 것 같던데.”
나는 대충 이유를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 먼저 운을 떼었다.
지난번처럼 언제 갑자기 통신이 끝날지 모르니 미리 본론을 이야기해야 했다.
-예. 급한 상황이니 사족은 제외하고 핵심만 이야기하겠습니다.
바라던 바다.
-이전에 아가씨가 도와준 죄수를 기억합니까?
“기억 못 할 리가요.”
-다행이군요. 그 죄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리케도르안과 자신의 관계는 여전히 숨길 생각인 듯했다. 괜찮은가? 그럼 말할 수 있는 것이 제한될 텐데.
그리 생각한 순간이었다.
-사실 그 죄수는 귀한 분입니다.
뭐? 콜록, 숨을 잘못 들이켜서 사레들릴 뻔했다.
-저도 어쩌다 알게 된 건데, 생각지도 못한 분의 아드님이셨더군요.
“켈록켈록!”
나는 기침을 애써 멈추고는 그의 말을 들었다.
-이런 많이 놀라셨어요?
“아니요. 콜록. 그냥 생각지 못한 얘기를 들어서.”
그래, 이렇게 나온다는 거지?
“계속 이야기하세요.”
-크흠, 네. 아무튼 귀한 분의 귀한 아드님이셨단 말이지요.
귀한 분은 맞지만 그냥 귀한 아드님은 아닐 텐데. 아무래도 그는 적절하게 이야기를 지어낼 모양이었다.
-무려 헤르님 대공가의 공자님이시니까요.
리케도르안과 저의 관계만 쏙 뺀 채로 말이다.
-그래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문제라니요?”
-저희가 귀한 분께 마법을 썼지 않습니까.
“……누가 저희예요?”
난 댁이 시켜서 한 것밖에 없는데? 이런 의미를 담아 이야기했더니, 잘 알아들은 듯 웃음소리가 넘어왔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아마 조사에 들어가면 아가씨의 이름도 나올 겁니다.
한 배에 탔다, 이건가. 한데 왜 겁을 주나 모르겠다. 어차피 은근하게 압박하지 않아도 들어줄 생각이 만만인 것을.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곧 귀한 분이 이 감방에 행차할 겁니다. 그 죄수의 부친 말입니다.
역시나.
제이르의 목적은 나와 같았다. 사흘 뒤 헤르님 대공이 이곳에 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요?”
-그런데 그분이 도착하면 분명 이상함을 눈치챌 겁니다.
그렇겠지. 그렇게 간헐적으로 모습이 휙휙 바뀌니까. 그저 식사를 두고 갈 뿐인 간수들은 감방 안쪽으로 들어가지 않으니 모르는 것 같다지만……. 리케도르안을 만나러 온 대공까지 속일 수는 없을 거다.
-그렇게 되면 이 수감소가 뒤집힐 거고 아가씨나 저도 무사하지 못할 겁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꾸했다.
“무시무시한 말을 참 태연하게도 하시네요.”
제이르가 잠깐 침묵했다.
-……아가씨야말로 태연하신 것 같습니다
“그럴 리가요.”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나.
‘그냥 각오한 거지.’
그는 내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말을 해 줄 이유가 없었다.
-첫 만남도 그렇지만, 당신은 참 특이한 아가씨이신 것 같습니다.
“그런 말 많이 들어요. 아무튼 본론은요?”
팔찌 너머로 아주 작은 웃음소리가 넘어왔다. 헛웃음에 가까운 소리였다.
-현재 들킬 위기를 맞이한 상황이죠. 하니,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어떤 방법이죠?”
-하나는 그 죄수에게서 마법의 흔적을 아예 지우거나.
“지우거나? 다른 쪽은요?”
-처음부터 그분이 이곳을 방문하지 못하게 하면 되지요.
전자는 몰라도 후자는 내가 바라던 바였다.
“좋아요, 상황은 이해했어요. 방법이 있어요?”
-일단, 전자는 방법이 없습니다. 한 번 시동한 마법은 회수할 수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두 번째가 좋겠네요.”
-예. 오지 못하게 하는 것.
“어떡하면 그게 되는데요?”
-간단합니다. 그분은 아드님이 건강할 때 방문합니다.
그거야 그랬다. 헤르님 대공은 리케도르안이 멀쩡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방문해서 학대할 것이다. 그리고 아마 이 정도 기간이면 지난번 흔적이 사라졌을 거라 생각할 거다.
-이를 반대로 생각하면 어떻겠습니까.
나는 멈칫했다. 제이르의 말을 바로 알아들었지만 말로 나오지 않았으니까.
아들이 건강할 때 방문한다.
반대로 말하자면…… 아들이 건강하지 않으면 방문하지 않는다. 이 말이란 거잖아. 나는 입술을 벌렸다. 지금 애를 억지로 아프게라도 하자는 거야?
“지금, 리케도르안을 일부러 아프게 하자는 거예요?”
-네. 그렇습니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획기적인 생각이라 생각해서? 아니, 기가 막혀서다.
지금 충신 주제에 이걸 방법이라고 내놓은 거야?
아니. 아니다. 진정하자. 아직 다 듣지 못했잖아.
“혹시 그 말씀 하신 게 아픈 척 꾀병을 부린다거나, 겉보기로 아프게 한다거나… 뭐 이런 건가요?.”
-아니요. 실제로 아픈 것이죠. 이곳에 올 분은 어설픈 눈속임으로 속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 무려 대공씩이나 되니까 당연히 그러하겠지. 하지만 이게 리케도르안을 생각한다는 사람이 내놓을 방법인가?
아무리 원작 시작 전이고 현재 두 사람의 관계가 원작과 같은 상태가 아니라고 해도. 부아가 치밀었다. 난 숨을 꾹꾹 내리누르며 들었다.
-그리고 웬만큼 아픈 정도로는 안 됩니다. 적어도 간수들이 확실히 확인하고 보고를 할 정도로 크게 앓아야…….
“앓아야?”
-심한 몸살 정도가 좋겠군요. 피를 토하거나.
뭐? 피를 토해? 나는 경악했다. 제이르에 관해 모든 것을 아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그가 내놓은 방법에서 리케도르안에 대한 배려는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어디에도. 전혀.
-아, 몸살을 일으키는 마법은 전처럼 아가씨가…….
“제이르 씨.”
차분하게 그의 말을 잘랐다.
“지금 그래서 그 죄수를 일부러 아프게 하자는 거냐고 물었어요.”
-…….
제이르의 음성이 잠깐 멈췄다.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숨소리가 들렸으니까.
-물론 이런 제가 이상하게 느껴지실지 모르고 이해하기 어려우신 걸 잘 압니다. 이해가 안 가시겠지요, 하지만 아가씨, 완벽히 속이기…….
“이봐요. 제이르 씨.”
더는 헛소리를 잇기 전에 말을 잘랐다.
“제이르 씨, 저는 그리 오래지 않은 시간 전에 그 죄수가 기절한 모습을 본 적 있어요.”
그가 멈춘 것을 느끼며 침을 삼켰다.
“피투성이가 된 채로요.”
나는 천천히 눈을 깔았다.
“그 죄수에게 아무것도 해선 안 되는 규칙을 어기고 깨끗하게 닦고 몰래 약을 반입해 바르고 먹이고 눕힌 사람이 누구라 생각하세요?”
당연히 나다.
“그 사람이 더는 아프지 않게 늦은 밤 몰래 지하 감방에 들어간 사람은요.”
내 나름의 위험을 감수한 건 그저 리케도르안이 덜 아팠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피투성이의 모습은 너무 아파 보였으니.
“모두 저예요.”
도움이 된다면 나쁘지 않겠다 생각했다.
“이런 제게 그 사람을 일부러 아프게 하란 말인가요? 저는 못 해요. 그 피투성이로 신음하던 모습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도 못 할 거예요.”
나는 여느 때보다 단호했다.
“그 사람은 아파도 신음조차 제대로 못 내요. 정말 아파야 소리를 내요. 이것조차 배우지 못한 사람처럼 어색해서 눈치를 본다고요. 하, 그런 사람을 일부러 아프게 한다는 발상은 대체 어디서부터 나온 거죠? 사람이 인형이에요?”
이가 악물렸다. 내가 억지를 쓴다는 자각은 있다. 도덕적인가? 그럴 수 있지.
하지만 아무리 합리적이라 해도 해야 할 행동이 있고 아닌 게 있는 거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걸 오빠나 르나그에게 부탁하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사람 잘못 봤네요.”
찾아보면 방법이야 있겠지. 없으면, 최후의 보루를 이용하는 거고.
“나는 제이르 씨가 그 죄수를 조금이라도 생각해 주는 줄 알았어요. 생각해 보니 전혀 상관없는 남이었는데.”
-…….
제이르의 침묵이 이어졌다. 이전의 침묵과는 달랐다. 숨소리가 조금 거칠었으니까.
“아무것도 못 들은 걸로 할게요.”
내가 그렇게 말하곤 팔찌를 풀어 내리려 할 때였다.
-상관없지 않습니다.
딱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더는 헛소리 할 생각 마라, 이런 단호함이 내 목소리에서 느껴졌을 터다.
그럼에도 팔찌를 타고 넘어오는 음성에서 더는 여유나 장난스러움은 느낄 수 없었다.
-제가 그분을 지키려 한 건…….
호칭이 달라졌다. 아울러 그의 기도도 함께 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굳이 짐작해 보자면 억울함이 느껴졌다.
-정말로 이 방법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팔찌를 잡았던 손을 떼어냈다.
-하, 내가 왜 이런 얘기까지.
이어서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흐음, 얼떨결에 이 남자를 낚은 기분인데. 나는 뺨을 긁적이면서도 팔찌로 넘어오는 음성에 집중했다.
-그분이, 신음을 내셨습니까? 많이 괴로워 하셨나요?
“아, 네…… 뭐. 거의 내지도 못했긴 하죠?”
-아가씨는, 그분을 지칭하는 호칭이 바뀌었는데도 전혀 놀라는 기색이 없으시군요.
“어, 음. 그거야, 이 감방에 마법사가 있는 게 더 놀랄 일이 아닐까 싶은데요.”
뭐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놀라지 않은 거지만 이렇게 말할 수는 없지.
-그래요, 이렇게까지 나온 이상 무엇을 숨기겠습니까마는…….
제이르가 리케도르안의 정체를 이야기했다. 헤르님 대공에 관한 것도 마지막으로는 자신의 정체도 내보였다.
“그래요? 그렇군요.”
중간에 열심히 놀란 척하긴 했는데. 내가 들어도 난 연기에 소질 없구나 싶었다.
-……태연하신 기색이 짐작하신 건가 싶기까지 합니다. 아니. 심드렁하게까지 느껴지는데요. 착각입니까?
“에이, 착각이에요. 착각.”
나는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와, 놀, 랐, 어, 요.”
국어책 읽듯이 감탄사를 흘려내면서.
-진짜 특이한 아가씨네요.
제이르가 작게 중얼거렸다. 이어서 한숨을 내쉬긴 했지만 그 나름의 이해를 한 듯했다. 아울러 조금 뒤 진지하고 복잡한 심사를 담은 음성이 넘어왔다.
-저는 그분을 진심으로 위하며 따릅니다. 오래 전부터 결정했어요. 죽을 때까지 따르기로. 정말입니다. 앞으로도 그분을 보필할 거고요, 그러니 그분을 생각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제이르가 잠시 숨을 참았다가 말했다.
-인형처럼 생각한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오. 저 말이 꽤 열이 받았던 모양이다. 근데, 틀린 말은 아니었잖아.
-……다만, 제가 그분의 상처를 안일하게 생각한 것은 인정하겠습니다. 일단은 제가 고통에 무딘지라 이해하지 못했군요, 하아…… 그분의 능력을 맹신한 것도 잘못한 일이었습니다.
책 속에서 리케도르안은 상처를 입었을 때 며칠 만에 치유하는 짐승 같은 자생력을 자랑했다. 특유의 능력이기도 했다.
다만 그건 그가 여주인공을 만날 때쯤 각성 시기가 가까울 때의 이야기였다.
왜 걔가 어린 소년이라는 것엔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거지?
열여섯이다. 고작해야 나와 2살 차이였지만 워낙 수줍어하고 붉히곤 해서 내게는 더욱 어리고 청초했으며 남동생같이 느껴지는 아이.
제이르는 이어서 자신이 이렇게까지 할 수밖에 없던 이유를 설명했다. 간수들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리케도르안에게 혹독했던 모양이었다.
-간수들의 눈을 속이려면 확실해야 합니다. 이건 정말입니다.
“알았어요. 이해했어요.”
나도 한 발짝 물러났다. 제일 최상의 결과는 헤르님 대공이 오지 않는 거다.
“어쨌건 그를 위해서 더더욱 아파야하고.”
그러기 위해선 어쨌거나 간수들이 오해를 해야 한다, 이 말 아니야.
“아프든 아픈 시늉을 하든 간수들이 속아 넘어가야 한다, 이 말 아니에요.”
-맞습니다.
“그럼 이렇게 해요.”
나는 흘끗 시계를 살폈다. 언쟁을 하느라 시간이 지나갔다. 거기다 나에게도 제이르에게도 많은 시간이 있는 것은 아닌 상황. 빠르게 마무리해야했다.
“그 마법, 약하게 걸 수 있죠?”
-어느 정도?
“적어도 겉으론 아프구나 싶어 보일 정도. 고통 없이 열이 나는 정도로만요.”
-가능은 합니다만. 어쩌시려고요?
“내가 간호한다고 나설게요. 요는, 간수들이 아프다고 보고하는 거잖아요?”
제이르는 잠시 말이 없었다. 가늠해 보는 것이리라.
잠시간의 침묵 끝에 팔찌에서 다시 음성이 흘러나왔다.
-……납득은 어렵지만 알겠습니다.
“생각보다 빠르게 수긍하시네요?”
-아가씨의 도움에 기대는 처지니까요.
그건 그렇지.
-거기다 그분을 생각 이상으로 걱정해 주시는 것을 이제 알았으니까요. 오히려 저보다도 말입니다.
그것도 그래. 내가 새벽 외출을 감수하고 돕다가 졸지에 르나그에게 들키기까지 한 처지잖아.
-그분을 위해 화내 주는 분이니 여기서 경솔한 선택을 할 시, 제일 피해를 보는 것이 그분인 걸 알고 계시지 않을까 싶고.
나는 허, 혀를 짧게 찼다. 눈치가 빠른 데다 머리도 빠르게 굴리는 남자네. 이젠 영악하게 굴기까지?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믿어 주시니 감사하네요.”
이야기는 이렇게 일단락되고 마법은 어떻게 걸어 주려나 싶었다. 물어봤더니 그건 오늘 새벽을 틈타 전달하겠단다.
“어떻게 전달하려는 건데요?”
-간수를 매수한 건 당신뿐만이 아닙니다, 아가씨.
그 말로 짐작해 볼 수 있는 게 많았다. 그러니까 간수 중에 제이르의 수하가 있다는 거야? 혹은 리케도르안을 따르는 무리라든가? 아무튼 이 말인즉, 내일이 결전의 날이란 얘기다.
“어떻게든 내일 해결을 봐야겠네요.”
-예.
그렇지 않으면 헤르님 대공이 도착할 테니까.
‘그 뒤로는 끔찍한 학대가 있겠지.’
이뿐 아니라 조력자로 협력한 제이르와 나의 존재도 들키게 될 테고. 이건만은 막아야겠다.
“혹시나 해서 얘기해두는 건데, 이 방법은… 제가 있을 때나 쓸 수 있는 방법인 거 아시죠?”
오빠와 르나그의 말에 따르면 난 곧 출소한다.
그러나 헤르님 대공의 방문은 이번이 끝이 아니겠지. 결국 내가 없으면 더는 써먹을 수 없는 방법인 거고.
내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제이르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건 문제없습니다. 이번만 넘기면 되니까.
“왜요?”
-아마, 이후로 대공은 다신 방문하지 않을 겁니다.
제이르의 음성은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왜냐고 물었지만, 그는 답을 알려 주지 않았다. 그저 확신할 수 있다고 하며.
-제가 괜히 그분께 마법을 건 것이 아닙니다.
나를 통해 건 마법만 언급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