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르나그의 집무실을 나선 나는 느릿하게 걸었다.
리케도르안의 몸에 상처를 마구 내는 헤르님 공작이 오고, 그동안 의문의 다정한 편지를 마구 보내던 오빠가 이 감방에 한데 모인다는데. 애석하게도 그저 하잘것없는 죄수 1인 나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할 수 있는 거라곤 간수에게 말 걸기뿐.
하지만 나름 성의 있게 입술을 열었다.
“그러니까, 중간동 죄수들은 거의 산책이 어렵단 말씀이죠?”
“예. 그렇습니다.”
나는 간수의 얼굴을 보며 끄덕여 보였다.
눈앞에는 이번에 새로 내 간수를 맡게 된 중급 간수가 진중한 얼굴로 서 있었다.
야밤의 산책을 르나그에게 들킨 뒤로 내 방 관리 간수가 바뀌었는데, 두 사람 정도 번갈아 가며 나타나는 그들은 나를 감시하듯 뒤를 따르곤 했다.
웬 감시인이겠냐 싶겠지만 바뀌는 건 없는 데다 사실 이미 감방에 있는 이상 감시랄 게 새로울 것도 없어서 딱히 불편하진 않았다.
“아무래도 중간동부터는 죄질이 제법 흉악한 이들이 함께 모여 있으니까요. 아, 물론 이 중에서도 가벼운 죄질의 이들에겐 가끔 산책의 기회를 주기도 합니다. 다만 관리 인력이 부족한 탓에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요.”
“아하, 한번 본 적 있는데, 그럼 그때가?”
“예. 맞을 겁니다. 그때 보셨던 모양이군요.”
아울러 르나그의 언질이 있었던 것인지 그는 내 질문에 서슴없이 척척 대답해 주었다.
“으음, 중간동의 다음 산책이라……. 거기까진 관리 영역이 아니라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아, 그러고 보니 동료에게 머지않아 있을 거라곤 들은 것 같군요.”
“어머, 그런가요? 언제요?”
“열흘 뒤였던 것 같습니다.”
그게 어째서 머지않아 있을 일이란 말인가. 나는 표정을 구기지 않기 위해 애썼다. 간수는 뭐가 잘못됐냐는 양 나를 보았지만.
‘그나저나 간수가 자꾸 새로운 사람으로 바뀌니 이건 조금 불편하네.’
보통 친한 간수였다면 그러지 말고 한번 물어봐라, 아니면 당겨봐라, 궁금하다, 하고 언질이라도 해봤을 텐데. 간수가 바뀐 이후로 묘하게 보수적이고 사무적인 이들을 자주 보는 느낌이었다.
꼭 이건 간수에게 정들 기회를 주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잖아? 나는 고개를 가볍게 내저었다.
‘에이 설마.’
중간동에 관해 물은 건 대공가의 마법사 제이르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아마도 그는 기회를 노리며 이곳에 머물고 있을 터였다. 무엇보다 내게 경과를 알려달라고 요청했었으니 그도 이후가 궁금해서라도 나와 마주치고 싶지 않을까?
혹시라도 의심을 살까 싶어 나는 중간동 관련한 질문을 다른 여타 질문에 교묘하게 섞어 묻는 편을 택했다.
리케도르안을 돕는 것도 좋지만 차후에 귀찮아질 일은 없는 편이 좋으니까.
아무튼 간에 제이르라면 지금 리케도르안의 비정상적인 모습을 설명해줄 수 있고, 조치를 취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문제는 어떻게 만나냐는 건데…….
“이아나 양, 볕이 뜨겁습니다. 이만 휴게실로 돌아가시면 어떻겠습니까?”
“아? 네. 그럴게요.”
르나그를 만나고 난 뒤 당일 오후 혼자 생각할 시간을 가질 겸 동시에 겸사겸사 간수에게 정보라도 들으러 나왔지만 얻은 것은 딱히 없었다. 이렇게 시간을 흘려보내기만 해야 하나 싶었다.
휴게실로 돌아가자, 휴식을 맞이한 귀족 죄수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그중에서 나와 친한 무리 중 하나인 팔라디스 남작 아저씨가 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이아나, 여길세!”
굳이 무시할 이유도 없었기에 나는 느릿한 걸음으로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무리에는 팔라디스 남작과 샐리뿐만 아니라 이야기 나눠본 여성 죄수들이 함께 있었다.
“어딜 다녀왔나?”
“이아나 양, 오랜만이에요.”
“찾았다고, 이아나!”
“아, 네네. 어딜 다녀왔죠. 바로 제 침대에? 로아나 양 안녕하세요, 샐리도 안녕.”
모인 이들 중 한 사람은 대체 어디서 구한 건지 멋들어진 사제 부채를 흔들며 내게 인사를 건네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 봐야 같은 줄무늬 옷을 입은 처지에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지만.
나를 보는 얼굴들마다 묘한 흥분이 어려 있었다. 마치 소풍 전에 어린아이처럼 말이다. 내 무리뿐만 아니라 휴게실 전체가 묘한 들뜸이 어려 있었다. 이게 나를 봐서는 아니겠고.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지난번에도 이렇게 소란스런 분위기를 본 적 있다. 그때는 미술관 테러와 함께 범인이 체이서일지도 모른다는 제국에 충격적인 소식 때문이려니 했다.
“어째, 오늘따라 분위기가 들떠 있는 느낌이네요. 무슨 일 있어요?”
“그거야, 당연하지. 이런 이아나, 그저께 이야기했는데 잊은 건가?”
“아, 그랬어요?”
생각에 잠겨 있느라 남의 말을 건성건성 흘렸던 기억은 있었다. 나는 밉지 않게 슬쩍 웃어 보였다.
“이런, 대체 어디에 정신을 빼놓은 건지.”
“이아나가 멍하게 있는 날이 하루 이틀이에요?”
“그건 그렇지만. 뭐. 아무튼 조금 있으면 특별한 면회의 날이 아니겠나?”
“면회의 날요?”
“그래, 모레부터지! 무려 3일이나 한다네!”
다시 반문하려다 말고 나는 아, 소리를 흘렸다. 기억나는 것이 있었다.
“일 년에 단 한 번 있는 면회가 허용되는 날! 그날에 귀족 죄수에 한해서만큼은 번듯한 티타임이 허용되는 날이지.”
“비록 드레스는 어렵지만 말이죠.”
“간단한 예장이나 망토가 허용되니 뭐 어떤가.”
그러고 보니 들은 적 있었다. 이 세계에서 눈을 뜬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을 때였나.
그때도 이 아저씨가 신나게 설명해줬었지.
이 감방, 귀족 죄수에 한해서 1년에 한 번 대규모 면회를 허용하는데, 그날만큼은 이들이 귀족처럼 행동하는 것을 허락했다.
그러니까 면회라고 하여서 드라마에서 본 것처럼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뽕뽕 뚫린 구멍이나 전화기로 면담을 주고받는 식은 아니란 거다.
이걸 들은 지 좀 된 것 같은데 시간이 그렇게나 흐른 건가. 그보다는 이런 큰 행사가 있는데도 이제야 깨달은 것이 생경하기도 했다.
그동안 리케도르안이니 르나그니 정신을 좀 빼놓긴 했지.
그러다 문득 깨달음이 스쳐지나갔다. 나는 얼른 상체를 일으킨다.
잠깐. 가만있어 봐, 그게 모레부터 시작된다고?
그럼 헤르님 대공이나 오빠가 그냥 찾아오는 것이 아니었단 말이야? 조금이지만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오빠에겐 미안하지만 오빠는 제쳐두고서 헤르님 대공이 남들 이목이 몰려 있는 시기에 굳이 제 아들을 찾아와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다행인 건가?
“아저씨, 사람들이 온다는 면회요. 행사 기간 내내 사람들이 오는 거죠?”
“오, 그건 아니지. 첫날엔 이 감옥 내에서 간단한 행사 뒤 손님은 그다음 날에만 받는 거로 알고 있네. 그리고 3일째엔 또 내부에서 특별한 행사를 하지.”
“아 앞에 말한 티타임 같은 거요?”
“그렇다네. 죄수끼리만 즐기는 행사이지.”
나는 곰곰이 고민했다. 헤르님 대공과 사람들이 오는 날은 겹치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다시 등을 등받이에 가져다댔다. 뭐야. 좋다 말았네. 최소한 사람들만 많이 모이는 날이었어도 방법을 생각하기 쉬웠을 텐데.
그러나 불현듯 다른 생각이 들었다.
‘이상한데.’
헤르님 가문은 일정한 주기로 이 감방을 방문한다고 했다. 그것은 분명 캄브라캄 측이 헤르님 대공의 편의를 봐준 것일 거고, 동시에 헤르님은 바깥의 눈을 신경 써야 하니.
본래 방문하는 주기를 외부에 캄브라캄이 오픈되는 행사 기간에 맞춘 걸 거다. 하나 그렇다고 사람들이 많은 날은 곤란하니까 행사 날짜 중 혼자서만 내부 행사가 있는 날에 방문하려는 거다.
나는 천천히 헤르님 대공의 의도를 가늠했다.
그는 눈에 띄고 싶어 하지 않는다. 만에 하나 기간 내에 리케도르안을 볼 수 없다면, 일을 크게 만들지 않고 돌아갈 터.
그러니까 면회의 날 행사 기간 때 헤르님 대공이 리케도르안을 보지 못한다면… 다음 기회에나 이 감방을 방문할 거란 거다. 그때까지는 리케도르안은 무사한 거고.
그러니까 이번 행사 동안 리케도르안을 숨기면 된다?
‘이게 가능할까?’
물론 이게 오히려 기만일지도 모른다. 완전히 벗어나게 해주는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인정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있음을. 그가 잠시라도 아프지 않다면 더 좋지 않겠나?
그리고 벌어놓은 기간 동안 제이르가 그의 비정상적인 성장 형태에 대해서도 답을 찾는다면 좋을 것이고.
‘그러니까 제이르를 꼭 만나야 한다는 건데…….’
내가 고민에 잠긴 사이 아저씨를 비롯한 무리의 사람들의 화제는 다른 곳으로 흘러갔다. 이미 내가 오기 전에 면회 행사에 대해 실컷 이야기했는지, 그들은 신문을 하나 들고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내 말했지 않나? 장미의 전쟁으로 흐를 거라고.”
“대공가에서 이렇게 노골적인 도발에 걸려들까요?”
“아, 글쎄, 이 회담은 진짜라니까? 내 남작가를 걸고 장담하겠네.”
흘끗 고민에 빠지다 말고 나는 시선을 슬쩍 옮겼다. 샐리가 신문을 들고 있었고 남작 아저씨가 손가락으로 커다란 사진을 가리켰다.
그 사진을 보자면 신기하게도 두 개의 커다란 장미가 그려진 사진이었다. 정확히는 정교한 문양을 두 개 그린 것 같은 그림이었다.
“장미네요.”
“오, 이아나. 마침 말 잘했네. 그래, 이 제국의 위대한 다섯 장미에 관한 이야기 아니겠나? 타국에선 전설이 남아 있다고들 부러워하는 우리의 자랑거리지. 아가씨도 아주 잘 알고 있는 이야기겠지만.”
“흐응.”
잘 모르는데요. 나는 흥미가 인다는 듯 웃어 보였다.
“저는 잘 아는 이야기도 신나게 듣는 멋진 재주가 있죠.”
“크으. 역시나 아가씨는 좋은 청자란 말일세?”
팔라디스 아저씨는 사기꾼 기질을 버리지 못한 것인지 조금만 치켜올려 주어도 금방 신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곤 했다.
물론 이 아저씨가 사기꾼인 까닭은 이 신난 이야기 중에도 열심히 뒤에서 계산을 하며 남을 속여먹었기 때문이었지만.
“이 제국엔 타국에 없는 특별한 세 가지가 있다고 하지 않나. 전설의 발명가 최고 역작이자 건국과 함께 지어진 ‘태양의 황궁’, 고대시대부터 이어져 지어진 지 천년이 넘는 이 감옥 ‘캄브라캄’, 그리고 특별한 능력을 가진 ‘장미’.”
아저씨가 이야기를 하며 턱을 괴고는 인자한 미소를 걸었다.
“여기서 장미란 제국의 다섯 가문을 일컫는단 얘기가 아주 유명하지. 그리고 각기 가문들이 가진 특별한 능력도 말일세.”
“그건 그렇죠.”
특별한 능력하면 여기서부터는 잘 알고 있었다. 책 속 내용과도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리케도르안이 가진 저주, 이것도 가문에 내려온 특별한 능력 때문이었으니까.
“다섯 가문 중에 한 가문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한 가문은 남은 이들이 거의 실종되다시피 했으니 남은 것은 셋.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붉은 장미와 흑장미지.”
“헤르님과 도뮬릿 말이죠?”
샐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녀는 이미 아는 이야기지만 그럼에도 흥미롭단 기색이 역력했다.
사람이 들뜨면 뭐든 신나게 보인다더니만. 이 사람들 면회를 앞두고 딱 그런 상태인 모양이었다.
“그렇지. 특히나 도뮬릿은 이번 폭발과 같이 최악의 능력을 가졌다 알려진 가문 아닌가.”
“그에 반하는 헤르님은 정의를 구현하는 재능 쪽이고요?”
흐응. 리케도르안의 능력도 악당 체이서의 능력도 잘 아는데. 둘 다 그런 쪽은 아닐걸. 나는 웃음을 꾹 참았다.
그나저나 붉은 장미라. 헤르님 가문의 상징이 이쪽이란 건 잘 알았지만 생각할수록 리케도르안과 어울리는 이미지는 아니었다.
그는 열정을 상징하는 붉은색보다는 차라리 순백의 청아한 색이 어울리는 쪽이었으니까.
“나머지 중립과 평등의 노란 장미야 여기 이 감방을 관리하는 발테이즈 후작으로 잘 알려져 있지.”
르나그 말인가? 그건 또 처음 알았네. 나는 원작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듣는 기분으로다가 가벼이 경청했다.
“사실 내가 궁금한 쪽은 하얀 쪽이라네. 그쪽은 아주 오래전부터 유명세를 떨치던 곳 아니었나. 갑작스럽게 명맥이 끊어지기 전까진 말이지. 다른 가문이면 몰라도 이 가문의 능력이야말로 전 제국에 널리 알려져 있던 능력이니…….”
“치유 능력 말이죠? 몇 세기 전까지 성자나 성녀로 자자했었잖아요?”
“그래, 그거 말일세.”
거기까지 듣던 나는 잠시 멈칫했다. 치유 능력이라니……. 그 능력을 듣는 순간 생각난 사람이 있었으니까.
프란시아 올르 로제니아. 이 책의 여주인공이었다.
“로제니아, 그 가문에서는 더는 이런 특별한 이들이 태어나지 않는다고 하지 않나?”
“맞아요. 그렇댔어요. 황제 폐하께서도 관심을 놓으셨다고 하던데…….”
흐음, 이 이야기가 그렇게 이어지는 거구만?
사실상 말했듯 내가 읽었던 이야기는 개연성쯤은 개나 줘도 괜찮을 19세용 피폐 소설이었기에 군데군데 구멍 난 설정이 많았다.
분명 평범하다던 여주인공이 후반부에서는 난 치유 능력이 있었고! 사실 성녀였다! 외치는 장면이 있었던 것이다.
참 뜬금없는 설정이라 생각했는데, 이 세계에 들어와서 보니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다.
“뭐, 사라진 힘으로 치면 아주 이름마저 잊혀진 푸른색만 하겠어요.”
“그쪽이야 뭐. 이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이름이니.”
그들의 흥미로운 역사 강의는 거기서 끝이었다.
그들은 이후로도 시답잖은 신변잡기라거나 제국 곳곳의 이야기들을 일삼았고, 휴식 시간이 끝날 때까지 대화가 그치질 않았다.
어느덧 다들 방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이대로 저녁 시간까지 감방에 머물다 석식에 맞춰서 나올 수 있을 터였다.
“바로 지하 감방으로 말입니까?”
나는 마지막으로 나가길 기다렸다가 담당 간수에게 리케도르안에게 가고 싶다 알렸다. 식사 전에 리케도르안을 한번 만나고 올 생각이었다.
당연하겠지만 간수는 태연히 끄덕였다.
“이아나 양이 마지막으로 나가시는군요.”
“네. 혼자 다른 곳을 가려 하니까 그러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요.”
“아하.”
그렇게 막 함께 텅 빈 휴게실을 나서려던 때였다. 타다닥. 누군가 급한 걸음으로 뛰어왔다.
“이봐! 여기 있었군.”
내 간수와 같은 중급 간수의 옷을 걸친 이였다. 동료로 보이는 이가 무어라 귀엣말로 중얼거리자 담당 간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어째서인지 텅 빈 복도와 나를 한번 번갈아 보더니 굳은 얼굴로 나를 보았다.
“이아나 양, 정말 죄송한 말씀이나 지하 감방까지는 홀로 가실 수 있겠습니까?”
사실 죄수를 홀로 놔두다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지만 한 층 정도 오가는 정도는 귀족 죄수에게 가벼이 주어진 자유이기도 했다.
그리고 리케도르안의 감방에는 상급 간수가 지키고 있을 터라 완전한 자유가 아니기도 했다. 나는 괜찮다는 듯 끄덕여 보였다.
담당간수가 깊이 고개를 숙이고는 얼른 뛰어갔다. 대체 무슨 급한 일이지? 가벼운 호기심과 함께 텅 빈 복도를 걸었다.
본디 이 복도는 시간별로 한 번씩 비는 곳이긴 하나 오늘따라 유달리 텅 빈 느낌이었다. 마치 이곳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 양.
그렇게 아무도 없는 나선 계단을 천천히 내려갈 때였다.
-안녕하세요, 이아나 양.
낯선 음성이 들렸다. 나는 흠칫하며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 또한 마찬가지였다.
-여기입니다.
“……여기?”
-팔이요. 당신 팔.
고개를 살짝 내리면 내 팔에서 엷은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래전에 제이르가 준 팔찌였다. 혹시나 몰라 매일 차고 다닌 것이기도 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사방을 경계했다.
다행히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나는 안도감의 숨을 내쉬고는 얼른 고개를 내렸다.
“뭐야, 제이르 씨? 정말 당신이에요?”
-예. 맞습니다. 절 기억해주시다니, 기쁘네요.
“그런 얘기 할 때예요? 대체 어떻게 이렇게…….”
마법을 쓸 수 있는 거냐고 말을 하려는데, 그보다 먼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난감함이 깃든 음성이었다.
-정말 죄송한 말씀인데 이아나 양, 제가 지금 시간이 없습니다. 혹시 근처에 사람이 없습니까?
“네.”
-그럼 인적이 드문 장소로 이동이 가능하겠습니까. 최대한 빠르게요.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장소로요.
제이르의 다급한 말투가 꽤 수상하기 짝이 없었으나 나는 일단 그의 말을 듣기로 했다. 어쨌거나 나 또한 제이르와의 접선을 바라고 있던 참이었으니까.
“그나저나 참 빨리도 연락하시네요. 제게 경과가 너무나 궁금하다고 하시더니요.”
-하하하. 죄송합니다. 이건 사정이…….
그의 처지도 이해는 했다. 일단 그도 평범한 죄수로 숨어들어온 처지였으니 말이다. 그것도 마법사인 것도 숨기고 말이지.
나는 1층으로 내려와 뻥 뚫린 기둥 사이를 지나서 정원, 특히나 나무가 우거진 장소로 몰래 숨어들어갔다.
내가 걸어가는 사이에도 텅 빈 복도에는 간수 하나 보이지 않았다. 마치 어느 한 곳으로 몰려가기라도 해서 텅 빈 것처럼.
덕분에 수월하게 정원으로 들어왔고, 내가 열심히 걸어가는 사이에도 제이르는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아마 통신을 확인하려 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인적이 드문 장소에 도착했다.
나도 정원을 산책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장소였는데, 혼자 쉬기엔 최적의 장소였다.
물론 간수들이 반기지 않아 몇 번 오고 다신 못 간 곳이었지만 이 시간엔 사람이 없을 터였다.
나는 꼼꼼하게 주변을 확인하고서야 천천히 팔을 들어 올렸다.
“이제 괜찮아요.”
어라, 근데 왜 말이 없지?
“……이봐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제이르가 말이 없었다.
“저기요. 저기요?”
팔목을 들고 입에 가져다 대고 아아, 외쳐 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팔찌에 맴돌던 엷은 빛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야, 통신이 끊기기라도 한 거야?
나는 황망한 눈으로 팔찌를 바라봤다.
“뭐야…….”
어떡하지? 이대로 자리를 떠야 하나. 아니면 기다려야 하나…….
아니다. 팔찌를 한번 때려봐? 미간을 찌푸리며 팔목을 막 흔들어 보려 하던 찰나였다.
불현듯 눈앞이 새카매졌다.
“뭐, 뭐야……. 앞이…….”
정확히는 누군가가 내 앞을 가린 것 같았다. 감은 눈 앞으로 따사로운 온기가 느껴졌으니까. 아니, 보통 사람의 체온보다는 낮은 조금은 미지근한 듯 차가운 온기였다.
나는 내 눈을 가린 사람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그러고는 억지로 떼어내려 하는 순간이었다.
“쉬이, 괜찮아. 이아나.”
녹아내릴 듯 다정한 음성.
“나야. 이아나.”
봄꽃이 실바람에 살랑 흔들리듯 보드라운 어투였다.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음성이었지만, 어쩐지 누군지 알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잘 지냈어? 내 동생.”
‘오빠’였다.
오빠.
그 한 마디에 머릿속에 새하얗게 탈색되는 기분이었다. 잠시간 현실을 부정했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닐까. 그러나 애석하게도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오빠? 이 사람이 오빠라고?
손끝이 파르르 떨린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걔가 왜 여기 있어?’
정말 꿈을 꾼 것은 아닌 건지. 인지부조화가 뇌를 콩콩 두드렸다. 하나 ‘이아나’를 이리도 다정하게 부를 사람은 하나밖에 없었다. 진짜 오빠였다.
편지로만 보아 왔던 사람.
긴장감이 짜릿하게 심장을 죄었다. 손끝이 저리다 싶을 정도였다.
나는 내가 이러는 이유를 잘 알았다. 그동안은 거리낄 것 없이 자유롭게 행동했다. 하고 싶은 것하고 해 보고 싶은 대로 했지.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지금까지 본래의 이아나를 알지 못하는 이들과 함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아나를 잘 아는 이 앞에서는 어떻게 될까?
꿀꺽. 숨을 삼켰다.
“놀랐어?”
조심스럽고 느릿한 목소리가 나를 파고들고,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내 뒤에 있을 남자가 나를 보지 못하는 것에 감사했다. 침을 삼키는 것을 보지 못했을 테니까.
내가 결정하지 못한 순간에도 시간은 간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응.”
그러나 내 시도는 곧바로 무산되고 말았다. 바로 들려오는 대답에 말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귓바퀴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남자가 내 말을 듣기 위해 고개를 숙여준 탓이다. 몸이 저절로 움츠러들며 목소리마저 멈춘 것에 가까웠다.
“이아나.”
다시 들려온 목소리는 황홀하리만치 낮고 아름다웠다.
“다시 보네.”
아울러 몹시도 다정했다.
“이제 내게 말을 걸어 주는 거야?”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말, 걸어도 돼?”
“말을 걸다니….”
“넌 그저 누워 있을 뿐 어떤 말에도 대답하지 않았거든.”
살면서 이렇게 다정한 음성은 처음이었다. 다정이라는 글자를 꿀에 녹여 귀에다 줄줄 흘려보낸 기분이었다.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방금 뭐라고 했지, 내가 누워만 있었다고? 무슨 말이야.
“사실 널 찾아간다고 해서 네가 만나 줄 거라 생각 안 했어.”
고요한 가운데, 문득 르나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당신의 오빠가 이곳에 찾아왔었습니다.>
오빠가 감방에 들렀다고, 이곳까지 날 보러왔는데 보지 못했다고.
그때는 그러려니 했었지, 오빠가 남긴 꽃다발을 보며 그저 황당함 반, 많이 바쁘긴 한 모양이구나 반쯤 생각하면서 말이다.
여전히 등 뒤로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체온이 느껴졌다.
이제야 편지 속 가상인물이 현실에 존재한다는 것이 실감 나는 기분이었다.
“예전의 너였다면 넌 다신 내 얼굴을 보지 않았을 거야.”
오빠가 한 말을 빠르게 가늠해 보려 했다. 그동안은 말을 하지 않았다는 건가?
“내게 말을 걸지 않겠다고 했잖아.”
하나 정신을 차리기 무섭게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내 눈을 가린 남자가 다시 귓가에 속삭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제 네 목소리를 듣지 못할 줄 알았어.”
앞이 아찔했다. 이건 불가항력적인 일이었다. 그의 손가락이 부드럽게 뺨을 쓸었으니까. 사람은 눈이 보이지 않으면 다른 감각이 더욱 예민해진다.
그가 가린 탓에 눈앞은 여전히 깜깜했다.
잔뜩 달아오른 청각에 녹아내릴 것 같은 목소리의 조합은 가히 원색적이었다. 등줄기에 짜릿하고 차가운 물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리는 느낌이었다.
절로 내 허리에 힘이 들어간다.
아니야. 아냐. 이럴 때일수록 생각하자. 방금 뭐라고 했지? 이전의 이아나가 다시는 말을 걸지 않겠다고 했다. 그 말은 여러 의미로 해석되었다.
‘이아나’와 오빠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얼마나? 얘기하는 것만 들어서는 그저 가벼운 다툼이었는지. 심각한 싸움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네가 날 대신해 이곳에 들어갔을 때부터.”
어쩌면 ‘이아나’가 이 감옥에 들어온 일 때문에 틀어진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그의 손이 내 손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날 악어처럼 삼킨 채로 천천히 들어 올렸다.
……뭐 하는 거야?
내 손가락을 부드럽게 잡은 남자가 웃는 것 같았다. 그대로 어깨 뒤로 손이 넘어간다.
곧 손등으로 푹신한 것이 느껴졌다.
“네가 너무나도 보고 싶었어.”
흠칫.
이상하지.
분명 사람이 뒤에 있건만 여전히 활자가 사람으로 만들어진 것만 같았다. 현실에 존재한다고 인식했음에도 그가 영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내게 보내지던 유려한 글씨체와 다정한 어조의 편지가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이아나, 너도 보고 싶었니?”
“난…….”
입술을 열다 말고 숨을 내쉬었다. 이 순간 공기를 타고 흘러나오는 황홀한 향기, 아득해질 만큼 좋은 향기는 이 남자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내가 줄곧 감방에서 유일하게 맡아 온 기분 좋은 향기는 리케도르안의 것이었다.
그리고 이 남자는 청초하고도 시원한 향기, 지하의 공기 내음을 가진 리케도르안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왜 지금 리케도르안이 생각났지. 그야 나랑 이만큼이나 접촉한 남자가 그 말고는 없으니까.
후, 심호흡한 뒤에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된 목소리를 냈다.
“오빠.”
그렇게 부르며 그의 손등에 손을 가져다 댔을 때였다.
흠칫.
남자의 몸이 크게 떨렸다. 놀란 것 같았다. 닿아 있던 내가 느낄 정도로 큰 떨림이었다.
“……오빠?”
“이아나. 너…….”
지금까지 줄곧 여유롭다 못해 태연하던 음성이 짧게 끊어져 나왔다. 그가 갑자기 놀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호칭? 호칭이 문제인 건가? 편지에서도 오빠라고 했잖아.
다른 호칭이 있었던 거야? 이름을 불러야 했나.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름을 모르잖아.
여차하면 기분 전환 겸 달리 불러 봤다 말할 참이었다. 솔직히 사람이 감방씩이나 가는데 성격에 변화도 있고, 심경의 변화도 좀 있겠지. 뭐.
정 안 되면 내겐 최후의 수단도 있었다. 기억 상실이라고, 아주 무난하고 무해한 루트였다.
“나를 용서한 거야?”
조심스러운 남자의 음성이 귀를 파고들었다.
어째 이 남자의 목소리는 낮아질수록 더 위험한 것 같다. 사람을 목소리로만 아주 홀리는 것 같아.
용서라. 무슨 잘못을 했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손을 살짝 부여잡았다.
“시간이…….”
거기까지였다. 말머리까지만 꺼낸 순간 고개를 번쩍 들었다.
사사사삭.
멀지 않은 곳에서 풀을 마구 헤치는 소리가 들렸다. 딱 들어도 사람이 다가오는 소리였다.
머지않아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렸다. 아니 크게 소리치고 있었다.
“거긴가?”
“여기도 안 계신 것 같습니다!”
“샅샅이 찾아라!”
“예!”
분주하게 움직이는 발소리, 사방에서 들려오는 고함, 누가 들어도 심상치 않은 상황에서 나는 소리들.
점차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여기까지 도달하는 건 시간문제일 것 같았다.
왜인지 날 붙잡은 ‘오빠’의 손에 힘이 들어간 듯했다.
그 시간에도 소리는 시시각각 좁혀지고 있었다. 남자는 결심을 한 것인지 숨을 낮게 들이마셨다.
“하아…….”
이어 목에서 느껴지는 날숨에 척추가 쭈뼛 절로 세워졌다.
“이아나, 네가 무사해 보여서 다행이야.”
무사하다니.
“그 인간이 널 건드렸다면…… 이번에야말로 그냥 두지 않으려 했어.”
무어라 답변하기도 전에 남자의 다른 손이 움직였다. 자연스럽게 허리를 쭉 타고 오르는 손이 목구멍을 꽉 조이는 줄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찾았나? 구석구석 보도록!”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그가 내 손을 쥐었다가 놓았다. 그가 놓은 손에는 부드러운 것이 있었다. 여전히 보이지 않았지만 천 같았다.
“이아나, 네 출소일을 당길 거야.”
그의 음성이 처음보다 빨라졌다.
“얼마나?”
“곧 알게 될걸.”
아직 제대로 된 대화조차 못 해 봤는데, 알 수 있는 건 그의 목소리가 정말 끝내주게 좋다는 점이었다. 황홀함에 잠긴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나는 얼른 대꾸했다.
“왜 출소를 당기는 건데?”
출소일을 당길 거라면 그가 보내는 편지에 한 번쯤 언급이라도 했을 법한데 어디에도 없던 말이었다.
“네가 보고 싶으니까.”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그윽하게 내려앉았다.
“그리고 이젠 네가 위험하지 않은 장소를 마련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의 설명이 이어졌다. 물론 내가 한 번에 이해할 수는 없었다. 뻥 없어진 기억은 그저 맥락만 짐작하게 했다.
한순간 그의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다.
“내 동생. 날 용서해주길 바라.”
툭. 그의 머리가 내 정수리 쪽에 닿았다. 나른한 날숨이 머리카락을 간지럽힌다.
“해 준 거, 후회하지 않게 해 줄게.”
그의 손이 천천히 떨어졌다.
“조금만 기다려, 이아나.”
앞이 흐릿했다. 꽤 오래 시야가 차단되었던 탓이다. 눈을 깜빡이던 사이 뺨으로 부드러운 감촉이 스쳤다.
촉.
물기 어린 소리에 놀라 눈을 크게 뜨는 것도 잠시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데리러 올게.”
뒤에서 울리는 소리는 점차 멀어졌다. 대신 풀숲이 사사삭 움직이는 소리가 성큼 다가왔다.
뒤를 돌면 완전히 돌아오지 않는 시야에 멀어지는 뒷모습이 보였다. 갈색 로브를 머리까지 뒤집어쓴 모습, 알아볼 수 있는 건 상당히 장신이란 것과 짐승처럼 잘빠진 실루엣뿐이었다.
“……길기도 기네.”
참 잘빠진 뒤태라 생각하며 고개를 돌린 순간이었다.
눈앞의 수풀이 마구 흔들리더니 웬 사내가 나타났다. 그는 제복과 비슷한 형태의 간수복을 입고 있었다. 상급 간수였다.
“여기! 아,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그는 얼굴을 한 번 본 사람이었다. 리케도르안의 산책에 함께했었던 사람이다.
남자는 무뚝뚝한 얼굴로 어색하게 묵례했다.
“어딜 가시는 길이셨습니까?”
“식당에요.”
실제로는 지하 감방에 가던 길이었으나 정정하진 않았다.
간수는 수풀 사이에 내가 있는 것이 조금 이상한 기색인 듯했지만 이내 그러려니 해석한 듯했다.
어쩌면 내 편의를 봐주란 르나그의 명을 떠올린 걸지도 모르지.
“하아…….”
그는 가벼이 묵례하고, 그러더니 주변을 연신 두리번거렸다. 무언가를 찾는 기색이었다.
“저 이아나 씨……. 여기서 다른 사람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다른 사람이요?”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죄수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뇨. 죄수 말고…….”
“어머, 죄수 말고요?”
나는 그리 말하며 자연스럽게 둘러보는 척하면서 흘끗 뒤를 응시했다. 뒤쪽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태연히 잘 빠져나간 모양이었다.
그보다 이들이 찾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 같은데.
“죄수가 아니면 어떤 사람을 말하세요? 흐음, 이 시간엔 저 같은 사람 말고는 없을 텐데, 아무도 못 봤거든요.”
뒤에 아무도 안 보이겠다, 나는 모른 척 시치미를 뚝 뗐다.
“무슨 일이 있나요?”
나는 짐짓 무구한 체 눈을 크게 깜빡거렸다. 그리고 사내를 빤히 보았더니, 남자가 조금 난감한 낯을 했다.
“아, 저 실은…….”
그가 입을 꾹 다물었다가 떼어냈다.
“오늘 이곳에 귀한 손님이 방문하셨습니다.”
“손님이요?”
“예. 한데, 그분이…… 음.”
사내가 고개를 내려 뺨을 긁적였다.
“길을 잃으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여긴 안전한 곳은 아니니 간수들이 나서서 찾고 있었지요.”
나는 표정을 흐리지 않으려 애썼다.
길을 잃었다고?
아무래도 이들이 찾는 건 ‘오빠’가 맞는 것 같은데. 오빠가 사라진 것과 관련이 있을까? 아무리 봐도 오빠는 길을 잃은 사람의 모습은 아니었다.
아, 물론 본 건 아니지만 느낌이 그러하다는 게 있지 않나. 나는 여유롭다 못해 감미로운 목소리를 떠올리다가 눈을 들어 올렸다.
“아무튼 이아나 씨, 사람을 보지 못하셨다면 혹여 이상한 소리라거나 낌새는 받지 못하셨습니까?”
“낌새요? 으음…….”
“사소한 것이라도 좋습니다.”
나는 톡톡 턱을 두드리며 고민하다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 같아요.”
길을 잃은 것 같진 않았던 ‘오빠’의 모습. 자신을 찾는 사람들이 나타나자 금방 사라진 것까지.
“이상한 소리 말입니까? 어디입니까?”
나는 생긋 웃으며 한 곳을 가리켰다.
“저기요. 저기였던 것 같…….”
“감사합니다, 이아나 씨!”
고개를 숙인 사내가 허리를 들기 무섭게 뛰어나갔다. 덕분에 말은 싹둑 잘렸지만. 나는 기분 나빠 하는 대신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감사하긴요, 오히려 제가 죄송하죠.”
나는 검지를 든 손에서 엄지를 들어 빵, 하고 입 모양으로 속삭였다.
“거기, 꽝이거든요.”
내가 알려 준 방향은 ‘오빠’가 사라진 방향과 정반대 방향이었다.
흐응, 나는 소리 내어 웃었다.
이것 참. 전래동화 속 사슴을 숨겨 준 나무꾼이 된 기분이다. 그리고 사슴은 은혜를 갚았다. 이름 모를 오라버니께선 이미 그동안 선불로 지불하신 셈이니.
“이 정도면 담배와 꽃다발에 대한 은혜는 갚았겠지?”
나는 괜스레 검지 끝을 부는 시늉을 하고 천천히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웠다.
아울러 내 눈이 아래를 향했다. 지금까지 일부러 시선을 두지 않았던 손이었다.
“이건 뭘까.”
내 손안에는 작은 손수건이 있었다. 오빠가 쥐여 주고 간 것이었다. 나는 찬찬히 손수건을 살펴보았다. 특이할 것 없는 손수건이었다.
“이걸 왜 준 걸까?”
꼼꼼히 훑었지만 역시 특별할 건 없다.
아.
끄트머리에 가문 문양처럼 생긴 문양이 새겨진 것 외에는.
한참 손수건을 보던 나는 문득 다른 것을 발견하고 입을 살짝 벌렸다.
“아…….”
왼쪽 팔의 소매가 살짝 찢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틈으로 길게 그인 상처가 보였다.
어느 틈에 다친 거지?
실금 사이 피가 맺힌 채로 굳어 있다. 살짝 건드려 보니 완전히 굳은 건 아닌듯했고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얇은 책장에 샥, 베인 느낌이랄지.
오히려 상처를 보고서야 아픈 기분이었다.
나는 들고 있던 손수건과 상처를 번갈아 보다가 이내 손수건으로 상처를 톡톡 두드렸다.
일단은 쓰라고 준 것이니 쓰면 되겠지. 그러다 말고 하늘을 바라보며 뺨을 긁적였다.
대체 ‘오빠’는 여기 왜 온 거지?
거기다 왜 저를 찾는 간수들의 눈을 피해서 움직인 걸까.
차츰 파도처럼 밀려온다.
내가 외면해 온 것들.
‘나’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들이 슬금슬금 머리를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