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나 식사 후 리케도르안에게 가려 했던 내 계획은 장렬히 무너지고 말았다.
다름 아닌 나를 다급히 부른 호출 때문이었다.
“이아나 양은 무엇을 좋아합니까?”
나는 눈을 깜빡였다. 내가 왜 여기 앉아 있지.
“좋……아하는 거요?”
눈앞에는 르나그가 있었다. 맞은편에 우아하게 앉은 저 남자에게 대답을 해주어야 함을 알았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테이블에 온통 신경을 빼앗긴 탓이었다.
<총관리장님의 호출입니다. 이아나 양.>
식사를 마치고 부랴부랴 불려 나온 참이었다. 정확히는 점심을 먹고서 리케도르안에게 가기 전까지 잠깐 휴게실에서 아는 이들과 노닥거리는데, 하급 간수가 날 찾아오지 않던가?
얼굴이 익은 이였기에 산책이라도 권하는 건가 싶었더니 웬걸 무려 총관리장의 호출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먼저 르나그를 찾은 적은 있어도 르나그가 날 찾은 적은 없던지라 잔뜩 긴장하고 갔다. 그런데 웬걸? 그의 집무실로 들어갔을 때 나를 기다렸던 건……. 진수성찬이었다.
아니. 성찬은 성찬인데. 밥은 아니라 온갖 디저트의 향연이었다.
“저, 그 대답하기 전에요. …이게 뭔가요?”
“디저트입니다.”
“아뇨, 디저트라는 건 아는데.”
눈이 있으니 저게 뭔지는 안다. 다만 저렇게 차려놓고서 나더러 무엇을 좋아하느냐 묻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거지.
“당황하신 것 같으니, 다시 한번 여쭤도 되겠습니까.”
나를 이곳에 부른 르나그는 태연자약하게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이건 손을 올리라는 건가. 어색하게 내 손을 올리니, 그가 천천히 상체를 기울였다.
“이아나 양은, 무엇을 좋아하십니까?”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부드러운 입술이 손등을 스쳤다. 동시에 얼른 눈을 내리며 눈꺼풀을 크게 깜빡였다. 엄마야. 이게 뭐람.
“아니, 그 저, 케이크랑…… 셔벗…… 좋아하긴 하는데, 그, 어째서 이런 걸 대접해주시는지… 의문이어서요.”
“말씀드린 바 있지 않습니까.”
“말씀이요?”
르나그가 내 손을 잡은 채로 보일 듯 말 듯 눈을 휘었다. 확실히 가까이서 보니 그의 금색 눈동자는 빛에 부스러지듯 예기를 머금고 있었다.
나는 뱀에 콱 붙잡힌 개구리인 양 굳었다. 그대로 눈만 도로록 들어 올렸다.
“제게 시간을 내어주시기로.”
그의 말에 지난 기억이 주르륵 스쳐 지나갔다.
“그 남자와 시간을 보내셨더군요.”
그 새벽의 대화를 과연 약조라 해도 좋을지는 모르나. 확실히 나는 그와 약조하긴 했다.
슬그머니 시선을 손으로 옮겼다. 조심스럽게 붙잡은 손임에도 왜일까 금방이라도 검을 휙 뽑아서 목에 겨눠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이는 남자의 이 살벌한 얼굴 때문일 거다.
“그랬, 네. 그랬었죠…….”
결국 난 끄덕였다. 사실 나로서도 나쁜 일은 아니었다. 생각해보니 시간을 보내 달라고 했지 뭘 하자고 한 건 아니었으니까.
굳이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다면 살 떨리는 일은 없지 않을까?
물론 저 남자의 얼굴을 보는 것 자체가 내게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지만, 내가 감수할 일이었다. 사실 이게 다 책 속에서 저 남자가 얼마나 잔인하게 악당 짓을 했는지 너무 잘 아니까 고분고분한 것이다.
“혹시, 저와 있으신 것이 불편하십니까?”
“아, 아니요.”
네. 네. 아주 많이요!
“그렇진 않아요. 많은 도움을 주셨잖아요.”
나는 겉으로나마 표 나지 않은 척 최대한 태연하게 웃었다. 르나그의 손이 천천히 떨어진다. 그가 다시 붙잡을세라 나는 얼른 내 손을 가슴으로 가져왔다.
“다행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그의 목소리는 차가워서 그렇지 꽤나 듣기 좋은 편이었다. 둥둥 귀를 울리는 것이 중후한 맛이 있다고 할까.
“앉으시겠습니까?”
그는 예의 바르게도 의자를 빼주기까지 했다. 나는 잠시 내 옷차림을 내려다봤다. 음, 이거 참 다시봐도 줄무늬 바지를 입고 받을 만한 에스코트는 아닌 것 같은데 말이다. 그가 가리키는 자리에 앉고 보니 테이블 위가 더욱 자세히 보였다.
“……와아.”
동그란 테이블 위는 각종 디저트로 가득했다. 거기다 갓 만들기라도 한 것인지 생크림에 자르르 윤기가 흘렀다. 토핑으로 올려진 과일은 신선하기 그지없었다.
감방에서 이런 걸 만드는 게 과연 가능할까.
“드시지요.”
“아, 네.”
나는 묘한 생각을 지우며 나는 포크를 들었다. 아무래도 저 뚫어질 듯 나를 향한 시선이 기어이 내가 한입을 먹고서야 떨어질 것 같아서 말이지.
“아.”
입에 머금자마자 눈을 크게 떴다. 절로 감탄이 흘러나왔다.
“맛있어.”
아닌 게 아니라 정말 맛있었다. 입안에서 부드럽게 녹아 단맛이 넘어갈 때까지 남아 있었으니까. 내가 작게 중얼거리는 말을 들은 건지, 그의 날카롭던 얼굴이 순간이지만 부드러이 풀린 것 같았다.
“다행이군요.”
그가 턱을 괴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레몬 셔벗을 좋아하십니까?”
“음……. 단것은 가리지 않고 잘 먹어요.”
나는 입술에 살짝 묻은 것을 슬쩍 혀로 핥으며 르나그를 쳐다봤다. 눈이 마주친 순간 르나그가 잠시 멈칫한 것 같았다. 아, 너무 교양 없었나.
“아무래도 자주 못 먹던 것이다 보니까.”
이건 아주 어린 시절의 내 얘기였다. 그러니까 저쪽 세계에서의 나. 어린 시절에 아토피 피부질환을 앓은 탓에 커서도 단것을 조절해야 했다. 금방 발진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아……. 이해합니다. 이런 것을 먹지 못하던 환경이셨지요. 이아나 양은.”
……어? 생각지 못한 그의 대꾸에 잠시 멈칫했다.
이를 증명하듯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먹던 입술이 멈췄다. 나는 얼른 삼키고 조심스럽게 입을 떼어냈다.
“저를 잘 아시나요?”
“어찌 모르겠습니까. 자주 뵙지만 않았을 뿐 이아나 양에 대한 소식은 늘 들었습니다. 그럴 만한 관계니 말이지요.”
“아하…….”
가문 간의 관계를 말하는 건가. 생각해보면 르나그는 줄곧 나와 내 가문에 잘 아는 것처럼 말하긴 했다.
내 아버지나 오빠와도 뭔가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것 같았고.
번개와 같이 깨달음이 스쳤다. 그래. 이참에 여기 대해서 알아볼까? 이 남자를 통해서.
“저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셨다고요?”
“예. 맞습니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사실 처음부터 기억이 없다고 실토했으면 좋았을 텐데, 처음에 위기를 모면하겠답시고 어설프게 아는 척했던지라 돌이키기도 곤란했다.
무엇보다 아직까지도 사실대로 말하기엔 이 남자의 얼굴이나 후폭풍이 조금 무섭단 말이지. 일단은 한 번은 우회하기로 했다. 다른 이야기로 갔다가 자연스럽게 파고드는 걸로.
“그런데 시간을 내어달라고 하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총관리장님이 저를 대접하신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는데요…….”
또박또박 말을 하려다가도 그의 얼굴을 본 순간 말끝이 곱아들어가며 늘어졌다. 길고도 날카로운 눈매 때문이었다. 거기다 체격까지 크니 왜, 살면서 절대로 시비 걸리지 않을 것 같은 상이 있다면 딱 이러할까 싶었다.
그나마도 눈매는 안경이 겨우 사무적인 낯으로 중화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안경까지 없으면 상당히 억세고 사나워 보였겠다 싶었다.
“안 되겠습니까?”
그는 턱을 괸 채로 고개를 비스듬히 떨어트렸다. 깊은 시선이 나를 향했다. 동시에 부드럽고도 그윽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이아나 양을 대접할 기회를 주시면 안 되겠느냐, 여쭸습니다.”
아니. 기회라 할 것이 있나요. 잘 먹여주면 나야 땡큐인데. 다만 잘 먹여놓고 이제 다 먹었니? 배 좀 갈라보자꾸나. 하는 그레텔 이야기 속 마녀 같은 이야기가 나올까 봐 무서운 거지요.
“저, 어째서요?”
“어찌 대접하느냐, 이유를 말씀드리자면 그냥-.”
그가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
잠깐이지만 날카롭던 눈매가 가벼이 접힌다. 아울러 은근한 숨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고개를 들면 그는 손가락으로 턱밑을 느릿하게 문질렀다.
“……그저 그러고 싶었다는 것으로는 안 되겠습니까?”
잘못 본 게 아니라면, 그의 눈 밑이 약간이지만 달아오른 것도 같았다. 눈을 깜빡이면 금세 사라져 있었지만.
“아뇨……. 안 될 것은 없죠.”
나는 뺨을 긁적이고는 괜히 포크를 물었다. 어쩐지 머쓱한 분위기를 만든 것 같다는 생각에 애꿎은 생크림만 퍼먹으면서.
“차도 함께 드시지요.”
“아……. 감사합니다.”
나는 물고 있던 포크를 놓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말린 홍차입니다. 이아나 양이 좋아하지 않을까 싶어 꺼내왔습니다.”
“네?”
“당신의 오빠가 선물로 준 것입니다.”
쪼르륵. 르나그는 무려 내 잔을 채워주기까지 했다. 일련의 행동이 몹시도 차분하고 우아했다. 잠깐의 침묵 사이로 잔을 채우는 소리가 우리 사이를 메웠다.
“아, 그러고 보니. 이아나 양.”
“네.”
그의 부름에 막 찻잔을 들어 입에 머금으려 하던 채로 시선을 들어 올렸다. 꼴깍 넘어가는 차가 몹시 달콤하다.
신기하네.
확실히 나는 홍차를 좋아하긴 했다. 진짜 이아나도 홍차를 좋아했구나. 의외의 공통점을 발견하고서 신기해할 때였다.
“이아나 양의 출소일이 곧 결정될 것 같습니다.”
나는 막 머금었던 차를 푸욱 뱉을 뻔했다. 간신히 이를 참아낸 건 순전히 저 남자의 얼굴 탓이었다. 뱀처럼 차갑고 날카로운 눈. 아마 저기 뱉기라도 했으면……. 꼴깍 침이 넘어갔다.
‘그대로 푹 찔렸을지도.’
나는 애써 침착하게 목소리를 가라앉히며 입술을 열었다.
“출소라니요?”
아니, 세상에 총관리장님. 전 제가 무슨 죄로 얼마나 형량을 받아 여기 있는지도 모르는데 출소라뇨.
“말 그대로입니다. 이아나 양, 당신은 곧 머지않아 이 감방에서 출소하게 될 겁니다.”
출소. 새삼 내가 죄인, 죄수이고 이곳이 감방이라는 실감이 났다. 이건 어쩔 수 없었다. 하도 편히 돌아다닌 탓에 여기가 줄무늬 옷 입고 돌아다녀도 되는 곳쯤으로 인식했지.
나는 이곳에 놀랍도록 적응한 것으로 모자라 편히 지냈으니까.
그리고 이것이 가능했던 건…… 눈앞의 남자가 눈감아준 탓이니.여기에 저 남자의 호의가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나는 르나그를 응시했다.
출소니, 감방이니. 공간을 인식하는 말들을 들어서일까. 조금 전까지는 부드럽게 보였던 르나그의 낯이 성에가 낀 듯 아주 차가워 보였다. 그저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그게 가능한 일이었나요?”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출소요.”
아니. 출소가 이렇게 간단하고 단출하게 통보되는 거였어?
드라마에서 꽤 극적인 순간에 000번 석방이다, 하는 목소리와 함께 기뻐하는 죄수의 얼굴 따위를 떠올렸다. 내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기쁘지 않습니까?”
나를 보던 르나그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음, 기뻐할 타이밍을 놓친 것 같은데.
“아뇨. 저는 죄를 지어서 여기 온 거니까. 죄인이 이렇게 쉽게…….”
쿵!
나는 말을 하다 말고 흠칫했다. 눈앞의 남자가 테이블을 짚고 벌떡 일어난 탓이었다. 그는 가볍게 친 것 같았지만 4층 트레이가 흔들릴 정도로 진동이 일었다.
“이아나 양, 설마 줄곧 그렇게 생각하신 겁니까?”
르나그의 얼굴로 당혹스러운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그가 이렇게 나오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생각했냐니, 내가 나를 죄인이라 생각한 거? 틀린 말은 아니잖아. 왜 저렇게 나오는 거지? 나는 천천히 끄덕였다.
“당신의 탓이 아닙니다.”
“무엇을 말하시는 건가요.”
르나그가 조금 전에 했던 질문을 내가 다시 했다.
“당신은 죄인이 아닙니다.”
죄인이 아니라고? 그럼 뭔데? 이러한 뜻을 담아 그를 쳐다보았다. 르나그는 대답이 없었다. 대신 황금빛 눈동자에 알 수 없는 빛이 어렸다.
르나그가 잠시 말이 없자, 내 쪽에서 이어 입술을 떼었다. 이 순간만큼은 르나그를 보며 가볍게 가지고 있던 두려움은 잠시 내려놓은 뒤였다.
“이곳은 악명 높은 캄브라캄 감옥이에요. 나는 이 감방에 있는 죄수들 중 하나고. 내가 죄를 지은 자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요?”
내가 이곳에서 편히 지내온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서 공간의 성질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자유롭다 한들 한정된 자유였다. 나는 쇠창살이 달린 방 안에서 잠이 들며 이 공간에서 탈출할 수 없다. 그동안은 이를 소리내어 확인하지 않았을뿐 굳이 생각하거나 토를 달지 않았다.
“다릅니다. 이곳의 모든 죄수가 죄를 지어 왔다고 하여도 당신만은 다릅니다. 이아나 양.”
르나그는 단호하게 선언했다. 어느새 당혹스러운 표정은 저 차가운 안경에 빨려 들어간 듯 온데간데없었다.
“그건 과장인걸요. 저만 해도 억울하게 들어온 이를 몇몇 보았어요.”
“그럴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사람은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셔서는 안 됩니다.”
르나그가 테이블 가장자리를 손으로 짚었다. 동시에 그의 상체가 살짝 기울어졌다.
“여기 있는 이들은 대체로 흉악하거나 교활하고 간교하지요. 귀족 죄수라 하여 다르지는 않습니다.”
그가 조금씩 가까워질수록 나는 커다란 맹수가 몸을 엎드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금방이라도 몸을 일으켜 송곳니로 나를 뚫어버릴 것 같은.
“……제가 그들과 다르다면 무엇이 다른가요?”
꿀꺽. 침을 삼키며 잠시 바지자락을 붙잡았다. 손바닥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기분이었으나 애써 티 내지 않았다. 여기서 등을 보여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총관리장님께서 보시는 나는 어떤 사람이죠?”
“그건…….”
사실 대화가 조금 돌아오긴 했지만 나 또한 기회를 노리고 있긴 했다. 위기감을 느낀 지금에야 내 가문이나 정체를 알아낼 수 있는 기회였다.
“……다른 것은 몰라도 당신이 죄를 짓지 않았다는 사실은 분명하게 압니다. 당신은 보호받기 위해 이곳으로 보내졌으니까요.”
“……보호?”
“예. 저 바깥에는 당신을 노리던 이가 아니, 무리가 있었습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에 나는 잠깐 입을 꾹 다물었다.
이아나를 누군가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보호하기 위해서 보낸 곳이 감방이다?
누가 보낸 것인지 몰라도 사고방식 한번 참 음침하고 특이하다 싶었다.
누가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감방으로 보낸단 말인가.
보라. ‘이아나’는 귀족이었다. 그것도 르나그에게 청을 넣거나 오빠가 보내는 보석이나 물건으로 보아서는 꽤 나쁘지 않은 가문. 그렇다는 건 줄곧 나름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는 소리다.
아무리 귀족 죄수를 위한 생활 복지가 좋다고는 하나 그래도 죄수는 죄수였다. 귀족 저택이나 방과 비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기에 굉장히 황당하고 어리둥절한 방법이었단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아니면……. 그렇게 해야 할 만큼 절박했거나.
“그리고 내게 당신을 보호해달라며 보낸 이는 다름 아닌 당신의 오빠였습니다.”
“내…… 오빠가요?”
“예. 이아나 양도 이미 짐작하고 계셨겠지만 말입니다. 이곳에서 어느 날 눈을 뜨시고 많이 당황하셨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제가 굳이 당신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적응하길 기다렸다 이 말씀인가요?”
“예.”
이로써 알게 된 것은 여기 있는 르나그가 이아나의 가문과 생각 이상으로 긴밀한 관계에 놓여 있다는 점이었다.
그저 내 편의를 봐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 거대한 감옥의 총책임자로서 나를 보호하려 했던 것이라니.
“보통 이렇게 청을 받고 편의를 봐주시나요?”
“그동안 전적을 여쭈시는 거라면, 아주 드문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질문에 나는 몇 가지 가정을 지워냈다. 난 또 이아나가 메인 주인공들의 가문과 관계있는 사람인가 했다. 이리되면 내가 세워둔 퇴소 후 일상이 일그러질 수 있다. 이 책의 장르를 기억해야 했다. 나는 혹시나 싶어 확신을 위해 한 번 더 물었다.
“꼭 제가 후작이나 공작 영애가 되기라도 한 것처럼 대우하시는 것 같네요. 과분하게도.”
잠시 그의 금빛 눈이 뜻 모를 빛을 담고서 나를 향했다. 그와 나. 색이 다른 시선이 잠시 허공에서 교차했다.
“……그건 아닙니다.”
“아니라고요.”
“예. 이아나 양은, 후작 영애도 공작 영애도 아니시지요.”
그 말로 나는 안심했다.
‘좋아. 이쪽만 아니면 돼.’
내가 말한 양 가문 모두 메인 주인공들의 가문이었다. 후자는 최종 흑막 체이서와 리케도르안의 가문, 다른 하나는 악녀의 가문이었으니까.
안심하는 사이 르나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작은 테이블을 빙 둘러 내게로 다가왔다. 그의 커다란 손이 테이블을 짚었다. 나는 가까워진 거리에 눈을 깜빡였다.
“이아나 양, 제가 이 순간 당신도 알고 저도 아는 당신의 가문을 입에 담지 않는 것은.”
그의 태도는 더없이 정중했다.
“당신이 얼마나 당신의 가문을 싫어하였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그의 손은 내 바로 앞에서 멈췄다. 마치 잡을 듯 말 듯 한 거리에서 허공을 배회했다.
“저는 당신이 저를 미워하지 않기를 바라니까요.”
스르륵. 흘러내린 그의 긴 머리칼이 볕을 가렸다.
나는 그의 긴 머리칼이 느리게 흔들리는 것을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니까 이 남자는 더 오래전부터 이아나를 알고 있었단다. 그리고 이아나는 자신의 가문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막 내가 입술을 열려 하던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는 내게도 그랬지만 르나그에게도 달갑지 않은 소리인 듯했다. 르나그가 미간을 설핏 찌푸렸다. 그러나 물리지는 않았고, 이내 열린 문으로 간수가 들어왔다.
“총관리장님, 급한 서신입니다.”
우물쭈물하며 눈치를 보는 간수의 손에는 새빨간 봉투가 들려 있었다. 뭔지 몰라도 저 빨간색을 보아서는 다급한 것인가 싶었다. 간수는 서신만 건네고서 나갔고, 르나그는 지체 없이 서신을 읽었다.
“이런, 이아나 양…….”
그에게서 낭패 어린 표정이 스쳤다. 저 얼굴에 저런 표정도 스칠 수 있구나 싶었다.
어느새 그가 나를 향했다.
“왜 그러세요?”
르나그가 입을 꾹 다물었다가 느릿하게 떼어냈다.
“당장 이곳으로 오겠다는군요.”
“네? 누가요?”
그가 잠깐의 침묵 끝에 이어 말했다.
“당신의 오빠가 말입니다.”
오빠. 낯익은 단어에 나는 순간 멈칫했다.
“혹, 이아나 양. 그대의 오빠에게 실수한 것이 있습니까?”
“……네?”
그와 나의 시선이 교차했다.
“실수라니요…….”
실수라니. 내가 ‘오빠’에게 실수할 것이 뭐가 있단 말인가. 눈을 깜빡이는데 문득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빠에게 답신을 보냈던가?
늘 하던 일을 빠뜨렸다는 자각이 이제야 들었다. 딱 어제의 일이건만 왜인지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어째서인지 그래서는 안 됐었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 순간 르나그가 단정하게 선고했다.
“그가 즉시 당신을 봐야겠다는군요.”
그는 이렇게 말하고서는 잠깐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의아한 기색이었다.
“아니, 아무래도 제가 말실수를 한 것 같군요. 당신이 실수했다니 가당치 않습니다.”
“네?”
무슨 말인가 싶어 그를 쳐다봤다.
“당신이 실수를 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예?”
나도 모르게 마음의 소리가 빠져나갔다.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얼른 수습했다.
“아, 아……. 네. 어, 음.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자 르나그가 단호하게 응수했다.
“좋게 보다니요?”
눈을 들어 올렸을 때 르나그의 얼굴에는 내 오빠의 소식을 들었을 때 당혹스러움은 온데간데없었다. 다만 조금 다른 것을 본 것도 같았다.
“저는 언제나 당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아나 양.”
그는 긴 눈매를 느리게 깜빡였다. 나긋한 미소와 함께.
“으음…… 네.”
조금 전에 스쳐 지나간 부담스러운 눈빛은 뭐였지. 흡사 아이돌 팬이 우리 아이돌 누나, 오빠가 그럴 리 없어 하는 팬의 눈과 다르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에 대해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일단 잠시 넘기기로 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으니까.
“그나저나 이거 곤란한 일인데…….”
그사이 잠시 고개를 숙인 르나그가 혼잣말하듯 작게 중얼거렸다.
정말 저도 모르게 나온 소리인 듯했으나 그와 나 사이가 제법 가까웠기에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왜 곤란한 일인가요?”
“아, 들으셨습니까? 다름이 아니라……. 으음.”
그는 잠시지만 망설이나 싶더니 이어 입술을 열었다. 조금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곧 헤르님 대공가가 방문합니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나는 잠깐 멈칫했다.
“대공가에서요?”
“예. 현재 이아나 양이 즐겁게 데리고 노는 그자의 가문이기도 하지요.”
헤르님. 리케도르안의 가문이었다.
“……오늘 오전에도 함께 계셨던 그자 말입니다.”
“네. 그랬었죠.”
잠깐 르나그에게 아주 서늘한 음성이 스쳤던 것도 같았지만 그의 음색은 기본적으로 차가웠기에 구분할 수는 없었다.
잘못 들었던가.
난 잠깐 고개를 갸웃하고는 이야기에 집중했다.
헤르님 대공가가 방문한다. 이것이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책 속에서도 서술되어 있었을 만큼 응당 있는 일이었다. 다만…….
‘저번에 그들이 다녀갔을 땐, 리케도르안의 몸이 성하게 남아 있지 않았지.’
리케도르안의 아버지인 헤르님 대공은 남자주인공을 학대했다. 자신의 아들이 유능한 본인처럼 능력은커녕 하잘것없는 재능조차도 없이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저주에만 휘둘린다는 이유였다.
물론 그는 남자주인공답게 누구보다 강력한 재능과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것이 밝혀지는 것은 아주 후의 일이었다. 적어도 여주인공을 만난 뒤의 이야기.
그러니 그때까지는 매번 이렇게 폭력을 당하고 또 당해야 한다는 거다.
‘그때 잔뜩 상처 입었었지.’
지난번 헤르님 대공가에서 사람이 다녀갔을 때를 떠올린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날의 일은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인생 좋게좋게 편하게 사는 주의라 하여도 눈앞에서 피 냄새를 흘리며 잔뜩 상처 입은 모습을 무시하고 잊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되도록 그런 모습을 보고 싶지 않기도 했다.
나는 주먹을 꾸욱 눌러 쥐었다. 물론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만은 사실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으니까.
대공가의 마법사, 제이르의 부탁으로 리케도르안에게 마법을 걸어준 것. 그로 인해 리케도르안이 비정상적인 성장 형태를 지니게 되었다는 점, 이것이 못내 마음에 쿡 박혔다.
‘다른 건 몰라도 이래선 안 되는 건 알아.’
그런 모습을 헤르님 대공에게 보여서는 그리 좋은 결과를 이끌지 못할 게 분명했다.
리케도르안은 이상하게도 잠깐 동안 성장한 모습을 유지하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비약적으로 힘이 커졌다거나 능력이 생겨난 것은 아니었다.
정녕 진정한 성장, 즉 각성을 한 모습이었다면 그는 이미 자신을 억누르는 쇠사슬을 자유자재로 풀었어야 했다. 원작에서처럼 말이다.
말했듯 헤르님 대공은 제 아들이 무능하고 쓸모없어서 싫어했다. 동시에 저주에 휘둘려 사람의 말을 잃은 모습을 혐오한다. 그런데 이번에 어설프게 성장한, 그것도 별다를 것도 없는데 능력은 여전히 없는 채인 것을 알게 된다면…….
그가 평소에 받던 학대가 어디까지 심해질지 모를 일이었다.
“그들은 언제쯤 오나요?”
“헤르님 대공가를 말씀하십니까. 역시 이아나 양도 신경 쓰이시는 모양이군요.”
내 가문은 르나그와 친밀한 관계를 가진 가문이다. 르나그는 겉으로는 중립을 표방했으나 사실은 체이서를 따르는 후작, 내 가문은 악당 쪽 세력에 가깝다.
이는 이미 지난 르나그와의 대화에서 확인한 것이기도 했다.
“아시다시피 이아나, 당신의 가문은 헤르님 대공가와 마주치면 그다지 달갑지 않은 데다 시국이 시국이지 않습니까.”
“아……. 그건 그렇죠.”
대충 아는 척 끄덕였지만 속으론 머리가 팽팽 돌아간다. 어째서 시국이 문제인가 의문이 들었지만 대충 짐작은 갔다.
죄수들이 삼삼오오 떠들던 폭탄 테러. 거기서 악당 체이서의 부친이 죽었지? 체이서가 범인으로 몰리고 있고. 정의를 수호하는 헤르님 가문으로서는 그대로 두고 보지 못할 일일 터였다.
솔직히 나로서는 정의를 수호한다는 인간이 제 아들을 어찌 때리고 학대할 수 있나 싶지만.
개연성 없는 책의 내용이 그렇단 거겠지 혹은 인간은 참 입체적인 거겠지 하고 더러운 기분으로 납득할 뿐이었다.
아무튼 간에 헤르님 대공이 이곳에 행차하신다면, 이곳에서 체이서의 끄나풀 -내 가문- 즉, 내 오빠와 만나는 것이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니겠다 싶었다.
리케도르안도 리케도르안이지만. 그동안 다정하게 대해주었던 편지가 스쳤다. 나름 친절하고 다정하던 ‘오빠’가 이런 곤욕을 당하는 건 원치 않았다.
하지만 과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얼마나 걸리나요?”
“네? 아, 헤르님 대공가 말씀입니까. 아마…… 예정대로 온다면 이라면 4일쯤 걸릴 겁니다.”
르나그가 제 턱을 잡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이어 말했다.
“당신의 오빠의 경우에도……. 4일쯤 걸릴 것 같군요. ……정상적인 루트를 이용한다면 말입니다.”
정상적인? 묘하게 수식어가 걸리긴 했지만 내비게이션이 교통상황에 따라 미리 예상시각을 예측하듯이. 대충 평균 도착 시간으로 알아들었다.
“어쨌거나 마주칠 수 있다는 거죠?”
“예. 현재로서는 그렇습니다.”
그 말에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떼었다.
“……총관리장님 생각엔 두 가문이 만났을 때 충돌도 예상하시고요?”
아무래도 상대적으로 아래일 내 가문이 깨질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예. 그렇습니다. 감방이 한차례 뒤집힐지도 모르겠군요. 좋지 않습니다. 이곳은 죄인을 가두는 공간인 만큼 소란이 용납되지 않은 곳이지요. 황제 폐하께서도 좌시하지 않을 겁니다.”
속사정이야 체이서와 손을 잡았다고는 하지만 겉으로는 그는 이 감방의 평화와 평온을 책임지는 관리자였다.
나는 그의 사정을 이해했다. 헤르님같이 권력자가 깽판을 치면 그도 곤란하겠지.
“네. 문제가 커질 수도 있다는 거네요.”
나는 르나그가 했듯 손가락을 들어 올려 턱을 톡톡 두드렸다. 생각에 잠겼을 때의 버릇이었다. 르나그는 나를 잠시 의아하게 보는 듯했지만 얌전히 나의 침묵을 기다려주었다. 가만 보면 무서운 얼굴과 달리 참 예절이나 매너가 좋은 사람이었다.
“다른 것보다도 이아나 양이 휘말리실까 염려됩니다.”
예의상인지 몰라도 그가 한마디를 덧붙여주었다. 썩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가문의 의뢰를 받아서건 어쨌건 간에 이 남자는 편의를 봐주는 데다 나를 보호하고 있었다고 하니.
나는 살그머니 손을 뻗어 테이블 위에 놓인 간식 중 자그만 종이에 포장된 것을 잡았다. 그러고는 슬며시 그가 테이블을 짚은 손 앞에 놓았다. 르나그의 시선이 나를 향한 것이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들고는 모처럼 웃었다. 날카롭고 무섭게 생기긴 했어도 그가 제 책임을 다하는 것을 모르진 않았다.
“감사합니다.”
내가 쭉 뻗은 간식이 톡 그의 손끝에 닿았다.
“과분한 배려를 받는 것 같아요. 제 걱정을 많이 해주시네요.”
“그거야, 그런 관계이니까요.”
르나그가 어째서인지 잠시 내 시선을 피했다. 긴 머리카락이 고갯짓을 따라 살랑 흔들렸다. 흐트러지는 머리칼 사이에서 잠깐이지만 묘한 것을 본 것 같기도 했다.
차갑기 그지없던 남자의 붉어진 눈 밑이라거나.
다시 나를 돌아본 얼굴이 너무나 태연해서 확신할 수는 없었다.
“이제 와서 오빠를 중간에 돌려보낼 수는 없을까요? 말씀하신 대로라면, 그런 상황은 피해야 할 것 같은데.”
“당신의 오빠는 제 말을 들을 것 같지 않군요. 무엇보다 이미 출발했다면 마땅히 전달할 수단이 없을 겁니다. 여기 도착한 뒤에나 닿겠지요.”
“……으음, 그렇다면 어쩔 수 없네요.”
일단 당장은 방법이 없다는 얘기였다.
르나그가 곤란해질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데, 어찌 도움을 줄 방법이 없어서 조금 머쓱한 마음이긴 했다.
내 오빠와 가문 때문에 곤란해졌다고 하니 말이다.
“제 탓은 아니지만 괜히 죄송한 마음이네요.”
“예? 이아나 양께서 죄송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멋대로 찾아온 것이 이아나 양은 아니지 않습니까.”
내게서 그런 표정이 드러났는지 르나그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한 일이네요.”
하하. 나는 작게 소리 내어 웃고는 뺨을 긁적였다. 교양 있는 행동은 아니었지만 르나그의 시선이 어째 집요해지는 기색이라 도르륵 눈을 굴리기 바빴다.
“아무튼 그럼 저는 그리 알고 돌아가 볼게요.”
나는 그리 말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아쉽지만 이야기를 여기서 마무리한 건 조금 전 다급히 방문한 간수의 서신 탓도 있었지만 이곳으로 향하는 무수한 발소리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둔한 내 귀에도 들릴 정도라면 아주 가까워졌다는 이야기였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말을 막 마무리하기가 무섭게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후두두두. 달려온 발소리치고는 몹시도 정중한 노크 소리였다. 내가 돌아가야 한다는 신호기도 했다.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였다.
“이아나 양.”
손끝이 조심스럽게 붙잡혔다. 내가 거칠게 뿌리치자면 얼마든지 뿌리칠 수 있는 조심스럽고도 미약한 힘이다. 몸을 돌리면 르나그가 나를 붙잡은 채로 상체를 기울였다. 손등에 부드러이 입술이 스쳤다.
“인사를 잊으셨습니다.”
그의 고개가 느릿하게 올라왔다. 긴 갈색 머리칼이 부드럽게 흘러내린다.
“부디 잊지 말아주시길, 저는 당신의 편의를 위해 있습니다.”
르나그는 이렇게 보호 대상을 감방에 받은 것이 처음은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전에도 나 같은 사람이 있었다는 건데.
보통은 관리 대상, 혹은 보호 대상에게 이리도 세심하게 챙겨주는 걸까. 매처럼 날 집요히 향한 금안을 본 순간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네, 감사합니다.”
어째서 이 손이 갈고리에 꽉 잡힌 듯한 느낌이 들까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