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87)

***

방으로 돌아온 나는 책상 위에 보석 꽃을 올려둔 채 고민에 잠겼다.

그동안 너무 편하게 살았나?

아무래도 슬슬 내 집안에 대해서 고민해봐야 할 것 같았다. 어차피 오래지 않아 출소하고 이대로 태평하게 있으면 어련히 알게 되리라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르나그의 태도를 봐서는 어쩌면 내 집안이 체이서 및 르나그와 보통 관련이 있는 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처음엔 ‘그럴지도 몰라.’ 하고 생각했던 가능성이 점차 확신이 되고 있으니 말이다.

한참 생각에 잠겨 있다가 곧 나는 벌떡 일어났다. 벌떡 이어 간수의 동행하에 응접실로 향했다. 아직 자유시간이 끝나지 않은 응접실은 복작복작한 가운데 여유로웠다.

“고민에 빠진 얼굴이군. 어린 친구?”

소파에 앉아 있으려니 예상대로 남작 아저씨가 맞은편에 앉았다. 웬일로 그의 옆자리로는 샐리가 다소곳하게 앉았다. 두 사람이 함께 있다니 드문 일이었다.

“흐음, 근심 어린 얼굴인데 그래. 무슨 일인가?”

“있기야 하죠. 아, 아저씨. 물어볼 것이 있는데. 괜찮죠?”

샐리와 남작 아저씨는 본래 데면데면했으나 나를 매개로 안면을 트고 알음알음 지내는 관계였다. 사실 귀족들은 잘 모르는 사이라도 아는 척하는 게 미덕이라나.

“오, 어린 친구에게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

“그리고 지금부터 제가 꽤 재미난 얘기를 할 거거든요.”

“물어볼 것에 재미난 얘기라. 기대되는데?”

남작 아저씨를 향했던 시선이 샐리를 향했다. 시선의 의미를 알아챈 샐리가 어머, 하고 생긋 웃었다.

“나도 끼워주니?”

“그럼요. 샐리는 언제든 환영이죠.”

“어머나, 이아나같이 예쁜 아이가 말해주니 기쁜걸.”

샐리는 사교계 파티에 참여한 경력이 긴 베테랑 숙녀였다. 남작 아저씨야 말할 것도 없고. 나는 얼른 끄덕였다.

“그동안 제 가문에 관해 궁금해하셨었죠? 두 사람은 제 가문이 어떤 곳이라 생각하세요?”

턱을 괴고 빙긋 웃는 나를 바라보던 샐리의 눈이 동그래졌다. 남작 아저씨도 다르지 않았다.

물론 사기꾼답게 바로 수습했지만.

“이런, 예상치 못한 수수께끼인데?”

그동안 나는 누군가 가문에 관해 물을 때마다 웃음으로 대답했다. 당연하지. 나도 몰랐으니까. 출소하면 어련히 알게 되겠거니 했다.

하나 이젠 그저 태평히 지켜볼 수 없다. 만약 정말 내 가문이 체이서와 관련 있는 곳이라면? 곤란했다. 출소해서는 안락하게 살고 싶으니까.

뭔가 미리 알고 있으면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멀리 요양 가는 방법이라거나.

“수수께끼라, 확실히 이아나의 가문은 죄수들 사이에서 재미난 문제였지. 뭐. 나부터 솔직하게 말할까? 간수관리장을 만날 정도의 가문이자, 이아나 네 나이에도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 영애라고 하면…… 아인테. 르만, 하운드 정도로 추려지지.”

“어머. 저도 비슷하게 생각했는데. 르만 백작 영애는 이미 한 번 본 적 있으니 아니고 아인테나 하운드가 아닐까 했지만요.”

“아인테 백작 부인은 남방 사람이지. 피부가 살짝 까무잡잡한 편이야. 그리고 딸도 자신을 닮았다고 말하곤 했네. 그러니 아인테도 아니야.”

그들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짓고 있던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마치 맞혀보라는 듯이. 그러나 머릿속은 빠르게 돌아갔다.

아인테는 백작, 르만도 백작, 하운드는 후작이라고……. 그렇다면 ‘이아나’는 최소 백작 이상의 가문이다.

남작 아저씨 말에 따르면 귀족 죄수가 간수관리장을 볼 수 있는 기준은 영지의 규모로, 최소 규모가 정해져 있단다. 여기서 영지의 규모는 단순히 땅의 크기가 아닌 재력, 재산 등 모든 것을 아우르는 척도였고, 이로 등급을 매겼다.

다시 말해 간수관리장을 보는 가문은 손에 꼽는다는 거다. 사실 관리장쯤 되면 감히 귀족을 가려 받을 수 있단 건데, 귀족 입장에서는 꽤 치욕적인 일이었다.

바깥에서는 천시하는 기사 출신에게 평가받는 것, 도도하기 짝이 없는 그들에게 달갑지 않은 일이니까. 그래서 귀족 죄수들이 관리장을 만나는 이들을 눈여겨보고 있는 걸 거다.

나는 여유롭게 웃는 척 눈을 가늘게 좁혔다.

‘좋아. 적어도 멀리 요양 갈 재력은 된다는 거지.’

꼭 요양 문제는 아니었지만 규모는 대충 알겠네. 나는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간간이 힌트를 줄 듯 말 듯 맞장구를 쳤다.

이것이 한계에 다다랐을 무렵 나는 답을 바라는 이들에게 씩 웃어주었다. 그리고 입을 열 때쯤, 간수가 신호를 외쳤다.

“모두 돌아가십시오!”

자유시간의 끝이었다.

“이런. 정답은 다음으로 미룰까요?”

아쉬워하는 두 얼굴을 보며 생긋 웃었다. 미안요. 저도 아직은 정확히 모르겠거든요. 그러나 다행히 그들은 오히려 흥미진진한 얼굴로 돌아갔다. 사실 살짝 지루하고 무료한 감방에서 신나는 일은 드물었다. 이들도 금방 끝내기 아쉽다고 생각한 거겠지.

“이아나. 기분이 좋아 보이네요.”

감방으로 돌아가는 길, 붙임성 좋은 간수의 물음에 나는 미소로 답했다.

확실히 다른 날보다 기분이 좋은 편이긴 했다. 솔직히 보석 꽃이 마음에 들긴 했으니까.

“네. 좋은 선물을 받았거든요.”

“아, 그 오빠에게서요?”

“정답.”

방으로 돌아온 나는 문을 지키는 이와 인사를 나누고 안으로 들어섰다.

책상에 놓인 꽃을 지나쳐 서랍을 열었다.

잔뜩 쌓인 빈 편지 중 하나를 꺼낸 나는 빠르게 편지를 썼다. 사실 남작 아저씨와 샐리에게 물어본 것은 그럴싸한 답이 궁금해서였다.

하나 귀족 생리에 밝은 그들의 의견은 답에 근접할지 모르지만 정답을 알기에는 부족했다. 그렇기에 처음부터 내가 생각했던 방법은 따로 있었다. 가문에 대해 궁금하다고? 그럼 제일 빠른 수단을 쓰면 되지.

「오빠, 우리는 어떤 가문일까?」

만족스럽게 편지를 바라보던 나는 다음 날 편지를 부쳤다.

뿌듯하게.

여기에 답장이 오려면 며칠 걸리겠지?

편지를 기다리는 동안 리케도르안을 보러 갈 생각이었다. 일단 오늘은 늦었으니 어려울 것 같고.

“내일 가자.”

그렇게 다음 날, 나는 지하실 계단으로 향했다.

“길을 잘못 들었습니다. 아가씨.”

그러나 나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하실 계단 앞에서 가로막혔기 때문이었다. 나는 처음 보는 간수들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내 구역 간수 대부분의 얼굴을 보았다고 생각했지만 전혀 모르는 얼굴이었다.

일단 침착하게 미소를 보였다.

“음. 그러네요. 길을 잘못 들었나 봐요. 가끔 이런다니까. 식당은 어디였더라.”

“왼쪽입니다. 이곳이 워낙 복잡하니 간수와 함께 다니셔야 합니다.”

그들은 내가 입은 죄수복을 바라보며 표정을 살짝 풀었다. 이곳은 각 구역마다 죄수복의 모양이 조금씩 달랐는데, 간수들은 귀족들이 대부분인 동쪽 구역 죄수에게는 비교적 관대한 편이었다.

때때로 감시 간수가 없이 돌아다니는데도 슬쩍 넘어가 줄 만큼. 따라서 식당에 가는 정도의 단독행동은 이렇게 눈감아주곤 했다.

그만큼 우리의 위험성이 크지 않는 거라 판단한 거겠지.

“고마워요. 저 그런데 무슨 일 있나요? 못 보던 분이신 것 같아서요.”

“아……. 네. 기밀은 아닙니다만. 저희는 서쪽동의 간수입니다. 이곳은 최악의 범죄자를 감금하는 지하 구역으로……. 며칠 전 침입자가 있던 모양입니다.”

“……침입자요?”

나는 움찔했다. 왜 낯설지가 않을까. 묘한 기시감이 목 뒤를 꾹 찔렀다.

서쪽동은 살인, 방화, 반역 등 죄질이 가장 무거운 죄수들이 있는 곳으로 어느 구역보다도 감시가 삼엄하고 환경이 나쁜 곳이었다.

아울러 낯선 간수는 방금 지하 구역이 최악의 범죄자를 감금하는 곳이라 했지만 사실 리케도르안 홀로 지하를 쓰고 있었다. 그곳은 감방 측에서 헤르님 대공가를 위해 내준 공간이니까.

본래 르나그의 집안은 대대로 감방을 관리하는 중립파였으므로 대를 이어 대공가에게 이런 공간을 내줬다. 한데 르나그가 중립을 버리고 체이서와 손을 잡은 것이고.

“침입자라니, 너무 무섭네요. 혹시 무슨 사고가 일어난 건…… 아니겠죠? 무서워서…….”

“이런. 아가씨께서 걱정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가장 안전한 구역에 계십니다. 다만 이 지하 구역에서 죄수의 옆에서 침입자의 ‘물건’이 발견되었다고 하더군요.”

“아……. 저런. 그렇군요.”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숨을 삼킨 나는 동요를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다. 하나 태연한 미소를 유지하며 마지막까지 인사하고 등을 돌렸다.

방긋 웃는 나를 보던 간수가 귀를 살짝 물들이는 것도 같았다. 신경 쓸 겨를이 없었지만.

잠시만. 분명…….

리케도르안에게 머리끈을 주고 왔었지?

침입자의 정체가 나라니. 나라니?

손에 땀이 흥건했다.

생각해보면 이전에도 리케도르안의 감방에 담요를 두고 온 적 있다. 그렇지만 이건 한스와 미리 얘기된 사항이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둔 걸로 하겠습니다. 어디 가서 얘기하시면 안 됩니다?>

그러나 한스의 호의는 딱 거기까지였고. 대신 다신 다른 물건을 두고 오지 않겠다 약조했었다. 특별 죄수에게 편의를 봐줘서는 안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렇기에 리케도르안이 안쓰러워도 이후 새 담요를 가져다주지 못한 거였는데…….

지금 상황은 한스와 약속되지 않은 상황이다. 그러니 한스는 침입자가 있었다고 생각하고 신고한 거겠지. 혼을 쏙 빼놓은 리케도르안의 모습 때문에 깜빡 잊고 말았다. 등신같이.

복도 한복판에서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지나가던 간수가 어디 아프냐고 물었지만 괜찮다고 애써 웃어 보였다. 한편으로는 리케도르안이 염려됐다.

‘나 때문에 불이익을 겪게 되면 어떡하지?’

리케도르안의 꿉꿉한 감방을 떠올린 나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가뜩이나 감방에서 그의 처우는 좋지 않았다.

“하. 돌겠네. 정말…….”

그러나 야속하게도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무슨 정신으로 밥을 먹었는지 모르겠다.

정신 차려 보니 깜깜한 밤이었다. 창문 밖 달이 동동 뜬 하늘을 바라본 순간 모래를 삼킨 것처럼 텁텁해졌다.

“……내 방에서는 낮인지 밤인지 알 수 있지.”

창문이 있으니까. 끙끙대던 나는 결국 벌떡 일어났다. 서랍을 열어서 제이르가 준 팔찌를 꺼냈다. 어쩌다 기회가 없어 제이르에게 돌려주지 못했지. 이젠 꺼내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물건이었다.

<혹시 몰라 마법당 4번씩은 쓸 수 있게 해뒀어요. 아, 문을 여는 주문은 두 배로 걸어둘게요. 실수하면 안 되니까요.>

그날 문을 여는 마법과 투명 마법 두 번. 수면 주문 한 번 썼지. 그러니 아직 모든 마법을 더 쓸 수 있단 소리다.

나는 곧 팔찌를 움켜쥐었다. 한숨이 튀어나왔다.

곧 결심이 섰다.

“……그래. 괜찮은지만 보고 오자.”

딱 이만큼만. 이만큼만 가는 거다. 눈물을 뚝뚝 흘리던 리케도르안의 얼굴을 떠올리니 그냥 넘길 수가 없었으니까.

서쪽동의 간수들은 거의가 매일 보는 간수들과 수준이 전혀 다르다. 그들은 상급 기사였다. 쉽사리 통과하기는 어렵겠지? 나는 지하계단을 지키던 간수들을 떠올리고 입술을 깨물었다.

이들은 손속이 잔혹하다고 했나. 아무래도 흉악범을 다루기 때문에 사납기 그지없다고 했다. 혹시라도 리케도르안이 그런 대우를 받고 있다면 어떡하지? 가슴이 쿡쿡 찔렸다. 모든 게 내 실수였으니까.

“확인만.”

나는 문을 열고 복도로 발을 디뎠다. 며칠 전 밤처럼 새벽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복도 저 끝에 간수가 걷고 있었다. 내 모습이 저 사람에게 보이지 않을 건데도 발을 재게 놀렸다.

가슴이 초조했다.

다행히 지난번처럼 계단에서 간수들을 갑작스럽게 만나지 않고 1층까지 내려왔다. 계단 앞으로 가기 전 나는 굴러가는 돌 중 하나를 들었다. 그리고 쭉 걸어 지하실 계단 앞에 도착했을 때, 낮처럼 지키고 있는 간수를 응시했다.

……다행히 한 사람만 지키고 있네.

낮과 다른 숫자에 안심했다. 잘됐어. 돌을 만지작거리던 나는 이내 있는 힘껏 앞으로 던졌다.

딱!

돌이 부딪치는 소리에 간수가 고개를 돌렸다.

“……뭐지?”

고개를 갸웃하나 싶던 그가 천천히 돌이 떨어진 곳으로 걸어갔다. 그가 수풀 사이로 들어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얼른 계단으로 달려갔다. 벽을 더듬어 소리 없이 내려간 나는 창살 앞에 도착했다.

놀랍게도 철창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한스가 없잖아?’

아마도 이젠 한스의 자리를 비워두고 계단에서부터 지키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상급 기사가 계단을 지키고 있으니 문제없겠다 생각했겠지? 나로선 다행이지만. 한편으로는 당혹스러웠다. 비상 경계치고는 조금 허술한 거 아닌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보다는 리케도르안이 급했다.

끼이익.

최대한 소리를 낮추고 최소한의 면적으로만 열린 문을 지나 문을 닫았다. 얼핏 보면 닫힌 것처럼 착각할 정도로.

오늘따라 그에게 향하는 거리가 왜 이리 멀게 느껴지는 건지. 마침내 램프를 들었던 손을 내려놓자. 희미한 램프 아래 소년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리고 이번에도 정확히 눈이 마주쳤다.

“이아나.”

나는 멈칫했다. 그가 나를 불렀으니까.

“어떻게 난 줄 알았어?”

나는 마법을 해제했다. 그러나 급하게 온 나머지, 그에게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갔다는 것을 간과했다.

철그렁.

쇠사슬이 거칠게 움직였다. 재빨리 몸을 물리려 했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물러나려던 손을 잡아당긴 그가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동그랗게 뜨인 소년의 눈에 해사한 미소가 앉았다. 주홍빛을 배경으로 성스럽기까지 한 미소에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당신에게서는 향기가 나요.”

“……너.”

“당신만의……. 향기.”

내 손을 잡아다 입술을 가져다 대는 그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언제 봐도 더럽게 잘생긴 얼굴이구나. 어처구니없게도 미모에 긴장감이 풀릴 줄이야.

그나저나 어느 쪽인 거지? 이성이 있는 쪽이라 생각했는데. 하는 행동은 꼭…….

“음, 반겨줘서 좋은데 말이야. 이제 나를 막 만지고 그러네? 나 좋아해?”

“……네? 네. 네, 네?”

“농이야.”

그러나 화들짝 놀란 그가 나를 뿌리친 뒤였다. 새하얗던 얼굴이 붉은 꽃이 핀 듯 발긋 달아올랐다.

아. 이성이 있는 쪽이구나. 설마, 반가워서 무슨 짓을 한 건지도 모른 거야? 그런데 왜 꼭 내가 가해자인 것처럼 쳐다보는 건지. 난 그저 찾아온 죄밖에 없는데 말이다.

“그렇게 보지 마. 너무하잖아. 힘들게 찾아왔는데.”

“아, 저, 그, 저는, 불순, 하지 않아요!”

“누가 뭐래? 그보다 실례할게.”

이성이 있는 쪽이라니 잘됐다. 제일 무해한 쪽이니. 나는 그의 턱을 붙잡고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봤다. ……상처는 없는 것 같지? 아래를 보면 손도 발도 목도 모두 멀쩡했다.

상처라고는 얼마 전 그의 가문 사람이 낸 것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것도 내가 가져온 약 덕분에 거의 나았고.

나는 꼼꼼하게 확인하고 나서야 숨을 뱉었다.

“……놀라라.”

진짜 큰일이라도 생길 줄 알고 놀랐네.

하기야 냉정히 생각해보면 감방 측에서 리케도르안에게 심하게 대하지는 않을 건데.

어쨌거나 책의 초반엔 르나그가 중립을 유지하는 척이라도 하니까. 대놓고 대공의 자식인 리케도르안을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거였다.

아무리 버린 거나 마찬가지인 자식이라도 ‘저주’를 앓는 이상 헤르님의 상징이나 다름없으니까.

그래. 나도 내가 섣부르다는 건 알았지만……. 사람 마음이 쉽게 넘어 가지겠냐고. 아무래도 나는 건드리면 움찔하는 남주님에게 꽤 정을 준 모양이다. 나 때문에 험한 일이라도 당할까 봐, 아플까봐. 모든 것을 제치고 달려오고 말이야.

사실 달려오더라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미안.”

“네?”

“나 때문에 험한 일을 당할지도 몰라서. 물론 이런 일이 오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으로 조금 괴롭네.”

복잡한 세상 나 하나 편하게 살자는 게 내 신조였는데 말이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리케도르안이 내 손끝을 잡았다. 옷자락에서 손끝으로 발전한 건가. 손끝의 온기가 느껴지는 동시에 그가 입을 열었다.

“당……하고 나면, 당신이 와요?”

고개를 들면, 물기 어린 투명한 눈동자가 있었다. 놀란 얼굴이 그의 눈동자에 비칠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다음 날도, 다음 날도. 앞으로도 계속? 그러면 나. 맞아도 돼요.”

……뭐?

리케도르안이 무어라 더 하려는 순간 나는 그의 입을 막았다. 동그랗게 뜨인 눈을 바라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미쳤어. 얘가 지금 뭐라는 거니?

“무슨 소리야, 대체. 당신 내가 왜 약을 가져온 거라 생각해? 노력을 무색하게 만들 셈이야?”

“……읍. 읍.”

“변명은 안 들을 거야. 나쁜 어린이네.”

그러자 그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불만 어린 시선이다. 아마 자기는 어린이가 아니란 소리를 하고 싶은 모양이다. 그래 봐야 내겐 새끼 고양이가 냥냥 외치는 느낌이었지만. 한참을 그의 입을 막았던 나는 그가 잠잠해지고 나서야 놓아주었다.

분명 나보다 힘이 더 세면서도 나를 억지로 놓게 하지 않은 그가 신기했다.

“이제 이상한 소리 하지 않기. 알았지?”

잔뜩 붉어져서 숨을 색색 뱉는 리케도르안의 얼굴이……. 나는 슬그머니 눈을 피했다. 저럴 때마다 없던 은근한 가학심을 자극하는 얼굴임을 알까?

“이제, 가나요?”

“아니. 오늘은 그냥 이야기하러 온 거야. 아직 시간이 조금 있거든.”

시간을 바라본 나는 빠르게 판단했다. 조금만 더 있어도 되겠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밝아졌다. 복사꽃같이 발그레한 홍조가 뺨에 맴돌았다.

“지난번에 열 살부터 이곳에 갇혔다고 했잖아요.”

지금까지는 조금 흥분해서 말이 짧았지만 나는 얼른 평소대로 말투를 돌렸다.

“음, 그럼 그전에는 집, 아니. 저택에 있었던 거예요?”

끄덕.

리케도르안에게는 모든 것에 무지한 아이 같으면서도 생각보다 제법 반듯한 말을 구사하는 상반된 모습이 공존했다. 이건 아마 대공저에서 굳어진 모습이겠지? 그는 이 감방에서 간수와 부친을 제외한 누구와도 만나지 못했을 테니까.

“그럼 저택에서는 잘해주는 사람 있었어? 좋은 사람.”

그러자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리케도르안이 천천히 눈을 깔았다. 그러고는 느리게 입술을 떼었다.

“있……었어요……. 이도르안 아저씨. 메리다.”

이름만 들어서는 어떤 사람인지, 기사인지 귀족인지 시중인인지 알 수 없었지만, 리케도르안의 표정이 처음으로 평온해 보였다.

“그, 그리고 이곳에서 다, 당신이 가장 좋은 사람이에요.”

그렇겠지. 나 말고는 제대로 만난 사람이 없을 테니까. 간수들은 그에게 ‘사람’이 아니었으리라. 나는 보일 듯 말 듯 살짝 웃었다.

“그렇구나.”

그러나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내 옷자락을 잡아챈 리케도르안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저, 정말이에요. 다, 당신만 생각하고.”

“생각하고?”

“그리고, 그, 그리고…….”

그가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다, 당신만 생각하면 커져요!”

……어디가?

소리쳐 묻고 싶었지만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왜인지 물으면 엄한 대답이 나올 것 같아서였다. 솔직하게 말해서.

이 마귀는 모두의 마음속에 있는 거잖아요?

하지만 나는 새 나라의 착한 어른이므로 천천히 리케도르안의 시선을 피하며 바닥을 훑는 척했다. 착한 생각, 착한 생각, 착한 생각……. 속으로 스무 번쯤 되뇌면서.

그리고 다시 리케도르안에게 돌아왔을 때 나를 향한 푸른 시선을 마주했다. 눈이 어쩜 이렇게 파랄까? 정말이지 이건 깊은 심해인가 싶을 마치 푸른 눈동자였다.

나는 이번에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했다. 이렇게 몇 초가 흘렀을까, 리케도르안의 뺨이 발긋 물들었다. 그는 교차하듯 시선을 피하더니 입술을 우물거렸다. 귀마저 토끼의 눈동자처럼 새빨간 색이었다.

“읏. 그, 그렇게 쳐다보지 마세요.”

“왜?”

“그, 그거야 커지니까……!”

그러니까. ……어디가?

최대한 자세히 듣고 싶다고 하면…… 안 되겠지. 응. 안 되는 일이다. 이 소년이 나랑 겨우 두 살 차이라곤 하지만, 그래도 이쪽이 연하란 말이지. 아무리 미래가 창창하던 모습을 봤다 하더라도 안 된다. 하지만……. 이번에야말로 이걸 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는데, 다행스럽게도 리케도르안이 먼저 입을 떼어냈다.

“당신을 생각하면, 자꾸, 팔도 다리도…… 커지는 기분이에요. 손가락도 길어지고…….”

“……그래? 다른 건요?”

“다른 건…….”

왜인지 마지막에서 그가 머뭇거리더니 볼을 더욱 붉게 물들였다. 우물쭈물하던 그의 입이 무어라 더 웅얼거렸지만, 마지막 부위는 들을 수 없었다.

부위였는지 아닌지 알 수는 없었으나 정황상 어디를 말한 것 같은데. ……안 듣는 편이 나을 것 같기도 하고. 아냐. 아냐. 엄한 상상을 지워내면서 나는 손으로 턱을 짚었다.

“그러니까, 종합해서. 날 생각하면 몸이 커지는 느낌이 든다는 거네요?”

“네? 네…….”

“실제로 실험해본 거예요? 음, 여기서 실험이란 네가 직접 재어본 거냐 묻는 거예요. 팔이라든가 다리라든가.”

리케도르안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순진하게 눈을 깜빡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그…… 생각은 못 했어요.”

나는 시선을 떼어내 감옥 곳곳을 쳐다봤다. 벽이 벽돌로 이루어졌을 테니, 눈금을 잰다거나 실험하기는 어렵지 않았을 터였다. 다만 그는 이런 생각 자체를 해보지 않은 것 같았지만.

“그나저나 오늘 계속 깨어 있던 거예요?”

생각해보면 리케도르안은 잠들어 있는 법이 없었다. 첫 만남을 제외한 몇 경우를 제하면 거의가 항상 눈을 뜨고 있었다. 잠을 자지 않는 건지, 우연히도 내가 찾아갈 때가 깨어 있는 순간이었던 건지 알 수 없지만.

“대체 잠은 언제 자는 거예요? 자는 걸 본 적이 없네. 원래 잠이 없는 편이에요?”

“그…… 잠은 원래 없지만. 자, 자고 싶지 않아요.”

“자고 싶지 않다니?”

우물우물하던 리케도르안이 잠시 시선을 내렸다가, 이내 휙 들어 올렸다.

“잠들면, 당신을 볼 수 없잖아요.”

새파란 눈에 내가 담겼다. 눈 맞춤은 오래가지 못했다. 잔뜩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내려버린 리케도르안 탓이었다.

그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내, 내가 잠든 사이에 당신이 다녀가면? 그대로 사라질 테니까.”

……어라.

나는 흠칫했다.

그의 손이 어느새 내 손 바로 옆에 있었다. 천천히 다가온 손은 차마 닿지 못한 채 내 주위를 맴돌았다. 나는 사람이 손끝까지도 붉어질 수 있음을 알았다.

“……이제 갈 거예요?”

손끝만 발긋 물든 그의 손가락은 창백하다 싶은 내 손과 비교되어 더욱 붉게 보였다. 사실 나는 아팠다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몸이었다. 정확히는 죽었다가 깨어난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

이 탓에 뼈대가 가늘었고 살집이 없었으며 피부도 창백하게 흰 편이었다. 다행히 아팠던 것치고는 그다지 움직이는 데 무리는 없었지만 모두가 나를 가녀리게 여겼다.

이러한 탓일까, 내 손 옆에 놓인 리케도르안의 손이 오늘따라 더욱 커 보였다. 나는 눈동자를 데굴 굴렸다. 당황스러움은 금세 사라지고 난감한 듯 무심함이 그 자리를 채웠다.

이봐요, 깜빡이는 켜고 들어와야 할 것 아니야? 운전의 기본도 모르시는 선생님 같으니라고.

언제나 그렇듯 물에 촉촉이 젖은 백합처럼 수려한 남자였다. 이것이 아직 완전히 개화하기 전이란 점에서 무척이나 파괴적이었다. 지금이 이 정도면 몇 년 뒤는 대체 어떻단 말이야? 사실은 이미 한번 본 적 있지 않았던가.

잘 커서 초절정 섹시 다이너마이트라도 되나, 굳이 유치한 표현을 가져온 나는 고개를 돌렸다.

“당장은 안 가요.”

시선을 둔 곳은 시계였다.

이 시계로 말할 것 같으면 방을 나서며 가져온 물건이자 몇 안 되는 ‘이아나’의 물건이었다. 어째서 귀한 집 아가씨가 이런 낡은 물건을 썼을까 싶지만 시간을 보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시계 뒷면에는 무어라 새겨져 있지만 칼로 긁혀서 어떤 단어였는지, 알아보기 어려웠다. 추측하기로는 이것도 그 오빠란 사람이 준 것이 아닐까 싶지만, 시계를 가져온 이유는 내가 이곳을 빠져나갈 시간을 정하고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내가 알기론 간수가 교대하는 타이밍은 일정하다. 이것은 간수가 바뀌어도 마찬가지였다. 해가 뜨기 직전 4시경 새벽. 다시 말해 이는 내가 조용히 빠져나갈 시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남아 있었다.

시계를 다시 주머니에 넣고 리케도르안을 바라봤다.

“물론 날 밝기 전에는 가야 하지만.”

생각해보니 그를 자주 찾았던 편이었지만 이렇게 느긋하게 꽤 오래 볼 시간은 없었던 것 같다. 항상 간수의 눈을 피하거나 시간적 여유가 부족했었으니까.

“나 아직 여유가 조금 있어요. 기쁘죠?”

“네, 네?”

“나 안 가니까 기쁘잖아요. 아닌가.”

장난스럽게 툭 붙였는데 웬걸, 나를 빤히 보던 리케도르안이 또르르 시선을 굴렸다. 파란 바다를 담은 듯 유리알 같은 눈동자가 그대로 내려가고…….

끄덕.

손가락을 꼼지락 움직이던 리케도르안이 보일 듯 말 듯 끄덕였다.

“……조, 좋아요…….”

어느새 리케도르안의 손이 내 옷자락 끝을 살짝 부여잡고 있었다. 나는 그를 떼어놓는 대신 머리를 돌려 못 본 척했다.

‘이 대공님이 무슨 수작이신가.’

귀여움으로 우심방을 조져놓으시겠다. 이건가? 나는 이 손을 놓아버릴까 살짝 고민했지만 몸을 살짝 뒤로 기울이는 것으로 합의를 보기로 했다.

“시간도 조금 있겠다, 우리 얘기나 해볼까요.”

“얘, 얘기요? 어떤 얘기를?”

“글쎄요, 거기까지 생각해보진 않았는데.”

나는 흘끗 그가 잡은 옷자락을 응시했다가 다리를 세워 턱을 괴었다. 무의식중에 들어 올린 손을 그를 향해 뻗었다.

그가 흠칫했다.

아무생각 없이 건드린 리케도르안의 머리칼은 신기하게도 솜털처럼 보드라웠다. 금방 떼어낼 요량으로 건드린 것이었으나 손을 떼고 싶은 기분이 싹 사라졌다.

내 행동이 자연스러웠던 것은 그가 짐승 성격일 때 산책을 하며 의도치 않게 길들인답시고 이런 행동을 했었기 때문이었다.

<강아지는 만져주면 좋아합니다! 키워봐서 잘 알지요.>

개를 많이 키웠다던 간수가 알려줬었지. 말을 잘 들을 땐 칭찬을 해줘야 한댔나.

“착해요.”

나의 이런 행동에 손사래 치거나 몸부림칠 줄 알았는데, 리케도르안은 웬일인지 가만히 있었다. 아니, 어깨를 움찔했으나 그뿐이었다.

타닥타닥.

간수실에 놓인 등이 타고 있었다. 옅은 주홍색 빛과 어스름한 새벽빛 아래서 그의 은빛 머리칼은 옅은 푸른색을 머금고 있었다.

나는 조금 신기한 기분으로 그의 머리에서 손을 떼어냈다. 그의 푸른 눈에 잠시 아쉬움이 스쳐 지나갔다.

“그럼 아까 하던 얘기마저 할게요. 미안해요. 나 때문에 험한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한 건 진짜예요…….”

난 네가 걱정돼서 왔어. 내 탓이니까.

“당신 때문이라니요?”

“내가 준 머리끈 기억해요?”

그에게 미안함을 담아 미소했다. 사태의 원인은 거기서부터 시작했었지.

“당신에게 주고 간 그 머리끈 때문에 누가 당신 방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아챈 모양이에요. 나와 친분이 있던 간수가 나라는 것까진 밝히진 않은 것 같지만… 간수들 수뇌 사이에서는 침입자가 있었다는 걸로 간주하는 것 같아요.”

한스는 심증이 있어도 말을 하지 않은 것 같다. 보고는 했지만 말이지. 하기야 내 얘기를 꺼내면 본인이 내게 받은 담배와 각종 물건에 대해서도 꺼내야 했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더구나 내가 죄수 취급도 받지 않는 귀족 죄수인 이상 알려봐야 본인 손해라는 것을 알고 있겠지. 나도 처음에 그걸 노리고 거래한 거긴 하지만…….

“어찌 되었든 내 탓이란 건 돌이킬 수 없는 일이네요. 미안해요.”

리케도르안이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그치고는 단호한 몸짓이었다.

“……그런 거라면 당신의 탓이 아니에요.”

그가 내 옷자락을 쥔 손에 힘을 주는 것 같았다.

“당신이 내게 준 걸로 말하자면, 이것이 없었던 때에 나는 더…… 괴로웠으니까. 나는 새, 생겨나서 좋아요.”

“뭐가 생겨요?”

“생각할 수 있는 거요…….”

말하자면 의지처가 생겼다는 걸까? 아이들에게 보드라운 물건은 정서발달에 좋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이것을 보면 멍하니 벽만 보고 있지 않아도 돼요.”

하지만 이미 어린 시절을 학대로 보냈을 이 남자에게는 없었을 일인 게 분명했다. 나는 보잘것없는 머리끈이 이런 의미가 될 줄은 몰랐던 터라 조금 난감하고 머쓱해졌다.

이 남자에게 이 감방에서 하루는 그저 무심히 흘려보낼 하루들이었겠지. 그건 내가 나타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말하자면 나는 갈증으로 고통받는 사람 앞에 나타난 아주 작은 물 잔이었다.

입술을 축일 수는 있어도 갈증을 채워줄 수는 없다.

궁극적으로 이 남자의 삶이 행복해지기 위해선 저주를 풀어야 하고, 그 저주를 푸는 시기는 꽤 뒤인 데다가 해결할 사람은 내가 아닐 테니까.

물론 저주가 아니더라도 이 남자의 정서적 갈증을 일부나마 채워줄 수는 있겠지만, 나는 그리하지 않는 길을 택했다.

“그나저나 오늘은 꽤 오랫동안 변하지 않네요? 신기록 아닌가.”

나는 보일 듯 말 듯 웃으며 부러 다른 화제를 꺼냈다. 리케도르안이 나를 보며 입술을 달싹이는 것 같았지만 이내 시선을 떨어트렸다.

“그건 잘…… 모르겠어요. 그냥…….”

“그냥?”

귀마저 발긋 물들어 붉은 꽃처럼 보이는 얼굴 아래서, 그의 입술이 겨우 움직였다.

“이, 이 모습으로 당신을 조금 더…… 기억하고 싶어서…….”

이후로도 리케도르안이 무어라 한 것 같았지만 우물쭈물하는 그의 음성은 뒤로 갈수록 목구멍 안쪽으로 곱아 들어가 끝말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아무튼 간에 휙휙 짐승 모드로 변하는 건 어떤 순간에, 어떤 사유로 되는 건지 본인도 모른다는 거지?

“으음, 당신도 이유를 모른단 말이죠? 이것 참 변하게 하는 상황이나 원인을 알게 되면 당신도 편할 텐데.”

시도 때도 없이 변하는 건 리케도르안도 불편할 테니 말이다.

“……흣.”

“……이봐요?”

자기 어깨를 꾹 껴안던 리케도르안이 고개를 들더니 머리를 갸웃했다.

“끼잉?”

나는 헛웃음을 들이켰다.

……허. 이것 봐. 아주 순식간에 변하잖아?

나를 보는 눈망울은 아주 순진하기 그지없었으나 자세히 보면 조금 전과는 달랐다. 짐승 버전이 된 리케도르안은 아르르, 짖으려 하다 말고 내게 성큼 다가왔다.

“안 돼. 물지 마.”

“캉?”

나는 얼른 다리를 뒤로 빼냈다. 어째서인지 내 옷 끝자락을 물려 하던 리케도르안은 울상을 지었다. 먼저 휙 물러난 나로 인해 거리가 멀어졌기 때문인 듯했다.

“물면 가까이 안 갈 거야. 집에 갈 거야.”

“끼잉.”

“……알아들은 거지?”

“왕왕!”

…허, 말은 참 잘 알아듣네. 아니, 본능적으로 느끼는 건가? 여기서 사람 말만 해주면 좋을 텐데 말이지. 나는 한숨을 쉬다 말고 문득 주머니 안에 든 것을 떠올렸다.

처음부터 여기 오려고 계획했던 것은 아니지만…… 주머니엔 여전히 간식거리가 담겨 있었다. 얼른 주머니를 열자, 리케도르안의 눈동자가 반짝반짝해졌다.

“가기 전에 간식이나 주고 갈게.”

시간이 꽤 흘렀다. 이쯤 되면 슬슬 나갈 준비를 할 시간이었다. 나는 물러났던 거리를 살그머니 좁혔다. 손에 든 사탕 봉지를 벗겨내는데, 막 껍질이 뜯어질 때였다.

덥석.

나는 눈을 깜빡였다. 리케도르안의 손이 내 손을 꾹 붙잡고 있었다. 돌아온 건가?

“왜 그래요?”

“…….”

그는 물음에 답이 없었다. 조금 이상해 쳐다보고서야 알았다. 그의 숨소리가 조금 전보다 거칠었다. 이상한 느낌이 아니라 꼭 아픈 사람처럼 앓는 느낌. 깜짝 놀라 얼른 그의 뺨을 붙잡았다.

뜨겁잖아?

수 분 전까지만 해도 멀쩡한 낯빛이었다. 오히려 조금 희고 창백하면 창백했지 이렇게 붉어진 느낌은 아니었다. 그것도 아픈 사람처럼 열이 오른 느낌은 더더욱.

“하아…….”

그가 내 손을 꾹 부여잡은 채로 고개를 수그렸다. 어깨로 색색 닿는 거친 숨에 밀어내지조차 못했다. 어떡해. 진짜 많이 아픈가? 적어도 짐승 모드는 아닌 것 같았다. 대체 어느 쪽이지.

흘러내린 머리카락에 손을 댈까 말까 고민하던 순간이었다.

잠깐.

……리케도르안의 몸이 이렇게 컸었던가?

나를 붙잡고 있던 손은 기억하는 것보다 컸다. 옹송그린 등도, 옆으로 넓어진 어깨도. 어째서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나 이상할 정도였다.

더는 헐렁한 죄수복을 걸친 소년이 아니었다. 팽팽해진 남성의 가슴을 본다. 완연한 청년의 모습을 갖춘 남자가 천천히 머리를 들어 올렸다.

나는 바로 가까이서 보이는 야릇하게 긴 눈매에 히익, 숨을 삼켰다.

저기, 가까운데요. 가까운데요!

“……줄 거예요?”

“네, 네?”

“줄 거냐고. 물었어요.”

그가 붉은 입술을 움직여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코 끝에서 숨이 느껴졌다.

“음, 그러니까…… 주인님?”

응. 아냐. 그거 아니야. 절대 아니야.

“아니야. 이아나.”

“아……. 맞아. 그랬었지. 이아나.”

그가 내 이름을 몇 번이고 머금었다. 잊지 않겠다는 듯이. 아직 열기가 채 가라앉지 않아, 눈 밑이 발갛게 달아오른지라 오싹한 느낌을 자아냈다.

“그거, 나 줄 거예요?”

“……사탕?”

나는 사탕과 그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 얼떨떨하게 끄덕였다. 얼른 이걸 주고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컸다.

하지만 리케도르안의 뺨에 대고 있던 손은 떨어지지 못했다. 그가 나를 잡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른 손으로 나를 아프지 않게 잡고는 그대로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땀에 젖어 흐트러진 은빛 머리칼이 흔들린다.

찌이익.

손안에서 그가 입에 문 사탕 봉지가 찢어졌다. 왜 그걸 굳이 입으로 뜯는 건데……? 이렇게 묻고 싶었지만 쓸데없이 퇴폐적인 이 분위기가 내 입을 꾹 다물게 만들었다.

그가 옅게 눈을 휘었다.

“이제, 뜯었으니까. 먹여주면 되겠다, 그죠?”

……응. 그리고 넌 조금 자야겠네요.

“……그래요. 먹어요.”

나는 체념과 함께 손을 움직였다. 아니, 움직일 필요도 없었다. 그가 입술을 벌려 사탕을 이로 물었으니까. 어쩌다 이런 광경까지 보게 되었나, 잠시 회의감을 느끼던 나는 천천히 손을 빼내려 했다.

그가 나를 다시 붙잡지 않았다면 그랬을 거였다.

“리케도르안? 읏.”

선홍빛 혀가 내 손가락을 길게 핥아올렸다. 저기요? 내 물음은 그의 행동에 집어 삼켜졌다. 내 손목을 잡은 손은 단단했다. 하지만 빠져나가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음에도 움직이지 못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눈을 빼앗겨서다.

그가 내 손가락을 사탕이라도 되는 것인 양 물고, 핥는다. 앞니로 애교스럽게 물었다가도 축축하고도 따뜻한 혀가 손가락을 휘감았다. 배 속에 열기가 고이는 기분에 화들짝 손을 빼냈다.

벌떡 일어나는 동안 그는 입을 벌린 그대로 눈동자만 나를 따라 올라왔다. 후, 신이시여. 저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세요. 제발요.

“어디 가요?”

짐승과 같은 안광이 나른하게 반짝였다.

“……나 그만 자러 갈 건데.”

“응. 자요.”

낮고 낮은 음성이 내게 속삭였다.

“여기에서.”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뒤로 발을 빼냈다. 거의 본능과도 같은 행동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그가 잠시 방심한 탓인지 쉽사리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이 천운이었다.

나는 그대로 돌아서서 그대로 문을 나섰다.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와 함께 쇠사슬이 철렁거린 것도 같았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철문을 나섰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철문을 잠그는 것은 잊지 않았다. 나의 과오가 다시 그에게 해로 돌아와서는 안 되니까.

하지만 정신 쪽은 믹서기에 윙윙 갈아놓은 것처럼 엉망이었다.

‘돌아가자.’

그래. 돌아가서 누워서 푹 자자. 이런 해로운 건 얼른 잊는 거야. 나는 계단을 오르다 말고 등을 기대며 숨을 골랐다. 나는 나쁜 생각 안 했다.

착한 생각. 착한 생각. 착한 생각…….

이쯤 되면 착하지 않은 생각을 야기하는 남주님의 행태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지만 곧 반성했다.

이런 생각은 피해자의 탓으로 돌리는 질 나쁜 범죄자들의 사고방식과 다를 게 뭐란 말인가. 후 숨을 고르고는 등을 떼어냈다.

이제 이 지하 감방을 무사히 나서는 일만 남았다.

이미 투명화 마법은 계단에 막 오르면서 걸어놓은 뒤였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흔적을 남기는 건 잊지 않는 나였다. 이 정도면 출소하고 스파이나 첩보 쪽으로 취직해야 하는 건 아닐까? 별생각이 다 든다.

“……아니야.”

출소해서는 양지에서 살자. 그래 양지에서 살 거라고.

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은 모르지만 전과자라고 취업에 불이익이 있는 건 아니겠지. 나는 일부러 실없는 생각을 하며 숨을 골라냈다.

“……사람이 있을까.”

귀를 기울이자 지하실 입구 근처에서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내 생각이 맞았던 모양이다. 지금은 교대 시간이었다.

좋아. 기다려야 하나 싶었는데 다행이야.

나는 철두철미하게 고개만 삐쭉 내밀어 복도에 아무도 없음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새벽빛, 곧 아침이 될 듯한 빛에 아스라하게 물든 복도만이 시야를 반겼다. 꼼꼼히 확인하고서야 몸을 그대로 빼냈다.

그렇게 발걸음을 디디며 최대한 소리 없이 몇 걸음 걸었다.

이대로 무탈하게 돌아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얼른 침대로 돌아가자. 어쩐지 참 기나긴 밤이었다. 들리지 않게 작게 숨을 내쉬고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렇게 한 걸음을 더 디뎠을 때였다.

저벅저벅.

모퉁이를 돌아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앞은 아니었다.

뒤였다.

뒤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소리가 날까 그대로 멈췄다. 이 순간에도 발소리는 저 멀리서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니, 걸음이 어찌나 여유로우면서도 빠른지 금방 가까워져 오는 것 같았다.

……어떡하지, 이대로 빠르게 움직여야 하나?

아니면 저 사람이 나를 지나갈 때까지 기다려?

어느 쪽이든 길 한복판에 서 있는 지금 모습으로는 좋지 않을 것 같았다. 하나 왜인지 좀처럼 몸이 쉽게 움직여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좀처럼 잘 들을 수 없는 묵직하게 들려오는 저 발소리에 긴장한 탓이었다.

그래. 밤의 복도를 몇 번 걸어본 것도 경험이라고 나는 저 발소리가 내가 알던 평범한 간수들의 것과는 다른 것임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저벅저벅.

발소리가 더욱더 가까워진다.

아니, 일단 몸을 피해야겠어. 앞으로 가든 가장자리로 가든!

댕댕댕.

머릿속에 종이 치는 것 같았다. 어느 쪽이든 뒤는 돌아봐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는 것처럼. 나는 어느 신화 속 아내를 구출하러 저승으로 찾아간 음유시인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뒤를 돌아본 순간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것임을 경고받은 사람같이.

점자 가까워져 오던 발소리가 거짓말같이 멈췄다.

돌아보지 마. 돌아보지 말자. 그리 중얼거리면서도 결국 나는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솨아아. 바람이 불었다.

눈앞에서 긴 갈색 머리칼이 공중에 길게 나부꼈다. 이 바람에 내 망토 자락도 흩날리고 있었지만 마법을 걸어뒀기에 저쪽은 나를 보지 못할 것이었다.

……분명 그럴진대.

그러나 한 쌍의 금색 눈은 나를 정확히 보고 있었다. 아니. 저 그림같이 부드럽고 날카로운 눈매가 나를 향하는 데는 단 수초도 걸리지 않았다. 긴 팔다리와 단단한 어깨. 늘씬한 실루엣은 이 새벽빛에 물든 한 마리의 재규어 같았다.

르나그였다.

그가 나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내게만은 선하게 굴겠다는 듯이 웃을 듯 말 듯 입술을 휘면서.

“산책은, 재미있으셨습니까. 아가씨.”

나는 그대로 굳었다.

수많은 생각이 떠올랐다가 지워졌다. 반복해서 떠올랐다.

왜, 어떻게? 무슨 수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나는 숨을 참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천천히 눈을 아래로 내렸다.

아냐. 떠보려는 것일지도 몰라. 아직은.

시선이 향한 곳은 소맷자락이었다. 정확히는 손등까지 덮은 이 소매 아래 팔목, 팔목에 끼워져 있을 팔찌였다. 헤르님 대공가의 마법사. 미래의 리케도르안을 모시는 최측근 제이르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분명 그는 내게 이 팔찌에 투명화 마법을 걸어주었다고 했다. 나는 이걸 사용해서 리케도르안의 방에 몰래 다녀왔었고. 순찰하던 간수를 스친 적은 있었지만 그들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이제 와 팔찌가 고장 난 것은 아니었을 터였다.

그랬다면 리케도르안의 방에 들어가기 전 상급 기사가 나를 알아차렸을 테니까. 그 증거로 이 마법은 그림자마저 지워내는 마법이었다. 내겐 그림자가 없다.

……그러니, 제이르의 마법에는 문제가 없다.

아울러 그 사람은 미래의 대마법사가 되는 조연이었다. 남자주인공의 오른팔이 그저 그런 마법사일 리 없지 않은가? 비록 원작이 시작되기 몇 년 전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원작보다 실력이 못 미친다고 해도 무려 이 감옥 캄브라캄에 잠입해 몰래 마법을 사용할 정도의 실력자였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혹시 몰라 여전히 숨소리를 죽였다. 아니, 거의 참으며 아주 가늘게 내뱉고 있었다.

동시에 나는 아직도 확신하지 못했다.

르나그가 정말 나를 본 것은 아닐지도 몰라. 그냥 해본 소리면? 분명 그가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지만……. 여전히 혹시라도. 떠보는 것은 아닐까?

이성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르나그가 그럴 이유는 전혀 없었지만 나는 가정을 버리지 못했다.

……만에 하나라도 기척만을 느끼고 그저 불러본 것이라면. 아니, 이 상황을 피하고 싶은 걸지도 모르지만. 내 앞니가 아랫입술을 더욱 세게 깨물 때였다.

“깨물지 마십시오.”

정적으로 멈춰 있던 르나그의 몸이 움직였다. 그는 신기하게도 그림자 한 점 없는 내가 있는 곳으로 정확히 다가오고 있었다.

“다치지 않습니까.”

나는 깨달았다. 아니길 바랐던 내 생각은 내 바람과 상상에 불과했다는 것을. 르나그는 정녕 나를 정확히 봤던 것이다.

……대체 어떻게? 무슨 수로?

짧은 생각이 교차하는 사이 르나그가 손을 들어 올렸다.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 속도로 그저 올리는 것뿐이었지만 긴장하고 있던 나는 몸을 빠르게 뒤틀었다.

흠칫 떨었다.

르나그의 손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위협하려 한 것은 아닙니다.”

그가 상체를 살짝 기울였다. 정말 옅은, 약하디약한 바람에 스르륵. 내 망토의 모자가 흘러내렸다. 이어 바람이 불었다. 허리까지 내려온 내 머리칼이 한들거린다.

분명 아직 마법이 작용하고 있는데, 내게 그림자가 없는데도. 르나그의 가는 눈매는 흩날리는 내 머리칼을 향했다.

“……어떻게, 어떻게 전 줄 아신 건가요?”

고요한 내 목소리는 작았음에도 공동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르나그의 시선이 살짝 돌아간다. 코에 걸린 안경알은 시린 달빛을 반사했다. 조금 있으면 해가 뜨겠지만 여전히 어두운 새벽이었다.

“어떻게라……. 이 감옥에서 이런 색은 이아나 양 당신 외에는 없습니다.”

“아뇨. 망토를 썼는데 어떻게 알아보았냐는 말이 아니라요……. 그러니까.”

잠시 망설이자, 르나그가 이어받았다.

“당신의 체구와 걸음걸이로도 당신임을 알았기는 하였습니다.”

……아니, 그런 걸로 어떻게 나, 아니 저인 걸 아는 건데요. 놀람에 이어 찾아온 작은 황당함에 난 말문이 막혔다. 표현하고 싶은 것은 이게 아닌데. 내 손이 옷자락을 꾹 부여잡았다가 놓았다.

“혹시 제가 당신의 얼굴을 보고도 이아나 양인 줄 알아보지 못하리라 생각하셨습니까? 제 시력은 그리 나쁘지 않은 편일진대…….”

“……아뇨. 그러니까.”

“아니면. 제가 이아나 양에게 걸린 마법을 그대로 간파하여 놀라셨습니까.”

빙빙 돌아가던 르나그의 음성이 정확하게 지표를 찔렀다. 이 선생님. 왜 갑자기 명치를 치고 그러세요, 다른 의미로 깜빡이가 없는 사람이네. 나는 대비하지 못한 이처럼 입을 달싹였다.

“정확…… 네. 정확하시네요. 그걸 여쭙고 싶었어요.”

“그럼 저는 이아나 양이 어째서 이 야심한 시각에 1층 복도를 걷고 계셨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그것도 마법을 사용한 상태로.”

“…….”

……나도 묻지 않을 테니 너도 묻지 말라는 건가. 슬그머니 눈을 들어 올려 르나그의 눈을 보았지만 의중을 알 수 없었다. 물음에 답하지 않겠다는 것인지, 내게 질문을 하고 싶은 건지.

“제 능력에 대한 힌트를 드리자면 저는 마음 먹으면 이 감옥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두 알 수 있습니다.”

푸르스름한 빛으로 물든 새벽과 아침 사이에서 그의 황금색 눈이 유달리 반짝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말입니다.”

비유를 찾자면 어둠 속에 몸을 웅크린 맹금의 그것 같았다.

“저도 많이 놀랐습니다.”

확실히 그의 눈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저 시선은 당장 네 죄를 고하렷다, 하고 나를 뼈까지 발라먹겠다 선언할 것 같은 눈 같았으니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니.”

부드러움 속에 숨기려 하는 것 같았으나 특유의 날카로움은 시선을 타고 흘러나왔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내 숨이 꼴깍 넘어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느새 나는 손을 포개어 가슴 위로 꾹 눌러 잡았다.

찬연한 예기를 품은 눈이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그것.”

“네?”

“팔에 그것 말입니다.”

그는 놀랍게도 내 팔 언저리, 정확히는 헐렁한 팔찌가 흘러내린 그 자리를 정확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물건’은 당신의 오빠가 준 것입니까?”

아무래도 나는 이 남자를 과소평가했던 것이 분명했다. 그래. 책 속에서 모든 이야기를 좌지우지했던 최종 흑막 체이서, 그보다는 못할 거라고.

그러나 달리 보면 그 체이서의 무려 오른팔씩이나 되는 조연이었다. 남자가 이야기한 것처럼 이 남자에게는 내가 몰랐던 능력이 숨겨져 있던 걸지도 몰랐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마법 물건을 갖고 싶다고 했더니 선물해주었어요.”

……이름 모를 오빠 미안. 이름 좀 팔게요.

나중에 가서 르나그가 오빠란 사람에게 확인하면 곤란해지겠지만 당장은 모면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혹여나 뒤에 가서 다시 꺼낸다고 해도 수습할 이야깃거리를 생각해볼 수 있으니까.

그리고 내 변명은 그럴싸했다.

이미 오빠란 사람은 내게 많은 것을 선물해주었다. 아울러 내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가져다주었다. 허구한 날 소포가 날아오는 데다 이이는 내 오빠와 아는 사이였으니. 이를 모를 리 없었다.

내 오빠가 전달 가능한 물건 안에 마법이 걸린 물건까지 포함되는지는 몰라도……. 여기서 더 따지려 들면 여동생을 끔찍하게 아끼는 사람이라 몰래 주더라. 해버리자.

“그렇군요.”

그러나 결심이 무색하게도 그는 쉽게 수긍했다. 아주 산뜻하게. 오히려 놀란 건 나였다.

……이걸로 납득한다고? 정말?

“저, 혹시…… 이런 건 감방 안에 반입이 안 되는 물건인가요?”

“원칙상으로는 그렇습니다.”

르나그가 단정한 어투로 대답했다. 그러고는 장갑 낀 손을 자기 가슴에 가져다 댔다.

“하지만 어떤 규칙이든 이아나 양은 예외이시니 개의치 않으셔도 됩니다.”

“……예외요?”

“예. 제가 당신의 오빠에게 부탁받은 사항이기도 하지요.”

서린 음성이 조곤조곤하게 귀를 파고들었다.

“이아나 양이 무엇을 하려 하든 자유롭게 두어달라는 것.”

이 순간 눈앞에 있는 것은 이 남자인데, 왜 이상하게도 이름도 얼굴도 모를 ‘오빠’의 존재감이 커지는 기분일까.

대체 그 사람 뭐하는 사람이지?

나를, ‘이아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거야? 이렇게까지 캄브라캄에서 편의를 봐주려고 하다니. 그렇게나 아끼는 건가?

혼란스러웠다.

분명 귀족 죄수들은 여타 죄수에 비해 정말 범죄자가 맞나 싶을 만치 자유로웠다. 물론 여기엔 그들이 죄질이 가볍거나 진짜 죄인이 아닌 자도 섞여 있는 탓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규칙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그러길 바라는 바입니다.”

그러니까, 귀족 죄수들에게도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 정도는 있었다는 거다. 식사 시간을 준수한다거나……. 밤에는 절대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것이라거나.

“밤 산책이 하고 싶으셨습니까?”

“……네. 하지만 밤에 나오는 건 간수들도 있고 규칙상 눈치가 보여서. 아니, 원래 원칙상 안 되는 일이니까요.”

나는 어느새 침착함을 되찾고 차분하게 대꾸했다. 물론 그러면서도 당황한 표정을 드러내는 건 잊지 않았다. 여기서 너무 침착하면 이상해 보이잖아.

너무 의식한 탓일까 졸음이 밀려왔다. 하기야 밤을 꼬박 지새웠으니 피곤할 만했다.

깨어나기 전까지 많이 아팠다던 이아나의 몸은 생각보다 편히 움직여졌지만 한 가지 단점이 있었는데, 지금처럼 밤을 지새우는 것에 꽤 취약하다는 것이었다.

한번은 오빠에게 편지를 쓰다 밤을 꼴딱 새웠던 적이 있는데, 그때는 다음 날 휴식 시간까지 꾸벅꾸벅 졸았었지.

“피곤하십니까?”

“아……. 음, 티 났나요?”

내가 어설프게 웃자, 르나그가 움찔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잠시뿐이었고 그는 자연스럽게 등을 반쯤 돌렸다.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이어 르나그가 정말로 내 옆에서 걷기 시작했다. 얼떨결에 그의 걸음을 따라 걷게 된 나는 잠시 후회했지만 이내 가볍게 지워버렸다. 그래, 뭐 데려다준다는데 어쩌겠어.

그나저나 여전히 내 쪽에는 그림자가 없는데 말이지.

이를 증명하듯 중간에 교대하던 중인 간수와 마주쳤지만 그들은 르나그에게 정중하고도 깍듯하게 인사할 뿐 이쪽에는 전혀 시선을 주지 않았다. 여전히 내 몸에 투명 마법이 걸려 있다는 증거였다.

르나그는 끝까지 내게 왜 산책을 하고 싶어졌냐고 묻지 않았기에 나도 르나그가 어떻게 나를 알아봤는지 묻지 못했다. 더는 살떨리는 이야기를 주고받고 싶지 않은 마음이기도 했다.

마침내 도착한 내 감방 앞에서 우리는 시선을 마주했다.

“편히 쉬십시오.”

그는 잠시 멈칫했다가, 이내 내게 피곤하다면 내일 아침식사 시간에는 나오지 않아도 괜찮다고 덧붙였다. 편의를 봐주겠다는 이야기 같았다.

“그래도 괜찮은 건가요?”

“이아나 양께서는 몸이 약하지 않습니까.”

그거야 그렇다고는 듣긴 했는데……. 나는 조금 머쓱한 표정으로 뺨을 긁적였다.

“제가 조금은 편의를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싫은 건 아니라요. 그냥 그런?”

덕을 조금도 아니라 많이 보는 것 같지. 나도 뭔가 묘하게 이상한 것을 느끼는데, 이게 뭔지 정확히 콕 짚어 말을 못 하겠다.

눈앞에 큰 그림이 있는데, 구석만 보느라 전체가 보이지 않는 느낌?

“……이 감방에서는, 특히 귀족 죄수에게는 몸이 안 좋은 자에 한해서 활동을 빼고 휴식을 주기도 하니 명확히 말하자면 편의를 보는 건 아닙니다. 특혜도 아니지요.”

“아, 그런가요?”

“하지만 확실히 이아나 양께서는 원하는 것을 언제든 뭐든 하셔도 괜찮습니다. 특권이라 말을 하는 이들은 걱정 마십시오.”

……어쩌시려고요?

잠시 살벌한 상상이 스쳐 갔지만 르나그는 말이 없었다. 그저 웃고 있건만 많은 말을 들을 기분이었다.

“아무튼 염려 마시고 하고 싶은 것을 하십시오. 모두, 제가 허락할 테니까요.”

“그건 어째서인가요?”

술술 대답을 뱉던 그가 어쩐 일인지 잠깐 입을 꾹 닫았다가 떼어냈다.

“제가 그리하고 싶으니까요.”

아, 그러니까 엿장수 맘대로라는 건가? 시선을 바닥으로 흘려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르나그가 짧은 인사를 끝내고 등을 돌렸다.

“저기. 후작님.”

나는 막 움직이는 등을 향해 밑밥을 던졌다. 막 생각난 건데 일단 던져나 보자 하고.

“네? 지금 뭐라고…….”

“아, 아닌가요? 동료들은 다 그렇게 불러서요.”

“……아뇨. 아닙니다. 말씀하시지요.”

그가 손등으로 우아하게 제 입을 가렸다. 틈을 타 나는 얼른 말을 이었다.

“하고 싶은 걸 뭐든 해도 된다고 하셨는데. 그럼.”

그가 고개를 돌렸다.

“지하 감방에 가는 것도요?”

“…….”

침묵 속에서 그의 안경 속 눈이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뱀의 것처럼 예기 어린 시선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지만 꾹 참아냈다.

막 이제 와서 전부 취소하고 너 독방행 땅땅땅. 하진 않겠지?

앞으로 리케도르안을 만날 일이 또 있을지도 몰랐다. 그때마다 이렇게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하고 싶진 않았다. 밑져야 본전이란 생각으로 한번 던져본 거였지. 어쨌거나 저 남자는 내게 묘한 편의를 봐주고 있는 것 같으니까.

“……그를 가지고 노는 것이 재밌습니까? 하기야. 당신은 그럴 수 있겠군요. 그럴 만하다 여깁니다.”

르나그는 내 제안에 뜻 모를 답을 내뱉었다. 저게 무슨 말이야? 대충 맥락상 알아들은 척 동의 어린 시선을 보냈다.

엄밀히 말하면 가지고 노는 건 아닌데.

“산책을 하며 당신이 공을 던지거나 목줄을 쥐는 등, 그에게 수치를 주었단 이야기는 전해 들었습니다.”

……리케도르안이 짐승일 때 산책을 시켜준 것이 이렇게 와전된 모양이다.

“아무튼 간에 앞으로 어떤 시간에든 그곳에 출입하시겠다면 상관없습니다. 대신.”

생각보다 가볍게 받아들여진 데에 기묘한 허탈감이 들었다. 아니, 그러면 그동안 열심히 한스를 꼬시거나 오늘 힘들게 침입한 건 또 뭐란 말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말이나 꺼내 볼 걸 후회하는데, 불쑥 눈앞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르나그의 상체가 우아하게 기울어진다.

“……대신요?”

무엇을 말하려는 걸까. 긴장한 순간 그의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었다. 딱 무례하지 않을 거리에서 멈춘 그는 서리 같은 음성으로 부드럽게 속삭였다. 조금 망설이면서.

“그 시간만큼 저와 보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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