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87)

***

그날 밤 잠을 설친 것은 물론이다.

다음 날 이른 오전, 내가 발을 끌며 복도를 걷는데, 옆에서 이런 날 흘끗흘끗 보던 간수가 슬쩍 입을 열었다.

“이아나 괜찮습니까? 아픈 곳이 있다면 의무실로 가겠습니다.”

“아니. 아니에요. 산책할래요. 바람 쐬고 싶어요.”

나는 퀭한 얼굴로 산책을 나왔다. 어제 새벽, 침대로 돌아왔을 때 이미 아침에 가까워져 잘 시간은 거의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돌아가는 데 어려움이 있었던 건 아니다. 리케도르안의 감방에서 빠져나와서 문을 원래대로 잠그고 한스의 마법까지 풀고 돌아가는 데에는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으니까. 감방으로 돌아가는 길도 순조로웠고.

밤잠 이루지 못한 건 순전히 내 문제였다.

아니, 그 모습을 보고 누가 편히 발 뻗고 자냐고! 솔직히 성장한 리케도르안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려서 혼났다. 책 속 세계관 내 남녀를 불문하고 전부 홀릴 외모라더니… 과소평가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전부 홀리는 게 아니라 아주 씹어 먹을 것 같은 외모던데? 나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산책을 담당하는 간수가 의아하게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이아나? 얼굴이 뜨겁습니다. 역시 의무실을.”

“아니에요. 산책을 해서 열이 오르네요. 운동이 과했나 봐요.”

“운…동이요?”

간수는 산책은커녕 벤치에 앉은 내 모습을 한번 훑었다.

……네. 저도 개소리인 걸 압니다.

하지만 간수는 더는 무어라 하지 않고 다른 죄수에게로 걸어갔다.

나는 멀어지는 등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오늘은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푹 쉴 생각이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한 번 더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으아아아!”

착한 생각. 착한 생각!

저 멀리 옆방 죄수인 샐리를 비롯한 여자 죄수들이 모여 평소보다 더욱 꺄르르 웃는 것이 보였다. 보통 때라면 저들 사이에 슬그머니 끼어들었겠지만 오늘은 아니다. 힘이 없어서 그대로 감았다.

제이르를 다시 만난 것은 그날로부터 사흘 뒤였다.

“마법이 발동된 걸 느꼈는데, 성공했나 봐요?”

수도에서 새로운 마법 구속구들이 도착했다며 한동안 산책이 금지된 리케도르안이었다. 그 덕에 오늘도 홀로 산책을 즐기던 나는 갑자기 나타난 불청객을 못마땅하게 응시했다.

“아아, 안녕하세요.”

오냐. 내가 마침 널 벼르고 있었단다.

“내가 성공했을지, 어떻게 아나요?”

“간단하죠.”

제이르가 여름 숲처럼 싱그럽게 웃었다. 녹색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실패했다면 이곳에서 더는 보지 못했을 테니까요.”

나는 멈칫했다. 눈을 들면, 싱글싱글 웃는 낯이 있었다. 와. 은근히 짜증 나는 얼굴이네.

“그러니까 실패할 가능성을 알고, 이후 일어날 일을 알면서도 내게 맡겼다는 거다?”

“아가씨는 기꺼이 해주셨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덕분에 호기심도 충족하고.”

여전히 그는 연구자인 척 행세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우습지도 않은 연기였지만 사정을 몰랐다면 제법 그럴싸한 연기였다.

“확실히 나도 궁금해서 참여했으니 당신의 탓만 할 것이 아니네요.”

“아.”

“하지만. 적어도 나는 당신처럼 재미가 아니라 그 죄수를 걱정해서 이 일에 끼어든 거란 건 알아두세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에게서 한 걸음 물러나 살짝 경멸스러운 눈으로 제이르를 응시한다. 네가 진짜 리케도르안을 생각한다면 양심에나 콕콕 찔려보라는 뜻에서. 아니나 다를까 제이르가 순간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내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가씨와 싸우고 싶지는 않아요. 언제 또 인사를 드릴 수 있을지 모르니까요. 전부 밝힐 수는 없지만 제게 큰 의미가 있는 일이었답니다.”

그는 진지했다.

“진정 마법을 써주셨다면 정말 감사한 일이지요.”

그러고 보니 오늘은 중간동과 함께 산책하는 날이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나타난 것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지만, 그럼 그는 지금도 마법으로 몸을 숨기고 나타난 건가?

“저로서는 위험을 감수하고 만나러 온 것이랍니다. 곧 이 감방의 주인이 완전히 돌아오면 섣불리 움직이기 힘들어지거든요. 그 사람이 있을 때의 이곳은 마법사에게도 위험한 곳이라.”

이곳의 주인, 르나그를 말하는 것이리라. 아무리 탈옥이 자연스러운 그라도 쉬운 일은 아닐 것이었다. 그제야 나도 표정을 살짝 누그러뜨렸다. 이 남자에게 리케도르안이 중요한 사람이긴 한가보다 싶었으니까.

“그나저나 걸어보니 별거 아니었죠?”

“하, 별 거, 아니었다고요?”

전혀.

“내가 그것 때문에 얼마나 밤잠……. 아니. 아니에요. 그럼 그 죄수는 이제 괜찮은 거예요?”

나는 신음하던 리케도르안을 지워내며 제이르를 응시했다.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얼굴을 부드럽게 풀어냈다.

“네, 괜찮습니다. 예정보다 빨리 걸어준 걸 테니. 아, 실례. 여기서 ‘예정’이란 성인이 되기 전을 말합니다. 아가씨가 아니었다면 아주 늦게나 걸 수 있었겠지요.”

어쨌거나 언젠가는 걸 예정이었다는 소리였네. 안 되면 본인이 나서려 했나. 나는 작게 숨을 돌렸다. 어차피 걸어야 하는 거 내가 조금 일찍 건 모양이었다. 예상대로였다.

“그보다 갑자기 커진 건 뭐예요?”

나는 밤에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털어놓았다. 제이르는 유심히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설명이 이어지자 내 얼굴이 점차 풀렸다.

“당연한 일이었다고요?”

“예. 일순간 ‘성장’이 일어난 건 당연한 일입니다. 일시적인 현상이죠. 미리 그 모습을 끌어옴으로써 몸이 마법에 적응을 잘했나. 일종의 시험을 해본 거라 생각하면 편할 거예요.”

실수한 건 아니란 말이지.

“그래요. 일시적인 거고 앞으론 그럴 일 없단 거죠…….”

안도의 숨을 뱉던 나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제이르를 만난 첫날에는 별생각 없이 받아들였지만…… 다시 만난 지금 의문이 하나 치켜들었기 때문이었다.

“왜 저였나요? 왜 굳이 제게 약을 준 거였어요?”

“음, 그걸 물어주실 줄은 몰랐는데.”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런 것을 묻느냐는 듯이.

“두 사람이 함께 산책하는 것을 보면서 아가씨가 그 죄수와 친밀한 사이라고 느꼈으니까요. 제가 아가씨에게 부탁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죠.”

친밀한 사이…… 개처럼 다루는 사이가? 하지만 모든 사정을 아는 제이르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그동안 아무도 리케도르안에게 다가가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사실 짐승의 저주를 앓는 사람은 아무에게나 경계를 풀지 않아요. 특히나 저는 중간동의 죄수라 접근이 어려울뿐더러 아무나 다가갈 수 없는 죄수이기도 했고. 적어도 아가씨는 그 죄수가 경계를 낮출 만큼……. 잘해주셨다는 뜻이겠지요.”

그리 말하고는 제이르는 작게 웃었다. 마치 감사하다는 듯이.

“그런데 아가씨는 왜 그 죄수를 돕나요? 저야 연구를 위해서라지만, 아가씨의 이유를 듣지 못했네요.”

바람이 불었다. 제이르의 머리칼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그 사이로 보이는 눈은 장난스러운 척하지만 퍽 진지했다. 웃기지도 않네. 지금 리케도르안에게 해가 될지 말지를 판단하기라도 하겠다는 걸까. 나는 그대로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쥐고 픽 웃었다.

“잘생긴 게 좋아서요.”

벙 찐 제이르의 얼굴을 재밌게 바라보면서.

“와……. 생각지 못한 답변이네요.”

그는 얼이 빠진 얼굴로도 퍽 짓궂은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이 꽤나 근사했다. 이어서 그의 짧은 머리가 살랑 흔들렸다.

“그럼 부탁 하나만 더해도 될까요.”

“아뇨, 하지 마세요.”

그가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안 된다고 했건만 태연히 입을 열면서 말이다.

“다음에 또 그를 보게 된다면 제게 경과를 알려주겠습니까?”

제이르에게서 나온 것은 예상보다 멀쩡한 부탁이었다. 한 번 더 밤에 잠입을 시키면 정강이를 차주려 했는데.

“그건 어렵지 않지만 우리가 다시 볼 일이 있을까요?”

“마법사에겐 이런 말이 있죠. 안 되면 되게 하라.”

나는 그의 부탁에 고개를 끄덕였다. 경과만 전달하는 것이라, 어렵지는 않은 일이었으니까.

“어떻게든 아가씨에게 연락하겠습니다. 꼭.”

***

약 십 분 뒤, 제이르는 제 방으로 돌아갔다. 시간이 촉박했던 모양인지 입을 벌리던 모습을 얼른 수습하고 휙 가버리는 모습이 말도 못 붙이게 바빠 보였다.

‘뭔가 묻고 싶은 게 많은 얼굴이던데.’

산책이 끝나고 정원에서 감방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옆방 죄수인 샐리를 만났다. 그녀 또한 나처럼 산책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로 옆에는 담당 간수가 함께였다.

“샐리!”

“어머, 이아나!”

그러고 보니 정원에서 여자 죄수들이랑 신나게 수다를 떨고 있었지. 최근 내내 하이텐션이던 그들을 떠올린 나는 샐리에게 손을 흔들었다.

“여기 있었어?”

샐리가 나를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도도도 달려왔다. 그녀의 간수를 슬쩍 쳐다보니 터치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아깐 어디 갔었어?”

“아까요?”

“정원에 있던 건 봤는데 찾으니 없어서 아쉬웠어. 얘.”

제이르를 만나는 동안 그가 마법적인 뭔갈 해서 안 보였던 모양이다. 나는 태연하게 웃으며 간수관리장을 만나고 왔다고 말했다.

“아하, 위층에 갔다 왔구나?”

“그렇죠.”

어차피 내가 자주 다녀온다는 건 그녀도 알고 있는 데다 지금 함께 있는 간수는 정원 산책 때 없던 이였다. 샐리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넌 꽤 대단한 가문 딸이었지? 이름은 모르지만 말이야.”

“에이. 그렇지도 않아요.”

이곳에서 간수관리장을 직접 만나는 죄수는 꽤 괜찮은 집안의 귀족이라는 뜻과 같았다.

“그나저나 무슨 일 있었어요? 날 찾았다면서.”

하지만 나도 내 가문 이름을 모르는데 대단하면 뭐하겠어?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녀를 바라봤다. 샐리가 내 어깨를 애교스럽게 두드렸다.

“그래!”

이어 그녀의 얼굴이 갑작스레 휙 다가왔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갑자기 왜 이러세요.

“이아나, 여자 죄수들끼리는 전부 돌렸는데. 넌 아직 못 들었지?”

“무슨 이야기인데요?”

“감방을 방문한 엄청난 미남 이야기!”

워낙에 할 일이 없는 감방이라 죄수들이 할 수 있는 소일거리에 한계가 정해져 있었다. 이렇다 보니 각자 나름의 취미를 개발하곤 하는데, 그중 샐리를 비롯한 몇몇 죄수들은 남자 죄수들의 얼굴을 두고 한담을 나누는 게 취미였다.

이름하야 미남 추구, 미추 모임이라 이거다. 사실 내가 샐리와 친해진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세상에, 들어보렴. 이번에 나타난 사람이 이롭스보다 잘생겼다고 하지 않니!”

그리고 이들이 가장 좋아라 하는 사람이 간수 중 젊고 미남인 이롭스라는 사람이었고.

“처음엔 이래. 아이샤 자작부인이 글쎄, 식당에서 돌아오다가 커다랗고 검은 마차를 봤다지 뭐야.”

“검은 마차라면 손님용이요?”

“그래! 죄수용은 파란색이잖니? 그리고 마차에서 내린 사람을 봤는데. 세상에 그렇게 생긴 미남은 처음이라지 뭐야.”

아이샤 자작 부인이라면 무려 스무 살 어린 귀족 청년과 염문설 때문에 여기에 갇힌 부인이다. 보통이라면 문제 될 것이 없는 일이었지만 집안 사이의 문제가 크게 불거질까 두려워한 남편이 머리 좀 식히라며 이곳에 보냈다고 했지.

머리 식히라고 감방이라니, 남편이 좀 쓰레기시네. 하고 고개를 끄덕이던 기억이 있다. 참고로 이분의 특징은 그림을 기가 막히게 잘 그린다는 거다.

“들어봐. 그분이 그림에 또 일가견이 있잖아? 본 걸 그대로 그려주셨는데 와……. 정말.”

“엄청났어요?”

“그래!”

좀처럼 자세한 설명 없이 호들갑을 떠는 샐리를 보며 깨달았다. 그냥 수다를 떨고 싶었던 거구나.

“음, 확실히 그 정도면 대단한 미남은 맞겠네요. 아이샤 자작부인은 기준이 까다로운 분이니까.”

확실히 과장을 한 건 아닌 것 같았다. 이들, 이른바 미추 파악(?) 모임은 한가락 하던 귀족들답게 심미안이 남달랐다. 특히나 자작 부인은 그중에서도 기준이 남다른 사람이었지.

샐리의 수다는 그 후로도 이어졌다. 흥미로운 이야기도 10분이 넘어가자 슬슬 한계가 왔다. 그녀의 담당 간수마저도 질린 얼굴로 그녀를 바라볼 정도였으니.

고개를 끄덕이며, 대충 맞장구를 쳐주고 있을 때였다.

“이아나!”

누군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내 방을 지키는 간수였다.

“급한 일입니다.”

그는 나를 방으로 데려다주던 간수를 돌려보내고 은근하게 샐리를 바라봤다. 샐리는 어머나 시간이 이렇게, 하고 외치고는 내게 인사를 건넸다.

“또 보자. 이아나!”

음. 덕분에 오늘은 짧게 끝났네. 나는 방으로 쏙 들어가 버린 샐리를 바라보다 슬쩍 시선을 옮겼다. 내 방을 감시하는 간수는 ‘제이슨’이란 이름의 남자로 무뚝뚝한 중년 아저씨였다.

그는 젊은 여성인 나를 어려워하는 편이었는데, 나뿐 아니라 대부분의 여성 죄수를 어려워했다. 그래서 용건이 있을 때 말고는 말을 거의 안 해봤지?

조금 난감한 얼굴을 한 그가 작게 속삭였다.

“간수관리장께서 부르십니다.”

간수관리장? 난 고개를 갸웃했다. 오빠가 뭔가를 또 보낸 걸까. 물건이 올 때마다 불려갔기에 드문 일은 아니었다.

“얼른 가요.”

간수관리장의 집무실은 내 감방의 위층이었다.

계단을 가볍게 걸어가는데, 아래쪽이 소란스러웠다. 흘끗 난간 아래로 보자 복작복작하게 몰린 사람들이 보였다.

“저기, 제이슨. 저긴 왜 저렇게 사람이 몰려 있나요?”

“아……. 오늘 손님이 오셔서 그런 걸 겁니다. 중요한 손님이라 들었는데, 어떤 분이신진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흐음, 샐리가 말한 미남인가. 폐쇄된 감방이었지만 면회가 금지된 것은 아니었다. 대신에 굉장히 많은 돈을 내야 올 수 있다고 했지?

<그 돈은 모두 감방 주인의 주머니로 들어가지.>

남작 아저씨의 말을 듣고 역시 르나그는 수완가라는 생각을 했었다. 감방 장사로 이렇게 돈을 벌다니. 물론 일부는 국가 재산이겠지만 르나그 지분이 크다고 했다.

아무튼 간에 중요한 손님이라 말을 하는 걸 봐서는 단순한 면회객은 아닌 것 같은데… 가벼운 호기심으로 난간 아래를 다시 살펴본 나는 사람 한가운데에서 유달리 눈에 띄는 커다란 등을 발견했다.

등이 커다래 보인 건 남자의 덩치가 아주 크거나 살집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저런 체형이 벗겨보면 아주 탄탄하다던데. 동시에 나는 눈을 떼어내지 못했다. 살짝 보이는 옆모습이 무척이나 유려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와. 저 사람이 샐리가 말한 사람인가?”

콧날만 살짝 보이는데 저렇게 미남이오, 외치다니. 정면이 보고 싶어지는 실루엣이네. 하나 머리에 로브 같은 걸 걸치고 그림자 쪽에 서 있어서 머리색이나 자세한 윤곽은 볼 수 없었다.

그저 늘씬한 실루엣이 잔상에 남을 때까지 바라봤다.

그리고 남자가 사라진 뒤에야 나는 고맙게도 나를 기다려준 제이슨과 함께 간수관리장실로 향했다.

뜻밖에도 간수관리장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이는 르나그였다.

“이아나 양.”

나를 자연스럽게 반긴 르나그가 대신 문을 닫았다.

“음, 출타하셨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말하다가 문득 며칠 전 새벽 리케도르안에게 가며 들었던 간수들의 대화를 떠올렸다. 요즘 르나그가 볼일을 보고 나서 저택이 아니라 감방으로 돌아온다고 했었지.

……그렇게 감방이 좋은가?

르나그가 나를 보며 가볍게 묵례했다.

“네. 맞습니다. 잠깐 돌아왔습니다. 급한 일이 생겨 다시 가봐야 하겠지만. 그보다, 아쉽겠습니다.”

응? 뭐가? 호기심 어린 나의 시선에 그는 보일 듯 말 듯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의 오빠가 이곳에 찾아왔었습니다.”

“오빠가요?”

나는 멈칫했다.

“모처럼 당신의 오빠가 이곳까지 보러왔는데, 사정이 생겨 그대로 돌아갔습니다.”

찻잔을 들어 올린 그가 말을 이었다.

“여기 집무실까지 왔지만 도착과 동시에 가문에서 일이 터졌다는군요. 아무래도 당신의 가문은 여러…… 일이 많은 곳이니까요.”

“아…… 네. 그렇죠.”

난 어쩌면 오빠가 체이서 아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떠올렸다. 책 속 머리가 좋은 만큼 많은 음모와 계략을 제 손안에서 굴리던 체이서였다. 그런 사람 아래에 있다면 여러 일을 처리하느라 확실히 바쁘겠지. ‘오빠’도? 나는 얼굴도 보지 못한 오빠의 격무에 조금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러고는 나도 모르게 배배 꼬던 머리칼, 내 머리색을 보며 눈을 깔았다.

‘내가 분홍 머리니 오빠도 비슷한 색을 지녔겠구나.’

이아나가 이름도 듣지 못한 인물이니 아마도 이 오빠란 사람도 모르는 이일 가능성이 크겠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네요.”

“당신이 그럴 것 같다며 당신의 오빠가 남겨두고 간 것이 있습니다.”

그 말을 하는 동시에 나는 움찔했다. 르나그가 설핏 얼굴을 찌푸렸기 때문이었다. 와, 찡그리니까 엄청 살벌하네. 긴 머리칼과 서늘함을 드리우는 안경, 그는 감탄이 나올 만큼 우아한 자태였으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시선을 가진 이였다.

티를 내지 않으려 했지만 꼭 커다란 도사견이 으르렁거리는 것처럼 무서운 시선이었다. 곧 원래의 시선으로 돌아갔지만 난 남아 있는 잔상만으로 손끝을 파르르 떨었다.

“보통은 이는 규칙 위반이지만, 당신을 책임지겠다고 한 이상 전달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이것입니다.”

나는 르나그가 꺼내 든 것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 거라고요?”

이 순간 기쁨보다는 황당함이 앞섰다. 르나그가 꺼내온 것은 꽃다발이었다. 양손에 들면 가득 찰 꽃다발. 크기 자체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문제는 이게 진짜 꽃이 아니란 점이었다.

보석이었다. 그것도 전부!

……와, 잠깐만. 이거 깨물어 봐도 되나?

보석의 중심은 새하얀 꽃이었는데, 꽃잎이 보석인 것 같았다. 나는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보석을 바라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전부 크기가 내 주먹 네 개 정도인데…… 이 정도면 집 한 채를 받은 거 아냐?

“……저희 집, 망하지는 않겠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집안 간의 일 때문에 그런 거라면 안심하셔도 됩니다. 당신의 오빠가 잘 해결 중이니까요.”

아니. 그걸 물은 게 아닌데요. 천천히 눈을 내려뜬 나는 오빠가 남기고 갔다는 꽃다발을 응시했다. 그러다 꽃다발 속에 자리한 작은 편지를 꺼냈다.

보석에 시선이 팔려서 이제야 알아차렸네. 얼른 편지를 펼쳤다.

「내 사랑하는 여동생에게.」

늘 보던 단정한 글씨.

「나를 보지 못한 대신. 이걸 봐주겠어? 너처럼 아름다운 꽃을, 하루에 한 번. 시들지 않는 이 꽃을 말이야.」

향기도 없는 꽃에서 마치 향기가 날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시드는 꽃은 네가 실망할 테니까.」

아무래도 나를 보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나서 쓴 것인 듯 미안함이 담겨 있었다.

옆에서 르나그도 편지는 이곳에서 쓴 거라고 알려주었다.

「네가 실망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어. 좋은 것만 가지길 바라기에.」

이윽고 마지막 구절에서 잠시 시선이 멈췄다.

「곧 데리러 갈게.」

난 얼떨떨하게 입을 달싹였다. 솔직히 가늠이 되질 않았다. 대체. 이아나네 집은 얼마나 부자인 거야.

그보다…… 감방에서 이런 걸 받아도 되는 거야?

4장. 감방의 남자들

꽃다발을 한창 바라보던 나는 고개를 들어 르나그를 응시했다. 르나그는 긴 침묵을 잘도 기다려주었다.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여전히 당황스러웠다. 생전 처음 보석 꽃이라는 해괴하고 희귀한 것을 받았는데,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겠다. 하나 난 최대한 동요하지 않고 태연하려 애썼다.

“이걸 방으로 가져가도 되는 걸까요?”

이전에도 말한 바 있지만 감방은 감방답게 매우 단순하고 심플한 구조였다. 달랑 침대와 책상, 그리고 창문과 커튼. 여기서 커튼도 귀족 죄수라 있다고 했지.

죄질이 나빠지는 중간동부터는 보통 상상하는 감방과 다를 것이 없다 했다. 아무튼 간에 방에다 이 꽃을 가져다 두면 그야말로 누추한 곳에 이런 귀한 보석님이 해야 할 상황이 벌어질 듯했다.

“가져가도 괜찮습니다.”

르나그가 가볍게 끄덕였다. 그의 허락에 ‘그렇구나, 역시 안 되죠?’ 하고 끄덕이려던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당신 것이니까.”

……아니. 훔쳐 갈까 봐 걱정한 건 아니었는데. 나는 어느새 가까워진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뒤로 물렸다. 어째서인지 그가 내게 상체를 살짝 기울여준 덕에 그를 자세히 바라볼 수 있었다. 찬탄이 나올 만큼 예쁜 금색 눈동자였다.

가만. 이 안경…… 도수가 있는 걸까? 안이 굴곡되지 않고 그대로 보이는 것 같은데.

“이 순간에 이상한 질문이지만, 눈 많이 나쁘세요?”

책 속에 르나그 시력에 관한 구절은 없었지? 내 물음에 그가 잠시 멈칫했다. 생각지 못한 질문이었나 보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다른 이유 때문에 쓰고 있는 거라.”

다른 이유? 냉정해 보이기 위해서? 무서워 보이기 위해서? 음. 그렇지만 이 남자는 안경이 없는 쪽이 더 살벌할 것 같은데. 오히려 안경이 사나운 눈매를 죽이고 서늘함을 덧그리는 것 같다.

“그저 누가……. 안경을 쓰면 더 잘 어울릴 것 같다 하였기에.”

하지만 이렇게나 가까이서 바라보니 사나움이 덜했다.

그 정도로 금빛 홍채가 예뻤던 탓이다. 빛을 받아 햇빛 조각처럼 반짝반짝했으니까.

“그렇구나. 곤란한 질문이었을 텐데 대답해주셔서 고마워요.”

나는 그를 바라보며 살짝 웃었다. 그러자 왜인지 그가 잠시 멈췄다.

“……꽃은 눈에 띌 테니 담아드리겠습니다. 곤란해질지도 모르니까요.”

“네. 네? 아, 고맙습니다.”

확실히 그냥 들고 가기엔 지나치게 화려한 보석 꽃다발이었다. 방에 가져다 둬도 혼자만 튈 것 같다는 생각을 했으니까. 이 남자가 이런 세심함을 보여줄 줄은 몰랐는데.

“친절하시네요.”

“그렇습니까? 들어보지 못한 말이로군요.”

그렇게만 웃지 않으면 더 자주 듣지 않을까요? 그의 웃음에 숨을 살짝 삼킨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이런 점은 조금 다정한 것 같지만 여전히 무섭기도 했다.

책 속에서 르나그의 검에 명을 달리한 죄수는 손가락으로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체이서에게 있어 누구보다 좋은 조력자였던 그는 잔혹한 수단도 서슴지 않았다.

그 장면을 떠올리면 쉬이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간수들을 관리하는 만큼 검 솜씨도 좋다고 했었지. 생긴 건 영 검사 쪽은 아닌데. 오히려 지적인 법조인 같달까. 고개를 숙이며 사르르 쏟아지는 부드러운 머리칼은 한 번쯤 만져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만졌다가는 큰일 나겠지만.

오빠와 아빠에게 청탁을 받은 것이겠으나 내게 참 잘해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청탁이란 것이 참 의문스럽지만 말이다.

분명 내가 읽은 내용 속에서는 그가 청탁을 받은 사람에게 이렇게 잘해주지 않았는데. 책 속에서 읽은 그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으니… 이쯤 되면 슬슬 내 집안에 대해서 궁금해진다. 아주 진지하게.

“저도 한번 묻고 싶군요.”

르나그가 고개를 숙였다.

“당신은 궁금하지 않습니까? 왜 당신의 오빠가 이곳에 가둬두었는지. 단 한 번도 제게 묻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그러게. 슬슬 나도 그게 궁금하던 참이었어요.

나는 눈을 슬쩍 내렸다.

“글쎄요. 처음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오빠가 이유 없이 그럴 사람은 아니니까요.”

꼬박꼬박 편지에 선물까지 부치는 사람이라면 애정은 있는 거겠지. 그게 미안함에서인지 죄책감인지 진짜 애정인지 몰라도 말이야.

“……그렇군요. 이아나 양은 여전히, 오빠를 믿고 있는 거군요.”

나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미묘한 뉘앙스인데. 이렇게 말을 하는 걸 봐서는 오빠를 잘 아는 눈치다. 아니, 당연히 잘 알겠지만. 뭔가 더 꿉꿉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곧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그러다 말고 고개를 든 순간 그대로 멈칫했다.

……언제 이렇게 가까워졌지?

그와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웠다.

“음, 네. 일단은 오빠니까요. 그런데 그, 얘기를 이렇게…… 가까이서 해야 할까요?”

그가 그대로 멈췄다. 잠깐 굳었던 얼굴이 빠르게 멀어졌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음. 저쪽도 생각지 못한 상황인가. 답지 않게 당황한 얼굴에 입술을 끌어올렸다.

“그만 가볼게요.”

그렇게 그가 안겨준 상자를 안고 등을 돌리려 했다. 그가 답지 않게 말을 늘이며 이아나 양, 하고 부르지만 않았다면.

“……저.”

처음으로 망설이는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왜 그러지?

나를 쳐다보던 서늘한 금색 눈이 느리게 아래로 내려갔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봐도 아무것이 아닌 얼굴이었으나 그가 품은 말이 나올 것 같지 않았다. 조른다고 나올 것 같지도 않고. 나는 찝찝한 마음으로 그의 인도하에 걸음을 옮겼다.

곧 등 뒤로 문이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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