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87)

***

―깊은 밤.

나는 죽은 듯이 잠든 풍경 속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스르륵 일어나기 무섭게 머리를 한데 묶었다. 곱슬이라 부스스한 머리카락이 핀에 걸려 악, 소리를 냈지만 덕분에 눈이 말똥말똥해진다.

“후…….”

방금 일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한숨도 자지 않았다. 잠들면 일어나지 못할지도 모르니까.

“하마터면 잠들 뻔했네.”

나는 유달리 밤잠이 많았다. 물론 밤잠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 만은. 유달리 깊은 잠을 자서 업어 가도 모를 정도라는 거다. 그러니 밤중에 일어나려면 차라리 처음부터 자지 않는 편이 나았다.

<새벽에도 경계요? 당연히 서죠. 하지만 중죄인 구역보다는 느슨하죠. 아무래도.>

친하게 지내던 간수에게 술을 넘겨주는 척 새벽 경계에 관한 정보를 들었다.

<사실 이건 비밀인데, 가장 가벼운 죄질의 죄수들……. 그러니까 여기는 새벽에 보초를 거의 서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귀족들은 잘 나가지 않잖아요. 탈옥도 그렇고.>

남작 아저씨 말에 따르길 평소 귀족들은 사교계 현장에서야 밤을 지새우거나 밤놀이를 즐기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비교적 적당한 밤에 잠들어 정오에나 일어나는 게 미덕이란다.

물론 남성과 여성의 차이가 있다 하지만 실상 그렇게 다르지 않다고 했다. 그리고 이 감방의 규칙적인 생활에 물든 이일수록 밤에 얌전히 자는 편이고, 결과적으로 이 구역은 새벽에 무척이나 평화롭단다. 아무 일이 없어서 지루할 정도로.

<그러니 가끔은 간수끼리 모여서 시시덕거리기도 하고 그렇죠. 이아나가 준 걸 이때 즐기기도 하고?>

<아하. 술. 언제 마시나 했더니 새벽에 몰래?>

<하하하. 이거 간수관리장님께는 비밀입니다?>

<물론이죠.>

듣자 하니 이 구역 간수는 많아야 다섯, 평균적으로는 넷이라 했나. 나는 숨을 삼켰다.

……감방에서 첩보물을 찍을 줄은 몰랐는데.

그러나 손안에서 찰랑거리는 팔찌를 본 나는 결심을 굳혔다. 그래. 규칙적이고 조금은 지루하던 생활에 물리던 찰나에 잘됐지!

그리고 매번 왕왕! 짖는 남주님을 보면 언제 사람이 되나 착잡하기도 했고.

“팔찌를 먼저 쓰라고 했지?”

팔찌를 비롯해 사탕 등 준비를 단단히 한 나는 제이르가 준 팔찌를 꾹 쥐었다. 팔찌엔 총 세 개의 보석이 달려 있었는데, 팔목에 얌전히 놓인 것 중 첫 번째 보석을 꾹 문질렀다.

“……<야람>.”

제이르가 알려준 시동어를 중얼거리자, 은은하게 피어오른 금색 빛무리가 온몸을 휘감았다.

“아, 놀라라.”

그대로 사라진 황금빛을 보다 손을 내려다봤다. 이걸로 된 걸까?

“……내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댔지.”

나가서 확인하는 수밖에 없단 얘기다. 나는 문으로 살금살금 다가가 문고리를 잡고 다른 시동어를 중얼거렸다.

제이르가 이 팔찌에 걸어준 마법은 총 3개.

두 번째 보석에 담긴 건 지금처럼 잠긴 문을 조용히 여는 주문이었고……. 난 열린 문 사이로 고개를 쏙 내밀었다.

아무도 없나? 없네. 조용한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당연했다. 5시간 전부터 일정한 소리로 들려오는 발소리의 횟수를 셌으니까. 지금이 잠시 감시가 이 복도에 없는 시간이었다. 교체하는 중인지 40분에 한 번꼴로 시간은 5분 정도 비더라고. 이것도 이 구역이 평화롭기 때문이랬지. 나로선 잘된 일이었지만.

나는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소리 없이 발을 디뎠다. 아무도 없는 복도였지만 괜스레 긴장돼서 침을 꼴깍 삼켰다.

여기서 복도 끝으로 가면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보통은 식당이나 정원으로 내려갈 때 사용하는 계단이었다.

그리고 모퉁이를 돈 순간 나는 멈칫했다. 계단 바로 앞에 간수가 있었다.

가까스로 비명을 참았다.

“……응? 무슨 소리 못 들었어?”

“아니? 네 숨소리 아니야? 야야, 콧김 좀 그만 불어라. 시끄러워 죽겠어.”

“허 참.”

교체가 아니라 계단에서 쉬고 있던 건가. 간수와 나의 거리는 채 세 걸음이 되지 않았다. 이는 내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고 휙 돌아서였다. 나는 손으로 입을 꼭 막은 채 살살 뒷걸음친 나는 벽에 꼭 붙었다.

분명 앞에 있음에도 그들은 나를 보지 못했다.

이게 바로 제이르가 첫 번째 보석에 걸어준 마법, 몸이 투명해지는 주문이었으니까.

<이 마법은 마법을 걸어도 내 몸은 그대로 보입니다. 남들 눈에만 보이지 않는 거죠.>

눈치를 보던 나는 눈조차 조심조심 깜빡거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다행이랄지 간수들이 나누는 대화소리가 작은 발소리를 감춰주는 것 같았다.

한참을 걷고 나서야 나는 숨을 짧게 쉬었다.

“하아.”

……마법이 제대로 듣는지 이렇게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다고.

위기를 무사히 넘긴 나는 지하실 계단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쭉 들어가서 작은 모퉁이를 돌면 있는 계단이었다.

그러나 벽에 다다를 즈음 발소리가 들렸다.

“아니, 총관리장께서는 이 새벽에 어쩐 일이시래? 갑자기 돌아오시다니.”

“원래 감방에 사시던 분이잖아. 낸들 그분의 뜻을 알겠나. 그런데 수도 쪽 일이 무척 바쁜 시즌인데도 자꾸 돌아오시고. 요즘 따라 더욱 감방에 붙어 계시려는 것 같지 않아?”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허 참. 감방에 보석이라도 감춰 두셨나, 멀쩡한 저택 놔두고 왜 그러신대.”

갔나?

벽에 꼭 붙어 있던 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지나고 나서야 참았던 숨을 뱉었다.

이번엔 모퉁이를 돌기 직전에 우르르 몰려오는 발소리를 들었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들킬뻔했다. 그나저나… 르나그가 이 새벽에 돌아온 건가?

참 워커홀릭이네. 아냐. 반대로 말하자면 이렇게 일해서 그 정도 지위를 쌓은 거겠지.

나는 멀어지는 간수들의 등을 바라보다가 얼른 등을 돌렸다.

다행히 지하실 계단을 내려갈 때까지 더는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다. 천만다행이지. 마침내 마지막 계단까지 내려갔을 때 내 등엔 땀이 흥건했다. 지하에 도착하는 것만으로 잔뜩 긴장했던 탓이다.

그저 낮과 밤이 바뀐 것뿐인데 낮에 익숙했던 공간이 이렇게나 낯설 줄은 몰랐다.

속으로 작게 숨을 뱉으며 고개를 들었다.

감방 앞에는 한스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본래 한스는 이 지하를 홀로 전담하는 간수가 아니었는데, 이전의 산책 사건 이후로 산책은 몇 사람이 돌려서 맡는 대신 그는 감방을 전담하는 간수가 되었다.

내가 산책 때마다 구속구를 맡게 된 지라 나와 친분을 고려해 그를 전담으로 붙여준 모양이었다. 나로선 좋은 일이었지만.

한스는 나름 친절하고 좋은 사람이었지만. 반면에 합리적이고 이중적이며 계산적인 사람이기도 했다. 리케도르안이 신음하는 것은 아무렇지 않지만 내가 다친 그를 바라보며 놀랄까 걱정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니 이 순간에 도움을 구할 수는 없다.

‘이런 상황을 예상한 거겠지.’

제이르는 영리하게도 이런 것까지 챙겨주었다. 잠든 한스에게 살금살금 다가가던 나는 그대로 멈춰 섰다. 한스의 눈이 거짓말처럼 떠졌기 때문이었다.

“응, 뭐지? 기척이……. 착각이었나?”

기사는 기사라는 걸까. 식은땀이 흘렀다. 나는 한보 떨어진 앞에서 소매를 꽉 쥐었다. 한스가 고개를 돌리기 전에 얼른 팔찌의 세 번째 보석을 세 번 꽉 눌렀다.

<세 번째 보석은 조심해서 쓰셔야 합니다. 이 마법은 가까이서 써야 하거든요.>

그리고 한스가 보지 못한 사이 쇄도한 금색 빛이 그의 목에 꽂혔다. ……모 만화 탐정이 된 기분이네. 꼭 내 이름은 고난! 힘들죠. 하고 외쳐야 할 것 같다.

“윽, 뭐야. 모기?”

목을 쓰다듬던 한스가 뭐지, 하고 중얼거리더니 이내 그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그 사이 슬슬 뒷걸음친 나는 이윽고 한스가 완전히 쓰러져 잠들고 나서야 숨을 크게 내쉬었다.

“……살았다.”

나는 복잡한 시선으로 팔찌를 내려다봤다. 제이르가 마지막 보석에 걸어준 주문은 바로 ‘수면 주문’이었다.

<장담하죠. 거대한 마물도 잠들 겁니다.>

사실 이 말을 들었을 때 황당했지. 마물이 잠들 정도의 마법을 사람에게 써도 되는 거냐고, 하지만 제이르가 안전은 보장했으니 괜찮을 거다. 허튼소리는 안 할 인물이었으니까.

물론 책 속 내용 즉, 지금에서 몇 년 후의 성격이 그렇다는 거지만 지금도 그렇기를 바라야지.

철컥.

녹슨 쇳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새벽이라 더 크게 들리는 소리, 녹슨 철창을 바라보면서 역시 한스를 재우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내가 봐도 새벽에 이러는 내가 참 수상해 보이니.’

문틈으로 익숙한 이끼 냄새가 느껴졌다. 나는 저벅저벅 들어간 뒤 램프를 내려놓았다. 따로 방에서 들고 올 수 없어서 한스 옆에 있던 것을 들고 온 것이었다.

그리고 동그랗게 뜬 눈과 마주했다.

“누구시죠?”

나는 멈칫했다.

어라. 아직 마법을 풀지 않아서 내 모습이 보이지 않을 텐데… 놀랍게도 리케도르안은 내가 있는 곳을 정확하게 바라봤다. 그것도 얼굴이 있는 부분을 말이다.

나는 혹시 몰라서 예비 침대보를 짧게 잘라 망토처럼 뒤집어쓴 상태였다.

‘리케도르안은 기척을 안 걸까 아니면 내가 보이는 걸까.’

더구나 말을 더듬지 않는 그가 신기했다. 나를 보면서는 언제나 얼굴을 붉혀놓고서는 똑바로 응시하는 눈은 청명하기만 했다. 신기한 마음에 잠시 이렇게 지켜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시간이 없다. 나는 얼른 마법을 해제하고, 천을 벗어 던졌다.

어둠 속에서 새파란 눈이 살짝 흔들렸다.

“……당신?”

그의 파란 눈동자에 물음표가 가득 새겨졌다. 뒤이어 올 질문은 왜, 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이어 말하지 못했는데, 입이 가로막혔기 때문이었다.

“쉬이. 착하죠?”

그의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댄다. 나는 천천히 손가락을 떼어내고 쉿, 하고 속삭였다. 쇠사슬 소리는 꽤 요란했으므로 혹시나 누가 듣고 올지도 모른다. 물론 이 새벽에 여기까지 올 사람은 없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으니까.

“밤에 보니까 더 반갑지?”

난 이렇게 말하고 아차 싶었다. 아, 여기엔 창문이 없지? 리케도르안은 낮인지 밤인지 모르겠구나! 내가 실수를 정정하려고 입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네. 밤에, 오셔서 놀랐어요.”

리케도르안은 정확히 시간을 짚어냈다. 나는 하려던 말을 잊고 그를 바라봤다.

“당신, 시간을 알아?”

“네? 네. 하늘이 보이지 않아도 느낌으로 알 수 있어요. 식……사 시간으로 유추하는 것도 어렵지 않고…….”

나는 의외라는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내 시선을 느낀 건지 리케도르안의 볼이 살짝 물들었다. 이내 그의 고개는 땅으로 기울어졌다. 부끄럽다는 듯이.

“…별 거 아니에요……. 어렵지 않은데….”

가만 보면 이성이 있을 때의 그는 제법 똑똑하고 말씨 또한 우아했다. 말을 더듬어서 그렇지. 가끔 짐승인 모습에서는 생각지도 못할 단어들을 쓴다.

‘신기하게도 말이지.’

나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당신은 언제부터 이 감방에 있었던 거예요? 태어날 때부터는 아닐 것 아니에요.”

시간이 급했지만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왔다. 이런 걸 물을 때가 아닌데… 호기심이 앞서고 말았달지.

“음. 아니에요.”

나는 얼른 아무것도 아니라고 덧붙이며 고개를 저었다. 못 들은 걸로 해달라고 말하면서.

그러나 철그렁. 요란한 쇠사슬 소리가 들렸다.

“열 살요. 여, 열 살. 그때부터 이곳에 있었어요.”

내 시선이 진동하는 그의 눈을 향했다.

열 살? 그럼 장장 6년을 이 방에 갇혀 있었다는 건가? 나는 잠깐 놀란 눈으로 그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음. 더 얘기를 듣고 싶은데 오늘은 그것보다 더 급한 일이 있어요.”

“그, 급한?”

“응.”

리케도르안의 과거는 책 속 대화에서만 유추할 수 있는 수준이었으므로 내가 모든 걸 알기는 어려웠다. 가려진 과거라. 호기심이 치켜들었지만 곧 손목에 걸린 마법을 떠올렸다. 지금은 이걸 궁금해 할 때가 아니야.

“궁금한 눈이네. 맞아요. 밤에 온 건 이것 때문이에요.”

나는 준비한 주머니를 흔들어 보이곤 여기서 조그만 사탕을 꺼냈다. 사탕을 주며 마법에 대해 설명할 요량이었다.

“당신에게 주고 싶은 게 있었거든요. 바로 이거.”

사실, 방에서부터 마법을 어떻게 걸지 고민했었다.

대뜸 뺨을 잡아다 마법 좀 걸게? 할 수는 없으니 설명이 필요하지 않겠어.

“이걸 먹고 날 보면 아주 특별한 일이 있을 거예요.”

보통 사람은 평생 보기 어려운 게 마법이었다. 아울러 이건 내가 준비한 게 아니라 제이르가 준비한 것이지만 그는 제 정체를 드러내길 바라지 않았다. 그저 지나가는 마법사라고만 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그의 비밀을 지켜줄 생각이 없었다.

“사실 이건 말이죠, 먹고 나면…….”

이건 당신을 돕고 싶어 하는 사람이 보낸 거라고 말을 해주려고 했다.

“머, 먹으면 되나요?”

“그래요. 먹으면 돼……. 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이렇게 순순하게? 나는 황당함을 숨기지 못했다.

“아니, 왜 주는지 안 물어봐요?”

내가 얼른 손을 뒤로 물리며 말하자, 리케도르안이 입술을 달싹였다.

“무, 물어봐야 하나요?”

갸웃, 고개를 기울이는 새하얀 얼굴로 은색 머리카락이 스르륵 떨어졌다. 나는 순진한 눈망울을 바라보며 말문이 막혔다. 이어서 사탕과 그를 번갈아 본다. 아, 그러고 보니, 내가 맨날 음식 가져다 먹였지. 그에겐 새삼스러운 일일터였다.

……그래도 그렇지,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준다고 막 먹으면 안 돼요. 이 사람아.

“하, 오늘부터 경계심 좀 길러요, 당신. 남이 준 거 함부로 먹으면 안 돼요. 특히 약이나 음식 같은 건 더욱.”

이건 사탕이긴 하지만. 당황한 리케도르안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 그, 그냥 머, 먹으면.”

“당연히 안 되지. 내가 나쁜 사람이면 어떡하려고 그래요?”

“하지만…….”

잠깐 왜 그렇게 보는 건데?

바다를 담아놓은 듯 일렁거리는 그의 시선이 나를 담았다. 하도 투명해 꼭 내 모습이 비칠 것 같은 눈동자에 난 움찔했다. 저 물기 어린 눈동자가 깜빡이면 톡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으니까.

“……해칠 거예요?”

쿵쿵.

이 순간 날뛰는 우심방은 내 탓이 아니다. 이건 본능이라고.

“나를 상처입힐 거예요?”

살짝 땀에 젖은 그는 아름다웠다. 성스러운 얼굴 아래 손에 채워진 족쇄가 자극적인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왜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나는 적극적으로 나는 변태가 아니다 중얼거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거야 다, 당신은 때리지도 않았고, 접시를 엎거나 깨, 깨트리지도 않았고……. 마, 맛있는 것을 주고!”

“그래도 무턱대고 믿으면 안 되죠. 어제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된다는 말도 안 들어봤어요?”

도리도리.

아. 여기엔 이런 말이 없나? 내가 고민하는 사이, 리케도르안은 물끄러미 나를 응시하다가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때…… 때려도 돼요.”

……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나는 고개를 홱 들었다.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허, 누가 당신 때린대요?”

“하, 하지만 지, 지난번엔 주……인님……이라고 부, 불러 달라고.”

“농담을 아직도 기억해요? 집요한 사람이네!”

이 남주님 농담을 다큐로 받는 사람이네. 나는 황당한 시선으로 그를 보다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이러다가 시간만 가겠다 싶어 얼른 그의 손에 사탕을 쥐여주었다. 이 이상한 분위기에서 어서 탈출해야겠어.

“일단 오늘은 위험하지 않은 사람이라 쳐요. 다음부터는 함부로 믿지 말고. 어쨌거나 이거 먹어요. 시간이 없어요.”

“…….”

“내 말 들리죠? 알아들은 거지?”

……끄덕.

오늘은 중간에 짐승으로 변하지 않나 보네? 나는 내게 잡힌 손가락이 발긋 물드는 것을 발견했지만 모른 척했다.

내가 사탕을 준비한 건 제이르가 혹시나 마법을 거는 동안에 잠시나마 따끔한 고통을 느낄지도 모른다 해서였다. 주사를 맞는 아이에게 달콤한 걸 주는 것처럼 달달한 거라도 물고 있으면 좀 괜찮을까 해서 가져온 거였지.

“자 얼른 먹어요.”

리케도르안은 망설임 없이 사탕을 입에 물었다. 나는 그가 사탕을 우물거리는 것을 보다 슬쩍 그의 뺨에 손을 얹었다.

그는 뺨을 고스란히 내줬다. 정말이지 무방비하다. 이 모습에 난 기분이 묘해졌다. 어쩜 이렇게 의심도 없이 다가오는 걸까?

‘이 마법은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라 했지.’

나는 눈을 내리깔고 집중했다. 손목에서 푸른빛이 희미하게 맴도나 싶더니 리케도르안에게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리케도르안!”

쇠사슬이 철렁 움직였다. 나는 얼른 그의 어깨를 잡았다. 그럼에도 그는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앞으로 쓰러졌다. 그대로 엎드린 채 끙끙 앓았다.

“괜찮아요? 리케도르안, 리케도르안! 내 말 들려요?”

그는 대꾸는커녕 신음만 끙끙 흘렸다. 미치겠네. 이런 얘기는 없었잖아.

‘그냥 조금 따끔하다며!’

조금 따끔한 뒤에 살짝 커진다고 하길래, 단순히 몸이 성장하는 정도를 예상했다. 나는 그가 앓는 것을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방에서 진통제를 가져오기에 시간이 촉박했다. 젠장, 이렇게 앓는 게 부작용인 줄 알았다면 승낙하지 않았을 거라고! 내가 입술을 깨물 때였다.

“……어?”

붙잡고 있던 그의 어깨가 두껍다고 느꼈다. 어깨뿐이 아니었다. 손도 발도 길어진 다리가 보였다. 팔랑팔랑. 착각이 아닌 듯 커진 몸을 이기지 못하고 찢어진 옷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언제 커진 거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 리케도르안이 나를 응시하는 순간 난 숨을 멈췄다. 숨 막히도록 아름다운 얼굴이 바로 앞에 있었다. 나는 그대로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나를 붙잡은 손이 빨랐다.

철그렁. 쇠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진다. 곁눈질에 늘어난 족쇄가 그대로 보였다. 하나 시야를 덮은 것은 조그마한 얼굴이었다. 성장하며 더욱 붉어진 그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왜, 피하는 거죠?”

“……아.”

“어딜 가려고?”

청초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나움이 일렁거리는 눈은 짐승일 적 그대로였다. 짐승일 때와 이성이 있을 때는 시선부터 달랐다. 그러니 알 수 있다. 그는 짐승의 모습인데도 말을 하고 있었다.

리케도르안이 고개를 기울이자 길어진 은빛 머리칼이 이마 위로 스르륵 흩어졌다. 눈이 나를 보며 보일 듯 말 듯 휘어진다. 더욱 깊어진 눈매는 야릇하다는 느낌이 들기 충분했다. 내 숨이 절로 넘어갔다.

그의 눈동자가 목울대를 향하는 것도 같았다.

“놔요.”

“……왜?”

리케도르안의 머리가 깊게 기울어졌다. 그 순간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피하려고 해요?”

야릇한 눈매에 물기가 어렸다. 긴 눈매와 물기 어린 눈은 미묘한 부조화를 이뤘으나, 더욱 자극적이었다.

‘……이거, 그냥 성장이 아니잖아!’

나는 제이르에게 이를 갈았다. 속았어. 속은 거라고! 이게 어딜 봐서 단순히 살짝 성장하고 만 거야?

나는 확신했다. 이건 책 속 리케도르안의 모습이다. 그러니까 4년 뒤 그가 성장했을 때의 모습. 심장이 쿵쿵 뛰었다.

나는 다른 한 손으로 소매를 꾹 쥐었다. 눈 둘 데가 없는 모습 때문이었다. 조금 전에 옷이 찢어지지 않았던가? 사실 바지는 아슬아슬하게 세이프를 유지하고 있다. 문제는 눈부시게 하얀 가슴, 거기다 근육이 선명하게 도드라진 가슴을 보고 아무렇지 않을 자신이 없다는 거다. 근육뿐인가? 저 미모를 보고 아무렇지 않은 게 이상한 거였다.

선명하게 보이는 복근이 내 시선을 느꼈는지 슬쩍 힘이 들어간 게 느껴졌다. 어째,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아이처럼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거, 좋아해?”

그 순간 리케도르안이 툭 던진 말은 나를 흔들어놓기 충분했다. 마치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흘러나온 말이었으니까. 하마터면 뭐요, 복근요? 당연히? 대답할 뻔했다.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리케도르안의 손이 꾸물꾸물 움직였다는 점이었다. 그의 살갗에 닿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다. 뭐야, 지금 내 손을 어디 올린 거야?

“이봐요.”

“으응?”

하지만 나를 향한 느슨하게 뜨인 눈과 마주치자 말이 소리 없이 사라진다. 아, 잠간. 이거 반칙 아닌가요? 리케도르안의 손이 천천히 내려간다. 쿵쿵. 뛰는 심장이 느껴졌다. 나는 손을 움츠리려다 멈칫했다. 정점이 손가락에 걸린 탓이다.

“흐…….”

눈앞에서 터진 숨소리에 나는 숨을 꼴깍 삼켰다. 느릿하게 뜨인 그의 푸른 눈이 기묘한 열기를 품는다. 어느새 그가 직접 손을 비비고 있었다. 손에 힘을 주자 주르륵 내려간다. 단단한 복근이 느껴졌다.

……신이시여, 왜 이러세요.

산 넘어 산이로군.

그러나 동시에 남아 있던 이성이 시간이 없노라고 소리쳤다.

……이럴 때가 아니야.

“놔요. 나 나가야 해.”

시간이 없다. 순찰이 돌기 전에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리케도르안에게 붙잡힌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니. 힘이 들어간 그의 손가락과 딱딱한 손바닥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내가 화를 내려는 그 순간, 그에게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가지 마요.”

젠장, 왜 이 순간에 나를 유혹하는 건데? 억지로 빼내려는 손은 그대로 돌아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러고는 다시 한번 빼내려는 시도를 하려 했지만 그의 시선과 마주하고 움찔했다.

선명한 짐승의 시선이었다.

“어디 가?”

나를 바라보는 이 눈, 눈물을 잔뜩 머금었으나 나는 알았다. 수틀리면 언제든 홱 변해서 목덜미를 물어뜯을 수 있는 맹수라는 걸.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불완전한 상태였다. 짐승이되 이성이 있을 때의 파들파들 떨던 모습이 공존했으니 섣불리 건드려서는 안 됐다.

“…리케도르안, 착하죠. 자, 이걸 봐, 당신이 좋아하는 걸 가져왔어.”

난 한 손으로 열려 있던 주머니를 밀었다. 그는 흘끗 주머니를 응시했다. 아마도 그가 가장 좋아하는 쿠키를 보았겠지.

“당신 거야.”

“내 거?”

나는 최대한 태연하게 끄덕였다. 그의 눈동자가 나와 나를 붙잡은 손, 그리고 쿠키를 번갈아 응시했다. 그러고는 내 손을 통째로 가져왔다.

“뭐라고, 부르랬지…… 기억이 안 나. 아, 주인님?”

“아니야.”

……그놈의 주인. 다신 농을 하지 않으리라 결심하며 입술을 떼어냈다.

“이름을 불러.”

“이름?”

그가 상체를 숙이며, 점차 우리 거리가 가까워졌다. 팽팽해진 쇠사슬이 꼭 지금 분위기 같았다. 나는 온순하지만 언제 달려들지 모를 짐승을 바라보며 천천히 끄덕였다.

“……그래. 내 이름. 이아나.”

시선이 지나치게 가까웠다. 눈앞에서 깜빡이던 파란 눈동자가 서서히 휘어진다. 새하얗게 부서지는 미소에서 성스러움이 뚝뚝 떨어졌다. 그 사이로 야릇함이 흘렀다.

그가 내 손을 가져다가 다시 한번 제 가슴으로 가져다댔기 때문이었다.

그가 느릿한 숨을 토했다. 훅 끼치는 열기에 나도 모르게 움찔할 만큼. 그가 내 손을 꾹 쥐었다가 놓았다. 살살 비비는 느낌에 나마저 간질간질한 열이 오를 것 같다.

“이아나.”

“…….”

결국 내 손이 참지 못하고 빼려다 도리어 새하얀 살결을 더듬었다. 의도치 않았다고는 하나 느낌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에게서 다시 느른한 숨이 흘러나왔다. 손가락은 내 의지를 배반하고 갈라진 근육의 골을 더듬었다. 단단하다. 나는 숨을 꿀꺽 삼켰다.

“이아나.”

그가 제 혀를 축였다. 혀마저 선홍빛이라니. 그가 다가옴에 따라, 무릎끼리 맞붙었다. 나는 그의 허벅지를 보았다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성장은 여기도 한 거겠지. 응. 그런 거겠지.

의도치 않게 수납된 것을 보았다 보니 미열이 오른다.

“이아나?”

그가 천천히 아래로 향한 시선은 붙잡은 내 손을 향했다. 이름만 들었는데, 살 떨리는 기분이 드는 이유는 뭘까. 내 목울대가 꿀꺽 넘어갔다.

이윽고 그가 제 가슴에서 내 손을 떼어냈다. 놓아주는 대신 과자를 내 손으로 붙잡게 하고는 이어 내 손목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러고는 보일 듯 말듯 미소했다.

“……먹여줘.”

볼을 붉히며.

나는 잠깐 잘못 들은 건가 싶어 눈을 깜빡이면서 응시했다.

아니. 지금 얘가 뭐라는 거니. 먹여줘? 뭘? 그의 손은 여전히 내 팔을 붙잡고 있었다. 손목에서 말랑한 입술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현재 채 상처가 사라지지 않은 얼굴이라 입술 옆 피딱지의 느낌이 손목으로 고스란히 느껴졌다.

“……안 돼?”

시선을 살짝 든 리케도르안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입술이 선정적으로 움직였다. 혀로 입술을 축이기까지 한다. 아니, 성장하는데 입술은 왜 더 붉어진 거지? 나는 차마 시선을 돌리지도 못한 채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아나.”

괜히 이름을 부르게 한 것 같다.

……언제부터 내 이름이 이렇게 묘한 느낌이었지?

나는 눈을 꾹 감았다가 뜨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가 이어질 나의 말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어쨌거나 먹여주지 않으면 놓지 않을 기세다. 이 순간에도 시간은 가고 있었다.

“힘 좀 빼. 아파.”

나는 그의 눈을 마주하며 또박또박 말했다. 그러고는 쿠키를 쥔 손을 흔들어 보였다.

“원하는 게 이거지? 그럼 이 손 놔. 먹여줄 수 없잖아.”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던 리케도르안이 천천히 손을 놓았다. 하지만 느리게 굴러가는 그의 눈동자는 경계심을 풀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짐승이 눈앞에 어슬렁어슬렁 걷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 기분을 오래 느끼느니 얼른 먹여주고 빠르게 빠져나가는 쪽이 좋겠다.

마침내 그의 손이 완전히 떨어졌다. 그렇지만 언제든 다시 뻗을 수 있는 거리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대로 그의 턱을 잡았다. 입술에 상처 난 것을 제외하면 매끄럽기만 한 살갗이었다.

“벌려, 입.”

“…….”

짐승인 듯 아닌 듯 물기 어린 눈이 나와 교차했다. 그의 혓바닥이 느릿하게 입술을 쓸었다. 내 손에 닿지 못했음에도 절로 갈증이 이는 행동이었다.

“어서.”

천천히 벌어지는 그의 입을 바라보며 난 들고 있던 쿠키를 집어넣었다. 마치 사탕을 먹듯 크게 다물린 입술이 움직였다. 그 입술이 흡사 키스를 하듯 농염했다.

‘아, 진짜 야한 생각 좀 그만하게 해주세요.’

제가 쓰레기가 된 것 같다고요. 나는 찾지도 않던 신을 욕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쿠키를 주었음에도 여전히 손을 움직일 수 없었다.

나는 그의 입속에 삼켜진 손가락을 난감히 응시했다.

……손은 왜 먹는 건데.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었다. 짐승일 때의 그는 먹는 것에 정신이 팔려 쥐고 있던 내 손까지 삼켜버리곤 했으니까.

한데 지금은 달랐다. 전보다 이지가 생긴 그는 분명 내 손까지 삼켰음을 인지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손가락을 놓지 않았다.

“손은 놔. 어서.”

하지만 놓기는커녕 손목을 쥐는 그의 손가락을 느꼈다. 천천히 검지를 빨아들인 그가 눈만 들어 나를 응시했다.

“……먹으면 안 돼?”

그의 얼굴이 촉촉한 물기를 담은 눈을 한 채 그대로 기울어졌다.

하, 먹여줘 다음은 먹어줘라고? 아니. 아니지. 나는 얼른 고개를 거세게 흔들었다. 이어 미간을 좁혔다.

“그건 먹는 게 아니야. 놔. 빨리.”

단호한 내 음성에 그가 잠깐 멈칫했다. 슬그머니 시선을 옮기나 싶던 그가 혀로 손가락을 축였다.

“달콤한데.”

“……읏.”

나도 모르게 음성이 새어나갔다. 순간 더욱 짙어진 시선을 느꼈다. 이대로는 위험하다는 생각에 상체를 뒤로 물렸다.

다행히 이번엔 손이 완전히 빠져나왔다. 심장이 거칠게 쿵쿵 뛰었다. 쇠사슬이 철렁 움직이며 내게로 그의 손이 뻗어왔지만 코앞에서 멈췄다. 내게 닿기에는 쇠사슬이 짧았다.

“이아나.”

갈증이 난 그의 음성에 청아함과 매혹이 공존했다.

“한 번 더……. 한 번 더 먹여줘. 응?”

흘끗 바닥을 응시했던 나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안 돼?”

“안 돼. 난 제멋대로 구는 사람이 싫어.”

나는 감싸 쥔 손을 풀어 그에게 손목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그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역시 이성이 있는 모습이 공존하고 있다. 그렇다면…… 수틀리면 내가 물러날 거란 사실을 깨달은 시점에서 더는 이상한 짓을 하지 않겠지.

그럼에도 나는 직접 주는 대신 주머니를 밀었다. 그가 직접 집어 먹도록.

“먹어. 네가 직접.”

그러자 줄곧 사납던 눈이 살짝 접혔다. 그대로 고개를 숙인 그가 주머니로 입을 가져다 댔다.

“응. 먹을게.”

아니. 왜 손을 쓰지 않는 건데? 짐승처럼 입을 가져다 대고 먹는 그를 바라보며 오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이건 인간도 아니며 완전히 짐승도 아니다. 그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가로지르는 푸른 눈을 쳐다본 나는 침을 삼키며 손을 꾹 쥐었다.

그에게 약을 가져온 것은 작은 호의와 호기심에서였지만 어쩐지 그보다 큰 대가를 치른 것 같은 기분이다.

‘더는 여기에 있으면 안 되겠어.’

내가 허겁지겁 남은 주머니의 끈을 잡아당기고 몸을 일으킬 때였다. 하윽, 신음이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익은 벼처럼 동그랗게 굽어진 등이 보였다.

“리케도르안?”

나는 황급히 다가가 어깨를 잡았다. 뜨거웠다. 어깨뿐 아니었다. 온몸이 뜨겁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뚝뚝 떨어졌다. 푹 젖은 그는 더욱 노골적으로 자극적이었지만 애써 눈을 돌리며 그의 이마를 짚었다.

“아, 아파…….”

“괜찮아? 괜찮아요? 말은 할 수 있는 거야?”

“몸이 뜨거워…….”

대체 제이르는 내게 뭘 가져다준 걸까? 그냥 먹이기만 하면 된다며! 나는 이를 바득 갈았다. 그는 책 속에서 리케도르안에게 충성을 맹세한 충견이었다. 그런 이가 리케도르안에게 해될 일을 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니 마땅히 거쳐야 할 과정일지 모르나 그렇다고 해도 지금 이 모습은 너무 괴로워 보였다.

난 입술을 깨물며, 그의 땀과 눈물을 닦아냈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해.”

그러자 고통에 가득 찬 푸른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아픔 때문인지 눈물로 얼룩진 눈은 심해처럼 침잠하는 색이었다.

“이상하네. 여기…… 와서, 나를 걱정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내 손을 가져온 그가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마치 예뻐해 달라는 짐승처럼 뺨을 비비며. 이성을 되찾았다기에는 탁한 눈이었다.

“이건 내 거야?”

그가 가리킨 것은 남아 있던 쿠키였다. 나는 끄덕였다. 네 거야. 이 물음이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는 몰라도.

“……그럼, 이제 이것도 내 거?”

다음으로 가리킨 것은 내 손이었다. 아니. 가리켰다는 말은 옳지 않았다. 난 입술을 내 손목에 묻는 그를 바라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뜨거운 숨이 손목에서 손바닥까지 그대로 느껴졌다. 파르르. 전율이 흘렀다. 떨리는 손을 그가 모르길 바랄 정도로.

“그게 왜 네 거야. …내 손이지.”

그가 무구한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 채 흐르지 못했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눈물 아래로 짐승이 야릇한 미소를 피워 올렸다.

“그럼, 어떻게 해야 줘?”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손을 빼냈다. 그대로 그의 눈을 덮었다.

어떡하긴. 좀 자라. 너.

이미 힘이 빠진 지 오래인 그였다. 그렇기에 빠져나오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숨을 거칠게 내쉬는 그를 그대로 두고 오려니 마음에 걸렸지만 시간이 없었다. 나는 손수건과 신음을 앓는 그를 번갈아 보다 땀을 꾹꾹 닦아주었다. 그러고는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이거라도 쥐고 있어.”

그냥 가긴 하겠지만 양심에 콕콕 찔려서 안 되겠다. 나는 그의 손에 내 머리끈을 쥐여 주고는 그대로 일어났다.

낡은 담요를 끌어다가 그의 등에 덮어주었다. 그동안 그는 내가 준 머리끈을 용케 알아차렸는지, 그걸 손에 꼬옥 끌어안고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아니……. 이게 더…….”

땀에 젖어 흐트러진 머리칼, 울긋불긋한 뺨, 그리고 해진 옷자락, 그 사이로 드러난 마른 듯 탄탄한 새하얀 등까지……. 그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나는 어느새 작아진 손에 방울이 딱 알맞게 꽉 찬 모습을 바라보다 눈을 꼭 감았다.

……착한 생각 하자. 착한 생각.

한 손에 주머니를 든 채 등을 돌렸다.

긴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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