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87)

***

‘오빠’가 찾아오겠다고 했지만, 그날 이후 며칠이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이었다. 아니, 완전히 무소식은 아니었지. 이틀 뒤에 다시 빈 편지지가 도착했으니까.

그러나 그곳엔 전처럼 나를 염려하거나 오겠다는 글은 적혀 있지 않았다.

“역시 그냥 해본 소리였나?”

나는 화창한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아쉽다고 하기에는 미묘했다. 굳이 따지자면 그냥 한번은 이아나의 가족을 보고 싶었던 마음이랄까.

나는 천천히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이곳에서 처음 눈을 떴던 날을 떠올렸다. 눈을 뜨니 새하얀 천장이었지.

나는 감방의 의무실에서 깨어났다.

<이, 일어났습니까? 세상에! 당신 심장이 멈췄었어요!>

의원의 말로는 잠깐 심장이 멎었다나.

평소에 이아나의 몸은 아주 약한 편이었다고 한다. 어째서인지 내가 깨어나고 나서는 감기 한 번 치르지 않았지만 말이다.

사실 눈을 뜬 순간 그리고 심장이 한 번 멎었다는 생각이 든 순간 본능처럼 드는 생각이 있었다.

원래의 이아나는 죽었구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 사실이었다. 마치 누가 귀에 속삭여주듯이.

이 몸은 내 거야. 몸에 각인되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

‘엄청 혼란스러웠었지.’

이처럼 나라고 처음부터 태평했던 것은 아니고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는 과도기와 부정기를 거쳐서 지금이 내가 된 것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기엔 너무 큰일이니까 말이다.

좀 나사 빠진 채로 살면 이러다 언젠가 집에 갈 줄 알았는데.

출소하고 나면 생이 편할 줄 알았는데, 슬슬 아니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안 돼. 아닐 거야. 출소하면 어디 공기 좋은 곳에 요양이나 가려고 했는데.

그러나 곧 담담하게 풍경을 응시했다. 그래. 지금 고민해봐야 뭐하겠어. 닥쳐오면 그때 생각해보지.

“오늘은 리케도르안의 산책도 없고.”

때마침 오늘 아침에 리케도르안의 산책에 오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를 들은 참이었다. 새로 들어온 구속구가 있다는데 그걸 실험해볼 거라나.

생각이 복잡하다는 이유로 오늘 응접실을 대신해 정원을 택한 참이다.

벤치에 앉은 채 숨을 내쉬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홀로 맞이한 하늘과 공기는 쾌청하기만 했다.

“심심해 보이네요?”

낯선 목소리에 시선을 돌리자 방글방글 웃는 남자가 보였다.

누구지? 처음 보는 얼굴인데. 나도 모르게 정원을 훑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따라 정원에 죄수가 평소보다 많은 것 같았다.

“오늘 중간동까지 함께 열렸어요. 처음 아셨구나?”

중간동이라면 가벼운 죄질만 저지른 내가 있는 곳과 달리, 조금 더 죄질이 무거운 이들이 있는 곳이었다.

살인과 방화, 반역까지의 범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은… 가족 대신 온 이들이 대부분인 내 층 사람들과 다르게 이른바 ‘진짜 죄인’이란 소리다.

“너무 경계하지 말아요. 나쁜 놈은 아니에요.”

“보통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나쁜 놈이던데.”

“진짜 아니래도?”

남자는 선량한 얼굴에 미소를 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간수들의 위치를 파악했다. 확실히 간수 또한 다른 날보다 많았다.

“이번에 총관리장의 출타에 인원이 많이 빠져나가고, 중간동 산책 감시 인원이 부족해서 당신들과 함께 산책을 하게 된 거라 하더라구요. 궁금해하는 것 같아서.”

딱히 궁금하지는 않았는데. 설명을 좋아하는 사람인가?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너무 경계하지 말아요. 우리 동은 엄선된 사람에게만 산책을 허락하니까.”

“엄선?”

“여기요.”

남자가 자신의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렸다.

“정상인 사람만 산책할 수 있다나.”

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남자를 관찰했다. 하늘을 배경으로 비 온 대지처럼 잘 어우러지는 갈색 머리칼이 한들한들 흔들렸다.

조금 장난스러운 녹색 눈을 바라보던 나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내 이름은 제이르예요.”

나는 움찔했다. 역시나. 색 조합이 익숙하다 싶었더니.

“그리고 당신을 꼭 한번 만나고 싶었어요.”

제이르. 아니, 제이르 유타 투펜포스. 이 책의 조연이자, 여주인공과 리케도르안의 탈옥을 돕는 이였다.

이 시점부터 여기 있는 줄은 몰랐는데. 혹 있어도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여겼지.

이로써 이 감방에서 중요한 주조연은 거의 만난 것 같다. 전혀 기쁘지는 않지만.

그보다 나를 만나고 싶었다니?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마침 제이르가 말을 이었다.

“이전에 당신이 산책하는 모습을 멀리서 봤거든요. 음, 정확히는 누군가를 조련한다고 해야 하나. 다루는 모습을요?”

“당신이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닐 건데요?”

“말을 뭘 어렵게 하시나, 나 탈옥했어요.”

……그게 자랑스럽게 말할 일이니?

지금 사람 좋은 척 빙글빙글 웃고 있지만 그는 탈옥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능력을 가졌다. 더구나 책 속에서 이 남자는 단순히 리케도르안의 탈옥을 돕는 이가 아니었다. 그는 죄인인 척 가장하고 있을 뿐 헤르님 쪽 사람이자 마법사였다.

그리고 훗날 대공이 된 리케도르안의 오른팔이자 충실한 보좌관이 되는 이이기도 했다.

“아무튼 그 모습을 보고 관심이 생겼어요. 사실은 내가 마법사거든요. 마법사들이 연구 거리에 눈이 확 돌아가는 성향을 가진 건 아실 거라 생각해요. 유명하니까.”

그가 제 가슴에 손을 얹었다. 나는 콧잔등을 찡그렸다.

“정말 마법사라면 내게 그런 얘기를 하면 안 될 텐데요. 마법사는 감옥 위치가 다를 텐데?”

“누가 들을까 봐 이러는 거라면 그러지 않아도 돼요. 이미 아무도 듣지 못할 거거든요.”

제이르가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나는 흠칫 놀라 얼른 근처 간수를 응시했다. 간수는 태연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눈동자의 초점이 흐렸다.

“지금부터 딱 5분간 간수는 아무것도 기억 못할 거예요.”

숲처럼 진한 녹안이 장난스럽게 휘어졌다. 책 속에서 웃음이 많은 제이르였지만, 난 그가 결코 가볍지 않은 성격을 가졌음을 알았다.

“난 그냥 재미난 얘기를 해주러 왔어요. 당신이 보살피듯 아끼던 그 죄수에 대해서요.”

제이르가 고개를 기울였다.

“왕왕 짖는 모습 봤죠. 그거, 짐승이 되는 저주인 거 알아요? 아주 오래된 저주인데… 보통 사람은 아마 잘 모를 거예요.”

헤르님 대공가에 내려오는 저주는 그들 중에서도 소수만이 아는 저주였다. 그러니 아마 내가 모를 거라 생각하고 대놓고 이야기하는 것일 터다.

하나 갑자기 대뜸 찾아와서 이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래요, 짐승이 되는 저주란 말이죠. 처음 짐승이 될 때는 언어조차 못한다고 해요. 모습만 사람일 뿐 말도 행동도 아주 짐승인 거죠. 그런데 그렇게 살면 너무 불편하잖아요? 그래서 저런 저주를 앓는 이들에게 임시방편으로 각성이란 걸 시켜주곤 해요. 이 역할을 마법사가 맡죠.”

“그런 이야기를 내게 하는 이유가 뭐죠?”

“당신도 궁금하니까 들은 거잖아요?”

더욱 뜻을 알 수 없는 그의 말에 나는 눈을 살짝 찌푸렸다. 궁금하긴 궁금한데. 더 알고 싶지 않은 마음이 함께였다.

“그런데, 당신과 있던 죄수는 보니까 아직 각성을 하지 않은 상태더라구요? 저대로는 짐승일 때도 그저 짐승의 말과 행동만 반복하는 불쌍한 처지로 살겠죠.”

……아니. 그럼 누가 리케도르안에게 짐승의 말만 가르쳐서 말을 못 하는 게 아니었단 말이야?

내가 아주 엉뚱한 오해를 했었네. 난 동요를 숨기며 태연한 척 제이르를 응시했다. 그럼 책 속에서 리케도르안이 짐승일 때도 사람의 말을 했다는 건, 제이르가 각성인가 뭔가를 걸어줬기 때문이라는 건데.

제이르가 내게 다가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는 책 속에서 리케도르안에게 목숨을 다해 충성하는 인물이었다.

지금에야 정확히 어떤 마음인지 모르겠지만 리케도르안을 도우려는 것 같다. 그렇지 않았으면 정체를 들키는 걸 감수하고 내게 말을 걸지 않았을 테니까.

물론 그는 내가 이미 모든 진실을 안다는 걸 모르겠지만.

“지켜보니까 아가씨는 꽤 호기심이 많은 사람인 것 같아요. 그러니 그 죄수의 상태도 알아차린 거죠?”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지켜볼 만큼 많이 봤다는 소리예요?”

“네. 탈옥이 취미거든요.”

…정말 부러운 취미이긴 한데. 만약 내가 중죄인이었으면 바로 혹했을 것 같다. 탈옥 꿀팁 좀 알려달라고 말이다.

“내게 원하는 게 뭐예요?”

“네?”

“간수까지 저리 만든 걸 보니, 할 말이 있어서 찾아온 거 아닐 거예요.”

그러자 제이르가 나를 빤히 쳐다보나 싶더니, 곧 녹색 눈이 빙긋 휘어졌다. 그가 살짝 휘파람을 불며 역시, 하고 중얼거렸다.

반면 난 저 반짝반짝한 눈동자가 부담스러워졌지만.

“아가씨가 내 마법적인 호기심을 충족시켜줬으면 해서요.”

“호기심?”

“네. 나는 짐승의 저주를 가진 사람에게 각성을 걸어줄 수 있는 마법사거든요. 오랫동안 연구하고 싶었던 소재를 보니 손이 간지러워서 말이죠.”

그저 호기심인 척 꾸몄지만 제이르의 진짜 목적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날 통해서 리케도르안에게 마법을 걸겠다 이거구만? 왤까. 왜 굳이 지금? 어차피 기회는 많을 텐데 왜 날 통해서 공개하는 위험을 감수하는 걸까. 이러면 리케도르안의 감방 생활이 조금 더 이르게 편해지니까?

하지만.

“제가 들어줄 이유는 없는데요.”

“오, 제 마법적 호기심을 충족시켜드리면 지금 아가씨를 해코지 않을게요.”

“협박하는 거예요?”

제이르의 눈이 실눈같이 가늘어졌다.

“농입니다. 대신 언제든 단 한 번 뭐든지 도움을 드릴게요. 마법사의 도움은 흔치 않은 기회인 걸 아실 거예요.”

확실히 나쁘지 않은 거래이긴 했다. 다만, 저 제이르를 써먹을 수 있는 기회가 실상 내게 딱히 득 될 게 없다는 거다.

내가 조연을 써먹을 일이 뭐가 있겠어. 출소하면 원작이랑 상관없는 곳에 가서 잘 먹고 잘살 건데.

그러나 다음 순간 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제이르가 덧붙인 말 때문이었다.

“아마 죄수도 엎드려서 땅의 걸 주워 먹는 대신 스푼을 사용하게 되겠죠. 농 같지만, 그 죄수에게도 나쁜 일은 아닐 겁니다.”

단순하게도 그 제안이 마음에 들었다. 제이르가 도움 어쩌고 선심 쓰듯 내세운 것보다 더욱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리케도르안이 자꾸 떨어진 쿠키를 주워 먹어서 곤란했지.

“어려운 일인가요?”

“전혀요. 그저 이것만 건네면 되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제이르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는 자신이 내 손바닥에 마법을 걸어줄 테니 리케도르안에 다가가 ‘시동어’만 외우면 된다고 설명했다.

“이건 내가 만든 마법이에요. 말하는 순간 발동할 테죠.”

자신이 직접 만든 마법. 리케도르안에게만 듣는 한시적인 마법이라나. 이렇게 체계적인 설명을 보아선 이 접근은 역시 의도적이었단 얘기다.

“준비성이 빠르시네요?”

“네. 이미 만들고 아가씨를 설득해볼까 했거든요. 난 무척 학구적인 성격이라서요.”

그런 것치고 왜 감방에 있느냐 대꾸하려던 나는 그대로 고개를 저었다.

왜긴 왜겠어 헤르님 쪽 사람이니까 그렇지.

우두머리가 체이서 쪽인 것에 반해 죄수들 곳곳에는 헤르님 쪽 사람이 섞여 있었다.

아무리 대공이 리케도르안을 버렸다지만 방치한 것만은 아니었단 소리겠지.

알았다고 하며 손을 내밀 때였다.

“그런데 어쩌죠? 이거, 밤에 진행해야 해요.”

……뭐?

“이 마법은 달의 힘에 영향을 받거든요.”

제이르의 손이 내 손목을 무례하지 않게 잡았다. 그의 손 주변에서 희미한 빛이 휘휘 돌았다.

“저기요, 무슨 소릴 하는 건가요? 내가 밤의 감방을 벗어나서 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그 점까지 도와드리려고 하는 거죠.”

제이르가 손을 떼어내자, 내 손목에는 없던 팔찌가 생겨났다.

그의 눈처럼 녹색의 끈으로 된 팔찌였다. 중심에는 반투명한 보석이 반짝거렸다.

“이걸 사용하면 될 겁니다.”

제이르가 작게 속삭였다. 그런 그의 속삭임 뒤로 내 손등에 푸른 빛이 피어올랐다. 빛이 가라앉으며 손목 안쪽으로 지팡이 모양의 문양이 덧그려졌다.

이게 마법 문양이라고?

“다 됐습니다.”

제이르가 씩 웃었다. 그러고는 뒤로 살짝 물러나서는 박수를 쳤다. 난 의심스러운 눈으록 그를 보았다.

“이거, 죄수에게는 해가 되지 않는 거죠?”

“아, 네. 그 마법, 기분은 괜찮을 겁니다. 부작용이 살짝 있겠지만?”

부작용? 미간을 찡그린 내가 그를 노려보자, 제이르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별건 아니에요. 갑작스럽게 성장하는 정도? 금방 원래대로 돌아오겠지만요.”

제이르는 손을 딱 튕기더니 마법을 풀었다고 속삭였다. 그러고는 얼른 등을 돌렸다. 오래 같이 있는 모습을 보여 좋을 것이 없다나.

나는 눈을 좁히며 멀어지는 등과 팔찌, 손등에 새겨진 푸른 문양을 번갈아 봤다.

……별거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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