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앞으로도 이곳에서 당신은 원하는 일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겁니다.>
르나그의 집무실을 나선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심경이 복잡해서였다. 와. 이렇게 달갑지 않은 사실을 알게 되다니. 내가 악당 부하 집안이라니! 하지만 얼추 말이 되는 것 같았다.
냉혹한 성격인 르나그가 나를 신경 쓴다는 점부터 뭔가 묘했어. 이미 이 시기에 체이서와 손을 잡았네. 잡은 거야.
르나그와 체이서.
두 사람 다 이 책 속에서의 악역. 체이서가 메인 악당이라면 르나그는 이를 보조하는 동시에 가끔 아주 잔혹한 면을 보이던 조연 악당.
체이서와 르나그가 이미 이 시점에서 손을 잡았다면, 이 감방은 체이서의 손아귀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르나그는 체이서와 반대되는 헤르님의 아들, 리케도르안을 달갑게 여기지 않을 거고, 이는 리케도르안을 개처럼 다룬 것에 즐거워하던 모습을 생각하면 아귀가 맞아떨어진다.
여기서 어째서 리케도르안이 체이서의 공간이나 다름없는 이 감옥에 있나 하는 의문이 들겠으나 이유는 이렇다.
헤르님 대공은 리케도르안을 이곳에 집어넣을 때까지 두 사람의 협력관계를 몰랐으니까. 물론 르나그라면 체이서와의 협력관계는 숨기고 겉으로는 책 속처럼 중립인 척 시늉하겠지만.
아울러 여기만큼 폭주를 막기 좋은 곳이 없다는 설정 때문에 여기 머무는 것이기도 했다.
“와. 세상에.”
어쨌거나 이미 체이서의 손에 떨어진 것이라면 리케도르안에게 상황이 좋지 않았다. 어쨌거나 중요한 건 내 오빠와 아빠가 르나그가 청탁을 들어줄 만큼 작위가 있는 집안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서 악당 체이서의 부하 집안 중 하나일 거라는 것도 같이.
충격적이긴 하네.
그래도 그나마 나았다. 이들과 직접 엮이는 인물은 아닐 테니까. 아직 출소하고 멀리 떨어져서 살겠다는 목표는 실패하지 않았단 거다.
사실 조금 전 르나그는 내가 나간 직후에 문을 열고 나를 한번 붙잡았다.
<저는 이 길로 잠시 다시 한번 어딜 다녀올 예정입니다. 무슨 일이 있다면 언제든 간수를 통해 말씀해주십시오. 돌아올 테니.>
무엇이 그리 바쁜지 나와 만난 뒤로 또 자리를 비울 거란다. 대신에 무슨 일이 있다면 자기가 바로 전달받을 수 있다나? 그가 바라는 무슨 일은 없을 것 같고 만날 일이 줄어든다니 반길 일이다.
“얼른 출소나 했으면.”
소박한 바람을 되새기며 나는 리케도르안의 지하실로 걸음을 옮겼다.
“비가 오네.”
창문에서 동글동글 굴러가는 물방울을 응시했다. 내 앞에서는 간수가 걷고 있었다. 저이가 듣지 못하도록 작게 중얼거려서 내 중얼거림은 듣지 못했을 거다.
나는 목소리를 높였다.
“저기, 오늘은 부슬비가 떨어져서 산책은 무리겠네요. 그죠.”
“네? 네. 그렇죠.”
예상대로 산책은 힘들 거란 답변이 돌아왔다.
“응접실로 가겠습니까?”
“음. 아니요.”
고개를 저었다. 응접실로 가지 않고 리케도르안을 잠시 보고 올 생각이었다. 나는 걷는 체하며 흘끗 주머니를 확인했다. 두툼한 주머니는 비상 간식으로 두둑했고, 움직일 때마다 바스락 소리를 냈다.
지하의 멍멍이가 달달한 걸 좋아하던데 이건 어떠려나. 사실 주머니 속 이 사탕은 놀랍게도 르나그에게 받아 채운 것이기도 했다.
“기분이 좋아 보이시는군요.”
“아, 네? 아……. 그런가요.”
간수를 따라 계단을 내려가며 리케도르안의 수줍어하는 얼굴을 떠올리곤 씩 웃었다.
그 사람, 놀리는 맛이 있단 말이지. 그러나 잠시 후 지하 감방에 도착한 나는 들어가지 못한 채 걸음을 멈췄다.
“아저씨?”
분위기가 묘했다. 무언가 변했다는 건 아니다.
“아……. 왔습니까, 이아나.”
떨떠름한 한스의 표정과 반쯤 열린 감방의 문. 그리고 오늘따라 더욱 새빨갛게 보이는 벽의 램프까지. 나는 간수 한스와 철창을 번갈아 응시했다. 이윽고 바닥에 고인 웅덩이를 마지막으로 고개를 들었다.
“……문이 열려 있네요?”
한스는 간수답지 않게 유들유들하게 웃는 이였다. 그러나 오늘 그의 표정은 평소와 다르게 어색했다. 꼭 숨기는 게 있노라 고백하는 것처럼. 이게 더 이상하잖아.
“오늘은 먼저 온 면회객이 있었습니다.”
“그래요?”
나는 한스를 보는 대신 철창을 응시하며 끄덕였다.
“음. 이아나. 오늘은 그냥 돌아가는 편이 좋을 것 같습…….”
“괜찮아요. 들어가 봐도 될까요?”
꼭 한스의 표정이 아니더라도 이곳이 평소와 같지 않다는 건 눈치챘다. 늘 굳게 잠겨 있던 문이 열려 있는 것만 봐도 느껴졌으니까.
더구나 열린 문을 통해서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운 냄새가 났다.
“뭘 보더라도 비밀로 할게요. 나, 계속 그래왔잖아요? 걱정 말아요. 입은 무겁잖아요.”
한참을 머뭇거리던 한스가 어렵게 허가했다. 그도 고집스러운 내 표정을 읽은 듯했다. 그보다는 질 좋은 물건을 건네는 나와의 사이가 틀어질까 염려한 거겠지만.
간수들은 친절한 듯하면서 계산적이며 이기적이었다. 감방이니까 당연한 일이다.
책임이 막중한 자리고, 담당 죄수가 문제를 일으킬 시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 겉으로는 아무리 평화로워 보여도 말이다. 그렇기에 이들의 이기적인 합리성을 이해했다.
나는 늘 하듯이 담배를 넘기고는 빠르게 발을 놀렸다.
“하아…….”
내 다리가 바삐 움직인다. 철창 속으로 들어가고, 숨을 토했다. 그러고는 램프를 고쳐 쥐었다. 짧기만 한 거리가 길게 느껴진 것은…… 아냐. 나는 고개를 저으며, 태연하려 애썼다.
조금 전 철창 앞, 바닥에 고인 웅덩이는 저 밖에 내리는 비가 아니었다.
‘피’였다.
이 부분은 읽어본 적 있었다.
“……이걸 직접 보게 될 줄은 몰랐다고.”
지나가듯 서술로 적혀 있던 부분이 왜 선명하게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피를 봐서인가?
리케도르안의 부친 헤르님 대공은 그를 덜떨어진 자식이며, 명문 헤르님의 치욕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폭력을 서슴지 않았고 흔적을 남기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는 이 감방에 버리듯이 가둔 뒤로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악당 체이서에게 죽기 전까지 아들을 학대했다고 했다.
이해할 수 없었던 점은 그럼에도 리케도르안은 살해당한 아버지의 죽음에 슬퍼하고 부친을 살해한 체이서에게 증오를 품었다는 점이었지만. 어쩌면 정을 줄 사람이 없던 그에게 아버지는 세상을 향한 유일한 창구였을지도 모른다.
외로운 어린 짐승이 자신을 물어뜯는 포식자에게 몸을 의지한 것인지. 혹은 스톡홀롬 증후군 같은 것은 아닌지, 난 모르겠지만.
원래 사람의 감정은 복잡한 법이니까.
“하아.”
나는 마침내 벽 앞에서 램프를 들어 올렸다.
흔들리는 불꽃 아래, 넝마인지 사람인지 모를 피투성이 몰골로 쓰러진 소년이 보였다.
“리케도르안.”
파르르 떨며 입을 열자, 움찔 움직이던 그가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왕!”
먼지 앉고 상처 입은 몸에서 새파란 눈만이 깨끗하게 보였다. 이 순간 산책 나가는 줄로 알았는지, 비틀거리는 팔로 일어나려 애쓴다. 사람의 말을 하지 않는 그가 안쓰러워 보였다.
“일어나지 마.”
“낑?”
쪼그려 앉은 나는 상처 난 뺨을 톡 건드렸다.
“……사람 말을 안 하는 게 반가운 건 또 처음이네.”
“왕! 아르르, 왕!”
리케도르안은 살짝 미간을 찡그렸으나, 이내 해맑게 왕왕 짖었다. 나는 웃지도 흐리지도 못한 애매한 표정으로 리케도르안을 쳐다봤다.
“……몇 번 산책했다고 배도 까주고 이렇게 반기고. 이렇게 경계심이 없어서 어떡할래요.”
내 손가락이 부드러운 은색 머리칼을 스쳤다. 그러나 다른 날과 달리 손가락은 머리끝에서 걸렸다. 손가락을 빼니 엉긴 피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끼잉. 끄응?”
나는 깨끗한 엄지손가락으로 그의 턱에 맺힌 피를 닦아냈다.
“오늘은 산책 안 해. 이 말은 알아듣지?”
“우우?”
그의 음성이 피가 잔뜩 굳은 모습과 대조되어 오히려 더욱 묘해진 기분을 느꼈다.
“상처 매단 채로 해맑은 얼굴 하지 말아. 안쓰럽게.”
뺨에서 그나마 상처 없는 눈 밑을 손으로 쓸었다. 그가 음미하듯 눈을 감았다. 의외로 짐승일 때 그는 만져주는 것을 좋아했다. 마치 정에 굶주린 것처럼.
우습게도 한 달 조금 넘게 만나 산책을 한 것뿐인데. 그것도 손가락에 꼽을 만큼 많지 않은 횟수인데. 그러나 사방이 가로막힌 깜깜한 감옥을 훑어본 나는 이해했다. 아니,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어 내게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자조적이었다.
“하기야 반평생 이곳에 있었다면 이것도 반가울 만하겠다.”
“끼잉?”
“이대로 두면 아프겠다. 그치?”
치료가 필요해. 나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덥석.
눈을 내리자, 리케도르안이 나를 붙잡고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것이 보였다. 짐승인 그는 혼란스러워 보였다.
“어디 안 가. 잠시만 기다려.”
개들은 주인이 사라지는 걸 본능적으로 느낀다던데, 그도 그렇기라도 한 듯 고개를 저으며 낑낑대며 울었다.
“……아르르, 끼잉.”
“응. 착하지. 기다려.”
단호하게 말하자 구속구의 힘인지는 몰라도, 그의 손에서 힘이 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남은 그의 손가락을 떼어내는데, 마지막 손가락을 떼어낸 순간 멈칫했다. 그의 손이 나를 잡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손끝만 겨우 붙잡을 만큼. 나는 그를 응시했다. 아픈 와중에도 아주 붉어진 얼굴이었다.
“어디…… 가요……?”
물기로 찬 눈이 나를 응시했다. 주룩주룩 눈물 자국이 남은 얼굴은 고통스러웠다는 증거인 것 같았다.
“……가지 마세요…….”
나는 난감한 얼굴로 손을 바라봤다. 울 것 같은 이 남자를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이 얼굴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이유를 알지만 내가 해결해줄 수 없잖아. 그러니 이 얼굴은 반칙이다. 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나는 그에게서 도망가려는 것이 아니었다.
“다시 올게.”
“정……말……?”
약속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라지만 지금이라면 못할 것도 없었다.
“약속 알아? 약속할게. 손가락 걸고.”
나는 그의 새끼손가락에 손을 걸었다. 여기엔 없는 동작일지도 모르지만 그는 순순히 나를 응시하며 놓아주었다. 그냥 힘이 빠진 것 같기도 했지만.
나는 그대로 주춤 물러서다가 등을 돌렸다. 등 뒤로 쓰러진 채 꼼짝 못 하는 소년이 마음에 걸렸지만 더 급한 건 따로 있었다.
덜컹. 철창이 열렸다. 조금 놀란 얼굴로 나를 응시하는 한스를 보며 입을 열었다.
“아저씨, 혹시 여기에 치료약이…….”
하나 나는 얼른 멈췄다.
“아니. 아니에요.”
아무리 친절한 간수라 해도. 간수는 간수다. 나는 숨을 꾹 참았다. 그리고 램프를 내려놓고 빠르게 계단을 달렸다.
“이아나? 벌써 갑니까?”
“네. 다시, 다시 올게요!”
상처가 심해도 너무 심했다.
얼른 치료해야 하지 않을까? 머리로는 저 상처는 언젠가 다 나을 것이고, 그는 정상적인 상태로 여주인공을 만나게 되리란 걸 알았다. 하지만 나는 피투성이 소년을 그대로 둘만큼 태평하지는 못했나 보다.
어디로 가지? 르나그? 아니다. 그는 이미 출타했을지도 몰라. 거기다 리케도르안을 돕겠다고 한다면 훗날 어떤 식으로 돌아갈지 몰랐다.
“하아하아…….”
방에 도착했지만 쓸 만한 물건은 없었다. 당연했다. 나는 그렇게 다칠 일이 없었으니까. 신속하게 책상을 훑던 내게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편지지였다.
그래, 편지.
나는 빠르게 펜을 들었다.
「약을 보내줘. 제일 잘 듣는 거로. 상처 치료하는 거!」
밑져야 본전이겠지만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기본적인 것만 주어진 방에는 약이라거나 붕대 같은 것이 없었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더니.”
붕대는 탈옥이나 자해에 쓰인다는 이유로 금지되었다고 했나. 물론 이곳에 환자는 있고 그런 환자를 위한 의무실이 있었다. 그러나 의무실에 가더라도 약초나 약품을 바깥으로 가져가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예전에 수면제를 숨기고 탈옥하려던 이가 있었다나? 이상한 곳에서 감방다운 곳이었다.
나는 문을 두드리고 방 앞을 지키던 간수에게 얼른 말했다.
“저기, 편지요. 오늘 바로 보낼 수 있을까요? 급한 거라.”
“괜찮을 겁니다. 마침 오늘 편지를 일괄 배송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좋아. 평소 간수들과 친하게 지냈던 것이 도움이 됐다. 마침 자주 물건을 찔러주었던 간수라, 내 부탁에 그는 흔쾌히 오늘 안에 부쳐주겠다 해주었다.
편지는 그날 밤 곧바로 배송되었다. 우습게도 단 이틀 뒤 거짓말처럼 답신이 도착했다.
“와, 세상에.”
나는 입을 쩍 벌렸다.
그도 그럴 것이 다양한 약과 약을 모르는 내가 봐도 아주 비싸 보이는 크리스털 병에 담긴 약이 가득 담긴 채 함께 배달되었으니까.
물론 이건 물품에 해당해서 간수관리장을 통해 받을 수 있었다. 르나그가 출타했다는 말은 사실인지 진짜 간수관리장이 전달해준 것이다. 물론 전달해주며 간수관리장은 웬 약인지 의아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묻지는 않았다.
그저 총관리장, 르나그가 나를 잘 봐주란 말을 했다는 엉뚱한 말을 붙일 뿐이었다. 나는 거기에 신경 쓸 겨를도 없이 급한 마음을 품고 겉은 태연한 척 등을 돌렸지만.
“얼른 가자.”
나는 빠르게 리케도르안에게 달려갔다. 여기까지 벌써 이틀이 지났다. 마음은 초조하기만 했다.
한스는 주머니를 한 아름 품고 온 나를 아무렇지 않게 철창 안에 들여보내주었다.
한스는 며칠 전에도 별로 놀라거나 당황한 기색이 없었지.
한스는 그날 리케도르안이 어떤 상태인지 알면서도 동요 없는 얼굴이었다. 내가 찾아와서 놀라긴 했지만 그건 평범한 소녀인 내가 이 풍경을 볼 걸 감안해서였지, 리케도르안을 신경 쓰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렇다는 건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다는 소리다.
나는 그저 책 속 주인공들의 대화로 리케도르안이 어떤 과거를 지녔는지 알았으나 후루룩 읽는 것과 직접 보는 것은 달랐다. 그러니까 언젠가 다 나을 상처임을 알면서도 이렇게 급하게 달려온 거겠지만.
“……누, 누구?”
램프를 들어 올리자 움찔하는 소년의 형상이 보였다.
“나예요.”
소년이 등을 뒤로 물리다 말고 멈칫했다. 작은 몸짓 하나가 파닥거리는 새와 같아서 입술을 꾹 깨물었다. 뭔가 이상했다. 그토록 기만하던 이 남자가 누구냐고 묻는 것이 말이다. 이윽고 나는 가까이 다가가고서야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눈에도 상처가 있었구나.
정확히는 눈꺼풀 위쪽이었다. 이틀 전에는 미처 보지 못한 상처인 듯했다. 여기서 흘러내린 피가 굳어서 눈을 뜨지 못하게 한 거다. 눈을 뜰 수는 있겠지만 희미하게 보일 정도로.
나는 리케도르안 앞에 쪼그려 앉고, 주머니를 열었다. 가져온 물에 손수건을 적셔 그의 얼굴을 천천히 닦아주었다.
“……읏…….”
굳어진 피를 닦아내자, 파르르 떨리던 그의 눈이 뜨였다. 눈을 뜨자마자 새파란 눈동자가 드러났다. 나를 보자마자 흔들렸지만.
“자, 잠, 잠시.”
“불편해도 조금만 참아요.”
나는 그가 뒤로 물러난 만큼 그를 쫓아갔다.
철그렁. 쇠사슬이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결국 벽에 등을 부딪친 그는 물러날 곳이 없어 얼떨떨한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흐…….”
상처가 덕지덕지 앉은 얼굴과 물기 어린 눈은 없던 가학심까지 부추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여러모로 우심방에 좋지 않은데 하는 수 없잖아.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는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얼굴을 닦아냈다.
“소독하는 거예요.”
이성이 있는 쪽이라 다행이었다. 짐승 쪽이었으면 조금 힘들었을 테니. 대신에 갈수록 붉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마주하며 그의 목을 닦아내야 했다.
“으읏.”
상처에 닿은 걸까. 리케도르안이 목을 움츠렸다. 오히려 고개를 모로 돌리는 통에 더욱 닦기 좋아졌지만.
이쯤 됐다 싶을 때 손수건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주머니를 들어 올리며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깨달았다.
지나치게 가까웠다.
소년의 떨리는 눈동자가 바로 앞에 있었다. 눈을 깜빡이는 내 모습이 푸른 동공에 비칠 만큼 가깝다.
“아…….”
움직이지 못한 건 더 물러날 공간이 없을뿐더러 쇠사슬이 걸려서인 것 같았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려고 했던 건 아니었지만……. 확실히 눈을 뗄 수 없는 외모였다.
여기서 더 크면 정말 끝내주겠네.
맑은 하늘 아래서 빛을 내던 파란 눈동자는 빛이라고는 램프 하나뿐인 이 공간에서도 촉촉하게 빛났다. 사슴처럼 길게 뻗은 목이나 닿으면 움찔하고 꽃이 핀 듯 붉어지는 하얀 피부까지. 19금 소설에서 퇴폐미를 담당하는 남자주인공이라기엔 아직 너무 청초했다.
“떨지 말아요. 잡아먹지 않으니까.”
“잡, 잡, 잡?”
“응. 안 먹어요.”
내 것이 아니거든.
“지금부터 약을 바를 건데, 아프면 말해요?”
“네? 네네?”
“아파도 계속 바를 거지만.”
“제, 제가 직접…….”
“그 손으로요? 쇠사슬은?”
“…….”
잠시 뒤 자신의 얼굴을 감싸 쥔 리케도르안이 고개를 내렸다. 저 자세로 상처에 닿으면 아플 텐데. 나는 머리칼이 이마에 닿지 않게 그의 앞머리를 살짝 붙잡아 올렸다. 그리고 가지고 온 머리핀을 꽂았다.
“세상에. 나보다 더 잘 어울리네.”
예고 없이 의문의 패배를 당한 나는 눈을 깜빡거리다가 살짝 웃었다. 이 미모라면 지는 게 당연하기도 하니 별 감정은 들지 않았다.
“왜, 왜, 왜. 웃는 거예요?”
“당신이 나보다 더 예뻐서요.”
“그……. 렇지 않아요! 당신은!”
“네?”
큰 목소리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어서 고개를 기울였다.
“그럼요? 나 예뻐요?”
“……그, 그건.”
리케도르안이 얼른 고개를 숙였다. 아, 겨우 들었나 싶더니. 치료 한번 하기 힘드네. 난 양손으로 그의 턱을 살짝 잡아 들어 올렸다.
“알았어요.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은 안 해줘도 되니까. 일단 이대로 있어요. 치료 좀 해요. 아프잖아.”
나는 한 손으로 주머니를 뒤집어 있는 것 전부를 하나하나 꺼내서 늘어놓았다. 마음 같아선 와르르 쏟아내고 싶지만 유리로 된 케이스도 있어서 조심스러웠다. 친절하게도 오빠란 사람은 약뿐 아니라 약에 대한 설명서도 함께 보내주었다.
“으음, 그러니까 이건 긁힌 상처고 이건 쓸린 상처……. 아니. 화상약은 왜 보낸 거지?”
설명서라고 했지만 직접 그의 글씨로 적힌 종이였다. 새삼 이 정성스러움에 감탄했다. 하기야 평소 원하는 것을 척척 보내주는 것만 봐도 수완 좋고 아끼는 마음이 전해졌지.
아니, 아끼는 마음은 아닌가? 진짜 아꼈다면 대신 감방에 보내지 않았을 테니까.
한참 약을 분류하던 나는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어디가 다쳤는지 적지도 않고 약을 보내 달라고 했구나. 나는 뺨을 긁적였다. 그래서 이렇게 약이 많았어.
‘으음. 급하긴 급했구나.’
고르고 골라 리케도르안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추려냈다. 그리고 그중 하나를 들어 뚜껑을 열었다. 박하향 같은 쌉싸름한 약초 냄새가 났다.
“음, 내가 좋아하는 냄새는 아니네. 아파도 참아요? 좋은 약은 몸에 쓰다잖아.”
“…….”
움찔.
이제 그는 소리도 내지 않고 내 손을 받아들였다. 받아들인다기보다는……. 눈을 꼭 감고 인내하는 모습이었지만. 그렇게 부끄러운가? 아니면 싫은가.
“흐읏, 조, 조금만 천천히…….”
“……말을 왜 그렇게 해요?”
오해할 것 같잖아요, 선생님. 체온이 높은 그의 피부에 차가운 내 손이 조금 자극적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말이요?”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개를 저은 나는 전보다 느리게 손을 움직였다. 얼굴에서부터 시작한 약은 천천히 내려가 목과 쇄골에서 멈췄다. 빗장뼈 안쪽 우묵한 곳에 들어간 손이 느린 움직임으로 좌우로 움직인다. 이쯤 되니 나도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다.
빠르게 바른다면 차라리 그냥 넘겼을 텐데. 자꾸만 느려지니…… 음미하게 되잖아. 솔직히 이런 감상엔 갈수록 열꽃이 피듯 붉어지는 그의 피부도 한몫했다.
마침내 창살 내엔 숨소리만 가득했다. 텅 빈 방을 메운 고요에 나는 살짝 불편해졌지만 그뿐이었다. 차라리 빠르게 끝내자 싶어 손가락을 하나 더 꺼내 들어 발랐다.
그리고 팔목과 발목, 찢어진 천 사이의 허벅지 아래까지 약을 모두 발랐을 때, 나는 붙잡고 있던 그의 손을 들어 올려 후, 불었다.
“흐으.”
파르르르.
“왜 떨어요?”
“바, 바, 바람이!”
“왜요. 손이잖아요. 불어서 말려야 돼요. 특히 수갑 찬 쪽은 이렇게 하지 않으면 덧나요.”
다시 한번 후, 불었다.
“……으읏. 하, 한 번만으로 충분……한 것 같아요.”
“신음 좀 그만 낼 수 없어요?”
왜 선량한 소녀를 시험에 들게 하는 거야. 미간을 좁혔다. 그러자 그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데구루루. 뺨을 굴러가는 옥구슬 같은 눈물에 침을 꼴깍 삼켰다.
하아, 그냥 쳐다보지 않는 게 낫겠다.
“다 됐어요. 다음은…… 뭐지? 아, 진통제네요. 이건 고통을 줄여주는 약이에요.”
환처럼 동그란 약이 유리병에서 데굴데굴 흔들렸다. 나는 의아한 시선으로 날 바라보는 리케도르안을 담고는 눈을 깔았다.
“원래 이것부터 먹어야 하지만 그럼 그만큼 지속시간이 짧아지는 거라서…… 마지막으로 미뤘어요.”
그는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진통제가 왜 필요한가 싶겠지.
사실 나는 어제도 리케도르안을 찾아갔었다. 철창 안까지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편지의 답장은 도착하지 않았으나 염려되는 마음에 갔었던 거였다.
그리고 나는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문 앞에서 서성였다. 감방을 가득 메운 신음을 들어서였다.
<으윽, 아흑, 윽. 으.>
그건 분명히 고통으로 신음하는 소리였다. 그가 이 상처의 고통에 아주 많이 괴로워하고 있었다. 들어가지 못한 건 차마 아무 방법이 없는 상태로는 지켜보지 못할 것 같아서, 그리고 이 신음에도 태연한 한스를 보고 싶지 않아서기도 했고. 그래서 오늘 약이 도착하자마자 이렇게 달려왔지.
“이제 약 먹을까요?”
이 소년은 앞으로 4년을 더 아무것도 없는 깜깜한 감방에서 버티게 된다.
“약이요?”
“네. 아플 때 먹는 거요. 지금 여기 바른 것처럼 낫게 하는 거예요.”
하나 상대적으로 죄질이 가벼운 나는 곧 나갈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라서 나는 그를 도울 수 있다. 그가 4년을 버틸 것을 아니까.
안쓰럽잖아.
언젠가 구원받을 때까지만 이 정으로 참아보라고.
이리 생각하는 나는 이기적이니까 그가 딱 이 이기심만큼 목을 축였다가 잊으면 좋겠다.
“이건 삼키는 약이에요.”
나는 그의 앞머리를 살짝 어루만지며 말했다.
“먹을 수 있죠? 여기까지 가져왔는데 성의가 무시당하면 슬플 것 같아.”
“……먹을, 먹을게요.”
“응. 착하다.”
그는 빨개진 얼굴로 환약을 받아들고 나를 번갈아 보았다. 한참이 지나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래요?”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이 흐려졌다. 그는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입을 천천히 떼어냈다.
“어, 어떻게 먹는 건가요?”
“아, 설마 처음 먹어봐요?”
끄덕.
여러모로 놀랄 일이었지만 곧 이곳에서는 약의 형태가 대부분 물약이란 것을 떠올렸다. 의무실에도 한가득 물약이었지. 의사 말로는 환 형태로 건조하기 힘들어서라고 했다.
“물을 이렇게 머금고 삼키면 돼요. 꿀꺽.”
그러나 이렇게 설명했지만 그는 좀처럼 삼키지 못했다.
‘어린아이들이 알약을 먹지 못하는 거랑 같은 건가.’
나는 난감한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약을 빻으면 될까 싶다가도 마땅한 도구가 없었다. 수갑이 단단하겠지만 저건 너무 더럽잖아. 으음, 어떡한다.
“이리 줘볼래요?”
일단 그에게 약을 돌려받고 그대로 숨을 뱉었다. 어쩔 수 없나.
“그럼 내가 먹여 줄 테니까. 딴말하지 말아요. 당신이 못 먹어서인 거니까.”
“네, 네네? 아……. 으, 네.”
망설이던 그가 눈을 굴리다가 천천히 끄덕였다. 어라. 흠. 오늘따라 묘하게 더 붉은 얼굴인데? 순종적인 것도 그렇고. 나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내 그러려니 하고 그의 턱을 붙잡았다.
“입 벌려요.”
붉은 그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더. 더. 명령과 같은 청유에 입술이 더욱 벌어진다. 환이 꼭 맞은 크기가 됐을 때쯤 약을 집어넣었다.
손가락과 함께.
“쉬이. 내 손가락 씹으면 안 돼요?”
“끕…….”
손가락에서 물컹한 안쪽의 살이 느껴졌다. 나는 그가 놀라지 않도록 아주 천천히 손을 집어넣었다. 너무 깊었다간 다시 토해낼지도 몰라. 그러니 더욱 조심스럽고 가볍게…….
곧 말캉한 것이 내 손가락을 꾸욱 찔렀다. 아니, 어쩔 줄 모르고 간질이는 것이었다. 흘끗 보니 분홍빛 혀였다. 선홍빛이 도드라진 살은 마치 이 남자처럼 겁이 많고, 파들파들 떨며 조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나 물지 말아요.”
그가 눈물을 머금은 눈으로 천천히 끄덕였다.
“옳지. 목구멍 뒤로 넘길 테니까. 뱉지 말고, 삼켜요.”
혹시나 토해내지 못하게 그의 혀를 지그시 누르자, 반사적으로 물기 어린 그의 눈이 나를 향했다.
어느새 눈 밑까지 촉촉하게 젖은 눈동자에 잠깐 움찔했지만 이내 나는 태연한 척 그의 혀에 집중했다. 그대로 환을 깊게 밀어 넣었다.
꼴깍.
말캉한 혀가 손가락을 휘감았다. 눌렀기에 반사적으로 나온 행동이겠지.
리케도르안이 내 손가락을 문 채로 나를 응시했다. 이에 잠깐 손가락을 빼는 것을 잊고 멈칫했다. 잔뜩 붉어진 눈 밑, 목 끝까지 피어버린 붉은 열꽃.
그는 집요하리만치 나를 쳐다보고 있다.
본능적인 움직임인지, 그의 혀가 내 손끝을 간질였다. 다른 손끝이 절로 곱아든다. 어쩔 수 없이 닿는 것이라 해도 상당히 외설적이었다.
맨입에 약을 삼켜서 고통스러울 만한데도. 말캉한 혀의 감촉이 그대로 손가락에 휙 감겼다. 윽. 손을 빼내고 싶어도 어느새 내 손을 잡은 그의 손 때문에 움직여지지 않았다.
아니. 왜 빨개지면서 놓아주지 않는 건데?
나는 침묵이 내려앉은 순간을 견디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짖어봐요.”
“……?”
그의 고개가 갸웃 돌아갔다. 나는 참지 못하고 말했다.
“어서.”
차라리 짖는 게 나을 것 같아.
“언제까지 물고 있을 건가요?”
화들짝 놀란 리케도르안이 내 손을 놓았다. 자신도 모르게 나왔던 행동인 건가?
손가락을 손수건에 닦은 나는 얼른 그에게 물을 내밀었다. 그가 물을 마시는 동안 얼른 나머지 손을 닦고, 주머니 안에 약병을 챙겼다.
“다 마셨죠? 병은 가져가요.”
목소리에 다급함이 스몄다. 내 안의 감이 말하길 더는 여기에 있으면 안 된다고 외치고 있었다.
“오늘은 이만 가볼게요. 오늘 밤은 아프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나 약속 지켰어요?”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은 지켰다. 동시에 다시는 그와 약속을 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는 것을 느꼈다.
묘한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저 눈을 계속 보고 있다가는 뭐든 해주겠다 선언할 것 같으니 말이다.
“자, 잠깐.”
어쩐 일인지, 리케도르안이 처음으로 나를 불러 세웠지만.
난 듣지 않은 채 등을 돌렸다.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습니다.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