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87)

***

그와 함께 산책하는 날은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

“오랜만입니다. 이아나.”

간수들이 반갑게 인사했다. 의외로 산책 시간에 리케도르안과 함께 걷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수많은 간수들에게 제지라도 당하지 않을까 했는데, 의외로 순순히 나를 중심에 넣어주었던 것이다. 오히려 간간이 아는 간수들에게 인사를 받았다. 대부분이 내게 ‘대가’를 받아 가던 이들이었다.

이 자본주의 미소들 같으니라고.

“최근엔 세탁실 쪽으로 오지 않습니다. 섭섭하게.”

“내가 아니라 다른 게 섭섭한 건 아니고요?”

새 옷을 가져다주는 세탁실 쪽 간수와 몇 마디 주고받던 나는 흘끗 리케도르안을 응시했다. 소년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다른 간수와 함께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얼굴을 돌렸다.

“안녕.”

흐응. 왜 눈을 피하실까. 눈이 마주치자마자 휙 돌아가는 얼굴을 끝까지 좇았다. 조금 전까지 날 보고 있었으면서 말이야. 분명 옆통수가 따가울 정도로 시선을 느꼈다고.

“이건 안 불편해요?”

얼른 그의 옆으로 다가간 나는 수갑을 톡 두드렸다. 그의 손목을 꽁꽁 옭아맨 수갑이 차륵 소리를 낸다.

“……안 불편해요…….”

그가 보일 듯 말 듯 끄덕였다. 하늘빛 은발 사이로 붉어진 귀가 보였다.

며칠 동안 알아본 결과 의외로 여기서 리케도르안의 정체를 아는 이들은 아무도 없는 듯했다. 이러한즉슨, 리케도르안의 진짜 정체는 최소한 관리자급이 되어야 안다는 얘기겠지.

‘간수들은 리케도르안을 마법 범죄 죄수로 알고 있었어.’

마법 범죄 죄수란 말 그대로 마법 범죄에 관련한 죄수였고, 발작 및 갑작스러운 폭주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은 죄수로 분류되었다.

그래서 다들 감시하는 수가 많아도 그러려니 하는 듯했다.

그리고 이 간수로 이루어진 벽 안에 들어서서 보니, 밖에서 봤던 것만큼 리케도르안에게 위협적이지도 않고, 혹시나 짐승화되는 그를 생각하면 이 정도 인원이 괜찮은 것 같기도 했다.

“근데 목에 그건 뭐예요?”

나는 리케도르안의 목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그의 목에는 날 때부터 찼을 구속구 말고도 또 다른 족쇄 같은 것이 채워져 있었다. 목걸이처럼 생겼는데…… 대꾸해준 것은 옆에 있던 간수였다.

“마법 범죄자 전용 목걸이입니다. 혹시나 있을 발작이나 폭주에서 이렇게 잡아당기는 용이지요.”

철그럭.

간수가 붙잡고 있던 쇠사슬을 잡아당기자 리케도르안이 작게 큽, 하고 신음했다.

“아하.”

나는 팽팽하게 잡아당겨진 사슬을 자연스럽게 잡고, 방싯 웃었다.

“와, 그렇구나. 신기하네요.”

웃는 동안 다시 느슨해진 쇠사슬을 느꼈다. 리케도르안을 강제하는 취급이 보기 좋진 않았지만. 어쨌거나 여긴 감방이었다. 이런 식으로 깨달아서 기분이 별로였지만.

“폭주할 때 잡아당기면서 명령하면 자연스럽게 마법이 발동합니다.”

간수는 묻지도 않은 설명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오, 네네.”

하나도 궁금하지 않은데 말이지. 설명하는 간수는 이곳의 간수 중에서도 나이가 어린 편이었다. 아마도 내 또래? 자꾸만 볼을 미묘하게 붉히는 그의 말을 흘려들으며, 리케도르안을 관찰했다.

흘끔흘끔, 나를 바라보던 리케도르안은 어느새 정원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하늘도 땅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시선이 천진난만하기 짝이 없었다. 하기야 정말 처음이나 다름없겠지?

나비를 쫓는 아기를 보는 기분이 이러할까. 꽤 흐뭇하게 그를 바라볼 때였다.

“리케도르안?”

그 순간 굽혀진 그의 등을 보았다. 여느 때와 다르게 그가 짧게 진동했다. 나를 바라보며 겁먹고 파들파들 떠는 것과는 달랐다.

“아르르르…….”

이어 리케도르안의 입에서 익숙한 짐승의 언어가 나왔다.

나는 얼른 몸을 뒤로 물리고, 당황한 시선으로 그를 응시했다. 뭐야? 왜 몸을 떨지? 그동안은 전조 없이 바뀌지 않았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으르르.”

“발작이다!”

“폭주야! 검을 들어!”

간수들이 침착하게 검을 들었다. 베지는 않으려는 듯 검집에서 검을 꺼내지 않은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의 본질은 기사였기에 어색한 풍경은 아니었다.

“마법 범죄 죄수가 발작했다. 다들 자리에서 준비해! 아롭스!”

지휘관은 이곳에서 가장 연차가 오래된 간수인 안톤이었다. 모두가 그의 명에 따라 누군가 빠릿하게 대꾸했는데, 개중 아롭스라 불린 사람은 조금 전 으스대며 내게 구속용 목걸이를 설명했던 젊은 간수였다.

“목걸이를 발동시켜!”

“네! 정지하라!”

아롭스가 처음 듣는 언어를 외치며, 리케도르안의 목에 연결된 쇠사슬을 잡아당겼다.

“어. 이, 이게 왜 이러지?”

그러나 팽팽하게 잡아 당겨진 줄에서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 발동하는 건지 몰라도 나를 감싼 간수가 당황한 것이 느껴졌다.

“마, 마법이 발동하지 않습니다!”

“뭐?”

다른 이들이 달려들어 쇠사슬을 잡아당기며 단어를 외쳤지만 마찬가지였다. 그사이 다른 간수와 대치하고 있던 리케도르안이 팔을 휘둘렀다. 검이 순식간에 옆으로 날아갔다.

“으윽!”

“피해! 피하라고 했잖아!”

“대장님, 오른쪽입니다!”

……살벌하잖아.

간수 대부분이 땅에 드러눕는 데는 채 몇 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나마 버티는 이들은 푸른 깃을 단 간수들이었다.

하나 실력 좋은 이들마저도 겨우 수적 우세로 버티는 중이었다. 고작해야 열여섯 소년을 상대로.

“죄, 죄수들에게 가지 못하게 막아!”

“안 돼!”

우리 남주, 먼치킨이라더니. 무시무시하게 강하잖아?! 그사이 눈 먼 검을 피해 뒷걸음치던 나는 눈앞에 움직이는 쇠사슬을 보았다. 으르렁거리는 리케도르안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잽싸게 쇠사슬을 잡았다.

그 순간이었다.

나는 흰빛이 도는 쇠사슬을 멍하니 바라봤다. 이게 왜 색이 변했지? 얼떨떨해하기도 찰나 나를 보며 놀란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지휘관인 안톤이 외쳤다.

“이, 이아나. 얼른 시동어를 외쳐요!”

“네, 네? 뭐, 뭐라고요?”

“아무거나 좋습니다! 얼른!”

그러나 그와 동시에 리케도르안과 대치하던 그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리케도르안이 나를 응시했다. 와 잠깐만, 쟤 지금 날 본 거지? 오금이 저렸다. 지하에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살벌함의 크기가 달랐다.

대체 무엇 때문에 이리 난폭해진지 모르겠지만 책 속에서도 이런 ‘폭주’에 대한 서술이 있긴 했다. 심하면 짐승이었던 기억을 잃을 정도라고 했었나? 리케도르안이 발을 굴렀다.

“뭐든! 외, 외쳐요!”

지휘관 간수의 간절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리케도르안이 지척에 쇄도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 아, 앉아!”

쾅!

그 순간 주변이 고요해졌다.

……통한 거야?

나는 초점이 흐린 눈으로 쇠사슬과 바닥에 엎어진 리케도르안을 교차해 봤다.

아니 이게 뭐야!

“방심하면 안 됩니다! 계속 외쳐요!”

뭐를? 그러나 간수의 말처럼 거짓말같이 리케도르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별 타격이 없는 것처럼!

“어, 엎드려!”

쾅!

“굴러! 일어나! 앉아! 굴러!”

아니, 무슨 청기백기도 아니고! 하지만 이것저것 따질 처지가 아니었고 무아지경으로 외치다 정신을 차렸을 때, 주변은 초토화되고 조용해진 뒤였다. 파인 흙구덩이가 여기저기에 있었고, 주변 이들이 아연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시선을 주는 대신 천천히 아래를 내려다봤다.

“끼잉. 끼잉…….”

배를 내보인 남자주인공을 바라보며 천천히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게 대체 무슨 등신 같은 상황인 거죠?

조금 전 광기로 난폭해진 눈은 어디에도 없었다. 진정된 것인지 처음부터 정신은 있었던 것인지 몰라도 하나만은 분명했다. 나는 끙끙대며 달려오는 리케도르안에게 나지막하게 외쳤다.

“……앉아.”

착.

“…….”

나는 한 번 더 마른세수를 했다.

……남주님 당신 왜 사족 보행하는 건데. 아니, 언제부터 남자주인공이 걷는 것마저 개가 된 거였냐고. 그보다 이게 조련 가능한 거였냐고!

자괴감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내게 조련사의 재능이 있었다니……?

“이, 이아나. 마법사였습니까?”

아니요. 처음 듣는데요. 의도치 않은 재능의 깨달음에 황망하게 간수를 쳐다봤다. 간수들과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침묵만이 감도는 정원에서 서로 눈만 깜빡이며 입을 달싹이는데, 문득 시야로 아무도 없는 주변이 보였다.

텅 비었잖아?

정원에는 나와 간수들을 제외하면 다른 죄수들은 보이지 않았다. 발 빠르게 도피시킨 걸까?

‘아마도 그렇겠지.’

나는 끔뻑이던 눈을 돌리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리케도르안의 이 모습을 많은 사람들이 보지 않아서 다행이랄지. 곧 나는 얼굴을 문질렀다.

……다리로 머리 긁지 말아 줄래?

“그거, 누가 가르쳤니?”

“왕?”

아니다. 나는 무구한 푸른 눈을 보다가 끙 숨을 내쉬었다. 지금 꼬리만 없지 앉아 있는 꼬락서니가 영락없는 멍멍이인데. 지금의 너랑 무슨 말을 하겠니.

철그렁.

쇠사슬이 잡아당겨졌다. 리케도르안이 막 나에게 다가오려 하다가 쇠사슬에 붙잡혀 멈칫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여전히 새하얗게 변한 쇠사슬을 바라보며 복잡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으으으.”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느리게 입을 열었다.

“…앉아.”

착.

“일어나.”

벌떡.

아, 안 돼.

이건. 행동도 개잖아!

아니 대체 이건 뭔데. 무슨 상황인 건데. 언제부터 책 속 남자주인공이 개가 되었던 거지? 이건 단순히 왕왕, 짖는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지금까지 언어는 개의 말을 쓰더라도 손을 썼잖아. 음식도 손으로 먹었잖아!

나는 책 속 내용을 떠올렸지만 이런 게 있을 리가 없었다.

분명 책 속 리케도르안은 ‘짐승’이 되는 저주를 앓았다고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흉포해지고 인간의 수십 배 이상 힘이 세지는 정도였다. 쉽게 말해 미친 사람처럼 군다는 거지, 개보다는 광견병에 가깝다는 얘기다.

하지만 그 광견이 진짜 광견이란 얘기는 없었잖아요!

나도 모르게 힘이 풀려 쪼그려 앉았다.

철그렁.

쇠사슬의 소리가 들리더니, 낑낑대며 다가온 리케도르안이 곁눈질에 잡혔다.

“물지 마.”

“왕!”

리케도르안이 짖으며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안 문다는 것 같았지만. 내가 그걸 어떻게 믿어?

“물러나. 착하지? 이거 물고 있자.”

나는 어느새 능숙하게 머리끈을 꺼냈고,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입술에 물었다. 옆에 있던 간수가 호오, 하고 감탄했다. 누군가는 박수도 쳤다.

“놀랍습니다! 완벽하게 길들이셨군요!”

선생님, 박수 치지 마세요. 이게 칠 상황입니까? 지금 심경이 너무 복잡하니까.

……아니. 난 왜 익숙한 건데.

그도 그럴 것이 난 애견인도 아니었건만 어느새 푹신한 방울 달린 머리끈을 입에 물리고 쓰다듬어주기까지 한 뒤였다. 뒤늦게 황당함이 따라왔다. 나는 입술에 머리끈을 문 리케도르안을 바라보다가 슬그머니 손을 내밀었다.

“손.”

……갸웃.

“손은 안 되나? 설마 앞발……. 은 아니겠고.”

척.

“…….”

나는 인간의 길을 포기한 것 같은 남자주인공을 짜게 식은 눈으로 바라봤다. 왜 손보다 앞발로 알아듣는 건데.

한번 생각했던 것이지만 분명 리케도르안에게 빌어먹을 짐승의 언어를 가르친 미친놈이 존재하는 게 분명했다. 어쨌거나 그는 짐승이 되더라도 어느 정도 인간의 말을 함께 알아들었기에 상황은 이대로 일단락되는 듯했다.

“이아나. 총관리장을 봬야겠습니다.”

상황이 정돈됐다 싶을 때, 안톤이 다가와 말했다. 아무래도 지금 일어난 일은 그냥 넘어가기 어려운 일이겠지. 나는 쇠사슬에 한번 시선을 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지금 총관리장께서는 잠시 자리를 비우셨으니, 일단 방으로 돌아가시고, 관리장께서 돌아오시면 바로 뵐 수 있게 조치하겠습니다.”

“알았어요. 그런데 이제 리케, 아니. 이 죄수는 어떻게 되나요?”

나는 르나그를 한 번 더 본다는 사실이 조금 불편했지만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 그건 상관없는데 이제 리케도르안은 어찌 되나? 안톤은 어째서인지 잠시 미간을 찌푸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구속용 목걸이가 어째서 우리 외침에 반응하지 않았던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제가 붙잡아도 여전히 반응이 없는 것이 이상합니다.”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나요?”

“확실히 대마물용 구속구를 사용한 것이 처음이긴 하지만……. 이런 일은 들은 바 없습니다.”

말을 하며 간간이 간수들이 쇠사슬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하나둘씩 고개를 저었다. 내가 슬쩍 손을 떼면 금세 원래 검은색으로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보통은 누가 잡아도 흰색이 된단다. 나도 왜 이런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나저나 몸은 괜찮으십니까?”

“네? 아, 네. 긴장해서 힘이 빠지는 것 말고는 없는 것 같아요.”

혹시나 리케도르안이 다시 발작할지 몰라 쇠사슬은 꼬옥 쥐고 있었다. 근데 조금 전부터 묘하게 손끝이 떨렸다. 손에 힘을 준 탓인 것 같다. 거기다 왜 기력이 떨어지는 느낌일까? 크지는 않지만 조금 숨이 찬 기분이었다.

이어 힘이 빠지는 느낌에 나는 쇠사슬을 쥐었다가 놓았다.

‘좋지 않은데, 이거.’

스르륵. 비틀거리는 내 손을 간수 중 누군가가 잡아주었다.

“괜찮습니까?”

“아, 네…….”

막 간수에게 고맙다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바로 그때였다. 요란한 쇠사슬 소리가 들렸다. 나는 허리에 훅 감긴 단단한 것을 느끼고 멈칫했다. 이어서 귀로 색색 낯설고도 낮은 숨소리가 들렸다.

“리케도르안?”

어느새 일어나 나를 끌어안은 리케도르안이 간수를 향해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선명했다. 이건 또 뭐야. 허리에서 아릿한 고통이 올라왔다. 목을 간지럽히는 숨결에 심장이 뛰었다. 잠시 긴장했던 나는 눈을 깜빡이며 간수들에게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괜찮아요.”

긴장한 간수들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쉬이. 착하지.”

꿀꺽 침이 넘어갔다. 침착하자.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리케도르안의 얼굴로 가져갔다. 물면 어떡하지? 다행히도 그는 물지 않았다. 손바닥에 푹신한 감각이 느껴지고 그가 얼굴을 비볐다.

“자, 리케도르안.”

“아르르르?”

손바닥에 집중한 그의 팔이 잠시 느슨해졌다. 그 순간 온 힘을 줘서 그의 팔을 벗겨냈다.

“엎드려.”

쿵!

와, 오싹했다. 나는 쓰러진 그에게서 빠르게 돌아섰다. 그러고는 잊지 않고 입을 열었다.

“아, 앉아!”

쾅!

“누가 일어나래. 엎드려.”

“낑낑!”

순식간에 낑낑대는 그를 바라보며 살짝 들었던 긴장이 멀리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그것도 잠시, 새하얀 배를 드러낸 그를 보며 잠시 눈을 돌리긴 했지만.

……너 정말 멋없다.

그런데도 흐드러진 모습이 묘한 기분을 불러일으키다니. 역시 미모가 깡패인가 보다.

“후…….”

나는 쇠사슬을 쥐지 않은 손으로 허리를 쓰다듬었다. 조금 전 허리로 단단히 감겼던 그의 팔, 살갗으로 넘어온 단단한 감촉은 진짜였다. 꿀꺽 침이 넘어간다.

‘쓸데없이 몸만 좋아서는.’

상황이 마무리되자, 지켜보던 안톤이 얼른 입을 열었다.

“흠흠, 이아나. 일단은 이 죄수를 다시 방으로 돌려보낼 건데, 도와주시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도 이곳에서 이 구속구를 다룰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었다. 그들과 함께 가기로 했다.

그러나 안톤의 부탁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죄송하지만 한 가지 더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총관리장께서 오기까지는 며칠이 더 걸립니다.”

안톤이 뺨을 긁적이며 조심스레 말했다.

“앞으로 저 죄수의 산책에 의무적으로 동행해주실 수 있을까요?”

“네?”

“아, 저희도 다른 방법을 찾아보겠지만. 정 방법이 없다면 염치없이 이아나의 도움을 받고 싶습니다. 물론 여기 대해선 별도의 사례를 챙겨드리겠습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놀란 건 갑작스러운 제안때문이 아니었다.

……산책을 계속한다고? 얼떨떨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이해가 가질 않았다. 이 사달을 보고서?

“이걸 보고도 산책을 허락한다는 말인가요?”

내 입술에서 이 기분을 고스란히 담은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이 죄수의 산책은 총관리장께서 명하신 일입니다. 부재할 때 임의로 명을 변경할 권한이 저희에게는 없습니다.”

“아니, 그래도…….”

“물론 다른 죄수의 안전을 고려해 시간대는 교체할 예정입니다. 되도록 아무도 없는 시간에 홀로 하는 쪽으로 말입니다.”

설명에 따르면 이 감방은 군대와 다르지 않았다. 까라면 까야 한다는 소리다. 산을 파라면 파고, 바닷물을 퍼 올리라면 퍼 올려야 한다나. 마찬가지로 한 번 내려진 명은 마음대로 수정할 수 없다고 한다.

나는 어쩐지 짠한 마음으로 그들을 응시했다.

……개고생을 자처하시는구나.

잠시 뒤 그 개고생에 나도 동참해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황망해졌지만. 어쩌겠나, 르나그에게 산책을 부탁한 건 나였다. 일말의 책임감을 느끼고 동의했다.

허어, 어쩌다가 여기서 강아지 산책까지 가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결국 하루일과를 마무리하게 된 장소는 리케도르안의 감방이었다. 지하의 그의 방에 도착하자, 간수들이 그를 묶었다.

이어 간수들이 우르르 밖으로 나가고, 설명을 맡았던 고참 간수와 감시 담당인 한스만 남았다.

“저기, 목에 구속구 하나가 안 빠진 것 같은데.”

나는 내 목을 톡톡 두드렸다. 내 말처럼 리케도르안은 여전히 두 개의 구속구를 목에 차고 있었다.

“흠흠, 저 구속구는 총관리장께서 오실 때까지 묶어둘 생각입니다.”

안톤이 벽에 묶인 리케도르안을 흘끗 보고는 말했다.

“내일 다른 도구를 사용해보고 소용없을 시에 계속 저 도구를 쓰고 이아나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안톤은 내게 꾸벅 묵례했다.

“혹시 그렇게 된다면, 잘 부탁드립니다.”

덩치가 큰 그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방 안에는 나와 한스만 남았는데, 나는 한스에게 부탁해 잠깐 리케도르안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을 받았다.

“얼른 나와야 합니다, 이아나.”

한스마저 나가고 나는 홀로 남아 리케도르안을 응시했다. 아직 이성이 돌아오지 않은 그는 손목에 감긴 수갑을 당겨보거나 발의 족쇄를 탕탕 치는 둥 불만을 그대로 드러냈다.

이 지하로 돌아오면서 더욱 사나워진 시선이었다.

나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쪼그려 앉았다. 그를 보며 조금 전까지는 표현하지 못했던 진심이 툭 튀어 나갔다.

“미안해.”

이건 사과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의 산책을 부탁했을 때만 해도 이런 사건은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난 그저 네가, 평화롭게 산책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쉽게 여겼다. 르나그가 된다고 했으니 간수들이 어련히 알아서 관리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쇠사슬에 묶여서 하는 산책이 즐겁기는 했을까. 천진난만하게 하늘을 응시하던 그를 떠올리자,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괜한 걸 물었다. 손끝으로 그의 쇠사슬 끝을 툭 두드렸다.

“이런 걸 하고, 기분 좋을 리 없는데.”

수갑을 향해 으르르, 이를 드러내던 리케도르안이 어느새 울음을 멈추고 나를 응시했다.

“그래도 조금은 좋았니? 좋았으면 좋겠다.”

“…….”

바다같이 푸른 눈동자 속에 칼처럼 벼려진 사나움이 일렁거렸다. 바깥에서는 당황함에 미처 보지 못했지만, 역시 그의 눈동자는 인간답지 않은 거친 난폭함을 품었다. 내게 푸른색은 차분함의 색이었는데, 그의 눈은 꼭 새파란 불꽃 같다.

천천히 손을 뻗었다. 물릴까. 조금 무섭긴 해도 그보다는 왜인지 괜찮을 거라는 기분이 들었다.

예상대로 그의 뺨에 닿았을 때 그는 깨무는 대신 얌전히 뺨을 내주었다. 손바닥에 끝이 거친 은발이 비벼졌다. 내 손바닥에 마구 얼굴을 비비는 피부는 놀랍도록 부드러웠다.

와. 죄수 주제에 이렇게 피부가 좋다니. 반칙이야.

나도 모르게 엄지로 그의 뺨을 무아지경으로 쓸어볼 때였다. 리케도르안이 돌연 멈칫했다. 아니, 멈칫한 것보다는 굳은 것 같은데……. 내가 눈을 깜빡이는 찰나 동안 점차 그의 귀가 붉어지고, 열꽃이 핀 뺨을 발견했다. 목이 빨갛네.

“돌아왔구나?”

그런데 왜 도망가지 않았을까. 가벼운 의문을 가지며 엄지로 그의 귀를 살짝 문질렀다. 그가 읏,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났다. 짐승일 때도 느꼈지만 놀라운 속도였다. 그렇게 나쁜 사람 본 것처럼 갈 필요는 없잖아. 이번엔 내가 짓궂긴 했지만.

“왜, 왜, 아, 아직 안 가고 여기 있는 거예요?”

“얼른 갔으면 좋겠어요?”

나는 그의 목에서 채 벗지 못한 목걸이를 톡 건드렸다. 그의 눈이 잠시 흔들렸다.

“너무 놀라지 말아요. 무안하잖아. 내가 오늘 난동도 막아줬는데.”

물론 내 탓도 어느 정도 있지만. 그의 목을 바라보던 나는 살짝 찌푸렸다. 구속용 목걸이만 두 개라니 무겁기도 하겠다. 그의 목걸이에서 한참 눈을 떼지 못하는데, 몸이 당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시선을 내리자 리케도르안이 내 옷자락을 살짝 붙잡고 당기고 있었다.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내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요.”

나는 멈칫했다.

“기억해요?”

“대부분은요. 가, 가끔은 기억나지 않지만. 일부예요.”

짐승일 때의 기억을 대부분 가지고 있다니, 그건 흑역사일까. 하지만 생각해보면 아직 이 무구한 눈은 부끄러움도 모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쪽의 부끄러움은 아주 많은 것 같지만.

“……난 나가서 좋았어요.”

“앞으로도 나가고 싶어?”

끄덕.

작은 고갯짓에 턱을 괴던 나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는 본인이 짐승일 때 받았던 취급에 신경 쓰지 않은 것 같았다. 거기에 하나 더 늘어난 구속구에도 관심이 없고. 이건 그만큼 길들여졌다는 걸까.

그렇겠지. 이 소설은 쓸데없이 그의 구속과 불행에 세심했으니.

“실수한 게 아니라서 다행이네요.”

뭐. 그래도 앞으로 그의 소소한 행복에 일조했다면 다행 아닐까.

여주 언니가 나타날 때까지 적어도 4년 이상을 깜깜한 벽만 바라보는 건 너무하잖아. 나는 뺨을 잔뜩 물들이고 어떻게든 눈을 피하지 않으려 하는 그를 응시한 채 피식 웃었다.

귀엽긴 참 귀엽단 말이지. 이 사람이 언젠가 야릇하고도 퇴폐적인 남자주인공이 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뭐. 찬찬히 보면 지금도 싹이 살짝 보이긴 하지만. 문득 시선이 그의 해진 옷에 머물렀다.

“감기 걸리겠다.”

나는 얼른 담요를 잡고 그의 가슴에 덮어주었다. 음, 얼마 전에 가져온 건데 벌써 더러워졌다. 새로 가져올까 고민하는 사이 목까지 빨개진 그를 응시했다. 움찔, 움찔하는 모습에 손을 떼어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이 꼭 이 상스러운 사람! 하고 외치는 것 같았다. 왜 나는 담요를 덮어주고도 죄책감을 느껴야 하나요?

“흐음, 그렇게 싫어?”

감방은 쌀쌀했다. 특히나 그의 방은 지하 깊은 곳이라 더욱 추웠다. 보통보다는 튼튼한 몸인 것 같지만, 그래도 언제 감기에 걸릴지 모르는 일이잖아?

“…….”

“알았어. 다신 안 건드릴게.”

하지만 평안 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고, 움찔움찔하는 그를 구경하는 건 재밌지만 첫날처럼 울리는 건 별로다. 눈물로 가득해서 나를 바라보면……. 정말 이상한 것에 눈을 뜰 것 같단 말이지. 슬슬 한스가 정해준 시간도 다 된 듯하고.

나는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나도 피곤해서 별다른 인사 없이 등을 돌리려 했다.

그가 얼른 나를 붙잡지 않았다면.

“자, 자, 잠깐.”

리케도르안은 이게 붙잡은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옷의 끝자락만 붙들었다. 내가 붙잡힌 게 아니라 멈춰준 것에 가까울 정도로.

“왜?”

고개를 기울이자, 그는 머리를 숙여버렸다. 옷깃 뒤로 빨개진 등이 보였다. 와, 온몸이 빨개졌네. 한번 찔러보고 싶다는 충동을 꾹 참았다.

“허, 허락 없이 닿, 닿는 일은 무서우니까…….”

이윽고 그의 손이 꼼지락 움직여서 내 손가락, 손끝을 붙잡았다.

“조, 조금씩만.”

“조금씩만?”

“닿…….”

순간 짐승일 때의 그가 나를 껴안았던 조금 전이 떠올랐다.

체온이 뜨겁다. 사람이 아닌 형질을 함께 가져서인 걸까. 빨개진 얼굴도 손끝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꿀꺽 그의 목울대가 넘어간다.

“……이 정도는 ……괜찮아요.”

그의 고개가 슬그머니 올라가고, 물기 어린 그의 푸른 눈동자가 나를 향했을 때. 여기서 덮치면 몇 년 구형일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선생님. 이거 합법적인 유혹 아닌가요.

하지만 여기서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인지 정도는 하고 있었다. 쟤는 남자주인공이고 인생 가늘고 길게 사는 것이 최고다. 그것도 여기는 19금 피폐 소설이니 언제 집으로 돌아갈지 모르는데.

나는 손가락을 꼼지락 움직여서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떨어트렸다. 적어도 그가 뿌리쳐졌다고 생각하지는 않게. 아주 조심스럽게. 그러고는 그의 뺨을 톡 두드렸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알았어. 갈게.”

나는 뺨에 열꽃처럼 빨간 꽃이 피어난 그에게서 슬쩍 물러나 손을 흔들었다. 새삼 손을 흔드는 게 어색하게 느껴졌다. 늘 먼저 등을 돌렸으니.

“다음 산책에서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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