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87)

***

드디어 비가 그쳤다.

비가 그치고 본격적인 여름의 시작이었지만, 다행히도 이곳의 여름은 그리 덥지 않았다. 이 나라가 그런 것인지 이 지역이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더위도 추위도 좋아하지 않는지라 잘된 일이었다.

“오랜만의 산책이라니.”

비가 그치고 이틀 뒤. 간수들은 산책을 허가했다. 간만에 누리는 정원의 공기가 나쁘지 않았다.

“음, 공기 좋고.”

정원이라 해봐야 있느니 못한 꽃과 듬성듬성 자란 잔디가 전부이지만. 나를 포함한 죄수들은 여기에 만족했다.

더구나 비가 와서 내내 응접실에 갇혀 있었다면 더욱 반가울 거다. 비록 응접실 같은 곳은 화려하게 꾸며놓고 정원은 왜 이런 식인가 싶지만 정원까지 완벽하면 저택이지 감방인가.

“그러고 보니.”

리케도르안은 잘 지내고 있을까?

오빠가 편지를 보내지 못한 약 이 주일 동안 그를 보지 못했다. 거기에 편지가 오고 나서도 묘하게 몸이 찌뿌둥해서 찾아가지 못했고. 간수들의 시간표가 살짝 바뀌어서 한스의 차례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중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친숙한 한스가 좀 더 많은 것을 눈감아주니까 말이다.

“이것 봐, 땅이 금세 말랐어. 아이, 어떡해. 볕이 강하면 피부의 적인데!”

“샐리는 충분히 하얘요.”

나는 옆에서 함께 걷는 그녀에게 웃어주었다. ‘샐리’는 내 옆방 죄수였다.

“글쎄요. 이아나 만큼은 아닐걸요.”

그녀가 샐쭉 미소했다. 빨간 머리에 주근깨가 살짝 보이는 얼굴이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이런 날에는 자기 대신 날 집어넣은 남동생을 두드려 패고 싶어져요.”

“그럴 만해요.”

샐리의 남동생은 세금을 횡령했다. 하지만 가주인지라 감방에 갈 수 없어 혈육을 보냈는데, 그게 바로 누이인 샐리였다.

“돌아가면 그놈의 세 번째 다리를 영원히 구실 못하게 할까 봐요. 앞으로 차기 자작은 까짓거 내가 하죠.”

“……음. 샐리, 기사 출신 죄수들이랑 많이 친해졌나 봐요.”

그녀의 과격한 언사도 이해가 간다. 갑자기 사고 친 동생 덕분에 혼기가 꽉 찬 이 아가씨는 성을 바꾸는 대신 이름에 두 줄이 그어졌다. 그래서인지 분노가 장난 아니었다.

내가 슬금슬금 뒤로 피하려는데, 그녀가 내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이-아나. 그 보다 말이에요오.”

안 돼. 하소연은 안 돼. 당신 두 시간짜리잖아!

“어?”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그러지? 나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고, 이내 눈을 크게 떴다. 그곳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다.

“저거 간수들 아니에요?”

푸른 깃은 간수 중에서도 중급 기사를 상징했다. 감방의 특성상 산책 시 한 번에 여러 명의 죄수들이 뭉쳐 있지 못하게 했는데, 이는 탈옥 도모를 방지하고자 함이었다.

사실 잡범이나 억울하게 대신 잡혀 온 이들 겸 게으른 귀족의 특성상 성가신 탈옥을 생각하는 이는 거의 없지만. 아무튼 저렇게 사람이 몰려다니는 건 보기 드물단 얘기다. 나는 곧 뭉쳐진 사람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자그만 인영을 발견했다.

리케도르안이었다.

“어라, 저거 낯익은 천인데…….”

그는 내가 주었던 담요를 머리에 쓰고 꼬옥 붙들고 있었다. 마치 겁먹은 강아지처럼.

“산책하는 건가요?”

“그런 것 같은데요.”

나는 르나그의 실행력에 놀랐다.

비가 그치면 리케도르안이 산책할 수 있게 한다더니, 이렇게 바로 보내줄 줄은 몰랐다. 하지만 나는 곧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무리를 응시했다.

……아니. 저게 무슨 산책이야?

이 미친놈들, 하는 말이 절로 나왔다. 일단, 그가 짐승으로 날뛸 것을 대비해서인지 사람이 지나치게 많았다.

거기다 리케도르안을 우르르 에워싼 남자들은 하나같이 근육이 우락부락한 데다 험상궂은 사내들뿐이었다. 리케도르안도 열여섯치고는 범상치 않던 체격이건만 곱절은 작아 보일 정도였다.

“저건 산책이 아니라 딱 집단 린치 1분 전인데?”

나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그들을 쳐다봤다. 샐리의 말에 나는 얼른 끄덕였다. 린치란 말은 내가 알려준 것이기도 했다.

“동의해요.”

나는 르나그를 욕했다. 신경을 써주긴 뭘 써? 저러다 없던 폐소공포증도 생기겠다! 여기 오고 한 번도 밖에 나와 보지 않았을 텐데 첫 산책이 원숭이 산책하듯 구경거리가 된 꼴이라니. 아무리 저주를 고려했다지만……. 애 숨 막혀 죽겠다.

현재 모습을 보아선 르나그가 체이서의 명을 받아 리케도르안을 엿 먹이는 거라 봐도 이해할 것 같다. 더구나 저건 눈에 너무 띄었다.

좀처럼 마이웨이를 추구하던 죄수들조차 삼삼오오 모여 수군거리고 있었다. 이러한 탓에 나는 선뜻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는데, 차마 저 덩치들 사이를 뚫고 그에게 갈 자신이 없어서였다.

그가 짐승인지 이성이 있는 쪽인지 알 수 없어서 염려되기도 했고.

그렇게 그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때였다.

아. 눈 마주쳤다.

푸른 눈이 나를 담았다.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서 이 거리에서도 그의 눈이 흔들리는 것이 고스란히 보였다.

“이아나. 이아나. 저거 쇠사슬 아니야?”

“네. 그래 보여요.”

거기에다 움찔 떠는 모습까지. 저거, 짐승이 아니라 이성이 있는 쪽이구나.

“……완전 무장을 했네.”

자세히 보니 그는 목에는 구속구를, 팔목에는 수갑을, 발에는 철퇴가 매달린 족쇄를 차고 있었다. 철퇴는 옆에 선 간수가 들고 있었는데, 누가 봐도 산책이 아니라 운송이었다.

“방금 간수에게 물어봤더니, 저 사람 마법 범죄 죄수라던데?”

“아아.”

지켜보던 죄수들은 하나둘씩 납득하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내 팔을 흔들어보던 샐리도 내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다른 죄수에게로 홀랑 가버렸다.

그렇게 나는 홀로 남아 리케도르안을 바라보다 말고 걸음을 내디뎠다. 그에게 가까이 가볼 생각이었다.

홱!

이내 나는 눈을 크게 깜빡였다. 이게 뭐야. 리케도르안이 내게서 등을 휙 돌렸기 때문이었다.

“뭐야…….”

나는 멀어지는 리케도르안의 등을 황망히 응시했다.

“어어, 죄수! 이봐! 천천히…….”

빨라지는 그의 걸음을 따라 간수들의 걸음도 빨라졌다. 그들도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렇게 나는 발을 옮기자마자 얼른 도망가버린 리케도르안을 물끄러미 봐야만 했다. 황망했다.

“……왜 도망가는 건데?”

당황스럽던 기분이 물러간 자리로 괘씸함이 들었다. 너, 누가 그 산책 하게 해준 건데! 심지어 악당 조연까지 만나가면서 얻은 기회인데 말이다. 한편으로는 의문이 들었다.

왜 저러는 거지?

고개를 기울이며 찡그린 나는 곧 등을 돌렸다.

모르겠으면 물어보지 뭐.

“물어보러 왔어.”

나를 보자마자 동그랗게 변한 눈을 보며 머리를 기울였다. 나를 보는 푸른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 이성이 있는 쪽이네.

“네, 네, 네?”

“빨개지지 말고. 아직 아무것도 안 했잖아.”

그러자 그가 움찔했다.

“그, 그건 앞으로 할 거라는…….”

“뭘 해? 확 해버린다.”

“아, 으, 아, 안 돼요!”

……그러니까, 나 아무것도 안 했는데 왜 변태가 된 기분을 느껴야 하니? 나는 황당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그대로 쪼그려 앉았다.

“하아. 끄응. 힘들어…….”

사실 급하게 지하 감방으로 달려와서 숨이 찼다. 순간 확 달려가길래 아픈가 싶기도 했고. 문제가 생겼나 싶기도 했으니까.

만약 그런 거라면 산책을 주도한 사람으로서 죄책감이 들 것 같았다. 아무 일도 없어서 다행이지만.

“핫, 괘, 괜찮아요?”

‘일단 멀쩡해 보이네.’

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꼼꼼하게 훑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 머리로 올라왔을 때 조금 전보다 더 빨개진 얼굴이 나를 반겼다.

“대체 왜 날 보고 빨개지는 거야? 쳐다만 봐도 그래?”

변태 취급받더라도 이유는 알고 받자. 응?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저어. 눈이 마주치면…… 어, 아.”

“듣고 있어.”

“나랑 눈을 맞추던 사람이 없어서요…….”

나는 멈칫했다. 그러고는 천 속으로 숨어버린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빼꼼.

말이 없어서 궁금해진 건지 그가 눈만 꺼내어 나를 봤다.

“신기하고……. 궁금해요.”

당신이. 리케도르안이 입술을 오물오물 움직였다.

“궁금해해도, 되나요?”

그리 말하며 빠르게 다시 숨어버렸지만.

내가 준 손수건 아래에서 달싹거리는 붉은 입술을 본 순간 나는 얼른 시선을 돌렸다. 어라. 리케도르안은 피부색이 이렇게 하야면서 입술은 장미처럼 붉었다. 그리고 새빨개진 뺨도. 계속 보고 있으면 이상한 기분이 들 것 같다.

솔직히 나는 성인인 리케도르안의 외모가 취향이었지, 하얗고 여린 미소년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럼에도 숨을 삼키게 되는 건……. 끙. 전부 다 저 남주인공 얼굴이 인간의 미모 같지 않은 탓이야.

“그랬구나, 음. 아, 가봐야겠다. 궁금해서 급하게 나온 거거든.”

담요에 감싸인 그의 어깨가 움찔 떨린 것도 같았지만, 그보다 먼저 상체를 세웠다. 그렇게 돌아서려는데 턱, 발걸음에 턱이 걸렸다.

나는 그의 손가락을 얼떨떨하게 바라봤다. 살짝. 그는 개미가 다섯 걸음쯤 걸었을까 싶을 정도로 아주 작은 면적만을 잡고 나를 올려다봤다.

“가요?”

사실 정말로 급하게 온 거라 한스에게도 어렵사리 부탁한 자리였다. 내가 끄덕이자 그가 더욱 고개를 들었다.

“있, 잖아요.”

더욱 붉어진 얼굴 사이로 새파란 눈이 드러났다. 한들한들 흔들리는 은색 머리칼도.

“왜…….”

물기 어린 눈이 나를 향했다. 이 순간 맹목적이다 싶을 정도로 나만을.

“……안 왔어요?”

침을 꼴깍 삼켰다.

“어, 언제 말이야?”

“그동안, 내 방에요…….”

잠시만, 잠시만. 내 방이라니요. 당신, 왜 오해하기 쉬운 단어를 쓰세요? 그는 눈꼬리에 그렁그렁 눈물을 매달고 눈을 깜빡였다. 어라. 어라라라. 잠깐. 잠깐만.

“……기다렸는데.”

여기서 덮치면 감방 가는 걸까? 그러나 나는 금방 이성을 되찾았다. 이어서 자기 눈을 비비며 눈물을 쏟아낸 리케도르안을 본 순간 되찾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니, 어째서 우는 건데?

도무지 남자주인공의 감정변화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슬그머니 내가 메마른 건가 고민도 해봤지만…… 아니야. 난 아직 플란다스의 개를 떠올리고서도 슬퍼할 수 있다고. 하필이면 왜 개를 떠올린 건지 모르겠지만.

리케도르안이 붉어진 제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철그렁. 쇠사슬의 소리가 요란했다.

“……우리 마지막이에요?”

그 말에 나는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눈물을 뚝뚝 흘리는 그 앞에 다시 쪼그려 앉았다.

“저기,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북도 치고 장구도 치고. 소고도 치겠네. 사실 조금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기분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니까 평생 정 한번 못 받아보다가 처음 느껴봤다, 이거잖아? 고작 한 달짜리 정에 눈물을 뚝뚝 흘리는 그를 보고 있으려니 기분이 묘해졌다.

이런다고 내가 여주인공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여주인공 언니가 해줄 일은 그의 삶 통째로 구원하는 일이니까. 아마 길어야 몇 달짜리 정 따윈 한 번에 잊고 말 거다.

그렇기에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산책, 별로였어?”

“산책?”

나는 그의 눈물을 살짝 훔치며 씩 웃었다.

“그거 내가 부탁한 건데.”

물기 어린 그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나는 흔들리는 푸른 눈동자를 즐겁게 바라보며 웃었다. 난 아무 능력 없다. 저 구속구를 건드려본들 풀리지 않을 거고 장미 문양을 멈추지도 못할 테니 안심이지. 이렇게 미모만 감상할 수 있으니까.

“고맙지?”

나는 그리 말하다 말고 멈칫했다. 잠깐만. 아니, 무릎걸음으로 걸어오지 마.

“……당신이요?”

“혹시 정말이냐고 묻는 거면 맞아. 시선 말고 사람의 말로 해줄래?”

“바, 바깥.”

“응. 바깥. 좋지?”

끄덕.

나는 보일 듯 말 듯 끄덕이는 그의 모습을 뿌듯하게 응시했다. 그래 내가 바라던 건 이런 거다. 어차피 스쳐 지나갈 인연, 나도 소소하게 행복해 보고 그도 이런저런 경험들을 해보고 윈윈 아닐까?

사실 19금 소설이라 보통의 소설보다 짧았기에 리케도르안의 이야기는 여주인공과 뜨거운 밤에 맞춰져 있었다. 사랑도 좋지만 좀 더 소소한 행복들도 누려도 됐을 텐데 19금 소설이 그렇지 뭐. 나도 감방에 갇힌 그를 보고서야 이런 생각이 들었으니까.

“다음엔 같이 산책하자.”

이렇게 말하고 보니 꼭 그 산책이 애완견 산책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왤까. 아마 일어난 채로 무릎 꿇고 있는 얘를 보고 있어서인 것 같다.

흔들리던 그의 시선이 차차 진정되며 나를 향했다. 그는 내가 바라보는 것만으로 목이 발긋 물들었다. 혀로 입술을 적시기도 했다. 나도 모르게 시선이 분홍빛 혀끝에 머물렀다.

“다, 당신, 뭐라고 불러요?”

“나? 으음……. 산책하게 해줬으니까…… 주인님?”

“벼, 벼, 변!”

“농담에 펄쩍 뛰지 마.”

놀랐잖아. 나는 그의 손을 흘끗 바라보며, 손등을 콕 찍었다.

“근데 나 언제 보내줄 거야?”

그의 손은 아직도 내 옷자락을 잡고 있었다.

“계속 잡고 있으면 방에 못 가는데. 몹쓸 사람이네.”

손가락으로 그의 손등을 간지럽힌다. 그러고는 도드라진 손등뼈를 음미한 듯 미끄러져 내렸다.

“아, 아,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이렇게 잡아놓은 건 넌데?”

“읏. 소, 소, 손은 대지 말고.”

“뭐야. 너만 만질 수 있다는 거야?”

슬쩍 손끝으로 손끝을 톡 건드리자, 리케도르안이 화들짝 놀랐다.

“……그, 그게 아니라.”

계속 보니 귀엽기도 하고. 자꾸 세상 처음 나간 아기 고양이처럼 구니 괜히 한번 건드려보고 싶은 거다. 나는 나를 놓은 손을 한번 바라보다가 손등으로 입술을 가렸다.

“불공평해. 간다.”

이렇게 소리 내어 웃고는 고개만 돌렸다.

“다음엔 산책할 때 도망가지 말고요.”

“아르르르?”

……언제 개가 되었니? 어처구니가 없어, 그를 보다 웃어버렸다.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절묘한 타이밍에 짐승이 되나 싶었다.

어느새 어쩔 줄 모르던 얼굴에서 홍조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드러난 사나운 눈동자를 바라보며 얼른 뒤로 물러났다. 그러고는 눈을 가늘게 좁히며 그를 쳐다봤다.

“듣기 싫은 말은 안 듣는다, 이건가.”

“왕왕?”

……편할 때만 개소리를 하고 말이야. 홧김에 같이 짖으려던 나는 마음을 고쳐먹고 등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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