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87)

***

“아, 과자 부스러기.”

쿠키를 건네줄 때 부서진 과자 부스러기가 손바닥에 묻어 있었다. 나는 그가 정신없이 내 손바닥을 탐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이유를 아니까 산통이 와장창 깨져서 좋기는 한데.

할짝. 할짝.

나는 얼떨떨하게 그를 응시했다. 나도 모르게 들숨을 삼켰다.

…혀를 내민 모습이 너무 외설적인데 어쩌지.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를 붙잡은 힘이 어찌나 강한지 꼼짝도 못 해서였다. 그저 내가 씌워준 숄을 머리에 얹은 채, 하염없이 손가락과 손바닥을 오가는 얼굴을 보았다.

어라, 이 남자가 점점 얼굴 쪽으로 다가오는 것 같은데…….

“잠깐. 잠깐만…… 읏.”

그의 무릎에 올려진 담요가 떨어지며 웅덩이에 폭삭 젖었다. 젖어가는 끝을 바라보던 나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가까워지는 거리에 긴장하는 순간, 소년이 멈칫했다.

“아…….”

화들짝 놀란 리케도르안이 그대로 손을 떼어냈다. 하필 떼어낸다는 게 거의 던지다시피 한 거였지만 말이다.

“아야…….”

덕분에 흙바닥에 철퍽 주저앉아 진흙의 촉촉함을 고스란히 느꼈다.

“오, 왜, 왜왜왜, 다, 당, 당신이! 내, 내 손을, 어, 얼굴을!”

“뭐? 허, 이 무슨. 말은 바로 하자. 손을 핥은 건 너라고.”

“하, 하, 핥, 핥!”

“응. 핥았어.”

내팽개쳐진 나는 그가 나를 가해자로 만들기 전에 얼른 덧붙였다.

차르르륵.

그 어느 때보다 요란한 쇠사슬의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자 벽에 등을 붙인 그가 내 숄로 가슴을 가린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쇠사슬. 쌕쌕, 숨소리. 눈꼬리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아니 왜 내가 가해자가 된 기분이 드는 건데?

“이, 이, 일어나니, 당신이…….”

“아, 기억은 있는 거야?”

난 그저 한마디 했을 뿐인데.

화아아악!

팔까지 빨개진 사람은 처음 봤다. 마치 붉은 꽃밭을 보는 것 같았다. 숄 사이로 드러난 목부터 귓불, 팔, 손등까지 빨개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처, 처음.”

“처음이란 소리 그만하자.”

질리지도 않니?

“쿠, 쿠키 맛있었는데, 왜, 왜, 당신 손이…….”

“무슨 말……. 아하, 내 손이 쿠키로 보였다고? 당신 이성이 날아가면 딱 그 정도 생각만 하나 보네.”

이건 좀 흥미롭다. 나는 손바닥을 꽃받침 하듯 가져다 대고 그를 관찰했다. 옷이 바래긴 해도 새하얘서 붉음이 더욱 도드라진다.

“전부 기억해?”

끄덕.

눈이 마주치자 더더욱 빨개지는 모습이 귀엽다고 할지. 누가 봐도 이건 내가 가해자가 된 기분인데 말이다. 억울했다.

“그럼 불가항력인 것도 알겠네.”

나는 죄 없다? 쿠키 준 것밖에 없다고.

“하, 하지만…….”

그가 손등으로 얼굴을 가린 채로 더듬더듬 말했다.

“정말 처, 처, 처음…….”

“떽.”

……내 손바닥의 순결은 생각 안 해주는 거니?

여기서 나도 처음이라고 해봐야 상황을 악화시킬 것 같다. 현명하게 입을 꾹 다문 나는 그대로 일어났다. 이젠 정말로 시간이 없었다.

이쪽은 시간이 지나면 진정하겠지, 뭐.

흘끗 보자, 그는 내가 준 숄에 얼굴을 묻으며 온몸으로 난감함을 표현하고 있다. 쇠사슬이 얼굴을 마구 가리려는 손에 끊어질 것 같이 당겨졌다.

이쪽도 힘이 강한 건가.

그렁그렁 눈꼬리에 맺힌 눈물이 금방이라도 뚝 떨어질 것 같았는데. 귀여웠다. 아니, 뭐 피폐 19금 소설 남자주인공이 뭐 이래?

나는 황당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숄 때문에 남자주인공의 눈이 안 보인다. 저렇게 얼굴을 묻은 채로 안 보여주려나 보다. 나는 진흙을 대충 털어내고 등을 돌리려 했다.

다음엔 꼭 안전거리 확보하자. 다짐하면서.

“다, 다, 당…….”

나는 고개를 돌렸다. 천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리케도르안의 얼굴이 보였다. 이내 거북이처럼 잠시 숨었다가 드러난다. 여전히 뺨이 붉다.

“……이름이 뭐예요?”

붉어진 얼굴에서 오직 그의 눈만이 새파랬다.

깊은 새벽하늘에 뜬 새벽별처럼 혹은 보석인가 싶을 정도로 영롱했다. 눈은 이성이 있는 쪽이 더 예쁘구나.

“이아나.”

이제야 궁금한 걸까. 벌써 양 손에 꼽는 방문인데 말이지. 나는 방싯 웃고는 등을 돌렸다.

또 봐요. 저 세상 숙맥 씨.

램프가 멀어지며 그의 붉음도 차츰 멀어졌다.

***

비는 한동안 계속 내렸다.

주룩주룩. 때로는 세차게 쏴아아. 빗소리를 언제나 들을 수 있었는데, 여름인 데다 우기이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처음엔 지금이 여름인 줄도 몰랐지만. 다행인 것은 이 감방이 계절에 비해 비교적 서늘하다는 거다. 적어도 덥지는 않다. 간수들 말로는 무슨 처리를 했다고 하는데 자세히는 알려주지 않더라.

하기야 죄수한테 건축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려주겠어.

“탈옥할지도 모르는데.”

물론 난 탈옥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지만.

내가 이렇게 여유로운 건 전부 내 죄질이 가벼워 오래지 않아 나갈 수 있다는 점에 있다.

그래서 남주님과 시시덕거려도 정이 쌓일까 걱정이 없는 거지. 오래 지나지 않아 난 나갈 테고 약간이라도 정이 쌓인 시간보다 더 긴 시간이 흐르고 여주인공이 등장할 테니까.

착하고 멋진 여주인공 언니가 해방을 하사하시니 얄팍한 정쯤은 한방에 해결해주실 거라고. 하지만 기우도 걱정이라고, 한동안 리케도르안에게 가는 건 잠시 관두기로 했다.

비가 계속 내리기도 했고, 자꾸 어디로 사라지냐고 꼬치꼬치 캐묻는 남작 아저씨가 조금 귀찮기도 했다.

무엇보다 큰 이유가 있긴 했지만……. 일단은 그날 안전거리를 확보하지 못한 나를 반성하자는 의미에서다.

어쨌거나 리케도르안은 저주에 걸려서 반쯤 짐승인 사람인데, 그동안은 강아지처럼 왕! 왕! 짖는 것만 보다 방심했다.

잡혔던 순간만 생각하면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날은 잘 빠져나와서 다행이었지 사실 언제 다칠지 모를 상황이었다. 책 속에서 철창도 찢던 그의 무위를 떠올리면 어린 시절이라고 해서 무시해선 안 될 거니까.

안전 이즈 베스트다.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왜 안 오지?”

더는 한스에게 건네줄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텅 빈 탁자 위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오빠의 편지가 늦다. 내게 담배나 술 등을 전달해주는 편지는 빠르면 2일 늦어도 5일에 한 번씩은 꼭 오곤 했다.

그러나 벌써 일주일하고도 5일째 편지가 오지 않았다. 보통 3통 이상은 쌓일 시간인데 말이다.

“흐응, 무슨 일 있나?”

애초에 편지에 많은 양을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가지고 있던 것도 금방 동났다. 덕분에 한스나 간수들에게 슬쩍 찔러 넣을 물건이 없어진 나는 자연히 자유를 잃고 응접실에서 머물게 됐다.

사실 나처럼 죄질이 가벼운 죄수들의 방은 평범한 크기 정도였다. 이 정도면 보통 귀족의 방의 5분의 1쯤 되는 크기라고 했나. 저택에서 살아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살 만한 방이었다. 방 안엔 침대와 카펫 책상 정도가 있었는데, 위치에 따라 작게 창도 나 있다. 나는 책상을 톡 두드렸다.

“이상하긴 한데.”

아무튼 ‘오빠’에게서 오는 편지는 늘 응접실에 다녀올쯤 책상 위나, 방문 밑으로 넣어주곤 했는데……. 감감무소식이다.

왜 안 오지. 이제 귀찮아진 건가?

텅 빈 책상을 떠올리며 반대쪽으로 고개를 기울일 때였다.

“무슨 고민에 빠져 계신가, 아가씨?”

“아, 아저씨.”

맞은편 탁자 끝을 톡톡, 두드린 사람은 남작 아저씨였다. 그는 자연스럽게 내 맞은편에 앉고, 턱을 괬다. 다리도 꼬았는데, 양복도 아니고 줄무늬 옷을 입고 이렇게 나오니 참 멋이 없다.

“깊은 고민에 빠진 얼굴인데 그래?”

“오. 제대로 보셨네요. 오늘 저녁은 뭘까 고민 중이었는데.”

“오호, 그런 거라면 내가 간단히 해결해줄 수 있지. 싸구려는 아니지만 고급도 아닌 칠면조 아니겠나? 아, 어린 양고기 스테이크가 그리워질 지경이야.”

남작 아저씨가 고오오급 스테이크가 먹고 싶다며 울상을 지었다. 나는 재미 삼아 고오오급, 하고 그를 흉내 냈다.

“죄수가 고오급을 찾는 것도 웃기잖아요.”

나는 일부러 느릿하게 말하고는 방싯 웃었다. 여기서 나오는 칠면조 겁나게 맛있던데. 이처럼 가끔 여기 죄수들의 마인드가 어려울 때가 있다.

내가 날 때부터 귀족이 아니라서인가 보다.

“뭐 또 재미난 얘기를 하러 오셨어요? 해주면 좋고.”

“하하, 이 늙은이가 아가씨에게 좋은 이야기꾼이라니 즐거운 일이로군. 뭐, 나도 너와 이야기하는 게 취미에 가까우니 말이야. 아, 안드레아 백작 부인 얘기는 들었나?”

남작 아저씨는 감방 내에서 발이 넓었다. 인맥이 귀족의 기본 덕목이라 외치지만 다음 사기 상대를 찾는 거다. 그래서인지 감방 안팎 소식에 매우 밝았다.

“얼마 전에 히스테리로 기절한 부인 말하는 거죠? 간수한테 들었어요. 옆옆 방이거든요.”

죄수 중에는 본인이 죄수임을 인정 못 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이야기 속 백작 부인이 바로 그런 유형이었다.

“나흘 전인가 비명소리에 잠에서 깼었어요.”

그녀는 밤마다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곤 했는데, 자신이 죄수가 된 것을 인정하지 못해서였다. 얼마 전 밤에도 커다란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었지.

“그래. 그 히스테리가 말이야. 사실 단순한 게 아니었다는 것이지. 안드레아 백작가가 망해버렸거든. 아주 폭삭.”

“엥. 하루아침에 멀쩡한 백작가가 망해요?”

그게 가능한가? 나는 쿠키를 집어 먹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쿠키 하니 괜한 것이 생각나 버렸지만. 미소년이 손바닥을 핥던 게 생각날 게 뭐람.

“물론 있을 수 없는 일이긴 하다만, 하지만 흑장미라면 이런 게 가능하지.”

“도뮬릿이요?”

걔가 왜 여기서 나와?

“설마 그 사람들이?”

“그래. 체이서 루브 도뮬릿. 차기 흑장미 가주가 아주 커다란 건을 터트렸다지 뭐냐.”

아. 하기야 걔들은 악당 가문이니 가능한 일인가.

“그런데 문제는 안드레아 백작이 헤르님 대공의 오른팔이나 마찬가지였다는 거지.”

“세상에, 헤르님이면 붉은 장미 말인가요?”

“그래. 그 헤르님!”

리케도르안이 있는 헤르님 대공가와 도뮬릿은 철천지원수지간에 가까웠다. 그것도 역사가 아주 깊은 사이랬나.

붉은 장미와 흑장미.

가문의 상징에서 알 수 있듯 완전히 대조되는 색에서부터 그들의 대칭적인 성향을 알 수 있다.

뭐 한쪽은 주인공이고 다른 한쪽은 악당 겸 서브남이니, 대립이 당연하겠지만 가문에서부터 뿌리 깊은 증오가 삼각관계에서 정점을 맞이했다… 이런 설정이었지. 사실 대공가에서 버림받은 리케도르안은 도뮬릿에 관해 별생각이 없었으나, 그것은 처음에만 그랬을 뿐 그에게도 부친으로부터 세뇌받은 증오가 심어져 있었다.

흑장미를 미워하고 증오하라는 생각 말이다.

선량한 남자주인공은 이를 거부하려 하지만 후에 그마저도 못하게 된다. 나중에 체이서가 그의 친부이며 심복이며 친우를 죄다 죽여 버리니 말이다. 자업자득이다.

우습게도 리케도르안은 제 아버지인 대공을 증오하는 한편 애정을 품었다. 그래서 대공을 죽인 체이서를 미워하고 증오했다. 충분히 이해가 갈 분노이긴 하다.

관계 한번 엉망으로 만들어보겠다는 작가의 의지가 느껴졌었지. 19금 소설이라 해도 꽤 질척했단 말이다.

“체이서 루브 도뮬릿은 아주 영리한 청년이지. 그런데 이번만은 잘못 건드렸어. 아직 정정한 헤르님 대공이 기사단을 출동시켜 증거를 잡아냈거든.”

“그거 큰일이네요. 그래서요?”

“큰일이지. 지금 체이서는 실종 상태라더군.”

걔가? 그럴 리가 없는데. 다른 곳에서 엄한 악당의 계획을 펼치는 거라면 모를까. 곰곰이 책 속 내용을 떠올리던 나는 체이서가 리케도르안의 아버지, 헤르님 대공을 죽인다는 사실을 생각했다.

혹시 그게 이 시기인가? 아닌데. 대화로만 휙 지나가서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 악당이 잡히거나 다칠 일은 없을 테니. 그저 나와는 먼일이겠거니 했다.

“현재 헤르님 대공이 눈이 빠져라 체이서 도뮬릿을 찾고 있다는데 어찌 될지 모를 일이지. 일단 당장은 몸을 사릴 필요가 있을 테니 말이야.”

나는 남은 쿠키 조각을 입에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아저씨는 어쩜 그리 잘 알아요?”

“오, 작업 밑천이지.”

아하. 정보도 사기 밑천이라. 아주 바람직한 사기꾼의 자세다. 덕분에 나도 여기서 심심치 않았지만.

사실 헤르님이나 도뮬릿이나 주연들의 가문이니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출소하면 얘네랑 아주 멀리 떨어져서 살아야지, 하는 마음이랄까?

“그래서 아가씨의 고민은 뭐였나? 이 정보랑 교환할 가치가 있나?”

“장난도 참. 뭐 별건 아니었어요. 그냥……. 오빠에게서 편지가 안 와서요. 이럴 사람이 아닌데 말이에요.”

참 성실히도 편지를 보내던 사람이었는데 말이지.

“꼬박꼬박 편지를 보낸다던 오빠 말인가? 흠…… 급한 일이라도 생긴 모양이지. 너무 염려하진 말게.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아. 장담하지.”

“고마워요.”

나도 그러길 바란다며 씩 웃어 보였다. 조금 염려되긴 하지만 감방 안에서 뭘 할 수 있겠어. 그냥 기다려야지.

삼십 분 뒤. 응접실에서 자유시간이 끝나고 나는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여전히 텅 빈 책상을 바라보다 아직도 편지가 오지 않았구나, 확인했다. 조금 우울해졌다.

노 자본 인생은 곤란한데.

“……출소했더니 버려진 거였다. 이런 거만 아니면 좋겠는데.”

나 오빠와 아빠의 죄를 대신해 여기 온 거라며. 눈을 감고 그대로 침대에 몸을 묻었다. 여기에도 침대가 있어서 다행이다.

내 장점은 낙관적인 성격, 단점은 낙관이 지나쳐 지나치게 무심하다는 것이었다. 고민을 길게 하지 않았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스르륵 잠에 빠져들었다.

***

며칠 뒤 세차게 내리던 비가 부슬비로 바뀌던 날이었다.

“조금 있으면 비가 완전히 그치겠네요.”

“네. 그러네요.”

간수도 이리 생각했는지 날이 개면 산책을 할 수 있겠다고 말했다. 응접실도 슬슬 지긋하던 차였는데, 잘됐다. 그렇게 생각하며 응접실 소파에 앉는데, 누군가 맞은편에 앉았다. 남작 아저씨였다.

상기된 얼굴이 어쩐지 잔뜩 흥미로 부푼 모습인 것 같다. 흐음. 자기 사기 업적을 자랑할 때 저런 얼굴이었는데.

“이아나, 들었나? 아니. 들었을 리 없지!”

나는 피식 웃었다.

“그럼요. 들었을 리가 없죠. 뭔데요? 빨리 말해주세요. 신나셨잖아요?”

“흠흠, 티 났나?”

아주 많이. 말하고 싶어 근질근질한 얼굴인데요. 나는 고개를 까딱였다.

“글쎄, 헤르님 대공이 크게 부상을 입었다고 하는구먼! 그런데 동시에……. 안드레아 백작 가를 폭삭 망하게 한 ‘진범’이 붙잡혔다 하지 뭔가.”

그 순간 나는 조각나 있던 원작의 실마리를 잡았다.

“세상에나. 진범은 체이서 도뮬릿이 아니었던 모양이야? ……아니면, 그가 적절하게 ‘진범’을 꾸렸거나 말일세.”

아. 맞다. 체이서가 리케도르안의 아버지를 죽일 때 일단 크게 한 방 먹이고, 다음에 부상으로 골골대는 대공을 보내버렸다고 했나, 그랬던 것 같은데. 이게 그건가 보네. 머릿속에서 대화로만 살살 지나가던 이야기가 맞춰졌다.

“실종되었던 체이서 루브 도뮬릿도 돌아온 모양이야. 참 수완 좋은 청년이지. 어떻게 성장할지 무서워.”

남작 아저씨가 무서운 사람은 무서운 사람끼리 놀아야 된다고, 열심히 역설하고 나는 그 말이 맞다고 끄덕였다.

“정말 꼭 한번 만나보고 싶은 청년이라니까! 한편으로는 만나보고 싶지 않기도 하고……. 끄응, 양가적인 마음일세.”

이 아저씨가 체이서를 상대로 괜한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할 텐데. 악당 성격에 그에게 사기 치다간 손목이 나가는 걸로 끝나지 않을 테니 말이다.

하기야 설마 도뮬릿을 건드리겠어. 듣자 하니 도뮬릿은 원작 시작 전에도 이미 악명이 자자한 곳이었다.

“뭐. 아저씨나 제가 그 사람을 볼 일이 있겠어요.”

나는 부슬비가 내리는 창문을 바라보며 가볍게 말했다.

“왜, 모르지. 한 치 앞도 모르는 것이 세상일이라고. 사람 연이란 어찌 될지 모르는 것 아니겠나?”

“연은 무슨요.”

듣자 하니 만나면 뼈도 못 추릴 것 같은데. 무시무시한 가문이랑은 엮이고 싶지 않은데요.

어라. 곧 비가 그칠 것 같다. 땅이 마르고 나면 산책을 갈 수 있으려나…….

“비가 그치겠군.”

“그러게요.”

우린 그 후로도 이전처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그날 자유시간이 끝나고, 방으로 돌아가자, 마침 방 앞을 지키고 있던 간수가 싱글 웃었다.

“오랜만에 편지가 왔네요. 이아나.”

나는 간수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의 말처럼 책상 위에 봉투가 있었다.

“문 잠급니다.”

“아, 네!”

끼익. 문이 닫히는 것을 배경 삼아 얼른 편지를 들어 올렸다.

이야. 이게 이렇게 반갑게 느껴지다니. 편지는 언제나처럼 텅 빈 종이와 함께였다. 공백이 없었던 일인 것처럼 자연스럽다.

나는 깃펜을 꺼내려다 말고, 또 한 장의 편지를 발견했다.

뭐지? 항상 봉투와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빈 낱장뿐이었는데?

「잘 지내? 내 사랑스러운 여동생.」

아주 단정한 글씨였다. 글씨만 보고도 아, 이 사람 한 정갈한 미모 할 것 같다, 엉뚱한 생각이 들 정도로.

편지를 보던 나는 얼른 답장을 썼다.

「난 잘 지내.」

음, 부족한데. 아! 고민하던 나는 다른 편지를 채웠다.

「술. 고급담배. 요망. 아주, 아주 많이!」

이제 부족할 일 없겠지?

아. 뿌듯하다.

2장. 나한테 왜 그러세요?

감방에 살면서 좋은 건 옷이 참 편하다는 점이다. 활동하기 편한 데다가 갈아입을 필요가 없다는 장점이 있으니 좋은 것 같다.더구나 똑같은 옷을 몇 벌이나 더 준다. 원하는 만큼 주던데, 다들 못생겼다고 싫어하지만 난 좋아한다.

반면 안 좋은 점은 다 같이 칙칙한 줄무늬 옷을 입은 건 조금 그렇단 거다.

<촌스러워! 촌스럽다고!>

<사교계를 주름잡던 내가 어째서 이런……!>

이 패션은 귀족 죄수들 사이에서도 원성이 자자했다. 하기야 귀족들 눈에 수면 바지 핏이 예뻐 보일 리가 없지. 보통 로판 소설에 빙의하면 드레스라거나 레이스가 층층이 달린 원피스를 상상하곤 하는데 여러모로 특이한 체험을 하는 것 같다.

출소하면 덜 하려나?

흐음. 밖으로 나간 뒤에 생활은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죄수복의 이미지가 워낙 강해야 말이지. 눈 떠보니 낯선 방이지, 감방이라 하지. 조금 현실감이 없었다. 지금도 그냥 될 대로 살아보자 싶은 마음이 더 크다. 물론 이곳 생활이 지루해서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나는 장담할 수 있다.

지금만은 모든 지루함이 날아갔다고 말이다.

“드시지 않습니까?”

눈앞에서 르나그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나는 눈을 도로록 굴리다가 끄덕였다. 내 웃음이 어색하지 않길 바라면서.

“……마……셔야죠. 잘 마실게요. 감사합니다.”

호로록. 마시는데, 아, 혀 데였다. 혀를 살짝 깨물었다가 찔끔한 눈물을 닦아낸다. 그러다 말고 나는 그대로 멈칫했다.

르나그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매는 뱀처럼 길쭉했다. 그렇다고 비열해 보이는 상은 아니고 아주 차갑고 칼 같은 사람처럼 보인다고 할까. 코에 걸친 안경이 더욱 시린 이미지로 보이게 했다.

그러나 역시, 모든 것을 덮을 정도로 잘생겼다.

내가 왜 이 악당 조연과 차를 한잔 하고 있느냐……. 나도 잘 모르겠다. 분명 간수관리장을 만나고 싶다고 했는데 그가 반겨주었으니까.

<어서 오십시오.>

십 분 전, 면담을 요청했던 간수관리장이 부른다는 말에 왔더니, 이런 호러블한 만남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참에 이직을 한 건 아닐 거고. 왜 하위 직급 흉내를 해가면서 나를 보는 건지 모르겠다. 대체 내게 무슨 말을 하려나 싶었지만, 의외로 그는 말이 없었다. 무려 십 분간이나!

대신에 나를 뚫어지게 보았는데, 이게 매우 부담스러워서 그렇지 덕분에 내게도 그를 관찰할 기회가 생겼다.

나는 흘끗 곁눈질했다.

“저어…….”

긴 갈색 머리칼을 단정하게 내린 머리칼, 안경 아래 지적인 금색 눈동자. 모두 바늘 하나도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인상과 잘 어우러졌다. 그에 비해 몸이 단단하기 그지없으니.

책 속에서는 난동 부리는 살인범을 직접 제압하기도 했었지. 그리고 그 죄수의 팔모가지를 날려버렸던가. 하하. 내 눈빛이 아련해졌다. 아, 무섭다. 아무튼 이 책 속 악당들은 ‘자비리스’한 인간들이었다. 그러니 긴장하는 거지.

“저를 부르신 까닭이…….”

본래 죄수들은 바깥에서 사제 물품을 들여오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들여오기 전 엄중한 검사를 거쳐야 했는데, 보통은 그 검사를 거쳐 간수에게 물건을 받곤 했다.

몇몇 사람은 그냥 간수가 아닌 간수관리장에게 건네받기도 했는데, 아마도 작위가 괜찮으면 그리하는 듯했다. 나도 그러했고 말이다. 그래서 처음에 이를 보고 이아나의 집이 좀 사는구나 느꼈지.

“제가 아가씨를 부른 까닭은 드릴 것이 있어서입니다.”

오빠라는 사람은 2주에 한 번꼴로 간수관리장을 통해 이런저런 선물을 보냈다. 오늘도 그걸 받으러 온 것일 뿐인데. 르나그의 손이 탁자 위로 뻗었다. 나는 그가 내려놓는 조그만 상자를 내려다봤다.

“받으시지요. 이아나 양의 것입니다.”

나는 눈치를 보다 상자를 열어봤다.

아.

이번에도 머리핀이네. 상자를 닫고 눈을 도로록 굴리며 일어날까 말까 고민했다. 더 볼 일이 없는 데다가 그만 가고 싶은데 말이지.

“당신의 오빠가 원한 대로 이곳에서 당신의 성이 아닌 이름을 부르도록 했습니다. 처음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알 것 같군요.”

“네? 네…….”

아. 그거 오빠란 사람이 그런 거였구나. 어쩐지 다들 알아서 ‘이아나’라고 부르더라. 나는 성의 없이 끄덕였다. 얼른 이곳에서 나가고 싶다. 슬슬 저 시선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빠와 아버지도 감사하고 있을 거예요.”

“…그들이 말입니까?”

“네.”

아무렴 청탁을 들어줘서 고맙다고 생각하진 않을까? 반대로 나도 이름 모를 그들에게 고마운 마음이었지만. 르나그가 나를 응시하며 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역시 당신은 선량하군요. ……그들과는 다르게.”

……네?

어째서 그렇게 귀결되는지 모르겠는데. 더구나 마지막 말은 작게 속삭인 통에 듣지 못했다. 새삼 되묻기도 그래서 나는 그저 웃었다.

“좋은 분들이에요.”

감방에 있는 동생에게 먹을 거도 줘 선물도 줘. 갖고 싶은 거 갖다 줘. 좋은 오빠 맞지 뭐.

“네. 적어도 당신에게는 그런 것 같군요. 그것도 신기하지만.”

그가 눈을 느릿하게 내렸다.

“아, 그러고 보니 이아나 양이 원하던 일도 곧 실행될 겁니다.”

르나그의 시선은 비가 주룩주룩 내린 창을 향하고 있었다.

빗줄기가 가늘어진 지 이틀째, 곧 비가 그칠 것 같았다. 창문에서 눈을 떼어낸 그가 나를 응시했다.

“비가 그치면, 말씀하셨던 어린 죄수도 산책할 수 있을 겁니다. 중급 기사 여럿과 함께하겠지만.”

그가 웃을 듯 말 듯 입술을 끌어올렸다.

“이 점은 괜찮으십니까?”

나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차가운 이미지가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이 남자의 미소 비스무리한 것에 놀랐으니까.

……근데 아니 저게 웃은 거야?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얼굴이 깔끔해서 그렇지 칼빵 있는 얼굴이었으면 딱 내 모가지를 따버리겠다는 얼굴인데? 나를 겁주게 하려는 거였다면 성공했다.

나는 당황하지 않은 척 손바닥의 땀을 옷에 문질렀다.

“네? 네. 네!”

‘와, 이런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순정남이 된다니.’

사실 본편에서는 아주 잔혹하고 냉정한 악당 조연이라, 나도 외전을 읽지 않았다면 상상도 못 할 모습이었다. 이렇게 사람을 고기 해체하듯 집요하게 바라보는 사람이 간도 쓸개도 줄 것처럼 군다니 말이다.

“필요한 일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말씀해주십시오.”

저게 웃은 건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곧 날카롭게 벼려진 시선에 나는 슬그머니 눈을 피했다. 꼴깍. 침을 삼켰다.

대체 오빠랑 아빠는 이 남자에게 얼마를 먹인 걸까? ……모르긴 몰라도 천문학적인 비용이었을 거야.

“네에.”

그의 자본주의 미소를 바라보며 끄덕였다.

청탁 만세. 황금 만세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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