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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작은 프로젝트가 하나 생겼다. 이름하야 ‘남주님 산책시키기.’ 어감이 조금 이상한 것 같기는 하지만.
큰 뜻은 없다. 사실 그저 먹고 자고 만나봐야 맨날 보는 사람이 거기서 거기인 감방 생활, 지루하기까지 한 감방 생활이었다.
보통 교화목적으로 규칙적으로 살게 한다는데 개뿔이. 내가 아는 죄수 중에 다음 범죄를 도모하면 했지 반성하는 인간은 전혀 없더라. 다들 자기들을 우월한 귀족이라 여겨서 범죄쯤이야 하는 마인드였지.
선량한 건 나밖에 없어. 라고, 담배와 술을 적절한 덤을 붙여 팔아먹는 내가 생각했다.
나는 뻔뻔하지 않아. 암.
<서쪽 간수의 탑 쪽 사무실에 있다는 얘기는 들어봤네만.>
이곳을 관리하는 시스템은 이렇다.
먼저 하급 기사 및 소수의 중급 기사로 이루어진 간수들이 있고, 이 위로 간수들을 관리하는 간수관리장이 있다. 그 위로는 관리 인사들이 있고 가장 위에 캄브라캄 총관리장이 존재하는데. 총관리장은 감방에 잘 있지 않아서 볼 수 없다나.
따라서 총 관리장이 왕이라면 중간 관리인 간수 관리장은 기사단장 정도였다.
“별일이군요. 간수관리장님께 면담을 요청하는 분이 계시다니.”
나를 안내하던 간수 도르핀이 말을 걸었다.
“급한 일이 있으신가 봅니다.”
이곳의 죄수들이 전부 귀족인 탓에 요청하면 간수관리장을 만날 수 있었다.
다만, 번거롭고 귀찮아서 가지 않는 것뿐이지. 남작 아저씨 말이, 귀족은 태생부터 게으르다나.
사실 요청에도 선이 있어서 요청한다고 아무나 만날 수 있는 건 아니긴 했다.
“아마 관리장실에 도착하면 관리장님이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감사한 일이네요.”
귀족에도 급이 있다. 낮은 작위 계급을 가진 이들은 요청은커녕 응접실 한켠에 짜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응접실에서 계급이 훤히 드러났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내 요청을 받아들인 걸 봐서는 내 작위가 나쁘지 않다는 건데.
“계단 조심하십시오. 곳곳에 함정이 설치되어 있으니 말입니다. 물론 뛰지만 않는다면 발동하진 않을 겁니다. 도망치는 탈옥자를 잡기 위한 것이니까요.”
“으음, 네.”
어휴, 살벌해라.
이곳은 참으로 자유로운 감방 같지만, 이 평화는 죄질을 구분해 최악으로 나쁜 자들을 격리해서 수용하기 때문에 유지되었다. 리케도르안의 경우 죄인보다는 그 자체의 위험성 때문에 갇힌 거였고, 아직 난동조차 부린 적 없어서 내가 몰래나마 볼 수 있었던 거였다.
원작 시작했으면 어림도 없다. 그때는 사람도 해친 죄인이었으니까.
나, ……여기가 피폐 소굴이 되기 전에는 탈출할 수 있겠지?
“여기입니다.”
여기까지 안내한 도르핀이 정중하게 손을 들어 올렸다.
똑똑.
그가 살짝 물러났다. 이윽고 문이 열리자, 나를 들여보내고 본인은 앞에 머물렀다. 방으로 들어서자 평범한 집무실이 보였다. 전체적으로 나쁘지는 않은데 묘하게 좁고 평범했다.
죄수들이 한담하는 응접실보다 초라한 간수 집무실이라니,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나저나 텅 비었잖아?’
나는 아무도 없는 방을 보며 미간을 살짝 좁혔다. 분명 요청이 받아들여졌다고 했는데?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거고 말이다.
“엇갈린 건가?”
이렇게 된 거 구경이나 해볼까 싶어 나는 책상을 쭉 훑었다.
평범한 책상이었다. 하지만 보다만 서류라거나 잉크병에 푹 담긴 깃펜.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네. 깃펜을 저렇게 꽂아놓고 가나? 꼭 방금 전까지 사람이 있었던 것 같은 흔적이었다.
그때였다.
“누구십니까?”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저쪽에 문이 하나 더 있었구나. 막 닫힌 문 앞으로 장신의 남자가 서 있었다.
“아, 저 면담을 요청한…….”
“이아나 양이군요.”
“네? 네.”
나와 마주친 눈이 짓궂게 휘어졌다. 긴 갈색 머리를 느슨하게 묶어 늘어트린 남자였다. 코에는 외알 안경을 멋스러이 걸치고 있었다.
와. 남자가 장발한 건 처음 보네. 장발과 안경이란, 극히 드문 조합이 어색하지 않은 건 남자가 지나치게 미남이기 때문이었다.
미모 이즈 뭔들이로구나.
……한데 갈색과 금색, 그리고 장발. 익숙한 조합이다. 나는 간수관리장을 만나러 왔는데 왜 이 남자가 있는 걸까? 나는 안경 아래 금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간수관리장님이신가요?”
다시 말하지만 간수관리장은 중간 관리다. 회사로 치면 대리, 혹은 과장.
“네.”
왜 거물이 눈앞에 있는 거지.
이 남자의 이름은 르나그 튜즈 발테이즈. 책 속의 조연이자, 이 나라의 후작 중 하나이며…….
이 캄브라캄의 총관리장이었다.
다시 말해 우두머리.
책 속 인물 중에 요주 인물을 꼽자면 최대 악당 체이서 루브 도뮬릿이 첫 번째, 다음가는 나쁜 사람이 바로 이 남자였다.
왜냐, 악당 체이서와 한편이기 때문이지.
그는 체이서와 손을 잡고 여주인공을 이 감방에 들어오게 해서 체이서와 엮이도록 돕는 인물이었다. 무엇 때문에 체이서를 돕는지 본편에서 나오지 않았으나, 외전까지 추가 구매한 나는 안다.
체이서의 이름 모를 여동생을 사랑했었지? 이 남자가. 악당과 한편인 주제에 의외로 순정남이구나 감탄했었지.
“저를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하나 중요한 건 이게 아니었다. 왜 이 남자가 왜 후작씩이나 되어서 간수관리장 흉내를 내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경계를 지우지 못한 채로 태연하려 애썼다.
“네. 부탁이 있어서요.”
“어떤 부탁입니까?”
죄수들이 간수관리장을 만나 하는 얘기는 대체로 밖에서 물건을 들여오고 싶다는 거였다. 얼마 전 한 백작부인은 드레스를 입고 싶다 떼를 쓰다 거절당했다고 했지. 이처럼 모든 청이 수락되는 건 아니다.
“여기 모든 죄수들은 공평한 대우를 받는다는데, 맞나요?”
“표면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의외로 솔직하네. 그 뭔가 더 있다는 대답은 뭐야.
나는 찝찝함을 삼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상 공평하지 않다는 건 나도 알고 있었으니까.
“규칙에 따르면 살인, 방화, 반역 등의 중죄를 지어 격리된 죄인이 아니면 모든 죄인은 하루에 일정 시간 산책을 하거나 응접실에서 취미생활을 즐길 수 있어요. 그렇죠?”
“그렇습니다.”
나는 숨을 삼켰다. 여기서부터 중요했다.
“우연히……. 우연히 죄수들과 이야기하다가 제가 머무는 건물 제일 아래에 어린 죄수가 있다는 걸 알았어요.”
나는 손을 쥐었다 폈다.
“볕도 들지 않는 독방에 홀로 갇혀 지내는 죄수라고 하던데.”
“예. 그런 죄수가 있기는 합니다.”
부드러이 받아넘기는 그의 태도는 이상한 점이 보이지 않았다. 그를 관찰하며 나는 끄덕였다. 예상대로 리케도르안은 아직 이곳에서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이 르나그와 남주 사이가 나빠진 것은 체이서가 등장한 이후였으니까.
“듣기론 산책마저 불가하다던데, 제가 있는 건물에 수감된 죄인이니 죄질이 중죄도 아니고 조금 불쌍하지 않나요?”
“그러니까 이아나 양께서는 그 어린 죄수가 신경 쓰이신다는 말입니까?”
순간이지만 안경 속 그의 눈이 살짝 좁혀진 것 같았다.
착각이었나?
다시 부드럽게 풀어진 눈매를 바라보며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네. 맞아요. 혹시나 하고 얘길 꺼내보기 위해 왔어요.”
“선량하시군요.”
“음……. 네.”
이건 좀 양심에 찔린다. 완전히 순수한 의도만은 아니었으니까.
“제게도 어린 동생이 있어 못 본 척 지나갈 수가 없어서요.”
“……당신께 어린 동생이요?”
“네.”
사실 이아나에게 동생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오빠랑 아빠의 죄를 대신해서 있다는 건 들어 아는데 말이지.
사촌 동생 정도는 있겠지 뭐.
귀족들 사이에서는 오촌 육촌도 친척으로 치더라? 그럼 그 많은 친척들 중에 어린아이 하나쯤은 있지 않겠어. 그리고 당장 르나그에게 확인할 길이 없잖아?
“부탁이에요. 어린 죄수가 산책할 수 있게 해주세요.”
“네. 들어드리겠습니다.”
자, 이제 거절…… 응?
“네?”
“들어드리겠다고 했습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들어준다고? 왜? 왜? 이렇게 쉽게?
리케도르안은 집안에 내려오는 힘을 억누르지 못해 위험 때문에 죄수인 척 꾸며져 감금된 상태. 관리자인 이 남자는 이 사실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안 된다고 하면 적절한 방법을 제시하려고 했는데…….
“이미 당신의 오빠와 아버지에게 어떤 부탁이든 들어주겠다고 했습니다.”
“아, 네? 네……. 제 오라버니랑 아버지가요…….”
걔들 뭐 하는 사람들인데?
아니, 어떤 사람들이길래 철혈의 후작이라 불리는 이 남자한테 청탁을 넣은 건지 모르겠다. 쉽게 들어줄 작자가 아닌데 말이다.
책 속에서도 르나그가 죄인들의 청탁을 들어주는 장면이 있긴 했지만 부탁한 이들은 억 소리 나는 대가를 치르곤 했다.
잠깐만, 사실 나……, 좀 좋은 집안의 딸인가?
“아아. 네 그럼…….”
“이아나 양이 말씀한 어린 죄수는 마법 범죄 죄인인지라 산책 시간에 별도의 중급 기사들이 함께할 겁니다. 이 정도면 만족하실까요?”
리케도르안의 저주를 표면상으론 마법 범죄 죄인이라 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얼떨떨하게 끄덕였다.
“선량하신 분이군요.”
르나그가 빙긋 웃더니 팔을 뻗었다. 손을 얹으란 건가? 내가 눈치를 보며 손을 얹자 그가 나를 문으로 안내했다.
아하, 부드러운 축객령이구만.
목표를 달성했기에 미련은 없었다. 다만, 너무 쉽게 달성된 목표에 아주, 아주 찝찝했을 뿐이지.
“당신의 부친과 오빠에게 부탁받은 것이 있으니, 소홀하지 않을 겁니다.”
끼이익 문이 열린 순간. 르나그가 내 등 뒤에서 문을 당겼다. 탁. 문이 다시 닫히고, 장신의 남자가 천천히 내 키에 맞춰 상체를 숙였다.
“이아나 양.”
무례하지 않을 정도의 거리에서 르나그가 작게 웃었다. 짓궂게 보이는 눈이 휘어졌다.
“약속이 아니라도 당신의 부탁이라면 들어줄 겁니다.”
아니, 누가 이 사람이 차갑고 냉혹한 감방 수장이랬지. 책에서는 철저히 계산적이라며. 대체 얼굴도 모르는 아빠랑 오빠가 뭘 얼마나 준 거야?
“또 놀러 오세요.”
난 황망히 그를 응시했다. 그러고는 결심했다.
……아니. 안 올래요.
***
다음 날,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기껏 간수관리장을 만나러 가서 리케도르안의 산책을 허락받은 보람이 없게도 비가 아주 세차게 내렸다.
‘사실 간수관리장 만나러 가서 만난 건 무려 서브 악당인 르나그였지만.’
본래 계획대로라면, 대충 착하고 선한 영애 흉내나 내며 리케도르안의 이곳에서의 현재 처지를 자세히 알아보고…… 그 김에 산책도 유도해보려고 했는데.
‘르나그 때문에 망했지.’
그가 이미 나를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아니, 나를 안다기보다는 얼굴 모를 내 오빠와 아빠가 청탁을 넣은 거겠지만.
이 소설은 19금답게 악당들이 잔혹하다.
르나그도 마음에 들지 않는 죄수에게 서슴없이 고문과 처단을 내리는 냉정한 악당이었다. 물론 메인 악당이자 서브남인 체이서만하겠냐만은 손속이 보통은 아니었지.
웬만하면 눈에 띄지 말자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마주칠 줄은 몰랐다.
그나저나 이아나의 오빠와 아빠는 어떤 사람들이길래……. 그 르나그가 친절을 베풀게 하는 거지?
의문이 들었지만 곧 그러려니 했다.
“출소하면 알게 되겠지 뭐.”
실제로 간수관리장이 내 죄질은 가벼운 편이랬고 이는 오래지 않아 나갈 거란 소리였다.
이러니 여유도 있고 남자주인공도 겸사겸사 보러 가는 거지만.
그리고 르나그의 친절이 꼭 나쁘지는 않았다. 일종의 낙하산인 거니까? 뭐 그게 전부 이아나 집안의 금전적인 힘이겠지만. 나가면 고맙다는 얘기라도 해야지.
아니지, 나는 오빠랑 아빠의 죄를 대신해서 왔다고 하니 이건 당연한 건가? 잘 모르겠네. 어쨌거나 얼굴 모를 오빠 덕분에 감방에서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는지라 딱히 악감정은 없었다.
“잘 지냈어요?”
“이틀 전에도 봐놓고서 그러십니까.”
나는 오늘도 리케도르안의 방에 왔다. 헛웃음을 짓는 한스에게 웃어주고는 자연스럽게 철창 앞에 섰다. 아! 한스에게 작은 상자를 내미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오늘도 들어가십니까?”
“새삼스럽게요?”
처음 리케도르안을 본 뒤로 시간이 되는대로 이곳에 찾아온 나였다. 덕분에 한스랑도 더 가까워졌다. 물론 여기엔 물질적인 보상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는 나에게 호의를 베푸는 사람이었다. 나 같은 사람은 처음 봤다나. 여기엔 담배에 대한 흡족함이 포함된 듯했다.
“아, 이아나. 오늘은 조금 위험하니 주의하십시오.”
“위험?”
“아, 별건 아니고 오늘은 바닥이 미끄러우니 조심하시란 말이었습니다. 비 오는 날은 바닥에 습기가 차서 조금 위험하거든요. 지하다 보니 흙도 흘러내리고 비도 샙니다.”
“여기 건물만은 튼튼하게 지어지지 않았어요?”
“그렇죠. 그렇지만 지하는 신경을 써 봐야 지하 아니겠습니까.”
한스가 뺨을 긁적였다.
“그리고 가끔…… 죄수도 괴성을 지르기도 하고. 아무튼 지하가 더 쌀쌀할 겁니다. 감기 조심하십쇼.”
죄수가 비명이라……. 가끔 산책하다 벌레를 보고 비명을 지르는 죄수는 본 적 있었다.
아무리 잘 지어봐야 감방은 죄수를 가둬두는 곳이다.
자유를 주었다고 해도 제한된 자유고, 좋은 방을 주었다 해도 정말 좋을 리 없었다. 군데군데 감방다움이 보였으니까. 중죄인이 머무는 곳은 더 심해서 쥐도 나온댔나.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은 조금 쌀쌀한 것 같아서 숄이며 담요 같은 것을 잔뜩 챙겨왔으니까.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몸 건강한 게 최고다. 나는 한스를 뒤로하고 철창을 열었다.
끼이익.
원래도 조금 녹슬었다 싶은 문이었는데, 오늘따라 소리가 더 크다. 안으로 들어서자 꿉꿉한 냄새가 코를 훅 찔렀다. 평소보다 이끼 냄새가 더욱 심하다.
‘이것도 비가 와서인가.’
한 걸음 앞으로 나가려는데 발이 축축했다.
“무슨 웅덩이가…….”
이렇게 많아?
물이 지나치게 많았다. 작은 물방울이 뺨을 톡 건드렸다. 천장에서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누가 보면, 여기 비 오는 줄 알겠네.”
어쩐지 습기가 심하다 싶더니. 이 물들이 모여 바닥에 고인 것 같았다. 가뜩이나 흙바닥에 이건 좋지 않은데. 톡톡. 타닥타닥. 지하인데도 천장에서 빗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램프를 들어 올렸다. 곧 리케도르안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저……기요?”
가죽신이 무겁고 바지 밑자락이 젖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눈앞에는 잔뜩 젖은 채로 파르르 떠는 소년이 있었으니까.
“크르르르.”
으르르릉 거리며 노려보는 걸로 보아선 오늘도 이성 없는 쪽이 반겨주나 싶었다.
“안 추워?”
평소처럼 엉덩이를 깔고 앉을 수 없어서 쪼그린 채로 물었다. 파란 눈이 찡그려졌다.
“컹! 왕! 왕왕! 왕!”
“그건 좋은지 싫은지 알 수가 없잖아.”
쇠사슬이 철컹철컹 움직이며 소리를 냈다. 오늘따라 유달리 움직임이 거친 그였다. 나는 슬쩍 엉덩이를 물렸다. 아, 심기가 불편한 것 같기도 하고.
“어떤 점이 불편한지 물어보고 싶은데, 사람의 언어를 해달라고 하는 건 무리인 것 같고…….”
“캉! 아르르 왕! 왕왕왕!”
“쉬. 착하지. 비가 와서 소리가 더 울린다.”
“왕!!”
너 오늘따라 개소리가 심하다?
“너…… 끙, 아니다.”
왜 그러니 물어보려다가 어차피 답도 ‘아르르르’일 것 같아서 그만두기로 했다.
들고 있던 숄을 펼쳤다. 그에게 다가가려 하던 나는 그대로 멈칫했다.
…물리겠지?
가뜩이나 평소보다 짖는 소리가 더욱 크다. 한눈에 봐도 경계 어린 얼굴인데, 가까이 다가가기까지 하면 큰일 날 것 같았다. 몇 번 얼굴을 봐서 익숙해진 건가 싶었는데 또 아닌가 보다.
‘개랑 비슷하면서도 다르네.’
뭐 때문일까. 혹시 비 오면 삭신이 쑤신 것처럼 얘는 물을 싫어하고 그런가? 책을 더듬어보던 나는 리케도르안이 유달리 ‘물’을 무서워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너 같은 개새끼는 가문의 수치다.>
보통 대공가에서 저주를 타고난 사람들은 15살 이전에 힘을 제어할 수 있게 되고, 감방에 갇혔다가도 금방 나오곤 했다.
이들은 힘을 제어하지 못하면 사회화가 어렵기 때문에 사실상 이전엔 짐승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오래도록 감방에 갇힌 리케도르안은 대공가의 수치였다.
<못난 놈.>
<아, 어푸, 아버, 지, 어푸어푸, 아버지!>
그의 부친이 현 공작이 그를 다뤘던 방식은 폭력적이었는데, 특히나 그의 머리를 세숫대야에 집어넣고 숨 쉬지 못하게 막아버리곤 했다.
잔혹한 방식이었다.
이런 강압적인 방식 속에서도 힘을 제어하지 못한 리케도르안은 결국 물을 두려워하게 되고, 동시에 대공가에서 반쯤 버려졌다.
그렇기에 최후의 수단인 ‘동반자’를 기다리게 된 것이지만.
나중에 가서야 그가 워낙에 강대한 힘을 가져서 제어가 힘들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원작이 시작하기 전인 지금은 그저 덜떨어진 자식 취급을 받았을 거다.
날 때부터 차게 된, 이 족쇄를 풀어줄 ‘동반자’가 나타날 때까지. 그러나 이미 대공가는 그에게서 관심을 저버렸기에 특별히 동반자를 찾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여주는 어디까지나 ‘우연히’ 이 감방에 와서 그를 만났다.
나는 파들파들 떠는 리케도르안을 응시했다.
그 우연이 당신을 구원할 때까지, 여기에 머물러 있겠지.
짐승이 가장 날카로워지는 순간은 새끼를 배었을 때와 상처 입었을 때라고 했다. 사람과는 달라서 약함을 드러내는 것이 곧 도태되는 거라고.
결국 눈앞의 소년은 상처 입은 짐승이다. 트라우마도 상처는 상처니. 우연히 봤던 구절이 도움이 될 줄은 몰랐네.
나는 손을 들어 올렸다. 이것만으로도 움찔하는 그가 조금 안쓰럽기도 했다가. 곧이어 스르륵 풀린 내 머리칼이 등 아래로 찰랑 떨어졌다. 나는 벗겨낸 머리핀을 그의 눈앞에 흔들어 보였다.
딸랑.
“종소리 좋아해?”
청량한 소리에 소년의 떨림이 잠시 멎었다. 바다처럼 새파란 눈이 눈앞의 리본을 따라 움직였다.
딸랑딸랑.
리본에 달린 작은 종이 다시 맑은 소리를 냈다.
“역시 관심을 줄줄 알았어.”
이건 편지를 보내던 오빠가 보내준 것이었다. 가끔씩 편지와 함께 선물이 오곤 했다.
“낑?”
감방에서 하기에는 지나치게 화려한 것들이 많았다. 그냥 넣어 두려다가 어쩐지 그가 이런 걸 좋아할까 싶어서 가져와 본 거였는데.
“빗소리보다는 이게 낫다 그치?”
사납던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러 나를 향했다. 리본에 달린 종이 딸랑거리자, 다시 머리핀 쪽으로 굴러갔지만.
꼭 공을 본 강아지 같네.
손가락으로 소리를 내고 나는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머리끈을 꺼냈다. 첫날 리케도르안이 좋아하던 폭신한 장식이 달린 머리끈이었다.
“자, 이것도 가져왔다? 좋아하지?”
파란 눈에 반가움이 어렸다. 나는 이걸 얼른 그의 입에 물려주었다.
콱.
아. 역시 잘 무네.
“옳지. 잘했어. 푹신한 게 물기 좋다, 그치?”
끄덕끄덕.
“……대답하라고 물어본 건 아냐.”
어째 이런 건 재깍재깍 대답하냐.
“자, 놀아.”
나는 그의 손에다 종 달린 리본을 묶어주고는 톡 두드렸다.
딸랑딸랑.
그가 종소리에 정신을 빼앗긴 사이 나는 들어 올린 숄을 그의 머리에 올려놓았다.
“쉬쉬. 괜찮아. 옳지. 다 젖었잖아. 좀 닦자. 감기 걸려.”
갑작스러운 천에 놀란 리케도르안이 버둥거렸지만 이내 잠잠해졌다. 숄이 부드러워 따뜻했던 모양이었다. 그래, 너도 좋은 건 느껴지지? 근데, 짐승일 때도 감기에 걸리나? 책에서는 본 적 없는 서술이라 고개를 갸웃했다.
사람이면 가히 독감에 걸릴 만한 환경인데 얘는 반쯤 짐승이라 잘 모르겠다.
차르르릉!
그 순간 거친 쇠사슬 소리에 나는 본능적으로 손을 뒤로 물렸다.
“캬우?”
“떽. 그럼 못 써.”
내가 있던 곳으로 빈 허공을 잡은 리케도르안의 손이 있었다.
“왈!”
촤르르륵! 탁!
그와 나 사이를 가로막은 건 짧은 쇠사슬이었다. 나는 아슬아슬한 거리를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곧 손이 천천히 거둬진다.
와. 쇠사슬이 아니면 금방 잡혔겠지?
소년은 숄을 머리에 얹은 채로 나를 응시했다. 하얀 숄을 뒤집어쓴 모습은 하늘빛 은발과 어우러져 마치 어린 성자인가 싶을 만큼 성스러워 보였다. 미모만큼은 끝내주는 남자주인공이었다.
푹 젖어 달라붙은 옷은 굴곡을 보였다.
열여섯의 나이임에도 살짝 벌어진 어깨나 단단해 보이는 팔에서 데구루루 눈을 굴렸다. 침을 꼴깍 삼켰다.
……이 사람. 얼굴이랑 몸이 매치가 안 되는 것 같은데요.
“방금 잡으려고 했지? 꽉.”
나는 머리핀을 꼭 쥐고 있는 그의 손등을 톡 두드렸다. 붙잡을까 봐 얼른 빼냈지만.
“그거처럼 붙잡으면 아파. 부러질걸?”
진짜 부러질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쇠로 된 머리핀이 조금 휘어졌다. 나는 슬쩍 몸을 떨었다.
‘와. 저게 인간의 힘이냐.’
원작에서도 남주가 힘 조절을 하지 못해 여주에게 멍 자국이 남았다는 얘기가 있었다.
물론 그건 밤의 침대에서 얘기지만 뭐 다르지는 않으니까. 일부러 다치게 한 것이 아니라 평생 그는 남을 다치게 하면 안 된다고 배운 적이 없었다. 타인을 마주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교육 중 일품은 조기교육이랬어.’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착하지. 움직이지 마. 쉬이. 쉬이.”
리케도르안의 시선이 따라왔지만 그는 조금 전처럼 붙잡으려 하지는 않고 물끄러미 응시했다.
“자, 나는 이제 이 ‘수건’으로 널 닦을 거야.”
그는 수건을 한번 나를 한번 번갈아 보았다. 나는 그가 볼 수 있게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얌전히 있으면 좋은 걸 줄 거야. 여기까진 이해했지?”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건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리케도르안이 천천히 머리를 숙였다. 나는 살살 눈치를 보며 그의 머리를 마저 닦아주었다. 이거야 입마개를 한 강아지를 씻기는 기분이다. 입마개를 한 대신 족쇄를 찼다는 것이 다르겠지만.
“옳지. 잘했어. 기다려. 물면 안 돼. 잡으면 더더욱 안 되고.”
“왕!”
주머니에서 쿠키를 꺼낸 나는 닦을 때까지 얌전히 있던 그에게 건넸다.
훈련은 당근과 채찍에서 나온다고 모 유명 훈련사께서 말씀하셨다.
그런데 어쩌다가 내가 이렇게까지 하고 있는 거지?
나는 맛나게 먹고 있는 소년을 보며 끙 숨을 흘렸다. 뭐. 좋은 게 좋은 거겠지. 이걸로 여주인공의 멍이 줄어든다면 잘된 일이니까.
“맛있지?”
“왕!”
……근데 그놈의 개소리는 어떻게 안 되는 거니?
끄덕.
깜짝이야. 순간 먹는다고 고개를 움직인 그를 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대답한 줄 알았네.
“옳지. 잘 먹네.”
나는 방싯 웃으며 그의 머리를 마저 닦아냈다.
그사이에도 쿠키에 온 정신을 뺏긴 짐승 어린이는 쿠키를 입 안 가득 집어넣고 먹었다. 귀엽기도 해라. 우물우물. 양볼 가득 부푼 뺨이 욕심 많은 다람쥐 같았다.
‘생긴 건 성스럽기 그지없는 미소년인데 말이지.’
나는 주머니를 탈탈 털어 남김없이 주고, 마지막 쿠키를 먹어치울 때까지 지켜봤다. 먹방을 보면서 흐뭇한 기분이 이런 건가.
마침내 마지막까지 전부 먹어치운 리케도르안이 나를 응시했다.
살짝 으르렁거리면서 바라보는 시선이 어쩐지 초롱초롱했다.
“응? 더 달라고? 없어. 이제.”
갸웃.
“……어허. 귀여워도 안 돼. 없어. 돌아가.”
그를 바라보던 나는 나도 모르게 그의 가슴을 향했다. 달라붙은 젖은 천은 제법 단단한 외곽선뿐 아니라 새하얀 속살이 비쳐 보였다.
천 아래로 선명한 모양이 보였다. 저게 바로 문양이구나.
그의 가슴에서 붉게 도드라진 문양은 ‘장미’였다. 아주 새빨간 붉은 장미. 저 장미는 헤르님 대공가를 상징했지만, 더욱 자세히는 대공가 사람들이 걸린 저주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저주를 가진 자는 이렇게 활짝 핀 장미 문양을 타고난다.
조금 전에 말했듯 남자주인공은 ‘동반자’를 만나며 비로소 힘을 제어하고 족쇄에서 벗어나지만, 사실 이 찾는 기간이 무한정 긴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일정 시간 내에 상대를 만나지 못하면 요절하는데, 이때 남은 시간을 알려주는 것이 저 몸에 새겨진 장미다.
동반자를 만나지 못하고 시간이 가는 동안 장미에서 꽃잎이 하나씩 사라진다.
그렇게 마지막 꽃잎이 사라졌을 때도 동반자를 만나지 못하면…… 그대로 죽는다. 여기서 만난다는 건 합일, 즉 밤일을 치른다는 거다.
참, 19금 소설다운 설정이지.
어쨌거나 리케도르안은 아직 문제없었다.
“아, 그만 가봐야겠다.”
슬슬 한스가 부를 시간이었다. 그대로 담요를 그의 무릎에 덮어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려 했던 나는 그대로 멈칫했다.
“……너.”
고개를 돌리자 나를 붙잡은 리케도르안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잠깐만 잡았다고? 어라. 식은땀이 흘렀다.
“자, 잠깐.”
역시, 힘 조절을 하지 못하는 소년은 사정없이 나를 붙잡고 잡아당겼고 그 덕에 몸의 중심이 그에게 쏠렸다.
콰당!
졸지에 그의 가슴팍을 앞둔 나는 당황했다. 아니, 문양을 자세히 보고 싶었던 건 아닌데?
“어…….”
이거, 엿 된 거지? 남주의 위험성을 익히 알면서 조금 귀엽고 느슨하게 군다고, 방심한 내 탓이다.
침을 꿀꺽 삼켰다.
……개소리한다고 너무 귀엽게 봤나 봐. 어쩌지.
하지만 최대한 침착하게 그를 응시했다. 미친개를 만나서 당황하거나 함부로 등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했다.
아니, 어쩌다가 남자주인공을 미친개 취급하게 됐나 싶지만.
눈앞에 눈부시도록 잘생긴 얼굴이 있었다.
그러나 새파래서 차갑고 서늘한 눈은 집요하도록 나를 응시했다. 파란 눈 속에 사납고 난폭한 기운이 일렁였다.
차르륵. 쇠사슬 소리가 가장 크게 들리는 순간이었다. 소년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읏……아파…….”
그가 잡은 손목에서 느껴지는 아릿함에 작게 신음했다.
숨소리가 그대로 느껴지는 거리에서 멈춘 리케도르안이 눈을 내렸다. 그는 작은 움직임도 놓치지 않고 잡아내는, 본능 그대로 움직이는 짐승 같았다.
킁킁.
목덜미에서 숨이 느껴졌다. 그대로 천천히 내려간 얼굴이 그대로 붙잡은 내 손목을 들어 올렸다. 그러더니 시선만 올려 나를 바라봤다. 천천히 입을 벌린 그가 내 손을 입으로 가져다 댔다.
손가락을 깨물며 핥던 시선이 나와 마주쳤다.
할짝.
……어라.
짐승의 시선이었다.
할짝. 할짝.
아니, 잠깐, 잠깐만.
축축한 혀가 닿는 음란한 소리에 귓불부터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이런 진도는 곤란한데요,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