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87)

***

리케도르안이 처음, 하며 눈물을 글썽였지만, 나는 여기에 대해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보통은 이런 식으로 여주인공보다 플래그를 꽂아버렸다! 하고 고민하겠지만 이 소설은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할까. 여주인공만이 할 수 있는 것이 명확히 정해져 있다.

19금 소설답게 몸정맘정 전부 주고받는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

여기에 선행되는 행동이 바로 아까 리케도르안에게서 보았던 ‘구속구’를 벗겨주는 일이다. 리케도르안의 목과 손목, 발목을 감고 있는 족쇄 형태 도구 말이다. 여주인공 프란시아에게는 특별한 치유 능력이 있었고, 이 능력의 도움을 받아 리케도르안의 구속구를 벗겨냈다.

무려 첫날밤 이후 다음 날에 말이다.

이처럼 그의 구속구를 벗겨내는 것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여주인공만이 할 수 있었고, 평생 자유를 갈망한 리케도르안에게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만들어주었으며, 따라서 그에게 구원자일 수밖에 없었다. 대공가는 전통상 구속구를 벗어야 이 감방을 벗어나게 해주니 말이다.

‘이미 저쪽은. 출소일이 정해졌단 말이지.’

출소하니 말인데, 나는 언제 출소하는지 모를 일이다.

“한숨을 쉬는 걸 보니, 출소 생각?”

“출소라고 하지 말아요. 진짜 죄인 같잖아.”

“뭘 새삼스럽게.”

내 맞은편에 앉아 싱글싱글 웃는 남작 아저씨는 전에도 말했듯이 위조 동전을 팔다 사기죄로 잡혀 온 팔라디스 가문의 남작이다.

아울러 심심할 때 말 상대로 나쁘지 않은 상대였다.

우습게도 이곳은 감방이면서 나름의 응접실도 있었다. 그래서 누구든 모여 얘기를 나누든 간단한 독서나 자수 등의 취미생활을 즐길 수 있는데, 사실 비슷한 줄무늬 옷을 입고 여유를 즐긴다는 게 웃기기도 하다.

이 옷으로 귀족 흉내를 내봐야 전혀 멋이 안 난다고.

다들 진짜 귀족이라 해도 말이야.

“그보다 오늘은 뭐 재미난 이야기 없어요?”

“무엇을 원하실까, 아가씨는.”

감방 생활은 규칙적이며 무료했다. 정확하게는 규칙적이어서 무료한 거다.

“으음, 전 다 좋은데.”

그나마 소일거리라고는 비슷하게 할 일 없는 죄수와 응접실에서 만나 같이 떠드는 거라니. 남작 아저씨는 이게 사교계와 뭐가 다르냐며 웃곤 했다. 사교계는 겪지 못했지만 비슷한 생각이다.

이런 거라면 나가지 말아야지.

“그럼 도뮬릿 얘기해주세요. 지난번에 하다 말았잖아요?”

“오, 수도의 흑장미 말인가.”

도뮬릿 공작가.

이 제국의 세 공작 중 하나이자 책 속에서 주요한 사람이 있는 가문이기도 했다.

“내가 또 제국의 검은 장미에 관심이 아주 많지.”

남작 아저씨는 생각 외로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고 내게 알려주는 것을 좋아했다.

나는 이런저런 얘기를 듣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 하지만 이런 성향 때문이 아니라도 도뮬릿에 대해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책 속 최대 악당이 있는 곳이었으니 말이다.

소시민은 거대한 원작의 날갯짓을 피해 미리미리 궤적을 알아둘 필요가 있지. 암.

“지하에서 피는 꽃은 여전히 지하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향기를 내고 있지. 얼마 전 경매장에서 보석을 궤짝으로 사들였다고 하는데, 그 속에 폐하께서 잃어버린 티아라가 있다고 하던걸.”

“경매장은 황실이 주최하는 것 말고는 불법이라면서요?”

“물론이지. 법이 바뀐 적은 없으니 역시 지하에서 피는 꽃들이 활약한 것 아니겠나.”

지하에서 피는 꽃. 도뮬릿가의 상징이 흑장미였으므로 이렇게 표현하곤 했다. 사실 하는 짓들도 악당이나 다름없었으니 어울릴만 만했다. 진짜 악당이었지.

황제의 티아라라면 나도 안다. 그거 원작에서 여주인공이 찾아내는 거잖아?

심지어 악당인 체이서 루브 도뮬릿의 방에서 발견한다. 이로 체이서는 이 감방에 오게 되고, 뒤이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이곳에 돌아온 여주인공과 감방에서 재회하게 되지만 말이다.

“들어보게.”

남작 아저씨의 목소리가 은밀해졌다.

“황실에서 저택을 수색했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네. 심증은 충분했는데 말이야! 병든 공작의 뒤를 잇는 후계자, 도뮬릿 소공작의 수완이 아주 좋아!”

“그렇군요.”

아무래도 책 속 악당이니 비범하겠지. 그나저나 신기했다. 이 아저씨는 감방 안에서 많은 걸 알고 있네?

내 시선을 느꼈는지 아저씨가 빙긋 웃어주었다.

“이아나, 도뮬릿 공작가의 진정한 보물은 아주 깊이 숨겨져 있다는 얘길 들어봤나? 오 물론 아가씨도 익히 알겠지만. 글쎄, 거기엔 숨겨진 ‘딸’이 있느니 마느니 하는 얘기가 있지 않겠어. 아주 흥미롭단 말일세.”

“아, 들어본 적 있어요.”

“사교계에서 만연한 소문이지.”

악당 체이서에게는 여동생이 있긴 했다. 단지 책 속에 이름조차 나오지 못하고 요절해서 그렇지. 동생이 있다는 것도 체이서가 여주인공에게 동정을 사기 위한 요소로 등장했다.

이놈도 아끼는 것 정도는 있었다 하고 나온 정도?

나는 금방 흥미를 잃었다.

“그나저나 얼마 전에 말한 ‘모험’은 재미있었나?”

“아, 물론이죠.”

리케도르안의 미모는 황홀할 정도였지. 나는 눈물을 뚝뚝 흘리던 얼굴을 떠올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맞다. 아저씨. 혹시 간수관리장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알아요?”

“관리장? 글쎄. 서쪽 간수의 탑 쪽 사무실에 있다는 얘기는 들어봤다만.”

사슬로 꽁꽁 묶인 리케도르안의 팔이 스쳐 지나갔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기억해두자.

우리의 얘기는 금세 널을 뛰었다.

남작 아저씨는 솜씨 좋은 이야기꾼이라 내가 흥미를 잃었다 싶으면 금방금방 화제를 바꿨는데, 누가 사기꾼 아니랄까봐 이것이 몹시 교묘하고 자연스러웠다.

“아저씨는 내가 본 사기꾼 중에 제일 말을 잘해요.”

“최고의 칭찬이군.”

나는 주머니를 뒤적여 종이로 곱게 싼 네모상자를 그에게 내밀었다. 고급 시가(cigar)였다.

아저씨는 받지 않겠다고 한사코 거절했지만 나는 기어이 손에 안겨주었다.

“좋은 얘기에는 좋은 대가가 있어야죠. 주고 싶어서 그래요. 아저씨 담배 애호가잖아요?”

“이아나, 사기꾼은 화대를 받지 않는다고.”

“흐응, 그럼 더 받아야죠.”

난 씨익 웃었다.

“아저씨가 대가 없이 좋은 얘기를 할 때는 사기를 칠 때뿐이니까.”

잠깐 멍한 표정을 짓던 남작 아저씨가 곧 나처럼 소리 내어 웃었다. 못 당하겠다고 말하던 그는 내가 내민 상자를 간수 몰래 집어넣었다.

그와 동시에 간수가 휴식 시간의 종결을 알렸다.

***

끼이익.

굵직한 문이 열린 사이로 축축한 이끼 냄새가 풍겼다.

‘여긴 며칠 전과 다를 게 없네.’

리케도르안을 처음 만난 지 3일이 흘렀다.

지하로 매일 오는 건 아무리 간수들의 슈퍼스타인 나라도 무리였다. 그렇기에 며칠을 기다렸다. 오늘도 한스에게 고급 담배를 건네고 열린 문이었다. 나는 램프를 들고 살금살금 감방 안쪽으로 걸어갔다.

며칠 전처럼 자고 있으려나?

램프를 벽으로 가져간 나는 그대로 멈칫했다.

아, 아니구나.

나를 향한 살벌한 시선을 마주하며 오늘은 어느 쪽이 깨어 있는지 확실히 인지했다.

“왈 왈왈왈! 왈!”

“……격한 인사 고마워.”

이제 두 번째 보는 거지만, 구분하기 참 편하네.

“으르르르. 아르르르-.”

그는 정체 모를 짐승어를 뱉고 있으니 말이다.

“으르르르!”

난 고개를 기울였다.

“할 줄 아는 게 아르르르야?”

나를 노려보던 소년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어라, 알아듣잖아?

“그래. 말은 알아듣잖아. 왜 말을 쓰진 않는 거야? 듣기는 되고 말하기는 안 되는 거?”

이번엔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살벌한 시선은 지우지 않으면서 말이다.

……노려보면서 말은 참 잘 듣네.

나는 묘한 기분으로 그를 내려다보다 말고, 품속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주머니를 여는 순간 고소한 향기가 났다.

소년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빵 좋아해?”

갸웃.

“내가 널 위해 장발장이 되었단 얘기야.”

나는 주방에서 훔쳐 온, 아니. 정확히는 식사 시간에 숨겨온 빵을 흔들흔들 흔들었다. 새파란 눈동자가 빵을 따라 이리저리 움직인다. 어라.

오른쪽이면 오른쪽. 왼쪽이면 왼쪽……. 귀여워라. 먹을 걸로 장난치면 안 된댔는데.

“줄까?”

“왕!”

“아니, 그거 말고. 따라해 봐. ‘주세요.’”

“왕? 왕왕?”

“주세요.”

“왕왕왕!”

“……대체 누가 개소리를 가르친 거야.”

듣기가 된다는 건 분명 말하기도 된다는 건데, 이건 누가 처음부터 개소리부터 가르쳤단 소리다. 대체 이렇게 세밀하게 개 언어를 가르친 미친놈이 누구야?

나는 소년을 황망히 응시하다 말고 고개를 저었다.

“기다려.”

그리 말하고는 그의 손이 닿기 전에 손을 뒤로 빼냈다. 빵을 따라서 그의 눈동자가 따라왔다. 나는 왜 안 주냐는 듯한, 굶주린 맹수 같은 시선에 잠깐 움찔했다.

와. 쇠사슬이 없었으면 분명 뒤로 튀었을 거야.

“생각해보니까 이걸 그대로 주면 넌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겠다. 잠깐만. 아니, 안 준다는 게 아니고. 목이 막힐까 봐 걱정된다는 거야!”

이 말은 알아듣지 못했는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더욱 매서워졌다.

철그럭 철그럭.

팽팽하게 당겨진 쇠사슬을 한번 보았다가 얼른 빵 덩어리를 일부 떼어냈다.

“먹어.”

소년에게 건네자, 그가 얼른 먹어치웠다.

“천천히 먹어야 해. 체하니까.”

그가 내 손을 덥석 잡고 입을 앙다물었다. 입술 덕에 손바닥이 간지러웠다.

“……맛있어?”

빵부스러기를 가득 묻힌 소년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았다.

아하. 좋다는 뜻이구나. 그나저나, 누가 개의 행동까지 가르친 거냐? 소년이 손바닥을 핥을 기세라 얼른 다시 빵을 떼어냈다.

“천천히 먹어야 해?”

“켁, 켁켁!”

어째 급하게 먹나 싶더라니. 리케도르안이 눈물을 글썽이며 목을 움켜잡았다. 이럴 줄 알았다. 나는 당황하지 않고 얼른 물통의 뚜껑을 열었다.

물진 않겠지?

목이 말랐는지 리케도르안은 물통에만 집중한 채 물만 삼켰다. 한참을 꼴깍꼴깍 넘어가는 목울대를 생각 없이 바라볼 때였다.

어라. 언제 이렇게 붉어졌지?

램프의 불빛 아래 붉게 달아오른 소년의 귀가 보였다. 뺨이며 목이며 해진 천 아래 드러난 어깨까지도.

그의 뺨에서 손을 가져다 댄 채로 눈을 깜빡였다.

“그, 그, 그만. 소, 손 좀 떼, 떼, 주세, 요.”

나는 씩 웃었다.

“내 손아래서 잘만 먹어놓고는.”

그 순간 그의 얼굴이 확 터질 것 같았다. 이토록 붉어진 사람의 얼굴은 처음이었다. 나는 신기한 듯 바라보다가 그의 뺨을 톡 건드렸다. 눈물이 고인 눈이 흔들리며 나를 응시했다. 심드렁하게 생각했다.

와. 구분하기 참 쉽네.

“채, 채, 책임질 거, 아니면, 소, 손대지 말, 아요!”

음. 널 책임질 사람은 따로 있는데. 리케도르안을 책임질 사람이라 하면 당연히 여주인공 아닌가? 예쁘고 착해. 구속구도 벗겨줘. 능력도 대단해. 맞춤 여주인공이다.

어차피 여주인공 손에 똑 떨어질 남자주인공일 거, 이러니 마음 놓고 구경 오는 거지만은. 잘생긴 얼굴이나 구경해야지.

출소하면 못 볼 테니 말이야. 난 어느새 뒤쪽으로 한참 떨어진 리케도르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배 더 안 고파요?”

이성이 완전히 돌아온 그의 얼굴은 새빨갛기 그지없었다. 누가 보면 내가 잡아먹는 줄 알겠다.

“아, 안, 안 고파…….”

꼬르르륵―.

참고로 이건 내 뱃소리 아닌데. 와, 저기서 더 빨개질 수도 있구나.

“흡…….”

다음 순간 나는 폭발할 것 같이 붉어진 얼굴을 마주했다.

“배고픈 건 부끄러운 게 아니에요. 간수들이 밥 안 줘요?”

안 줄 리는 없다. 이래 봬도 대공가의 하나밖에 없는 핏줄 아니겠나. 힘을 억누르지 못해 여기 격리된 것이지 아무리 싫어하고 애물단지여도 굶겨 죽이진 않을 거다. 대신 이렇게 사람이 바짝 마를 정도로 열악한 걸 식사로 주기는 해도 말이다. 더럽기 그지없는 밥그릇을 보던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저게 뭐냐, 돼지죽도 아니고. 진짜 심하네.

“이리 와서 먹어요. 남은 거 많아.”

빵은 넉넉하게 가져왔다. 중앙감방은 죄수들이 대부분 귀족이라 먹을 것만은 풍족하게 줬다. 남작 아저씨 말로는 이곳엔 볼모 역할로 잡혀 온 죄수도 있으므로 잘 안 먹이면 벼르고 있던 가문 사람들이 항의한다나.

아무튼 그 덕에 원 없이 빵을 훔쳐 온 나는 주머니를 흔들어 보였다. 아니, 눈은 흔들리면서 왜 안 오는 거야?

“뭐예요. 내가 가요? 가서 먹여주…….”

“가, 가, 간다!”

주춤주춤 다가오긴 하는데, 어느 세월에 여기 오겠다는 거지.

“그냥 내가 갈게요.”

그냥 내가 움직였다. 가까이 가자 그가 움찔했다. 아니. 세상에 처음 나간 고양이도 아니고 하나하나 이렇게 반응하면 신경줄이 남아나지 않겠다. 귀엽기는 하지만.

“먹어요.”

“……내, 내 손으로.”

“그 손으로요?”

리케도르안은 제 팔을 보면서 침묵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팔은 수갑과 사슬에 묶여 있었다. 아까 짐승처럼 먹던 것을 보면 먹을 수는 있겠지만, 상당히 불편할 거다.

“불편할걸요.”

“그건 그렇지만.”

“얼른 입 벌려요. 따라해 봐요. 아…….”

“어, 어린애가 아, 아니에요!”

“누가 어린애래요? 불편하니까 이렇게 준 거지.”

“이, 이렇게, 먹여 주는, 사람, 은 처음…….”

나는 얼른 소년의 손에 빵을 쥐여주었다. 아이고 그놈의 처음 타령!

“……자. 자! 그냥 직접 먹어요.”

그러나 예상했던 대로 사슬은 큰 장애물이었다. 손목이 완전히 꺾인 채로 먹는 자세가 부자연스럽다 못해 내가 불편했다. 보다 못해 빵을 뺏었다.

“이리 줄래요?”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냥 조금씩 떼서 줄게요. 어쩔 수 없잖아요? 나 곧 가야 하거든요. 대신 처음 어쩌구 하지 않기. 난 그냥 도와주는 거예요?”

우쭈쭈. 넌 혼자 할 수 있는데 도와주는 거예요. 알았죠?

나는 어르고 달래는 시선으로 응시해주고는 빵을 작게 떼어냈다.

“입 벌려요.”

“흐…….”

“어서요.”

망설이던 리케도르안이 천천히 입을 벌렸다.

작은 입이 벌어진 것뿐인데 왜 묘한 느낌이 드는 걸까. 해진 옷과 새하얀 목을 보던 나는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다행히 그는 잘 먹었다. 얼굴은 여전히 빨갰지만. 나는 물통을 잡고 그에게 물까지 먹여주었다.

“많이 먹을 거라 생각했지만 정말 많이 먹네.”

한참을 먹여주고 나자, 주머니는 텅 비어 있었다. 애매하게 남는 것보다 이쪽이 만족스럽긴 했다. 그나저나 왜……. 남주님은 꼭 순결을 뺏긴 사람처럼 파들파들 떨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저기요, 난 먹는 거 도와준 죄밖에 없거든요?”

“이, 입술, 입술에 손이 닿았다!”

“아니, 그럼 입술에 먹이지. 콧구멍으로 먹여요?”

“뺘, 뺨을 마, 만지고…….”

“닦아준 거지. 빵 부스러기를 그냥 둬요?”

이렇게 말했지만 리케도르안의 책망 어린 시선은 꽂혀서 떨어질 줄 몰랐다. 결국 내가 두 손 들어 보이며 항복했다. 어쨌거나 처음 어쩌고만 하지 않으면 됐지. 뭐. 아, 슬슬 한스가 나를 부를 시간이었다.

‘벌써 이렇게 됐잖아?’

나라고 시간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닌 데다 실랑이를 하다 보니 밥을 먹인 것만으로 허용된 시간이 지나 있었다.

‘오늘 할 말이 있었는데 말이지.’

리케도르안은 여전히 얼굴을 붉힌 채 입만 벙긋거리고 있었다. 리케도르안을 보아하니. 저 상태에서 내 말이 들리겠냐마는.

나는 손뼉을 쳤다.

“있잖아요. 여기 너무 어둡지 않아요? 볕도 안 들고 이끼 냄새나고. 심지어 공기도 텁텁해요.”

지하 감방이 거기서 거기겠지만 제일 최하층 깊숙한 곳에 있는 리케도르안의 독실은 제일 심했다.

“여기 죄수들은 하루에 한 번 교도소 앞으로 산책하러 나가요. 밖이라고 뭐 말라붙은 잔디라거나 시든 꽃이 전부지만.”

이 정도로 할 수 있는 것도 죄수들이 귀족이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죄수들이 이용할 수 있는 거라면 리케도르안도 이용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성장이 끝나지 않은 지금 그라면 중급 기사들도 리케도르안을 제압할 수 있다.

“저기, 산책하고 싶지 않아요?”

내게는 재미없고 지루한 일상이지만 리케도르안에게는 그 일상마저 주어지지 않는다. 적어도 4년 뒤 여주인공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산책……이, 뭔가요?”

나는 다소 황망한 시선으로 리케도르안을 보았다.

어이쿠. 여기부터란 말이야?

사람은 자신이 사용하지 않는 단어를 이해할 수 없다. 안경을 들어본 적 없는 사람이 안경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처럼.

“밖에 나가는 거요.”

“나, 나, 나는 밖에 나갈 수 없는데…….”

“나갈 수 있다면요? 나갈 거예요?”

그는 쪼그려 앉아 나를 한참을 응시했다. 그렇게 조금 더 시선을 마주했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소년의 눈이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봤다. 그것은 불이 반짝였던 등이 꺼지는 것처럼 아련했고, 푸른 바다가 오염된 것처럼 처연했다.

그사이 한스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 가봐야겠다.”

소년이 입을 달싹였지만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또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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