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감방에서 남자주인공을 만나다니요?
꽃이 막 지고 여름 잎이 팔랑팔랑 흘러내리는 날이었다.
나 이아나는 이 상황을 자연스럽게 인지했는데, 문제는 이 상황을 인지하는 과정에 무려 3개월이 걸렸다는 거다. 눈 떠보니 낯선 사람들이 낯선 머리통을 하고 돌아다니는 이곳이 바로 다른 세계. 나아가 오래전에 읽었던 책 속이라는 것을 알기까지 말이다.
책에 빙의했다.
빙의했는데 보통 꿈꾸던 생활은 아니었다. 그거야 당연했다. 여긴 호화로운 침대가 있는 방도 낡은 목조 건물도 아니었고.
<감방이잖아!>
감방이었다.
모를 수는 없었다. 눈앞에서 돌아다니는 사람이 다 같이 칙칙한 회색 줄무늬 옷을 입고, 가슴에는 한 곳에는 번호를 새겨 넣은 ‘번호표’를 달고 있었으니까!
……아니, 눈 떠보니 감방이라니.
<감방? 감바아아앙?>
이건 꿈이라도 꾸고 싶지 않은 꿈인데?
애석하게도 이곳은 내가 읽은 책 속이 맞았다.
‘캄브라캄’이라는 감옥 이름이나 중근대 시대 주제에 묘하게 낯익은 감옥 방들의 명칭들. 어쩜, 빙의를 해도 19금 피폐 로맨스 소설에 빙의를 하는 걸까?
이 소설은 내가 심심해서 읽어본 소설이었다. 심심해서 읽은 것치고 기억을 많이 하는 이유는 남주가 끝내주게 잘생긴 데다 설정이 특이하기 때문이었다.
먼저, 이곳으로 말할 것 같으면 죄인들을 가두는 감방이었지만 조금 특별하게도 죄인들이 남달랐다. 인권이라면 개나 줘버린 시대에 죄인을 상대로 식사에 방에 산책까지 시키는 곳이랄까.
이는 죄인이 전부 ‘귀족’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아버지와 오빠의 죄를 대신해서 이 감방에 투옥되었다는데.
“이봐, 이아나.”
일단 무슨 죄인지는 모르겠고, 그러려니 하고 있다. 책 속에서 이아나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듣고 있나?”
“아, 네. 네네!”
성은 듣지 못했지만 같은 방 사람들이 잡범이니 나도 아마 어디 작은 영지 영애 겸 잡범이려니 하고 있다.
나는 눈앞의 나이 든 아저씨에게 집중했다.
배가 통통하게 나온 중년 귀족 아저씨. 그는 헛기침하며 내가 한 질문에 충실히 대답해주려 했다.
“영지의 감옥에 들어가지 않고 중앙 감방에 모인 이유? 간단하지. 본보기를 보여주는 거야. 귀족들도 처벌할 수 있다. 황제 폐하의 권력을 보여주는 거지.”
“아하, 그렇군요.”
똑똑하지만, 가짜 동화(銅貨)를 팔다 걸려온 팔라디스 남작 아저씨는 좋은 말 상대였다.
“그래서 각지 귀족이 여기 갇힌 거구나.”
이야기가 조금 샜지만, 이 소설의 내용은 이렇다.
여주인공. 아름답고 착한 영애이자 다정한 아가씨, ‘프란시아’는 아버지의 죄를 대신해서 이곳 중앙감방 캄브라캄에 수감된다. 호기심 많고 순진한 이 아가씨는 어느 날 밤에 감옥을 몰래 산책하다 아주 깊은 방에 수감된 한 남자를 만나게 되는데…….
「넌 누구지?」
벽에 손바닥을 고정 당한 채, 고문받는 이는 이 감방의 가장 오래된 수감자이자 남자주인공인 리케도르안 폰 헤르님.
훗날의 헤르님 대공이었다.
대공가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힘이 있어 이 힘을 억누르지 못한 자는 캄브라캄 깊은 곳에 감금되었고. 힘을 억누를 자를 찾을 때까지 나올 수 없었다. 그 힘이란 게 사람을 ‘짐승’처럼 만들어버리기 때문이었다. 말 그대로 이성을 깔끔하게 지우고 인간 이상의 힘을 내는 짐승 말이다.
「가엾은 사람…….」
착하고 순진한 주인공은 남자주인공의 사정을 듣고 그의 쇠사슬을 풀어주게 되는데, 힘 때문에 남자 주인공은 풀려난 순간 짐승화 되어서 이성을 잃고 여주인공을 덮친다.
「흣……!」
큼큼, 엄한 상상은 됐고.
아무튼 간에 이렇게 하룻밤 뜨거운 관계를 보내고, 여주인공은 남자주인공의 ‘동반자’만이 풀 수 있는 족쇄를 풀어내 그를 자유롭게 한다는 내용이다.
참고로 여기서 ‘동반자’란 대공의 연인이자 영혼을 계약한 관계를 말한다.
여기에 악당 얘기라거나 더 있지만 일단 메인은 남자주인공과 서브 남자주인공, 그리고 여자주인공이 감방을 배경으로 으쌰으쌰 뜨겁고 뜨거운 밤을 보내는 19금 피폐 삼각로맨스 소설이다.
피폐 삼각로맨스 딱지가 붙은 이유는 남자주인공이 워낙 험한 성격인 데다 악당인 서브남도 만만찮은 집착남이어서 그렇다.
“생각해보면 내용 참. 참으로 그렇고 그런 관계였지, 아마.”
내가 알기로는 악당과 남주가 원수 집안이라, 사교계로 나가서도 삼각관계를 보여주는데 아무튼 초반 배경은 여기 캄브라캄 감방이다.
나는 그대로 쪼그려 앉아 철창 안쪽을 응시했다.
“흐으응, 그러니까 저분이 그분이란 말이지.”
철창 너머는 너무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안 보여.”
좀 더 들어가면 희미하게 뭐가 보일 것도 같은데.
수감소 내 2층, 3층 방들은 작게나마 창문이라도 있는데 이 방은 사방이 벽이었다. 지하니까 그런가. 지하도 창문은 만들 수 있잖아? 왜 처음 남자주인공 성격이 음침했는지 알겠다. 없던 음침도 생길 환경이다.
“이아나, 그만 가시면 어떻습니까.”
“에이, 아저씨 조금만 더요.”
나는 방싯 웃으며 간수인 한스 아저씨의 어깨를 툭툭 애교스럽게 쳤다. 아저씨는 그런 나를 못 말린다는 듯이 보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원래 이거 어림도 없는 얘기인 거 아시죠? 간수관리장님이 아시면 난 죽은 목숨입니다. 예?”
“에이, 물론이죠. 입 무거운 거 알면서 그러신다.”
“하여간. 특이한 성격입니다. 보통 귀한 영애들은 나 같은 하급 기사와 어울리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내가 대답 없이 씩 웃자, 한스도 허탈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 저도 영애가 준 것이 아니면 들어주지도 않았겠지만.”
캄브라캄 수감 건물 중에서도 중앙동은 귀족들이 머무는 곳이라 간수들은 죄다 기사였다. 특히나 남자주인공을 지키는 간수는 꽤 실력이 받쳐주는 기사였고. 감방이란 특성상 바깥보다 남녀가 내외하는 정도가 적은 편이었다.
하나 이런 이들 중에서도 나처럼 허물없이 구는 사람은 처음이라고 하급 기사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곤 했다. 물론 3개월이나 지난 지금 다들 적응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제가 준 건 마음에 들어요?”
“물론입니다. 대체 어디서 이런 고급 담배를 구해오는 겁니까? 이러니 저 같은 중하급 기사들이 환장을 하는 거지요.”
“몰라요. 오빠한테 편지 쓰니까 가져다주던데?”
그가 신기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봤지만 정말이었다.
이곳에서 눈을 뜨자마자 보게 된 것이 책상 위에 놓인 편지였다. 작은 쪽지와 함께.
「원하는 것을 써줘.」
이후로 내게는 매달 꼬박꼬박 빈 편지지가 도착했는데, 거기다가 원하는 것을 쓰면 다음 달에 뭐든지 가져다주곤 했다. 심지어 감옥에서 금지된 술이나 담배조차도 말이다. 처음에는 뭔지 몰라서 그냥 뒀는데, 다음 달에 ‘필요한 게 없니?’ 하는 편지가 와서 알았다.
어쨌든 이 덕분에 간수들조차 못 가지는 것들을 손쉽게 얻게 되었고, 나는 감방에서 이들의 슈퍼스타가 되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영애는 대체 어느 가문이십니까?>
이곳에서는 작위 그대로 사용하는 사람도 있었고 이름만 부르게 하는 이도 있었다. 귀족이다 보니 3615번! 하고 부르지는 않더라?
<난 이름으로 불리는 게 좋아요.>
아무튼 내 가문을 궁금해하는 이들에게 나는 항상 고개를 저으며 ‘이아나라 불러줄래요?’ 하고 말하곤 했다.
‘왜냐면 나도 모르거든.’
아무도 내 가문을 알려주지 않았다.
알 만한 사람이라면, 그나마 여기서 높은 사람인 간수관리장이 있겠으나…… 얼굴 보기가 힘들었고 매달 오는 편지에도 이름 말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나도 그냥 대충 괜찮은 집안이려니 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책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이라면 이미 알았을 테니까. 이 소설 등장인물이 그리 많지 않았거든. 뜨거운 밤이 중요한 소설에 달리 뭐가 중요하겠어.
한스 아저씨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튼 이아나는 특이한 분입니다.”
“그런가요? 잘 모르겠는데…. 아, 그보다 아저씨, 부탁이 있는데요.”
나는 쪼그려 앉은 채 방싯 웃고는 철창 안쪽을 가리켰다.
“나 저기 들어가 보면 안 돼요?”
“안 됩니다.”
“정말?”
당연하게도 한스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나는 이들이 무엇에 약한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다음에도 같은 걸로 2개.”
“……안 됩니다.”
“3개?”
나는 그를 향해 씨익 웃었다. 내 웃음에 그가 움찔했다.
“그래도…….”
“3개에다 파이프 하나. 안 들어주면 타르민한테 전부 줘버릴…….”
“생각해보니 잠깐은 괜찮을 것 같군요.”
타르민은 한스와 라이벌 격인 간수였다.
“콜.”
나는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한스는 큼큼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머쓱함을 숨기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정말 잠깐만입니다?”
“네에.”
아직 원작 전이라 그런가. 소설 속에서와 달리 남자주인공은 삼엄한 감시에 놓이긴커녕 그가 있는 지하 감방은 관리조차 거의 되지 않았다. 아마도 이들이 아직 남자주인공의 힘을 몰라서인 것 같기도 했다.
‘책 속에서도 난동을 한번 피우고서야 삼엄한 감시 속에 갇혔다고 했나. 그랬으니.’
나는 성큼 문 앞으로 다가갔다.
“열쇠를 꽂고 돌리면 됩니다. 오른쪽으로 두 번 돌려야 합니다. 녹슬어서 잘 듣지 않아요.”
“네. 이해했어요.”
열쇠로 문을 열고, 그대로 밀었다. 녹슨 문 안쪽에서 꿉꿉한 이끼 냄새가 났다. 감방에서 좋은 냄새가 나지는 않겠지만 이 방은 특히 심했다.
‘아예 관리가 안 된 수준인데?’
벽 쪽에 다가간 순간 나는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눈을 크게 깜빡였다. 벽에는 쇠사슬에 묶인 채 그대로 잠든 소년이 있었다.
‘이게 아직 주인공을 만나기 전인 남자주인공…….’
통 먹지 못한 탓인지 바짝 마른 편이었지만, 그럼에도 숭고한 어린 성자같이 성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하늘빛에 가까운 은발과 머리색과 같은 긴 눈썹 때문인지도 몰랐다.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리케도르안, 겁나 잘생겼다.
아주 청결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약간 더러운 몰골이나 해진 옷이 오히려 더욱 자극적이라 해둘까. 눈 둘 곳이 없었다.
“몰골이 말이 아니네.”
어디 보자, 내가 현재 18살이랬고. 여기 갇힌 남자주인공은 리케도르안은 16살이랬지……? 원작이 시작되기 꼭 4년 전이었다. 그래서인지 열여섯이라기에는 조금 체구가 크긴 했지만 눈감은 얼굴은 앳된 느낌이었다. 와. 자는 모습이 꼭 천사 같네.
“살아 있나? 어째 더러운 곳에 두면 안 될 것 같은 얼굴인데.”
소년의 목에는 특이하게 생긴 목걸이가 있었다. 사실 형태는 목걸이보다는 목에 찬 수갑 혹은 족쇄에 가까웠다.
‘이게 소설에 나오는 구속구인가.’
꽤 둔중하게 생겼으나, 그의 외모를 가릴 수는 없었다. 사실 이곳이 정말 내가 아는 책 속인가 확인하고자 온 것이었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 미모는 책이 아니고서야 설명이 되지 않을 거다.
‘숨은 쉬고 있는 거지?’
나도 모르게 손을 뻗을 때였다.
움찔.
나는 멈칫했다.
잘못 본 건가 싶었지만, 이번엔 다시 한번 더 눈꺼풀이 꿈틀 움직였다. 곧 눈이 뜨였다.
“헉!”
불티가 일렁이는 푸른 눈과 마주한 순간 숨을 삼켰다. 눈앞에 심해인가 싶은 아름다운 눈동자가 천천히 깜빡였다.
그러나 감상할 시간은 없었다.
“으르르릉! 으왕! 왕!”
“엄마야!”
개소리에 깜짝 놀라 주저앉은 나는 엉덩이를 댄 채로 황급히 물러나야 했다.
……쇠사슬 늘어나는 거였냐고!
얼른 뛰쳐나오는 남자아이를 피해 물러난 나는 가까스로 이빨을 피할 수 있었다. 나는 아득히 황당한 눈으로 남자주인공을 응시했다. 짐승처럼 변한다며? 그냥 이성을 잃는다며? 성격만 난폭해지지, 사람 말은 한다고 했는데?
“왈! 왈왈!”
저건 그냥 개잖아! 개! 사람 말을 잊은 소년 앞에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러나 나를 향해 짖는 소년을 보다 보니 차차 익숙해지고, 나도 모르게 손을 더듬었다. 마침 손에 잡히는 것이 있었다. 왜 나무 막대기가 여기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슬금슬금 다가가 슬쩍 손을 내밀었다.
콱.
“……아. 물었다.”
나무 막대기를 입에 문 소년이 나를 노려봤다. 그러나 막대기를 입에서 놓지는 않았다. 마치 욕심난다는 듯이.
그러니까, 이건 싫지 않은 건가? 좋은 거지?
나는 신기한 듯이 바라보다가 막대기를 톡톡 쳤다. 날 보는 시선이 더욱 살벌해졌다.
그래도 놓지 않네?
꼭 껌을 뺏기기 싫어하는 강아지 같은 모습에 나는 눈을 깜빡이다 헛웃음을 지었다. 생긴 건 강아지보다는 새끼 맹수 같지만. 곧 실수를 깨닫고 손을 뻗었다.
“에비지지. 그거 이리 줘. 지지야.”
도리도리.
“……어라, 너 말 알아들어? 정말?”
그러자 그가 살벌한 시선으로 나를 노려봤다. 지금 누굴 바보 취급하냐는 눈인 거지? 와, 알아는 듣는구나. 그런데 왜 짖은 거지? 그나저나 저대로 두면 이 상할 건데.
“으르르르…….”
일단은 나무 막대기부터 뺏어야 할 것 같았다. 이상한 장난을 쳤다는 가벼운 죄책감에 몸을 더듬는다. 그러다 말고 나는 아, 하면서 손을 들어 올렸다.
좀처럼 줄 것 같지 않으니 대신할 것을 줄 생각이었다.
곧 나는 머리끈을 풀어 장식을 떼어내고는 그의 눈앞에 흔들었다.
“이거 봐봐, 리케도르안. 응? 봐봐. 이게 더 폭신하다? 이쁘지?”
“…….”
여전히 노려보는 시선이었으나, 한순간 흐려지는 순간을 똑똑히 목격했다. 이건 또 고양이 같네. 그가 시선을 빼앗긴 사이에 얼른 막대기를 빼냈다. 그리고 그가 다시 소리치기 전에 폭신한 머리장식을 물려줬다.
“어때, 더 좋지? 응?”
“…….”
“옳지. 옳지. 우쭈쭈, 착하다. 잘 문다. 저건 지지야?”
“……둬.”
“응?”
“그, 그만둬요.”
툭. 머리장식이 떨어진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손안에 일렁이는 램프의 불꽃이 소년의 얼굴을 선명하게 비췄다.
“아……. 그, 그만…….”
소년은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얼굴로 입술을 벌렸다가 닫았다가, 이내 울상을 지었다.
“내, 내게, 뭐, 뭐, 한 거예요?”
날 보는 순간 소년의 흰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마치 조금 전의 자신의 모습이 부끄럽기라도 한 듯이. 이와 동시에 나를 바라보는 눈에 순식간에 눈물이 고인다. 나는 당황했다.
“지, 지금 내, 처음을…….”
……네?
이건 무슨 독수리가 궐련 피우는 소리야. 뭐가 처음? 뭐가 처음인 건데.
“처음이요?”
나도 모르게 리케도르안의 장단에 맞춰 말을 높였다. 뱉고서야 알았다. 그가 이전과 완전히 표정이 다를 뿐 아니라 날 보는 시선마저 다르다는 것을.
“나, 나한테 이런 걸, 물린 사람은…… 당신이, 처, 처음…….”
“아니. 아니아니, 잠깐만.”
이 남주님이 요상한 데에 플래그를 꽂으시네. 큰일 날 소리를!
“그러니까 이런 걸 입에 물린 사람은 내가 처음이라는 거죠? 오해하게 말하지 말아요.”
“오, 오해, 아니잖아.”
“오해야.”
이건 무슨 상황이야, 대체. 그러니까 이성이 돌아오면 이런 상태라는 거군.
“오해가 아니.”
“맞아요!”
나는 기꺼이 상대에게 맞춰 말을 자유자재로 높이고 낮춰주었다. 이게 바로 맞춤형 대화이니까.
그는 물기 어린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조금 전 맹수인가 싶은 날카로움과 사나움은 사라졌지만 제법 매섭게 책망하는 눈이었다. 푸른 눈동자는 꼭 바다처럼 일렁였다. 파란 보석을 떼어다 박아놓은 것 같은 눈동자가 눈물이 가득하니……. 똑 눈물이 떨어지면 내 양심으로 콕 박힐 것 같다.
환장하겠네.
“저, 미안해요.”
나는 괜히 찔려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손으로 뺨을 문지르고는 시선만 도로록 굴려 리케도르안을 응시했다. 어째서인지 그는 뜻밖에 놀란 얼굴이었다.
“나, 나한테 사, 사과한 사람도, 네가…… 처, 처음.”
아까부터 그놈의 처음 염불은 왜 나오는 건데?
“아니. 아니아니요. 말을 바로 하자.”
그에게 다가간 나는 쇠사슬에 묶인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리케도르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순간 아파서인가 싶어 슬쩍 손을 떼고 보았지만, 상처는 없었다. 아무튼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입을 열었다.
“처음은 중요하지 않아.”
“…….”
“중요한 건 오늘이 처음인 게 아니라, 네가 앞으로 이런 말도 일도 아주 많이 겪을 거란 거지. 아, 입에 뭐 물리는 거 말고.”
그러니까 처음 같은 플래그 꽂는 거 아니란다.
퍽 진지하게 조언하며 말을 들어라, 하는 시선으로 리케도르안을 빤히 응시했다.
“그!”
탁. 쇠사슬이 차르륵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내 손을 쳐낸 그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성스럽기까지 한 그의 얼굴 밑이 빨갰다.
“소, 손, 하, 함부로 잡는, 거. 아니야!”
“손? 손이라니. 닳는 것도 아니고. 아니, 그보다 내 말 듣기는 한 거예요?”
“나, 나, 남자 손이잖아!”
누가 남자라는 거지. 몸만 살짝 컸지 얼굴은 앳되기 그지없는 사람을 말한 건가?
‘누가 남자냐고.’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쏘아붙여 줄까 싶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그가 눈물을 펑펑 쏟아내면 더 곤란할 것 같았다.
참고로 난 예쁜 남자는 취향이 아니다. 당장 성인이 된 리케도르안이면 모를까. 미래의 그는 짐승미 겸 야성미가 철철 흘러넘치던 남자 주인공이었다. 그냥 짐승이었지, 짐승.
‘후, 특히나 밤에 말이야.’
물론 짐승이 아닐 때 청초한 모습도 꽤 좋아했지만, 그런 그가 어린 시절 울보라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어릴 때라서인가?
4년이란 세월이 사람을 바꿔놓는구나.
“이아나!”
밖에서 한스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 돌아가야겠네요.”
나는 소년을 보고는 씩 웃었다.
“시간 다 됐습니다, 이아나!”
“네, 갈게요!”
리케도르안에게 살짝 미안하다고 한 번 더 속삭인 뒤에 나는 램프를 들었다. 잠깐 이 어둠 속에 다시 그를 두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어린애인데 말이지.
“또 올게요.”
램프가 멀어진 통에 그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