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 먼 길을 돌아(2)
베를리아가 알아본 결과 에메이던 영지의 주인인 자작가 내외는 그 근방에서 평판이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부부가 덕이 많고 온유한 성격을 가져 영지민들에게도 넉넉히 베풀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에메이던 자작 부부는 리리카 외에도 일전에 두 명의 아이를 입양했었는데, 그들은 이미 자라 각자 번듯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두 아이는 성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제 부모를 찾는다고 했다.
입양되었다지만 그에 상관없이 부모와 자식 사이가 좋다는 걸 증명한 셈이었다.
리리카의 나이는 현재 8살로 에메이던 영지는 더없이 평화로워 아이가 자라기에 아주 좋은 환경이었다.
그래서 베를리아는 제가 그의 앞에 나타나도 될지 쉽게 판단할 수 없었다.
황제의 권위가 바로 설수록 안젤라의 최측근인 베를리아의 위세 또한 덩달아 점점 더 높아졌다. 솔직히 말해 공작가조차 그 위세 앞에 맥을 못 추릴 정도였다.
그러니 많은 이가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이 평온한 영지가 베를리아와 엮이게 되면, 필요 이상으로 다른 귀족들의 주목을 받게 될 거라는 의미였다.
나무가 가만히 있고자 해도 바람이 불면 나뭇잎이 흔들리는 법이었다.
힘 있는 자들이 하나 둘 에메이던 부부를 건드리거나 꼬여내기 시작하면, 아무리 좋은 사람일지라도 권세와 엮여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며칠 지켜보는 게 좋겠어.”
결국 베를리아는 영지에 머무르며 리리카를 몰래 관찰하기로 했다.
영 모양새 안 나는 일이었으나, 만일 리리카가 이곳에서 행복해 보인다면 그 삶을 엉망으로 흐트러뜨리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이 영지에는 메리쉬와 베를리아의 기척을 알아낼 만큼 뛰어난 기사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시간을 조금만 들이면 될 일이었다.
***
그렇게 지켜본 아이의 일상에는 크게 특별난 것이 없었다.
단 하나, 아이가 자작 부부와 관계가 소원하다는 점을 빼고는 그랬다.
“뭔가 이상하군요.”
메리쉬가 그 점을 정확히 지적했다.
자작 부부가 아이를 학대하거나 차별하는 것은 아니었다. 부부는 분명 아이에게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도 아이는 자작가에 섞여들지 못했다.
자작 부부는 아이의 이런 모습에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그들은 아이가 일찍 철이 든 것쯤으로 여기는 듯했으나, 베를리아는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아이의 모습은 마치 현대 세상에 섞여들지 못하던 자신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를리아는 갈등했다.
아이의 행동 양상으로 보아 이전 삶에 대한 기억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아이는 자신을 전혀 모르는 상태일 텐데, 아이에게 다가갈 방법도 문제였다.
그런데 그 고민은 의외의 곳에서 해결되었다.
“왜 며칠째 나를 지켜보고 있어요?”
베를리아와 메리쉬가 숨어 있는 나무로 뜬금없이 다가온 아이가 보이지도 않는 그들에게 말을 걸었기 때문이다.
***
아이는 베를리아와 메리쉬를 데리고 사람들 몰래 저택으로 들어갔다.
마치 미리 준비했다는 듯이 딱히 긴장한 기색도 없는 매끄러운 행동이었다.
베를리아는 묘한 기분이 되어 아이를 바라봤다. 아이는 보통의 평범한 애들 같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리리카 같지도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베를리아가 꿈속에서 봤던 리리카 같았다는 게 옳은 말일 터였다.
“나를 데리고 갈 건가요?”
아이는 제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자마자 베를리아를 돌아봤다.
자신이 마주해야 할 상대가 그녀임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뭐?”
베를리아의 목소리에 당황이 드러났다.
대뜸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이야 전혀 몰랐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가 조금 다급해져 물었다.
“혹시 자작 부부가 너에게 무슨 짓을….”
베를리아가 지켜본 그 며칠 간 자작의 저택은 평온해 보였으나, 수면 위만의 평화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의 얼굴에 걱정과 분노가 드러났다.
하지만 아이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내게 잘해 줘요. 다만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닐 뿐이에요.”
아이가 다가와 베를리아의 소맷자락을 잡았다.
“내 이름은 리리카예요.”
아이가 자작 부부에게 받은 이름은 에드워드 에메이던이었다. 그러나 아이는 단호하게 그 이름을 부정했다.
“나는 내 이름을 아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이는 태어난 이래 단 한 번도 리리카가 아닌 적이 없었다. 그러니 ‘에드워드 에메이던’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아무리 자작 부부가 공을 들여 입양된 아들을 대해도, 살가워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베를리아의 표정이 울 듯 말 듯 애매해졌다.
달랑 이름 하나일 뿐이라도, 어렴풋이 남은 리리카의 기억은 그를 결코 다른 곳에 섞여들지 못하게 했을 터였다.
적어도 베를리아는 그게 어떤 기분인지 알고 있었다. 현대 세상에서 그녀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늘 외로웠으니까.
“당신, 나를 아는 것 맞지요?”
리리카가 확신을 담아서 물었다. 시종일관 무표정하던 아이의 얼굴에 처음으로 미소가 담겼다.
“이름이 뭐에요?”
그 얼굴이 베를리아에게 익숙했다.
리리카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혐오하지 않는 상대가 그녀였으므로.
그리움이 물씬 밀려 왔다. 베를리아가 아이를 안아들었다.
“베를리아 리들턴.”
아이가 베를리아의 목에 짧은 두 팔을 감으며 물었다.
“나를 데려가 줄 건가요, 베를리아?”
리리카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
베를리아가 거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는 그에게 이미 너무 많은 은혜를 입었으니까.
“그래. 나랑 가자, 리리카.”
베를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그녀가 아이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차례인 모양이었다.
***
리들턴 후작이 별안간 사내아이 하나를 입양했다더라.
그 소문은 삽시간에 이너스틴의 수도 전역에 퍼졌다.
그러나 진상을 알아내고 싶었던 이들이 아무리 소문을 파고들어도, 그들은 아이의 출신은커녕 이름조차 알아낼 수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베를리아가 므시아와 황제의 힘까지 동원하여 말이 새어나갈 구멍을 철저히 막고 있었으니까.
그리하여 밖은 떠들썩하든 말든 리들턴 저택은 매우 평온했다.
물론, 메리쉬와 리리카의 사이를 빼고는.
“아저씨는 할 일이 없어요? 왜 맨날 베를리아 옆에서 시간만 죽여요?”
그 며칠 사이에 본색을 드러낸 아이는 틈만 나면 메리쉬에게 툴툴거렸다.
베를리아가 꿈속에서 봤다던, 그녀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의 모습과 똑같았다.
리리카는 베를리아를 제외한 리들턴 저택 내의 모든 사람을 경계했다.
그런 와중에 유일하게 호의를 품은 상대인 베를리아가 메리쉬와 대개 붙어 있으니, 아이의 눈에 메리쉬가 유독 거슬린 모양이었다.
“하…. 사람 성질 긁는 건 여전하군.”
아무리 메리쉬가 베를리아 외에는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도 아이와 다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오늘도 자신을 괜스레 건드리는 리리카를 보며 짜증스레 한숨만 삼켰다.
메리쉬가 눈매를 가늘게 뜨고 리리카를 내려다봤다.
아이가 리들턴 저택에서 위험한 것도 아닌데 확 그냥 혼자 둬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멜, 리리를 잘 부탁해.’
잠시 자리를 비운 베를리아가 저택을 나서기 전에 했던 부탁이 아니었다면 정말 나 몰라라 해 버렸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시시각각 리리카가 메리쉬의 인내심을 자극하던 찰나, 다행히도 베를리아가 늦지 않게 돌아왔다.
“멜, 리리.”
“베를리아!”
베를리아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자, 아이는 언제 툴툴거렸냐는 듯이 재빠르게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병아리가 어미 닭을 쫓는 듯한 모양새에 메리쉬가 아이를 못마땅하게 보면서도 붙잡지 않았다.
다시 태어난 리리카는 아이였다.
부모의 정 따위 느껴본 적 없는 메리쉬였으나, 어린 아이가 누군가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러니 아이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상대를 어른이 되어서 질투 따위로 빼앗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늘 고생 많았지? 멜.”
리리카와 인사를 나누고 난 베를리아가 메리쉬에게로 다가왔다.
그녀가 외출을 하고 돌아오면 리리카를 상대해 주느라 메리쉬는 뒷전으로 밀리기 일쑤였다.
그것을 베를리아도 알고 있기에 미안한 듯한 얼굴이 되었다.
“육아에 동의한 것은 저이니, 어쩔 수 없죠.”
메리쉬가 뚱한 얼굴을 하면서도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리리카를 리들턴의 아들로 들이는 것에 찬성한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어린 아이인 리리카와 지내는 것에 대해 각오는 어느 정도 했던 터였다.
“고마워, 멜.”
베를리아가 메리쉬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러자 살짝 뾰로통하던 그의 표정도 곧 느슨해졌다.
그러나 그러기 무섭게 두 사람의 사이로 작은 아이가 끼어들었다.
“왜 나 몰래 두 사람만 속닥거려요?”
리리카가 뚱한 얼굴을 하고 베를리아와 메리쉬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 모습이 두 어른 사이의 비밀을 못마땅해 하는 일반적인 아이와 크게 다를 것이 없어보였다.
“둘만 있을 만하면 훼방 놓으면서 뭘 몰래 속닥이긴 속닥인다고 그래.”
메리쉬가 리리카를 번쩍 안아들며 혀를 찼다.
아이는 가까워진 거리에 뚱하게 그를 쳐다봤으나 베를리아에게 안아달라고 하지는 않았다.
같이 지내며 그녀의 몸이 그리 건강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안 탓이었다.
게다가 아이는 또래보다 영리한 편이었던지라, 메리쉬에게 늘 툴툴거리기는 해도 그가 저를 봐주고 있다는 사실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리리카는 메리쉬를 싫어하는 듯 굴면서도 아이러니하게 가끔은 이런 접촉을 허용하고는 했다.
“궁금하면 언제든 말해 줄게, 우선은 저녁부터 먹자.”
베를리아는 사이가 좋지 않은 듯 좋은 듯 애매해 보이는 메리쉬와 리리카를 보며 작게 웃었다.
재스민이 그들에게 다가와 말을 전했다.
“어서 오세요, 베를리아 님. 마침 저녁 준비가 다 되었으니 다 같이 식사하러 가시면 될 것 같아요.”
그 말을 들은 베를리아가 한 남자와 한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이 앞에 내밀어지자, 두 사람 사이 투닥투닥거리던 소리가 멎었다.
“가자.”
메리쉬와 리리카가 서로를 흘겨보더니, 질세라 덥석 베를리아의 손을 잡았다. 아이가 혀를 베 내밀며 말했다.
“베를리아의 옆에는 내가 앉을 거에요.”
“할 수 있으면.”
그러자 메리쉬가 코웃음 치며 대꾸했다. 베를리아가 두 손을 잡아 이끌며 말했다.
“다행히도 내 옆자리는 두 개가 있잖아?”
베를리아가 웃었다. 그제야 메리쉬와 리리카도 서로를 향해 찌푸리고 있던 표정을 풀었다.
베를리아가 사랑하는 모두가 마침내 각자의 평화를 맞이한, 그런 어느 날의 일상이었다.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