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깽판치는악녀님 (147)화 (147/148)

외전 4. 먼 길을 돌아(1)


 

증오가 베를리아의 삶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증오가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삼켜 버릴 수는 없었다.

증오는 증오대로 내버려 둔 채, 그 속에서도 베를리아는 또 다른 희망을 발견했다.

바로, 자신의 영혼 속에 리리카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베를리아는 에르젠타샤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녀는 절반의 희소식과 절반의 비보를 듣게 되었다.

“아이야, 네 영혼을 통해 리리카 그 아이를 되살려낼 수는 있다. 다만 그 아이의 영혼과 네 영혼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 아이를 되살리면 네 영혼에 또 다시 금이 가게 될 것이다.”

에르젠타샤가 염려를 담아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계속된 몇 번의 회귀로 인해서 베를리아의 영혼은 상당히 위태로운 상태였다.

게다가 네멘 리들턴의 저주가 이제는 사라졌다고 해도, 그 여파는 여전히 남아 있었으니 단언컨대 베를리아는 괜찮은 상태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영혼에 금이 가게 되면 베를리아의 수명은 더욱 줄어들 것이 뻔했다.

“그 금을 제 영혼으로 채우면 안 되겠습니까?”

그 때, 메리쉬가 나섰다. 베를리아의 눈이 커다래졌다.

베를리아의 저주가 카를로스에게 완전히 옮겨간 뒤에도, 메리쉬는 그녀의 건강에 대하여 아주 많이 예민하게 굴었다.

그녀가 평범한 사람처럼 온전히 건강해질 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실시간으로 그녀의 건강에 신경을 곤두세우고는 했다.

그래서 베를리아는 에르젠타샤의 말을 듣는 순간 메리쉬가 반대하겠노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말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아이야, 그렇게 되면 이번에는 네 수명이 줄어들게 될 것이다. 게다가 너 또한 영혼을 소모했던 적이 있으니 마냥 온전한 상태가 아니란다. 그 점을 알고도 그리 말하는 게냐?”

에르젠타샤가 이번에는 메리쉬에게 물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베를리아를 돌아보며 말했다.

“베릴, 나 또한 리리카에게 목숨의 빚이 있어요. 그러니 당신과 내가 함께 빚을 갚는 게 옳다고 생각해요.”

메리쉬에게는 신의 반응 따위보다 당연히도 베를리아의 생각이 더 중요했다.

그는 혹시나 이번 일로 베를리아가 제게 또 다른 미안함을 품지 않길 바랐다.

“…고마워, 멜.”

메리쉬가 보인 의외의 행동에 잠시 침묵했던 베를리아가 한발 늦게 입을 열었다.

베를리아도 메리쉬가 왜 이렇게 말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리리카에게 빚을 졌기 때문이라고 했으나 그건 핑계에 불과했다.

메리쉬는 베를리아가 리리카로 인해 슬퍼하는 모습을 매번 가장 가까이서 본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단지 그녀의 슬픔을 덜어 주고 싶다는 이유로 이런 결정을 한 것이다.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요.”

메리쉬가 베를리아에게 가볍게 입을 맞추며 웃었다. 그는 늘 그러했듯이 그녀의 편이었다.

“나는 베릴, 당신과 한날한시에 죽고 싶거든요. 당신을 먼저 보내기 싫은 내 욕심일 뿐이에요.”

메리쉬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그게 참으로 그다웠다.

아주 당연하게도 베를리아를 자신의 세상으로 여기는 점이.

“지금 당장 리리카를 되살리지 않아도, 너희가 수명을 다하고 나면, 베를리아 너의 영혼에서 그 아이의 영혼을 분리시키면 될 일이다.”

에르젠타샤도 리리카가 안타까웠다.

그러나 신은 본디 자신의 신녀를 가장 아끼는 법이었다.

에르젠타샤는 오랜 방황 끝에 이제야 평온을 누리게 된 베를리아가 조금이라도 더 길게 행복하기를 바랐다.

“에르젠타샤시여, 저는 리리카의 행복을 두 눈으로 보지 않는 한 늘 그의 존재를 손끝에 박힌 가시처럼 품고 살아야 할 겁니다.”

그러나 베를리아의 대답은 단호했다. 그녀의 결심이 변함없었기 때문에, 메리쉬의 생각 또한 마찬가지였다.

에르젠타샤가 한숨을 쉬며 말을 덧붙였다.

“너희가 알던 리리카란 존재가 아닐 수도 있다. 흩어진 영혼을 모아서 재구성하는 일이야. 너희와의 기억을 가지고 태어날지, 아니면 전혀 다른 인간으로 태어날지는 알 수 없다.”

“그렇다고 영혼의 본질이 달라지지는 않으니까요.”

베를리아는 절대 자신의 생각을 꺾을 마음이 없었다. 그것을 보며 에르젠타샤가 마지막으로 확인하기 위해 물었다.

“영혼이란 우리 신조차도 쉽게 건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너와 메리쉬, 리리카 모두 이미 인과율을 거슬렀어. 너희를 도왔던 신들조차 마찬가지지. 또 다시 인과율에 대가를 치르려면 그 전보다 곱절의 대가가 필요하다. 다른 신들의 힘을 빌려야 할 거야. 그렇게 되면 신들이 네게 진 빚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정말 괜찮겠느냐?”

신들의 봉인을 푼 사람은 결국 베를리아였다.

에를니아를 제외한 모든 신은 그녀에게 갚아야만 할 빚이 있었다.

그 빚을 리리카를 위해 사용하게 되면, 베를리아가 그간 고생한 일들에 대한 대가를 신들에게 받아내기란 요원해지는 것이다.

“상관없어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저를 불행하도록 두지 않을 거고, 저 또한 그들이 행복해지게 만들 거니까요.”

베를리아는 자신만만했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믿었다. 이제는 그럴 수 있었다.

결국 에르젠타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동시에 베를리아와 메리쉬의 주변으로 빛무리의 형체들이 나타났다. 다른 신들이었다.

인간은 비교도 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 앞에서, 베를리아와 메리쉬는 결코 기죽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의 손을 잡은 채로 담담히 서로를 마주했다. 곧 환한 빛무리가 터졌다.

***

“대체 리리카는 어디에 있는 걸까?”

수하의 보고서를 받아든 베를리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곁에서 그녀를 달래듯이 메리쉬가 어깨를 토닥였다.

“에르젠타샤의 입으로 리리카가 환생했다는 말을 들었으니 분명 세상 어딘가에 있을 거예요. 시간만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찾아낼 수 있어요.”

리리카가 환생했다. 그러나 에르젠타샤의 말대로 그가 어떤 사람으로 태어났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베를리아는 리리카를 찾는 중이었다. 그를 반드시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으니까.

그러나 얼굴도 이름도 심지어는 생김새조차도 모르는 상대를 찾는 것은 아무리 베를리아라도 쉽지 않았다.

므시아의 인력들을 총동원해도 다시 태어난 리리카를 찾는 일은 요원했다.

“기껏 다시 태어났는데, 리리카가 행복하지 않을까 봐 걱정돼.”

베를리아가 자신을 뒤에서 감싸 안는 메리쉬에게 기대며 조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이제 행복했다. 그 행복에는 리리카의 몫이 분명 지대했다.

“무엇보다 내가 리리카를 잊을까 봐 그게 제일 걱정 돼.”

그렇지만 너무 행복해서, 때로는 리리카가 생각나지 않을 때도 있었다.

아니 실은 그럴 때가 더 많았다.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그를 찾고 싶었던 것이다.

“리리카는 나를 두 번 살렸어요.”

메리쉬가 베를리아에게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서 멀어지지 않은 채로 그가 말을 이었다.

“나를 되살렸고… 무엇보다 당신을 구했죠.”

스치는 두 입술이 간질거렸다. 메리쉬의 말은 그 무엇보다도 달콤하게 들렸다.

“그러니까 내가 기억할게요. 맹세해요, 반드시 리리카를 베릴의 앞에 데려올게요.”

메리쉬는 지금껏 베를리아에게 한 맹세를 어긴 적이 없었다. 자신이 약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녀는 안도했다.

베를리아가 마음 놓고 행복에 젖더라도 메리쉬가 리리카를 기억할 테니까.

“사랑해, 멜.”

“사랑해요, 베릴.”

두 입술이 서로에게 사랑을 속닥였다. 벌컥 문이 열리지만 않았더라면, 분위기가 더 묘하게 흘러갔을지도 몰랐다.

“찾았어, 베릴!”

안젤라였다. 그녀가 대단히 기쁜 음색으로 소리쳤다. 그 순간 세 사람의 사이로 싸한 침묵이 맴돌았다.

“미…안해요, 나는… 그냥, 기뻐서.”

지나치게 달라붙어 있는 두 사람과 방 안의 미묘한 공기를 알아차린 안젤라가 얼굴을 붉히며 문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녀가 베를리아와 메리쉬를 번갈아 보며 어색하게 존댓말 했다.

베를리아가 민망한 표정으로 빠르게 메리쉬에게서 떨어졌다. 무엇보다 중요한 말을 들었으니 그대로 분위기에 젖어 있을 수 없었다.

“아니야, 앤지. 그보다 찾았다는 게….”

베를리아가 들어오라는 듯 손짓했다. 그러자 안젤라가 여전히 붉은 얼굴을 식히며 방 안으로 다시 들어섰다.

“리리카를 찾은 거 같아, 베릴.”

베를리아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레스가 조금 흐트러진 것도 신경 쓰지 못한 채로.

“어디야?”

베를리아의 목소리에 긴장과 들뜬 기색이 어려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기다리던 소식이 마침내 그녀를 찾아왔다.

***

리리카가 어떤 존재로 다시 태어났을지 특정하기 어려운 이유가 또 있었다.

영혼이 머무는 세상과 현실은 그 시간대가 판이하게 달라서, 그의 영혼이 어느 시간대에 탄생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리리카의 나이대를 추정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로 인해 베를리아는 안젤라의 도움이 필요했다.

신을 모시는 자들만이 영혼의 본질을 볼 수가 있었는데, 당연히 베를리아 혼자서 이 대륙 위의 모든 영혼을 확인하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때문에 황제인 안젤라가 은밀히 신관들에게 명령을 내려 할 수 있는 한 많은 이의 영혼을 확인했다.

그렇게 꽤 시간이 지나고 많은 이가 수고한 덕에 마침내 리리카를 찾게 되었다.

“여기에 리리카가 있다고?”

그리고 지금, 베를리아는 리리카가 머문다는 곳에 와 있었다. 그녀는 리리카를 찾았다는 이야기에 지체하지 않고 달려왔다.

그러나 정작 그곳에 오니, 베를리아는 쉽게 들어갈 수가 없었다.

꽤 번듯하게 생긴 저택을 가지고 있는 평화로운 영지의 귀족. 그곳의 입양아가 리리카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