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깽판치는악녀님 (146)화 (146/148)

외전 3. 카를로스(3)


 

카를로스를 지옥에 떨구어 놨으니 모두 신경 쓰지 않고 살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 아, 그 얼마나 허울 좋은 교만이던가.

인간은 그들이 지나온 과거가 자아낸 하나의 베와 같았다. 과거가 지나온 길이 없으면 그들도 없다. 과거에서 자유로울 수 있으리라는 것은 모두 착각에 불과했다.

특히나 베를리아처럼 기억하고 있는 과거가 많을 경우에는 더더욱 그랬다.

자신이 절대로 과거를 없던 취급할 수 없음을 깨달은 것은 꿈에서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한 뒤였다.

‘마녀가 죽었다!’

베를리아는 사람 많은 광장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 군중들의 열띤 목소리가 들렸다.

저 높이 단상 위에 피가 묻은 단두대가 있었다. 그 밑으로 굴러 떨어진 목 하나가 보였다.

자신이었다.

‘악녀의 최후에 축배를!’

우욱- 그 역겨운 광경에 베를리아의 속에서 구역질이 치밀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런 그녀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마녀를 몰아내신 태자 전하와 성녀님께 영광을!’

카를로스와 안젤라가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저 높은 곳에 서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꿈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몇 번이고 겪은 과거는 때로는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었다.

베를리아는 순간 자신이 겪었던 모든 것이 꿈이며, 이곳이야말로 현실은 아닌지 두려워졌다.

그 순간 리리카를 군중 속에서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몸이 굳어 움직이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리리카…?’

리리카는 처음 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제 앞의 모든 인간이 끔찍하다는 듯 혐오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광대의 가면이 벗겨져 드러난 민낯이 적나라했다.

리리카의 얼굴에는 세상에 대한 환멸과 경멸만 있을 뿐 인간이란 존재에 관한 호의라고는 단 한 점도 없었다. 그래서 리리카는… 대단히도 외로워 보였다.

***

“베릴…! 왜 그래요…!”

잠에서 깨어난 베를리아가 무너질 듯 울고 있자, 메리쉬가 놀라 물었다. 남들보다 허약해진 몸을 갖게 된 그녀가 혹시라도 어딘가 아플까 봐 그는 조금도 안절부절못했다.

“멜… 멜… 리리카가….”

메리쉬를 진정시켜 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베를리아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심장이 옥죄이는 슬픔이 몰려들었다.

메리쉬가 처음 베를리아를 회귀시켰을 때, 인과율은 그에 대한 대가로 그의 영혼을 탐했으나 에르젠타샤가 힘을 써 준 덕에 메리쉬는 무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리리카가 베를리아를 두 번째로 회귀시키고자 했을 때, 인과율은 시간을 두 번 거스른 것만큼의 더 큰 대가를 요구했다. 결국 에르젠타샤조차 완벽히 그를 보호해 줄 수 없었다.

아마 리리카가 살아남았더라도, 그의 수명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을 것이다. 리리카는 제 영혼을 인과율에게 대다수 제물로 넘겨줘 버렸으니까.

영혼이 지탱하지 못하는 육신은 어차피 실이 끊긴 목각 인형이 되어 곧 스러져 버렸으리라.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베를리아는 리리카의 죽음이 지나치게 사무쳤다. 제 처형식을 보던 그의 모습을 꿈으로 본 이후에는 더욱 그랬다.

‘너의 죽음을 이만큼이나 많은 사람이 기뻐해, 베릴.’

꿈에서 베를리아는 리리카의 속내를 들었다. 그건 베를리아의 영혼 속에 남은 기록이었다.

그가 제 영혼을 소모하여 그녀의 시간에 개입한 탓에, 베를리아의 영혼에 리리카의 흔적이 남아 버린 것이다.

그에 관한 꿈을 유독 자주 꾸는 이유기도 했다.

‘봐, 세상이 얼마나 미쳐 있는지를.’

리리카는 처음부터 이 세상도 카를로스도 전부 싫었다.

메리쉬에게는 베를리아가 세상이자 그의 모든 시작이었기에 사랑했다면, 리리카는 세상에서 싫지 않은 상대가 베를리아뿐이었기에 사랑하고 말았다.

그래서 리리카는 베를리아의 죽음 이후 후회했다.

베를리아는 두 번째 삶에서 악녀로 지낸 이전의 삶을 세상에 갚고 싶어 했다.

그녀가 세상과 잘 지내 보려 할 때마다… 리리카는 솔직히 말하자면, 허무한 노력이라 생각했다.

어차피 이 세상은 글러 먹었으니까.

리리카는 베를리아의 죽음에 축배를 드는 미친 세상을 보며 그 사실을 진즉에 알려줄 것을 그랬다고 아주 많이 후회했다.

‘네가 없는 세상은 딱 이 만큼 끔찍해.’

그러니까 리리카가 베를리아를 살린 것은 필연적인 일에 가까웠다.

세상에서 역겹지 않은 단 하나가 사라져 버렸으므로, 세상이 존재한들 아무 의미가 없어서, 정말이지 너무나 끔찍해서.

리리카는 베를리아가 없는 세상의 역겨움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제 모든 것을 걸었다.

그 덕에 그녀가 지금 이곳에 살아 있었다. 제 연인과, 행복하게.

그 행복이 죄악 같았다. 베를리아가 말도 잇지 못하고 울음만 쏟아내자 메리쉬가 그녀를 제 품에 껴안으며 말했다.

“모든 것은 카를로스 에덴버와 에를니아의 탓이에요. 당신 탓이 아니야, 그러니까 베릴… 제발.”

누군가의 죽음은 메리쉬조차 어떻게 해 줄 수 없는 일이었다.

어제까지는 충만한 행복으로 미소 짓던 연인이 오늘은 울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의 연인은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미안해, 미안해, 멜… 나는 도저히….”

베를리아는 자신이 리리카의 죽음에서 영원토록 자유롭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메리쉬가 그녀의 뺨을 흠뻑 적신 눈물을 닦아 주며 달랬다.

“잊지 않아도 돼요. 괴로우면 울어도 돼, 그렇지만- 그게 당신 탓이라고는 생각하지 말아요.”

메리쉬가 조곤조곤하게 속닥였다. 괴로움으로부터 베를리아의 주의를 돌리고 싶었다.

“당신을 죽이고, 나를 죽이고, 리리카를 죽게 만든 것은 모두 카를로스 에덴버잖아요. 베릴, 혼자 괴로워하지 말고 차라리… 그놈에게 돌려줘 버려요.”

그래서였다. 그들이 행복에 겨워 잊고 지내던 한 남자를 떠올리게 만든 것은.

“베릴, 당신이 괴로울 때마다 카를로스 에덴버는 그 두 배, 세 배, 괴롭게 만들면 되잖아요. 그 모든 죽음을 자아낸 것은 그 놈인데 왜 당신이 괴로워해.”

슬픔으로 뒤흔들리는 베를리아에게 메리쉬의 말은 빠르게 스며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누군가의 죽음을 대가로 행복을 누리고 있음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곧 영원한 고통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 고통을 누가 베를리아에게 선물했는지는 분명했다.

“누구 때문에 베릴, 당신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당한대로 돌려줘야죠. 그게 베릴의 방식이잖아요.”

메리쉬의 말이 맞았다. 슬픔과 비탄에 젖어 울기만 하는 것은 제가 아니었다. 베를리아가 작게 물었다.

“내가 카를로스를 찾아가도 괜찮아?”

카를로스는 어쨌든 과거 한때나마 베를리아가 사랑했던 상대였다.

연인의 입장에서 무엇을 위해서든 그런 사람을 찾는 것이 달갑지 않으리라 생각됐다.

“베릴의 고통을 덜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그러나 메리쉬는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로 베를리아에게 입을 맞췄다. 그가 그녀를 종용했다.

“베릴에게 끝나지 않을 고통이라면…그 원인도 그때마다 더욱 더 불행해야 맞는 거 아니겠어요?”

그 속살거림에 베를리아가 넘어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그래서 베를리아는 카를로스에게 희망을 불어넣고, 그것을 꺾었다.

노역장의 감시자들이 갑자기 대거 자리를 비운 것부터, 카를로스에게 건네진 탈출 제안.

그의 무리가 탈출 경로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까지 단 하나도 그녀의 작품이 아닌 게 없었다.

이 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몇 번이고 눈을 깜박이며 저를 쳐다보는 카를로스를 마주하며 베를리아가 입을 열었다.

“카를로스, 나는… 네가 겨우 이 정도로 불행한 걸 참을 수가 없더라.”

카를로스를 보고 있자니 베를리아의 안에서 잊고 있던 증오가 다시 피어올랐다.

복수를 끝내 홀가분하게 털어 버렸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스운 일이었다. 몇 번의 삶 내내 쌓아 온 증오를 어찌 한순간에 사라지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지.

게다가 증오를 흘려보내는 것은 애초부터 베를리아의 방식이 아니지 않던가.

“베를리아…!”

모든 순간이 사실은 베를리아에게 농락당한 것이었음을 안 카를로스가 분노를 드러냈다. 그가 이성을 잃고 베를리아에게로 달려들었다.

베를리아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을 기만했다. 제 절박함을 이용했고 자신을 속였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쿵.

“으윽!”

그러나 어디선가 튀어나온 메리쉬가 카를로스를 바닥에 처박았다. 카를로스는 오물 범벅이 되어 분노에 찬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베를리아, 가만 두지 않겠어…!”

그 모습을 베를리아는 가만히 내려다봤다.

마침내, 그녀가 원하던 대로 카를로스는 완벽히 추락했다.

분노에 이성이 흐려진 그는 더 이상 고귀한 척조차 하지 못했다.

“난 오늘처럼 너에게 끊임없이 희망을 불어넣을 거야.”

베를리아가 조곤조곤 카를로스에게 설명했다. 그녀의 말투만 본다면 썩 친절한 태도였다.

“너는 그 상황을 의심하면서도… 탈출할 수 있으리라는 유일한 희망에서 벗어나지 못해 매번 멍청한 짓을 반복하게 되겠지.”

희망은 때론 사람을 죽인다. 자신만 달라지면 카를로스도 달라질 거라 믿었던 베를리아의 희망이 그녀와 그녀의 소중한 이들을 해쳤듯이. 베를리아는 이제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네가 저 높이까지 올라갔다가 저 아래로 추락해서 망신창이가 되었으면 좋겠어.”

베를리아의 구두가 지그시 카를로스의 머리를 오물투성이 바닥에 내리눌렀다.

메리쉬가 그녀의 발을 치우려 발버둥 치는 카를로스의 팔에 그대로 검을 박아 버렸다.

“으읍!”

고통과 치욕감에 카를로스가 몸부림쳤다. 그것을 보면서 베를리아는 태연하게, 더러워진 구두를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몇 번이고 저 위에 올라가게 해 줄게.”

희망으로 가득 차 둥실 떠올라라. 더 높이, 더 멀리.

네 불행을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어쩌면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으로.

카를로스, 너는 속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죽을 수도 없는 비참한 삶을 버티기에는 그만한 희망이 없을 테니까.

“그래서… 추락해 버려, 카를로스.”

베를리아가 선고했다.

그간 엉망으로 굴려진 카를로스의 신체는 더 이상 충격과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기절해 버렸다. 그제야 그녀가 그의 머리에서 발을 치웠다.

노역장으로 돌아가면 그 때문에 탈출에 실패했다고 여기는 자들이 카를로스를 열렬하게 반길 것이다. 그것은 그에게 또 다른 지옥이 될 터였다.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밑바닥에는 끝이 없다지.”

베를리아가 기절한 카를로스에게 들으란 듯 읊조렸다.

“기대해, 매번 새로운 바닥을 보게 해 줄 테니까.”

베를리아는 여전히 카를로스를 증오했다. 그리고 그녀는 기꺼이, 증오를 버리지 않기로 했다.

카를로스가 제 영혼에 남긴 흔적을 볼 때마다 베를리아는 더 강렬한 증오를 불태우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게 바로, 카를로스의 가장 큰 불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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