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깽판치는악녀님 (145)화 (145/148)

외전 3. 카를로스(2)


 

“며칠 후, 감시자들이 단체로 이곳을 비운다더군. 남는 몇몇만 처리하면 우리는 자유요.”

사내가 희망에 차 말했다. 카를로스가 대답했다.

“기꺼이 동참하지.”

카를로스의 입가에 광기에 찬 미소가 내걸렸다. 신은 아직까지 자신을 버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

사내와 뜻을 함께하기로 한 자들의 수가 꽤 됐다. 아무래도 노역장에서 힘 좀 쓸 법한 이들은 죄다 끌어 모은 모양이었다.

이곳의 환경은 누가 뭐래도 결코 인간이 살 만하다고 할 수 없었으니, 사람들이 빠져나갈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런데 감시자들은 무슨 이유로 자리를 비운다는 거지…?”

다 함께 계획을 세우던 찰나, 카를로스가 의문을 품고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계획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그저 단순 무식하게 감시자들을 때려눕히고 이곳에 불을 질러 쫓아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뿐이었으니까.

계획은 허술했고 상황은 이상했다. 그래도 노역장에서 부리는 인간들이 꽤 많은데, 그들을 두고 감시자들이 외출을 한다는 게.

“가끔 그럴 때가 있소. 다만 불규칙하고 알려지지 않아 이번처럼 때를 노려 기습하기가 쉽지 않을 뿐이지.”

사내가 나름 차분하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그럴수록 카를로스의 안에서는 의심이 불타올랐다.

“매번 모르던 일을, 이번에 갑자기 알게 된 거야…?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카를로스의 말에 모여 있던 몇몇 눈에 함께 불안이 피어났다. 건장한 사내들이 몽구스처럼 목이 움츠러들어 단체로 갑작스레 주변을 둘러보는 꼴이 꽤 우스웠다.

그들은 당장이라도 이 허술한 계획에서 빠지겠다고 말할 것처럼 보였다.

“닥쳐! 안 나갈 거면 넌 빠져!”

무리 중 한 사내가 쾅! 하고 바닥을 손으로 내리쳤다.

이 말도 안 되는 계획은 그나마 사람이 여럿 모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카를로스가 그 사람들을 모조리 뒤흔들어놓고 있으니 열이 받은 듯했다.

“잘 생각하게. 형씨 말대로 이번처럼 ‘우연히’ 감시자들의 부재를 알게 될 일은 앞으로 어쩌면 영영 없어. 이 일에서 빠지면 탈출은 영원토록 요원한 일이 되겠지.”

카를로스에게 일을 제안한 사내가 차분하게 그를 설득했다.

그리고 카를로스는 절박했다. 본디 차가운 이성 속에 싹텄던 의심은 이번이 아니면 이 끔찍한 곳을 나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짓밟혔다.

“…내가 괜한 소리를 했어. 그래, 계획이 어떻게 된다고?”

카를로스는 결국 이 무리한 계획에 순응했다. 그는 제 입으로 계획을 물었으나 알고 있었다.

이딴 계획 따위 이미 아까 말한 막무가내 방식이 그 내용의 전부라는 것을.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카를로스가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이 계획에 있었으니까.

희망은 때로는 사람을 죽이는 법이었다.

***

카를로스에게 제안했던 사내의 이름은 제임스였다. 제임스는 이 노역장 무리의 우두머리를 맡고 있었다.

“한 번에 들이닥쳐야 하네.”

제임스가 무리를 둘러보며 말했다. 무리는 지금 얼마 남지 않은 감시자들의 숙소 근처에서 그들을 제압하기 위하여 대기 중이었다.

‘괜찮을까…?’

잠깐 의구심이 카를로스의 안으로 날아들었다. 그러나 제임스가 손짓하고 모두가 숙소로 달려드는 순간 그 생각은 휘발되어 버렸다.

“뭐야!”

“아악!”

“네놈들!”

감시자들이 반발할 새도 없이 들이닥친 제압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그 모든 상황이 아주 아주 순조로웠다.

“지금 뭐 하는 건가…!”

그리고 이 상황을 마무리 지으려는 카를로스를 갑자기 제임스가 말렸다.

“뭘 하긴, 마무리하려는 거지.”

카를로스의 손에는 감시자들이 쓰는 몽둥이가 들려 있었다. 그는 그것으로 감시자의 머리를 내려치려던 참이었다.

즉, 죽일 생각이었다는 말이다.

“쓸데없는 짓 말고 나오게, 그럴 시간 없어!”

제임스가 미간을 찌푸린 채로 소리쳤다. 그러자 카를로스가 신경질적으로 답했다.

“시간이 없으니 더 해야지. 죽은 자들을 수습하느라 우리를 쫓아올 이들의 걸음이 느려질 테니까. 게다가 저들이 멀쩡하게 우리를 쫓아오면 분명 문제가 될 거야.”

카를로스의 말은 한없이 냉정했다. 그는 원래 후환을 남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 살인을 하면 일이 더 귀찮아질 거야. 우리라고 이 자들한테 악감정이 없어서 그냥 두는 줄 아나?”

제임스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카를로스가 기묘한 기분이 되어 그를 쳐다봤다.

제임스의 말투가 본래의 질 낮은 말투와 조금 달라졌다. 마치, 원래의 어조가 드러난 것처럼….

“불이야!”

“다들 대피해!”

“물을 가져와!”

사람들의 비명이 여기저기에 울려 퍼지지만 않았더라면 카를로스는 그 이상함 속에서 무언가를 분명 잡아냈을 터였다.

“이럴 시간이 없네, 어서 빠져나가세. 다른 쪽에서 이미 불을 놓은 모양이니.”

무리는 불을 놓기로 한쪽과 감시자들을 제압하기로 한 쪽으로 나뉘어 있었다.

누군가 제압이 완료되었음을 신호함과 동시에 다른 쪽에서 불을 지른 듯했다.

카를로스가 잠시 기절해 있는 감시자들을 쳐다봤다. 무언가 찜찜함이 마음 한구석에 계속 남아 있었다.

“그만 좀 미적거려! 빨리 빠져나가야 한다고!”

그러나 시종일관 나름 느긋하던 제임스가 다급하게 재촉하자, 카를로스는 자리에서 일어나야만 했다.

카를로스는 이곳과는 전혀 상관없는 곳에서 왔으며, 심지어 자신이 여기에 어떻게 오게 된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니 무리가 자신을 두고 나가면 이 주변 지리를 몰라 길을 잃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될 경우 이 모든 일을 혼자 뒤집어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러니 제임스의 말대로 미적거리면 안 됐다. 카를로스가 빠른 발걸음으로 제임스의 뒤를 따랐다.

***

찰박찰박, 바쁘게 움직이는 발을 따라 더러운 물들이 밟혀 튀는 소리가 선명했다.

더러운 것들이 엉겨들어 바닥에서 질척거리는 게 물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조금만 더 가면 돼!”

누군가 외쳤다. 카를로스도 그러기를 간절히 바랐다.

가장 낮은 곳. 무리 중 한 사람이 이곳을 그렇게 말했던 것 같았다.

노역장을 나와도 그 주변 역시 처참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카를로스가 있던 노역장 같은 장소도 있었으나, 그 외에도 인간들의 시체나 죽어가는 인간이 쌓인 무더기 또는 온갖 쓰레기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그것은 카를로스에게 공포심을 부추겼다. 자신도 언제 저렇게 될지 몰랐다.

그는 자신이 지금 이 끔찍한 곳을 탈출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단히 안도했다.

엉기성기 판자를 얽어 만든, 집보다는 움막에 가까운 것들이 여기저기 자리 잡은 뒷골목은 어지러웠다. 마치 미로를 빠져나가는 듯했다.

한참을 돌고 돌았다. 어디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을 안내하는 무리가 없었더라면 절대로 빠져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의 멀쩡해 보이는 저택들이 점점 더 시야에 가까워지자, 카를로스는 점차 안도했다.

그 입구에서… 베를리아를 보기 전까지는.

“안녕, 여러분.”

베를리아가 느긋하게 웃으며 골목의 초입에 서 있었다.

마치 가장 낮은 곳만 빠져나가면 새로운 인생이 펼쳐질 것처럼 점차 상기된 얼굴로 뛰던 이들이 모두 멈추어 섰다.

그녀의 주변으로 골목을 막고 선 사람들이 빼곡했기 때문이었다.

“하룻밤 꿈은 다들 열심히 꿨는지 모르겠네.”

베를리아가 나긋한 어조로 말했다. 그 말투가 지나치게 부드러워서, 일순 그녀가 무리를 막는 게 아니라 구원하러 왔다고 착각이 들 만큼.

“그렇지만 이제 꿈에서 깰 시간이야.”

물론, 베를리아는 무리의 구원자 따위가 아니었다.

그녀는 그들의 희망이 최고조로 달아오른 순간 무참히 꺾으러 왔으므로.

“그 지옥으로 돌아가서 잘 기억해.”

베를리아의 손가락이 척 카를로스를 가리켰다. 그로 인해 그의 얼굴이 바짝 얼어붙었다.

“오늘 내가 너희들을 막는 건 다 저 남자 때문이야.”

그 순간 무리의 시선이 카를로스에게로 다닥다닥 달라붙었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하찮다고 여겼던 자들에게서 두려움을 느꼈다. 소름이 돋았다.

이제 카를로스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설령 황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라도 대응할 수 있던 때와는 달랐다.

지금의 카를로스는 날 선 악의 앞에서 완전히 맨몸으로 서 있었다. 그는 그 어떤 날보다도 더없이 무력했다.

“뭐 하는 거야! 눈앞에 저 자들만 치우면 그 빌어먹을 노역장을 벗어날 수 있잖아!”

카를로스가 신경질적으로 외치며 베를리아의 무리를 손가락질로 가리켰다.

이렇게 돌아갈 순 없었다. 돌아가게 되면 그에게 예정될 지옥이 뇌리에 선명했다.

그 순간 베를리아의 곁을 지키고 있던 자들이 칼을 빼들었다.

카를로스의 말에 금방이라도 베를리아 쪽으로 달려들 듯했던 이들이 주춤 뒤로 물러섰다.

“투항해. 닥치고 다들 노역장으로 돌아가.”

베를리아가 아까와 달리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 말투는 확실한 명령이었다.

그리고는 입가에 서늘한 웃음을 띠며 검지로 카를로스를 재차 가리켰다.

“지금 얌전히 돌아가면 저 남자가 책임을 지도록 해주지.”

베를리아의 목소리가 이브를 꼬여내는 뱀처럼 쉭쉭 사람들의 마음에 감겨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여기서 떼죽음을 당하거나, 돌아가서 더한 일을 당하거나 해야 할 거야.”

베를리아의 경고는 지독히도 현실성이 있었다.

모두가 주춤주춤 카를로스로부터 멀어졌고 탈출의 의지를 하나둘 꺾어갔다.

희망이 그렇게 하나, 하나 꺾이는 것을 보며 베를리아가 카를로스에게 다가왔다.

“좋았지?”

카를로스가 미간을 확 찌푸렸다. 그러나 베를리아는 그가 대꾸하도록 두지 않았다.

“탈출할 수 있을 줄 알았을 거야.”

베를리아가 픽 카를로스를 비웃었다. 그 비웃음이 모든 것을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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