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깽판치는악녀님 (143)화 (143/148)

외전 2. 리암


 

데니안을 용서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가 제멋대로 대가를 치러 버린 후, 그에 대한 전의를 상실했을 뿐.

데니안은 변했다. 게다가 그는 안젤라에게 필요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베를리아는 데니안에게 더 이상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베를리아에게는 처분을 결정해야 할 대상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그녀는 안젤라를 돕기로 한 후, 칩거를 완전히 끝내고 나서야 리암을 찾아갔다.

“약속이 다르잖아, 베를리아!”

물론, 변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베를리아가 휴식을 취하는 세 달여 동안 로베르 저택에 강제로 유폐당한 리암이 그랬다.

“내가 뭘.”

자신을 보자마자 다짜고짜 소리치는 리암에게 미간을 찌푸린 베를리아가 퉁명스레 말했다. 그러자 그가 곧바로 다시 소리쳤다

“나를 저택에 방치해 뒀잖아! 사람들은 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모를 거고… 데니안은 오히려 공을 세우고 여전히 기사단장 직위를 유지하고 있는 판에…!”

“아하, 그러니까.”

베를리아가 리암의 말을 뚝 끊었다. 그녀의 어조에서 빈정거림이 한가득 묻어나왔다.

“지금 너는 네가 여전히 사람들이 우러러보던 황태자의 최측근 같은 권력자가 아닌 게 불만인 거구나?”

베를리아가 기가 차 웃었다. 그녀는 리암이 자신에게 원망을 토해내는 이유를 빠르게 알아차렸다.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고? 사람들이 이전처럼 네게 아부하기 위하여 네 저택의 문턱을 뻔질나게 드나들지도 않고, 너는 권력을 누리기는커녕 귀족들 사이에서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가 되는 게 지금 분하다는 거잖아?”

베를리아의 말에 반박하려던 리안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가 속물적인 그의 속내를 적나라하게 지적한 탓이었다.

“아니라고 했잖아…! 그게 아니고… 그래, 사람을 이렇게 혼자 집에 처박아두는데 화내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어?”

“내가 그럼 뭘 어떻게 했어야 했는데?”

베를리아가 두 팔을 꼬아 팔짱을 끼며 짜증스레 말했다.

“내가 네게 한 약속은 네 빚을 탕감해 주겠다는 것뿐이었어.”

베를리아는 리암과의 약속을 지켰다. 이제 그의 이름으로 남은 빚은 없었다. 그녀는 딱 거기까지만 할 수도 있었다.

“네가 사실 살아 있음을 내가 굳이 알리지 않은 거? 저택에만 갇혀 있다 보니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모양인데, 네가 살아 있으면 지금 이렇게 사지 멀쩡했을까? 황태자의 이름난 마법사가?”

데니안은 이전 황실을 점령하는 일에 공을 세웠다.

그러나 리암은 달랐다. 에덴버 황실을 끌어내리는 일에 눈에 띄게 공여한 바가 없었으므로 백성이나 귀족들이 그를 어찌 처리할지 모를 일이었다.

“그건 네가…!”

“그걸 내가, 그거까지 도와야 했어? 내가? 왜?”

물론 베를리아에게는 리암을 전과 똑같이는 아니더라도 여전한 권력을 누리게 해 줄 방법이 있었다.

데니안과 같이 새로운 황실이 들어서는데 리암이 공을 세우도록 도왔으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도 베를리아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왜 베를리아가 굳이 그렇게 도와야만 했단 말인가?

“널 몰매 안 맞게 했으면 나한테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니야?”

물론 리암한테 딱히 그런 감사를 바란 적은 없었다. 베를리아는 그에게 기대 따위를 품지 않았으니까.

다만 물에서 건져놨더니 보따리까지 내놓으라고 할 줄은 몰랐을 뿐이다.

“데니는… 데니안은 도와줬잖아!”

리암이 반박하듯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그게 퍽 억울한 모양이었다. 베를리아는 괜히 왔다고 후회했다. 짜증이 치밀었다.

안젤라도 데니안도 변했다. 그래서 리암도 어쩌면 그러지 않을까, 조금쯤 궁금했다. 주변 인물들의 변화는 베를리아의 삶이 진짜로 에를니아와 카를로스가 만든 그 무대를 탈출했음을 증명하는 것 중 하나였으니까.

베를리아는 자리에서 앉을 새도 없이 등을 돌려 문 쪽으로 다가갔다. 쓸데없는 호기심으로 시간을 낭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 가!”

리암이 곧바로 베를리아를 붙잡았다. 이제 그가 붙잡을 동아줄이라고는 그녀밖에 없기 때문일 터였다.

탁!

그러나 베를리아는 곧바로 리암의 손을 쳐냈다.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이 한 인간을 바꿀 수 있다는 오만을 버렸다.

인간은 변화시킬 수 없다. 사람이 변하는 것은 오직 스스로에 의해서일 뿐.

“네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리든 말든 네 마음대로 해.”

베를리아가 싸늘하게 말했다. 딱히 데니안을 구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에 제게 협조가 가능하며 기사들을 움직이게 할 상대가 데니안이었을 뿐이다. 그는 제 말을 거절하지 못할 테니까.

반대로 말하자면 리암에게는 그런 최소한의 믿음조차 가지지 않았다는 이야기였다.

솔직히 베를리아에게 진심으로 미안해한 것도 아니고 필요에 의해 카를로스와 그녀의 쪽에 이리 갔다 저리 갔다 바빴던 그를 뭘 믿고 일을 맡기겠는가.

리암은 그간 제 행동도 생각하지 않고 억울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베를리아에게는 왜 데니안은 되고 그는 안 됐는지에 대하여 설명해 줄 생각도, 의무도 없었다.

“베릴!”

리암이 외쳤다. 그가 지금 베를리아에게 이렇게 절박한 이유는 간단했다. 스스로는 이전처럼 일어설 용기도 힘도 없기 때문이었다.

‘나 호구였네, 진짜.’

베를리아가 속으로 혀를 찼다. 그간의 생 동안 자신이 멍청하게도 달라는 대로 다 주었던 결과물이기도 했다.

리암은 타인에게 빨대 꽂고 사는 것에 대한 최소한의 미안함도 없어 보였다.

“네 빚도 사라졌으니… 너와 나, 더 이상 볼 일 없을 거야.”

베를리아의 말투가 한없이 단호했다. 그녀가 이대로 두면, 리암은 이 저택에서 홀로 시간만 축낼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견디지 못할 테니 베를리아는 그것도 썩 괜찮은 벌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더 이상 리암 따위에게 관여하고 싶지도 않았고.

“베릴, 이렇게 그냥 가면 어떻게 해!”

리암이 다시 베를리아를 붙잡으려 들었다. 그러나 언제 로베르 저택 안으로 들어왔는지, 밖에서 기다리던 메리쉬가 그 순간 빠르게 리암을 바닥으로 내동댕이쳐 버렸다.

“쯧, 베릴에게 그만 좀 징징대. 심지어 그 나이 먹고…. 네 놈 인생은 네 놈이 챙겨. 왜 자꾸 남의 연인에게 네 인생 책임져 달라고 징징거려. 수치심도 없나? 막말로 베릴이 죽든 말든 내버려 둔 네놈이, 베릴과 무슨 사이씩이나 된다고 베릴이 신경을 써야 하나?”

메리쉬가 노골적으로 한심스럽다는 눈으로 리암을 내려다봤다. 그 와중에도 그는 이 잘난 사람이 자신의 연인임을 자랑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리암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제야 수치심이 든 모양이었다.

그 나이 먹고 징징거린다는 말은 그가 어린애만도 못하다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리암은 얼마든지 울어 재낄 수 있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그것만으로는 일을 해결할 수 없는 어른이었으니까.

“감히 평민 따위가 날 모욕해…!”

바닥을 나뒹굴었던 리암이 화가 난 듯 벌떡 일어섰다. 그래봤자 메리쉬의 앞에서는 범 앞의 하룻강아지처럼 하찮아 보였지만.

“너도 참 한결같다.”

리암을 상대하기 싫어 그냥 가 버리려던 베를리아가 결국 다시 입을 열었다.

그녀는 리암 따위가 제 연인에게 막말을 퍼붓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므시아에 도움받으러 오면서도 퍽 억울해했잖아, 너.”

망해가는 집안이었어도 자부심이 있었다. 우습게도 리암은 그랬다.

그래서 그는 아무것도 없어 므시아까지 왔으면서도, 므시아에 도움받는 것을 수치스럽다고 여겼다.

그 우스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하여 리암은 매번 베를리아에게 그 사실을 숨겨달라고 했다. 사람들이 로베르 후작가가 므시아에 채무가 있음을 모른 이유였다.

“네멘을 두려워하면서도 평민한테 고개 숙여야 한다는 사실을 견디기 싫어했지.”

네멘 리들턴은 귀족들조차도 두려워하는 존재였다.

그래서 베를리아는 당시 리암이 므시아를 찾아와 네멘을 만났을 때의 표정을 더 똑똑히 기억했다. 두려움과 함께 그 속에는 분명 경멸이 묻어났다.

베를리아는 훗날 그것이 범죄자를 향한 경멸만은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다.

만약 므시아가 그저 범죄 집단이었기에 혐오한 것이라면, 리암은 그토록 므시아를 잘 이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네 핏줄이 귀하고 대단한 게 아니라, 돈 많고 힘 있는 집안에 태어나 남들보다 훨씬 좋은 출발선에 선 것뿐인 주제에.”

고귀한 푸른 피, 그딴 것은 없다. 그저 날 적 누가 더 달리기 쉬운 길에 서 있느냐 그뿐이었다.

베를리아는 그 길의 출발선이 모든 사람에게 같을 수 없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에 관하여 딱히 억울한 마음은 없었다. 그건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게다가 그녀는 어쨌든 이렇게 자신의 힘으로 여기까지 올랐지 않았던가.

“아니라고 할 거라면 너를 봐, 리암 로베르. 지금 네가 나나 메리쉬보다 나은 게 뭐가 있는지.”

그러나 그 핏줄 하나 가지고 내세운다면 말은 달라지는 법이었다

“내가 지금 당장 귀족 작위 때려친다고 해도, 나는 나야. 베를리아 리들턴- 그 이름 하나로 나를 증명할 수 있는.”

베를리아가 삐뚜름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턱을 치켜들었다. 그 모습이 더없이 오만했다.

“네게는 뭐가 있는데?”

베를리아가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듯 리암에게 고개짓했다. 당연히 그가 대답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리암 로베르, 네 주제에.”

평민이나 귀족 따위가 문제가 아니라… 리암 로베르 자체로 별 볼 것이 없다. 베를리아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리암의 얼굴은 점점 흙빛이 되었다.

카를로스를 사랑하던 시절, 베를리아는 자신이 평민임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했다. 카를로스가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리암은 자신이 멍청하게 지나온 과거의 그녀를 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로 인해 베를리아에게 불쾌감을 주었다는 사실도.

“미안해, 내가 실언했어. 네게 화낼 일이 아니었는데. 나는… 베릴, 네가 아니면 다시 일어설 수 없는 거 알잖아.”

그래서 리암은 태세를 바꾸어 매달렸다. 퍽 우스운 일이었다.

그리고 리암이 궁지에 몰리지 않았더라면 이토록 쉽게 인정할 리도 없었다. 베를리아는 그 사실을 잊지 않았다.

“알아, 그래서 그냥 남겨 두려는 거야.”

베를리아가 마지막으로 리암에게 환히 웃어 주었다.

“평생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채로 남아 있어, 리암 로베르.”

베를리아가 자연스레 메리쉬와 팔짱을 끼며 돌아섰다.

어쩌면… 리암이 변했다면, 데니안처럼 최소한의 기회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카를로스만큼 그를 증오하지는 않았으니까.

“베릴!”

리암이 다급하게 베를리아에게로 다가왔다.

그러나 메리쉬가 휙 밀어 버린 문은 쿵 소리를 내며 리암의 앞에서 굳게 닫혀 버렸다.

“가자, 멜.”

“네, 베릴.”

두 사람은 유유히 로베르 저택을 빠져나왔다. 리암은 변하지 않았고 베를리아는 변했다.

그래서 리암은 행복하지 않을 것이고 베를리아는 행복했다. 그게 리암과의 마지막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