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깽판치는악녀님 (142)화 (142/148)

외전 1. 황제의 스캔들(4)


 

데니안은 계속해서 황실 기사단장을 맡게 되었다. 그만큼 안젤라가 믿을 수 있으며 동시에 기사들을 잘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 데니안 외에는 없는 까닭이었다.

그런데 그 후부터 어쩐지 데니안이 안젤라를 피하기 시작했다.

분명 데니안이 황실 기사단장의 자리까지 쉽게 올라온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애초에 스스로 무언가를 꾸미고 숨기는데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안젤라가 데니안의 이상한 행동을 알아차린 것은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다.

“데니, 왜 날 피해?”

안젤라는 이전처럼 망설이지 않고 데니안에게 곧바로 물었다.

둘만 있는 황제의 집무실 안, 그는 그녀의 질문에 답하지 않은 채 눈을 피했다. 고요함만이 그 공간을 맴돌았다.

“데니안.”

안젤라가 데니안을 채근했다. 그가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다.

“폐하, 저를 이전과 같이 대하시면 안 됩니다.”

“데니, 그게 무슨 소리야?”

“카를로스가 황태자 시절, 평민들과 어울린다고 하여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폐하께서는 모르시겠지요.”

평민인 베를리아가 앉혔고, 평민인 데니안이 지켰던 황태자.

귀족들은 그 사실을 괄시했다. 카를로스가 제 측근 중 귀족 출신이었던 리암을 가장 내세웠던 이유였다.

본디 귀족들이 밀던 선황의 자식들은 모두 고위 귀족 가문의 모친을 둔 이들이었다.

카를로스조차 약소국 출신 왕녀의 소생이라고 업신여겼으니 평민들을 어찌 취급할지는 뻔한 일이었다.

물론 안젤라는 알 일 없는 사실이었다. 고귀하고 선한 성녀의 앞에서는 많은 이들이 제 본성을 드러내길 꺼렸고, 그리하여 가식적으로 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신전이 안젤라를 지도자로서 두려워하는가 아닌가와는 별개로, 신전은 진실로 사랑스러운 성녀를 아껴 험한 꼴을 보여 주지 않으려 한 탓이 가장 컸다.

초반, 베를리아가 안젤라를 두고 온실 속 화초라고 했던 말이 아주 괜한 것은 아닌 셈이었다.

“귀족들… 특히 중앙 귀족들 사이에서 평민에 대한 인식이 안 좋다는 건 나도 이제 알아, 데니.”

안젤라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말했다.

한때 온실 속 화초였다고 해서 영원토록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황제가 되어 만민을 위한 정치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에 부딪히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안젤라는 황제가 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제 앞에서 온화하게 웃던 귀족들의 민낯을 보게 되었다.

“황제께서 느끼시는 것은 실상의 반의 반도 되지 못할 겁니다.”

데니안이 굳게 결심한 듯 단호한 표정을 하고 안젤라와 시선을 마주했다.

귀족들은 날 적부터 성녀였던 안젤라의 신분을 귀히 여겼다.

오죽하면 카를로스가 그녀와 가까워지자, 귀족 중 누군가는 그제야 천한 피 때문에 걱정이었던 후사가 안심이라 암암리에 발언할 정도였다.

“귀족들은 폐하의 피를 경애하니까요.”

안젤라의 표정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데니안의 말이 날카로운 칼날처럼 그녀를 찔러 왔다.

“폐하께서는 귀족들의 위에 있어도, 그들이 반감을 갖지 않을 극소수의 사람이시죠. 그러니 폐하께서 어떻게 평민에 대한 귀족들의 태도를 실감하시겠습니까.”

귀족들이 안젤라의 신분을 어찌나 귀히 여기는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성녀로 태어나, 종래에는 모든 신을 아우르는 에르젠타샤의 딸이 되지 않았던가.

특히나 중앙 귀족들은 대개 건국부터 신성 제국과 함께 자리 잡은 가문에서 나고 자라, 신이 택한 나라라는 것에 뼛속부터 자부심을 가진 자들이었다.

귀족들이 신을 얼마나 믿느냐와는 별개로 안젤라의 존재는 그 자부심을 채워 주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귀족들이 본능적으로 안젤라에게 유한 까닭이 되었다.

그 때문에 귀족들은 성녀였던 안젤라가 정치에 능숙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쉬이 무시하지는 못했다.

데니안의 말이 옳았다. 안젤라는 절대로 그나 베를리아가 겪은 것을 고스란히 알 수 없었다.

“저와 거리를 지키셔야 합니다.”

제국의 긴 역사 아래 드디어 황실과 신전을 모두 발아래 둔 황제가 안젤라였다.

그런 그녀는 온 제국이 아니라, 온 대륙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폐위당한 황태자의 최측근 기사를 옆에 두는 것만으로도 기실 말이 많습니다. 그런데 저를 가까이하는 행동까지 보이신다면… 외람되나 어찌 오해를 살지 모를 일입니다.”

입 밖으로 직접 내지는 않았으나, 안젤라와 데니안 사이에 스캔들이 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실제로 폐하의 호위로 곁에 있을 때마다 느껴진 기척이 한둘이 아닙니다.”

카를로스는 팔다리의 힘줄이 끊겨 더는 검을 들 수 없었다. 그러니 이 제국에서 메리쉬가 아니고서야 데니안에게 기척을 숨길 수 있는 자는 없었다.

데니안은 안젤라의 곁을 지킬 때마다 자동적으로 신경을 곤두세우게 되었다.

데니안 또한 황궁에서 지낸 세월이 꽤 길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제가 안젤라와 가까운 것이 그녀에게 어떤 악영향을 끼칠지를.

“저를 멀리하십시오.”

데니안이 다시 한번 강조했다. 그러자 안젤라의 두 눈이 흔들렸다.

“데니, 너까지 멀리하면….”

안젤라가 말끝을 흐렸다. 그녀는 자신이 이 황궁에서 데니안을 얼마나 의지했는지를 새삼 깨달았다.

“멀리하셔야 합니다, 황제시니까요.”

데니안의 말투는 시종일관 깍듯하기 그지없었다. 안젤라는 뒤늦게야 그것을 깨달아 말을 잃었다.

안젤라를 존중하여 존댓말을 쓰던 것과는 달랐다. 데니안의 말투는 명백히 거리를 두고 있는 사람의 그것이었다.

그 앞에서 안젤라는 끝내 완전히 말을 잃어버렸다.

***

‘황제는 외로운 자리가 될 거야, 앤지.’

안젤라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를 택한 이후, 베를리안은 걱정을 버리지 못했다.

베를리아에게는 황제라는 자리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자리를 제가 권했으니, 한편으로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괜찮아, 너도 있고 데니안도 있잖아.’

그때, 안젤라는 정말로 괜찮았다. 어차피 모든 사람이 자신이 준 만큼 마음을 돌려주거나, 모든 사람을 곁에 둘 수 없다는 것은 이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누군가를 멀리해야만 하는 건 안젤라에게 여전히 익숙하지 못했다. 익숙해지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데니가 내게 거리를 두기 시작하니 마음이 이상해, 베릴.”

안젤라는 당황스러운 기색이었다. 자신이 이렇게 동요할 줄 스스로 몰랐던 탓이었다.

그러나 아직 황궁과 신전이 완전히 합쳐지지 못했고, 우선 나라의 대소사를 처리해야 했던 까닭에 안젤라는 황궁에 머물러야만 했다.

그로 인해 그녀는 자신이 가진 많은 것들을 신전에 두고 올 수밖에 없었다.

물건도… 사람도.

베를리아가 휴식을 취하는 사이, 안젤라가 궁에서 가까이 지낼 사람은 데니안뿐이었다. 사방이 적이었다. 안젤라는 의연하게 버텼으나 사실상 대단히 외로웠다.

그 와중에 몇 달간 단 한 사람만을 곁에 둔다는 것은 관계의 의미를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베를리아는 일이 제가 생각했던 방향과는 다르게 돌아간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데니안이 아니라, 안젤라가 먼저 흔들렸다. 베를리아는 새삼 미래가 바뀌었음을 깨달았다.

“…앤지, 데니안이 신경 쓰여?”

베를리아가 나직하게 물었다.

네 번의 생 동안 그녀의 기억 속에서 안젤라는 항상 카를로스와 함께였다. 그래서 한편으로 이제는 그와의 모든 인연이 끊기는 듯해 기뻤다.

안젤라의 새로운 상대가 데니안이 될 줄은 몰랐지만.

“…응.”

안젤라도 조심스레 대답했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이 다른 누군가에게로 흘러가는 중이라는 사실이 낯선 모양이었다.

베를리아는 어쩌면 안젤라의 상대가 데니안이라서 다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안젤라를 오랫동안 좋아했고 인내심도 있으며 우직한 사람이니까.

“그럼 마음이 가는 데로 해, 앤지.”

베를리아가 안젤라의 등을 떠밀 듯이 가볍게 톡 건드렸다.

“내가 그래도 될까? 데니 말대로 지켜보는 눈도 많고….”

안젤라가 망설이며 걱정스러운 어조로 중얼거렸다. 황제인 자신이 사사로운 감정으로 행동을 취해도 될지 망설여졌다.

“되게 만들면 되잖아.”

베를리아가 시원스레 웃었다.

“나라면 내가 원하는 사람을 포기하는 것보다, 다른 일을 해내는 게 더 쉬울 거야.”

안젤라가 멈칫했다. 베를리아의 말은 짐짓 너무 쉽게 이야기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러나 안젤라는 그녀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베를리아는 행복을 누릴 자격을 거머쥐었다.

이번에는 안젤라의 차례였다.

안젤라가 지금 당장 데니안과 결혼을 하고 싶을 만큼 그가 좋다던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저 옆에 있어 주었으면 했다.

그러나 황제의 자리란 그 작은 욕심조차도 이루기 어려운 자리였다.

혼인은 생각하지 않고 하는 연애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황제가 한다면 의미가 달라진다. 받아들이는 자들이 가볍게 여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안젤라는 데니안의 말대로 그를 멀리하거나 혹은 가까이하여 돌아올 일 또한 감당해야만 했다.

한참의 침묵 끝에 안젤라가 입을 열었다.

“나는 내 사람 하나 스스로 정하지 못하는 황제가 되고 싶진 않아.”

안젤라가 결연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녀가 말하는 ‘내 사람’은 비단 데니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황제의 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황실 기사단장조차도 멀리해야만 한다면, 그 누구도 안젤라의 뜻대로 편히 곁에 둘 수 없을 터였다.

황제란 입을 열지 않아도 소문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으니까.

“네가 원한다면 도울게.”

베를리아가 말했다. 그녀는 안젤라를 진심으로 친구로 여겼고 행복하길 바랐다.

그렇다면 지금처럼 계속 칩거 생활을 이어갈 수는 없을 터였다. 영원토록 빈둥빈둥 놀기에는 글렀다는 뜻이었다.

아마 메리쉬가 들었다면, 굉장히 싫어했을 발언이었다.

“고마워, 베릴.”

안젤라는 웃으며 거절하지 않았다. 모든 길을 혼자 가야만 황제인 것은 아니었으니까.

***

그 후 일주일 뒤, 안젤라는 황제로서 관리 등용 방식의 개정을 백성들 앞에서 공표했다.

귀족들의 예상보다도 빠른 행동이었다. 반발이 일었으나 안젤라는 물러서지 않았다.

황제, 안젤라 이너스틴이 국가 관리를 기용함에 있어 신분의 고하와 출신 성분을 가리지 않았으니 황실은 조용할 날이 없었다.

그러나 1년 뒤, 기어코 황제는 국가 관리의 절반을 평민으로 바꾸는 것에 성공한다. 사실상 귀족들의 패배였다.

그리고 그해, 오뉴월의 황금빛 햇살이 이제 막 덥혀지기 시작한 산들바람과 함께 내리쬐는 그런 날.

“데니, 나랑 연애할래?”

안젤라는 데니안에게 고백했다. 바야흐로 봄이 흘러가는 날, 두 사람 사이 새로운 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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