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깽판치는악녀님 (141)화 (141/148)

외전 1. 황제의 스캔들(3)


 

베를리아만을 향해 있던 이목이 순식간에 홱 안젤라에게 쏠렸다. 귀족들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베를리아가 완전히 전면에 나섰던 탓에, 그들은 지금껏 이것이 황제의 의중이리라 굳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신경 쓰지도 않았는데 황제가 지금 베를리아를 편드는 말을 한 것이다.

귀족들이 한편으로는 안젤라를 베를리아의 덕에 우연히 황위에 앉은 꼭두각시 정도로 보고 있었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들은 아주 당연하게도 베를리아만 꺾으면 될 거라고 여기고 있었다.

“다행히도 짐에게는 신을 함께 모시던 이들이 있으니, 그들이 그대들의 부담을 덜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안젤라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당당하던 귀족들의 낯빛은 어두워졌다.

안젤라의 말은 즉, 귀족들이 비울 자리를 신관들로 채우겠다는 의미였다.

갑작스럽게 신권과 황권이 통합된 시점이었다. 신관과 귀족들의 신경전은 극에 달해 있는 탓에, 이 시점에서 누가 더 권력을 잡느냐는 두 세력 사이 아주 예민한 문제였다.

그런데 지금 안젤라가 아예 귀족들의 자리를 없애 버리겠노라 선언했다. 아를레나 공작과 라미르니에 후작의 표정이 더없이 싸늘해졌다.

“폐하께서 잘 모르실 수도 있으나, 애석하게도 황실과 신전은 다릅니다.”

라미르니에 후작이 대단히 안타까운 것처럼, 마치 무지한 이를 가르치듯이 말했다. 참으로 오만하기 그지없는 태도였다.

“그럴 수도 있겠지.”

안젤라는 그 모습에 노여움 하나 없이 긍정했다. 얼굴에 띤 미소가 더없이 그녀를 여유로워 보이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그대들이 보기에, 저들이 모시는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끝까지 진실을 모르던 자들과 진실을 밝혀낸 자들 중 백성들이 누구를 따를 것 같은가?”

에덴버 황실의 끝을 고할 때, 안젤라가 신전을 내세웠던 덕에 신전은 현재 이전보다 더 많은 백성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게다가 신들이 늘어난 만큼, 그 신의 신도를 받아들일 신전 또한 더욱 필요해졌다.

귀족들과 신관들 사이 눈치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신관들이 유리한 상황이었다.

다만 지금까지 무게추가 한쪽으로 쏠리지 않은 것은 안젤라가 어느 한쪽의 편을 들지 않고 쭉 중립을 유지한 덕이었다.

귀족들은 사실 진즉에 안젤라에게 굽혔어야만 했다.

그러나 평화를 추구하는 자애로운 성녀의 이미지와, 늘 저들에게 적당한 대가를 받고 져 주던 황제에게 익숙했던 그들은 그 사실을 잊어버렸다.

“폐하께 여쭙습니다, 과연 그들이 저희를 온전히 대체할 수 있겠습니까?”

라미르니에 후작의 어조에 날이 서 있었다. 그는 지금껏 안젤라가 신관들을 굳이 제 세력으로 끌어들이지 않은 이유를 정확히 지적했다.

안젤라가 신관들을 지지하는 순간 정국은 균형을 잃어버린다. 황제인 그녀의 입장에서는 귀족들로 신관들을, 신관들로 귀족들을 억제해야만 했다.

그런데 귀족들이 설 자리를 없애 버린다? 그것은 안젤라로서도 신관들에게 휘둘리게 될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는 의미였다.

그러니 라미르니에 후작이 이 상황에서도 뻣뻣하게 고개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때 베를리아가 조용히 지적했다.

“무례하군요, 라미르니에 후작.”

라미르니에 후작이 움찔거렸다.

베를리아의 말은 옳았다. 황제가 선택한 사람을 의심한다는 것은 황제의 판단을 의심한다고 대놓고 말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라미르니에 후작도 자신이 순간적으로 경솔했음을 속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라미르니에 후작의 미간이 미약하게 찌푸려졌다.

어느덧 동등한 후작이 되어, 아니 실은 그보다도 더한 권력을 가지게 되어 자신을 후작이라 부르는 그녀가 아니꼬웠다. 그래도 어떻게 할 수는 없었지만.

“…소신이 불충했습니다, 폐하.”

결국 라미르니에 후작이 안젤라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가 이를 악물었다. 방금 베를리아가 말을 꺼낸 타이밍이 그토록 적절할 수가 없었다.

안젤라가 베를리아의 편을 들고, 또 다시 베를리아가 안젤라의 편을 들었다. 베를리아가 누구의 사람인지 명확히 보여 주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황제에게 베를리아가 있다면, 황제는 진실로 신관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가 제 주인에게 적 되는 자들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이곳의 모든 귀족이 알고 있었다.

황제가 허락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베를리아는 이전에 그랬듯이 황제에게 반기드는 자들의 입을 영영 다물게 만들어 버릴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귀족들은 그 상황에서 안젤라의 말이 베를리아의 뜻을 이길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단번에 제도를 바꾸면 문제점이 크게 발생할지도 모릅니다.”

안젤라가 베를리아의 편을 들었을 때부터, 내리 입을 다물고 있던 아를레나 공작이 드디어 말을 꺼냈다. 그리고 그 발언에 귀족들이 작게 탄식했다. 베를리아가 꺼낸 이야기를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동시에 귀족파 귀족들은 안도했다. 라미르니에 후작이 황제에게 예의 없이 군 반면, 아를레나 공작은 적당한 때 빠져 베를리아와 황제의 뜻을 수용했다. 누가 더 손해를 볼지는 명확했다.

아를레나 공작이 잠시 담담한 눈으로 베를리아를 바라봤다. 공작은 이미 그녀와 황제가 죽이 맞던 시점부터, 자신들에게 승산이 없으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러나 분노는 일지 않았다. 어차피 정치판에서는 영원한 아군도 적도 없는 법이었다. 이미 결정된 일에 대하여 쓸모없는 감정을 일으키기보다, 앞으로 어떻게 대처할지가 중요했다.

“일리 있는 말이야. 그러면 어떻게 할지 지금부터는 그에 대하여 논의하도록.”

안젤라가 만족스레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의 회의는 완전한 베를리아와 안젤라의 승리였다.

***

“앞으로 그런 일이 있거든 미리 나와 상의해 줘.”

황제의 집무실, 단 둘만 남게 되자 안젤라가 베를리아에게 말했다.

“베릴, 널 못 믿어서가 아니야. 네가 날 믿었으면 해.”

“앤지, 널 못 믿은 게 아니라….”

베를리아가 드물게 난감한 표정으로 변명했다. 그러나 안젤라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날 믿는다면 너 혼자 모든 것을 감당하려고 하지 마. 나는 카를로스와 다르고, 무엇보다 네가 지켜 줘야만 하는 황제가 되고 싶지 않아.”

허리를 꼿꼿이 세운 안젤라의 표정은 의연했다.

그녀는 자신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로 결정되었을 때부터, 누군가에게 의지할 생각 따위는 버렸다.

도움을 거부하지는 않겠으나 혼자서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사람이 되길 원했다.

게다가 자신의 유일한 친구인 베를리아에게 가장 최악이었던 사람처럼 되고 싶지도 않았고.

베를리아가 잠시 멍하니 안젤라를 바라봤다.

안젤라는 늘 그녀를 놀랍게 했다. 지긋지긋하게도 바뀌지 않는 인간이 있는 한편, 그와 상반되게 나날이 성장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매번 안젤라가 증명해냈다.

“응, 미안해. 내가 경솔했어. 다음에는 너와 상의하고 싶어, 앤지.”

베를리아가 작게 웃었다. 이번 생에는 이런 사람과 친구가 되었다. 그게 좋았다.

베를리아가 인정하고 나자 안젤라도 더 이상은 그녀의 독단을 문제 삼지 않았다. 그저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런데 왜 이 시점에 관리 등용 문제를 꺼내 든 거야?”

베를리아가 주도적으로 황실 관리의 기용 방법을 바꾸자 말했으니, 그녀는 이 일에서 멀어질 수 없었다.

즉 베를리아의 휴식도 여기서 끝이라는 의미였다. 안젤라는 그녀가 그토록 원하던 휴식이 이렇게 끝나 버렸음을 안타까워했다.

“앤지, 혹시 요즘 데니안과 가깝게 지내?”

“어, 어…?”

베를리아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안젤라에게 되물었다. 그리고 안젤라의 반응은 누가 봐도 당황한 사람의 것이었다.

“왜 그렇게 당황해?”

그래서 베를리아도 멈칫했다. 가볍게 물은 것이었는데, 안젤라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아니, 그건 왜 물어?”

안젤라가 애써 침착함을 가장하며 물었다. 그 모습이 더욱 의아스러웠으나, 베를리아는 쉬이 대답해 주었다.

“조사해 본 결과, 귀족들이 너에게 혼인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한 시점이 몇몇 귀족이 너와 데니안의 사이를 언급한 이후라고 하더라.”

베를리아가 조사원에게 들은 내용에 따르면 귀족들이 안젤라의 혼인을 그토록 물고 늘어진 까닭은 단순했다.

“앤지, 너와 데니안의 사이가 가까워 보이니까… 귀족 출신이 아닌 황후를 맞이할까 봐, 그게 염려되었던 모양이더라고.”

정말이지 아니꼽게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이유였다.

현재 귀족들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으니 당분간은 안젤라의 혼인 이야기도 쏙 들어갈 터였다. 그러나 귀족들을 정신없게 할 방법이 이 뿐만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를리아가 이와 같은 방법을 선택한 것은 그녀가 느낀 못마땅함이 한몫 한 셈이었다.

평민들이 황실의 중요 요직을 맡기 시작하게 되면, 결국 귀족들도 평민이라고 하여 무시할 수만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귀족들의 의심이 아주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닌 거야?”

안젤라의 표정을 본 베를리아가 조금 놀란 말투로 물었다.

이 모든 것을 계획한 베를리아의 머릿속에서 이런 안젤라의 반응만은 예외였다.

그녀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했으나, 그녀의 삶에 있어서 무려 네 번 동안 안젤라가 카를로스의 연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쩌면 베를리아는 안젤라가 다른 누군가와 이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특히나 그 대상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안젤라와 이어진 적이 없었던 데니안이 되리라고는 더더욱 생각하지 못한 터였다.

“으음, 그게….”

안젤라가 말끝을 흐렸다. 정말로 그녀와 데니안의 사이에 무언가 있기는 있는 모양이었다.

“뭔데?”

베를리아가 자신도 모르게 안젤라에게 다가가 비밀 이야기를 듣듯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본디 세상에서 가장 재밌는 것이 남의 연애사라는데, 베를리아로서는 그 긴 생 동안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러니 살짝 들뜨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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