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황제의 스캔들(2)
일을 맡겨 둔 수하에게서 결과를 얻은 지금, 베를리아의 입매가 삐뚜름하게 비틀렸다.
“…정말 겨우 이거 때문에 그렇게 안젤라한테 결혼하라고 다들 입을 모아 성화인 거야?”
베를리아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서류를 빤히 쳐다봤다.
“알아본 바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수하 또한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매한가지인 듯싶었다. 하긴, 므시아의 일원치고 서류 속에 드러난 귀족들의 행태를 두고 좋아할 이들은 아무도 없을 터였다.
톡, 톡.
베를리아의 손가락이 책상을 여러 번 두들겼다. 그녀의 못마땅함이 소리가 되어 울렸다. 생각을 끝낸 베를리아가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
귀족들에게는 하필 그리고 베를리아에게는 마침 딱 오늘이 중앙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아주 오랜만에 중앙 회의에 참석했다. 그리고 귀족들의 대다수가 갑작스럽게 등장한 베를리아를 경계했다.
중앙 의원석을 차지한 귀족들은 모두 나름 한가락 한다는 이들이었다. 그랬으니 그들이 안젤라를 전면에 내세운 것은 눈속임일 뿐이요, 실제로 카를로스를 끌어내린 사람은 베를리아라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그로 인해 에덴버 황실이 몰락했을 때, 귀족들은 베를리아의 행보에 주목했다. 그런데 웬걸, 그녀는 정말 그대로 잠적해 버렸다.
베를리아가 세운 공이 있었으니 후작위를 하사받은 것쯤은 문제 될 게 아니었다. 귀족들은 그보다도 제대로 권력을 틀어쥘 수 있을 이 시점에, 마치 자신은 정치와 전혀 무관하다는 듯이 칩거 생활을 유지하는 베를리아의 의중이 의아했다.
약 3개월간 그렇게 무수히 난무하던 추측과 의심을 깨고 베를리아 본인이 마침내 등장했다. 그러니 경계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할 판이었다.
“폐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대다수가 자신을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회의장에서, 베를리아는 개의치 않고 손을 들어 안건을 꺼내 들었다.
“발언하시오, 리들턴 후작.”
안젤라는 의아한 눈이었으나 베를리아의 발언을 허가해 주었다. 베를리아가 귀족들을 한 번 쭉 둘러보고는 기묘한 웃음과 함께 말을 이었다.
“황실 관리들의 기용 방법을 바꾸었으면 합니다.”
“리들턴 후작!”
그 순간 귀족 중 누군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술렁임이 순식간에 장내를 가득 채웠다.
현재 황실의 보직을 맡은 자들은 모두 귀족의 추천을 통해 들어왔다.
말이야 황실의 관리는 신분에 상관없이 뽑는다지만, 기본적으로 어떤 귀족이든 연이 있어야만 관리가 될 기회라도 얻을 수 있었으므로 결국 황실에 들어오는 자들은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이전의 황제는 그 문제를 건드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전대 황제와 귀족들은 한 편이었으니까.
황제가 주는 이권으로 귀족들이 배를 불리고, 그 대가를 바치면 황제 역시 다시 제 주머니를 채우는 일이 끝없이 반복되었다.
그러니 전대 황제가 굳이 무엇 하러 귀족들을 등질 일을 했겠는가.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현 황제인 안젤라는 베풂을 미덕이 아니라 아주 당연한 일로 여겼다.
그리고 그녀의 가장 큰 지지자가 베를리아였으니 귀족들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쿵!
“지금 감히 누구의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는가.”
귀족들의 술렁거림을 안젤라가 막아섰다. 왕홀을 잡아 바닥에 봉을 내리치니 커다란 소리가 회의장을 울렸다.
귀족들이 놀란 표정으로 안젤라를 바라봤다.
그녀는 많은 이들의 염려보다 훨씬 황제 역할을 잘 해냈다. 성녀일 적에는 자애롭기만 하던 안젤라가 황제로서의 위엄을 보일 때면 귀족들은 매번 이렇게 낯설어하고는 했다.
“현재 시행되는 관리의 등용 방법은 부정합니다.”
그 틈을 타 베를리아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했다. 부적절하다, 구시대적이다 등이 아닌 노골적인 발언이었다.
“제가 귀족이어야 할 만큼 부와 힘을 축적하지 못했더라면, 저 또한 이 황궁에 평생 발을 디뎌 볼 수 없었을 겁니다.”
베를리아는 자신의 뿌리가 귀족이 아님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게, 그녀는 벌써 네 번이나 삶을 반복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중 한 번은 심지어 신분제가 없는 현대 세계에서 살았으니 결국 인간들이 저들 좋을 대로 만든 신분제 따위 뭐가 신경 쓰이겠는가.
게다가 베를리아가 자신이 평민이었음을 말함으로써 몇몇은 아예 입을 다물어 버렸다.
이전이라면 몰라도 지금 같은 때에, 굳이 그녀의 출신과 출세의 과정을 건드려서 척을 지고 싶은 사람은 없었다.
탐탁지 않았으나 그렇다면 차라리 티를 내지 않는 게 나았다. 이곳에 있는 귀족들은 적어도 그 점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리들턴 후작은 귀족이지. 그대가 평민에서 귀족이 될 때, 리들턴 후작은 분명 제국의 귀족으로서 이 제국의 법도를 수호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노라 맹세했을 걸세.”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중앙 의회의 귀족들 중에는 여전히 베를리아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잘난 이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방금 입을 연 아를레나 공작이 그랬다.
“현재 황실 관리들의 등용 방법은 제국의 법도를 수호함에 있어 가장 알맞게 만들어진 거네. 제국의 귀족이 된 자가, 제국의 법도를 뒤흔들어서야 되겠는가?”
아를레나 공작이 서늘한 눈으로 훈계하듯이 말했다.
그녀는 귀족파의 수장이었다. 즉 그 누구보다 귀족들의 이권을 가장 우선적으로 생각해온 사람이라는 의미였다.
그런 아를레나 공작의 앞에서 귀족들의 권한을 축소시킬 말을 꺼냈으니 반발이 돌아오지 않을 리 없었다.
그래서 베를리아가 가장 먼저 경계했던 사람 또한 처음부터 아를레나 공작이었다. 그녀의 유능함을 알고 있었으니까.
보라, 아를레나 공작의 말은 지금도 썩 그럴싸해 보이지 않은가.
“그것은 에덴버 시절의 이야기지요.”
물론, 베를리아는 이 정도에 그냥 물러설 생각 따위 없었다.
이전 같았으면 아를레나 공작이 주장하는 ‘귀족으로서의 본분’에서 그녀도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때는 카를로스의 곁에 있으려면 귀족이어야만 했고, 무엇보다 황제가 노골적으로 귀족들의 편이다 보니 그들의 힘이 강했기 때문이다.
베를리아가 가진 것들이 아무리 많더라도, 에덴버에서의 삶을 포기하거나 에덴버를 뒤엎을 생각이 아닌 이상 제국이 정한 규칙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 규칙에서 더 자유롭기 위해서라도 그녀에게는 귀족의 지위가 필요했다.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에덴버의 귀족들이 어떻게 새로운 나라인 ‘이너스틴’에서 전과 같은 지위를 누릴 수 있답니까.”
왜냐하면 ‘이너스틴’의 황제인 안젤라에게 후작의 지위를 받은 베를리아와 달리, 현재의 귀족들이 가진 지위는 모두 몰락한 황실로부터 온 것이었으므로.
“아직 먼저 처리해야 할 우선순위들이 급해 기존의 귀족들을 어떻게 할지 정해지지 않았을 뿐인 것을 다들 아실 텐데요.”
에덴버에서는 귀족들이 많은 권한을 누렸던 만큼, 대부분의 일처리도 그들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나라가 갑자기 뒤엎어진 상황이었기에 안젤라를 지지하는 강력한 귀족 세력이 없었다. 나랏일을 처리하는데 필요한 인력을 당장 길러낼 수는 없었으니 곧바로 귀족들을 걸러내지 않고 일을 하게 두었다.
그러니까 새로운 방식으로 인재를 등용하여 인력을 길러내겠다는 것은 일을 처리할 사람이 없기에 여전히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귀족들을 위협할 첫걸음인 셈이었다.
그 사실을 명확히 알고 있기에, 신중한 아를레나 공작이 곧바로 나선 것이기도 했고.
“언제까지고 옛 황실… 그것도 그 건국부터 부정했던 악신의 나라에서 세운 것들의 토대대로 따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를 모조리 내쫓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이번에는 반황태자파였던 라미르니에 후작이 말문을 열었다. 아를레나 공작도, 라미르니에 후작도 이번에는 그들의 속내를 굳이 숨기지 않았다. 그만큼 절대 물러설 수 없고, 강경하게 대응해야만 하는 일이란 뜻이었다.
“왜, 그럴 거라면 당장에 내쫓지 그러십니까.”
“우리가 이런 취급을 받아 가면서까지 나라를 위해 일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군요.”
곧바로 다른 귀족들이 연달아 들고 일어났다.
황제파와 황태자파가 동시에 몰락하면서, 귀족 파벌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를레나 공작과 라미르니에 후작뿐이었다.
그 수장인 두 사람이 직접 말을 꺼내니 그들을 따르는 이들도 당당해진 것이었다.
안젤라의 안색 또한 좋지 않았다. 그녀라고 해서 막 즉위한 황제라고 은근슬쩍 어영부영 대하는 귀족들이 탐탁찮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참고 있었다. 아직 ‘이너스틴’의 귀족들은 몇 없었고, 에덴버의 귀족들을 건드리는 것은 지금의 상황에 벌집을 들쑤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던 게 그 이유였다.
그러나 안젤라는 불안한 눈을 하고도 베를리아를 의심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베를리아가 굳이 자신에게 미리 상의하지 않은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젤라는 추후 이 정국을 이끌어가야만 할 황제였다. 에덴버의 귀족들을 개편한다고 해도 천천히 해야 할 일이지, 빠른 시일 내로 모조리 바꿔 버릴 수는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귀족들이란 오랜 시간 권력을 독점해 온 계층이었으니까.
그러나 베를리아의 지금 태도가 황제의 의중으로 비치면, 그 천천히 가는 시간 내내 안젤라는 귀족들과의 마찰을 피할 수 없을 터였다.
그래서 말을 하지 않은 것이다. 혹여 귀족들의 반발이 터졌을 때, 베를리아 혼자 모두 뒤집어쓸 수 있도록.
베를리아가 카를로스를 지킬 때 항상 쓰던 방식이었다. 아마 그녀는 안젤라가 이대로 가만히 있기를 바랄 터였다.
분명 베를리아 혼자 해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안젤라는 카를로스가 아니었다.
“그대들의 의향이 이곳에 없다면 짐이 그대들을 붙잡을 수는 없겠지.”
귀족들의 비난이 베를리아를 들쑤시는 상황, 그 속에서 안젤라는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