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황제의 스캔들(1)
환한 햇살이 투명한 유리창을 뚫고 들어왔다. 햇살이 산란하며 무지갯빛을 만들었으나 침대 근처에 내려진 하얀 캐노피에 막혀 버렸다. 그 속에서 연인들은 자신들만의 달콤한 아침을 맞이했다.
“일어났어요, 베릴?”
메리쉬가 웃으며 물었다. 베를리아가 눈을 뜰 때까지 기다린 모양이었다. 눈꺼풀이 올라가자마자 보이는 제 연인의 모습에 그녀의 입가에도 사르륵 미소가 어렸다.
“좋은 아침이야, 멜.”
살짝 열린 창문 틈을 통해 들어오는 산뜻한 공기와 햇빛이 달궈 놓은 아침의 온기가 한없이 평온했다. 그 평온함 속에서 베를리아는 팔을 뻗어 제 연인을 끌어안았다. 너른 품에 고개를 묻자 메리쉬 특유의 체취가 코끝을 맴돌았다.
“오늘은 궁에 가신다고요.”
“응, 안젤라가 급히 와 달라고 해서.”
메리쉬의 말에 베를리아의 목소리가 나른하게 흘러나왔다.
일이 모두 해결된 후 두 사람은 오래도록 칩거 생활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안젤라를 정면에 내세웠다곤 하지만, 베를리아 또한 새로운 황실이 들어서는 일의 주역 중 하나였다. 그로 인해 이전과는 다른 의미로 그녀를 알아보는 이들이 늘어나 외출 시에 과한 관심을 받고는 했기 때문에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여유를 즐기기 위한 조치였다.
그래서 오늘은 안젤라가 황위에 오른 후 처음 있는 부름이었다. 물론, 황제로서의 부름이 아니라 안젤라로서 친우에게 하는 도움에 가까웠지만.
“저도 같이 갈까요?”
메리쉬는 한 치도 제 연인과 떨어지기 싫은 모양이었다. 그가 은근슬쩍 말해 왔다. 그러나 베를리아는 단칼에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나만 와 달라고 했어.”
그러자 메리쉬의 얼굴에 노골적인 불만이 서렸다. 베를리아를 향한 감정이 아니라 제 연인을 빼앗아가는 안젤라에 대한 것이었다.
“황제와 사이가 안 좋지 않았을 때가 나았던 거 같아요.”
메리쉬가 작게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베를리아가 가볍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대답했다.
“나는 앤지와 친구가 되어서 좋은데? 내 생에 처음 가져보는 친구잖아.”
베를리아는 두 번째 생에서 안젤라와 잘 지내려고 노력했지만, 지금처럼 어울리지는 못했다.
베를리아가 안젤라의 맑음에 불편함을 느끼기도 했고 무엇보다 전생에 그녀에게 지은 죄가 있어 뻔뻔하게 다가가지 못했던 탓이다.
게다가 카를로스 또한 두 사람이 가까워지는 것을 반기지 않았으니 깊이 친해질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베를리아는 정말로 네 번이나 삶을 산 끝에, 제대로 된 친구를 가져 보는 셈이었다.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는 메리쉬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우고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다.
“알았어요, 베릴이 좋다면 나도 좋아요. 잘 다녀와요.”
메리쉬는 여전히 베를리아를 독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여전히 제 독점욕보다 그녀의 행복이 우선순위에 있었다.
베를리아가 좋다는데, 메리쉬가 그에 관하여 끝까지 떼쓰는 아이처럼 굴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다녀올게.”
베를리아가 마주 입을 맞추며 대답했다. 더 이상 황궁에는 그녀를 억압하던 존재가 없었으므로 그 발걸음은 더없이 가벼웠다.
***
“나보고 결혼하래.”
황제의 개인 응접실로 베를리아가 들어오자마자 안젤라가 말을 꺼냈다.
그간 베를리아가 외출은 하지 않았다지만, 안젤라와 연락은 계속 주고받은 덕에 그들은 어느새 서로 편히 말을 놓고 있었다.
그리고 황제가 된 안젤라의 성격은 그 사이에 조금 달라져 있었다.
이를테면… 방금처럼 베를리아의 안부를 묻고 예의를 차리는 과정을 생략하고 곧바로 본론을 꺼낸다든지.
“결혼?”
베를리아가 반문했다.
안젤라가 황위에 오른 지 이제 겨우 세 달여가 넘은 데다가, 그녀의 나이가 많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이른 재촉이었다.
“얼마 전부터 무슨 소리를 들은 건지 귀족들이 틈만 나면 나보고 결혼하라고 재촉이야. 귀에 딱지 앉겠어.”
안젤라가 베를리아의 맞은편에 앉으며 한숨을 푹 쉬었다.
평소 온화한 성격의 그녀가 이런 반응을 보일 정도이니 귀족들에게 얼마나 시달렸을지는 보지 않아도 알 만했다.
베를리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 시점에서 안젤라의 혼사는 그다지 중요할 게 없었다.
이전처럼 신성력을 가진 자들이 점점 줄어드는 판국이라면 신성력을 물려받은 혈손을 남기려 하는 것이겠으나 그조차도 아니었다.
오히려 봉인되었던 신들이 풀려나며 신성력 보유자들은 늘어나는 추세가 아니던가.
오러나 마력조차도 결국 신들이 인간에 나누어준 신력의 일부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신성력은 현재 치유뿐 아니라 다양한 방면으로 연구가 진행되고 있었다.
인간들이 숨겨져 있던 신들의 존재를 받아들임에 따라, 그 믿음을 밑거름 삼아 신들의 힘은 점차 강해졌다.
그로 인해 신과 인간 사이 소통도 원활해지고 있었으니 다양한 신의 힘을 사용하던 옛 시대의 구현도 먼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왜 굳이?’
그러니 베를리아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마도 이것이 안젤라가 그녀에게 도움을 요청한 이유일 터였다.
“귀족들의 동태를 알아봐 주길 바라는 거야?”
베를리아가 물었다.
안젤라는 성녀로 나고 신전에서만 자랐기 때문에 정치에 관해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
특히나 본인이 정치보다 성녀로서의 의무에 관심이 있었기에 더더욱.
그러니 왜 갑자기 귀족들이 저러는지 까닭을 알 수 없어 답답할 만도 했다.
“부탁해, 부끄럽게도 내 능력으로 기반까지 쌓기에는 시간이 부족했어.”
안젤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 왕조가 바뀌는 일은 절대 예삿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에덴버 황실이 지은 죄의 청산부터 그들이 남긴 악습의 정리, 그 외에도 갑자기 신과 제국의 주인이 뒤바뀌어 혼란스러운 세상의 반응에 대응하는 등 할 일이 아주 많았다.
그 증거로 안젤라의 책상 위에는 서류가 산처럼 쌓여 있었고, 늘 잘 관리되어 온 피부가 과로로 인해 눈 밑이 거뭇하기까지 했으니 얼마나 일이 많은지 얼굴만 봐도 모를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신전과 황실이 통합되었다.
두 부류로 나뉘어 있던 신관들과 귀족 사이에 벽이 사라져 버렸으니,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구조의 재정립에도 많은 충돌이 있었다.
사실상 그 모든 것을 견디고 황제 역할을 하고 있는 안젤라가 귀족들의 동태까지 완벽히 파악하기란 어려운 게 당연했다.
군중들이야 기적처럼 등장한 신의 대리자를 그 신처럼 떠받드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기존의 에덴버 황실에게도 칼같이 제 이득을 따져 물러서지 않던 귀족들이 새 왕조가 들어섰다고 해서 얌전히 말을 들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안젤라가 딱히 신의 대리자라는 명함으로 누군가를 겁박할 성격이 아니기도 하고.’
베를리아는 자신이었다면 손에 쥔 힘으로 말 많은 자들을 찍어 눌러 버렸으리라 생각했다.
물론, 그렇기에 자신이 황제에 어울리지 않는 것일 테지만.
“부끄럽긴. 그 짧은 시간 안에 뒷골목이 많이 변화했더라. 네 덕이잖아, 앤지.”
세상이 변했으니 당연히 므시아도 변해야만 했다. 베를리아에게는 이미 돈과 권력이 많았고 더 이상 악행을 저지르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진정으로 그들을 아꼈기 때문에, 베를리아는 므시아가 음지에서 벗어나길 바랐다. 그들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겠으나 무려 세 번의 삶 동안이나 자신을 따라 준 자들이었으니까.
그래서 베를리아는 뒷골목을 주시하고 있었다. 므시아의 일원들은 결국 갈 곳이 없어 흘러온 자들이었다. 그녀는 므시아에 속한 사람들이 행복해지길 바라는 만큼, 또 다시 므시아 같은 곳을 찾는 이들이 생겨나지 않기 원했다.
그런데 웬걸… ‘가장 낮은 곳’이라고 일컬어지던 뒷골목에 이미 손을 쓰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게 안젤라였다.
그녀는 놀랍게도 황제가 되자마자, 마냥 보호받는 귀한 성녀로서는 닿을 수 없던 구석구석까지 제 손길을 뻗고 있었다.
참으로 안젤라다운 일이었다.
“네 덕분에 그동안 편하게 쉬었어.”
베를리아가 석 달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칩거하여 쉴 수 있었던 것은 안젤라의 덕이기도 했다.
베를리아는 카를로스와 에를니아에게 남들은 상상도 못 할 세월을 시달렸다.
그 덕에 그녀는 제 손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고는 못 견디는 완벽주의적인 강박이 있었다.
그런데 염려했던 부분마저도 안젤라가 처리해 두었고, 공식적으로 황제로서 베를리아에게 휴가를 명해 준 덕에 귀찮게 리들턴 저택을 찾아드는 이들도 없었다.
이제야, 정말로… 베를리아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보여 준 셈이었다.
“그러니 그쯤이야, 못할 것이 무어 있겠습니까, 황제 폐하.”
베를리아가 장난스레 안젤라의 손을 잡아 기사처럼 손등 위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곧 안젤라도 미소하며 장단을 맞추었다.
“그럼 부탁하네, 리들턴 후작.”
황제처럼 명령을 내리는 목소리는 더없이 가볍고 장난기가 가득했다. 베를리아에게는 이 순간조차도 행복이었다.
아, 네 번 만에 얻은 시간들은 무엇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
므시아가 불법적인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하여 그들의 능력까지 사라진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므시아의 일원들은 각자 기존과는 다른 일을 하게 되었을 뿐, 대다수가 베를리아의 므시아를 떠나길 원하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여전히 그녀의 아래에 있었다.
그러니 베를리아가 귀족들의 동태를 살펴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애초에 카를로스 때문에 귀족들의 생태를 빼곡히 파악해 두었던 그녀였다. 웬만한 귀족가 대부분에 사람을 심어 두기도 했으니, 이미 한 번 해 본 일 두 번 못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아직 귀족들을 제 편으로 끌어들이거나, 자신의 귀를 대신해 줄 첩자들을 보낼 정신이 없는 안젤라와는 달리 베를리아는 빠르게 안젤라의 부탁을 들어줄 수 있었다.
안젤라의 주변 이들은 어쩐지 어색하게 입을 다물고, 귀족들은 어떻게든 없던 일인 척 함구하는 일의 원인. 그것이 수하가 내민 서류 속에 있었다.